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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25. 12:30

Henry Kissinger. 2014. World Order. Penguin books. 374 pages.

정치학 교수로 였으며 미국의 국무부 장관을 지낸 저자가 서구의 외교사를 서술한다. 유럽의 국가들은 17세기 초반 삼십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음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국제관계의 규범을 만들었다. 이후 서구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는 웨스트팔리아 체제를 요약면 다음과 같다. 웨스트팔리아 체제는 종교와 세속 정치를 구분한다. 각 나라는 서로의 국가 주권을 존중하고, 서로를 대등하게 대우하며, 기존의 국경을 인정하고,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유럽의 국가들은 서로간 합종 연횡을 통해 세력 균형을 유지하면서 각 나라의 주권을 존중하는 이 체제가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이 체제가 훼손되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사이에 유지되던 세력 균형이 통일 독일의 부상으로 깨지면서 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웨스트팔리아 체제는 서구에서 오랫동안 국가들간에 관계를 조율하는 유효한 장치였다. 어떤 제도가 국가들의 상위에 군림하여 전체의 질서를 관리하는 방식, 즉 세계의 경찰이 존재하지 않는 한, 국가들 간 세력 균형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것 이외에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없다. 이 체제를 따르면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국가의 힘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전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제의 적과 손을 맞잡고 새로 부상하는 나라를 견제해야 한다. 이 체제에서는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어떠한 이념이나 이상이 없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도 없다. 오로지 서로간에 냉정한 힘의 평가와,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국가들 사이에 '현실주의 정치'(Realpolitik), '힘의 정치'(Power politics)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국제 질서가 자리잡았다. 이슬람 지역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합일되어 있다. 이슬람교는 세계를 이분법, 즉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과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지역으로 구분한다.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지역은 앞으로 정복을 통해 이슬람교를 믿도록 해야 한다.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은 하나의 원리로 통치되므로 지역간 구분이 중요치 않다. 오스만 터키 제국은 동서로는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아프가니스탄까지, 남북으로는 이집트에서 이란과 터키를 거쳐 발칸반도까지 거대한 단일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대제국에는 유럽에서와 달리 국가간 상호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다이나믹이 없었으므로,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와 경제가 정체되고 낙후하였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후 여러 지역으로 쪼개져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중국은 세계를 천황의 지배하에 있는 단일 세계로 인식한다. 유교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이념이다. 이 세계의 중심에 중국이 있고, 변방에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군신관계를 맺은 나라들이 있다. 중국이 볼 때 변방의 나라들은 모두가 중국 문명보다 못한 오랑캐들이다. 중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와 제도를 보유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므로, 주변국이나 이방과 관계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변국 중 중국을 침략한 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중국에 동화되었다. 예컨대 몽고는 중국을 침략하여 원나라를 세웠으며 만주족은 청나라를 세웠다. 서구에서는 국가들 사이에 웨스트팔리아 체제라는 수평적 질서가 지배했음에 비해, 아시아 나라들 사이에서는 중국을 가장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자리잡았다. 17세기에 서구의 나라들이 중국에 문호 개방을 요구했을 때, 중국은 이들을 오랑캐로 취급하고, 중국의 체제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여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결국 강제로 문호가 개방되고, 서구의 문물을 일찌감치 수입하여 발전한 일본에 국토가 유린되는 수모를 겪었다.

미국은 20세기초 제 1차 대전에 참전하기 직전까지 유럽에 대해 고립주의 혹은 중립주의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유럽의 열강들과 대양으로 구분되어 있고, 19세기말까지 서부를 개척하는 일에 몰두했으므로, 유럽의 국가들과 달리 국가의 안위를 위해 이웃 나라와의 관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이익이 직접적으로 걸린 경우 힘을 행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유럽 나라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에 간여하지 말라는 먼로 독트린을 선언했으며, 19세기 말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미국이 개입하여 바로잡을 수있다고 선언하였다. 이웃 나라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남서부를 빼앗았으며, 하와이를 점령했고,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을 미국의 식민지 내지 준식민지로 만들었다.

미국은 이념으로 뭉친 나라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의 조상으로부터 국가의 정통성을 이끌어낼 수 없다. 미국은 유럽의 봉건 질서를 부정하면서 만들어진 나라이다. 유럽의 전통적인 신분제도나 종교의 지배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건국 이념으로 건립되었다. 국가간의 관계에도 이러한 미국의 이념을 전파하려 한다. 미국은 유럽의 현실주의 정치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국가들 간 관계에서 개별 국가의 이익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고 대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나라의 주권은 존중하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이념은 인류가 모두 지켜야 할 보편적 원칙이라고 굳게 믿으므로,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승국이 된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이상주의를 국제관계의 규범으로 만들려 했다. '국제 연맹'(League of Nations)이 그것인데, 이 기구는 미국의 의회에서 조차 인준되지 못하였고, 무엇보다 국제 규범을 위반하였을 때 이를 강제할 조치가 없었으므로 국제 평화를 지키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제 2차 대전으로 유럽이 몰락한 후, 미국은 자신의 뜻대로 세계 질서를 만들고 강제할 수 있는, 세계 경찰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UN, IMF, World Bank 등이 그 산물이다. 냉전체제에서 소련과 경쟁을 벌이면서 미국은 미국의 이념을 전파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현실주의 정치, 공작정치를 병행하였다. 제삼 세계에서 국민을 탄압하는 독재자를 옹호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반군을 부추겨 콜럼비아로부터 파나마 운하를 빼앗아내고, 자주 민족적 독립을 저지하는 베트남 전쟁을 벌였다. 2차 대전후 미국의 국제관계는 공도 많지만 과실도 많다. 미국 덕분에 유럽과 일본이 다시 부상하였고,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었다. 반면 미국의 간섭 때문에 중남미와 중동은 계속 정정이 불안하고 발전이 지체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키신저는 21세기에 미국은 전환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과거와 같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기에는 힘에 부치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대신해 국제 질서를 주도해 나아갈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마지 못해 세계의 여러 문제에 간여하지만, 점차 개입의 범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단일 유럽이나 중국이 부상하면서 다자간의 관계, 즉 오랫동안 서구의 국제관계를 지배한 웨스트팔리아 체제가 다시 자리잡을 것이다.

이 책은 키신저의 경륜이 배어 있는 책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그러나 노년에 써서 그런지 분석의 예리함보다는 주마간산 식으로 전반적인 흐름을 해설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서구의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은 그래도 깊이가 있지만, 아시아에 대한 서술은 피상적이다. 추상적인 개념을 주어로 하는 문장을 구사하기에 말하는 내용이 바로 다가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저자의 명성만큼 그렇게 좋은 책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