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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10. 12:25

John Lewis Gaddis. 2018. On Grand Strategy. Penguin Books. 313 pages.

저자는 냉전 연구로 유명한 역사학자이며, 이책은 그의 방대한 역사 지식과 독서를 배경으로 하여 지도자와 정치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로운 에세이 형식으로 서술한다. 예일대에서 같은 제목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친 강좌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 로마시대에 옥타비안이 황제가 되는 과정, 영국과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통치 방식 비교, 히틀러와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헌법 개정, 러시아의 일차대전 참전과 공산주의 혁명, 등 서구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다양한 사례들이 언급된다.

지도자는 여우와 고슴도치 fox and hedgehog 라는 두 유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여우는 디테일에 강하며 여러 변수를 고려하여 움직이는 유형인 반면, 고슴도치는 한가지의 큰 아이디어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유형이다. 현실에서는 예기치 못한 복잡한 여러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한가지의 아이디어를 우직하게 밀어붙이면 낭패하기 쉽다. 그렇다고 예상되는 모든 변수들을 고려한다면 강력한 추진력을 동원하여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훌륭한 지도자는 이 두가지 성향을 동시에 품고서, 경우에 따라 유연하게 두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자가 현명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패턴을 암기하고 따를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왜 어떤 결정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검토하는 훈련을 통해 양성할 수 있다. 마치 운동선수가 코치의 지도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을 받고, 실전에서 이러한 능력을 적용하는 것과 같다.

페르시아의 황제는 그리스 침공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그의 참모의 조언을 무시하였다. 그는 예상되는 어려움을 모두 고려한다면 어떤 일도 도모할 수 없다고 하면서 침공을 결행하였다. 예상대로 큰 어려움에 봉착하여 결국 패하고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고슴도치 유형의 지도자가 실패한 대표적 사례이다.

로마시대에 시저 황제의 양자였던 옥타비안은 시저가 죽은 다음, 그가 왕위를 물려받도록 한 유언에도 불구하고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당시 강자였던 앤토니 및 시세로와 권력을 나누는 선택을 하였다. 이후 서서히 힘을 키워서 하나씩 강자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오랜 재임 기간 동안 훌륭한 통치를 한 황제로 기억되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통치 방식이 달랐다. 영국은 식민지의 지역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적용하도록 하는 통치 방식을 택한 반면, 스페인은 식민지 모국의 정책을 식민지 전체에 경직적으로 적용하는 통치 방식을 택하였다. 영국의 식민지는 종교의 다양성을 허용한 반면, 스페인은 카톨릭의 엄격한 원칙을 식민지 사람들 모두에게 강요하였다. 그 결과 식민지와 모국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영국의 식민지는 공화정이라는 유연한 정치체제로 통일되고 안정된 독립국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반면, 스페인의 식민지는 지역의 독립된 정치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서로 분열하였으며 각자 독립한 이후에도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히틀러와 나폴레옹은 전쟁 초기에 승리가 계속되면서 오만해져서, 자신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러시아로 무리한 정벌을 감행한 결과 크게 실패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지도자가 국가의 권력을 자기의 개인적 야망을 만족시키는데 사용하면 결국 몰락한다는 교훈을 제공한다. 지도자는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겸손해야 한다.

미국의 남북전쟁 시절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 선언을 하고,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헌법 개정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의원들을 매수하고 위협하는 수단도 불사했다. 그는 노예제 폐지라는 장기적이고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기적으로는 비난받을 만한 행위를 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고슴도치 형의 추진력과 여우 형의 교활함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제일차 세계대전 시절 영국은 러시아를 전쟁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국내 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며, 결국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렇게 출현한 공산주의 러시아는 서방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하였다. 영국의 러시아 참전 독려는 근시안적인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서구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운다는 취지에서 집필되었다. 다양한 작가와 작품이 인용되며, 곳곳에서 시대를 넘나드는 역사적 사례와 인물을 인용한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서술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저자의 서술이 산만하고, 때로는 견강부회적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023. 10. 26. 20:22

Jacalyn Duffin. 2021. History of  Medicine: A Scandalously Short Introduction. 3rd ed. University of Toronto Press. 495 pages.

저자는 의사이자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서양 의학의 역사를 의학의 분과별로 구분하여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의과대학에서 의학사 교과서로 사용할 목적으로 집필해서인지, 인간의 병과 의료적 개입 간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기보다, 구체적인 병에 대한 의술과 의료 조직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학, 의료의 전문화, 전염병, 혈액, 기술과 병원, 외과학, 여성 의학, 정신분석학, 아동학, 가정의학, 공중보건학, 환자 중심의 의료, 등으로 장을 나누어 각 분야에 대한 역사를 기술한다.  의학 전문 용어, 이름, 조직명이 많이 등장한다. 의사라는 직업의 내부를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서양 의학은 병이 난 뒤 이를 고치는 데 촛점을 맞춘다. 전염병 퇴치를 제외한다면, 의학의 이러한 접근은 인류의 건강과 수명 연장에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인류의 건강과 수명은 위생, 영양, 교육, 빈곤, 나쁜 습관과 그릇된 지식, 등을 바로잡는 노력에 의해 크게 개선되었다. 현재의 서양 의료 체계는 개인과 집단의 질병 위험을 줄이고 예방하는 쪽보다는, 병이난 환자 개개인의 치료에 집중해 있다. 이러한 접근이 사람들의 건강과 수명을 얼마나 늘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의사들의 소득을 높이는 데 편향되 발전한 결과이다. 저자 본인이 의사이지만 의학계의 관행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2023. 9. 2. 22:32

Diego Olstein. 2021. A Brief History of Now: The Past and Present of Global Power. Palgrave Mcmillan. 354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19세기 영국의 제국주의에서부터 시작해 근래까지, 미국의 패권과 이에 대항하는 다양한 세력들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각 시기별로 각 세력 집단을 유형화하여 설명한다.

영국은 18세기 말 이래 산업혁명으로, 19세기 중반 경제적 군사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산업화가 결합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자유무역과 비교우위를 밀어붙였다. 독일과 미국은 영국의 압력에 맞서 보호무역 정책을 강력히 실시하면서, 19세기 후반 후발 산업화와 민주주의 확대에 성공하면서, 20세기에 들어 영국에 대항하는 강국으로 올라섰다. 반면, 러시아, 오스만 터키, 중국 등, 자국의 신민을 권위적으로 억압하는 전통적인 제국들은, 영국이나 독일과 같이 산업화를 통해 군사력을 높이고 싶었으나, 국민의 참여를 높일 경우 권력자들이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개혁이 좌절되고 강국으로 올라서는데 실패하였다.

독일은 후발 산업화를 통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으나 그에 걸맞게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하여 불만을 가지고, 결국 1914~18년, 1939~45년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두차례의 전쟁을 계기로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국력은 소진되고 식민지를 잃은 반면, 미국은 영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다. 러시아는 일차대전 중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는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영국과 미국이 대표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미국은 영국과 달리, 식민지를 직접 지배하는 제국주의를 지향하지 않았다. 대신 압도적 군사력과 세계 곳곳에 군사기지를 구축하여 정치군사적으로 세계 국가들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엄청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차대전후 유럽의 복구를 지원하고, 무역과 투자, 다국적 기업 등을 통해 세계 경제를 실질적으로 지배했으며, 미국의 대중문화와 미국인의 꿈 이념을 통해 세계인의 의식을 사로잡는 등, 세계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제이차대전 이후 서구의 제국주의으로부터 독립한 식민지 국가들은 민족자결 원칙을 기반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국가주의가 결합된 체제를 채택하였으며, 미국과 소련의 패권에 추종하를 거부하고 비동맹의 제삼세계를 지향하였다. 중남미, 인도, 인도네시아, 이집트, 가나 등이 이러한 나라들이다. 이들은 보호주의 장벽을 높이고 수입대체 산업화를 통해 자국의 산업을 육성하려고 하였으나 산업화와 민주주의에 실패하였으며,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민주주의 형식을 갖춘 권위주의 체제를 지속해오고 있다. 이들 제삼세계 국가들은 1990년대의 세계화에 편승하여 원자재를 수출하면서 경제적으로 힘겹게 버텨나가고 있다.

미국의 패권에 포함된 서구 국가들은 1930년대 대공황속에서 케인즈의 경제정책을 따라 국가의 역할을 확대하였으며, 이차대전 이후 고도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후 미국은 정보통신기술과 운송기술의 발달과 함께 산업구조조정을 통해 생산성이 높아지고 성장을 지속하였다. 제조업은 해외로 이전하고, 국내에서는 금융, 서비스, 리서치 등에 주력하는 국제분업 세계화의 선두에 올라섰다. 그 결과 부의 집중과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소련은 중앙집중 경제와 권위주의 체제의 비효율이 갈수록 악화되었으며, 1980년대에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1980년대 후반, 폴란드, 헝가리, 동독, 등에서 소련의 장악에서 벗어나 민주화 시도가 진행되어 결국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1991년 소련이 해체되었다. 동구권은 서유럽에 편입되었으며, 러시아는 1990년대의 극심한 혼란을 겪으면서, 결국 민족주의와 권위주의가 결합된 약화된 강국으로 복귀하였다.

중국은 1949년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 모택동 치하에서 큰 혼란을 겪었다. 이후 1978년 등소평이 집권하여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지난 사십년간 고도 성장을 통해 미국 다음의 강국으로 올라섰다. 중국의 경제성장은 미국과 선진산업국에서 1980년대 이래 구조조정으로 제조업을 해외로 이전한 것과 절묘하게 맞물려 성공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 정책과 국제분업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선진 산업국에서는 불평등이 높아지고 성장에서 소외된 집단의 불만이 커졌다.  그 결과 민족주의와 반세계화의 목소리가 높아져 트럼프와 같은 극우 정치인이 등장하고, 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960~70년대의 베트남 전쟁의 실패, 2003년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쓴 이라크 침공, 아프간 전쟁의 실패 등으로 미국의 정치 군사력에 대한 세계의 존경은 사라졌다.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미국 경제의 비중이 줄었으며, 미국의 이념과 문화의 매력 또한 빛바래게 되었다.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면서 각 나라들은 각자 도생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높아지고 세계 질서는 다극체제로 이행하였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 이래 세계는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20세기 후반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정보혁명 information revolution 에 접어들었으며, 근래에 한단계 더 높아진 인공지능 혁명 Artificial Intelligence Revolution 으로 들어가고 있다.  인간의 지적인 분야를 기계가 맡게 되면서 인류의 삶의 방식은 앞으로 크게 바뀔 것이다.

저자는 미국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며, 아마도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추측되는데, 중남미의 변화에 깊이있는 이해를 보인다.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세계의 다른 나라들, 특히 제삼세계의 입장을 균형있게 반영하는 드문 역사 서술이다. 후반부에서는 분석의 정치성이 떨어지지만, 전반적으로 세계의 흐름에 대해 높은 통찰력을 제시한다.

2023. 8. 14. 10:53

Joshua Cole and Carol Symes. 2020. Western Civilizations: their history and their culture. vol1. 20th ed. W.W. Norton. 549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미국 대학의 교양학부의 대표적인 서구 문명사 교과서이다. 서구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시작해, 그리스 로마, 비잔틴, 대서양 연안 서유럽으로 발전하였다. 이 책은 기존의 역사책과 비교해 몇가지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과거의 역사책이 승자의 관점에서 승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이 책은 보다 중립적, 균형적인 접근을 한다. 둘째는 보다 구조적인 관점에서 역사 전개를 해석한다. 일이 왜 그렇게 전개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정치적 갈등에만 촛점을 두지 않고 경제와 사회적 요인을 고루 검토한다. 셋째는 역사 전개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조명하는데 노력을 한다. 넷째는 서구 문명의 발전에서 중동과 이슬람의 역할을 비중있게 다룬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자로 등극한 아테네가 다른 도시 국가들을 착취하는 지위에 올라서고, 아테네 내부에서도 소수의 시민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다수의 노예를 배제하였다. 결국 아테네에 대항하는 동맹이 결성되고, 도시국가들 서로간의 갈등에 과거의 적이었던 페르시아를 끌어들임으로서, 결국 그리스 도시국가들 전체가 페르시아에 먹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로마 제국은 피정복 신민을 체제 내로 포용하는 제도적 장치 덕분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원래 신민들은 소수인데다 계급 구조의 최상층에서 향락에만 몰두한 반면,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사람들이 군사를 포함한 실제의 모든 일을 담당하는, 지나치게 불평등하고 외곡된 구조 때문에, 결국 내부 반란이 일어나 망하였다. 로마 제국이 망한후, 기독교 문명과 로마의 유산은 세갈래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그리스와 터키에 걸쳐 위치한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 문명의 주축을 이어받았으며, 다음으로는 로마의 잔존 세력인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에 위치한 서로마 제국이며, 세번째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이슬람 세력이다. 이슬람 지역에서는 그리스 로마의 제도와 문물을 많이 물려받아 사용하였다.     

중세는 경제사회 발전이 정체된 암흑의 시기가 아니었다. 이는 근세의 학자들이 씌운 굴레에 불과하다. 서구 문명은 중세 시기 즉 500~1500년의 기간 동안 꾸준히 발전했으며, 이러한 변화 덕분에 1600년 이후 근세의 발전을 낳았다. 중세시대 서구 문명의 중심은 그리스 로마 문명을 이어받은 비잔틴 제국에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안정된 행정관료 제도 덕분에 거의 1,000년 동안 큰 변고 없이 체제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행정 관료는 노예가 담당하였다. 똑똑한 노예들은 행정 관료의 훈련을 받고 승진의 길을 걸어 최고 지도층에까지 도달하기도 하였다. 비잔틴 제국은 과거의 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신민들은 계급의 상층에서 놀고 먹는 반면 노예들이 모든 일을 다하는 지나치게 불평등하고 외곡된 구조 때문에 노예들의 반란으로 쇠퇴하였다.

1100년경 십자군 운동을 계기로 비잔틴 제국이 쇠하는 대신 베네치아와 제노아를 중심으로 한 북이탈리아가 흥하였다. 북이탈리아가 주도한 시기는 잠시로, 1400년대에 항해술의 발달 덕분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주도하는 대서양 지역으로 중심이 이동하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적극적으로 대양을 개척한 덕에 아시아와의 교역을 선점했으며, 중남미 대륙을 식민지로 선점하여 엄청난 부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렇게 식민지로부터 획득한 부를 국내 생산 기반을 높이는 데 쓰지 않고, 유럽 대륙의 이웃 국가들과 전쟁으로 위세를 높이는데 써버렸다. 시간이 지나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부가 줄어들면서, 결국 새로이 부상한 영국과 프랑스에 무역을 제압당하여 쇠퇴하였다. 프랑스는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 덕분에 서서히 국력이 성장한 사례이며, 영국은 일짜감치 왕권을 견제하고 상공인들이 성장하면서 금융과 무역이 발달하여 국력이 성장하였다.  

왕과 귀족간의 갈등, 세속권력과 종교 세력 간의 갈등, 지배집단과 중간층 간의 갈등, 지주 세력과 상공인 간의 갈등, 등이 역사를 추진한 동력이다.  지배자의 전제적 통치에 대한 견제는 1300년부터 유럽 여러 나라에서 전개되었다. 왕에 대한 견제는 오랫동안 대지주인 귀족이 주을 이루었는데, 1300년경 총과 대포의 도입으로 귀족의 중요성은 줄어든 대신, 전쟁 비용을 대는 상공인과 전쟁에 보병으로 참여하는 일반인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전쟁에서 일반 보병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국민 국가가 등장하였다. 국민 국가는 영토와 민족어를 바탕으로 한다. 과거에는 국가는 왕의 사유물로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유럽 전지역에 걸쳐 영토와 언어에 관계없이 전개되었다. 일반 민중은 왕과 완전히 유리되어 있었으며, 왕은 일반 민중들과 언어 및 종교를 달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전쟁은 귀족들과 용병들을 고용하여 왕들 사이에 벌어지는 게임에 불과했다. 

서구 문명의 발전의 동력은 전쟁과 상공업에 있는데, 이는 중국 문명과 뚜렷이 대비되는 특징이다. 그리스, 로마, 이탈리아 문명은 상업이 중심이었으며, 이후 대서양 제국들 역시 상업이 발전의 중심이었다. 토지는 귀족들의 권력의 기반이었으며, 이들은 군사력을 장악하였다. 전쟁기술이 발전하면서 군사력으로서 귀족의 중요성은 사라진 대신, 높은 전비를 부담하는 주축으로서 상공인의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일반 보병으로 뛰는 일반인의 세력이 점차 부상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된다. 

서구 문명은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고, 종교의 비중이 매우 큰 문명이었다. 서구 문명의 주도권은 시기에 따라 변천하였는데, 고대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였고, 다음으로는 그리스와 로마였고, 이어서 북이탈리아와 지중해 지역이었고, 이후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대서양의 서유럽으로 중심이 옮아갔다. 1941년에 1판을 시작으로 20번째 판을 개정하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저자를 거치며 다듬어져서, 이해가 쉽고 균형된 논의를 제공한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서구 사회를 이해하는데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2023. 7. 9. 21:57

박지향. 1997. 영국사: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까치글방. 496쪽.

저자는 영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영국의 역사서이다. 주요 주제에 따른 서술을 먼저 하고, 이어서 시대에 따른 서술을 한다. 주요 주제로는 영국인의 정체성, 통치제도, 영제국, 지성사, 지주와 중간계급과 자본주의, 노동계급, 영국의 현안과제(북아일랜드, 유럽통합, 경제적 쇠퇴)를 다루고 있다.

영국은 섬나라이기에 유럽 대륙의 정치 군사적 갈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1060년대 노르만의 침공 이래 20세기까지 일천년 동안 외세로부터 침입을 전혀 받지 않았다.  덕분에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유럽인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영국은 중세시대부터 왕권에 대한 지주 귀족들의 견제가 컸으며, 이는 1200년대의 마그나카르타에서 명문화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전통이 1600년대에 이미 정착되었으며, 1688년의 명예혁명에서 의회의 승인없는 세금의 부과를 금하고, 국가의 자의적 권력 행사로 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이 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확히했다. 대륙과 달리 영국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넘어 왕과 국가가 개인과 사회 위에 군림하는 절대 왕정의 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왕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이는 대륙 국가의 왕들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것보다 효율적으로 세수를 확보할 수 있으므로,  프랑스 및 스페인 등과의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원인이다.

영국의 지주계급은 상공업 자본으로 전화함으로서 경제 변화의 흐름을 잘 탔다. 17세기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소규모 농민을 몰아내고 농업의 대형화, 효율화를 이끌었으며, 이들은 이후 상업자본가, 금융자본가로 성장하였다. 이는 영국의 장자상속제에 힘입었다. 장자는 토지를 통째로 상속받아 지주로 남지만, 차남 이하는 상업과 금융 부분에 진출하거나 성직자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지주계급과 상공업 자본가 계급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영국은 세습적 신분 못지 않게, 근대 초기부터 부의 축적에 의한 지위 상승이 가능했다. 상업, 금융, 전문직, 등을 통해 부를 획득한 부르주아들은 토지 귀족 못지 않은 존경을 얻을 수 있었다. 상공인은 대지주 귀족과 함께 의회에 참여하였다. 성공한 부르주아들이 토지를 획득하여 지주계급으로 신분을 바꾸려는 욕구는 강하지 않았기에 산업 자본은 재투자되었다. 경제발전을 향한 자본의 선순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영국은 대륙과 달리 어느 정도 신분 상승의 길이 열려있는 개방된 사회였다. 이것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먼저 시작된 이유 중 하나이다. 영국은 개인의 자유와 성취 동기가 다른 어느 유럽 국가들보다 강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은 영국을 상인의 나라라고 경멸했으나, 상공업의 부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영국의 발전을 이끈 동력이다. 

175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의 7년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서 독보적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이후 미국 식민지를 잃기는 했으나, 인도, 캐나다, 호주, 등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19세기 말에는 전세계의 5분의 1을 식민지로 거느리는 제국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가장 먼저 산업혁명에 착수하여 19세기 중반 영국은 세계의 어느나라보다 생활수준이 높았으며, 세계 상공업의 생산과 수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면 영국의 경쟁력은 후발 산업국인 미국과 독일에 의해 추월당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발 산업국의 이점은 사라지고, 기득이권이 버티면서 새로운 파괴적 혁신을 추진할 능력을 상실하여, 후발 산업국보다 산업의 효율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 영국은 경쟁국가에 뒤지고, 두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제국을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여, 인도의 독립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 제국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18세기 후반 유럽을 휩쓴 사회주의 물결 속에서 급진 노선보다는 자본가와의 타협을 선택한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유럽보다 상대적으로 부유하였으며, 19세기 말 이래 노동자의 요구를 정치 과정에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노동조합의 후원을 등에 없은 노동당이 집권하였으며, 노동자의 요구의 상당 부분이 복지국가의 확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경제위기에 더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이 격렬했을 때, 보수당의 대처 수상이 집권하여 시장경쟁을 중시하는 신보수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영국은  금융부문을 제하고는, 낮은 생산성 때문에 산업 경쟁력이 낮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연구와 강의 경력을 잘 배합하여 쓴 책이다. 저자의 전공 분야인 계급과 노동 분야를 깊이있게 잘 썼다. 영국인은 세계의 가장 선진적인 모범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한 때 가졌지만, 지금은 선진 산업국들 중 상대적으로 뒤쳐진 나라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대단한 폭력적 갈등이나 혁명 없이 헌정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영국은 사회 청산의 경험을 갖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지, 부정적으로 보아야 할지 불확실하지만, 한국과 비교할 때 한 수 위의 나라인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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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16. 10:22

David Stasavage. 2020. The Decline and Rise of Democracy: A Global History from Antiquity to Today. Princeton Univ. Press. 310 Pages.

저자는 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고대에서 근래까지 민주주의의 원천과 변화의 원인을 전제주의와 비교하면서 서술한다. 민주주의는 오랜 옛날부터 인간사회 공통의 정치 제도였으며, 민주주의는 퇴보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전개되어 왔으며, 민주주의와 전제주의는 별도의 길을 걸어왔다.

원시시대와 고대에는 민주주의가 거의 모든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정치 제도였다. 지도자가 마을 혹은 부족의 세력가들로 구성된 집단과 협의하면서 통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단의 규모가 작을 경우 집단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고대의 민주주의는 주로 상층부의 참여에 국한될 뿐, 일반인에게까지 주권이 부여될 정도로 폭이 넓지는 않았다. 반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폭이 넓지만,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이라는 간헐적 간접적 방식으로 주권을 행사하기에 유권자와 대표 사이에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깊이가 얕다.

서유럽은 국가의 힘이 약했다. 왕은 소수의 가신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며, 자신 소유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정부를 꾸렸다. 대지주 귀족이나 도시민들은 왕의 통제가 미치지 않았다. 왕은 귀족과 도시 상공인들과 협의하면서 국가의 일을 처리하였다. 중세는 물론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의 국가는 국내총생산의 1%정도의 세수만을 거둘 뿐이었다. 유럽의 왕은 15세기 절대왕정 시절에도 자신이 통제하는 관료의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통치력이 미약했다. 서유럽에서 약한 국가와 협의체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귀족, 승려, 도시 상공인으로 구성된 협의체가 1250년 왕의 세수권한을 제한하는 서약인 Magna Carta와, 1688년 왕을 폐위시킨 명예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반인을 징집해야 하고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하게 되면서, 통치자는 국민에게 주권을 점차로 더 많이 양보해야 했다. 영국에서 19세기 중반 남성 모두에게 선거권이 확대되고, 1차대전 이후에 여성에게 선거권이 확대된 과정에는 이러한 힘이 작용하였다.

중국은 일찍부터 국가의 힘이 강했다. 기원전 주나라 시절부터 왕은 두터운 관료 집단을 거느리고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했다. 서기 200년전 한나라 시기에 시작된 과거제를 통해 왕은 자신이 직접 임명하고 통제하는 유능한 관료들을 동원하여 국민의 일상을 통제하였다. 한나라 시기에 국가는 국내총생산의 10%가량을 세금으로 징수하였으며, 도로나 치수사업 등 많은 사업을 전개하였다. 중국은 왕 휘하의 강력한 관료들 덕분에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 체제를 뿌리내렸으며, 이러한 전통은 현대의 공산주의 정권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유럽과 중국이 다른 길을 가게된 원인은 자연 환경의 차이에 있다. 서유럽은 넓은 평야가 없으며, 목축이나 호밀 재배에서 밀도가 낮은 농업을 하고, 자연 강우에 의존하여 생산에 굴곡이 많으며, 인구가 조밀하지 않았다. 토지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낮고, 사람들이 쉽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으면,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주의가 서유럽보다 미국에서 더 빨리 발달한 원인이다. 반면, 중국은 황하 유역에서 문명이 발달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넓고 비옥한 퇴적토가 있으며 강물을 끌여들여 밀도가 높은 농사를 지었다. 많은 사람이 집중해서 거주하고, 농업 환경 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중국의 농업은 생산량의 측정과 예측이 정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관료는 국민의 생산활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반면 서유럽의 농업은 외부인이 생산량을 측정하고 예측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지역인이 아닌 국가의 관료가 주민의 생산활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금을 거두기 어려웠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대표자를 뽑아 의회에 보내는 방식의 간접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영국은 대표자에게 의결의 전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1600년경에 일찌기 확립한 반면, 서유럽 대륙의 나라들은 대표자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제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세금, 전쟁 선포 등과 같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국민이 자신의 대표에게 일정한 한도까지의 결정 권한(mandate)만을 부여하는 제도는, 국가가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의회에서 논의가 진행되면서 대표자의 결정권한을 넘어서는 사안이 발생하면, 자신을 선출한 주민들에게 돌아가 다시 의견을 묻고, 의회에 돌아와서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의회의 효율을 크게 저해한다. 대표자에게 의결의 제한을 부과하는 전통은 주민이 대표자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정도가 높다. 반면 대표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제도는 일단 대표자를 선출하기만 하면 주민은 대표자에 대한 통제권을 더이상 행사할 수 없다는 면에서 국민이 주권을 보유한 정도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서유럽에서 상공업이 가장 먼저 발전했던 네덜란드를 영국이 제치고 17세기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영국의 의회가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반면, 대표자의 의결을 제한하는 제도를 유지한 네덜란드 의회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민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도가 높으면, 변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어려우며, 기득권자들이 버티고 신규 시장 진입을 제한한다.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 즉 지주가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꾸고 울타리를 쳐서 경작민을 쫒아내는 것이, 영국 의회에서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대표자에게 전권을 부여한 제도 덕분이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민주주의였던 서유럽보다 전제주의였던 중국이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잘 살았다. 전제주의 국가에서 국가의 지휘로 자원을 동원하여 일관된 경제성장을 추진한 사례가 여럿 있다. 소련이나 현대의 중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경제가 성숙하게 되면 추가적인 성장을 위해 개인의 창의가 필요한데, 전제주의 체제는 개인의 창의를 억압하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맞는 것 같지 않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정치적인 반대의견은 강력히 억압하지만, 생산성을 높일 수있는 비정치적인 아이디어는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혁신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민주주의가 성장하려면 어느 정도의 소득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맞지 않는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현재 기준으로볼 때 매우 가난한 수준의 사회에서 발달하였으며, 중국은 현재 상당한 소득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민주주의가 정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중류층이 자신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라는 요구가 높아지고 정치 참여 욕구가 커지기 때문에 중국이 민주화될 것이라는 예측은 지금까지 맞지 않고 있다. 물론 국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에 허덕인다면, 선동 정치가의 주장에 쉽게 혹하고 매표와 같은 선거 부정이 만연하기에 민주주의가 자리잡기 어렵다는 주장은 맞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볼 때 기본적인 생존의 위협을 넘어선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국민의 소득 수준과 민주주의는 경험적으로 관련이 크지 않다.

서유럽에서와 같이 일단 의회민주주의가 먼저 자리잡으면, 이후 관료가 충원되어 국가의 기능이 커진다고 해도, 의회가 관료 집단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약화되지 않는다. 반면 중국과 같이 강력한 관료집단이 전제주의 정치와 결합해 있는 경우, 이후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어도 자리잡기 힘들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하여 서방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경우, 그 제도의 성공 여부는 식민지 시기 이전 그 사회에 민주주의적 협의체 전통이 얼마나 있었는가에 달려 있다. 협의체 전통이 미약하다면 식민지 시기의 전제적인 통치 방식이 독립 이후에도 계속되는 반면, 협의체 전통이 있었다면 서구의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1990년 공산주의 몰락 이후 개발도상국에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이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대단한 일이다. 냉전시기에 미국과 소련이 자신의 진영에 속한 전제적인 정부를 떠받쳤었는데, 이러한 보호막이 걷히면서, 많은 나라에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근래에 민족주의와 대중영합주의가 발흥하면서 선진국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중앙정치와 대표자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은 난제이다. 시민 교육을 강화하고, 대표자와 유권자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이 필요하다.

의회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견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대표자를 통해 수렴하는 제도이다. 전제주의 체제 또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로를 가지고 있다. 어느 체제이건 통치자는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경우, 관료들이 지역의 민의를 수렴하는 경로로 기능한다. 능력에 따라 선발되는 관료는, 세습적 귀족과 달리 일반인 중에서 선발되므로 그들 자신이 민의를 대표하며, 이들이 행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국민들과 접하며, 국민의 의견과 필요를 반영하여 제도를 조정한다.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가 근래에 양극화되면서 정부와 의회가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조정하여 일을 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중국은 유능한 관료와 정치인을 점진적으로 위로 올려보내는 자신들의 체제가,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발하는 대의제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제도와 중국의 전제주의 제도는, 각자 안정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흥미로운 주제와 달리, 연구 논문과 같이 경험적 분석 자료의 제시와 건조한 서술 때문에 빠르게 읽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서구와 중국을 비교하고, 이슬람과 아프리카 등을 비교하고, 고대와 중세 및 현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종횡무진 생각을 펼쳐서, 통찰력이 돋보인다. 논의와 관련하여 의문이 생길만한 점들을 비록 저자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논의하는 솔직함이 엿보인다. 여러가지를 생각케 하는 좋은 책이다. 

2023. 6. 6. 12:37

Yuval Noah Harari. 2015.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Harper. 416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인류의 탄생에서 현대까지의 역사를 몇가지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거시적으로 서술한다.

인류는 인지 능력의 비약적 발달 덕분에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길을 걸었다. 추상적 상상을 하는 능력 덕분에, 인류는 종교, 이념, 민족, 국가, 법인, 기본권, 등 추상적 아이디어를 구심점으로,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이 함께 어울려 일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문자의 발명 덕분에 세대의 한계를 넘어 아이디어가 전해지고 축적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확장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비참과 멸종을 의미했다.

농업 혁명으로 생산력이 늘고 인구가 증가했지만, 이전에 수렵채취 단계에 비해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삶은 과거보다 더 고달파졌지만, 일단 농업 단계로 접어들면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었다. 잉여생산물을 기반으로 도시와 위계적 사회가 출현하고, 사람들은 성, 인종, 등으로 구분된 집단간에 편견을 생산하고 차별과 착취를 하였다. 이러한 구분과 착취는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해낸 아이디어에 근거한 것이다.

크게 볼 때 인류의 역사는 통합의 역사이다. 근래로 올 수록 인류는 과거에 고립된 수 많은 작은 단위의 사회로부터 점차 큰 단위의 사회로 통합되어, 마침내 지구 전체가 하나의 사회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통합은 경제, 정치, 종교의 영역 모두에서 전개되었다. 화폐와 교역을 통해 경제가 통합되었으며, 다민족을 아우르는 제국의 정복과 흡수를 통해 정치적으로 통합되었으며, 국한된 지역을 넘어 인류 전체를 관장하는 신과 초월적 힘이라는 아이디어로 종교가 통합되었다. 근대에 들어 '인간중심주의' Humanism 라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전통 종교를 대신하면서 통합을 이끌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전과 판이하게 구분되는 단계인 '근대' modern 를 이끈 핵심은 '과학 혁명' scientific revolution 이다.  이전에는 과거를 이상으로 생각했으며, 모든 중요한 지식은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1500년경 서구에서 '인간은 무지하다,' '세상을 관찰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자' 라는 새로운 지식 탐구 방법론이 등장하였다. 이렇게 세상을 탐구하여 획득한 새로운 지식은 힘을 가져다 주었다. 세계를 관찰하여 얻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은 생산력을 높이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서구에서는 새로운 지식의 발견과 함께 '진보' progress 에 대한 믿음이 확산되었다. 과거보다 미래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반면, 서구 이외의 사회에서는 새로운 지식을 힘으로 연결시키려 하지 않았다. 중국이나 이슬람의 지식 수준이 서구보다 더 높았지만, 그들은 모든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과거에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새로운 지식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나 문제에 봉착하면 과거 사람들이 남긴 지식을 열심히 파고 새로이 해석하려고 했다. 중국이나 이슬람인들은 인류의 이상향이 과거에 있다고 생각했다. 미래가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인류의 역사가 오랫동안 정체 상태를 유지했으므로 당연하다.

과학 기술은 제국의 확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국가의 후원 속에서 발전하였다. 주요한 과학 발견은 거의 대부분 국가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국가는 실용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비용을 지불하였다. 자본을 투자하여 거둔 이익을 재투자하여 사업을 더욱 더 확장시킨다는 자본주의적 사이클은 신용제도와 더불어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사업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는 신용제도는 미래의 경제성장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자본주의 제도는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하면서까지 금전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삼기 때문에 부작용도 적지 않지만, 다른 어느 제도보다 경제성장을 이끄는 데 탁월한 힘을 발휘하였다.

증기의 힘과 같이 새로운 에너지를 이용하는 산업혁명은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인류는 근래로 오면서 전기, 핵 에너지, 태양광 등과 같이 새로운 에너지 원을 계속 발굴하면서 생산성의 향상을 거듭했다. 이러한 물질적 발전을 이끈 힘은 과학 기술에 있는데, 인간의 과학 기술은 마침내 자연 세계의 원리인  진화적 발달을 뛰어넘어, 인간이 유전자를 조작하여 생물을 변화시키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변화의 방향은 미래에 슈퍼 휴먼의 출현을 예상케 한다. 미래에 출현할 수퍼 휴먼은 현생 인류에 대하여, 마치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보듯 할 것이다.

인류는 근래로 오면서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과연 인간은 과거보다 더 행복할까? 물질적 향상과 더불어 인간의 욕구와 기대수준 또한 함께 높아졌으므로, 삶에 대한 주관적 만족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디어와 대중문화는 잘 나가는 사람들을 계속 상기시키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불만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인의 중심 가치관인 인간중심주의는 인간 개개인의 느낌 feeling, 자기 자신의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느낌을 최고의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욕구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다. 인류의 물질적 발전이 행복을 높이지 못한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말인가? 불교에 따르면 인간의 불만과 근심은 집착에서 비롯되므로, 집착을 끊으면 만족과 불만이 없는 상태, 즉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관조하는 상태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복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는 아직 미해결의 과제이다. 한편 인류의 발전은 지구상 다른 생물들에게는 비참과 파멸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저자는 이 책을 출간한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인이 되었다. 필자도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책의 무엇이 사람들을 그렇게 매혹시켰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희미한 이책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다. 첫째, 여러 학문 영역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이 두드러졌다. 저자의 독서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그많은 이야기를 기억속에서 꺼집어 내어 적재적소에 꿰어 맞추는 능력은 놀랍다. 둘째, 저자는 관점을 수시로 바꾸고, 때때로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을 비교하면서 신선한 발상을 발산한다. 기존의 역사 서술은 거의 모두가 서구 중심인데, 저자는 수시로 비서구인의 관점에서 비교하며, 또한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의 관점에서 비교하기도 한다. 셋째, 역사 서술에 생물학, 사회학, 인류학, 정치학, 경제학적 시각을 접목하여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종횡무진 발휘한다. 그 결과 이 책이 역사책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물론 두번째 읽으니 곳곳에서 그의 추리이나 서술에 약점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는 아직 젊으므로 앞으로 어떻게 생각이 발전할지 궁금하다.

2023. 5. 14. 22:57

Eric Jones. 2003(1981). The European Miracle: Environments, Economics and Geopolitics in the History of Europe and Asia. 3rd ed. Cambridge. 257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세계사의 핵심 질문인, 서구가 왜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을 앞서 발전하게 되었는지 원인을 찾는다. 자연 환경적인 요인과 제도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서구가 아시아보다 앞서 산업화에 성공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서구가 본격적으로 아시아를 앞서게 된 시점은 대략 1500년대, 즉 북서유럽 사람들이 대양으로 나아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인도와 중국에 진출하게 된 무렵이다. 1500년대 이전에는 중국 문명이나, 이슬람 문명이 기술적으로 서유럽보다 앞섰으며, 물질적 수준에서도 서유럽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었다.

서유럽은 아시아의 다른 문명권과 비교하여 인구 출산률이 낮았으며, 인구 밀도가 높지 않았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가뭄과 홍수 등 자연 재해가 빈발하였기 때문에 자연출생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로 자녀를 낳는 전략을 택한 반면, 서유럽은 자연재해가 적었으므로 최대 자연출생력에 못미치는 출산 관행이 지배했다. 서유럽에서는 사람들이 결혼을 늦게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서 출산력을 조절하는 사회관습이 정착했다.

서유럽은 아시아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지 않으므로 인력보다 자본을 더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경제가 발전하였다. 농업이 주였던 시절에, 아시아는 논에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생산력을 높이는 전략을 구사했으나, 서유럽에서는 목초지에 가축을 키우고, 상대적으로 적은 인력을 투입하여 밭을 경작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서유럽에서 수력, 풍차, 석탄을 사용하여 에너지를 얻고, 새로운 생산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것, 즉 생산 과정에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서구가 발전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반발이 높았으며,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는 보수주의가 지배하였다.  

1500년대 무렵 유라시아 대륙에는 크게 네개의 문명권, 즉 유럽 문명, 중동의 오토만 제국, 인도의 무굴 제국, 중국의 명나라 제국이 존재했다. 서유럽을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문명은 정복 문명이었다. 중동과 인도 및  중국의 원나라와 청나라 제국은 모두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 유목민들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이다. 서유럽은 중앙아시아 초원 지역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문명과 달리 유목민 약탈자 권력이 닿지 못한 행운을 누렸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정복 세력은 토착인을 최대한 착취 약탈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을뿐, 국가의 생산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경제를 관리하고 국민을 통치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복 국가의 국민들은 중앙 집권의 권력에 포획되어 있었으며, 귀족들 또한 권력 집단의 일원으로서 국민을 착취하는 역할만 하였다.

반면 서유럽은 작은 여러 나라로 나뉘어서 서로 경쟁하였다. 유럽의 자연 환경은 산, 강, 바다로 지역을 잘게 나누고 있으며, 북서 유럽에는 숲이 널리 퍼져 있어 지역간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였으므로, 단일 권력이 전 지역을 장악하기 어려웠다. 각각 분할된 지역에 토대를 둔 국가들은 서로간 끊임 없는 경쟁과 협력을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권력 집단들의 틈바구니에서 상공업자들은 상대적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 서유럽의 권력자들은 자의적으로 상공업을 제한하거나 상공업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식으로 전횡을 부릴 수 없었다. 서유럽의 상공업자들은 자본을 축적하여 재투자하여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반면 아시아의 약탈적 정권 하에서 상공업자들은 자본을 모으는 것이 위험했으므로,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사치한 생활에 소비하거나, 지주 혹은 관료의 지위로 갈아타려고 노력했다.

서유럽은 작은 나라들로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지만, 기독교 문화의 일원으로서 서로 간 어느 정도는 유사했다. 서유럽의 다양한 나라들 사이에 사람들의 이동을 통한 아이디어의 전파가 매우 빨랐다. 한 지역에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면 서유럽 전체로 곧 퍼졌다. 지역간 언어의 차이가 있지만 유럽 대륙 전체로 지식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하였으며, 지역 언어들 사이에 유사성이 높았으므로 다른 언어 지역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 나라의 권력 집단이 자의적 횡포를 부리면, 곧 그 나라의 상공업자와 자본가들은 다른 지역으로 기술과 자본을 들고 이동하여, 그 지역의 세수가 감소하고 군사력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각 지역의 권력 집단은 자신의 지역에서 경제가 활발하도록 항시 관심을 기울였다. 상공업자들은 정치 권력 집단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누렸으므로, 이후 이들이 주도하여 정치 권력을 견제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발달하였으며, 상공인들의 경제활동을 돕기위해 도로를 닦고 상공업의 규칙을 관리하는 등으로 국가가 국민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국가 service state 로  발전하였다. 

저자는 서유럽이 1500년경 무렵에 세계를 앞서게 된 것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1400년경 혹은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점차로 배경이 무르익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정치권력이 상공업자의 자본을 자의적으로 탈취하지 못하는 관행은 1200년경 이탈리아에서 상공인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의 독립적인 존재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아시아와 비교하여 볼 때 서유럽에서는 1500년 이전부터  상공인의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관행이 자리잡은 것이다. 중세시대에도 교회와 왕으로 권력이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왕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전통은 영국에서 1300년대 후반 세금을 내는 상공인과 지주가 왕에게 압력을 가해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문서인 마그나 카르타를 받아내었으며, 서유럽 전지역에서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의회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중동이나 인도 문명은 역병의 피해를 자주 많이 받았으나 국가가 역병의 확산을 제한하는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반면,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국가가 주도하여 방역을 하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이전 서유럽보다 발달했던 생산 기술과 항해 기술을 국가가 금지하여 이후 기술이 퇴화하였다. 이는 중앙 관료들 사이의 권력 다툼과 보수 세력의 변화에 대한 저항이 이겼기 때문이다. 반면 서유럽에서 보수세력의 변화에 저항하는 힘은 중국만큼 크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신기술의 도입을 금지하였다고 해도 이웃나라가 버티고 있으므로 이러한 명령은 실제로 엄격히 지켜지지 못했다.

서유럽은 물론 아시아 전체적으로 1000년대 이래 인구가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증가하여 기존의 생산수단에 비교하여 인구압력이 계속 높아졌다. 1300년대 중반 페스트가 창궐하여 인구압이 일시적으로 낮아졌지만 100년도 못되어 다시 인구가 증가하였다. 서유럽과 중국은 높아진 인구압을 배출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농업 기술의 발전 및, 1500년대 이래 아메리카 대륙 등 식민지 개척으로 높아진 인구 압력이 분출될 탈출구가 마련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시장의 확대 등으로 자본주의 산업화를 이끌었다. 한편 중국은 명나라 이래 남쪽 지역으로 경작을 확대하여 높아지는 인구압을 배출하였다. 중국에서는 논농사 지역을 확대하면서 새로운 기술 개발 없이 인구를 많이 투입하여 생산을 늘리는 방향으로 발전한 반면, 서유럽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여 농업과 이후 제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경제가 발전하였다. 즉 중국에서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경제의 외연적 확대가 이루어졌으나 생산성의 향상은 높지 않았던 반면, 서유럽에서는 인구 증가와 더불어 기술 발전과 자본 투입이 높아지면서 생산성의 향상이 함께 갔다.

중국에서 새로이 개척할 땅이 다했을 때, 결국 권력 집단은 국민을 더 가혹하게 탈취하고 국민들은 참다참다 결국 폭발하여 정권이 교체되지만 이러한 사이클은 반복되었다. 중국의 청나라 시절 연거퍼 발생한 대규모 민중 봉기와 엄청난 인명 피해의 배경에는 이러한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새로이 개척할 땅이 없었던 중동의 오스만 제국이나 인도의 무굴제국이 간 길이기도 하다.  반면 서유럽은 인구 증가와 생산성의 향상 및 식민지로의 인구 배출이 함께 전개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인명 피해를 동반한 민중의 대규모 반란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책은 세계사의 핵심 질문에 대해 지금까지의 학술적 논의를 비판적으로 낱낱이 검토하면서 저자의 주장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교양서로 읽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저자의 글 쓰는 방식 역시 축약적이고 복합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주제와 관련하여 대표적으로 추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논의가 균형되고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읽기는 어려웠지만 영양가가 높았다.

2023. 5. 6. 22:34

William McNeill. 1991(1963). The Rise of the West: A History of the Human communi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807 pages.

저자는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고대에서부터 1950년경까지 세계 문명의 전개를 설명한다. 세계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중동지역이 인류의 문명을 대표한 500 BC 경까지, 이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유라시아대륙의 곳곳을 수시로 침범하면서 농업 혹은 상업을 기반으로 한 문명들(헬레니즘, 인도, 중국, 이슬람 제국)을 위협한 시기인 서기 1500년까지, 전세계에 대한 서구의 압도적 지배로 요약되는 1500년 이후 현재까지, 이렇게 인류 역사를 세개의 시기로 구분을 한다. 그는 세계의 문명권이 고대부터 서로 영향을끼치며 전개되어 왔다는 점, 1500년 총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발전은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의 전개에 의해 크게 좌우됬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류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3,000년 경에 이곳에서 농경이 처음 시작되고 도시가 출현하였으며, 부족의 규모를 넘어선 큰 규모의 정치체가 등장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후 변방으로 확대되어, 기원전 1700년경에는 이집트, 소아시아, 크레테, 이란으로 확대되었으며, 이후 인도, 그리스, 중국 문명이 기원전 500년경까지 세워졌다. 중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독립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반면, 인도와 그리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영향을 받아 세워졌다.

그리스 문명은 서쪽으로는 로마제국과 서유럽으로, 동쪽으로는 소아시아의 헬레니즘으로 확장되었다. 인도문명은 동남아시아로 확장되었으며 중국에 영향을 미쳤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은 철기문화를 일찌기 발전시키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멸망시켰으며, 이란 아프간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인도 문명을 위협하였다.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유목민족들은 중동과 중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통해 문명간 교류를 활성화하였다. 이들은 서쪽으로는 동유럽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중국을 수시로 침범하면서 기존 사회의 변화를 촉발시켰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 문명은 동으로는 이란과 인도 지역으로, 서로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로 확장하였다.

1500년까지 서유럽은 문명의 변방지대에서 낙후되었었다. 그러나 이후 항해 및 총포 기술과 함께 체계적으로 군사를 조련하는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다른 모든 지역을 압도하는 전쟁 능력을 획득하였다. 서유럽이 중국, 인도와 비교하여 이렇게 크게 발전한데는, 여러 작은 정치체들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전쟁 능력을 함양한 것, 지주층과 비교하여 상공인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점이 큰 이유이다. 서유럽의 이러한 전통은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부터 발전되었다. 반면, 중국은 지주세력이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여 상공인의 발전을 억눌렀다. 또한 상대적으로 안정된 중앙 집권체제가 계속 유지되면서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의 힘이 매우 강했으며, 다수의 정치체들간 경쟁을 통한 변화의 역동성이 부족하였다.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초원지역에 사는 유목민족은 주변의 농경민족보다 군사적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수시로 주변의 문명들을 위협하였다. 서쪽으로는 헝가리까지 진출하였으며, 이들의 압박으로 역시 유목민족이던 고트족이나 게르만족이 서유럽으로 밀려나 정착하였다. 유럽인은 고대부터 군사적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으므로, 호전적인 문화가 바탕에 깔려있다. 유목민족들은 남으로는 북인도로 진출하여 인도 유러피안어족의  인도문명을 세웠다. 이들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원나라, 청나라, 금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의 문화에 흡수되는 길을 택했다.

중동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시작해, 이후 헬레니즘을 수용하고, 이슬람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오랜동안 주변의 다른 문명권에 영향을 미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을 거듭하였으며, 노예를 기반으로 군대를 유지하였는데 이들의 거듭된 반란으로 국력이 쇠하였으며, 신정 정치가 계속되면서 변화를 거부하여, 외부의 위협에 대응한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1500년경 이후 서구 문명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이후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으로 이어지는 세계 확장의 길에 접어든다. 1400년경 부터 서유럽은 점차 기독교의 지배에서 풀려나,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세속적인 합리주의가 세를 더하였다. 이는 1700년대에 계몽주의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국민의 힘을 키우고 민족국가를 형성시킨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700년대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급속한 인구증가로 이어졌다. 결국 1800년대 중반쯤 세계 모든 지역은 서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유라시아대륙에 비해 3,000년 정도 문명의 발전이 낙후되어, 1500년경 서구와 만났을 때 아직 철기문화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유라시아대륙의 질병에 취약하여 쉽게 무너졌다. 서구의 위협에 대응해 자신의 선조로부터 계승한 문화의 무력함에 절망한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서구의 문화를 급속히 수용하였으며, 자신의 전통 문화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저자의 역사관은 두가지 점에서 독특하다. 첫째, 세계는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한다. 어느 지역에서 좋은 아이디어나 발전이 전개되면, 이것은 얼마 안되어 주변지역에 모방되고, 이러한 과정이 빠른 속도로 전지구를 돌며 영향을 미친다. 둘째, 서구가 앞서기 전인 1500년 무렵까지 유목민족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이 세계사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총포의 발명으로 유목민족의 파괴력이 무력해진 후에도 여전히, 군사적 능력은 역사의 전개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서구가 세계를 제패한 것은 우월한 군사력 덕분이다.  현재 세계는 서구의 문명권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 이를 대체할 어떤 다른 문명이 등장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계속 발전하면, 아마도 미래에 인류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현재의 인류를 대체하는 새로운 인류가 등장할 수도 있다.

저자는 역사의 전개를 거시적으로 접근하면서 말로 많이 설명한다. 다양한 사회와 제도, 지역, 시간을 종행무진으로 비교하면서 엄청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지금까지 학교에서 공부한 역사는 서유럽에 국한된 역사이며, 통찰력과는 거리가 먼 단순 학습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높이는 데에 역사 공부의 목적을 둔다면, 이 책은 정말 최상의 교재이다. 감탄을 거듭하면서 800쪽의 책을 읽었다. 여러번 읽을만한 책이다. 다만 20세기의 역사나, 동아시아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2023. 2. 21. 15:46

William McNeill. 1982. The Pursuit of Power: Technology, Armed Forces, and Society since AD. 1000.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87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서기 1,000년대 이래 무력과 전쟁 기술이 세계 역사의 전개에서 차지한 역할을 상세히 서술한다.

농업을 통해 자급자족의 수준을 넘어선 잉여가 생산되면서,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도시 인구와 정치 집단이 출현하였다.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댓가로 보호금을 갈취하는 시스템(protection racket)이 등장했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언제 드리닥칠지 모르는 폭력 집단에 의해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당하는 것보다는, 세금이라는 형태의 안정된 갈취를 당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에, 사람들은 국가라는 조직된 폭력 집단의 지배를 수용하였다. 폭력집단의 입장에서도, 예기치 못한 위험을 수반하며 불확실한 규모의 수입을 얻는 비조직적 약탈보다는, 조직적 폭력을 기반으로 안정된 지배 체제를 통해 생산자를 착취하는 편이 상대적으로 적은 위험으로 더 많은 수입을 가능케 하기에 국가체제를 수용하였다. 즉 폭력을 기반으로 한 안정된 지배체제인 국가는 어느 다른 폭력 집단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모두에게 더 많은 소득과 안정을 제공한다.

전 역사를 통틀어 사회 체제를 크게 두 범주, 즉 중앙의 계획과 위계적 명령을 통해 모든 경제 사회 활동이 운용되는 명령체제(command system)와, 다수의 개인이 참여하여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시장기구에 의해 경제 사회활동이 운용되는 시장체제(market system)로 구분할 수 있다. 공산주의,  중국의 관료적 권위주의, 프랑스의 절대왕정, 독일과 일본의 나찌/군부의 통제 등이 명령체제에 속하며, 자본주의,  개인주의적 시장 경쟁, 영국의 자유주의, 등이 시장체제에 속한다.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과 현재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명령체제가 지배하는 반면, 시장체제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작은 규모로 전개되고,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한 독특한 체제이다.

중국은 1500년경까지 생산성이나 군사력에서 서구를 크게 앞섰다. 중국에는 일찌감치 중앙집권 체제가 자리잡았다. 외부의 위협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내부에서도 지역간 경쟁이 심하지 않았으므로, 무인 세력은 관료나 문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다. 중국의 유교이념은 인문을 숭상하고 윗사람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반면, 무력이나 상공업은 천시하였다. 중국에서는 서구와 달리 무력 집단과 상공인이 연결되지 않았다. 상인은 독자적 권력을 갖지 못해 관료에 의해 재산을 뺏길 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이익을 재투자하여 사업을 번성시킴으로서 부를 늘이기보다는 관료로 갈아타려고 노력하였다. 무인들 역시 상인과 결탁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 권력을 장악하기보다 관료로 갈아타려고 노력하였다. 요컨대 중국의 유교문화권에서는 무기와 전쟁 기술이 발전할 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며, 그 결과 무력의 발전은 정체되었다.

서구에서는 1200년경 북이탈리아의 소규모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무기와 전쟁기술을 발전시키는 움직임이 펼쳐졌다. 도시국가는 주위의 폭력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용병을 고용하였고, 상인이 내는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유래된 화약은 서구에서 총포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서구유럽에서 왕이 봉건 제후를 제압하면서 무력 동원의 규모를 키웠으며, 왕들 간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하는 가운데 무기와 전쟁 기술 수준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1,400년경 대양을 항해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럽의 무력 각축장은 지중해로부터 대서양 연안으로 이동하였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이 무력 수준에서 강국으로 올라섰으며 ,유럽 무대에서는 물론 전세계의 식민지 쟁탈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서구 열강들이 유럽 무대에서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무기와 전쟁 기술 수준이 나날이 향상된 반면, 중국, 아메리카, 중동, 인도 등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무력의 발전이 정체되어 있었으므로, 전쟁에서 유럽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1,400년대 후반 대양을 통한 서구의 확장이 본격화되었을 때, 비서구 지역 사람들은 이들의 침략에 맞서 참혹하게 패배하였으며, 결국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서구 열강들 사이의 경쟁은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제압하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높은 비용을 수반하는 해전에서 영국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차례로 제압하였다. 영국은 시장체제를 발전시켜 금융가를 통해 전쟁에 필요한 비용을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조달할 수 있었던 반면, 스페인과 프랑스는 명령체제의 경직성과 비효율 때문에 전비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으며 높은 비용을 수반했다.

서구에서는 13세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부터 무력과 상공업이 서로 연결되어 상승적으로 발전하는 전통이 뿌리내렸다. 무력 집단은 상공인의 부를 이용하여 무력을 확장하였고, 상공인은 무력 집단의 힘을 등에 업고 상공업 활동을 확대하였다. 국가의 무력이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해외에서는 폭력을 동원한 약탈과 상업적 거래의 경계가 모호하였다. 국가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해적 내지 무역상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장려하였다. 서구의 식민지 쟁탈 경쟁은 국가의 무력과 상업적 이익이 결탁하여 전개한 프로젝트였다.

전쟁을 치르려면 거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력집단은 상공인과 어떤 형태로건 연결을 맺지 않고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서구에서는 국가들 사이에 무기 기술이 경쟁적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상공인의 우수한 무기 제조능력은 국가의 무력 경쟁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무력집단과 상공인간의 밀접한 관계는,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 모두, 기계적 우수성을 다투는 첨단 무기 개발 경쟁이 심화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무기 기술이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신무기를 개발하려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고, 더 많은 연구자가 관여해야 하고, 더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진행해야 하는 상황은, 20세기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에서  최고조에 달하였다.  소위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가 완벽하게 형성된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탄생한 프랑스 군은 군대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평민을 대거 징집하여 전쟁에 투입하였으며, 전투 능력과 업적을 기준으로 군의 위계를 조직하였다. 징집된 평민들은 혁명으로 탄생한 모국의 사활을 책임진다는 사명감과 함께 전쟁에서 뛰어난 업적을 거두어 국민적 영웅이 되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나폴레옹이 이끈 전쟁에 헌신적으로 임하였다. 그때까지 유럽의 지배자들은 평민들의 반역을 우려해 자국민보다 외국인 용병을 선호하였으며,  사회의 상층 계급이 개인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군의 지위권을 차지하는 관행을 유지하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러한 전통적 군대를 전쟁에서 완전히 제압하므로서 새로운 군의 개념을 서유럽에 확산시켰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군의 무기체계와 전쟁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증기기관 덕분에 운송의 제약이 사라지면서 전쟁의 폭과 규모는, 과거 말과 마차에 의존할 때보다 훨씬 더 넓고 커졌다. 과거에는 전쟁을 치를 때 식량과 군수물자의 조달이 가장 큰 제약요인이었는데, 19세기 증기기관 철도와 20세기초 자동차는 이러한 제약을 완화시켰다. 군의 대규모 조달 물량은 산업혁명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새로운 기술이 생산에 적용될 초기에는 상업적 성공이 불확실한데, 군은 상업적 이해타산을 넘어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생산품의 수요를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계속된 전쟁은 인구 폭증의 압력으로 초래되는 사회불안을 피하는 효과적 방편으로 작용하였다. 18세기 유럽의 인구 폭증은 기존의 농업 생산성을 넘어서는 규모였는데, 19세기 초 유럽을 휩쓴 전쟁은 수백만의 젊은이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였으며, 잉여 인력의 상당수를 전장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20세기에 벌어진 제1,2차 세계 대전 역시 19세기의 인구 폭증 문제에 대해 동일한 효과를 가져왔다. 거꾸로, 인구 폭증으로 인하여 사회불안 요소가 커지고, 이것이 전쟁으로 이끌었다고 인과관계를 추리할 수도 있다. 유럽, 특히 스페인, 영국은 자국의 잉여 인구를 식민지에 수출함으로서 인구 폭증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도 해외 혹은 시베리아로의 이민을 통해 인구 폭증 문제를 해결하였다. 반면 프랑스는 일찌감치 19세기 초에 출생율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에 인구폭증의 문제를 피해갈 수 있었다.

전쟁은 기존의 관행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턴을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기득권 집단이 기존의 관행을 고집하다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기존의 관행을 버리고 상대국이 실행하는 새로운 패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전쟁이 빈발하면서 서유럽 국가들 서로간에 기존의 관행을 버리고 보다 효율적인 새로운 관행을 경쟁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비효율적인 낡은 관행과 기득권을 고집하다가는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산업혁명 초기에 기존의 장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고집하며 변화를 거부하였는데, 19세기초 유럽을 휩쓴 전쟁은 소위 '미국식 생산방식(American Production system)'이라 일컬어지던 기계를 이용한 표준화된 대량생산 방식을 무기 생산에 도입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전쟁이후 민간물품의 생산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또한 전국의 농촌 벽지로부터 전쟁에 동원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후 과거 전통사회의 관습을 버리고 도시적 합리적 행위 규범을 따르게 되었다. 

군과 민간 활동은 서로 영향을 교환하였다. 예컨대, 19세기 이래 서구 유럽에서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대규모의 인원과 물자의 생산과 배치를 담당하는 사람을 민간 대기업의 경영자 중에서 구했다. 대규모 전쟁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인원과 물자를 조달하고 관리하는 일은 매우 합리적인 경영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전후 민간의 대기업 경영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동양과 비교해 유럽에서 무력이 크게 발전한 것은 여러 지역으로 차단된 지형적 원인과 함께, 농경이 아니라 유목을 생업으로 한 것에서도 부분적으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유목은 생명 살상을 일상적으로 하며, 특히 겨울이 다가오면 많은 가축을 일시에 죽이는 관행이 지배하였다. 중국의 논농사와 달리 유목은 좁은 지역에서 많은 인구를 먹여살릴 수 없으므로, 인구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오는 전쟁이 서구에서 더 자주 벌어졌다. 중국의 논농사는 중앙집권의 권력이 농사에 필수적인 치수를 관리하였으며, 농사꾼은 자신의 땅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중앙의 권력에 순종하였다. 동양의 집단주의적 가치나, 무력과 상공업을 경시하고 권위주의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는 이러한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반면 수시로 이동하는 유목민들은 중앙의 권력에 쉽게 반항하며, 서로간 생존을 위한 무력 투쟁도 불사함으로, 서구에서는 개인주의적 가치가 강조되고 집단간 무력 경쟁의 릴레이가 전개된 것이다.

저자는 전쟁과 무력 활동을 도외시한 역사 서술은 피상적이라고 주장한다. 인류의 시작에서부터 집단적인 무력 행사는 인간 사회의 핵심을 차지한다. 무력을 어떻게 관리하고 경쟁하는지는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전쟁의 승패 위험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세계의 역사와 사회의 전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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