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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해당되는 글 15건
2024. 1. 4. 16:50

W.Phillips Shively. 2011. Power and Choice: An Introduction to Political Science. 12th ed. McGraw Hill. 443 pages.

저자는 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대학교에서 사용할 정치학 개론 교과서로 집필되었다. 정치 사상과 이론, 국가와 정책, 민주주의와 독재, 정부기구와 정치과정, 의회중심제와 대통령 중심제, 관료와 사법기구, 국제정치 등 정치학의 전분야를 섭렵한다.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의 다양한 사례를 활용하여 다양한 정치 현상을 설명한다. 비교정치학적 접근을 하며, 서구 국가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개발도상국의 사례들도 폭넓게 다룬다.

정치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 사이에 합의를 도출하는 것인데, 이를 행위자들 사이에 갈등과 타협의 과정으로 볼지, 혹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볼지에 따라 관점의 차이가 있다. 저자는 전자를 power 의 관점으로, 후자를 choice 의 관점으로 명명한다. 사회과학의 이론틀에서 볼 때, 전자가 갈등론, 후자가 기능론에 해당한다. 근대 국가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대규모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넓은 영토에 걸쳐 규칙과 질서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면 이는 기능론적 관점이다. 반면 유럽에서 이웃 나라들 사이에 빈번히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조달하는 가운데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찰스 틸리의 설명은 갈등론적 관점이다. 

정치현상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서 이론적 깊이를 제공하는 좋은 책이다. 각 장의 주제와 연관되어 특정 국가의 정치에 관해 심층적인 사례 탐구를 제공하는데, 이는 각 장의 주제에 대해 이해를 깊이하면서 특정 나라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이 책을 통해 정치 전반을 폭넓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2023. 6. 16. 10:22

David Stasavage. 2020. The Decline and Rise of Democracy: A Global History from Antiquity to Today. Princeton Univ. Press. 310 Pages.

저자는 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고대에서 근래까지 민주주의의 원천과 변화의 원인을 전제주의와 비교하면서 서술한다. 민주주의는 오랜 옛날부터 인간사회 공통의 정치 제도였으며, 민주주의는 퇴보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전개되어 왔으며, 민주주의와 전제주의는 별도의 길을 걸어왔다.

원시시대와 고대에는 민주주의가 거의 모든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정치 제도였다. 지도자가 마을 혹은 부족의 세력가들로 구성된 집단과 협의하면서 통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단의 규모가 작을 경우 집단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고대의 민주주의는 주로 상층부의 참여에 국한될 뿐, 일반인에게까지 주권이 부여될 정도로 폭이 넓지는 않았다. 반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폭이 넓지만,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이라는 간헐적 간접적 방식으로 주권을 행사하기에 유권자와 대표 사이에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깊이가 얕다.

서유럽은 국가의 힘이 약했다. 왕은 소수의 가신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며, 자신 소유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정부를 꾸렸다. 대지주 귀족이나 도시민들은 왕의 통제가 미치지 않았다. 왕은 귀족과 도시 상공인들과 협의하면서 국가의 일을 처리하였다. 중세는 물론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의 국가는 국내총생산의 1%정도의 세수만을 거둘 뿐이었다. 유럽의 왕은 15세기 절대왕정 시절에도 자신이 통제하는 관료의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통치력이 미약했다. 서유럽에서 약한 국가와 협의체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귀족, 승려, 도시 상공인으로 구성된 협의체가 1250년 왕의 세수권한을 제한하는 서약인 Magna Carta와, 1688년 왕을 폐위시킨 명예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반인을 징집해야 하고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하게 되면서, 통치자는 국민에게 주권을 점차로 더 많이 양보해야 했다. 영국에서 19세기 중반 남성 모두에게 선거권이 확대되고, 1차대전 이후에 여성에게 선거권이 확대된 과정에는 이러한 힘이 작용하였다.

중국은 일찍부터 국가의 힘이 강했다. 기원전 주나라 시절부터 왕은 두터운 관료 집단을 거느리고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했다. 서기 200년전 한나라 시기에 시작된 과거제를 통해 왕은 자신이 직접 임명하고 통제하는 유능한 관료들을 동원하여 국민의 일상을 통제하였다. 한나라 시기에 국가는 국내총생산의 10%가량을 세금으로 징수하였으며, 도로나 치수사업 등 많은 사업을 전개하였다. 중국은 왕 휘하의 강력한 관료들 덕분에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 체제를 뿌리내렸으며, 이러한 전통은 현대의 공산주의 정권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유럽과 중국이 다른 길을 가게된 원인은 자연 환경의 차이에 있다. 서유럽은 넓은 평야가 없으며, 목축이나 호밀 재배에서 밀도가 낮은 농업을 하고, 자연 강우에 의존하여 생산에 굴곡이 많으며, 인구가 조밀하지 않았다. 토지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낮고, 사람들이 쉽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으면,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주의가 서유럽보다 미국에서 더 빨리 발달한 원인이다. 반면, 중국은 황하 유역에서 문명이 발달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넓고 비옥한 퇴적토가 있으며 강물을 끌여들여 밀도가 높은 농사를 지었다. 많은 사람이 집중해서 거주하고, 농업 환경 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중국의 농업은 생산량의 측정과 예측이 정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관료는 국민의 생산활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반면 서유럽의 농업은 외부인이 생산량을 측정하고 예측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지역인이 아닌 국가의 관료가 주민의 생산활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금을 거두기 어려웠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대표자를 뽑아 의회에 보내는 방식의 간접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영국은 대표자에게 의결의 전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1600년경에 일찌기 확립한 반면, 서유럽 대륙의 나라들은 대표자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제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세금, 전쟁 선포 등과 같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국민이 자신의 대표에게 일정한 한도까지의 결정 권한(mandate)만을 부여하는 제도는, 국가가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의회에서 논의가 진행되면서 대표자의 결정권한을 넘어서는 사안이 발생하면, 자신을 선출한 주민들에게 돌아가 다시 의견을 묻고, 의회에 돌아와서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의회의 효율을 크게 저해한다. 대표자에게 의결의 제한을 부과하는 전통은 주민이 대표자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정도가 높다. 반면 대표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제도는 일단 대표자를 선출하기만 하면 주민은 대표자에 대한 통제권을 더이상 행사할 수 없다는 면에서 국민이 주권을 보유한 정도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서유럽에서 상공업이 가장 먼저 발전했던 네덜란드를 영국이 제치고 17세기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영국의 의회가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반면, 대표자의 의결을 제한하는 제도를 유지한 네덜란드 의회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민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도가 높으면, 변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어려우며, 기득권자들이 버티고 신규 시장 진입을 제한한다.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 즉 지주가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꾸고 울타리를 쳐서 경작민을 쫒아내는 것이, 영국 의회에서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대표자에게 전권을 부여한 제도 덕분이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민주주의였던 서유럽보다 전제주의였던 중국이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잘 살았다. 전제주의 국가에서 국가의 지휘로 자원을 동원하여 일관된 경제성장을 추진한 사례가 여럿 있다. 소련이나 현대의 중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경제가 성숙하게 되면 추가적인 성장을 위해 개인의 창의가 필요한데, 전제주의 체제는 개인의 창의를 억압하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맞는 것 같지 않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정치적인 반대의견은 강력히 억압하지만, 생산성을 높일 수있는 비정치적인 아이디어는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혁신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민주주의가 성장하려면 어느 정도의 소득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맞지 않는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현재 기준으로볼 때 매우 가난한 수준의 사회에서 발달하였으며, 중국은 현재 상당한 소득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민주주의가 정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중류층이 자신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라는 요구가 높아지고 정치 참여 욕구가 커지기 때문에 중국이 민주화될 것이라는 예측은 지금까지 맞지 않고 있다. 물론 국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에 허덕인다면, 선동 정치가의 주장에 쉽게 혹하고 매표와 같은 선거 부정이 만연하기에 민주주의가 자리잡기 어렵다는 주장은 맞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볼 때 기본적인 생존의 위협을 넘어선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국민의 소득 수준과 민주주의는 경험적으로 관련이 크지 않다.

서유럽에서와 같이 일단 의회민주주의가 먼저 자리잡으면, 이후 관료가 충원되어 국가의 기능이 커진다고 해도, 의회가 관료 집단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약화되지 않는다. 반면 중국과 같이 강력한 관료집단이 전제주의 정치와 결합해 있는 경우, 이후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어도 자리잡기 힘들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하여 서방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경우, 그 제도의 성공 여부는 식민지 시기 이전 그 사회에 민주주의적 협의체 전통이 얼마나 있었는가에 달려 있다. 협의체 전통이 미약하다면 식민지 시기의 전제적인 통치 방식이 독립 이후에도 계속되는 반면, 협의체 전통이 있었다면 서구의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1990년 공산주의 몰락 이후 개발도상국에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이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대단한 일이다. 냉전시기에 미국과 소련이 자신의 진영에 속한 전제적인 정부를 떠받쳤었는데, 이러한 보호막이 걷히면서, 많은 나라에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근래에 민족주의와 대중영합주의가 발흥하면서 선진국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중앙정치와 대표자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은 난제이다. 시민 교육을 강화하고, 대표자와 유권자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이 필요하다.

의회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견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대표자를 통해 수렴하는 제도이다. 전제주의 체제 또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로를 가지고 있다. 어느 체제이건 통치자는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경우, 관료들이 지역의 민의를 수렴하는 경로로 기능한다. 능력에 따라 선발되는 관료는, 세습적 귀족과 달리 일반인 중에서 선발되므로 그들 자신이 민의를 대표하며, 이들이 행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국민들과 접하며, 국민의 의견과 필요를 반영하여 제도를 조정한다.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가 근래에 양극화되면서 정부와 의회가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조정하여 일을 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중국은 유능한 관료와 정치인을 점진적으로 위로 올려보내는 자신들의 체제가,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발하는 대의제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제도와 중국의 전제주의 제도는, 각자 안정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흥미로운 주제와 달리, 연구 논문과 같이 경험적 분석 자료의 제시와 건조한 서술 때문에 빠르게 읽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서구와 중국을 비교하고, 이슬람과 아프리카 등을 비교하고, 고대와 중세 및 현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종횡무진 생각을 펼쳐서, 통찰력이 돋보인다. 논의와 관련하여 의문이 생길만한 점들을 비록 저자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논의하는 솔직함이 엿보인다. 여러가지를 생각케 하는 좋은 책이다. 

2022. 7. 6. 18:33

Robert Dahl. 1998. On Democracy. Yale University Press. 188 pages.

저자는 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현실적인 필요 조건을 설명한다. 전반부에서는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왜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보다 나은지 설명하며, 후반부에서는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존립하는데 기여하는 조건에 대해 논의한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정치적 평등(political equality)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 민주주의의 이러한 조건은 왕정, 독재, 전제정치 등 다른 정치체제와 뚜렷이 구별되는 핵심 원리이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정치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지 않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느 민주주의 정치체제도 이러한 이상을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평등하기 위해서는 다음 다섯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효과적 참여, 평등한 투표,  정치 사정에 대한 이해, 의제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 성인 모두를 포괄함, 등이다. 이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정치적 평등이 실현될 수 없다.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다른 어느 정치체제보다 나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권력의 독단적 횡포를 피함,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함, 자유/ 자기 결정권/ 도덕적 자율을 보장함, 인간 개발, 개인의 이익을 보호함, 평화와 물질적 번영을 가능케 함. 이러한 이유들은 이론적 결론이면서, 동시에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대규모 집단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다음의 제도적 장치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선출직 공무원, 자유롭고, 공정하며, 자주 치러지는 선거, 의사표현의 자유, 집권자가 아닌 다른 대안적 정보 출처가 존재함, 결사의 자유, 시민 모두를 포괄하는 시민권, 등이 그것이다.  현존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이 제도적 장치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제도적 장치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할 경우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이러한 민주주의 제도를 가능케 하는 현실적 조건은 다음과 같다. 선출직 공무원이 군과 경찰을 통제할 것,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지지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을 것,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외세의 압력이 없을 것, 시장경제 자본주의, 분절적인 하위문화가 강력하게 존재하지 않을 것, 등이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조건들 모두가 어느 정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가 출현하기 어려우며, 설사 출현했다고 해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서구에서도 이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 나라는 20세기에 들어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요컨대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인류 역사를 통털어 매우 드문 특이한 현상이다.

어느 나라나 외부 혹은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위기 상황에 때때로 봉착하는데, 앞의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위기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경험을 한다. 선출직 공무원이 군과 경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 위기 상황에서 군사 쿠데타로 이전하기 쉬우며,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지 않으면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의 독단적 효율성이라는 유혹에 쉽게 빠지며,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외세의 압력이 크면 외세의 간섭 때문에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존립하기 어렵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자원 배분이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들 모두에게 분산되어 있는 반면, 공산주의는 중앙에서 자원을 통제하여 배분하는데, 공산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지도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전횡할 위험이 크다. 그러나 방임적 자본주의는 독점과 지나친 분배의 불평등이라는 문제점을 낳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평등 이념에 해가 된다. 따라서 현존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모두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제어하기 위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수정 자본주의를 택하였다. 대부분의 나라는 인종, 민족, 종교, 계급 등에 따라 분절적인 하위문화로 쪼개져 있는데, 하위문화 간 차이가 크고 대립이 심각하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 미국과 같이 이질적인 집단을 주류 문화로 완전히 동화시키는 정책을 수행하거나, 아니면, 이질적 집단들 사이에 협의를 통해 정치자원을 배분하는 제도를 만들어 민주주의 정치를 수행하는 스위스나 벨기에와 같은 드문 예도 있다.

21세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큰 관심사는 중국의 민주화일 것이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필연적으로 이들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 것이다. 현재의 중국은 플라톤이 주장한 "현자의 정치(guardianship politics)"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는 절대권력의 부패 위험, 견제의 결핍, 정당성의 결여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취약하다. 근래의 역사를 돌아보면, 절대권력은 민주주의보다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 국민을 고난에 빠뜨린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 체제는 다중의 지혜가 결집되는 의사결정 장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절대권력자 한사람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정치체제보다 위험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적으며,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복잡해지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므로, 독재 체제는 민주주의 체제보다 효율성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책은 저자가 일생 동안 연구한 주제인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관한 연구결과를 정리한 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저자가 지금 이책을 썼다면, 트럼프 이후 미국의 민주주의의 위기나, 중국의 괄목할 경제성장과 독재가 함께 가는 것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논의하며 저자의 통찰력을 제시했을텐데, 아쉽다.

2022. 6. 26. 12:33

Robert Dahl. 2005(1961). Who Governs? Democracy and Power in an American City. 2nd ed. Yale Univ. Press. 325 pages.

저자는 다원주의 정치이론의 대가이며, 이 책은 정치학의 고전으로 지칭되는 책이다. 저자는 예일 대학교가 있는 미국의 뉴헤이븐이란 인구 십만 정도의 작은 도시에서 1950년대에 벌어진 정치 활동을 통해서 권력의 작동 메카니즘을 살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자원은 여러 집단에 흩어져 있고, 다양한 영역에 존재하는 위계의 상위를 특정인이 독점하지 않는다. 통치 영역에 따라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서로 다르다. 정치적 의사결정은 여러 세력간 타협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다원주의 (pluralism) 이론은, 소수의 내적으로 통일된 집단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파워엘리트 (power elite) 이론과 대치된다.

민주주의의 국민 주권의 원칙은 다수가 자신을 스스로 통치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문자 그대로 실현되기는 어렵다. 실제로는 위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주로 참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다수의 시민들은  정치에 관심이 적으며 투표하는 행위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자원을 정치에 거의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다수의 견해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은, 소수의 지배집단이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결정하고 움직이는 독재체제와 대비된다. 

뉴헤이븐 사회는 18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영국계 초기 정착자들의 후손인 소수의 귀족들에게 모든 지위와 영향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고, 많은 재산을 소유했으며, 사회적 상위 지위를 독점했다. 정치 권력 또한 그들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1830년대에 세금 납부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백인 남성들에게 투표권이 확대되고, 상공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신흥 계급이 등장하면서 정치적 자원이 상이한 집단들에 흩어졌다. 이 신흥계급은 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과거에 권력을 장악했던 소수의 귀족 세력을 주변으로 밀어냈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밀려오고, 19세기말 20세기 초반에는 이탈리아인과 유태인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민족집단의 세력이 주요 정치 자원이 되었다. 20세기 중반 들어 먼저 아일랜드계가 다음으로 이탈리아계와 유태인이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면서, 정치 자원으로서 민족집단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반면 정치 영역에 따라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서로 상이한 권력의 다원화 현상이 나타났다.

저자는 그당시 뉴헤이븐 시 정치에서 핵심적인 세가지 영역에서 전개된 의사결정과 영향력의 행사 과정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첫번째는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이 각각 시장 선거에서 당을 대표하는 후보자를 선출하는 과정이다. 둘째는 뉴헤이븐 시의 재개발 사업과 관련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이다. 셋째는 뉴헤이븐 시의 교육 분야의 의사결정 과정, 구체적으로는 시의 공립 고등학교 두개를 폐쇄하고 한개의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이다.

시장 선거에서 후보자 공천을 하는 과정에는 중간 계층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다. 중간 계층 출신의 하급 지도자들의 목소리가 주요 의사결정에 반영된다. 이들 하급 지도자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고, 대부분 전문직이 아닌 일반 사무직에 종사하며, 소득도 높지 않지만,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의 의견을 대변하기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민족집단의 세력은 과거만큼은 아니지면 여전히 큰 영향력을 쥐고 있다. 선거의 영역에서는 다수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다. 따라서 소수에 불과한 과거의 귀족 집단은 이 영역에서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반면, 시간이 흘러 이민자 집단의 다수가 아일랜드계로부터 이탈리아계로 이동하면서,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이탈리아계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들어 이탈리아계가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면서 이탈리아계의 응집된 세력은 분열되었으며, 그와 함께 민족 집단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정당의 소수 지도자들이 사실상 공천을 결정하는데, 왜 그 과정에서 다수의 하위지도자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는 다음 네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첫째, 민주적 절차는 소수 지도자들의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둘째, 민주적 절차는 하위 지도자들의 충성을 불러 일으킨다. 셋째, 민주적 절차는 갈등을 질서있게 조정하도록 해준다. 넷째, 새로운 사회적 세력들이 부상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실상 소수가 의사결정을 하지만, 다수의 참여를 유도하는 민주적 절차들이 단순히 겉치장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뉴헤이븐 시의 재개발의 의사결정에는 재력가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재개발은 이들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재개발이라는 경제 사업에서 이들의 전문성이 발휘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이래 중상층이 점차 교외로 이전하고 뉴헤이븐 시가  쇠락하면서 재개발의 필요성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였지만, 주민 간 이해 조정의 어려움 때문에 오랫동안 재개발이 미루어졌다. 1950년대 후반에 선출된 시장이 주요 이해 관계자들을 모두 위원회로 끌어들여 이해를 조정하고 반발을 무마하면서 재개발 사업이 실현될 수 있었다. 시장이 재개발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심에 있지만, 다양한 경제 분야의 구성원들이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뉴헤이븐 시의 교육 분야의 의사결정에는 교육감, 교사 노조, 예일대 교수 등 교육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뉴헤이븐 시의 상류층은 그들의 자제를 사립학교에 보내기 때문에 공교육의 개혁과 관련한 의사결정에 참여하기 어렵다. 폐쇄하는 공립학교 부지를 예일대에 매각하고 그 자금으로 새로운 공립학교를 건립하는 사업에 대해 비판이 적지 않았으나, 학부모들이 새로운 공립학교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시장의 주도로 만들어진 위원회를 통해 교육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함으로서 그들의 반말을 무마할 수 있었다.

위의 세 영역의 어디에서도 일반 대중은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은 정당의 중간지도자들, 재개발 위원회의 대표들, 교육분야의 전문가들을 통해 반영되었다. 이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이유는 물론 자신의 이익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다수의 의견이 여과되어 반영된다. 만일 이들이 다수의 의견에 배치되는 의사결정을 한다면 다가오는 선거에서 패하고 직책을 잃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생업이 바쁘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정치활동에 참여할 자원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의견이 무시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중의 주권은 선거를 통해 실현된다. 다수의 시민들의 정치 참여도는 매우 낮지만 이들은 숫자가 많기 때문에 이들의 적은 참여라도 많이 모이면, 높은 수준의 정치 참여를 하는 소수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즉 다수의 의견은 소수의 의사결정에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정치 활동을 더 열심히 할까. 그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관련될 때 정치 활동에 참여하며, 교육, 소득, 직업 등 사회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사람들이 주로 정치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같은 사회경제적 수준에서도 일부 사람 다른 사람보다 정치 활동에 더 열심히 참여하는데, 이는 성격의 차이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기본적으로 힘든데(abrasive and exhausting), 일부 사람들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소질이 있으며, 이런 사람들이 정치 활동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그럴 심리적,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

저자는 다원주의 정치 이론이 실제 정치의 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3년 동안의 조사와 가용한 모든 자료를 동원하여, 주요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파헤친다. 구체적인 사례를 설명하기에 많은 사람이 등장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실제 정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한 드문 연구이다. 70년 전에 미국의 조그만 도시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여전히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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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30. 11:18

Jeffrey Winters. 2011. Oligarc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85 pages.

저자는 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부와 권력의 관계를 규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과거와 현재의 여러 사례를 통해 그의 이론을 검증한다. 권력의 궁극적 원천은 부(wealth)이며, 권력의 핵심은 부를 지키는 것이다. 소득과 재산 분포의 상위로 갈 수록 부의 집중도는 비약적으로 높아지는데, 전인구의 1%의 100분의 1도 안되는 소수의 부자들에게 자신의 부를 지키는 문제는 분포 상에서 그들 아래에 있는 일반 부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거대 부자들에게 부를 둘러싼 갈등은 잠재적 및 현재적 폭력을 수반한다. 부자는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는 자신들의 부를 지키는데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부와 권력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네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거부들 사이에 폭력적 투쟁이 지배하는 유형이다. 거부들에게 자신의 부에 가장 큰 위협은 다른 거부들이다. 이들은 사적인 폭력 수단을 보유하면서, 자신의 부를 지키고 다른 거부들의 부를 빼았는다. 이는 역사상 가장 흔히 존재하는 권력의 유형이다. 아프리카의 추장에서부터, 고대사회의 군벌, 중세시대의 영주, 미국의 애팔래치아 산간 지역의 파벌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사례를 찾을 수있다. 거부들은 자신의 부를 사용하여 폭력 수단을 고용한다.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통사람을 착취하는 데 폭력을 사용함은 물론, 다른 거부들의 위협을 물리치기위해 개인적으로 보유하는 폭력 수단은 필수이다. 돈이 없으면 자신을 위해 일하는 폭력 수단을 고용할 수없으며, 폭력이 없으면 생산자를 착취해 부를 축적할 수 없다. 부와, 폭력과, 권력은 등치의 관계이다.  

두번째 유형은 거부들이 집단적으로 권력을 공유하는 유형이다. 거부들은 각자 개인 소유의 폭력 수단을 보유하지만, 공동으로 정치에 직접 참여하면서 질서를 유지한다. 이탈리아의 마피아 사이에 결성된 협의체, 고대 아테네와 로마의 정부, 중세 이탈리아의 베니스와 시에나와 같은 도시 국가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유형에서는 공동 정부에 참여하는 특정한 거부가 위임된 권력의 정도를 넘어서 다른 거부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라설 위험성이 항시 존재한다. 이러한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하여 위임된 권력의 과다를 제한하는 다양한 장치를 만들어 놓고, 특정 거부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상호견제한다.  그럼에도 로마에서 시저가 공동 정부의 권력을 독점하여 황제가 되었다. 거부들 사이에 공동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협약이 깨어지면, 폭력적 투쟁의 유형으로 쉽게 회귀한다.

세번째 유형은 특정한 한명의 거부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나머지 거부들을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유형이다. 절대 권력자는 본인 자신이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국가 권력을 동원하여  거부들 사이에 갈등을 조정하고, 보통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착취를 관리한다. 거부들은 절대 권력자가 자신의 부를 보호해주는 대신에 부분적으로 개인 소유의 폭력 수단을 포기한다. 절대 권력자는 국가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늘리는 한편으로, 국가의 권력에 따른 이권을 다른 거부들에게 적절히 나누어주면서 개인적으로 그들의 충성을 관리한다. 외형적으로는 법에 의한 지배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부를 축적하는 영역에서는 법이 아니라 절대 권력자의 개인적 재량이 기본 원칙이다. 절대 권력자와의 친소관계 및 절대 권력자의 개인적 선호에 맞추어 모든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다. 보통사람들은 법에 의한 지배를 받으나, 거부들은 법의 범위 밖에 있다.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이 대표적인 예이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의 치하에서 절대권력을 중앙에 완전히 집중시켰으며, 일반 거부들은 절대권력자에 대항할 수있는 개인적 폭력 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권력자의 재량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반면 필리핀은 독재자 마르코스의 치하에서 일반 거부들이 개인적 폭력 수단을 부분적으로 소유하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위협하는 존재였다.

네번째 유형은 법에 의한 지배가 뿌리내린 입헌 민주주의 정치이다. 거부들은 법에 의해 부를 완전하게 보호받는 대신에 사적인 권력을 완전히 포기한다. 거부들은 다른 거부들로부터 자신의 부를 강압적으로 빼앗길 위험은 사라졌으나, 대신 일반 민중으로부터 부를 나누어 달라는 거센 요구나 국가로부터 고율의 세금을 통해 부를 빼앗길 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거부들은 자신의 부를 보호하는 일을 전적으로 하는 전문가를 많이 고용하여 법의 구멍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돈을 사용하여 정치인을 매수함으로서 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외곡시킨다. 미국의 세법이 매우 복잡하여 빠져나갈 구멍이 많은 이유는 바로 이들의 영향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의 거부들의 실효 세율은 일반 노동자의 세율보다 훨씬 낮으며, 근래에는 상속세를 완전히 폐기하였다.

민주주의는 보통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확대했지만, 부의 집중을 제어하지는 못했다. 거부들은 돈의 힘을 동원하여 민주주의 선거에서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후보의 범위와 정강을 제한함으로서 국민의 선택을 무력화시킨다. 분배의 평등을 요구하는 보통사람들의 시민 운동은 거부들이 돈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적으로 일하는 전문가나 정치인들에 필적할 수 없다. 일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한 활동을 소홀히 하면서 오랫동안 공동의 이념적 대의를 위해 발벗고 뛰기 힘들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시민의 정치 참여를 높이기는 했지만, 거부들의 부를 지키는 노력을 제한하는 데에는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싱가포르는 경제활동에 관한 한 법에 의한 지배를 확립했지만, 정치적 자유의 영역에서는 독재를 유지하는 특이한 예이다. 싱가포르의 부의 집중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심하며, 거부의 부는 법에 의해 잘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법에 의한 지배라는 원칙은 개인의 정치적 자유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적 참여가 부의 권력 독점과는 별개의 영역이라는 또 다른 증거이다. 

이 책은 새로운 권력 이론을 제시하는 학술서이다. 과거 엘리트 이론이 부의 소유에 관계 없이 소수에게 정치적 권력의 집중에 촛점을 맞추었는데, 그는 엘리트 이론은 권력의 원천의 중요성에 관해 소홀했다고 비판한다. 권력의 핵심은 부의 소유와 부를 지키는 것을 둘러싼 갈등이기 때문에, 이것을 간과한다면 정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부가 수반되지 않은 권력은 직위에서 벗어나는 순간 거품처럼 사라지므로, 부의 소유를 둘러싼 권력과는 관심이나 행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진정한 권력의 추동력은 물리적 부에 있다. 소득과 재산 분포 상위 0.01%에 속하는 사람들이 과거나 현재나 정치 권력의 핵심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나머지 99%의 사람들은 거부에게 착취되거나 혹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앞잡이에 불과하다. 

거부의 권력도 변화한다. 사회적, 경제적 위기로 거부의 부가 타격을 받으며, 세대를 거치면서 부의 부침이 있다. 거부의 구성과 권력이 변화한다는 것은 이러한 구조에 때때로 균열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위기가 지나고 나면 일부 거부들의 부는 소실되고 새로운 부가 축적되면서 기존의 거부 집단에 순환이 일어난다. 일반 사람들은 법을 지키지만 거부들은 법 위에 있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은 이들과 타협한다. 권력의 핵심을 물리적 부로 보는 그의 이론은 역사와 정치를 보는 신선한 아이디어이다. 거부의 부를 위협하는 위기를 단순히 외생변수로만 치부하고, 근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부정하는 물질결정론 materialism 이 반드시 옳은 것 같지는 않지만.

2021. 4. 21. 17:12

Daron Acemoglu and James Robinson. 2006. Economic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 Cambridge. 379 pages.

저자는 경제학자와 정치학자이다. 이 책은 어떤 경우에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어떤 경우에 민주주의로 이행하지 않는지, 어떤 경우에 민주주의가 공고해지는지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다. 전반은 저자가 제시하는 이론에 관해 개념적으로 설명을 하고, 중반 이후는 수리모델을 적용해서 이 이론을 검증한다. 

정치는 집단간에 경제적 이익이 충돌하는 장으로서, 부를 가진 소수의 엘리트 집단과 가난한 다수의 대중들 간의 투쟁이 정치과정의 핵심이다. 비민주적 정치체제는 엘리트의 부를 지키는 데 기여하며 다수의 대중에게 돌아가는 부의 몫은 적은 반면, 반대로 민주적 정치체제는 다수의 대중에게 부가 재분배되는 정책을 구사하므로 엘리트의 이익에 반하나 대중에게는 이익이 된다.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들어서면 재분배 정책을 채택하기 때문에 소득의 불평등 수준은 완화된다. 엘리트가 대중의 위협이 없는 데도 자발적으로 참정권을 확대하여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대중사이에 밀고 당기는 관계로부터 민주주의가 출현하는데, 저자는 이를 게임 이론을 적용하여 이론화한다. 다수의 대중으로부터의 참정권 요구, 부를 나누라는 요구가 커지면 엘리트들은 이러한 요구를 물리적으로 억압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 요구에 굴복하여 참정권을 확대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밑으로부터의 요구가 매우 큰 데, 엘리트들이 무리하게 힘으로 억압한다면 혁명이 일어나게 되며, 이 경우 엘리트들은 밑으로부터의 요구에 타협하는 결정을 한 경우보다 더 큰 피해를 입는다. 밑으로부터의 요구에 대해 엘리트들은 일시적으로 당근책을 제시하지만, 민중은 일시적 당근을 넘어서 미래에도 자신들에게 계속 유리하게 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장받기 위해 의사결정 제도를 민주주의로 바꾸려고 한다. 민주주의 제도는 대중이 엘리트로부터 미래의 분배를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저자는 민주주의로 이행하거나, 혹은 이행하지 않는 유형을 네가지로 단순화한다. 첫째는 영국의 모델이다. 영국은 17세기에 명예혁명을 통해 귀족과 지주로 구성된 의회가 왕권을 견제하는데서부터 시작해, 19세기에 들어 수 차례의 정치 개혁으로 참정권을 점차 확대하여, 1870년대에는 남성 모두에게 참정권이 부여되는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엘리트가 참정권 확대를 양보하는 이유는, 밑으로부터의 요구가 거셀 때 이를 물리적으로 억압하여 초래하는 혼란의 비용이, 참정권을 확대하여 민중의 요구에 타협하는 비용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영국은 상공인 계층이 확대되면서 과거에 엘리트가 토지에만 의존하던 때보다 물리적 억압의 비용이 더 들게 된 반면, 참정권을 확대한다고 해도 민주주의 정권의 재분배 정책으로 인해 엘리트가 떠앉아야 하는 비용이 적어지게 되었다. 엘리트가 토지에만 부를 의존하면, 대중을 물리적으로 억압하면서 초래하는 혼란의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다. 반면, 상공업이 확대되어 엘리트의 부가 무역, 상공업, 인적자본에 의존하는 비중이 커지면, 대중의 억압이 초래하는 물리적 혼란의 비용이 매우 크다. 엘리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무역과 상공업의 비중이 클 경우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선다고 해도 부의 재분배 조치로 인한 희생은 엘리트가 토지에만 의존하던 때보다 훨씬 적다. 상공업의 부는 토지의 부보다 해외로 부를 이전하거나 조세를 회피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의 엘리트들은 민주주의로 양보하는 것을 쉽게 허락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민중의 요구가 특히 19세기에 거세졌을까? 이는 18세기의 계몽주의 운동, 프랑스 혁명, 미국 혁명 등으로 민중의 정치 의식이 높아졌으며, 산업화, 도시화로 민중의 조직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반면 농업이 주인 경제에서는 민중이 농촌에 흩어져 있어 조직화하기 어렵기에 밑으로부터의 요구가 약할 수 밖에 없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산업화, 도시화가 본격화된 19세기 후반에 들어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선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중간계층의 존재는 다수의 민중과 소수의 엘리트 사이에서 양쪽의 요구를 절충하는 선택을 용이하게 한다. 따라서 중간계층이 성장하면 민주주의가 탄생하고 공고화되기 유리한 조건이 조성된다. 엘리트들은 밑으로부터의 요구에 대해, 먼저 중간계층을 포섭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약화시킨다. 다음 단계에서 밑으로부터의 요구가 다시 높아지면 참정권을 조금 더 허용하면서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경로를 밟는다.

영국은 민주주의제도가 도입된 이후, 지속적으로 민주주의 제도가 공고해지는 과정을 밟았다. 엘리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민주주의의 틀을 조작하여 계속 유지하면서 민중의 재분배 요구에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판을 뒤집어 업는 것보다 엘리트들이 부담해야 하는 피해가 덜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두번째 유형은 중남미 모델이다. 이 모델은 일단 형식적 민주주의가 들어서기는 하나,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지 못한다. 아르헨티나 등은 19세기 초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독재의 길을 걸어 오다가 19세기 중후반부터 형식적 민주주의를 만들기는 했으나, 쿠데타로 엎어지고, 다시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1980년대말까지 반복해왔다. 대농장 소유에 의존하는 중남미의 엘리트들은 대중의 분배 압력에 못이겨 형식적으로 민주주의를 허용했다가, 이러한 민주 정부의 혼란으로 쿠데타가 발생하여 군부가 집권하면, 민주정부때 도입했던 재분배 정책이 취소되면서 엘리트의 이익에 우호적인 환경이 만들어지고, 이어서 다시 민주주의의 압력이 높아지는 악순환을 거듭하였다. 중남미는 부의 불평등 수준이 높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 재분배 정책을 추진하면 엘리트들이 감당해야 하는 희생이 매우 크다. 부의 불평등 수준이 높아 밑으로부터의 압력이 혁명으로 비화될 위험도 크기 때문에, 엘리트들은 형식적 민주주의에 동의하기는 하나,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것에는 한사코 소극적이다. 민주주의 정부가 혼란에 빠져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 엘리트들은 쉽게 이들을 지지하는 편에 서게 된다.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계기, 및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계기는 모두 경제적 위기 상태에 빠질 때 발생한다. 외부적 요인 등으로 경제가 어려움을 격게 되면 밑으로부터의 요구가 거세져서 엘리트가 양보하는 사태로 발전한다. 일단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섰어도 경제적 혼란에 처할 경우 이 정부는 군부 쿠데타에 쉽게 허물어진다.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는 민중의 분배와 정의의 요구보다는 질서와 경제 안정을 우선시 하기에, 이들은 엘리트와 쉽게 결탁하며 기득권 집단에 유리한 정책으로 선회한다.

세번째 모델은 국민들이 참정권 확대를 강하게 요구하지 않는 비민주주의 체제로 싱가포르가 이에 해당한다. 싱가포르는 부의 분배가 상대적으로 평등하며 정부가 능력에 따라 움직이도록 투명하게 개방되어 있다. 국민은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데에서는 배제되어 있지만, 현재의 부의 분배와 삶의 수준에 어느 정도 만족하므로 엘리트의 독점적 권력에 반대하지 않는다.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강하게 요구함으로서 엘리트와 충돌하여 피해가 발생하면서까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의 보상이 크지 않다고 판단하기에 현상황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소득과 교육 수준이 높으므로 언제라도 민주주의 요구가 커질 수 있고, 엘리트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주의 체제로 양보하는 것의 희생 역시 크지 않으므로, 장기적으로 볼 때 싱가포르에는 국민의 참여가 확대되는 민주주의가 들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네번째 모델은 민주주의로 이행할 가능성이 차단된 경우로, 인종차별이 철폐되기 이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이에 해당한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백인과 유색인사이에 부와 이념의 격차가 매우 크므로, 백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색인의 요구를 억압하려 하였다. 유색인들의 참정권 요구는 백인의 노골적인 폭력에 부딛쳐 좌절되었다. 북미 대륙에서는 인디안 원주민들이 질병과 살육으로 오래전에 제거된 반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흑인 원주민들이 제거되지 않고 백인 지배자의 착취 대상으로 복속되어 20세기까지도 이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에 남아프리카에서도 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20세기 중반 이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제가 다원화되고, 국제적 압력이 높아지면서, 백인 권위주의 정권에 가해지는 내외의 압력은 점차 높아졌다. 경제 다원화에 따라 흑인들의 소득이 점차 상승하면서 백인과 흑인간에 불평등의 정도도 완화되었다. 1980년대 이래 백인들은 흑인들에 대한 억압의 고삐를 점차 늦추면서 흑인들과의 공생관계를 모색하였다. 넬슨 만델라라는 흑인 지도자가 백인들에게 보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백인과 권력을 분점하는 방안을 제도화하면서, 마침내 1990년대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중간층이 얇으며 소득 격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기 어려운 취약한 상태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있다. 이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다. 전반적으로 민중들의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아진 것, 세계화가 확대되면서 민주주의 정권의 재분배 정책으로 인한 엘리트의 희생이 감소한 것, 국제적 압력의 확대와 전염효과 등을 들 수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지 못하던 아르헨티나, 칠레, 콜럼비아 등에서도 앞으로 민주주의가 공고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경제의 다변화, 대중의 소득과 교육 수준 상승 등의 요인이 중남미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요인이다.

배링턴 무어가 "민주주의와 독재의 사회적 기원"이라는 책에서 민주주의의 이행을 사회계급 사이의 구조적 관계로 설명함에 비해, 이 책의 저자는 "민주주의와 독재의 경제적 기원"이라는 유사한 책 제목을 달고 경제적 이해의 갈등 관계로 민주주의의 이행 여부를 설명한다. 두개의 논의는 모두 경제결정론이라는 유사점이 있다. 무어는 사회학자답게 보다 사회구조적인 배경에 설명의 촛점을 맞추는 반면, 이 책은 경제적 결정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정치학의 행위자 모델을 접목하는 설명을 한다. 경제 이외의 요인, 예컨대 인종이나 민족 등에 따른 정치적 갈등도 깊이 들여다 보면 경제적 이익의 분배와 관련된 것이므로 경제결정론적인 설명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정치를 철저하게 경제적 이익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의 장으로 보는 접근 역시 독특하다. 모든 정치과정은 경제적 이익을 둘러싸고 전개된다는 시각이다. 

이 책은 저자들이 제시하는 이론에 대해 개념적 설명을 하는 부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수리 모델을 제시하는 중반 이후부터는 이해하기 어렵다. 저자들의 다른 책이 그렇듯이 통찰력이 크며 감탄할만하다. 수리모델이 얼마나 타당하고 유용한지는 까막눈인 필자로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명쾌하다.

2021. 4. 16. 18:02

Ronald Inglehart. 2018. Cultural Evolution: People's motivations are changing, and reshaping the world. Cambridge. 216 pages. 

저자는 정치학자로 "세계가치관조사" World Value Survey 의 주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저자의 가치관 변화 이론을 조사 자료를 이용하여 검증한 그간의 연구 결과들을 요약하여 제시한다. 저자는 근대화이론 modernization theory 를 약간 변형하여,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사회의 가치관이 물질주의 materialistic values 에서 비물질주의 non-materialistic values 로 바뀐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그의 주장을 한단계 더 발전시켜 생존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 survival values 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가치관 Expression values 로 바뀐다고 주장한다.

물질적인 생존이 위협을 받는 단계에서 사람들은 권위주의적 지도자를 추종하며, 집단주의 collectivism 가치관을 지지하며, 외부인을 배격하며,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으며, 종교를 중시하며, 위계적 질서와 전통을 옹호한다. 그러나 물질적 결핍으로부터 해방되어 물질적 안정을 당연시하는 단계에 이르면 사람들의 삶의 우선순위는 바뀐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고, 자유를 중시하며, 개인주의 individualism 가치관을 지지하며, 자율성을 중시하며, 다양성을 허용하며, 세속적 합리적 가치관을 가지며, 외부에 대해 개방적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생물학적 진화와 유사하게,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자신을 표현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삶과 사회발전에 더 유리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서구 사회가 20세기 후반 지식중심의 경제 knowldege economy 로 이전하면서, 자유, 자율성,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람이 획일적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보다 생산성이 더 높아진다.

가치관의 변화는 세대의 이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장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가치관이 이후 일생동안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기에 물질적 결핍을 겪은 사람은 생존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을 일생 유지하게 되는 반면, 성장기에 물질적 안정을 당연시하며 자라난 세대는 자신의 표현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일생 유지한다. 서구 사회에서 2차대전 이전에 성장기를 겪은 세대는 생존을 중심으로 한 가치관을 가진 반면, 전후의 풍요 시기에 성장한 세대는 자신의 표현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가진다. 이들이 바로 1960년대의 반문화운동, 베트남전 반대 운동, 여성운동, 동성애 인정을 가져온 세대이다. 

개별 사회 내에서 볼 때는 종교적인 사람이 덜 종교적인 사람보다 삶의 질이 높지만, 사회전체를 단위로 보면 종교를 중시하는 사회는 세속적인 사회보다 구성원들의 삶의 질이 높지 않다. 서구 산업사회는 모두 세속주의 secularism가 확대되어 왔는데, 이러한 추세 예외라고 하던 미국 조차도 근래에 종교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있다.

개인주의가 강하고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게 되면 여성의 지위는 향상된다. 물질적 생존이 위협을 받을 때에는 권위주의적 남성 우위의 가치관이 지배하지만, 물질적 위협으로 부터 벗어나면 여성의 지위, 성적 자유, 성적 다양성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한다.

물질적 위협으로 부터 벗어나면 집단에 대한 충성도는 약화된다. 이는 자신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전장에 나가겠다는 의지의 약화로 나타난다. 즉 물질적 위협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의 의식은 평화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한다.

경제발전이 왜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저자는 경제발전이 사람들의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것이 민주주의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이라는 인과관계를 제시한다. 사람들이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면, 자신을 표현하고 자유를 중시하는 가치관이 지배하게 되고, 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시키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의 의식에서 민주적 욕구, 즉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기를 원하는 욕구가 높아지면, 사회적 동원으로 이어지며, 이는 민주적 제도의 발전을 낳는다. 사람들의 민주적 욕구의 정도와 민주적 제도화의 정도가 불일치 할 경우 정치가 불안정해진다. 만일 사람들의 민주적 욕구가 높지 않다면, 아무리 외부로부터 민주적 제도를 도입하여도 이것이 정착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가 이라크이다. 중국을 민주화하려면 결국 그들의 경제발전을 도와서 중국인들이 자신의 표현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 변화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답이다. 중국은 아직도 일인당 소득이 낮아 사람들이 생존의 위협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권위주의 가치관과 권위주의 정치가 지배하고 있다.

경제가 발전하여 소득이 높아지면 사람들의 행복도도 높아진다. 소득이 낮은 수준에서는, 소득이 증가하면서 행복도가 높아지는 속도도 높다. 그러나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소득의 증가가 행복도의 증가에 미치는 영향은 약화된다. 그럼에도 소득의 증가가 행복도의 증가를 이끈다는 명제는 어느 소득 수준에서나 항시 옳다. 행복도는 시대나 사회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거나, 행복도는 소득과 무관한 것이라는 기존의 주장은 경험적으로 그릇되다.

1990년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동구권 사람의 주관적 삶의 질은 현저히 하락하였다. 이는 경제적인 후퇴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 못지 않게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공산주의 이념이 몰락하면서 삶의 의지처를 잃은 때문이다. 그 결과 동구권은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종교의 영향이 높아졌다. 종교가 공산주의의 빈자리를 메운 것이다.

근래에 서구 산업국의 노동계층 사람들은 소득이 정체하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물질적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생존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높아졌다. 그 결과 이들은 권위주의와 인종주의를 옹호하며, 대중영합주의 정치인에 지지를 보낸다. 이민자가 20세기 후반 이래 급격히 증가하면서 자신의 삶의 방식이 위협을 당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화적 가치에 따라 투표하는 성향이 높아졌다. 종교와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는 노동계층의 투표 성향은 계급적 이익과는 별개의 독립 차원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서비스 노동자가 늘어나고, 인공지능의 확대로 사무직 노동자의 지위까지 위협받고, 승자독식 winner-takes-all 체제가 뚜렷해지면서, 생존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확대되며, 민주주의가 후퇴할 위험이 크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1930년대에 대공황시대에 뉴딜정책과 유사하게,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분배를 바로잡는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 

저자는 근대화이론의 옹호자로 이 책에서 그의 일생의 연구결과를 집약한다. 그의 주장은 비교적 분명하며, 데이타 분석 결과를 통해 그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 책의 초반은 자신의 이론을 잘 정리하여 읽을만 하다. 그러나 이책의 중반 이후는 그가 과거에 쓴 논문을 짜깁기하여 덧붙이기 때문에 중복이 많으며 읽기에 지루하다. 여하간 한 학자의 일생의 연구를 요약하여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2021. 2. 24. 17:58

Benjamin Friedman. 2005. The Moral Consequences of economic growth. Vintage books. 436 pages.

저자는 경제학자이며, 이 책은 경제성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18세기 이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역사 전개를 사례로 하여 설명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사회가 개방적이고, 이민자와 다양성을 포용하고, 사회이동이 높으며, 공정성과 민주주의가 향상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반면, 경제가 침체 혹은 후퇴하면 사회적으로 리버럴한 가치로부터 멀어진다. 절대적인 경제 수준보다는 경제가 성장하는가 여부가 사회적으로 리버럴한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인이다. 즉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라도 경제가 성장하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관찰되는 반면, 아무리 소득이 높은 나라라도 경제가 침체하거나 후퇴하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먼저 자신의 과거의 상황과 비교하며, 그 다음으로 주변의 다른 사람의 상황과 비교한다. 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하면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여 자신의 현재가 나을 가능성이 크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상황도 조만간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비록 자신의 상황의 개선 속도가 주변 사람의 개선속도보다 느리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과거와 비교해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 상황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게 되면, 사회적으로 개방성과 포용성이 높아지며, 사회이동의 가능성이 높아지며, 공정성과 민주주의도 향상되게 된다(movements toward openess, tolerance, mobility, fairness, democracy). 반면 경제가 침체하면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리버럴한 가치에 대해 등을 돌린다.

미국이 1960년대에 민권운동으로 흑인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고, 이후 여성운동으로 여성의 지위가 크게 향상된데에는 이차대전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꾸준한 경제성장이 배경 요인이다. 1970년대 중반이래 경제가 어려워지고, 1980년대 구조조정의 기간에 노동자의 소득이 정체되고 일자리가 불안정해지면서, 흑인의 지위 향상은 중단되었으며, 이민을 통제하는 조치가 등장하고, 대중영합주의 정치가 득세하게 되었다. 1870년대에 큰 불황을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농민을 중심으로 대중영합주의가 세력을 얻고 인종차별이 심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세기 말에 미국 사회의 전반적 개혁을 추진한 진보주의 progressivism 사회운동이 발흥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볼 때 19세기의 경제성장과 중류층의 부상 덕분이다.

영국은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이래 19세기 전기간 동안 경제가 꾸준히 팽창하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1880년대 이래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했으며, 투표권을 꾸준히 확대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930년대의 대공황 기간 동안 배타적인 민족주의 세력이 활개를 쳤으며, 독일은 1차대전 이후의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배경으로 나찌의 파시즘이 득세하였다.

근래에 선진국에서 경제가 침체하면서 사회적 불만이 높아지고 정치가 불안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자식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면, 사람들이 리버럴한 가치에 등을 돌리게 된다. 약자에게 권리와 혜택을 나누어주는 것에 인색해지며,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데 더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 책은 지난 200년 동안의 서구의 경제 사회의 변화를 주마간산으로 훑으면서 사회과학에서 논의하는 주요 주제들을 거의다 건드린다. 저자는 소득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정치 사회적 안정을 위해서  꾸준한 경제성장이 필수라고 주장한다. 경제성장과 사회적 리버럴리즘 사이에 인과적 관계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전반적으로 당연한듯 보이지만, 엄밀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예외를 많이 발견한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시대에 뉴딜 정책을 통해 리버럴한 정책이 많이 도입된 것이 대표적인 예외이다. 이는 사회 현상이 하나의 법칙으로 포괄할 수 없이 복잡하다는 의미이거나, 혹은 저자의 명제가 맞지 않다는 의미일 수 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같은 이야기를 여러번 반복하고, 문장이 장황하여 읽기 쉽지 않았다.

2021. 2. 4. 10:24

Roburt Kuttner. 2018. Can Democracy survive global capitalism. W.W.Norton. 309 pages.

저자는 American Prospect 라는 진보적 시사 잡지의 창간인으로, 이 책은 세계화, 특히 세계 자본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대중영합주의 정치가 출현한 근래의 경향을 분석한다. 왜 그러한 흐름이 전개되는지, 그러한 현상을 막으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등을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진단한다.

미국은 1930년 대공황시기에 뉴딜정책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탈피하고 민주주의를 지킨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제2차 대전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고, 모든 계층의 소득이 향상되고, 사회보장과 복지제도가 확대되고, 소득불평등이 감소하였다. 서구 유럽 역시 전후의 폐허를 딛고 부흥하면서 복지국가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자본가, 특히 금융자본의 세력은 억제되었으며, 브레튼 우즈 국제금융체제 덕분에 국제금융시장은 안정되고, 노동조합 가입율이 높게 유지되고, 완전고용의 목표가 실현되었다.

1973년에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미국이 금본위체제를 포기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지고, 미국의 무역 적자와 재정적자가 확대되고, 경제불황이 심각해지면서 1980년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이 들어섰다. 레이건 대통령은 시장 위주의 신보수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다. 규제를 풀고,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복지를 축소하고, 세금을 감면하면서 자본가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자본가, 특히 금융자본은 다양한 금융상품을 개발하여 위험이 높은 투자를 하면서 큰 돈을 벌었으나, 결국 고위험의 금융 행태는 실물경제와 어긋나게 되어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하였다. 국민의 세금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위험한 행위로 큰 돈을 번 자본가는 책임을 지지 않고 여전히 고위험의 금융 행태를 계속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신보수주의 정책으로 어려움에 빠졌다. 시장의 힘은 강화된 반면 노동자의 조직력은 약화되면서 자본가에 대비해 노동자의 협상력은 크게 떨어졌다. 생산성 증가분을 자본가가 가져간 반면, 노동자의 임금은 정체되었다. 국제분업체제가 확대되면서 미국의 공장은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였고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과거에 좋은 제조업 일자리는 사라지고 노동조건은 악화되었다. 기술수준이 낮은 노동자에게는 불안정하며 낮은 임금의 서비스직 일자리만 남게되었다.

세계화로 국가와 지역들 사이에 자본을 유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세금은 낮아지고, 노동자의 힘은 약해지고, 반면 국제 자본의 힘은 강해졌다. 재정이 악화되면서 유럽에서도 과거에 후했던 복지제도는 후퇴했다. 전세계적으로 진보주의 세력은 약해진 반면, 보수주의 세력은 강해졌다.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여 기존의 제도권 정치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대가 높아졌고, 대중영합주의 정치인이 호응을 얻게 되었다.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주의 정치인은 노동자의 불만에 감정적으로 부응하였지만, 실제 정책에서는 노동자보다는 자본가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를 부정하고, 폭력을 옹호하고, 반대를 허용하지 않는 파시즘의 정치인이었다. 노동자의 불만을 계속 방치한다면, 결국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권위주의적 정치가 득세할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저자는 각 국가가 주권을 행사하여 세계 자본의 힘을 제한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제도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경제 변화에 잘 적응하도록 적극적인 노동정책을 펴고, 연금, 의료보험 등의 사회보장의 내실을 높여 노동자의 삶이 안정화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국제 자본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정부에 세금을 감면하도록 압박하고, 노동자 보호에 제한을 가하도록 하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선진국이 함께 협력하여 국제자본의 힘을 제한할 때 이것이 실현될 수있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모두 자본가에 포획되어 있으므로, 기존 노선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개혁이 가능하지 않다. 국민의 불만이 쌓이고 쌓여 진보주의 정치인이 출현하고, 그가 국민의 적극적 지지를 등에 업고 자본가의 세력을 제한하고 노동자 보호 제도를 확충하는 과감한 개혁을 하여야 한다.

저자의 20세기 미국과 유럽의 정치경제의 전개에 대한 서술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선진국의 진보적 지식인의 주장이 그렇듯, 그것은 대체로 선진국의 입장만을 반영한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1970년대 이래의 세계화로 선진국 자본의 힘이 강화되고 기술수준이 낮은 노동자의 힘이 약화된 것은 맞지만, 이 기간 동안 개발도상국의 빈곤이 크게 개선되고 많은 사람의 소득이 상승하였다. 세계화로 선진국 자본이 거둔 이익보다 개발도상국에 일반 사람들의 소득의 증가분이 훨씬 더 크다.  즉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1970년대 이래 세계 정치경제의 전개는 매우 긍정적이다.

정치는 각 나라 내에서 벌어지는 것이므로, 노동자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 자본가의 경제 행위가 제한되지 않는다면, 정치적 혼란이 경제를 망쳐버릴 것이라고 한다. 선진국 경제에 혼란이 발생하면 개발도상국의 경제에도 어려움이 전파될 것이다. 결국 세계화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저자의 진보적 정책제안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전반적인 진단과 방향 제시는 맞는 말이다.

2021. 1. 27. 17:28

Steven Levitsky and Daniel Ziblatt. 2018. How Democracies die. Crown. 231 pages.

저자는 남미 정치와 유럽 정치를 전공한 정치학자들로, 이 책은 미국에서 도날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과정을 남미와 유럽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원활히 작동하는 것은, 민주주의 헌법과 같은 형식적 제도의 힘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상대를 합당한 경쟁자로서 인정하며 반대 행위를 인내하고 상대와 타협하는 비공식적 규범의 힘이라고 한다(tolerance and forbearance).

미국의 정치는 1970년대 중반이래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양극화가 심해졌다. 지난 수십년동안 공화당 정치인은 상대를 합당한 경쟁자가 아니라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무너뜨려야 하는 적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전통으로 내려오던 정치적 신사도를 저버리고 법이 허용하는 한 최고의 극단적 방법을 쓰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도날드 트럼프는 그러한 근래의 흐름에서 출현한 극단적인 정치인이다.

왜 근래에 미국의 정치가 그렇게 양극화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1960년대 이래 미국의 정치지형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1960년대 민권운동 이전에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우호적인 경쟁자로여기며 정치를 했다. 이는 1870년대에 남북전쟁 이후 남부와 북부가 정치의 장에서 흑인을 완전히 배제하고서 만들어진 우호적 관계이다. 문제는 민권운동으로 흑인이 미국의 정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서 발생했다.

1980년대 이래 민주당은 유색인과 세속적 세계관쪽으로, 공화당은 백인과 기독교 쪽으로 동질성이 높아졌다. 공화당의 지지기반인 백인 민족주의자 White Christian nationalists 들은 1960년대의 민권운동과 이민법 개혁이래 흑인과 유색인 이민자가 점차 늘면서, 과거 미국의 주류로서 압도적 다수의 지위가 무너지는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다수 집단의 지위가 도전을 받을 때 이들은 상대에게 매우 공격적이 되는데, 공화당이 1979년의 뉴트 깅그리치 출현 이후에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무너뜨리고 제압하려는 전술을 구사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바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백인 민족주의자들은 오바바를 미국에 충성하지 않는 진짜 미국인이 아닌 un-American 사람으로 매도하였으며,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오바마 정부의 일을 모두 반대하여 좌절시키는데 총력을 다하였다. 이런 극단적인 전술이 횡횡하면서 정치가 파행을 보이자, 기존의 정치계를 깡그리 부정하고 국민의 감정에 호소하는 대중영합주의적 외부자 populist outsider 인 도날드 트럼프가 기회를 잡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뒤 미국이 오랫동안에 걸쳐 만들어 놓은 민주적 전통과 관행을 무시하고 극단주의와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정치를 펼친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권위주의로 이행하는 몇가지 징표가 있다. 첫째는 정치인이 민주적 게임의 규칙을 부정하며, 둘째는 정치적 상대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셋째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폭력을 허용하거나 장려하며, 넷째는 언론과 정치적 경쟁자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한하려 한다. 트럼프는 이러한 네가지 징조를 모두 보였다. 트럼프는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다고 하며 선거의 정당성을 훼손하려 하였다. 트럼프의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범죄자로 매도하고 잡아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지지자들의 폭력적 행동을 지지하거나 용인하였으며, 세계의 독재자들의 인권 탄압을 옹호하였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공격하였으며, 정치적 상대를 제거하려 하고 탄압하였다. 

근래에 미국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정치적 다툼과 민주주의의 퇴행은 과거 중남미나 유럽에서 익히 보던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페루의 후지모리, 베네쥬엘라의 차베스, 터키의 에르도안, 헝가리의 오르반, 러시아의 푸틴,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중 일부는 처음부터 권위적 통치자로 등장하지 않았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상대가 갖은 수단을 써서 이들의 통치를 반대하고 이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들도 이러한 반대에 극단적 수단으로 맞받아쳐 권위적 통치로 흐르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과정을 설명하자면, 첫째, 정치적 심판관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경찰, 검찰, 정보부, 세무서와 같은 법집행 기관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고, 사법부를 무력하게 하고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며, 입법부를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버린다. 둘째, 주요 경쟁자를 배제시킨다. 자신에게 반대하며 굴복하지 않는 야당 정치인, 언론인, 기업가는 자신의 충견을 동원하여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셋째, 자신이 절대권을 행사도록 규칙을 바꾸어 버린다. 헌법을 바꾸고, 사법부와 입법부를 구성하는 법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꾼다. 

미국이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양극화를 초래한 주체가 공화당에 있으므로 공화당이 바뀌어야 한다. 백인 민족주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공화당의 지지 기반에서 탈피하여 유색인과 이민자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화당의 강력한 지지층인 백인 노동계층은 1970년대 후반이래 경제변화로 삶이 어려워졌는데, 이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소득 불평등을 줄이고, 적극적 노동정책과 보편적 복지정책을 통해 백인 노동계층의 삶의 위협이 줄어들면 그들의 극단주의적 태도도 완화될 것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민주주의 헌법을 가진 나라로 자부심이 크지만, 미국은 결코 예외적이지 않다. 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될만큼 건강하게 진행된 것도 아니다. 미국은 건국이래 근래까지 흑인을 배제하였기에 백인 정치인들 사이에서 화합이 유지되었으나, 아직까지 흑인과 이민자를 대등한 구성원으로 포용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세계의 다른 다민족 국가에서도 구성원이 잘 화합하는 민주주의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독재 시대에 정치인들의 행태가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상대가 극단주의적 책략을 구사한다고 하여 이에 맞받아쳐 극단주의적 전략으로 나아가면 결국 파국에 이를 뿐이라고 경고한다. 정치 지도자들이 이러한 위험을 예감하고 타협의 노력을 펼쳐 성공한 사례로 칠레를 든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극단적 책략이 먹힌 사례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과 독일의 나찌를 든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기초체력이 약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다. 비교 정치학의 폭넓은 지식을 배경으로 현재 미국의 정치 지형을 잘 분석한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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