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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5. 8. 17:07

Dan Ariely. 2009. Predictably Irrational: The Hidden Forces that shape our decisions. Harper Perennial. 322.

저자는 행동경제학자이며, 이 책은 그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사람들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다양한 패턴을 설명한다. 15개의 찹터마다,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상이한 이유와 배경을 관련 실험과 함께 소개한다.

경제학은 인간은 비용과 수익을 계산해서 행동하는 합리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은 경우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곤 하는 데, 그러한 비합리성은 무작위적으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이러한 비합리성은 우리의 사고방식에 내재된 오류에 기인하기 때문에, 그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점을 증명해도 자신의 의지로 고칠 수 없다. 그러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 환경, 맥락을 바꿈으로서 사람들을 올바른 행동으로 인도할 수 있다. 행동경제학에서 언급하는 '은연중에 권하는 장치, nudge" 가 바로 그러한 개입이다. 이 책에서는 많은 다양한 비합리적 행동 양식이 소개되는데, 다음에서 그중 몇개를 예시한다.

사람들은 비교를 통해서만 대상에 대해 사고를 하며, 비교가 제시되었을 때가 그러지 않은 경우보다 그것에 더 끌리는 성향이 있다. 비교의 대상이 제시되기 전에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의 편향성은 마케팅에서 흔히 이용된다. 예컨대 이코노미스트 잡지 구독을 권하기 위해, 잡지 구독과 온라인 접속권을 함께 묶은 상품을, 단순 잡지 구독 상품과 비교 제시함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잡지 구독과 온라인 접속권을 함께 묶은 상품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전략이다. 

화폐로 가치가 매겨진 서비스와 무료로 제시하는 서비스는 다른 인식의 영역에 있다. 전자는 '시장' market 의 인식 모드를 가동시키므로 사람들은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반면 무료로 제시하는 서비스는 '사회적 규범' social norms 의 인식모드를 가동시키으므로, 공동체 전체의 복리를 고려하며 일대일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두 영역은 동시에 섞여서 취급될 수 없다. 예컨대 회사가 종업원들에게 헌신을 요구하면서, 회사에 미치는 손익을 깐깐히 계산적으로 접근하면서 보상한다면, 종업원들은 '헌신' 이라는 사회적 규범의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반면,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것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한다. 이는 물건뿐만 아니라 더 넓게 적용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이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 높이 평가하는 반면, 상대의 입장이나 상대의 생각을 자신의 것보다 낮게 본다.

사람들은 기회가 허용되면 사소한 정도로 자신의 이익을 높이기 위해 부정직한 행동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 대단한 부정은 기회가 허용되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돈이 개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소한 부정직을 저지른다. 예컨대 직장에서 문방용품을 집으로 가져온다거나, 대학교 기숙사의 공용 냉장고에서 남의 음식을 쓸쩍 집어먹는 행위 같은 것. 또한 돈이 직접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개입된 경우, 사람들은 양심에 꺼리끼는 행동도 손쉽게 한다. 예컨대 회계를 약간 조작한다거나, 스톡옵션의 발동 시기를 과거로 한다거나, 등등.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어리석은 행동을 랜덤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비합리적 행동 유형과 그 배경의 인식구조를 이해한다면, 이러한 비합리성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환경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점에 행동경제학의 실용적 묘미가 있다.

이 책은 행동경제학에서 흔히 언급되는 많은 아이디어의 보고이다. 특히 각각의 행동 오류에 대해 실험을 기획하고 실행한 이야기가 독창적이고 유머 넘친다. 저자의 이야기 솜씨가 정말 대단하다.

 

2025. 4. 13. 16:27

Tony Judt. 2005. 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 Vintage Books. 831 pages.

저자는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이차대전 종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유럽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서술한다. 크게 네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의 핵심 이슈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1945~53 기간은 전쟁후에 혼란을 딛고 새로운 질서를 되찾는 시기이며, 1953~71 기간은 서유럽은 경제적 번영, 동유럽은 정체의 시기이며, 1971~1989 기간은 서유럽은 경제적 후퇴로 어려움을 겪고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 정권의 균열이 확대되는 시기이며, 1989~2005 기간은 공산권의 몰락 이후 유럽 통합 심화와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의 시기로 서술한다. 국내 및 국제 정치 이슈를 중심으로 서술하며, 사회, 경제, 문화적 측면은 피상적으로 훓는다.

유럽은 20세기어 두차례에 걸쳐 대륙 전체가 참여한 전면전을 치루며 1945년 전쟁이 끝났을 때, 물질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피폐하고 탈진하였다. 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소련을 축으로 하는 공산주의 경제/권위주의 정치체제는 근본적으로 사이좋게 공존하기 어렵다. 2차대전 동안 히틀러의 파시즘 정권의 위협에 대항해 임시로 손을 잡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소련은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유럽의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소련에 인접한 동유럽 국가들을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는 조치를 신속히 전개했다. 이러한 소련의 행동에 미국은 경악하였으며,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서유럽은 물론 세계 다른 지역에 확장되지 않도록 하는 반공 억제전략 containment policy 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은 전후 유럽의 경제적 피폐와 소련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마샬플랜과 베를린 봉쇄에 공수로 맞서는 정책이 그것이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부의 강대국에 의해 유럽 대륙은 둘로 갈라져 냉전체제에 수동적으로 편입되었다.

서유럽은 전쟁으로 탈진한 상황에서, 그들이 전세계에 소유한 식민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 전후 서유럽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나라들은, 미국과 소련사이에서 어느 편에도 줄서지 않는 '제삼세계' 세력을 형성하였다. 유럽은 지금까지 세계사에서 누리던 세계의 제국 중심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며,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수동적으로 질서를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서유럽은 미국의 방위 우산 하에서 경제발전에 매진하였으며, 다시는 본격적인 전면전을 벌이지 못하리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전쟁 동안 히틀러가 유럽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므로, 히틀러가 패하였을 때, 유럽의 각 나라는 자국에서 히틀러의 지배에 협력한 사람들과 침략자 독일을 응징한다는 명분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벌하고 자신의 영토로부터 몰아내는 작업을 하였다. 그결과 전후 유럽 대륙은, 전쟁 이전에 각 지역에 살던 소수 민족은 사라지고 각 국가마다 하나의 다수 민족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형태로 변화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유럽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중화학공업 중심의 계획경제발전 전략을 취한 소련의 경제적 성취가 대단하게 보였다. 진보적인 지식인과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대안으로서 공산주의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1958년 헝가리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중의 민주화 요구에 대해, 소련이 탱크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고, 서유럽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났다. 동유럽 사람들은 이후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암울함과 정체가 경제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서유럽이 1950~60년대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룰수 있었던 것은 두가지 요인 때문이다. 전쟁으로 많은 인명과 건물이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생산 시설의 피해는 실질적으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직후의 혼란이 진정되었을 때 생산력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두번째 요인은, 전후 물질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한 상황에서, 온국민이 경제적 풍요라는 유일한 희망에 매달려 전력으로 매진할 수 있었다.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종전후 5년 이내에 전쟁 이전의 생산력을 회복하였으며, 이후 매년 5~6%의 성장을 거듭하면서 60년대 후반에는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풍요에 도달했다. 두차례의 전쟁으로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정치인과 엘리트들은 새로운 정책으로 국민의 마음을 추스리려고 하였는데, 그것은 복지국가 체제이다. 국민 모두의 기본적 삶을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 체제는,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관련 정책이 도입된 이후, 전후에 내실을 다져 1960년대말이 되면 완비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전후에 독일이 빠르게 경제부흥하는 것을 지켜본 프랑스는, 독일이 과거와 같은 전쟁을 다시는 주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유럽이라는 공동체 속에 독일을 옭아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프랑스가 1950년대 초에 주도하여 독일과 프랑스가 참여하는 석탄철강 공동체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89년 동서독이 통합되었을 때, 유럽 통합을 더욱 강화하는 경제통합을 추진하였다. 역내 관세를 철폐하고, 통화를 통합하고, 국경 통제를 없애는 등 통합의 심도를 깊이하는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각 나라의 고유한 정체성이 유럽이라는 큰 단위로 흡수되지 않았으므로, 2000년대에 들어 정치통합을 추진하는 정책은 중단되었다. 또한 유럽 통합 내에서 가난한 나라와 부자나라간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내적 긴장이 수시로 표출되는 상태에 있다.

소련 공산주의는 자체의 축적된 모순 때문에 벽에 부닦뜨렸다. 1980년대에 고르바쵸프가 개혁을 추진했을 때, 예상치 못한 동유럽에서의 반발에 직면해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급속히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소련 제국이 해체되었다. 소련의 지배에서 풀려난 동유럽은, 소련의 미래 위협을 우려해 서유럽의 품으로 신속히 들어가는 선택을 하였다. 러시아는 이러한 소련 제국의 해체에 굴욕감과 배반감을 품게 되었으며,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권위주의 체제의 복원을 추구하는 푸틴이 국민의 호응을 얻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책은 20세기 후반 유럽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필독서이다. 다만 유럽을 구성하는 나라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서술을 성실히 따라가는 것은 정말 힘들다. 전체의 변화를 서술한다고는 하지만, 각국의 국내 정치 사정을 세세히 설명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고유명사나 사건들이 정말 많이 등장해서 읽으면서 두뇌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800쪽이 넘는 분량에 글씨는 또 얼마나 작은지 조금만 읽으면 눈이 침침하고 저려왔다. 맨 후반 일부는 결국 건너 뛰며 읽었다. 고생 고생 하며 이 책을 읽고 나서, 여하간 그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유럽과 그 사람들을 깊이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2000년 무렵에서 서술이 끝난 것이 아쉽다. 대단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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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4. 10. 20:56

Paul Nurse. 2020. What is Life: Understand Biology in Five Steps. David Flickling Book. 212 pages.

저자는 노벨상을 수상한 생물학자이며, 이 책은 그의 연구를 배경으로 하여 "생명 life 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다섯가지 주제로 답변한다. 세포, 유전자, 진화, 화학, 정보, 등이 저자가 보는 생명의 핵심이다.

생명 life 이란 외벽에 의해 가두리지어져서 밖과 안을 구별하는 '세포' cell 라고 하는 최소 단위를 필수 조건으로 한다. 세포 밖의 외부 세계가 무질서를 향하는 것과 달리, 세포는 세포벽 안에서 그 자신만의 고유 질서를 유지한다. 여러 세포가 모여 더 큰 복잡한 유기체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각각의 세포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생명체이며, 복제 기제를 통해 또다른 새로운 세포를 생산해낸다.

생명 life 의 핵심은 '유전자' gene 이다. 세포의 핵에는 유전자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유전자는 세포의 모든 작동과 재생산 과정을 통제하는 정보를 담은 DNA로 구성된다. DNA 는 이중나선구조로 된 단백질 구조체이며, 이 단백질 구조체는 ACTG라는 네가지의 염기서열을 통해 정보를 저장한다.  DNA에 저장된 정보는 유전자 복제를 통해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생명체는 '진화' evolution 과정을 통해 고유한 형질을 발전시켰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단세포 생물로부터 오랜 세월 에 걸쳐 점진적으로 변화하면서 오늘날의 다양성에 이르렀다. 진화의 기제가 작동하려면, 생명체는 재생산을 하고,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이어가며, 유전자 전승 과정에서 전세대와는 다른 차이가 만들어져야 한다. 환경에 잘 적응한 생명체가 그렇지 않은 생명체보다 생존하고 후손을 낳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원리, 즉 '자연 선택' natural selection 을 통해서 진화가 이루어진다. 진화는 특별히 정해진 방향, 즉 목적지가 없는 non-purpose 과정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DNA 작동방식이 동일하다는 사실로부터, 지구상의 생명체는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생명 life 은 본질적으로 일련의 '화학 작용' chemistry이다. DNA의 염기서열은 단백질 생성을 통제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지는 단백질은 '효소' enzyme 로서 세포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화학 반응을 가능하게 만든다. 생명체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필요한 활동을 하는데, 세포속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에너지 저장체인 ATP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를 적재 적소에 전달하고, 에너지를 연소하는 모든 과정은 화학 반응이며, 이런 모든 화학 반응에 효소가 개입한다. 효소는 기본적으로 탄소 중합체 carbon polymer 분자이다. 우리 몸에 사용되는 20가지의 아미노산 amino acid 은 탄소 중합체이며, 이 아미노산들을 다양하게 조합하여 단백질 구조체를 만들며, 이러한 과정은 DNA에 저장된 정보를 이용하여 RNA에 전사된 정보를 통해 이루어된다. 오늘날 모든 생명체의 화학 작용의 큰 그림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생명이란 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에너지' mystic energy, 혹은 '생명력' spark of life 라는 과거의 이론은 근거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생명 life 의 핵심은 '정보' information 이다. 생명의 핵심인 유전자는 정보의 저장고이며, 생명체가 신진대사 metabolism 를 하고 '항상성' homeosis 을 유지하는 기제는 정보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생명체는 다양한 feedback loop 를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이러한 기제의 핵심은 정보 통제이다. 유전자의 일부가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발현되도록 하는 후형형질 발현 epigenesis 이나, 유전자의 작동과정 전체를 통제하는 장치 역시 정보 관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생명체는, 그를 구성하는 개별 세포나 기관 단위가 아니라, 유기체 전체를 단위로 하여, 생존과 후손 번식이라는 '목적' purpose 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화학 기계 chemical machine 인 유기체는 정보를 관리하면서 조정하고 작동한다.

이제 생물학은 생명체의 기본 구조와 작동원리를 밝혀내었다. 생명체도 다른 무기물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의 법칙에 따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생명의 물리학적 physics 인 근거를 확인한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러한 깊은 지식은 생명체를 인간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고 관리하는 데 사용된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종자를 개량하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유전자를 변형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위험이 내재되어 있지만, 잘 관리한다면, 식량 생산, 온난화 등 인류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이 책은 생물학의 전문 지식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썼다. 전문 학자가 처음 쓴 교양서라고 믿겨지지 않을만큼 이해하기 쉽고 간결하다. 저자가 관련 주제에 대해 철저하게 알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지도 모른다. 곳곳에서 저자 본인의 연구 경험을 적절히 섞고, 이해를 돕는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단숨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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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3. 24. 17:28

Joseph Henrich. 2020. The WEIRDest people in the world: How the West became psychologicaally peculiar and particularly prosperous. Picador. 489 pages.

저자는 인류학자이자 심리학자이며, 이 책은 서구문명이 세계의 다른 지역을 앞서게 된 원인을, 서구인의 독특한 심리 특성인 개인주의 individualism 와 이에 따르는 사회제도에서 찾는다. 서구에서 개인주의가 출현한 원인은 씨족 중심의 가족제도가 약화된데 있는데, 이는 기독교의 영향이다.

사람들의 심리구조는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다. 여러 심리실험 결과 서구인의 심리구조는 세계의 다른 지역 사람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서구인의 심리구조는 개인주의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개인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개인이 속한 집단 내 혹은 집단간의 관계를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한다. 서구 이외의 사회에서는 모두, 개인주의가 아닌 집단주의, 즉 개인의 지위와 사고와 행동이 소속 집단에 매몰되어 있다.

개인주의를 추종하는 사람은 집단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보다, 타인에 대한 배타성이 약하며, 다른 집단의 사람과도 쉽게 거래하며, 보편적인 원칙을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하며 universalism, 기회를 찾아 이동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기존의 가치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실험에 개방적이며, 관심이 유사한 사람과 임의적인 조직 association 을 보다 쉽게 형성한다. 이러한 개인주의자의 특성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교류하고, 다양한 출처로부터 수집한 아이디어를 결합하여 혁신을 만들어내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결국 이러한 심리와 행동 성향은 서구의 도시화와 산업혁명을 낳았다.

서구에서 집단주의가 깨지고 개인주의가 자리잡은 데에는, 역사상 모든 인류사회를 지배하던 씨족 중심의 가족제도가 서구에서만 약화된데 원인이 있다. 인류 역사상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가족과 이의 확대판인 씨족과 부족 집단의 단단한 결합속에서 살아왔다. 자신이 속한 혈연 및 가족 집단과 그렇지 않는 타집단 사람을 구분하고, 후자에 대해 배타적이고 거래를 꺼리는 것은 모든 전통사회의 공통된 특징이다.

서구는 중세초기부터 일관되게 지속된 기독교 교회의 가르침이 가족의 집단결속을 깨는데 기여하였다. 사촌과의 결혼을 금하고, 부계와 모계의 양쪽에 대해 동일하게 친족간 결혼을 금하고, 일부일처제를 강력히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씨족 집단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반면 서구 이외의 사회에서는 사촌간 결혼이 광범위하게 행해졌으며, 모계에 대해 친족내 결혼을 금하지 않았으며,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씨족의 집단적 결속을 약화시킨 반면,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핵가족의 출현을 촉진시켰다. 개신교는 구교보다 이런 개인 중심의 가족 규범을 더 강력히 추진했으며, 신과 개인간에 매개자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서, 개인주의적 심성을 더 강화시켰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에 일찍 노출될수록, 친족간의 결혼이 드물며, 친족간의 결혼이 드물수록, 개인주의적 심성이 강하며, 개인주의 심성이 강할수록 경제성장의 정도가 높다.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기독교에 일찍 접할수록, 친족간 결혼이 드물며, 개인주의 특성이 강하며, 교육과 소득수준이 높다. 반면 중동의 이슬람과 중국의 유교는 가족 집단의 결속을 강하게 유지하는 방향으로 종교가 기여하였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 in-group 의 배타성을 깨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아이디어의 활발한 교류와 혁신, 모든 사람들을 대응하게 대우하고 동등한 원칙을 적용하는 입헌 민주주의, 등의 서구의 제도가 발전할 수 없었다. 대신 효율보다 연고를 중시하는 연고주의 nepotism, 타집단과의 거래를 꺼리고 차별하는 배타주의가 지배했다.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나 경제 규범들이 아프리카나 중동의 전통사회에 수입될 때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심리 구조가 이러한 제도를 작동하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20세기에 동아시아에서 급속하게 서구의 제도와 경제 규범이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사회에 이미 씨족 중심의 집단주의가 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과학의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의 기존의 논의와 연구를 포괄하여, 그야말로 거대 이론 grand theory 라고 할만한 것을 제시한다. 개인주의라는 심리 행위 성향이 서구의 성공의 핵심인데, 이것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독특한 가르침이 있다는 주장이다. 인류의 진화를 통해 발전시킨 가족 중심의 집단주의를 기독교가 깨버리는 매우 예외적인 사건이 벌어짐으로서, 개인주의라는 매우 예외적인 심리 행동 성향이 출현하였고, 근대 서구라는 세계 역사상 매우 예외적인 사회 문화가 출현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개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 사회의 성공의 열쇠가 된 셈인데, 앞으로도 그럴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저자는 자신의 이론을 매우 탄탄한 증거로 뒷받침하고 있어서 설득력이 크다. 미국의 별볼일 없는 대학을 나와 하바드 대학 교수가 된 저자의 예외적인 경력이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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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14. 20:08

존 파웰 (장호연 옮김). 2012. 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How Music Works). 뮤진트리. 318쪽.

저자는 물리학자이자 음악가로, 이 책은 음악이 작동하는 원리를 물리학 지식을 적용하여 설명한다.

음악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파동이며, 소음과는 달리 조직적으로 정렬된 소리이다. 어떤 소리의 파동이라도 규칙적으로 파동이 반복되면 우리는 쾌적한 느낌을 갖는다. 그 파동의 모습이 너무 단순하면 곧 싫증을 느끼지만, 다양한 변화를 주어서 파동의 모습이 복잡하면서도 규칙적으로 반복되면 흥미와 즐거움을 느낀다.

음악의 소리는 기본음과 오버톤이 중첩되면서 복잡한 파동 모양을 만들어 낸다. 악기에 따라 여러 오버톤 중에 선택적으로 특정 오버토의 소리가 강조되어 합성되면서 복잡한 파동을 만들어 낸다. 예컨대, 2,4,6, 오버톤이 강조되고 3,5,7 오버톤이 약한 악기가 있는가하면, 다른 오버톤의 조합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도 있다. 악기는 소리를 내는 처음, 중간, 뒤가 각각 소리의 오버톤 조합이 달라지는데, 이는 신세사이져가 동일한 오버톤 조합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여 생성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자연 악기의 자연스런 소리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조합이 악기의 음색 tember 를 만들어 내는 원리이다.

두개 이상의 음의 파동이 때때로 겹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파동을 만들어 낼 때 우리는 협화음으로 느낀다. 반면 불협화음은 두개 이상의 음의 파동이 겹쳐서 좀처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파동을 만들지 않을 때 받든 느낌이다. 한 옥타브의 간격은 두음사이의 주파수의 비가 1:2 이므로, 두개의 파동이 결합할 때 마치 한개의 파동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의 귀는 두 소리를 같은 소리로 인식한다. 한편, 5도 간격의 소리, 예컨대 도와 솔은, 둘간에 주파수의 비율이 1과 1/2 이다. 따라서 두음이 결합하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파동을 자주 만들기 때문에 우리 귀에 편안하게 들린다. 도미솔의 기본 삼화음이 가장 편안하게 들리는 이유 역시, 미가 도보다 1과 1/4, 솔이 1과 1/2의 주파수이므로, 세 주파수가 조합될 때 규칙적으로 자주 반복되는 파동을 다른 어떤 조합보다 더 자주 만들기 때문이다.

한 옥타브의 간격을 12개로 균일하게 등분한 것이 서구의 음계이다. 이때 등분하는 방식은, 비율적으로 동일한 간격으로 구분하는데, 한계단 즉 반음 내려갈 때마다, 5.6%씩 주파수가 낮아진다. 이 비율을 복리로 계산하면 12계단 아래는 2분의 1이 된다. 서구의 음계는 12개의 계단 중 7개의 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인접한 두 음간에 온음 간격을 갖는 5개의 음을 선택하고, 이 다섯개의 음 중에 거리가 먼 간격을 채우는 두개의 음을 추가로 선택하여 7개의 음을 만들었다. 온음 간격의 5개의 음, 즉 도레미솔라는, 어느 두개의 음 간에도 서로 파동이 간섭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파동을 자주 만들어내어 듣기 좋은 합성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세계의 대부분의 문화는 이렇게 5개의 음으로 구성된 음악을 만들었다.

한 옥타브의 간격인 12계단 중에서 7개의 음을 고르는 방법은, 각 음을 기준으로 7가지가 있는데 (이를 선법 mode 이라 함), 현대의 음악은 이 중 두개의 선법, 즉 장음계와 단음계 선법 두 개만을 주로 쓰고, 나머지 다섯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장음계는 인접음 간의 간격이 으뜸음을 기준으로 "온음-온음-반음-온음-온음-온음-반음"으로 구성된 7개의 음으로 구성된다. 7개의 음 중 어느 음을 으뜸음으로 삼아 이러한 규칙의 간격으로 7개의 음을 쌓아가는가에 따라 조가 나누어 진다. 어느 음을 으뜸음으로 삼던지 음의 배치는 모두 동일하다. 즉 C에서 시작하는 7개의 음이나, E에서 시작하는 7개의 음이나 음을 쌓아가는 방식은 모두 동일하며, 전자는 C-major, 후자는 E-major이라고 지칭한다.

인간은 으뜸음의 주파수의 절대값이 아니라, 음들 사이에 주파수 간격에 민감하기 때문에, 사실 어떤 음을 으뜸음으로 한 조성으로 작곡하던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베토벤을 포함해 음악 전공자들은 조에 따라 음악의 분위기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 실험해본 결과 음악 전공자들도 시작하는 으뜸음이 다른, 즉 조가 다른 음악의 분위기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한 곡 내에서 조옮김에 될 때에는 분위기의 변화가 발생하는데, 높은 음쪽으로 조옮김이 되면 밝은 느낌이 드는 반면, 낮음 음 쪽으로 조옮김 되면 가라앉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음악 전공자들이 조에 따라 곡의 분위기에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과거 특정 조로 작곡된 음악들의 분위기가 다른 조로 작곡된 음악의 분위기와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통계적 학습의 결과로 습관이 그렇게 형성된 것일뿐, 조성 자체의 차이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음계와 조성에 대해 다른 책들이 두리뭉수리 설명하던 것을, 그림을 이용해 단순화하여 쉽게 설명해준다. 각 악기들의 작동원리를 물리학 지식을 적용하여 잘 설명한다. 저자의 이야기 솜씨와 주제에 대한 이해의 깊이에 감탄했다. 저자가 철저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자가 음악 전공자인 것도 이 책을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데 한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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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8. 21. 16:51

John Mearsheimer. 2014(2001). Tradegy of Great Power Politics. W.W. Norton. 411 pages.

저자는 국제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자신이 "공격적 현실주의" (offensive realism)  라고 명명한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의 핵심을 설명하고, 1800년대 초반 나폴레옹 전쟁에서부터 최근 미국과 중국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강대국들 사이의 주요 국제정치적 갈등을 예로 하여 자신의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국제정치의 세계에는 국가를 넘어서는 권위체가 없으며, 국가들은 자신의 생존을 각자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국가들 사이에 권력 경쟁이 치열한 무정부 anarchy 상태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며, 한 나라의 다른 나라에 대한 의도는 수시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나라는 자신의 안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자신의 경제와 군사력을 키우고, 주변에 위협이 될만한 나라가 부상하는 것을 막는데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국가가 속한 지역에서 가장 강하고 유일한 강대국이 되는 것만이, 가장 확실하게 안보를 보장하는 길이다. 자신의 나라와 대양을 넘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자신에 비견할만한 그 지역의 유일한 강자가 출현하는 것을 막는 것 또한 자신의 안보를 지키는 데 중요하다.

강대국이 주위의 나라들에 대해 공격적인 이유는, 국제질서 속에서 자신의 나라의 기존 지위 status quo 에 안주해서는 자신의 안보를 확실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역에서 최강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보다 강한 자에 대응해 다른 나라와 연대를 도모하여 안위를 보전해야 한다. 강대국은 자신의 확실한 안보를 위해 경쟁자의 부상을 적극적으로 offensive 차단해야 하기 때문에, 주변국에 대해 공격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선의와 평화를 강조하는 미국이지만, 상대의 도발이 없음에도 이라크를 침공하고 중남미의 반미 정권을 무너뜨리는 공작을 수시로 감행한 것에서 보듯이, 국가의 안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상대의 선의에 의지해서는 안되며, 국제정치체제 속에서 자신의 상대적 힘을 기르고 경쟁자의 부상을 적극적으로 견제해야 한다

국가들 사이의 관계 및, 각 국가들이 다른 나라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은, 각 국가들이 처한 국제정치 시스템의 권력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 (structural realism). 각 나라의 국내 정치가 민주주의건 전제주의건, 자본주의 체제건 공산주의 체제건, 지도자의 성향이 어떠하냐 등에 관계없이, 즉 이념, 체제, 지도자의 성향 등 국내적 변수와 상관 없이 모든 나라들은 국제정치 시스템 내에서의 구조적 맥락에 맞추어 행동한다. 

국제정치 시스템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비등한 힘의 두 강대국이 대치하는 양강 구도(balanced bipolar structure), 셋 이상의 비등한 힘의 강대국이 포진한 다자 구도 (balanced multipolar structure), 한 나라가 지역의 다른 나라들보다 힘이 우세한 상황에서 셋 이상의 강대국이 포진한 다자 구도(unbalanced multipolar structrue).  제2차 대전 이래 미국과 소련이 대치한 냉전 상태가 첫번째 경우이며, 독일이 상대적으로 우세하면서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이 포진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유럽이 세번째 경우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 독일이 부상하기 이전까지 19세기 중반의 상황이 두번째에 해당한다. 첫번째 즉 양강 구도가 가장 평화로우며, 다음으로 두번째, 즉 균형된 다자 구도가 평화롭게, 세번째, 불균형된 다자 구도는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상대적으로 우세한 불균형 다자 구도에서, 강한 나라는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구조적 현실주의 정치 이론에 따르자면, 20세기 초반 유럽은 불균형 다자구도 속에서 독일이 우세한 상황이었으므로, 히틀러가 출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조만간 독일이 주변 국가를 침공하여 유럽의 지역 패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을 것이다. 

미국은 자신의 지역, 즉 서반구에서 유일한 강자가 되었다. 반면 1800년 초반 프랑스의 나폴레옹 전쟁, 20세기 초중반 독일이 주도한 제1, 2차 세계대전, 일본이 주도하여 아시아 전역을 휩쓴 제2차 대전, 등에서 유럽 혹은 아시아 지역을 제패한 유일한 강자가 되려는 시도가 좌절되었다. 미국은 건국이래 북미 전역을 힘으로 정복하여 통일하고, 1823년 몬로 독트린 이래 서구 열강이 서반구에 세력을 펼치는 것을 막았으며, 20세기 두차례의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과 경쟁할만한 지역의 패권 국가가 부상하는 것을 막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의 세력이 서구 유럽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샬플랜이라는 대규모 경제원조와 NATO라는 군사적 투자를 통해 소련의 확장을 막았다.

1990년 소련이 스스로의 문제 때문에 붕괴하면서, 이차대전 이래 미국과 소련의 대치 상태, 즉 냉전 Cold War 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은 전세계에서 유일한 강대국 unipolar system 의 지위에 등극하였다. 이제 미국은 경쟁하거나 우려할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 내키는 대로 개입하였다. 1990년 초반의 이라크 전쟁, 2000년대의 아프간 전쟁, 2차 이라크 전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은 이 모든 개입에서 단기적 전쟁에는 승리하였지만, 해당 지역 사람들의 자주 자결을 원하는 민족주의와 충돌하였기 때문에 결국 물러나야 했다.

1980년대 이래 중국의 빠른 경제 부상으로 2000년대 들어 인구와 경제 규모 면에서 중국이 가까운 미래에 미국의 경쟁자가 될 조짐이 보이면서, 미국은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197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은 중국의 개방과 경제 성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는 중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중류층이 비대해지면 결국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으며, 또한 외국과 밀접하게 연결된 개방 경제는 전쟁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성장은 미국을 포함한 세계 평화를 촉진하리라는 자유주의 국제정치 이론에 바탕을 둔 정책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미국 경제가 어려움에 빠지자 아시아 대륙에 패권적 지위의 강대국이 등장하는 것은 미국의 경제적 및 안보적 이익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높아졌으며, 결국 미국 정부는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는 강경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미국은 호주, 일본, 인도, 등과 연대를 맺으며 중국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며, 중국의 경제와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역 규제와 기술 수출 제한을 포함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저자의 "공격적 현실주의" 정치 이론이 예측한 그대로이다. 중국은 미국의 견제에 당연히 반발하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간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높다. 한반도에서 남북간 충돌이나, 타이완을 둘러싼 충돌, 등이 미국과 중국간 전쟁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큰 곳이다. 중국과 미국 모두 핵 무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전면전의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은 넓은 지역에 걸쳐 퍼져 있으며, 국지적 충돌의 충격이 체제 전체로 퍼지면서 확대될 가능성이 유럽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중국과 미국간 전쟁의 부담이 과거 냉전시절 소련과 서유럽 혹은 미국과의 전쟁의 부담보다는 훨씬 덜하다. 다시말하면 중국과 미국간의 제한된 전쟁의 가능성은 냉전시절보다 높다.  

중국의 부상이 지속되면, 주변에 있는 국가들은 국외의 강대국인 미국 및 지역 국가들 서로간에 연대를 맺으면서 중국을 견제하는 균형 외교 balance of power 를 펼치는 것이 최선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지역의 유일한 강자가 되는 목표를 추구할 것이며, 지역의 패권을 쥔 강대국은 그 지역의 여타 나라들에 간섭을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남미에 대해 그래온 것 처럼, 중국도 지역 패권 국가가 되면 유사하게 행동할 것이다.

이 책은 출간된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현실주의 정치이론의 고전이라고 지목될만큼 국제정치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저자의 단순 명쾌한 이론과 경험적 사례 검증이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국제 제도의 효용을 과소 평가한다거나,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힘의 논리 이외에 다른 가치도 유의미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는 하지만, 근래에 격화되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현실주의 정치 이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현실을 설명하는 사회과학 이론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국제정치학계의 대표적인 학술서이면서도 쉽게 다가오는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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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 9. 14:29

데스번드 모리스 (이규범 옮김). 2017(1985). 바디 워칭. 범양사. 312쪽.

저자는 동물학자이며, 이 책은 머리카락에서 발끝까지 인체를 20개 부분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구조와 기능, 진화의 흔적, 성장과 운동, 자세, 표정, 몸짓 등등을 생물학, 의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 과학적 지식을 총 동원하여 종합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신체 각 부분에 대한 사회적 관습, 상징적 의미, 미신과 신화 등 사회 문화적 측면 또한, 서구사회에서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신체 각부분과 연관된 설명을 다양한 사진과 그림과 함께 곁들여 제시하기 때문에 이해가 쉬우며 읽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 몸은 누구에게나 매우 친숙하지만,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실을 접하게 되어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 몸의 많은 부분이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컨대 인간의 다리 자세에 따라 이것이 발산하는 성적인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 번역도 자연스럽게 잘 되어 있어서 좋았다.

2024. 5. 22. 17:17

Hein De Haas. 2023. How Migration Really Works: the facts about the most divisive issue in politics. Basic Books. 372 pages.

저자는 네덜란드의 사회학자로 이민문제 전문가이다. 이책은 이민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흔히 제기되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객관적인 데이타를 사용하여 이민 문제의 실상을 밝힌다.

국제 이민이 근래에 폭증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 이민자의 절대수는 증가했으나, 인구 비율로 볼 때에는 전체 인구의 3% 부근에서 매우 안정적이다. 이민자의 대부분은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같은 지역 내에서 이동하며,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이동하는 인구는 상대적으로 매우 소수이다. 근래에 선진산업국에서 불법이민자들이 폭증했다고 대중영합 정치인들이 주장하면서 대중을 선동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함이지, 실제 불법 이민자들이 폭증했기 때문은 아니다. 시민단체나 매스컴 역시, 불법 이민자들의 고통과 폭증을 자극적인 말과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크게 부각시키는데, 이 역시 그들 자신의 이익, 즉 대중의 지원과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소득 격차가 엄청남에도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 이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익숙한 환경에서 계속 살려고 한다. 국경을 넘어 먼거리를 이동하는데에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큰 투자가 필요하다.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모험을 감행할 때 치러야 할 재정적 비용이나 신체적 위험은 엄청나며, 설사 목적지에 도착해도 낮선 환경에서 주변의 차별과 무시와 외로움을 버텨내며 지내는 것은 엄청난 시련이다. 국경을 넘어 이주를 감행하는 사람들은 출신 국가에서 상대적으로 재력이 있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정신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이 오랜 고민과 계획 후에 신중하게 실행에 옮긴다. 이민자의 대부분은 극빈한 나라가 아닌 어느 정도 소득과 교육 수준이 되는 개도국, 예컨대 멕시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 국가 출신이다. 재해, 빈곤, 전쟁 등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같은 나라 내에서 이웃 지역이나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데에 만족한다.

큰 비용과 위험을 무릅쓰고 선진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뚜렷한 이유가 있다. 선진국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나라에 머무는 것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미래, 즉 지위를 상승시키는 데 훨씬 낫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일할 기회가 적으면 이동하지 않는다. 선진국의 경기와 이민자의 수는 함께 움직인다. 이민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 사람들이다. 불법 이민자들은 극심하게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진국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일 뿐, 가난한 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동 중에 착취당하고 도착해서 낮은 임금과 비인간적 노동조건으로 착취를 당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나라에 머무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기 때문에 그리한다.

선진국에서 얻는 일자리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이라는 유인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국경 장벽을 높이 세워도 불법 이민자의 유입을 막을 수 없다. 선진 산업국은 노령화, 교육수준의 상승, 여성의 노동 참여 확대, 소득 수준의 상승, 등의 요인 때문에 개인 서비스 수요가 갈수록 높아지는 반면, 소위 3d 업종, 즉 더럽고 힘들고 낮은 임금의 노동을 하려는 사람은 내국인 중에 거의 없다. 내국인은 차라리 놀면서 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지언정, 그렇게 열악한 지위의 일자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민자들이 없다면 다양한 개인서비스나, 농업 노동의 수요를 채울 수가 없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말로는 불법 이민자를 막겠다고 하지만, 막상 불법 이민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주를 처벌하는 조치는, 법에서 규정하고 있음에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미국 전체에서 불법 이민자를 고용한 고용주를 처벌한 사례가 일년에 10~30건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이를 실증한다. 

진보 혹은 보수 성향의 어느 쪽이 정부를 장악하던 이민자에 대한 실제 정책의 차이는 거의 없다. 노동시장의 수요와 합법 이민자의 규모 사이에 괴리가 있는 한, 그 간극을 불법 이민자가 채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선진국에서 이민 노동자의 수요가 크기 때문에, 사실 이민자의 90%는 합법 이민자이며, 10%만이 불법 이민자이다. 불법 이민자의 대분은 합법적으로 입국하여 비자 기한을 넘기는 등의 방편으로 불법 이민자가 된 경우가 다수이므로, 국경을 막는데 엄청난 돈을 들이는 것은, 보안 산업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 실제 별 효과가 없다. 국경을 넘는 것을 어렵게 만들수록, 불법 이민자가 치르는 재정적 신체적 희생이 커질 뿐이다. 

정부의 이민 정책은 일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보수당과 진보당 모두, 각각 자신의 지지층 내에  이민에 대해 서로 다른 이익을 가진 집단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보수당 지지자 중 기업가와 부자는 이민의 문호를 확대하기를 원하는 반면, 인종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 보수적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은 이민을 줄이기를 원한다. 진보당 지지자 중, 노동자들은 이민자가 확대되는 것을 반대하나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이민이 확대되어 인간적으로 핍박받는 개도국 사람을 돕고 사회의 다양성이 높아지기를 원한다. 따라서 선진국 정부가 제시하는 이민 정책은 수시로 바뀌며, 실제 문제를 정면으로 부딛치기보다, 국민들에게 내세우는 인상을 중요시하고 피상적인 접근에 머무른다. 

일반인들의 이민자에 대한 태도 또한 일관적이지 않다. 선진국의 일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나 핍박받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밑에 깔고 있으며, 실제 주위에서 이민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민자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저임금으로 파고 들어오면서 노동시장의 상황이 열악해지는 것을 염려한다. 많은 사람은 이민자들이 식당 뒤에서 일하며, 노약자를 돌보고, 아이를 돌보고, 청소하고, 정원 관리하는 것을 일상에서 항시 경험하면서 그런 일을 도맡아 하는 이민자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 이민을 막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합법적인 이민자의 유입까지 막는 것은 반대한다. 국경은 엄격히 관리되어야 하지만, 선진국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젊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력은 어느 정도 규모로 계속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상이 위와 같다면, 근래에 "이민의 위기" immigration crisis 라고 외치면서, 이 문제에 대해 긴급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는 정치인, 미디어, 시민단체의 주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저자는 이민 문제의 사실을 정확히 이해시키는 것이 일차적 목표일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할 의향은 없다고 말한다. 선진국 사람들이 높은 물가, 낮은 성장율, 낮은 삶의 수준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민자의 유입을 막는 어떤 방안도 효과를 볼 수 없다.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의 일자리 덕분에 선진국 사람들은 큰 혜택을 보고 있으며, 저소득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 또한 이익을 얻고 있다. 이러한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한 이민자는 존재할 것이고, 만약 이들의 이동을 막으려 한다면, 이민자들의 희생만 커질 뿐이다. 

국경을 완전히 개방하여 사람들을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하는 방안 또한 현실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선진국에서 이민자로 인한 이익은 중상류층에게 주로 몰려있는 반면, 노동계층은 상대적으로 큰 이익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 계층이 이민자가 주위에 넘쳐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국경의 완전한 개방은 정치적으로 현실화되기 어렵다. 선진국 국민이 합의하는 수준에서 합의하는 규모 만큼의 이민자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상의 정책으로 보인다. 내국인은 일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반드시 채워져야 할 일자리를 합법적으로 유입된 이민자가 채우도록 하는 정책이다. 만일 그렇게 하면 개도국 이민자가 지나치게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대해, 저자는 일자리가 없다면 이민자이 들어오려 하지 않을 것이고,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순환이동" circular movement 현상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 없으리라고 본다. 정치인들은 이민의 실상에 대해 솔직하게 국민을 이해시키면서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위선적으로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정치는. 이민자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 책은 저자의 30년간의 연구가 집약된 결과 답게 논의가 분명하다. 저자의 연구의 깊이가 느껴지는 책이다. 다만 맨 뒤편에 정책을 제시하는 부분에서는 모호한 서술이 보인다. 이민은 사회변화의 일부이므로, 사회변화 전체의 맥락에서 이민을 바라보아야 하고, 이민에 대한 접근 또한 보편적인 노동의 문제로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회학자의 냄세를 풍긴다. 여하간 서술이 명료하고 솔직한 인상을 풍기는 좋은 책이다.

2023. 12. 6. 15:26

앨리스 로버츠. (박경한, 권기호, 김명남 옮김).  2017. 인체 완전판 2판, 몸의 모든 것을 담은 인체 대백과사전. (The Complete Human Body by Alice Roberts). 사이언스 북스. 497쪽.

저자는 의사이자 체질인류학자이며, 이 책은 인간의 인체와 관련된 모든 주요 사항을 그림과 함께 담은 백과사전이다. 책의 절반 가까운 분량을 인체 해부 도감과 설명이 차지하며, 나머지 절만은 인체의 작동원리, 인생 주기, 질병과 장애로 구성되어 있다. 해부학의 그림이 전문가가 참고할 정도로 상세하며 부가된 설명이 매우 친절하다. 인체의 원리를 서술하는 부분이나 인생 주기에 따른 인간의 변화에 대한 설명 역시 수준이 높다. 

전문적인 해부학과 생리학 지식을 다루면서 일반인도 이해할 수준으로 친절하게 서술한 대단한 책이다. 저자가 BBC에서 인간관련 여러 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한 솜씨가 이 책에서도 느껴진다. 번역도 무척 잘 되어서,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번역해 놓았다. 지난 몇달 동안 책을 잡을 때마다 조금씩 읽으면서 즐거움을 느꼈으며, 인체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보너스로 얻었다. 마지막 쪽을 읽으면서 아쉬움을 크게 느낀, 드물게 좋은 책이다.

2023. 6. 16. 10:22

David Stasavage. 2020. The Decline and Rise of Democracy: A Global History from Antiquity to Today. Princeton Univ. Press. 310 Pages.

저자는 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고대에서 근래까지 민주주의의 원천과 변화의 원인을 전제주의와 비교하면서 서술한다. 민주주의는 오랜 옛날부터 인간사회 공통의 정치 제도였으며, 민주주의는 퇴보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전개되어 왔으며, 민주주의와 전제주의는 별도의 길을 걸어왔다.

원시시대와 고대에는 민주주의가 거의 모든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정치 제도였다. 지도자가 마을 혹은 부족의 세력가들로 구성된 집단과 협의하면서 통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단의 규모가 작을 경우 집단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고대의 민주주의는 주로 상층부의 참여에 국한될 뿐, 일반인에게까지 주권이 부여될 정도로 폭이 넓지는 않았다. 반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폭이 넓지만,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이라는 간헐적 간접적 방식으로 주권을 행사하기에 유권자와 대표 사이에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깊이가 얕다.

서유럽은 국가의 힘이 약했다. 왕은 소수의 가신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며, 자신 소유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정부를 꾸렸다. 대지주 귀족이나 도시민들은 왕의 통제가 미치지 않았다. 왕은 귀족과 도시 상공인들과 협의하면서 국가의 일을 처리하였다. 중세는 물론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의 국가는 국내총생산의 1%정도의 세수만을 거둘 뿐이었다. 유럽의 왕은 15세기 절대왕정 시절에도 자신이 통제하는 관료의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통치력이 미약했다. 서유럽에서 약한 국가와 협의체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귀족, 승려, 도시 상공인으로 구성된 협의체가 1250년 왕의 세수권한을 제한하는 서약인 Magna Carta와, 1688년 왕을 폐위시킨 명예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반인을 징집해야 하고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하게 되면서, 통치자는 국민에게 주권을 점차로 더 많이 양보해야 했다. 영국에서 19세기 중반 남성 모두에게 선거권이 확대되고, 1차대전 이후에 여성에게 선거권이 확대된 과정에는 이러한 힘이 작용하였다.

중국은 일찍부터 국가의 힘이 강했다. 기원전 주나라 시절부터 왕은 두터운 관료 집단을 거느리고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했다. 서기 200년전 한나라 시기에 시작된 과거제를 통해 왕은 자신이 직접 임명하고 통제하는 유능한 관료들을 동원하여 국민의 일상을 통제하였다. 한나라 시기에 국가는 국내총생산의 10%가량을 세금으로 징수하였으며, 도로나 치수사업 등 많은 사업을 전개하였다. 중국은 왕 휘하의 강력한 관료들 덕분에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 체제를 뿌리내렸으며, 이러한 전통은 현대의 공산주의 정권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유럽과 중국이 다른 길을 가게된 원인은 자연 환경의 차이에 있다. 서유럽은 넓은 평야가 없으며, 목축이나 호밀 재배에서 밀도가 낮은 농업을 하고, 자연 강우에 의존하여 생산에 굴곡이 많으며, 인구가 조밀하지 않았다. 토지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낮고, 사람들이 쉽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으면,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주의가 서유럽보다 미국에서 더 빨리 발달한 원인이다. 반면, 중국은 황하 유역에서 문명이 발달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넓고 비옥한 퇴적토가 있으며 강물을 끌여들여 밀도가 높은 농사를 지었다. 많은 사람이 집중해서 거주하고, 농업 환경 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중국의 농업은 생산량의 측정과 예측이 정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관료는 국민의 생산활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반면 서유럽의 농업은 외부인이 생산량을 측정하고 예측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지역인이 아닌 국가의 관료가 주민의 생산활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금을 거두기 어려웠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대표자를 뽑아 의회에 보내는 방식의 간접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영국은 대표자에게 의결의 전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1600년경에 일찌기 확립한 반면, 서유럽 대륙의 나라들은 대표자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제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세금, 전쟁 선포 등과 같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국민이 자신의 대표에게 일정한 한도까지의 결정 권한(mandate)만을 부여하는 제도는, 국가가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의회에서 논의가 진행되면서 대표자의 결정권한을 넘어서는 사안이 발생하면, 자신을 선출한 주민들에게 돌아가 다시 의견을 묻고, 의회에 돌아와서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의회의 효율을 크게 저해한다. 대표자에게 의결의 제한을 부과하는 전통은 주민이 대표자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정도가 높다. 반면 대표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제도는 일단 대표자를 선출하기만 하면 주민은 대표자에 대한 통제권을 더이상 행사할 수 없다는 면에서 국민이 주권을 보유한 정도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서유럽에서 상공업이 가장 먼저 발전했던 네덜란드를 영국이 제치고 17세기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영국의 의회가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반면, 대표자의 의결을 제한하는 제도를 유지한 네덜란드 의회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민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도가 높으면, 변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어려우며, 기득권자들이 버티고 신규 시장 진입을 제한한다.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 즉 지주가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꾸고 울타리를 쳐서 경작민을 쫒아내는 것이, 영국 의회에서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대표자에게 전권을 부여한 제도 덕분이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민주주의였던 서유럽보다 전제주의였던 중국이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잘 살았다. 전제주의 국가에서 국가의 지휘로 자원을 동원하여 일관된 경제성장을 추진한 사례가 여럿 있다. 소련이나 현대의 중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경제가 성숙하게 되면 추가적인 성장을 위해 개인의 창의가 필요한데, 전제주의 체제는 개인의 창의를 억압하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맞는 것 같지 않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정치적인 반대의견은 강력히 억압하지만, 생산성을 높일 수있는 비정치적인 아이디어는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혁신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민주주의가 성장하려면 어느 정도의 소득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맞지 않는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현재 기준으로볼 때 매우 가난한 수준의 사회에서 발달하였으며, 중국은 현재 상당한 소득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민주주의가 정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중류층이 자신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라는 요구가 높아지고 정치 참여 욕구가 커지기 때문에 중국이 민주화될 것이라는 예측은 지금까지 맞지 않고 있다. 물론 국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에 허덕인다면, 선동 정치가의 주장에 쉽게 혹하고 매표와 같은 선거 부정이 만연하기에 민주주의가 자리잡기 어렵다는 주장은 맞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볼 때 기본적인 생존의 위협을 넘어선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국민의 소득 수준과 민주주의는 경험적으로 관련이 크지 않다.

서유럽에서와 같이 일단 의회민주주의가 먼저 자리잡으면, 이후 관료가 충원되어 국가의 기능이 커진다고 해도, 의회가 관료 집단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약화되지 않는다. 반면 중국과 같이 강력한 관료집단이 전제주의 정치와 결합해 있는 경우, 이후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어도 자리잡기 힘들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하여 서방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경우, 그 제도의 성공 여부는 식민지 시기 이전 그 사회에 민주주의적 협의체 전통이 얼마나 있었는가에 달려 있다. 협의체 전통이 미약하다면 식민지 시기의 전제적인 통치 방식이 독립 이후에도 계속되는 반면, 협의체 전통이 있었다면 서구의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1990년 공산주의 몰락 이후 개발도상국에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이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대단한 일이다. 냉전시기에 미국과 소련이 자신의 진영에 속한 전제적인 정부를 떠받쳤었는데, 이러한 보호막이 걷히면서, 많은 나라에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근래에 민족주의와 대중영합주의가 발흥하면서 선진국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중앙정치와 대표자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은 난제이다. 시민 교육을 강화하고, 대표자와 유권자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이 필요하다.

의회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견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대표자를 통해 수렴하는 제도이다. 전제주의 체제 또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로를 가지고 있다. 어느 체제이건 통치자는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경우, 관료들이 지역의 민의를 수렴하는 경로로 기능한다. 능력에 따라 선발되는 관료는, 세습적 귀족과 달리 일반인 중에서 선발되므로 그들 자신이 민의를 대표하며, 이들이 행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국민들과 접하며, 국민의 의견과 필요를 반영하여 제도를 조정한다.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가 근래에 양극화되면서 정부와 의회가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조정하여 일을 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중국은 유능한 관료와 정치인을 점진적으로 위로 올려보내는 자신들의 체제가,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발하는 대의제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제도와 중국의 전제주의 제도는, 각자 안정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흥미로운 주제와 달리, 연구 논문과 같이 경험적 분석 자료의 제시와 건조한 서술 때문에 빠르게 읽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서구와 중국을 비교하고, 이슬람과 아프리카 등을 비교하고, 고대와 중세 및 현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종횡무진 생각을 펼쳐서, 통찰력이 돋보인다. 논의와 관련하여 의문이 생길만한 점들을 비록 저자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논의하는 솔직함이 엿보인다. 여러가지를 생각케 하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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