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mothy Garton Ash. 2023. Homelands: A Personal History of Europe. Yale University Press. 348 pages.
저자는 20세기 유럽을 전공한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유럽이 1945년 이차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에 EU의 출현, 19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거쳐온 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개인적 경험과 역사적 사실을 함께 엮어서 서술한다.
사람들이 성장기에 겪었던 중요한 경험들이 이후 평생동안 그들의 생각과 의사결정을 좌우하면서 역사는 전개된다. 1914년 1차대전을 겪은 세대, 1939년 이차대전을 겪은 세대,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를 경험한 세대가 그들의 경험을 전후의 유럽 역사 전개에 투영하였다.
유럽은 국가들 사이에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이 크지만, 로마제국에 뿌리를 둔 통일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정체성이 나폴레옹, 히틀러, EU, 등의 사람들의 희망과 정치체에 투영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였기 때문에, 완전한 통일체를 구현하려는 역사적 시도는 번번히 내부의 저항으로 좌절되었다. Brexit 도 그러한 역사적 경험의 연장선에 있다.
유럽은 1945년 이차대전 종전 이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는 70여년 동안 주요국들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경험하였는데, 이는 유럽의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인 시기이다. 물론 1990년대에 유고슬라비아가 분열하면서 코소보 전쟁으로 큰 상흔을 남기기는 하였지만, 이는 유럽의 주변부에서 일어난 일로 유럽인 다수에게 큰 기억을 남긴 전쟁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다르다. 러시아라는 핵을 가진 강대국이 이웃 나라를 침략한 국가들 사이의 본격적인 전쟁이다. 국가들 사이에 관계가 힘에 우위에 따라 좌우되는, 제1차대전 이전까지 유럽을 지배한 국제질서가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어 공산권의 몰락은 여러가지 원인이 동시에 겹쳐서 일어난 결과이다. 1970년대까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진영보다 더 잘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1980년대들어 공산주의 경제와 권위주의 정치 체제의 모순이 누적되어 균열이 커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폴란드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된 것이 중요한 계기이며, 이는 결국 1980년대 후반 자유주의 노조의 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집권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주변국들에 연쇄 반응을 촉발시켰다. 한편 서독은 동독을 상대로 1960년대 이래 정치적 경제적으로 포용정책을 펴왔는데, 1989년에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그 나라의 국경을 통한 동독인의 서독으로의 탈출을 막지 않도록 협력하는 댓가로 경제지원을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동독인의 대규모 탈출을 촉발하였으며, 이것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초래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가 들어서면서 권위주의적 지배를 완화하고 서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쪽으로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이, 예상치 못하게 동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장악으로부터 벗어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유럽은 1991년 소련이 붕괴했을 때의 미래에 대한 낙관을 뒤로 하고, 2000년대 중반이래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세계화의 결과, 중국 인도 등 제삼세계 국가들이 약진하고, 유럽인들 사이에 불평등이 커지고, 유럽 주위 국가의 사람들이 대거 유럽으로 몰려들고, 경제 성장이 정체하고, 인구 노령화로 복지국가의 기능이 약화되고, 유럽의 중하층의 불만이 높아졌다. EU 안에서도 부자 나라와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들 사이에 갈등이 커지면서 유로 위기를 몰고왔다. 급기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중심국가에서까지 극우 민족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고 유럽 통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전후 유럽이 추구했던 이상인 리버럴리즘은 각국에서 도전 받고 있다.
저자는 유럽의 미래를 어둡게 본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이 미국의 방위 보호에서 독립해 홀로 서야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확장 위협에 대해 유럽 국가들이 단결하여 대응해야 하나, 현재의 모습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제삼세계의 정치 경제 비중이 커지면서 세계에서 유럽의 상대적 영향력은 약화 일로이다. 유럽은 화려한 서구문명의 정통 계승자로서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을 옹호하는 리버럴리즘 liberalism 의 보루이기를 지향하나, 유럽 내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실 자유와 개방과 포용을 주창하는 자유주의 이념은 국내에서는 물론 국외 이웃에서 소외와 비참이 지속되는 상황과 함께 할 수는 없다. 인구 노령화로 인한 노동인구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 가난한 나라로부터 이민자를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새로이 유입된 사람들과 기존 국민 사이의 격차를 계속 유지하고 차별하는 것은 리버럴리즘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기존 국민과 동등하게 되도록 하는 것은, 서구의 근대사를 지배해온 또 다른 이념인 민족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기술 발전으로 세계화가 더욱 진척되고, 서구 사회의 인구 노령화가 계속되고, 부자와 빈자사이에 생활과 정보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이러한 딜레마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유럽이 처한 어려움과 혼란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저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유럽은 평화와 번영을 뒤로하고 새로운 역사적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이 책은 1945년 이래 시기를 직접 살아온 당사자로서 자신의 개인사와 경험을 역사적 사실과 조합하여 서술하는 이야기 전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주요 역사 사건에 참여한 본인 및 주변인들의 경험과 인터뷰를 역사 사실에 투영하여 서술함으로서 현장감을 높인다. 역사학자이면서 저널리스트로의 경험이 풍부하게 담긴 이야기 전개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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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rme Groopman. 2007. How Doctors Think. Houghton Mifflin Co. 262 pages.
저자는 에이즈와 암치료 전문의이며, 이 책은 의사들이 의료 현장에서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과 문제점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검토한다.
질병을 치료하는 행위는, 문제를 발생시킨 원인에 대해 불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추론을 해가는 과정이다. 의학적 지식의 한계도 있지만, 그보다는 증상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와 의사의 그릇된 사고 과정 때문에 잘못 진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의사는 환자를 처음 마주하면서부터 정보를 수집하며, 이러한 정보를 기반으로 병리의 유형 pattern 을 확정한다. 80~85%의 경우에 이렇게 확정한 것이 올바른 진단이지만, 15~20%는 잘못된 진단이다. 인간의 생리현상은 전형적인 유형에 들어맞게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의사들은 자신이 처음에 설정한 유형을 고수하는 성향이 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도 처음의 진단을 계속 유지하면서 유사한 치료과정을 반복한다. 의사들이 잘못 진단하는 원인의 일부는, 인간에게 보편적인 인지적 한계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지적하는, framing, anchoring, availability, 등의 인지적 편향이 의사들을 잘못된 판단으로 이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의료 개입을 하면서 원인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전적으로 의사의 사고 과정에 의존한다. 의사가 생각하는 방식이 그릇되다면, 아무리 고도의 기술과 장비를 동원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의사의 경험과 자기비판적인 성찰이 중요하다. 그러나 의료 비용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라는 외부 압력 속에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병원, 제약회사, 의료 기기회사의 상업적인 압력으로부터 많은 의사들이 중립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저자는 과학과 기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지만, 불확실한 상황에서 공격적인 개입 invasive treatment 으로 피해를 보고나서, 현재의 의료 기술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개입하는 접근에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저자 본인이 허리통증으로 인해 척추 수술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허리 통증은 수술이 필요치 않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내과 전문의인데, 같은 증상에 대해서도 외과에서는 수술을 선호하는 관행을 비판한다. 의료의 각 하위 분야마다 동일한 증상에 대해 자신들이 선호하는 개입 방법이 있는데, 의료인들 내에서도 어떤 방법이 적절한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의학적인 개입을 통해 완치된다는 환상을 버릴 것을 주문한다. 인간의 몸은 복잡한 기전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아무리 고도의 의학적 개입을 한다고 해도 아프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기는 어렵다. 문제가 악화되지 않는다면, 의학적 개입을 최소화 하면서 두고보는 watch and see 전략을 택하는 것이 더 좋은 의학적 접근이다. 문제가 발생할 것을 미리 예상하면서 선제적으로 의학적 개입을 하는 것, 노화에 따른 기능 약화에 대해 의학적 개입으로 기능 강화를 노리는 행위 등을 경계한다. 의학적 개입으로 개선되는 효과가 미미하다면 의학적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예컨대 유방암 검진이나, 전립선암 검진 등 많은 검진들은 이로인해 개선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에 의학계에서 논란이 크다.
이 책은 저자의 풍부한 치료 경험과 의료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 느껴진다. 각 장을 흥미있는 임상 사례로 시작하면서, 전문적인 영역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로 풀어낸다. 저자의 글쓰는 솜씨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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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E. 윌리엄스 (김성훈 옮김). 2017(2016). 늙어감의 기술: 과학이 알려주는 나이드는 것의 비밀. 현암사. 348쪽.
저자는 노인의학 전문의이며, 이 책은 과학적 연구결과와 자신의 오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잘 늙어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현재 서구에서 기대수명은 80이 넘는다. 그러나 늙어가는 것 및 노인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변화에 따라미치지 못한다. 미국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기대수명이 47세였으며, 로마시대에는 35세에 불과했다. 이제 일하는 기간 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노인으로 지내야 한다. 노년기는 인생의 잔여 기간이 아니며, 노년기의 삶을 죽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서는 안된다. 과거 노인에 대한 지식과 편견이 현재의 사람들을 지배하는데, 이것은 과학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은 태어났을 때가 가장 서로 유사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벌어진다. 노년기는 젊을 때보다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 건강, 정서적 상태, 사회경제적 지위 등에서, 하나의 범주로 뭉뚱그릴 수 없을 정도로 노인들 사이에 편차가 크다.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노인들 사이에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잘 늙는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의욕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 몇가지를 필수적으로 이행해야 한다. 첫째, 우리의 몸에 자극을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규칙적인 운동과 균형잡힌 영양 섭취가 요구된다. 둘째, 머리에 자극을 주는 것이다. 노년기에도 지적인 활동을 계속 해야 한다. 셋째,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노화에 따라 붙는 부정적 감정에 굴복하지 말고, 자신의 역할과 존재에 자긍심을 가지고 살도록 해야 한다. 넷째는 자신의 인생과 죽음에 대한 성찰과 함께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죽음을 회피하려 하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도록 심성을 길러야 한다.
노인의 몸이나 정서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비책은 없다. 수명을 늘이려고 악착같이 노력하기보다는,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고 삶의 질을 높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에너지 사용이다. 노년이 되어도 삶에 목표를 세워서 열심히 사는 것이 건강한 노년의 삶의 핵심이다. 돈을 버는 일을 그만둔다고 하여, 자신의 활동이나 사회 관계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는가는 각자 하기 나름이며, 그 결과 노인들 사이에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과학자로서 저자의 지식과 의사로서의 경험이 잘 녹아 있는 설명과 조언을 제시한다. 특별히 새로운 말은 없지만, 노년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검토에서, 생물학적, 생리학적, 임상적 검토에 이르기까지 균형있고 간명하게 설명한다. 다만 후반부에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제목으로 이야기하면서 중언부언하는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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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드뤼서 (전대호 옮김). 2009(2015). 음악본능: 우리는 왜 음악에 빠져들까? 해나무. 466쪽.
저자는 과학 저널리스트이며. 이 책은 뇌과학과 음악학 분야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음악을 감상하고 직접 하는 것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섭렵한다. 저자의 서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음악을 이해하고 즐기는 능력은 인간 본능의 일부이다.
역사상 인류 모든 사회에 음악이 존재하는 데, 이는 진화의 산물이다. 배우자를 구하는 짝짓기 행위의 일부로 발달했다는 가설도 있지만, 사회구성원의 통합을 도모하는 목적에서 발달했다는 가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모든 인류 사회에서 음악 활동은 개인이 홀로 하는 행위이기 보다, 공동체 구성원에게 공유되고 함께 참여하는 활동으로 존재했다. 함께 춤추고 음악을 하면서 공동체 구성원은 결속을 다졌다.
음계는 문화에 따라 다른 데, 태어난지 얼마 안된 유아는 특정 음계에 대한 선호가 없는 것으로 실험 결과 밝혀졌다. 그러나 태어난지 불과 1년이 되기도 전에 유아는 자신이 속한 문화의 음계에 익숙하고 이를 선호하는 성향을 보인다. 화음에 대한 선호는 생리적 근거가 있다. 협화음을 들을 때 우리의 두뇌는 불협화음을 들을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자신을 음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약간의 훈련만 하면 음정을 맞출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뇌가 본능적으로 음고를 구별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음들 간에 상대적 거리를 구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음의 절대적 주파수를 인지하는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다. 박자와 리듬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능의 일부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다양한 박자와 리듬을 구별하고 따라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인간은 익숙한 음악을 쉽게 식별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인다. 불과 첫 몇 음만 듣고도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수많은 음악 중의 하나와 쉽게 매치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한 음의 진행을 여러번 들으면서 고착화시킨다. 서구 음악의 기본적인 화음 진행 규칙에서 벗어나 진행되면, 전문적인 음악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금방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이는 일종의 '통계적 학습'의 결과인데, 많이 지나갈수록 숲속에 길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로서, 많이 접할수록 익숙하게 느끼고 앞으로의 진행을 예상하게 되며, 그러한 예상에서 벗어날 때, 이상하다고 느끼고 긴장을 느낀다. 예컨대 서구의 음악은 시작할 때의 조성에 맞는 기본음으로 끝을 맺는 것이 보통인데, 기본음이 아닌 음에서 음악이 끝나면 무언가 더 이어져야만 할 것 같은 미진한 느낌이 든다.
음악은 감정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사람들은 대체로 15세에서 25세 사이에 들은 음악을 일생 동안 기억하며, 특정 음악을 자주 들었던 때 느꼈던 감정이, 이후에도 그 음악을 다시 들으면 바로 연상된다. 과거의 특정 감정을 재생시키는 데, 음악은 냄세 만큼이나 뚜렷하게 연상 작용을 유발한다.
음악을 직접 하면 다른 어떤 활동보다 뚜렷이 우리의 뇌가 변화한다. 죽은 음악가의 뇌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 죽은 사람의 뇌와는 외관에서도 구분된다. 두뇌 활동에 문제가 있는 환자, 예컨대 치매나 파킨슨 병 등의 경우에, 노래를 부르는 등 음악을 직접하는 행위를 통해 뇌 전체의 활동을 촉진시켜 뇌의 퇴화를 늦추는 효과가 있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는데는 오랜 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며, 어릴 때 시작할수록 학습의 효율이 높다. 전문 연주자는 10,000 시간, 즉 매일 3시간씩 10년간 연습을 해야 도달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음악을 배운다고 해서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배우는 목표가 전문 연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연습하는 과정 속에서 음악을 즐기는 데 둔다면,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음악을 배울 가치가 있다. 물론 특정 악기를 웬만큼이라도 능숙하게 다루는데는 오랫동안 지루한 연습 과정을 참고 견뎌야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음악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라는 보상도 함께 한다. 피아노보다는 기타가 배우기 쉬우며, 가창법을 배워 아마추어 합창단에서 활동하는 것에서도 새로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고전 음악보다는 일반 대중 음악을 주로 예로 들며, 자신의 음악 체험을 덧붙이면서 많은 연구 성과를 쉬운 서술로 요약하여 제시한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솜씨가 뛰어나며, 번역도 자연스럽게 해서, 읽는 내내 흥미롭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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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ter Helm. Net Zero: How We Stop causing climate change. William Collins. 240 pages.
저자는 경제학자이며, 이 책은 지금까지 지구 온란화를 멈추려는 세계의 시도를 비판하면서,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정책을 제시하고, 정치 경제적으로 그러한 대책이 가장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1990년 유엔이 주도한 교토협약이래, 2015년 파리협정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지구온난화를 멈추기 위하여 회의를 무수히 하고 엄청나게 많이 논의하였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지구의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앞으로도 이대로라면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즉 지난 30년간 국제사회의 노력은, 실제 지구의 대기중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데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top-down 방식의 규제였다. 국가 대표들이 만나서 서로 감축 목표를 협의하여 정하고, 이 목표 달성을 위해 각 나라가 국내 정책을 만들어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세계에서 압도적인 규모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인, 중국, 미국, 인도가 이러한 감축 협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미국은 자신의 주권이 국제협정에 의해 제한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들로부터 구속력 있는 동의를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들 강국이 설사 약속을 위반한다고 하여도 제제를 가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국제회의를 거듭하면서 참가국으로부터 감축 약속을 쥐어 짜내는 것은 사실상 효과가 없다. 한편, 일방적으로 감축 목표를 정하고 어느 정도 성실히 이행하는 유럽 조차도,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는 행동하지 않는다.
유럽은 1990년을 기준점으로 하여, 유럽 지역으로부터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하여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 유럽에서는 이제, 이산화탄소 배출이 특히 많은 석탄을 거의 퇴출시켰으며, 에너지 사용 효율을 높이고, 에너지 집약 산업을 점차적으로 퇴출시키고, 이산화탄소 배출 허가권을 거래하는 방식으로 배출 총량을 규제하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의 노력은, 에너지 집약 산업의 생산물을 중국 등에서 수입함으로서,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지역을 유럽으로부터 지구 상의 다른 지역으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유럽의 탈산업화로 deindustrialization 인하여, 이 지역에서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줄어든 것일 뿐이다. 유럽인들이 이산화탄소를 많이 사용하는 에너지와 상품을 계속 선호하고 소비하는 한, 지구 대기에서 이산화탄소를 줄인다는 것은 헛구호에 불과하다. 유럽에서는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줄어들겠지만, 유럽인이 사용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지구상의 다른 곳에서는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자명한 사실에 애써 눈감고 있다.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진짜로 줄이려면, 이산화탄소 배출을 초래한 사람이 그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다. 지금까지는 이산화탄소의 저감 노력을 주로 생산 쪽에서 접근했는데, 저자는 소비 쪽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여 생산하는 이유는 결국 소비자가 그러한 생산품을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자의 행동을 바꾸지 않는 한 기업에게 이산화탄소를 저감하도록 강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소비자가 그러한 제품을 원하는 한, 기업은 어떤 우회수단을 써서라도 소비자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소비자의 행동을 바꾸는 방향의 접근을 밑에서부터의 개선 bottom-up 방식이라고 명명한다. 즉 환경오염이라는 경제적 외부효과 externality 를 가격에 반영시킴으로서, 시장 기구가 작동하여 환경오염의 비용 부담이 고르게 배분되도록 하는 것이다. 에너지와 상품에 포함된 이산화탄소의 배출양에 비례해 세금, 즉 탄소세 carbon tax 를 매기면 된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은 물론, 해외에서 생산되어 수입되는 물건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탄소세 border tax를 매긴다면, 생산 장소가 어디냐에 상관없이, 순수히 지구 환경이 미치는 영향의 정도에 비례하여 비용 부담이 배분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선진산업국은 물론 개발도상국 사람들도 가급적 이산화탄소를 덜 배출하는 방향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정할 것이다. 지구 상의 어느 곳에 살던지, 사람들은 탄소세를 덜 부담하는 방향, 즉 이산화탄소를 덜 배출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조정해 갈 것이다.
에너지와 물품을 소비하는 한, 이산화탄소가 전혀 발생되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 이산화탄소가 발생되는 양만큼, 지구상의 대기에서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쪽으로 동시에 노력을 기울여, 대기중 이산화탄소의 순증가가 없도록 하는 것, 즉 net zero 를 목표로 두어야 한다. 나무를 심고, 녹지를 늘이고, 탄소를 포집하여 지하나 바닷속에 저장하는 등의 노력을,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줄이는 노력과 함께 기울여야 한다.
화석 에너지로부터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기간시설 infrastructure 투자가 필요하다. 풍력 터빈이나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발전하는 것은 민간에 맡긴다고 해도, 전력망을 깔고, 전체의 전력 시스템을 관리하는 것은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 미래의 친환경 에너지는 주로 전기에 의존할텐데, 전기차를 본격적으로 보급하려면 충전 시스템의 기준을 정하고 전국에 망이 깔리도록 관리하는 주체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민간 기업은 아직 수요가 많지 않은 분야에 선제적으로 투자하려 하지 않고, 설사 투자한다고 해도 자신의 회사에게만 배타적으로 이익이 되도록 하려 하기 때문에 비효율이 매우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근래의 추세로 볼 때 에너지 전환은 빠른 기술 발전 덕분에 가까운 미래에 크게 개선될 것이다. 이러한 기술발전을 이끄는 연구개발은 국가가 주도해야 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 역사에서 보듯이, 산업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범용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는 민간 기업이 하려 하지 않는다. 민간이 개발한 기술은 저작권으로 보호되어야 함으로, 사회전반에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없다. 친환경 에너지는 화석 연료에 비해 생산 비용이 많이 들고, 에너지 집적도가 낮으며,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에너지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가진 친환경 에너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를 보완하는 안정적인 에너지원을 구축하도록 계획하고 관리하는 역할 역시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정부의 보조금이 추가되어야만 소비자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저자의 논의의 핵심은 탄소세이다. 즉 최종 소비자가 탄소배출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탄소 발생을 줄이는 방안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거둔 탄소세의 세수는 엄청난 규모일텐데, 이를 환경을 개선하는 목적에 한정해 쓰기보다는, 일반 재정에 포함시켜 최적의 효율성을 거두도록 하는게 좋다. 탄소세는 일종의 간접세이기 때문에, 소득이 낮은 사람이 소득이 높은 사람보다 더 많이 부담한다. 이러한 역진성을 상쇄하기 위하여, 소득이 낮은 사람에게 세금을 깍아주거나 사회복지를 늘이는 방법으로 하여, 전체의 형평을 맞출 수 있다. 앞으로 인구 노령화 등으로 선진국 정부의 재정이 크게 증가해야 하는 데, 탄소세를 통해 이러한 재정적 압박을 완화할 수 있다면, 탄소세의 도입은 정치적으로 실행 가능한 방안이 될 것이다.
선진산업국 사람들은 대체로 현재의 소비생활이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environmentally unsustainable 사실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이를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소극적이거나 자기 기만적으로 행동한다. 자신은 표면적으로 오염을 배출하지 않는 듯 하지만, 남들이 오염을 배출하여 만든 것을 수입하여 소비하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다. 명실상부하게 친환경적이 되도록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필요 없는 소비를 줄이고, 대중 교통을 이용하고, 환경위해적인 소비를 삼가고, 등등. 저자는 환경배출의 순증가가 0이 되는 미래가, 반드시 소비를 축소하거나 성장이 멈춘 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술 개발 덕분에 지난 수십년 동안에도 생산성이 크게 증가했듯이, 앞으로도 많은 환경 문제가 기술 개발에 의해 해결되고 생산성이 증가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낙관한다. 그럼에도, 현재와 같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unsustainable 방식의 생활을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지속가능하지 않을 not sustain 것이며, 환경 재앙을 맞을것이다.
저자는 이 분야에 오랜 연구를 한 권위자 답게, 명쾌한 논리로 문제를 분석하고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환경문제에 대한 다른 많은 책과는 구별되는 독보적인 책이다. 문제는 저자의 주장과 같이 탄소세를 부과하고, 특히 수입품에 대해서도 탄소세를 거둔다면, 개발도상국의 수출은 정체될 것이고 경제성장은 더뎌질 것이다. 현재의 환경 오염은 선진국이 과거 산업화 과정에서 저지른 것인데, 앞으로의 환경 개선을 위해 개발도상국은 산업화 성장을 멈추어야 한단말인가 하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두가지로 답한다. 지구온난화의 피해는 선진산업국보다 개발도상국이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더욱 크게 입을 것이기 때문에,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문제는 선진산업국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게도 시급한 과제이다. 개발도상국에게 빈곤문제가 환경문제보다 더 시급한 과제라고 해도, 선진 산업국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보상을 하는 것은, 지구 대기에 이산화탄소 농도를 줄이는 문제와는 별도로 접근해야 한다. 저자의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이 이러한 보상을 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기 때문에, 별도의 접근으로 선진산업국과 개발도상국간 형평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는 당장의 빈곤을 줄이는 것이 미래의 환경 재앙을 예방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큰 문제이기 때문에, 선진국의 탄소세는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환경 위기로 인한 선진산업국 사람들의 고통이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물질적 결핍으로 인한 고통과 유사한 수준이 될 때, 개발도상국 사람들도 환경 개선에 진정으로 동참할 것이다.
사람들의 소비 방식을 바꾸어 이산화탄소 발생의 순중가를 0으로 만들려면 상당한 규모의 탄소세가 부과되어야 하는데, 과연 선진산업국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는데 동의하겠느냐 하는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저자는 일시적으로는 탄소세의 여파로 실질 구매력이 떨어지고 소비가 줄어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소비와 행동을 조정할 것이기 때문에 탄소세는 탄소배출 저감이라는 목표에 근접할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사람들이 절약을 하도록 강제하는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과거 전시 상황이 유일하다. 서구의 다수의 사람들이, 미래에 닥쳐올 환경 재앙을 현재의 만족을 희생해야 할 정도의 절박함으로 받아들이려면, 지구의 기후변화가 앞으로도 한참은 진척되어야 할 것이다.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운 상태에 도달한다면, 사람들이 마지 못해 현재의 소비를 희생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이책은 유럽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세계 환경 오염의 주범인 미국과 중국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는 한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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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Jourdain. 1997. Music, the Brain, and Ecstasy: How music capture our imagination. Avon Books. 333 pages.
저자는 대중 과학 저술가이며 피아노 연주자이다. 이책은 음악의 원리를 물리적인 소리에서부터 음악 작품의 감상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소리 sound, 음 tone, 음율 melody, 화음 harmony, 리듬 rhythm, 작곡, 연주, 감상, 이해, 황홀경, 등으로 각 장 마다 구분된 주제에 대해 설명한다.
음악에서 '음' tone 은 특정 주파수의 소리 집합이다. 어떤 악기의 음이 단일 주파수로 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악기의 음은 '기본음' fundamental 과 이보다 높은 주파수의 여러개의 '상음' overtone 이 동시에 섞여 있다. 우리는 어떤 음과 이보다 높은 주파수의 배율로 만들어진 다른 음을 같은 음으로 인식한다. 이를 '옥타브 등가' octave equavalence 의 원칙이라 하는데, 옥타브가 높아질 때마다 주파수가 배율로 증가하며, 우리는 중간 옥타브의 소리와 위의 옥타브들의 소리를 같다고 느낀다. 기본음의 주파수의 1.5배에 해당하는 음도 상음에 섞여 있는데, 서구 음계에서 한 옥타브의 중간에 해당하는 '도'와 '솔'의 간격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기본음이 어떤 주파수여야 하는가는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두뇌는 주파수간의 간격 interval을 주로 구별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음계에서 악기를 조율할 때, 중간 옥타브 아래의 '라' A 음을 기준으로 하는 데, 이는 관행적으로 초당 110헬츠이다. 모짜르트 시대에 비해 근래로 올 수록 같은 음에 대해 약간 높은 수준의 주파수를 설정한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귀가 낮은 주파수보다 높은 주파수의 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의 서구 음계는 한 옥타브 간격을 균등하게 12개로 나눈 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7개 음은 우리의 귀에 서로 잘 조응하는 것으로 들리는 반면, 5개 음은 불협화음으로 들린다. '도레미파솔라시' 라는 7개의 온음과 5개의 반음으로 구성된 체계가 서구 음악의 기본 음계이다. 한 옥타브 내에 12개의 반음들을 서로 어떻게 간격을 조정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음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데, 장조와 단조라는 두가지 방식의 간격 조정 음계만이 현재는 주로 사용된다.
세계의 모든 문화가 한 옥타브의 간격 intrerval을 반드시 12개 음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나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간격으로 음을 구분하며, 많은 전통 문화의 음계는 5개의 간격으로만 구분한다. 특정 음계는 특정 문화의 음악적 관습의 산물이기 때문에, 서구 사람들에게는 서구의 음계가 편하고 좋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문화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 발전시킨 화음과 형식의 복잡성을 서구의 음계가 뒷받침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서구의 음계를 능가할만큼 풍부하게 복잡한 음악을 발전시킨 다른 음계는 찾을 수 없다.
음률 melody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음고 pitch 의 상하로 움직이며 음이 전개되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음악을 주로 멜로디로 인식한다. 어떤 음의 진행 contour 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음의 진행을 사람들이 싫어하는지는 분명하다. 대체로 화음에 부합하는 음의 진행이어야 한다. 동일한 음이 지나치게 많이 반복되거나, 화음에서 크게 벗어나는 음이 많거나, 비약이 심한 음악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화음 harmony 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여러 개의 다른 음고 pitch 음의 조합을 말한다. 서구에서 1500년대 이후에 단일 성부로부터 다성부 polyphony 의 음악이 발전하면서, 음을 조합하는 여러 방식이 개발되었다. 기본 3화음 triad 이 가장 많이 쓰이는데, 기본음에 3도와 5도 음정의 음을 쌓은 화음을 의미한다. 18~19세기에 바흐, 모짜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서구 고전음악은 화음 진행을 고도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조성음악이라 하여 서구 음악의 주류를 차지한다. 서구 고전음악은 화음의 고도화를 추구한 반면, 리듬 특히 박자의 복잡성은 희생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면, 많은 비서구 사회의 전통 음악은 화음은 복잡하지 않지만 리듬은 복잡한 음악을 탄생시켰다.
리듬 rythm은 음악의 시간적 경과이다. 리듬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규칙적인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는 박자 meter와, 의미있는 음의 뭉치인 악구 phrase 가 그것이다. 박자는 규칙적인 시간의 단위이지만, 반드시 기계적인 규칙성을 따르지는 않는다. 음악의 분위기에 따라 같은 박자에서도 좀더 느리게 혹은 빠르게 전개한다. 악구는 대체로 넷 혹은 여덟 마디로 구성된 의미있는 음의 뭉치이다. 음악 작품은 이러한 의미있는 음의 뭉치들이 위계 체계 hierarchy 를 형성한다. 음악 작품이란 단순히 여러 음의 나열이 아니라, 언어에서와 같이 위계체계를 형성하면서 복잡성과 추상성을 높인다. 음악에 대한 훈련이 깊어질 수록, 음의 뭉치들의 복잡성과 추상성의 위계체계가 높아지고, 이를 판독하는 능력도 길러진다. 예컨대 베토벤의 작품은 음의 뭉치의 위계체계가 높은 반면, 대중음악은 복잡성과 추상성의 위계체계가 얕다. 따라서 서구 고전음악의 고도의 위계체계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낄려면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한 반면, 대중음악은 훈련 없이도 음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작곡 composition 이란 작곡가의 머리속에 저장된 많은 패턴을 재료로 하여, 약간을 새로이 첨가하고 새로이 버무려 내는 작업이다. 마치 체스의 마스터가 수만개의 패턴을 기억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상황에 대처해 새로운 수를 두는 것과 흡사하다. 음악 활동에 열심히 매진하는 가운데에서만 영감이 떠오른다. 베토벤은 수천장의 습작 기록을 남겼는데, 이를 보면 수도 없이 지우고 고치는 작업을 통해서 완성작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한다. 전체의 구성과 중요 요소만을 대강 먼저 정하고, 이어서 나머지 부분을 채워가는 방식으로 일을 한다. 작곡가들은 머리속으로 음에 대한 이미지 auditory image 를 통해서 음의 전개를 만들어 내고, 이를 피아노로 확인하는 과정을 왕복하면서 작곡한다. 작곡가들은 소리에 민감하고, 감정적으로 격렬한 성정을 가지며, 조울증의 성향을 띤 경우가 많다.
연주 performance 란 음에 대한 이미지 auditory image 가 먼저 머리 속에 떠오르고, 이를 몸의 운동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많은 연주자들은 실제 손으로 연주하기 전에 머리속에서 음의 이미지를 통해 연주하는 절차를 밟는다. 어릴 때부터, 예컨대 6세부터, 음악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것이 이러한 음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중요하다. 일단 음의 이미지와 몸의 움직임의 연결이 확고히 정착되면, 연주의 대가들은 실제로 몸으로 많이 연습하지 않고도 머리속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이올린의 대가인 파가니니나 피아노의 대가인 리스트는 젊을 때는 많이 연습했지만, 대가가 되고나서는 연주 시간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정도 연습해야 음의 이미지와 몸의 움직임이 잘 연결된 상태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최소 10년 이상 매일 연습하여 10,000~ 20,000시간을 축적해야만 그러한 단계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해 understanding 이란 음들 사이의 복잡하고 추상적인 체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음악 애호가는 음악의 복잡한 패턴에 따라 앞으로 전개될 음들을 예상하고, 이러한 예상이 맞아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작곡가들은, 이러한 예상에 쉽게 부합하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우회하고 예상치 못한 새로운 요소를 삽입하면서, 음악의 청자와 일종의 밀고 당기기를 한다.
이 책은 저자의 음악 활동 경험과 과학적 이론적 지식이 잘 녹아 있다. 음악에 관련된 거의 모든 궁금증에 답하고 있다. 다른 과학 분야와 달리 음악의 분야는 별로 밝혀진 것이 많지 않음을 확인한다. 아마 예술의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오랫동안 음악을 접해 왔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음악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발견한 느낌이다. 저자의 과학 지식이 뇌과학 분야에 많이 치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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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ne Leighton and Edward Lopez. 2013. Madmen, Intellectuals, and Academic Scribblers: The Economic Engine of Political Chang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0 pages.
저자는 경제학자이며, 이 책은 정치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기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와 함께, 정치적 변화 사례들을 통해 그들의 이론을 옹호한다.
이야기는 1980년대 프로농구의 규칙을 바꾼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프로 농구에 공격시간 제한의 규정이 없던 시절, 많은 농구 경기에서 점수를 앞서는 팀이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고 볼을 돌리며 시간만 끌면서 관중의 흥미를 잃게 만드는 관행이 일반화되었는 데, 이 때문에 프로 농구 산업계가 위기에 처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공격시간 제한 규정이 새로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프로 농구 게임을 역동적이게 바꾸면서 관중을 흡인하여 큰 흥행 성공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따라 규칙을 바꿈으로서, 운동 선수의 인센티브가 바뀌었고, 그 결과 농구 선수의 행동 방식과 농구 게임의 내용이 바뀐 것이다.
사람들의 행동은 인센티브에 의해 좌우되는데, 인센티브는 제도의 산물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정치과정을 통해 제도로 구체화된다. 학자는 아이디어를 생산하며, 이들이 만들어낸 아이디어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지식인을 통해 사회 전반에 확산된다. 전문직 종사자, 변호사, 언론인, 연구소 연구원, 교사 등 아이디어를 전파하는 지식인의 유형은 다양하다. 이렇게 널리 퍼진 아이디어가 적절한 사회 환경을 만나면 정치인에게 채택되고, 정치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제도로 실현된다. 새로운 정책은 새로운 인센티브 시스템을 만들어내며, 그러면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고, 결국 사회가 바뀌게 된다. 학자들은 지금까지 축적된 다양한 아이디어를 취사선택하여 조합하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부터 힌트를 얻기도 하면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한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따른 새로운 인센티브 시스템을 도입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기존의 인센티브와 제도의 틀 속에서 이익을 누려온 기득권 집단 status quo 의 반발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는 사회환경이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사장된다. 그러나 어떤 아이디어는 외적인 변화 때문에 사회환경이 바뀌게 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고, 정치인에게 채택되어, 정책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부캐넌의 공공선택이론 public choice theory 은, 왜 비효율적인 정책이 효율적인 정책을 물리치고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설명한다. 소수의 결집된 행위자의 이익에 기여하는 정책은, 비록 전체로 볼 때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가져온다고 해도, 그들이 결집하여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반면 다수의 비결집된 행위자의 이익에 기여하는 정책은 그것이 전체적으로는 이익을 가져온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조직적인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책으로 구체화되기 어렵다. 외적인 환경이 변화하여 새로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새로운 정책이 요구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때, 기득권 집단이 옹호하던 기존의 정책에 대한 도전이 힘을 얻게 되고, 기득권 집단의 힘에 균열이 발생한다.
책에서 제시한 정치적 변화의 구체적 예는 다양한데, 다음 네가지 사례를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1970년대 미국에서 라디오 전파대역을 그당시까지 정부가 재량적으로 분배하던 시스템으로부터 경매 시스템으로 전환한 것, 1980년대에 민간항공서비스산업에 존재하던 엄격한 정부 규제를 풀고, 신규 진입, 가격, 노선 개설 등에 자유 경쟁 원칙을 도입한 것, 1990년대에 클린턴 행정부의 복지 개혁, 1990~2000년대에 주택금융관련 규제감독의 완화와 그 귀결로 2008년 금융위기 발생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케인즈의 거시 경제이론에 따라 1930년대 경제 대공황시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채택하였으며, 그이후 모든 서방의 국가들이 미국을 본받아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채택하면서, 그때까지 자본주의 경제의 큰 문제였던 시장의 큰 폭의 부침을 완화시킬 수 있게 된 것도 아이디어가 제도로 구체화된 다른 예이다.
치 책의 저자들은 자유시장 원칙을 옹호한다. 시장에서 무수한 참여자의 독립적 판단이 작용할 때 가장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이루어진다는 아담스미스와 하이에크의 주장을 옹호한다. 또한 아이디어가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힘이라는 관념론적 철학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디어가 적절한 사회적 환경을 만나야만 열매 맺을 수 있다고 하면서, 현실적인 조건과 운의 중요성 또한 강조한다. 기업 경영의 기업가 entrepreneur 못지 않게, 정치분야에서도 환경의 변화를 민감하게 읽어내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시에 도입하여 제도로 만들어내는 정치적 기업가 political entrepreneur 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들은 기존의 기득권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 을 한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어떻게 기득권 집단의 철옹성이 무너지고, 점진적이지만 제도의 변화가 찾아오는지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흥미롭다. 복잡한 현실 정치를 경제원리를 통해 설명해내는 그들의 순박함에 호감이 갔다. 그러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채택하는 데 적합한 현실적인 조건이 어떻게 형성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사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보다 이것이 더 어려운 부분이고, 이 때문에 기득권이 깨지기 어렵고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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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 Hobsbawm. 1962. The Age of Revolution: 1789-1848. Vintage. 308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1848년 유럽 혁명까지 약 50년간을 대상으로, 유럽 세계를 지배하던 구체제가 무너지고 근대 체제가 들어서는 과정을 서술한다.
구체제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왕,귀족,사제가 지배층을 형성하며 인구의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며 봉건제의 구속에 묶여 있다. 종교의 영향이 일상 전반을 지배한다. 봉건제 장원을 중심으로한 자급자족 경제이며,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은 미약하다. 이러한 구체제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심각한 균열을 보인다. 16세기 대항해시대 이래 상업이 발달하고, 18세기말 산업혁명이 불붙으면서 상공인의 부와 영향력이 커지고, 농민들이 농촌을 이탈하여 도시가 발달하고,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의 산물로, 부르쥬아라 칭하는 상공인 계층이 구체제를 뒤집어 엎은 사건이다. 직접적 원인으로는, 1756년의 7년 전쟁 결과 재정파탄에 처하고, 조세징수인의 가혹한 수탈과 흉작이 겹치면서, 농민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하여, 부르쥬아가 중심이 된 의회에서 왕,귀족,사제의 권한을 제한하는 결정을 내렸으며, 입헌군주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를 둘러싼 주변국들이 프랑스를 공격하여 구체제를 복구하려 하고, 왕당파와 개혁파 사이에 내전이 격화되면서, 혁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1792년 혁명 주도세력은 반대자를 엄격히 처벌하는 공포정치에 들어가고, 왕을 단두대에서 처벌하고 공화정을 수립한다. 나폴레옹 장군은 프랑스를 위협하는 주변 국가를 차례로 격퇴하고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하면서 영웅으로 숭앙되고, 결국 1799년 공화정을 버리고 황제에 등극한다. 나폴레옹 군대는 유럽 대륙을 거의 석권했으나,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하여 크게 패하고, 주변국가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들은 1814년 외국에 도피했던 왕을 다시 세웠으며, 1815년 귀양지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최종적으로 쫒겨남으로서 프랑스 혁명은 막을 내린다.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왕권신수설에 바탕을 둔 절대 왕정 monarchy 은 유럽 역사에서 사실상 막을 내린다. 나폴레옹이 점령한 지역 곳곳에서 공화정이 시도되었으며, 왕이 국가를 대표한다는 전통적 믿음 대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프랑스 혁명 정부가 외세의 위협에 대항하여 일반 민중으로부터 병사를 모집하여, 이들이 나라를 지키는 전쟁을 치르면서 굳어졌다. 나폴레옹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프랑스군은 애국심에 가득찬 민중의 군대였던 반면, 다른 나라의 군대는 귀족과 용병으로 이루어졌서 열심히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왕과 귀족들은 일반 민중을 무장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업적에 따른 보상의 원칙을 엄격히 적용한 반면, 귀족과 용병으로 이루어진 전통 군대는 열심히 싸울 동기가 약했다.
1814년 비엔나 회의 Congress of Vienna 를 계기로 나폴레옹이 점령한 지역에 국경이 새로 그어지고, 외면적으로는 구체제가 각 지역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일반 민중은 구체제를 더이상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830년과 1848년에 유럽 전 지역에서 구체제에 저항하고 공화정을 추구하는 폭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폭동들은 결국 진압되었으나, 이후 구체제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왕과 지배층의 권리를 제한하는 입헌 군주정으로 변화하고, 봉건 질서의 불합리한 구속을 폐지하고, 중산층의 권리를 확대하는 개혁이 속속 이루어졌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 nationalism을 고취시켰다. 구체제에서 왕과 귀족은 일반 민중과 유리되어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군이 진출하여 왕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각 지역에서는 언어와 종교를 중심으로 '민족' nation 이라는 정체성이 뚜렸해지고, 민족 국가를 세우려는 시도가 중산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 혁명군을 본따 유럽 전지역에서 지역의 일반 민중을 징집하여 민족 군대를 만드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민족 국가의 개념은 공고해졌다.
영국은 유럽을 뒤흔든 20년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다. 나폴레옹군이 영국 해군에 일찌감치 패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비교하여 프랑스는 중산층의 세력이 약했으며, 농민을 도시 노동자로 바꾸는 과정이 프랑스 혁명 때문에 더디게 전개되었으며, 7년 전쟁을 계기로 식민지 쟁탈전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패하여 많은 식민지를 잃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19세기에 들어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산업혁명이 빠르게 전개되지 못했다. 반면 영국은 19세기에 전세계를 식민지로 호령하고, 산업혁명에서 유럽 대륙 국가보다 크게 앞서면서, 엄청난 부와 군사력을 호령하는 제국이 될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정치 군사 영역에서 주로 전개되었지만, 사회구조, 예술, 종교, 과학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예술 분야에서는, 18세기 계몽주의를 기반으로 한 고전주의에 더하여, 프랑스 혁명 시기에 낭만주의가 출현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권위나 합리성에 대항하여, 인간의 감정과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는, 전통의 구속을 벗어버리는 혁명 정신을 반영한다. 프랑스 혁명은 기독교의 영향이 약화되던 18세기 계몽주의의 시대흐름을 가속화시켰다. 기독교 교회는 구체제를 뒷받침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군은 교회의 세력을 허물어 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요약 하자면,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주권의 새로운 체제가 성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의 힘은 19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꽃을 피워서,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와 기술 발달, 입헌군주제와 남성 모두에게 투표권의 확대로 귀결된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을 중심으로 근대가 출현하는 과정을 분석한 고전이다. 역사책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사건 서술이 거의 없고, 사회과학적 원인과 결과를 분석적으로 논의하기 때문에, 역사 사건에 대한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 계급 갈등을 중심으로 사회변화를 파악하는 사회학적 접근을 한다. 공산주의자 답게, 구체제, 자본주의, 부르쥬아지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노동자 농민에 대한 긍정적인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중부정과 삽입구가 많고, 생각의 전개에 따라 문장을 계속 확장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읽기가 매우 힘들다. 그럼에도 역사의 흐름에 대해 통찰력을 주는 대단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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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렬. 2009. 화학이 안내하는 바다탐구. 자유아카데미. 463쪽.
저자는 화학 해양학자이며, 이 책은 화학 지식을 동원하여 바다를 탐구한 결과를 설명한다. 바다물의 화학적 구성, 바닷물의 순환, 깊이에 따른 바다의 특성 차이, 바다의 지형, 바다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 조석과 파도, 등이 주요 내용이다.
화학 해양학에서는 온도와 염을 중심으로 바다를 분석한다. 깊이 및 지역에 따라 온도와 염에 차이가 있다. 바다는 깊이에 따라 표층과 중층 및 심해로 나눈다. 햇빛이 투과되는 표층의 깊이는 100미터도 안된다. 이 표층에서 대부분의 생명 활동이 전개된다. 1,000미터 이하의 심해에는, 0~2도의 매우 차가운 물이 적도에서부터 극지방까지 동일한 분포를 보인다. 바닷물에 녹아있는 염은, 소금의 구성 성분인 염소와 나트륨이 대부분(86%)을 차지하며, 이외에 황산, 마그네슘, 칼슘, 칼륨 등이 있는데, 지역에 관계없이 전세계적으로 염의 구성 비율이 동일하다.
바다는 매우 깊다. 전세계 바다의 평균 깊이는 3,600미터에 이른다. 육지의 연장인 대륙붕은 200미터 깊이 이하의 얕은 바다이며, 대륙붕을 넘어서면 가파른 경사를 지나 심해의 평탄한 해저가 넓게 펼쳐진다. 평탄한 해저 곳곳에는 깊은 협곡인 해구와, 화산으로 솟아오른 해령이 존재한다. 지구물리학 이론인 판구조론으로 바다의 지형을 설명할 수 있다. 대서양에는 남에서 북으로 길게 해저 산맥이 존재하는데, 이는 아메리카 판과 유라시아판이 서로 갈라지면서 벌어진 틈으로 마그마가 분출하여 만들어졌다. 지구의 판과 판이 만나는 지점에 매우 깊은 해구가 형성된다. 밀도가 높은 해양판이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은 육지판 아래로 들어가면서 해구를 만들고 지진과 화산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심해에 대한 탐사가 이루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닷물은 수평으로 뿐만 아니라 수직으로 순환한다. 표층의 바닷물이 심해로 내려가서 전세계 바다의 밑 바닥을 한바퀴 돌고 표층으로 올라오는 순환을 반복한다. 표층의 바닷물이 심해로 내려가는 입구가 대서양의 북쪽 끝에 있으며, 이곳에서 심해로 내려간 바닷물은 대서양 남쪽을 지나 인도양 바닥을 거쳐 태평양 북쪽에서 표층으로 솟아 오른다. 이러한 순환의 중간인 대서양 남쪽과 인도양에서 일부가 표층으로 용출한다. 이러한 전지구적인 수직 순환을 한번 하는데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일반적으로 해류라고 지칭하는 수평 순환은 표층에서만 일어나며, 심해는 매우 서서히 이동한다.
태평양 동쪽의 표층 온도의 이상 변화로 인해 태평양 서쪽 지방에서 기상 이변이 발생한다. 엘리뇨는 페루 연안의 이상 고온을, 라니냐는 그 반대 현상을 지칭한다. 이러한 변화는 수십년을 주기로 발생하는데, 원인은 모른다. 근래에 전지구적으로 표층 온도가 상승하면서 지구 온난화의 우려가 커졌다. 해양 온도의 변화는 지구 역사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했는데, 근래에 관찰되는 해양 온도의 상승은 1,800년대 이래 산업화와 함께 특이하게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바다는 인류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에도 바다에 대한 체계적 이해는 달 탐험보다 더 늦게 이루어졌다. 이 책은 전문 연구자의 서술로 바다에 관해 깊이있는 지식을 전달한다. 바다에 관해 알려진 지식뿐만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졌는지, 연구 방법과 계기를 설명한 것 또한 흥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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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d Gigerenzer. 2022. How to stay smart in a smart world: Why human intelligence still beats algorithms. Pneguin Books. 247 pages.
저자는 심리학에 배경을 둔 의사결정과 리스크 관리를 연구하는 학자이며, 이 책은 인터넷과 AI의 영향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 가져온 문제점과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한다.
인공지능 AI의 응용 범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과는 다르게 작동하며, 강점과 약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인공지능은 불확실성이 없고 고정된 규칙이 적용되는 안정된 환경에서 놀랄만큼 높은 성과를 낸다. 체스 게임이나 동일한 업무를 반복하는 데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이겼다. 반면 인간의 지능은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하여 진화한 산물이다. 인간이 활동하는 사회와 미래는 불확실성이 높으므로 인공지능이 잘 대응하기 어렵다. 주가와 금융위기를 예측하거나, 인간 행동을 미리 예측하거나, 질병의 발생과 전개 양상을 예측하는 등에서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낫지 않다. AI 의 능력에 대한 많은 논의는, AI를 개발하는 사람과 회사의 상업적인 동기 때문에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사람들의 행동과 가치관을 인공지능에 맞추어 바꾸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예컨대, 근래에 자율주행차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현재 그대로의 교통 환경에서 완전한 자율주행차는 가능하지 않다. 대신, 인간이 인공지능 환경에 맞추어 적응하는 (adapt to AI) 방식으로 변화할 것이다. 예컨대 자율주행차 전용 도로가 생기고, 그러한 도로에서는 인간의 주행이 금지되고, 모든 불확실한 변수가 제거된 교통환경이 그것이다. 이는 과거 자동차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자동차 도로에 인간이 들어가서는 안되고 마차가 다니지 못하게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AI와 빅데이터 분석은 기본적으로 변수들 사이에 통계적인 상관관계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는데, 이는 한계가 있다. 반면 인간은 이론적인 인과 관계를 통해 세상을 파악한다. 인과적으로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러한 사건과 통계적으로 연관된 변수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피상적이며 과거에 이미 발생한 상황에 이해가 국한된다. 과거에 발생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건이 전개된다면, 과거의 사건에 바탕을 둔 상관관계 지식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변이를 잘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 모델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변이를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모델을 만드는 데 사용되지 않은 사례에 대해 이 모델이 얼마나 잘 맞는지 검증해야 한다. 많은 사회과학 연구에서 제시하는 회귀분석 모델의 설명력은, 해당 연구에 사용되지 않은 다른 사례나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는 설명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은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인공지능은 감시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인공지능 서비스를 공짜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사생활 정보를 몽땅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게 내어준다. 이 회사들은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광고주에게 팔아 큰 이익을 얻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생활이 타인에게 털리는 것을 염려하면서, 사생활을 털어가는 서비스 회사에게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 자신의 사생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선택을 원치 않는다 (privacy paradox). 인터넷과 인공지능 회사는 사용자들이 더 오래 더 많이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개발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러한 서비스에 중독되어 사용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계속된 비디오 공급에서 눈을 거두지 못하는 것, 자신의 페이스북을 수시로 열어보아야 하는 것, '좋아요'에 집착하여 무수히 자신의 영상을 올리고, 항시 이를 의식하면서 행동하는 것, 등등. 이러한 소비자의 행동은 고도의 심리적 조작의 결과이다. 사람들은 자극적 뉴스와 영상에 관심이 더욱 쏠리기 때문에,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이런 쪽의 콘텐츠를 더 많이 제시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견해는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중국에서는 인터넷과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각 개인에 대해 사회 신용지수 social credit 를 산출하여 일상 전반에 활용하는 시범사업을 여러 도시에서 시행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금융 신용지수를 산출하여 금융 활동에 활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사회 신용지수의 산출을 위해 점수로 입력된다. 사회 신용지수는 사람들이 사회 규범을 잘 지키도록 유도하는 순기능과 함께, 체제에 비판적인 의견과 행동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서구 사회는 중국과 달리 정부가 아닌 인터넷 기업들이 개인 정보를 샅샅이 수집하며, 이를 광고주에게 판매함은 물론, 정부의 정보기관에게 제공하여 사회에 위험한 인물을 감시하고 색출하도록 한다.
인터넷과 인공지능이 가져온 인터넷 서비스 중독과 감시 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다. 현재처럼 서비스를 공짜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사생활 정보를 내주는 방식이 아니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대신 요금을 지불하는 구독 방식으로 전환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현재는 사람들이 서비스 요금을 지불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하고, 요금을 징수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정책에 대해 거대 인터넷 기업들은 적극 반대하겠지만, 정부가 주도하여 사회적 합의를 이끌고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이 제안하는 서비스 요금 유료화를 강제하는 정책이 실현되리라고 확신하는 것 같지 않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인공지능이 가져오는 미래가 반드시 사람들을 더 행복하거나 편안하게 만들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잘 할 수 있도록 인간의 행동과 사회 환경을 바꾸어 가리라는 예감이 든다. 중국의 사회 신용지수의 예에서 보듯, 사회질서와 통제에 대한 가치관도 바뀔 것 같다. 개인의 자유를 핵심 가치로 두는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조화와 질서를 우선시하는 사회로. 싱가포르식 사회 모델이다. 통찰력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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