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어느 곳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편집자가 내 글을 난도질 하여 최종 원고는 초고와는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다. 다음은 내가 처음에 쓴 초고이다.
뉴욕은 세계인이 방문하고 싶은 도시 중 1위로 지목된다. 왜 세계 사람들은 뉴욕을 찾을까? 지금 뉴욕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도 항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에 미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뉴욕은 사람들이 떠나고 빈곤과 범죄가 판치는 무서운 곳이었다. 그 당시 센트럴 파크는 대낮에도 걸어 다니기가 꺼려졌다. 1990년대에 미국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뉴욕은 부활하였다. 인구가 늘고 유명 연예인과 부자가 뉴욕에 산다는 소문이 퍼지고 기업이 뉴욕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뉴욕은 모든 미국인이 한번쯤 살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렇다고 뉴욕의 생활이 다른 곳보다 풍족하고 편하기 때문은 아니다. 뉴욕의 집값은 미국에서 가장 비싸기에 모두들 조그만 아파트에서 옹색하게 산다. 뉴욕의 주차비는 엄청나기에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서 출퇴근한다. 미국의 상징인 무한한 풍요와 소비지상주의는 뉴욕 사람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뉴욕의 매력은 ‘다양성’에 있다. 뉴욕은 예전부터 미국으로 이민자가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이들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뉴욕에 자신들만의 민족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19세기에 미국에 온 독일인,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유태인, 등 유럽의 이민자들이 집단적으로 살던 곳은 지금도 자취를 남기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훨씬 다양한 사람들이 뉴욕으로 몰려왔다. 중국인, 인도인, 중남미인, 한국인, 베트남인, 러시아인, 중동인, 아프리카인, 등등. 뉴욕에서 만나기 힘든 나라 사람은 아마 북한이 유일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그것도 각각 적지 않은 수가 한 도시에 모여들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그들은 고유의 언어와 음식과 관습을 가지고 왔다. 성서에 나오는 바벨은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안 되어 혼란에 빠졌다고 하는데, 뉴욕은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함 덕분에 융성하고 있다. 다양성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삶의 활력을 제공한다.
뉴욕의 삶은 지루할 겨를이 없다.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을 매일 접하는 것은 때로는 혼란스럽지만 신선한 경험이다. 피부 색깔은 물론, 얼굴 표정, 옷 입는 스타일, 치장하는 방식, 등 외모에서 차이가 난다. 서로 알게 되면, 행동거지나 예의범절, 가족 관계,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어제 본 티브이 드라마, 생각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나와 약간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길에서, 전철에서, 직장에서, 식당에서, 공원에서, 슈퍼에서, 집주위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때때로 문득 느낀다.
아시아 사람은 예의가 바르고 성실하며, 흑인은 정이 많으며, 인도 사람은 계산이 빠르며, 동유럽 사람은 무뚝뚝하고 속을 알 수 없으며, 베트남 사람은 영리하며, 중남미 사람은 열심히 살지만 기분파다. 뉴욕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뉴욕의 음식 문화는 다양하다. 미국의 고유 음식이라고 하면 햄버거와 스테이크 정도일 텐데, 뉴욕에서는 특색 있는 요리를 싼 가격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길모퉁이 피자집은 정통 이탈리아식 피자를 화덕에 구워서 내놓으며, 그 옆 인도 음식점에는 인도 사람이 만드는 특이한 향의 카레 요리가 미각을 자극하며, 그 옆 중국 음식점에는 중국말을 하는 주방장이 만드는 중국 요리가 가지 수를 셀 수없이 많으며, 그 옆 멕시코 음식점에는 타코 요리가 싸고 맛있으며, 그 옆 타이 음식점에는 일전에 태국 여행에서 맛보았던 타이 요리를 타이 여인이 친절하게 서빙하며,... 무궁무진하다. 이들 음식점의 주요 요리만 돌아가며 먹어도 한 달 내내 같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 이 모두가 그 나라 사람들이 고유의 재료로 만드는 ‘정통’ 요리이다.
뉴욕에는 볼거리가 넘쳐난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대체 몇 개인지 셀 수 없이 많다. 다양한 주제의 박물관이 있다. 인류 문명의 궤적을 보여주는 권위 있는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고전 미술 중심의 미술관, 최근의 작품을 전시하는 현대 미술관, 유태인 대학살 박물관, 중남미 문화 박물관, 소방 박물관, 금융 박물관, 디자인 박물관, 등등. 박물관과 미술관이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아이디어를 집약해서 보여준다면, 뉴욕의 수많은 갤러리와 부티크는 아름다움이 요즈음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말해준다.
뉴욕에서는 거의 매일 어디에선가 큰 전시회가 열리고 다양한 주제의 행사가 펼쳐진다. 요즈음 한창 진행되고 있는 뉴욕 패션 주간의 행사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를 위협하고 있다. 특히 뉴욕에 사는 다양한 민족들이 벌이는 민족 축제는 뉴욕 생활에 활기를 더한다. 이들은 맨해튼의 번화가에서 화려한 퍼레이드를 벌인다. 남녀노소가 함께 행진을 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구경꾼에게 손을 흔든다.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동네 전체에 만국기가 휘날리고, 흥겨운 음악이 거리에 넘치고, 노점 좌판에서는 민족 고유의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가게에서는 왕창 세일을 하고, 사람들은 곳곳에서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들이 서로 즐기는 모습을 보면 이방인인 나도 왠지 즐거워진다.
타임 스퀘어는 뉴욕 도심에 있는 교차로 광장인데 가장 뉴욕다운 곳이다. 화려한 광고 전광판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집채만 한 전광판은 폭탄을 퍼붓듯 정신없이 이미지를 쏟아 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독수리가 날다가, 란제리만 입은 여인이 요염한 포즈로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일렬로 건장한 젊은이들이 행진한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은 촌사람이 명동에 처음 온 것 같은 표정으로 인파에 떠밀려 간다. 껴안고 키스를 하는 사람들, 광장 계단에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 움직이는 관광버스 지붕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며 에너지를 느끼고 즐거워한다.
뉴욕이 1990년대에 부흥하게 된 것은 미국이 지식경제로 이전하면서이다. 지식을 다루고 지식을 생산하는 전문직이 경제를 주도하면서 다양성은 각광을 받는다. ‘창의적 계급’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아이디어가 삶의 핵심이다. 이들에게 단조로움이란 쥐약이다. 이들은 다양성을 접하면서 활력을 얻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산한다. 뉴욕의 지역신문인 뉴욕 타임즈가 전국적으로 지식인들이 구독하는 신문이 된 것은 당연하다. 뉴욕은 아이디어 산출의 중심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적인 삶이라고 하면 교외에 잔디밭이 있고 주차장이 넒은 집에 살면서, 주말에는 거대한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내고, 풍족하게 소비하는 생활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편할지는 모르지만 단조롭고 지루하다. 교외는 호기심을 질식시키는 공간이다. 반면 뉴욕의 거리는 항시 사람으로 북적이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하고 새로운 자극을 받는 곳이다. 뉴욕의 다양성을 탐내는 사람은 젊은이만은 아니다.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거리에서 한가하게 거니는 노인을 흔히 마주친다.
물론 뉴욕의 삶은 자극이 많기에 때로는 피곤하다. 한국 사람은 이런 삶에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서울과 다른 점은 뉴욕에는 사람의 다양성과 그것이 빚어내는 다양한 문화가 있다. 바로 그것이 뉴욕을 활기차고 호기심 넘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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