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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5. 12:46

Nassim Nicholas Taleb. 2018. Skin in the Game: Hidden asymmetries in daily life. Random House. 236 pages.

저자는 유가증권 딜러의 경험을 바탕으로 위험의 속성을 세상사에 적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에 간여하는 사람이 그 일의 결과, 즉 성패의 위험을 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자신의 일의 결과를 자신이 책임져야 할 때 사람들은 상황을 잘 이해하며, 자신의 역량을 최고도로 발휘하며, 사회 정의가 바로 서게 된다. 반면 일의 결과를 자신이 책임지지 않는, 일의 결과가 만들어내는 이익은 자신이 챙기지만 손해는 다른 사람이 지게 하는 그런 구조는 현실을 외곡하고 결국 망하게 되는 길이다.

금융가, 학자, 저널리스트, 분석가, 정책 입안자들은 말로만 일을 할뿐 그 일이 초래하는 실제의 위험을 지지 않거나, 이익만을 선택적으로 챙기고 손실은 남에게 떠넘기기 때문에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지식인은 현상을 복잡하게 설명함으로서 먹고사는 무리이다. 그들은 자신의 말이 맞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료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가가 중요한데, 지식인들은 복잡하게 보여야만 마치 중요한 것을 하는 듯이 보여서 먹고살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외곡하는 일에 공모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헬스장에서 근육의 힘을 키운다는 목적으로 복잡한 기구를 잔뜩 들여 놓지만 막상 바벨은 없다. 가장 단순한 바벨이 근육의 힘을 키우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헬스장에 있는 복잡한 기구는 특정 결함이 있는 사람에게 특정 부위를 재활시키는 목적의 것이다.

그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근육의 힘을 단련시키는데 바벨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지적은 맞지만, 복잡한 기구는 근육의 힘을 단련시키는 목적만은 아니다. 단순한 반복과 권태를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에 대응한 수단이다.  전문가가 복잡한 설명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은 '냉혹한 사실'(brute fact)을 원하지 않는다. 설사 복잡한 설명이 맞지 않더라도 냉혹한 사실의 냉혹함을 감추어주는 이야기꾼의 복잡한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냉혹한 현실과 실패의 쓴맛을 잊고 위무받는다. randomness 의 냉혹함을 똑바로 바라보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왜 나에게 이런일이?'(why me?)라는 질문은 정확한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위무를 원하는 것이다. 전문가와 종교인이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부응해 위무를 제공한다.

지식인보다는 상인, 사업가, 장인이 더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 상인, 사업가, 장인은 일의 실패 위험을 본인이 지며 실제 가치있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반면, 지식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위험을 지지 않으며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에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말이나 생각보다는 행위와 결과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 무엇을 하는지, 세상이 정말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것은 현실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전문가가 어떻게 진단하는지가 아니라, 세상이 작동한 결과에 주목해야만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있다. 시간의 시험을 통과하여 살아남은 것만이 합리적인 것이다.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탈락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시험만이 일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다. 세월의 시험을 통과한 할머니의 지혜가 사회과학자의 분석 결과보다 더 값지다.

평균으로 계산한 위험의 확률은, 드물지만 한번 닥치면 큰 피해를 주는 위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일상의 위험 중 후자의 것이 많은데, 우리는 이러한 위험을 직관적으로 알기에 피한다. 이는 손실 회피(loss aversion)의 성향으로 나타나는 데, 이러한 인식의 편향성(bias)은 생존을 위하여 꼭 필요하다. 진화의 결과 이런 성향을 가진 생물만 살아남았다.

저자는 간접 경험의 지혜를 인정하지 않는데, 인간의 지식의 발전은 사람들의 직접경험이 간접경험으로 축적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자연과학이나 기술의 세계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위대한 발견과 지식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 시대보다 오늘날 사회에 대한 이해가 더 높으며, 덜 폭력적이며, 비참이 덜 하고, 더 잘살게 되지 않았는가? 물론 말로 먹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적처럼 필요없이 현상을 복잡하게 외곡하며,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 비겁자라는 지적은 맞다. 그러나 지식 행위 전반을 부정하는 저자의 반지성주의에는 동의할 수없다.

이 책은 잠언집의 성격이다. 권력자와 전문가 집단의 권위와 위선에 대해 도전하며, 냉소적인 에피소드와 경구적인 발언으로 채워져 있다. 그가 쓴 기존의 책의 메시지를 반복한다. 그가 제시하는 메시지는 가치있지만, 책 전체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별 상상력없이 반복한다. 그는 겸손하고 독자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라틴어와 수사를 계속 나열하는 것은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저자 자신이 권위를 탐하는 행위이다. 그가 조금더 친절하고 겸손했다면, 사람들이 그의 지혜에 눈을 떠서 덜 어리석게 살아갈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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