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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24. 12:22

  미국의 여론조사에서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다. 미국인 주류 집단의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에 있으므로 미국의 식자층은 이러한 변화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물론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해서 신에 대한 믿음까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미국인 열 명 중 아홉은 어느 정도는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유럽사회는 이미 세속화되어 신을 믿는 사람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은 서구문명에 속하면서 근래까지 세속화의 물결이 침투하지 않은 예외적인 사회로 여겨져 왔다. 과학 기술의 힘을 신봉하고 물질주의와 소비문화가 팽배한 미국인이 독실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율배반처럼 생각되나, 실제 미국인 중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적지 않다. 기독교 근본주의를 추종하는 복음주의 교파 개신교 교도만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런 미국인의 독실한 신앙심이 근래에 두드러지게 균열하고 있다.

  미국인의 개인주의는 개신교 신앙과 맞닿아 있다. 신에 대해 개인이 홀로 영적인 책임을 지며,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신에게 다가가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기며, 신이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교리 등은 모두 개인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것을 명한다. 부모나 형제조차도 자신의 신앙에 직접적으로 간여할 수 없다.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를 통해 서로 사교하고 믿음을 부추기며 지내지만, 개신교는 신앙에 관한 한 개인이 사막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근래에 많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하며 교회에 나가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은 개인주의의 발현이다. 이들은 기성의 교회 조직이나 자신 이외의 외부의 권위를 부정한다. 삶의 의미를 찾고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서 기존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용감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서 혹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은 결국 허무로 흐를 위험성이 크다. 기존 종교나 교회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유럽의 경우 세속화된 인간으로 이전하는 중간과정이었다. 이들에게 신 혹은 초월적인 힘에 대해 막연한 개념은 남아 있으나 인간사는 인간이 관장하는 것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질문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할 것이지만 미국인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보통 미국인의 생각이다. 신이 없으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도덕이 없고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관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극한 개인주의자와 무신론자가 합체가 되면 무서운 사람이 탄생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생각은 약간 다를 것이다. 질서라는 것은 신으로부터 보다는 내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나온다. 내가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신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나의 가족이나 내가 속한 집단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다. 동양 사회에 절대자 신을 모시는 종교가 큰 세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게 해달라는 구복적인 신앙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절대적인 가치나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는 믿음은 동양 사람에게 생소하다.

  서구인이 교회와 신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절대적인 가치와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나서는 노력이 어디에 귀결될지 궁금하다. 불교의 참선이나 요가 등과 같이 자신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리 큰 성과를 거두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솔직히 자신의 내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가치 있는 무엇을 발견하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는다. 나는 생물학적인 존재이면서 사회적인 존재이다. 생물학적인 나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한다면 아마도 진화생물학에서 주장하는 ‘종족 본능’이 최고로 추구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왜 종족이 보전되고 융성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인간이 너무 많아서 지구상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가?

  사회적인 나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한다면 아마도 이웃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찾을 것이다. 사회의 복리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나의 행위에서 내가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궁극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신에 귀의하여 모든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는 것이 가장 쉬운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상실할 때 의지할 것은 주위의 이웃, 내가 속하는 사회밖에 없다.

  어찌 생각하면 왜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가치가 되어야 할지에 의문이 든다. 인류가 멸망한다고 하여도 그만 아닌가? 자연 그 자체에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의 기준이 없으므로 인류의 생존과 발전은 인간이 임으로 만들어낸 가치일 뿐이다. 결국 생물학적인 생존 본능만을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서구인들이 개인주의를 견지하면서 어떻게 신에게서 떠나서 삶의 의미를 찾을까? 아마도 헤매면서 살 것이다. 왜 사는지의 질문을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하고, 정 떠오른다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뒤로 미루고, 일상의 번잡함에 묻혀서 살다가 가는 것이다. 편하게 사는 것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바쁘고 벅차지 않겠는가?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삶이니 종교나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으로 하고 말이다. 이러한 주류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특이한 사람은 무시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