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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31. 13:39

2020. 12.9. 작성.

LA night view, from pinterest.co.uk, YocalFM Presenter

 

나는 한때 미국에서 살았고 여러 도시를 방문했지만, 로스앤젤레스(LA)는 좀처럼 갈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그곳에 사는 가까운 친지를 방문하여 수일간 머물렀다. 오래전 이민 간 친지를 머나먼 이국 타향에서 만났을 때 반갑고 울컥했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녀는 내가 어릴 때 함께 살며 나를 무척 귀여워해 줬다. LA 코리아타운을 돌아다니며 허름한 건물에 한글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보고, 한국의 거리와 흡사함에 익숙한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미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사는 삶의 고단함을 읽었다.

또 다른 미국의 중심,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는 미국에서 뉴욕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LA 행정구역상의 인구는 사백만이 채 못 되지만, LA 생활권까지 포함하면 천삼백만 명에 달하는 거대 도시이다. LA는 도시가 주변으로 무계획적으로 팽창한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도심에 몇 개의 고층빌딩을 제외하고는 낮은 건물들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다. LA 주변을 감싸고 고속도로가 스파게티처럼 얽혀 있으며 통근시간에 교통 체증이 심하기로 미국에서도 손꼽힌다. 그 덕분에 한때 LA는 대기오염이 건강을 위협할 정도로 심한 도시로 명성이 높았다.

근래에 샌프란시스코의 실리콘 밸리가 뜨면서 약간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LA는 서부에서 산업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꾸준히 성장하는 서부의 중심 도시이다. LA에는 제조업에서 엔터테인먼트와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이 왕성하다. 뉴욕, 보스턴, 워싱턴 DC와 같은 동부의 도시들이 미국 역사의 중심에 있다면, 로스앤젤레스는 그러한 정통적 미국의 정반대를 상징한다. 영국의 식민지에 뿌리를 두고 유럽에서 온 백인 이민자들에 의해 건설된 미국의 전통은 LA와 거리가 멀다.

현재 LA에서 백인은 전체 인구의 3분의 1도 못 된다. 중남미계 이민자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며, 나머지를 아시아계와 흑인이 각각 10%씩 나누어 갖고 있다. 2040년이 되면 백인이 미국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고 하는데, LA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소수인종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 되었다. 사실 LA에 중남미계 이민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당연하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이 1848년에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빼앗은 땅이다. 1980년대에 멕시코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올 때까지 미국과 멕시코 간 국경은 사람들이 수시로 왕래했다. 멕시코인들은 미국에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 넘어와 일하다 일이 뜸해지면 본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지내는 생활을 오랫동안 반복해왔다. 그러다 1980년대에 국경 관리가 엄격해 지면서 한번 미국으로 넘어온 멕시코인들은 다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LA와 같이 국경에 가까운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특이한 발전

동부 사람들이 보기에 로스앤젤레스는 허황한 꿈에 부푼 사람들이 모여 만든 도시이다. 1849년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사금이 발견되면서 미국 동부에서는 물론 유럽과 아시아에서까지 일확천금을 좇아 모여들었다. LA는 바로 이 금 채굴자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조하고 조달하는 산업이 붐을 이루면서 성장했다. 사실 골드러시 때 금을 채굴하여 돈을 번 사람보다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대주면서 돈을 번 사람이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청바지를 제조하는 리바이스가 대표적 사례이며,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가 골드러시 덕분에 발전했다. 19세기 후반 LA 인근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한때 천 개가 넘는 석유 채굴 봉이 있었으며 미국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상당 부분을 LA 유전에서 조달했다. 지금도 LA의 북서쪽 다저 스타디움 근처에서 석유 채굴 펌프가 가동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LA20세기 들어 지금까지 세 번의 계기를 통해 크게 변화했다. 처음은 20세기 초반으로 LA가 연중 항시 햇빛이 비치고 따뜻한 기후에 매력을 느낀 동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이다. 1885년에 동부와 LA를 연결하는 대륙횡단 철도 산타페 노선이 완성되면서 이것을 타고 동부 사람들이 LA로 대거 이주하였다. 이들은 그때까지 조그만 항구도시에 불과했던 LA에 부동산 개발 바람을 일으키며 큰돈을 벌었다. 뉴욕에 본부를 두었던 영화산업이 LA로 건너와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건설하였으며, LA에서 멀지 않은 사막 한가운데에 도박도시인 라스베이거스를 건설한 것도 그 무렵이다.

두 번째 발전의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찾아왔다. 미국이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LA는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조달하는 근거지로 크게 성장했다. 그때까지 미국의 산업 시설은 모두 동부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하여 서해안까지 운반하여 전쟁을 치르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기에 LA에 군수 공장을 대규모로 건설한 것이다. LA에는 군함과 전투기와 무기를 생산하는 첨단 공장이 많이 들어섰는데, 이후 첨단 방위산업이 LA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게 되었다.

세 번째 변화는 1965년 이민법을 개정하면서다. 그 이전까지 서유럽 출신의 이민자만 받던 이민 제한을 폐지하고, 세계의 모든 나라에 동등하게 이민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 법이 발효되고 얼마 지나자 매년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중남미와 아시아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1960년대에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기존의 인종차별적 이민정책을 폐지하고 인종과 무관하게 이민자를 받아들였을 때, 중남미와 아시아로부터 그렇게 많은 이민자가 몰려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970년경에는 제2차대전의 폐허를 딛고 유럽이 이미 발전하였기에 미국으로 건너오는 이민자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새로운 이민자들의 도시

1970년대이래 멕시코와 인접한 남서부와 서해안 도시에는 중남미와 아시아로부터 들어온 이민자들이 넘쳐났다. 급기야 1990년대에는 미국의 저명한 학자들이 미국 정신의 몰락”, “미국의 정체성의 위기등을 들먹이며 반이민 정서를 부추겼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유럽과의 연결을 중시했으며 대서양 연안의 동부 도시들이 유럽과 연결의 중심에 있었는데, 20세기 후반에 들어 아시아와 태평양의 중요성이 주목받으면서 태평양 연안의 도시들이 새로이 부상한 것이다.

LA는 근래에도 중남미와 아시아로부터 이민자가 계속 유입하면서 성장하고 있지만, 이 도시는 태생적으로 발전에 한계를 안고 있다. 물이 부족한 것이다. LA에서 내륙 쪽으로 맨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산맥이 보이며 그 너머는 막막한 사막이다. 원래 LA를 관통하는 강이 있었지만, 점차 수량이 감소하여 지금은 복개된 하수 하천에 불과하다. LA시는 북동쪽 네바다주 인근으로부터 매우 먼 거리를 잇는 수로관을 통해 식수를 공급받고 있다. 근래에는 물 사용을 통제하여 잔디에 물을 주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미국의 태평양 시대의 중심인 LA는 백인이 아닌 중남미와 아시아 이민자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정치의 가장 기층조직인 지역 교육위원회 위원에서부터 시장과 연방 하원의원에 이르기까지 선출직에서는 중남미와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물론 LA에서도 정부와 대기업의 고위직은 여전히 백인이 다수이지만. 뉴욕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과 교역하는 화물 운송 덕분에 성장했다면, LA는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 국가들과 교역하는 덕분에 성장했다. LA 사람들과 LA 경제의 활력은 아시아에서 온다.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경제위기 때 LA 또한 크게 타격을 받았다.

LA도 미국의 일부이므로 미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인종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92LA 폭동은 한국계 이민자들에게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남겼다.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운전자를 백인 경찰 여럿이 심하게 구타하는 장면이 미디어를 통해 퍼지고 이들 백인 경찰이 법정에서 무죄 방면되면서 폭동이 촉발되었다. 이 폭동에서 유독 한국계 이민자의 사업장만 골라서 파괴 약탈당한 것은 한국계 이민자들에게는 억울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흑인을 억압하고 착취한 것은 백인인데 왜 죄 없는 한국계 이민자들이 당해야 하냐고. 세상은 그런 것이다. 한국계 이민자와 흑인은 미국 사회에서 둘 다 약자이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반면 한국계 이민자와 중남미계는 사이가 좋다. LA 코리아타운에는 한인보다 중남미계 이민자들이 훨씬 더 많이 살며, 한국계 사업장에는 항시 중남미계 사람들이 일하며, 한국계와 중남미계는 서로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이 많다.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LA의 코리아타운에 사는 한인들도 미국인인가 하는 질문을 한다. 물론 그들은 법적으로는 엄연히 미국인이지만, 백인들은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코리아타운에 사는 한인들은 미국 주류 사회의 움직임보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많다. 그들은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인으로서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LA는 미국의 서부 개척의 신화가 지금도 진행 중인 곳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서 건너온 이방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미국의 전통과는 단절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곳이다. LA에서는 대를 이으며 사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LA에서 이민자들이 접하는 환경은 그들의 과거와 너무도 다르다. LA에서 오늘을 힘들게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현재의 역경을 이기면 그들의 자녀들이 성공하여 미국의 주류로 살 것이라는 꿈을 꾼다. 미래의 꿈을 꾸며 열심히 매진하는 인생은 어떻든 의미 있지 않은가. 로스앤젤레스에 한인타운을 거닐며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2012. 11. 9. 11:58

  20세기 초반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서구인의 생활 방식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도시가 확장되고,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특히 공간이 넓은 미국에서 자동차의 영향은 두드러진다. 미국인에게 자동차는 실용 이상의 그 무엇이다. 자동차를 벗어나지 않고 식사하고, 영화 보고, 사랑한다. 미국 문화에서 자동차를 타고 정처 없이 전국을 헤매며 여행하는 것은 젊음의 상징이다.


http://www.economist.com/news/business/21564821-carmakers-are-starting-take-autonomous-vehicles-seriously-other-businesses-should-too

The driverless road ahead

Carmakers are starting to take autonomous vehicles seriously. Other businesses should too





 

  운전사 없이 가는 자동차를 조만간 주위에서 볼 것 같다. 요즈음 외신에서는 생산의 기계화, 컴퓨터화하는 주요 분야로 운전의 자동화를 언급한다. 운전사가 필요 없는 자동차는 생산 방식과 삶의 양식 모두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 분명하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고통이 감소되면 사람들의 행동반경은 훨씬 더 넓어질 것이다. 잠을 자면서 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이동하는 것이 일상화될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는 인간 운전수의 결함이 없기에 교통문제는 많이 해결될 것이다. 고질적인 도로 정체는 해결될 것이고 교통사고도 거의 없을 것이다. 운전수 없는 자동차는 직업과 산업의 양상을 바꾼다. 미래 자동차 산업의 상당 부분은 소프트웨어 회사가 차지할 것이다. 물류 운송에서 인간의 역할은 줄어들고, 교통경찰은 대부분 사라지며, 신호등 또한 역사적 유물이 될 것이다.

 

  필요로 할 때 언제 건 자동차가 스스로 올 것이기에 자동차 소유에 대한 개념도 바뀔 것이다. 현재 자동차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차장에서 머물고 있는데, 이렇게 비효율적인 소유 관행은 사라질 것이다.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자동차가 사용가능하다는 면에서는 지금과 차이가 없겠으나, 자동차 사용 비용은 현저하게 낮아질 것이다. 지위 과시용으로 큰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이 이런 시대에도 계속될까? 인터넷의 등장으로 요즘 젊은이들이 과거보다 자동차에 덜 관심을 갖는다고 미국의 자동차 제조 회사들이 걱정하는 데, 운전수 없는 자동차의 등장은 자동차 제조회사에게는 엄청난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자동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운전사가 없는 자동차의 시대는 어느 날 갑자기 오지는 않는다. 지금도 컴퓨터로 제어되는 운전은 부분적이나마 실제 활용되고 있다. 자동으로 주차하는 기능이라던가, 충돌 위험에 처할 때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하여 충돌을 방지하는 기능은 고급차에 옵션으로 장착되고 있다. 구글은 사람이 운전하지 않는 자동차를 지금까지 1년 이상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차가 지금까지 사고를 딱 한번 냈는데 그것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동승한 운전자가 수동 운전 기능으로 바꾸어 운행했을 때에 발생했다.


  사람이 운전하지 않는 자동차가 나오면 그런 자동차를 타고 정처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고 싶다. 각자의 여행 취향에 따라 컴퓨터가 자동으로 길을 안내하면서 우리를 즐겁게 하리라 기대한다.  

2012. 10. 20. 22:53

   교과서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책이다. 성장기에 교과서에서 읽은 내용은 일생동안 기억에 남아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 서로 간에 생각의 공통된 출발점이 된다. 그렇기에 교과서에 담긴 내용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 사회에 힘 있는 사람들이 사회 구성원의 머리 속에 주입시키고 하는 것이 교과서에 담긴다.



http://www.economist.com/node/21564554

 

Textbooks round the world: It ain’t necessarily so

The textbooks children learn from in school reveal and shape national attitudes—and should provoke debate





 

   최근 한국 사회에서 교과서에 기독교의 창조론을 집어넣고자 하는 시도가 좌절되었다.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던 사건이 한국에서도 일어났지만 결과는 달랐다.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창조론을 과학 교과서에 넣는데 성공했으나, 한국에서는 실패했다. 한국의 기독교 세력은 미국만 같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와 지리 교과서는 그 사회의 집단적 편견을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주입한다. 한국인은 단군의 자손으로 단일민족이며, 선조로부터 삼천리 금수강산을 이어받았으며, 우리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배운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면서 숭고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학창시절 한국사를 배우면서 무수한 연도와 이름을 외어야 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었다. 왜 사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딴 것을 외우는데 내 삶을 낭비해야 할까? 나의 삶의 의미가 우리 민족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에 대해 다양한 사회를 경험하면서 의심하게 된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왕왕있다. 미국의 교과서에서는 인간의 성에 대해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남녀 간에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며, 인간의 성이 사람들의 생애와 그들이 사는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낙태를 많이 하는 나라이다.

 

   각 나라의 교과서에서는 자신의 나라가 최고라는 생각을 주입시킨다. 특히 미국 사람의 경우 이러한 선민의식, 특별의식은 유별나다. 미국 사람들은 조상을 공유하지 않기에 ‘미국’이 표상하는 이념을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의 국민들이 반드시 하나의 나라로 지켜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사회 집단들간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쉽게 쪼개질 것이다. 미국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미국사와 영어에 특히 비중을 많이 할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계의 나라들이 역사 교과서를 공유하는 것이 가능할까? 일본, 한국, 중국의 사람들에게 역사교과서를 함께 만드는 아이디어에 관해 물어보니 부정적인 답이 긍정적인 답보다 많았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인이 최고라는 생각, 조상의 축복 속에 번영하리라는 생각을 후손에게 주입시키고 시킬 것이다. 자신의 조상이 이웃을 괴롭히고 착취했으며, 전쟁을 벌여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후손에게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미국 사람들 역시 자신의 조상이 인디언과 흑인을 무참히 살해하고 번번이 약속을 어고 비인간적으로 착취한 철면피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케 한다면 그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치러야만 세상은 정의롭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자기 파괴적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 관해 알면 알수록 저들에게 천벌이 내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교과서에는 사회의 힘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 있기에 소외된 사람들은 관심에서 배제되어 있다. 교과서에서는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사회는 강자의 논리에 따라 전개되며 이것이 사회의 발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본가는 중요한 일을 하며 그들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하는 반면, 근로자들의 의견은 그리 중요치 않다는 생각을 주입받는다. 자본가와 근로자 모두 기업의 주인이므로 이들의 이익과 의견이 함께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으로 아예 언급되지 조차 않는다.

 

  적자만이 생존한다는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모든 역사 교과서는 은연중에 담고 있다. 세상은 잔인한 것이다. 땅속에 묻힌 미국 인디언에게는 후손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의로운 사회를 열망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내가 당면한 딜레마이다. 

2012. 10. 11. 10:11

   우리나라의 안철수, 일본의 토루 하시모토,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파키스탄의 임란 칸,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기성 정치권에 속하지 않은 아웃사이더로서 각 나라의 정치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과거에 정치를 하지 않았으므로 기성 정치권의 나쁜 관행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권자에게 매력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http://www.economist.com/node/21563719

Fighting monsters: Political outsiders are challenging Asia’s traditional elites


   일본을 제외하고 민주주의의 역사가 깊지 않은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는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되어 있다. 정치인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욕을 취하고, 반칙을 일삼고, 기업가와 결탁하여 자신들만의 특권 집단을 만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나랏돈으로 자식에게 집을 사준 일이나, 부유층이 국적을 바꾸면서까지 자식을 외국인 학교에 보내는 행태를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정치인과 고위 관료가 혼인과 직장 이동을 통해 재벌과 이익을 함께 하는 것, 국회의원이 되면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것, 판사와 검사는 재벌의 반칙 행위에 대해 관대한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것, 정치인들은 서로 싸우면서 국민의 복리보다는 권력 획득에만 관심을 두고 자신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한 통속이라는 느낌. 이게 바로 우리나라의 지도급 인사들이라니, 하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보통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선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들 사이에도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려 한다. 사람들은 남으로부터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긴장하며,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반칙을 저지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운전하면 뻔뻔하게 끼어들고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흔히 본다. 기업들은 속임수를 써서 고객의 돈을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면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곧이곧대로 규칙을 지키면 손해 본다는 생각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기에 기회만 닿으면 반칙을 저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전혀 반칙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성인이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부패와 무능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제이다. 모두들 반칙을 저지르면 시스템 전체의 효율은 약화되는데, 바로 이것이 후진국인 이유이다.  

   우리는 새로운 지도자를 갈망한다. 능력이 있고, 떳떳하고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성취한 사람을 찾는다. 안철수 현상은 바로 그러한 갈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므로 사회의 관행과 완전히 동떨어져 행동할 수는 없다. 한국의 중상류층이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기에, 안철수도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남들이 하는 반칙의 행위에 손을 적셨을 것이다. 한국의 기업 문화가 술 접대를 하지 않고는 일을 성사시킬 수 없는 관행이기에, 안철수도 룸살롱에서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면서 거래처를 접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군대가 상관이 부하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행위를 용인하는 문화이기에, 안철수도 그러한 군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치는 혼자 할 수없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정치를 하려면 세력이 필요하다. 기성 정치권과의 타협과 연대 없이 정치 아마추어들만 모여서 선거라는 게임에서 이기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선거가 그렇게 간단한 게임이었다면, 기성 정치인들이 이전투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철수 또한 어떻게든 기성 정치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이 과정에서 기성 정치권의 요구에 일정부분 양보할 것이다.

   기성 정치권을 그렇게 만든 것은 우리들 유권자이다. 유권자들이 그런 정치 관행을 용인하고 표를 통해 지지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그런 정치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유권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안철수는 기존 유권자들의 관행과 타협을 모색할 것이다. 자신들의 좁은 집단 이익을 우선시 하는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전체의 대의를 생각하라는 구호는 별반 설득력이 없다. 사람들은 겉으로 말은 어떻게 하든 자신의 좁은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유권자가 변해야 정치가 변한다는 말은 진리이다. 그 반대로, 정치가 변해야 유권자가 변한다는 말은 맞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안철수가 우리나라의 정치판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유권자의 정치의식이 과거보다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기성 정치권에 충격을 가져오는 신인 정치인의 등장은 성공하던 실패하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유권자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듯이 정치권도 한 번에 바뀔 수 없다. 여하간 새로운 정치인의 등장은 기성 정치권의 관행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가 민주화 된지 30년이 안되었는데, 이렇게 정치가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변화가 우리나라만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바퀴는 일단 굴러가면 좀처럼 되돌려 후퇴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니,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 기대하며 마음 편히 정치판의 돌아가는 사정을 지켜본다. 

2012. 10. 7. 14:52

   사람들은 학교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하며 하루가 멀게 교육 제도를 바꾼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교육 제도를 자주 바꾸는 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 것은 문제의 근원이   학교 교육 자체보다는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http://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12/10/why-kids-should-grade-teachers/309088/

 Why Kids Should Grade Teachers

By Amanda Ripley


   어느 사회나 학교 교육은 사회적인 성공의 중요한 통로이다. 과거 토지 소유나 신분이 지위와 권력의 기반이었을 때에는 학교 교육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요즈음 ‘지식 경제’(Knowledge Economy)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경제활동에서 지식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교육의 지위획득 기능은 더 커졌다.

   문제는 학생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학교 자체가 아니라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점에 있다. 사람들은 학교 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장치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어떤 가정 배경인가에 따라 교육 기회는 큰 차이를 보인다. 교육 수준이 높고 소득이 많은 부모의 자녀는 그렇지 못한 부모의 자녀보다 평균적으로 학업 성취도가 월등하게 높다. 일간 신문에서 서울대 학생의 부모의 상당수가 강남에 거주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사실 모든 초등학교 학급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공부를 못하는 학생보다 부모의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다.

   본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학업 성취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배경에 따라 성취가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을 사람들은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평등과 민주주의 이념은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평등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 제도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능력이 자녀의 학업 성취로 고스란히 이전되는 것을 허용한다. 자신이 어떤 부모에게서 출생하는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사람들은 이런 부정의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없는 사람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은 불편해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맨날 떠들면서 이리저리 뒤집어보아도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을 외면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아우성만 지속될 것이다. 

   미국은 이런 점에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종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열등한 지위에 있는 흑인과 히스패닉 자녀의 낮은 학업 성취도는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이다. 유색인이 다니는 학교의 수준은 정말 열악하다. 학교의 시설은 낡고 부족하여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는 환경이며, 선생의 수준이나 가르치려는 의욕은 낮으며, 학생의 배우려는 의지 또한 매우 낮다. 많은 유색인 학생들이 매일 집에서 복잡한 사건을 경험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학교에 오는 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머리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반면 중류층 백인이 다니는 학교는 좋은 시설과 안정된 가정 환경과 부모의 관심과 선생의 열의와 학생의 의지가 결합하여 높은 학업 성취를 보인다.

   미국의 교육 개혁은 대체로 유색인 학교의 낮은 학업 성취도를 어떻게 끌어 올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중류층 학생의 학업 성취도 또한 국제 비교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이면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는 있다. 미국의 많은 교육학자들이 복잡한 방법론을 동원하여 문제를 분석하고 매일 같이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오지만 그리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사실 효과를 보이는 개선책은 대체로 교육의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여기 소개한 기사에서 지적하는 개혁 방안은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자녀의 학업성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선생이 좋은가 여부는 학생의 학업 성취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어떻게 선생의 질을 높일 것인가, 어떻게 나쁜 선생을 솎아낼 것인가, 어떻게 수업의 질을 개선할 것인가는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다른 방법보다 학생이 선생을 직접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높다.

   학생은 선생과 오랜 시간 함께하고 선생이 제공하는 교육을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이므로 어느 외부 전문가보다 더 선생과 선생이 제공하는 교육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보다 선생에 대한 평가가 더 공정하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 편차는 매우 적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다른 학생들 간에도 선생에 대한 평가는 일관되다. 심지어는 유치원 학생들 조차도 자신의 선생을 잘 평가할 수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반면 학생의 학업 성취도로 선생을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선생의 질보다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복잡한 방식으로 부모의 사회경제적인 수준 차를 통제하여  학생의 학업성취도에 따라 선생과 학교의 질을 평가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공정성이 결여되어 반발을 낳는다. 우리나라에서 근래에 일제고사를 이용하여 학생의 성취도가 떨어지는 학교에 불이익을 주는 정책이 옳지 않다고 비판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을 잘 알기 때문에 복잡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단순하면서 직접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다음의 다섯 개의 문항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 이 수업을 듣는 학생은 선생님을 존경한다.

2. 우리 반 학생들은 선생님의 통제를 잘 따른다.

3. 우리 반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4.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거의 매일 많은 것을 배운다.

5.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는다.


  학생은 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물론 선생은 학생의 평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평가받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평가가 자신이 받을 보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면 더더욱 평가를 기피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공적인 일이므로 공적인 절차에 따라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보상이 따르는 일에 대해 평가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평가가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며,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기 어렵기때문이다. 학생의 평가가 오류투성이라면 모를까 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이것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평가는 학생은 물론 선생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학생들은 매우 냉정하며 공정하게 평가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관심을 덜 기울이거나, 수업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배우는 것이 많지 않은 수업은 학생들이 기피하며 낮게 평가한다. 학생의 이해도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면 반드시 낮은 평가를 받는다. 학생이 배우는 양과 수준과 속도에 관심을 기울이며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선생을 학생들은 선호하고 높은 평가를 내린다. 점수를 잘 주는 선생의 강의에 많은 학생이 몰리지만 그러한 강의에 대해 반드시 후한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한 강의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불만을 표하는 학생이 반드시 나온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선생의 강의를 평가할 때 비교적 후한 점수를 준다. 5 만점으로 평가했을 때 웬만큼 괜찮다고 생각하면 평균 4 점 이상이다. 평균 3.5점 이하를 받으면 학생이 선생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한학기를 가르치고 나서 선생인 나 자신에게 불만족했던 강의는 거의 반드시 4.0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학생들도 나와 동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선생이 학생의 평가를 받지 않았던 것은 우리사회의 권위주의적인 전통 때문이다. 사회적 권위가 합리성을 제약했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것이 선생의 권위에 대한 침해라고 반발하지만, 열심히 잘 가르치는 선생에게는 학생이 존경하고 좋은 평가를 내린다. 학생은 선생의 인간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수업을 통해 학생에게 한 일을 평가하는 것이므로 인권 모독과는 상관이 없다. 학생들은 평가를 통해 선생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개선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교사 노조는 선생에 대한 학생의 평가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는 이기적인 주장일 뿐이다. 대부분의 선생은 겉으로 드러내 말하지는 않지만 학생의 평가가 대체로 공정하고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 엉터리로 평가하지만 학생 전체에 대해 평균을 내면 일부의 왜곡된 평가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제도가 효과적으로 시행된다면, 전혀 준비하지 않고 수업에 임하는 선생이나, 학생의 학업 성취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선생은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나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그런 무책임한 선생을 여러 명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수업을 매일 들으면서 느꼈던 좌절과 분노를 기억한다. 나는 그런 선생을 전혀 존경하지 않았으며, 어린 나이에도 그들을, 그리고 그런 수업을 억지로 들어야 하는 나를 불쌍하게 느꼈다. 그런 선생은 자신이 잘 가르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기에 학생의 학업 성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것이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어떤 교육개혁보다 더 혁명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2012. 9. 16. 23:02

   2005년 11월 어느 날 미국의 미시간 주에 칼라마주라는 인구 74,000명의 조그만 도시에서 교육감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제부터 이 도시에서 졸업한 고등학생은 누구든지 그 주에 있는 공립 대학교에 진학하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는다. ‘약속’(Promise)라 명명된 이 프로그램에 소요되는 재원은 독지가가 기부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절대 비밀로 한다.

 

NYtimes_FreeCollegeScholarship.hwp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무슨 장난도 아니고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하냐는 부정적인 반응에서부터, 돈이 없어 대학갈 꿈도 꾸지 못했는데 대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에 이르기까지. 교육감이 직접 발표를 했으니 완전 거짓은 아니겠지만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발표를 한 이래 지금까지 7년 동안, 총 2,500명이 대학을 갔으며 3천 5백만 달라 (한화로 약 390억원)의 돈이 장학금으로 지불되었다. 이는 각 학생당 매 학기에 4천 2백 달라(한화로 460만원)가 평균적으로 지원된 것이다. 실제로 약속이 지켜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알아보자. 이곳은 과거에 대표적인 산업도시였다. 한때는 GM 자동차 공장이 있었고, 대규모 제지 공장이 있었고, 업존이라는 제약회사의 큰 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미국의 산업시설이 싼 임금을 찾아서 해외나 남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현재 이 도시에는 이렇다 할 산업 시설이 없다. 공장이 이전하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빈곤과 범죄가 심해졌다. 학교의 질은 형편없어졌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손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미국 중서부의 다른 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퇴락의 운명을 겪었다.

  그 동안 이지역의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서 온갖 처방이 다 동원되었다. 경제 전문가의 처방 중에 안 써본 것이 없었다고 한다. 떠나는 회사를 붙잡기 위해 세금을 깍아 주는 것은 물론, 큰 경기장이나 공원 시설 등 이 도시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토목공사에 이르기까지 소위 ‘경쟁력 강화 위원회’에서 머리를 짜낸 모든 처방을 써보았다. 도시 활성화를 위해 전문가들이 고안한 64가지나 되는 방안을 실행했으나 도시가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면서 공립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대학갈 희망을 안겨주면 빈곤에 찌든 이 도시가 활성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배경이라고 한다. 과거 이 도시의 산업이 활발하던 시절 지역사회를 위한 많은 자선활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전통이 남아 과거에 이곳에서 사업을 일으켜 엄청나게 큰 돈을 번 사람이 지역의 번영을 위해 돈을 내 놓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출발한 ‘스트라이커’ 라는 의료기기 회사의 창업 가족이 돈을 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7년간 390억원을 댔으니 매년 약 55억 정도 지출한 셈이다. 사실 미국 거부의 재산이라면 이 정도의 지출은 감당할 만하다. 이 실험은 현재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교육 부문에서는 단기간에도 눈에 띠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 공립학교 학생의 학업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고등학교 중퇴자 비율이 현저히 감소하고,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이 크게 증가하였다. 교육영역 밖의 효과는 아직은 제한적이다. 인구 감소가 멈추었으며,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지역사회로 조금씩 되돌아오면서 산업이 활성화될 조짐을 보인다. 교육 외의 영역에서는 아직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지 않지만, 교육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으로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므로, 이러한 실험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큰 성과를 거둘 것이 분명하다.

  교육 투자를 통해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아이디어는 참신하다. 지식 경제로 접어들면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소득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고등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은 일할 곳이 사라지는 추세이다.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기술이 없는 사람은 최저임금의 불안정한 일 이외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문제는 최저임금의 일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근로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섣부른 경제 활성화 정책에 돈을 쏟아 붓는 것보다는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묘책인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교 등록금을 공짜로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고등교육에 큰돈을 쓰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세상일에는 다 순서가 있다. 그러나 가난한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면 그들도 대학에 가고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불러 넣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은 이를 실제 실현할 수 있는 사회에서만 사람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다.

  부모를 잘 만나서 누구는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가고 누구는 대학을 꿈도 꾸지 못하는 사회에서 태어난다면, 불리한 쪽에 선 사람은 성공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를 원망하고 돌을 던질 것이다. 살기 좋은 사회란 자신이 어떤 패를 뽑을지 미리 알지 못하면서도 선택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을지. 아무리 소득이 높아지면 무엇 하는가?  

2012. 9. 9. 22:31

  북유럽은 정말 흥미롭다. 나만 아니라 미국인이나 유럽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 세계에서 가장 삶의 질이 높은 나라, 부패가 없고 투명한 나라, 삶의 위험을 국가가 보장해 주는 복지국가 모델을 실현한 나라, 국민의 정치 참여가 높은 나라, 소득의 거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고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이 공무원인 나라,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 극빈자가 없고 범죄율이 낮은 나라, 부유하며 일하는 시간이 적은 나라, 기술과 산업이 고도로 발달된 나라,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갈등이 없으며 모든 문제를 협의하여 가장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나라,  세련된 디자인과 높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나라, 남녀 평등의 수준이 최고인 나라, 자연이 매우 아름다우며 인구밀도가 낮아 공간이 풍부한 나라,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하는 나라, 노벨상을 제정한 나라.


Economist_BloodyScandinavians.hwp


  이렇게 말하면 이 나라의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90년대 초반 극심한 경제 불황을 겪었으며, 근래에 이 나라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으며, 실업률이 올라가고 복지 혜택이 축소되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으며, 사람들이 무뚝뚝하며, 무엇보다 겨울이 길고 혹독하다. 핀란드는 자살율이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높다. 노르웨이의 해저 유전을 제외한다면 자연자원도 별로 없다. 노르웨이의 물가는 또 얼마나 비싼가? 방문자들 마다 거의 두배에 가까운 생필품 가격에  깜짝 놀란다. 근래에 노르웨이에서는 외국인을 배척하는 극단주의자가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북유럽은 미국보다는 한 단계 앞서 발전한 사회인 것 같다.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을 선두로 신보수주의가 출현하면서 적자생존의 냉혹한 경쟁 사회가 출현하였다. 경제의 효율성은 높아졌으나 불평등이 확대되면서 능력이 없거나 실패한 사람은 좌절 속에서 사회에 돌을 던지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엄청난 부가 창출되기는 하였으나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빈곤은 확대되었다. 모두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든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대신 남과 경쟁해서 내가 더 잘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로 남았다.

  반면 북유럽 사회는 노동자의 세력이 자본가 못지않게 크기에, 사회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협의하여 문제를 풀어가는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하였다. 기업의 의사 결정권이 자본가의 위임을 받은 경영자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주인으로서 기업 경영에 함께 참여하는 경제민주주의가 실시되고 있다. 기업이 어려움에 빠지면 자본가와 노동자가 문제를 해결해 가는 노력을 함께 하고 희생을 분담하는 그런 경제체제이다. 영미식 자본주의에서 보면 참으로 이상한 사회이다.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니 말이 되는가? 그렇게 하여서 어떻게 다른 기업과 경쟁하여 이기며, 새로운 혁신이 도입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실제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이 많으며, 창의성이 높이 발휘되며, 엄청난 부가 만들어지고 있다. 북유럽은 인구도 많지 않은데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놀랍다. 스웨덴의 인구는 천만명에 불과하며, 이웃 노르웨이나 핀란드는 오백만명을 넘어서지 않는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이러한 북유럽의 독특한 사회체제에 더하여, 북유럽의 예술적 독창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북유럽은 예술적 독창성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아바(ABBA) 같이 독창적인 음악을 가지고 세계를 석권한 것은 그곳의 풍부한 음악적 토양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뭉크의 독창적 미술 또한 역시 그러하다. 추리소설의 분야에서도 북유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연이어 만들어 내고 있다. 북유럽의 독특한 풍토를 배경으로 하여 이야기를 정교하게 풀어가는 솜씨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북유럽은 범죄율이 낮고 북유럽 사람들은 전혀 공격적이지 않은데 범죄에 대한 상상력만은 걸출하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미국과 같이 총을 난사하는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도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고, 도심의 슬럼에 범죄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지능적인 범죄보다는 액션 영화에서 흔히 보는 무자비한 폭력 사건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북유럽처럼 범죄가 드물고, 조용하고, 개성을 존중하고, 세련된 사회에서는 범죄를 모의한다면 총을 휘두르는 그런 것보다는 고도의 지능적 플롯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저지를 것 같다. 그런 사회는 독창적이고 지능적인 범죄를 상상할 사회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북유럽에서 액션 영화가 제작되지 않듯이, 미국에서는 지능적인 추리소설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세계화가 되면 흔히 세계가 유사해 진다고 말한다. 유사한 미디어에 노출되고, 유사한 제품을 사용하고, 생각하는 방식이나 생활양식이 유사해지고, 등등.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부만 사실이다. 북유럽의 추리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북유럽 특유의 분위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지역적인 특색을 살렸기에 세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풍요로울수록 새로운 것을 찾는 욕구가 강하다. 굳이 오지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자신이 사는 곳과는 다른 자연환경과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세계화가 되어도 지역의 독특성은 여전히 보존할 가치가 있다. 사람들이 지역 고유의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때문이다. 지역 고유의 것에서 독창성이 나온다. 

  우리나라 사람은 흔히 미국을 본받아야 할 최고의 모범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지식인은 걸핏하면 미국에서는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을 따를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자연 조건과 사회적 배경이 너무나도 다르다. 미국은 자연자원이 풍부하며 이민자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사회이다. 미국 사회는 장점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약점도 많다. 미국 경제의 활기는 세계의 부러움을 사지만, 반면 높은 불평등과 빈곤과 범죄와 인종차별은 결코 배울 것이 못된다. 북유럽을 보면서 미국보다 이곳에서 배울 점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북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람 이외에 특별한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독창성을 북돋우는 북유럽의 토양을 배워와야 한다.  

2012. 9. 9. 21:05

   사진을 보고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40마일 (약 60킬로미터)을 차로 운전해서 가는데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특별히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나이지리아의 항구 도시 라고스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이란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Atlantic_TrafficJam.hwp


 


  근래에 아프리카는 아시아에 뒤이어 떠오르는 지역으로 주목받는다.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이 차례로 개발되면서 임금이 더 싼 아프리카 지역으로 생산 기반을 옮기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봉재업과 같이 저임금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업종은 아프리카에 엄청난 규모의 싼 노동력에 군침을 흘린다. 과거 이 나라들은 정치가 불안정하고, 도로나 항만, 에너지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이 축적되지 않아서 아무리 임금이 싸도 기업 활동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프리카 일부 나라들의 정치가 조금 안정되는 기미를 보이고, 아프리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중국이 과감하게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하면서 아프리카가 산업화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 결과는 사진에서 보는 엄청난 무질서와 교통 체증이다.

 

  엄청난 교통 체증은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부패에 주로 기인한다. 자원 개발의 이익을 독점한 독재 정부가 국민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의 보조금을 풀어 기름 값을 터무니없이 낮추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차를 소유하는 열풍이 불었다. 도로는 크게 늘지 않는데 차량이 갑자기 증가하니 교통체증은 당연지사. 산업화가 시작되어 물동량이 많아지면 철도와 대중교통을 확충하여야 하나 이 또한 정치적 부패로 지연되고 있다. 정권을 장악한 부족이 트럭 비즈니스를 독점하고 있는데, 이들이 철도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행태는 참으로 후진적이고 한심하다. 정치가 부패해서 뻔히 필요한 투자를 가로막고 경제 개발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그러니 가난하지’라고 혀를 찰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를 생각해 본다. 한 나라의 교통 사정은 정부의 부패 정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정치와 사회가 부패하면 교통 사정도 엉망이다.

 

  세계에서 가장 청렴하다는 스웨덴의 교통 사고율은 세계에서 최저이다. 스톡홀름이나 북구의 다른 도시의 교통 사정은 뉴욕이나 워싱턴과는 비교가 안 되게 좋다. 대중교통이 잘 발달해 있으며 자전거 이용도 활성화되어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부패의 정도가 높으며 교통 체증이 심하고 교통 사고율도 매우 높다.

 

  왜 정치가 부패하면 교통 체증이 심하고 교통사고가 많을까? 부패한 나라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자신의 고급차를 사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도 도로를 개선하고 대중교통을 확충하기 위해 세금을 더 내는 데에는 인색하다. 부패한 나라에서 힘 있는 사람은 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 데, 그 결과 힘없는 사람 또한 질서를 잘 지키려 하지 않기에 공공질서가 허물어진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라에서는 트럭 운전수들이 고속도로에 차를 주차해 놓아서 고속도로를 저속도로로 만들었다고 한다. 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두가 손해 보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후진국인 것이다. 또한 정치인이 기업과 결탁하여 차를 많이 팔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보통 사람의 교통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데에는 소홀하다. 힘 있는 사람들이 고급차를 사서 과시하면, 보통 사람들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너도 나도 차를 사서 끌고 다닌다.

 

  우리나라에서 운전을 하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 우격다짐으로 끼어들고, 차선을 마구 바꾸고, 교차로에서 꼬리 물기를 하여 진로를 가로막고,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막히고. 상대를 앞질러 나만 살면 된다는 초경쟁사회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힘 있는 사람들은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의 뒷좌석 앉아 여유 있게 가기에 교통 체증이 남의 나라 일일게다.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직접 운전을 해야 한다면, 아마도 한국의 도로 사정과 대중교통은 현재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일 것이다. 

2012. 9. 4. 23:01

  요즈음 미국에서 여대생이 남자를 사귀는 방식에 변화가 있다고 한다. 미국 여대생들은 남성과 가볍게 사귀며 즐기다 쿨하게 헤어지고 싶어 한다. 과거에는 사정이 달랐다. 여성이 남자와 만나면서 결혼으로 이어질 것을 염두에 두었다. 과거에는 자신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남성과 만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요즈음 여대생들은 이런 만남을 부담스러워 하고 기피하기까지 한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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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인즉 근래의 여대생들은 남성과 비슷한 방식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들은 일의 세계에서 성공하는데 삶의 우선순위를 둔다. 일의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냉혹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자질을 키워야 한다.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고, 대인 기술을 익히고 인맥을 쌓기 위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많은 모임에 참여하며, 일에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에라도 기꺼이 가며, 일을 위해서는 가족생활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 직장에서 성공한 남자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여대생들이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해서 성공하기 위해 남자들의 삶의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내동댕이 친 여성의 미덕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기 보다는 감추며,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물러서서 기다리며, 사회적으로 닳고 닳기보다는 때묻지 않은 순진함을 지키며, 무엇보다 너무 똑똑해지지 않으며...  여성적인 삶이란 일보다는 가정을 더 소중히 하고,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을 삶의 최고의 낙으로 삼으며, 남편을 잘 뒷바라지 하며, 경쟁보다는 양보와 희생을 택하며, 나의 이익을 생각하기 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등등. 이렇게 한다면 과연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잘 할 수 있을까? 요즈음 여성들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과거에 여성은 남편을 잘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여성은 남자와 만날 때 상대가 자신을 고생시키지 않고 잘 부양할 수 있을지 면밀히 살핀다. 능력 있는 상대가 자신과 결혼하도록 하는 데 모든 정력을 쏟아 붓는다. 여성은 남성의 심리를 조정하여 자신을 좋아하도록 내지 자신에게 걸려들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너무 헤퍼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튕겨서는 더욱 안된다.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응해 줄듯 줄듯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주지 않는 줄타기 묘기를 구사해야 한다. 상대가 능력이 없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버려야 한다. 더 좋은 패를 찾아서. 정말 힘든 일이다. 한번의 잘 못된 판단이 일생을 망칠 수도 있다. 결혼한 많은 여성은 이런 시간을 다시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50대의 안정된 삶을 누리는 어떤 여성이 혼돈과 불안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 이해할만 하다. 남녀관계가 삶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과거 젊은 여성들에게 남녀관계를  잘 푸는 것은 삶의 전부였다.   

   요즈음 미국 여대생들은 여성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여성도 직업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자신을 부양할 수 있고, 여성에게도 어떤 일을 하는지가 남성 못지않게 중요해지면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의존 성향은 점차 사라져 간다. 대신 여성 역시 남성과 마찬가지로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신중히 관리하고, 자신의 시장 가치를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예전처럼 여성이 남성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붓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남녀관계는 더이상 여대생들의 삶의 전부가 아니다. 

   한 남성에게 일찌감치 자신을 몰빵하며 연애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남자들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혼하자고 하고, 결혼하면 가사와 자녀 양육의 부담을 자신에게 덤탱이 씌우고,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꽃 피워보기도 전에 좌절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잠재력을, 자신의 기회를 시험해 보기도 전에 아이를 낳고 주저 않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조심한다. 자신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기반을 닦을 때까지는 남성의 진지한 사랑을 사절한다. 아무리 훌륭한 남성을 만나도 그의 성공은 그의 것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훌륭한 남성을 만나는 것을 서두르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훌륭해져야 훌륭한 남성과 만날 수있고, 그와 결혼하게 되어도 오래 함께 지낼 수있기때문이다. 자신이 그에 못미치면 죽어 살아야 하거나 혹은 버림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여대생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데 힘을 기울인다.  결혼해도 언제 이혼하자는 말이 나올지 모르기때문이다. 훌륭한 남성을 낚아채는 것이 게임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안다. 

   그렇다고 남성을 멀리한다는 말은 아니다. 대신 다양한 남성들을 가볍게 만나서 즐기면서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대인 관계의 기술을 습득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다. 남자건 여자건 사람을 많이 만나 봐야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느는 것이다. 일찍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지 않고, 자신이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남자의 마음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여러 남자를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피차 상처받지 않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을 테니까.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은 애시당초 없으니 적절한 상대를 만나면 성적인 즐거움을 사양할 이유도 없다. 애를 가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결혼까지는 아직 멀었으니 젊은 시절을 함께 즐기는 것이다.  

   상대와 만나면서 헤어질 것을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영악한 행위라고 비난할 수 있다. 자신의 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지켜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한들, 애틋하고 순진한 사랑을 모르면 세상 헛사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다. 여러 남자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여성은 아무도 자신의 것으로 차지할 수 없을 거라고  조언할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그런 여성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남성들은 순진하고 나만 바라보고 사는 여성 쪽으로 마음이 흐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어쨌든, 내가 여자라면 영악하고 쿨한 삶을 택하겠다. 사회적으로 능력있는 여성이 순진한 여성보다는 함께 일하기 좋고, 말도 잘 통하고, 어려울 때 도움도 청할 수 있다. 그런 여성이 함께 일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나와 인생길을 함께 할 동반자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순진한 쑥맥의 여성을 찾는 남성은 아마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아내를 일생 혼자서 벌어 먹여살리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외로운 남성의 길을 가야 한다.  

   한국은 여성에게 사회적인 참여의 기회가 공평하게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에게 의존하는 전략이 더 행복하게 사는 길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여성에게 그리 행복한 사회는 아니다. 남성은 활개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여성은 다소곳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일제 시대에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이 혼자서 빈곤에 허덕이다가 길거리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그녀는 시대를 너무 앞서 갔다. 남성에 의지해서 사는 삶을 거부했기에 어떤 남성도 그녀를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여성이 혼자 벌어먹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말이다. 

   미국 여대생들의 변화된 남녀교제 방식은 직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성의 문제에서도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가 돌아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1970년대 여성해방 운동의 열매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조용히 결실을 맺고 있다.  

2012. 8. 24. 21:30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50대 중반이 되면서 직업 전선에서 물러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창 일할 연령인 25세에서 54세 사이에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1970년대까지 95%를 넘었으나, 198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 상황이 바뀌면서 이 비율이 급격히 감소하여 근래에는 80%후반에 머물고 있다. 경제활동 참가율이란 해당 연령대의 인구 전체 중에서 일을 할 능력이 있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의 비율을 의미한다. 일할 능력은 있으나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구직을 포기한 사람은 경제활동인구에서 제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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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대 후반 남성들이 근래에 경제활동에서 더 많이 퇴장하는 데에는 구조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기술 변화가 급속하여 낡은 기술을 가진 중년을 직장에서 선호하지 않는데다,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하여 연공서열을 쌓아 높은 임금을 누리던 남성 근로자들은 싼 임금을 찾아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해고 되었을 때, 주변에 싼 임금을 주는 서비스 직종에서 새로이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쌍용 자동차에서 강제 해고된 사람들이 시급 오천원의 임시직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의 아내들이 과거보다 더 많이 경제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다. 미국에서 기혼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상승하여 연령대에 따라서는 70%를 넘어섰다. 과거에는 남성이 밥을 벌어 와야 한다는 압력이 대단하여 직장이 열악하더라도 어떻게든 참고 다녔으나, 부인이 돈을 벌어온다면 남성은 실직을 해도 한숨 놓고 과거에 일하던 수준의 보수에 걸 맞는 직장을 알아볼 뿐 열악한 일자리를 찾아 고생하려고 하지 한다.

  50대에 일자리를 벗어난 중년 남성들은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일찍 일에서 은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모든 은퇴한 남성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하루를 지내고 있지는 않다. 뉴욕 타임즈 매거진에 소개한 사례는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로 보인다. 집에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제일 많다. 과거보다 잠을 많이 잔다. 일을 할 때는 평일에 8시간 이하로 자던 사람들이 은퇴하고 나서는 9시간 이상 잔다. 텔레비전의 시청시간이 눈에 띠게 늘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취미활동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음악을 좋아 하던 사람은 하루에 많은 시간을 음악을 들으며 보내고, 악기를 좋아 하던 사람은 매일 악기 연습에 많은 시간을 쓰고 때때로 동호회 연주 모임에도 나간다. 일을 하지 않으면서 책을 많이 읽게 된 사람도 있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것을 새로이 배우거나 해보는 사람도 많다.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새로운 악기를 배우는 사람이 많으며 교양 강좌를 듣고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사실 50대 후반 60대 초반의 나이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왕성한 나이이므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만 아니라면 자신이 해보고 싶은 것을 더 늦기 전에 시도해보고 갈 때까지 가보고 싶은 때이다.

  사실 은퇴라는 것이 경제적인 어려움만 아니라면 해볼 만하다. 그러나 현실은 50대 중반에 은퇴하면 나쁜 점이 훨씬 많다. 경제적 어려움은 시간이 가면서 가중된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라면 30년 이상 근로 소득 없이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을 멈추면 미국에서는 처음에 실업 수당이 나오고 몸이 아프게 되면서 장애 수당을 받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미래에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걱정 때문에 사기에 걸려드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 압박 때문에 과거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열악한 조건에서 일을 하는 중년 남성이 점차 늘어난다.

  경제활동에서 은퇴하기에는 50대 중반이 이른 나이이므로 경제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압력을 많이 받는다. 일을 해야 할 나이에 일을 하지 않으면 놀고먹는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덮어씌워 지면서 자긍심을 훼손당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으며 주위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기생충 취급한다면 계속 살아야 할 가치를 부정당하게 된다. 남성의 경우 놀고먹는다는 자아 이미지는 견디기 힘들기에 사회생활이 움츠러들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쉽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정신적으로 피폐해 지면 오랜 세월 함께 하던 주위사람들, 특히 자신의 배우자 마져 떠나게 된다. 

  사실 누구나 직장생활이 힘들기에 빨리 은퇴할 나이가 되어 마음 편히 놀고먹는 생활을 기다리는 마음이 굴뚝같다. 문제는 사회에서 인정하는 은퇴 연령이 점점 뒤로 늦추어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십년 전만해도 경제활동연령은 59세에 종료되고 60세 부터는 노인, 즉 사회적으로 당당하게 은퇴 생활을 해도 되었다. 현재 64세까지로 되어 있는 경제생활연령은 조만간 뒤로 늦추어 질 것이 분명하다. 근래 여론조사에서 70세부터 노인이 시작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라 하며, 건강 상태로 볼 때 70세까지는 일하는 데 크게 지장이 없다고 하니 경제활동 연령이 69세로 늦추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 지금 대로라면 연금 재정이 파탄날 것이 분명하기에 연금 개시 연령도 뒤로 늦추어 질 것이 분명하니 50대에 은퇴하기는 글렀다. 마음 편히 놀고먹을 수 있는 날이 훨씬 뒤로 늦추어 지는 것이다. 무엇을 하건 필사적으로 일하면서 최소한 60대 초반까지는 버티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50대 중반에 은퇴하여 조금 먹더라도 여유자적하며 살고 싶지만 꿈같은 이야기이다. 직장 생활에 쫒기지만 않는다면 더 뜻있게 삶을 살 수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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