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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16. 21:37

   지하철을 타면 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각자의 세계 속에 몰입해 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은 눈이 어두운 노인이거나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사실 스마트폰을 산지 얼마 안되었기에 사용법을 익히고 새로운 앱을 시험해 보느라 바쁜 것은 이해한다. 나는 전철을 타면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 맞은편에 앉은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무슨 재미로 살까, 어떤 고민을 안고 헤메고 있나, 어떻게 저런 표정의 얼굴이 만들어졌을까, 젊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저사람은 과연 어떤 희망을 가졌을까, 여자는 남자와 어떻게 다를까, 등등 사람을 보면서 이모저모로 관찰하노라면 연민의 정이 느껴지고, 호기심이 피어오르고, 덧없다는 느낌도 들고,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Atlantic_Lonelyness.hwp



   페이스북 계정을 처음 만들면, 알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추천해 주어 친구를 맺게 한다. 오랫 동안 소식을 몰랐던 사람을 새삼 발견하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터넷 상의 접촉은 실제 대면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선뜻 연락을 취하지는 않는다. 페이스북의 관계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친구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아예 들어가 보지도 않는다. 내 페이스 북 계정에는 친구가 한명도 없다.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자주 휴대전화를 열어보고 이메일을 체크하는 것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누군가 찾아주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지만, 막상 상대와 접촉하면 왠지 불편해지는 것이 요즈음 사람의 심사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사람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개인주의적으로 된 것이다. 집단의 압력에 구속되던 상태에서 해방된 것까지는 좋은데, 의미있게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각자 자신의 틀을 지키면 서로 접촉하기가 조심스럽다. 상대가 쉽게 접근해 오면 나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 튀기고 싶은 변덕이 발동한다. 내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고 싶건만 막상 상대를 마주치면 왠지 상대의 못난 구석이 먼저 눈에 띠어 물러서 버리곤 한다. 나도 상대에게 그렇게 보일 것임을 알고, 나 자신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각자 자신의 것을 지키고 자신에게 충실하면 의미있는 무엇을 발견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 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삶의 울림을 찾지 못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라는 조언은 그릇되다. 아무래도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가장 감동을 받을 때는 남과의 연결 속에서 무엇을 할 때이었던 것 같다. 


   페이스북이 그렇게 많은 접속건수를 기록하지만 그것이 사람들 간의 직접적인 대면 관계를 대치하지는 못한다.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쏟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물론 둘 간에 인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외로운 사람이 인터넷에 더 몰두하기는 할 것이다. 인터넷을 많이 들여다보다 인터넷 세상으로 빠져든다는 환상은 매트릭스나 아바타와 같은 영화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 세컨드 라이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넷 속의 대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아직 인간의 진화 수준은 인터넷 가상 세계에서보다는 물리적으로 대면하는 관계 속의 삶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와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서로에게 구속되는 것을, 또한 상대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각자의 동굴 속에 머물러 있다. 인터넷이라는 제한된 통로를 통해 상대와 접하려고 하나,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별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 사회에 외로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으며 그들에게 대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직업이 번성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혼자만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선진국 사람들은 외로움이라는 비용을 비싸게 치른다. 가난한 나라에서라면 본인이 원치 않아도 항시 남과 부대껴야 하니 부자나라의 개인주의적 삶에는 양면성이 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면 그래도 선진국 사람의 개인주의적이며 외로운 삶이 집단의 압력에 이리저리 밀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나는 도저히 뗄 수없는 끈끈한 관계나 함께 망가져본 경험이 있는 허물없는 사이가 한편으로는 부럽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다. 일생 함께 점심을 같이해야 하는 직장 동료라는 말은 나에게 구속으로 다가올 뿐이다. 

   관계 맺는 일이 그렇게 힘들다니. 선진국 사람과 같이 제한적으로 또 계약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결코 그 관계가 편안해 질 수 없다. 하긴 나도 그리 관계 맺는 데 능한 사람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내식으로 살아가는 개인주의적인 삶이 편하기는 하다. 그래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끊임없이 남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나도 마음속 구석에 사람들과 관계 맺고자 하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게다. 나도 따지고 보면 외로움에 절은 사람이다.  

2012. 4. 8. 13:31

  선진국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기혼 여성의 경제활동이 크게 증가하였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성역할 분업, 즉 여성은 집에서 가사와 양육을 담당하고 남성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물론 경제형편이 어려운 계층은 이러한 사회적 이상형을 실천하기 어려웠다. 가난한 집의 부인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생계를 위해 돈벌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중류층에서 기혼 여성이 돈벌이를 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Economist_Women&Work.hwp



  세상은 변해 이제 서구사회에서는 70% 이상의 기혼 여성이 경제활동을 한다. 물론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전업직이 아니며, 남녀간의 임금 격차는 여전히 30%이나 난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만일 어떤 여성이 밖에 나가 일 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반전되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것이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될 정당한 사유로 인정되지 않을 날도 멀지 않다.

  여성이 밖에서 일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여성이 독립적인 경제기반을 가지면 남성과 여성간의 권력차이는 좁혀진다.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가 늘고,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의 발언권이 세지고, 이혼하고 재혼하는 사례가 늘고, 자녀를 적게 낳는 풍조가 정착한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 본인의 의지도 작용하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측면도 있다. 인구가 노령화하면서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하고 경제의 활력이 줄어드는 것을 보충하려면 여성의 참여를 늘릴 수밖에 없다. 여성의 교육이 남성과 동등한 수준에 근접하고 있는데 여성 인재를 집에 모셔둔다면 자원의 낭비가 엄청나다. 여성 인재를 놀리는 나라는 여성 인재를 활용하는 나라와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며, 우수한 여성을 고용하지 않는 회사는 그렇지 않은 회사에 뒤질 것이다. 

  여성의 경제력이 늘고 사회적 역할이 남성에 근접하면, “여성다움”이라는 문화적 상징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처럼 자신을 치장하고 남성에게 잘보이는 데 과도한 노력을 쏟아야만 하는 “여성다움”은 사라질 것이다. 적극적이고 독립적이고 능력있는 여성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는 문화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환상, 남성에 대한 여성의 환상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컴퓨터가 없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듯이,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없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어떨지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게 더 낳은 방식의 삶이고 인간성을 존중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방식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호도해도 비인간적이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삶에 책임지면서 사는 것이 더 편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2012. 3. 24. 12:22

  미국의 여론조사에서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다. 미국인 주류 집단의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에 있으므로 미국의 식자층은 이러한 변화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물론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해서 신에 대한 믿음까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미국인 열 명 중 아홉은 어느 정도는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유럽사회는 이미 세속화되어 신을 믿는 사람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은 서구문명에 속하면서 근래까지 세속화의 물결이 침투하지 않은 예외적인 사회로 여겨져 왔다. 과학 기술의 힘을 신봉하고 물질주의와 소비문화가 팽배한 미국인이 독실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율배반처럼 생각되나, 실제 미국인 중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적지 않다. 기독교 근본주의를 추종하는 복음주의 교파 개신교 교도만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런 미국인의 독실한 신앙심이 근래에 두드러지게 균열하고 있다.

  미국인의 개인주의는 개신교 신앙과 맞닿아 있다. 신에 대해 개인이 홀로 영적인 책임을 지며,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신에게 다가가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기며, 신이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교리 등은 모두 개인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것을 명한다. 부모나 형제조차도 자신의 신앙에 직접적으로 간여할 수 없다.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를 통해 서로 사교하고 믿음을 부추기며 지내지만, 개신교는 신앙에 관한 한 개인이 사막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근래에 많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하며 교회에 나가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은 개인주의의 발현이다. 이들은 기성의 교회 조직이나 자신 이외의 외부의 권위를 부정한다. 삶의 의미를 찾고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서 기존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용감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서 혹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은 결국 허무로 흐를 위험성이 크다. 기존 종교나 교회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유럽의 경우 세속화된 인간으로 이전하는 중간과정이었다. 이들에게 신 혹은 초월적인 힘에 대해 막연한 개념은 남아 있으나 인간사는 인간이 관장하는 것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질문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할 것이지만 미국인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보통 미국인의 생각이다. 신이 없으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도덕이 없고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관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극한 개인주의자와 무신론자가 합체가 되면 무서운 사람이 탄생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생각은 약간 다를 것이다. 질서라는 것은 신으로부터 보다는 내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나온다. 내가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신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나의 가족이나 내가 속한 집단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다. 동양 사회에 절대자 신을 모시는 종교가 큰 세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게 해달라는 구복적인 신앙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절대적인 가치나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는 믿음은 동양 사람에게 생소하다.

  서구인이 교회와 신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절대적인 가치와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나서는 노력이 어디에 귀결될지 궁금하다. 불교의 참선이나 요가 등과 같이 자신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리 큰 성과를 거두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솔직히 자신의 내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가치 있는 무엇을 발견하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는다. 나는 생물학적인 존재이면서 사회적인 존재이다. 생물학적인 나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한다면 아마도 진화생물학에서 주장하는 ‘종족 본능’이 최고로 추구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왜 종족이 보전되고 융성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인간이 너무 많아서 지구상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가?

  사회적인 나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한다면 아마도 이웃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찾을 것이다. 사회의 복리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나의 행위에서 내가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궁극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신에 귀의하여 모든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는 것이 가장 쉬운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상실할 때 의지할 것은 주위의 이웃, 내가 속하는 사회밖에 없다.

  어찌 생각하면 왜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가치가 되어야 할지에 의문이 든다. 인류가 멸망한다고 하여도 그만 아닌가? 자연 그 자체에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의 기준이 없으므로 인류의 생존과 발전은 인간이 임으로 만들어낸 가치일 뿐이다. 결국 생물학적인 생존 본능만을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서구인들이 개인주의를 견지하면서 어떻게 신에게서 떠나서 삶의 의미를 찾을까? 아마도 헤매면서 살 것이다. 왜 사는지의 질문을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하고, 정 떠오른다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뒤로 미루고, 일상의 번잡함에 묻혀서 살다가 가는 것이다. 편하게 사는 것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바쁘고 벅차지 않겠는가?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삶이니 종교나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으로 하고 말이다. 이러한 주류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특이한 사람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2012. 3. 22. 12:07

  이코노미스트지의 핵 에너지 특집호는 “실패한 꿈”이라는 머리기사로 시작한다. 핵 에너지는 인류의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있는 묘한 존재다. 화석 에너지는 조만간 고갈될 것임을 모두 알기에 대체 에너지를 찾으려 노력한다. 태양광, 풍력, 조력, 지열 에너지 등 환경론자가 선호하는 대안은 현재까지는 화석 에너지의 대체 수단으로 한계가 있다. 기술 수준이 낮아 비용이 많이 들거니와 무엇보다 산발적으로 소량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방식은 현재의 산업 구조와 잘 맞지 않는다. 현재의 산업구조는 집중하여 대량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체제가 잡혀있다. 반면 핵 에너지는 화석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집중적인 방식으로 대량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으며 원료 확보가 용이하고 생산비가 저렴하다. 안전 문제만 아니라면 핵 에너지는 화석 에너지를 대체할 가장 이상적인 수단이다.


  핵 에너지는 이상적인 에너지원이기에 저주를 받고 태어났다. 우주의 엄청난 에너지는 모두 핵 에너지이지만, 그 규모가 엄청나기에 인간에게 피해를 줄 위험성이 현재까지는 이익을 상쇄하고 있다. 핵 에너지 개발이 핵폭탄 개발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인류가 그렇게 엄청난 에너지원을 관리할 기술과 사회적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핵 에너지관련 기술 발전이 느린 것은 이유가 있다. 핵 에너지를 연구한다고 하면 바로 핵폭탄을 연상하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저지된다. 소수의 나라의 허가받은 기관이 아닌한 함부로 핵에너지를 연구하거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할 수 없다. 사실 무서운 것일수록 피하기보다 그것을 잘 다루어 유용하도록 만든 것이 인류 발전의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행착오와 아이디어가 결집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핵에너지 개발은 그러한 발전의 과정이 원천적으로 막혀있다.
 
  사실 핵 에너지의 문제는 기술 못지않게 사회적인 문제이다. 아무리 무서운 것이라도 관리를 잘 하면 어느 정도는 쓸만하며, 휘험 요소를 모두 숙지하고 사회가 합리적으로 공평하게 분배한다면 핵 에너지 개발에 찬성할 사람은 훨씬 많을 것이다.  핵 에너지 개발의 과정에서 피해를 누가 분담하는가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대부분의 사회는 이를 현명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에너지의 혜택은 힘 있는 사람이 누리면서 힘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떠않는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기에 핵 에너지는 사회 갈등의 씨앗인 것이다. 북구의 나라들과 같이 이익과 위험을 사회전체가 합의에 따라 공동 분담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면 핵 에너지는 훨씬 효율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나는 솔직히 서구 환경론자의 주장에 그리 동조하지 않는다. 환경을 생각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자신들은 편안하게 살고 많이 소비하면서 환경 친화적인 방식을 고민하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이다. 자신의 소비를 줄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어준다면 지구의 환경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미래의 에너지원인 핵 에너지를 포기하는 대신 환경친화적인 방식을 채택하려고 한다면 지금과 같이 풍요롭게 사는 서구인의 삶의 방식은 수정되어야 한다. 에너지를 많이 쓰는 생활을 지속하면서 대양열이나 풍력을 주 에너지원으로 한다면, 그러한 설비 자재를 생산하는 데 훨씬 많은 자원을 소모해야 하며 온 산천은 태양광 집열판과 풍력 프로펠라로 뒤덮일 것이다.

  "Small is Beautiful"이라는 철학을 정말 신봉하는가? 적게 먹고 적게 싸는 삶이 바람직하다는 이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한다. 좀 더 잘 살고 싶고 좀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원한다. 사실 일인당 소득이 4만불을 넘는 선진국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지금보다 조금 덜 풍요롭게 살아도 괜찮다. 그러나 세계 70억 인구 중 90%이상은 1만불도 안되는 소득으로 힘들게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 어느 정도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려고 한다면 엄청난 자원이 필요하다. 핵에너지의 엄청난 매력에 등을 돌릴 수 없는 이유이다. 이들을 서구인 수준으로 생활하도록 하려면 환경친화적인 에너지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재의 기술과 사회체제로는 불장난에 가까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핵에너지 개발에 좀더 투자해야 한다. 중국이 핵에너지에 몰입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엄청난 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기 위해 아무리 위험이 크더라도 핵 에너지의 희망을 포기할 수 없기때문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핵 에너지 개발의 피해는 주로 힘없는 사람이 떠않고 있겠지만 말이다.  

2012. 3. 11. 21:44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인들이 우리를 모범으로 여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실업문제, 빈곤문제, 재벌문제 등으로 우리 주위에서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숫하게 보며, 국회에서는 기득권을 챙기려고 억지를 쓰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정치인을 흔히 본다. 우리사회에는 부정이 판을 치며 술과 도박에 빠지거나 몸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향락산업 종사자가 얼마나 많은지 가늠할 수 조차 없다. 불안정한 가정환경과 냉혹한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이 폭력을 일삼거나 삐뚤어지게 자라나는 것을 주위에서 얼마나 많이 보는가? 이런 나라가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다니.


 

  그런데 외신에서는 세계의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한국을 본받아야 할 나라로 보고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단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물론 한국의 문화가 각광을 받으며 한국에 와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 요즈음 한국의 대학교에는 중국, 동남아, 중앙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에서 온 유학생이 급증하고 있다. 외국의 공무원에게 한국에 관해 교육시키는 대학원 프로그램에 입학하려면 엄청난 경쟁을 뚫고 선발되어야 한다. 마치 수 십 년 전에 한국인이 서구 나라에 가서 배우는 것을 동경했듯이 이들은 한국에 와서 배우고 싶어 한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커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세계에서 독보적인 사례로 언급될 만하다. 1960년대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였던 것이 이제 다른 나라에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로 성장한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 그렇다고 한국이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한국이 발전해 왔던 과정을 다른 나라가 따라 한다고 해서 성공할 것 같지는 않다. 국제적인 환경이 달라졌으며, 한국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은 다른 토양에 정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모범적인 사례라고 외국에서 칭찬한다지만 우리는 문제가 많음을 잘 안다. 불평등은 확대되고 있으며, 학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젊은이들은 실업과 좌절에 신음하고 있으며, 부정의와 부패가 도처에 널려있다. 그래도 뒤를 돌아보면 우리가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깨닫고 앞날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갖는다. 우리의 정치가 혼탁하지만 불과 20년 전에는 무자비한 독재가 판치지 않았던가? 현재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대의 무자비한 민간인 살상이 1980년에 한국에서도 있었다. 연줄이 없으면 취직을 하기 어렵고 급행료를 내지 않으면 관공서에서 일이 돌아가지 않던 때가 그리 멀지 않았다. 여전히 후진적인 시스템이 곳곳에 있지만 점차 바뀌는 것을 보면서, 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히 보면서 앞으로 일이십년 후에는 우리도 선진국과 같이 풍요롭고 투명한 사회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내가 열심히 사는 이유 또한 이러한 사회를 앞당기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 블로그를 정성을 기울여서 쓰겠는가?

2012. 3. 4. 19:53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온라인 마케팅의 중요성이 커진다. 이미 사용해본 사람의 의견을 게시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온라인 마켓팅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구매하기 전에 여러 판매자를 비교하고 다른 소비자들의 의견을 참조한다. 사람들은 판매자보다 실제 구매자의 말을 더 믿으므로 인터넷에서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인터넷에 게시되는 의견이 얼마나 객관적이냐는 점이다. 익명이 보장되는 인터넷의 속성상 판매자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긍정적인 의견을 남발할 수 있고, 혹은 반대로 경쟁자나 악의의 소비자가 부정적인 의견으로 매도할 수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정보는 있으나마나 하다. 인터넷의 정보가 이러한 약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구매를 할 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곤 한다.

  미국에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인터넷 리뷰 사이트가 여럿 있다. 소비자들이 직접 올리거나 혹은 리뷰 사이트의 직원이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용하고 올린 의견을 게재한 인터넷 사이트가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은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방문하여 게시된 의견을 참조한다면 그 회사는 광고를 유치하여 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객관적인 정보를 게시하여 방문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에도 한때 맛집 정보 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게재한 정보의 신뢰도가 형편없기에 실패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앤지스 리스트'(Angie's list)나 '옐프'(Yelp)는 대표적인 인터넷 리뷰 사이트로서 크게 성공하여 주식을 상장하기까지 했다. 앤지스 리스트는 집수리 분야에 특화하였으며 의견을 올리는 사람의 실명을 요구하여 거짓된 정보 생산을 차단하였다. 또한 유료 회원으로 가입해야만 리뷰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인터넷에서 공짜 정보를 얻는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돈을 내게 하면 방문자를 몰아낼 위험성이 크다. 그러나 집수리 분야의 경우 약간의 돈을 내더라도 유용한 정보를 얻는 것의 이익이 크기에 유료 회원이 미국 전역에서 백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집수리 서비스란 잘못 선택하면 물리기 힘들고 손해가 크기 때문에 좋은 정보의 가치가 큰 것이다. 

  옐프는 주로 레스토랑 리뷰에 특화하였는데 거짓 정보를 차단하는 노하우를 구축하여 성공하였다. 자체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거짓 리뷰를 자동으로 거르고, 자체 직원이 직접 나가서 소비자의 평가를 재검토하고, 거짓 리뷰를 게재하는 사람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효과를 거두었다. 업체로부터 광고를 수주하면서 이것이 리뷰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엄격히 지켰다. 물론 호의적인 평가를 받은 업체의 광고가 주로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거짓 리뷰를 차단하는 프로그램은 어떻게 작동할까? 구체적인 사실을 묘사하기보다 사용자의 주관적인 느낌을 남발하거나, 과장된 수사를 써서 칭찬하거나, 지나치게 평가 점수가 높거나, 합리적으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깍아 내리고 비난하는 말을 반복하는 등을 거짓 리뷰로 처리한다. 그럼에도 잘 쓴 리뷰의 경우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소비자가 올리는 리뷰를 전문으로 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약점은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리뷰를 써야 할 동기가 약하다는 점이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마다 리뷰를 써달라는 요구를 받지만 나는 한번도 이에 응한 적이 없다. 소비자가 사용 후기를 자발적으로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설사 쓴다고 해도 부정적인 경우가 훨씬 많다. 불만을 느낄 때 항의하는 맥락에서 쓰는 경우가 만족을 느껴 칭찬을 하기위해 쓰는 경우보다 많다. 인터넷에 자신의 의견을 쓰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이므로 웬만큼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으면 이해 상관이 없는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칭찬을 올리는 경우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터넷 상에 부정적인 의견이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물건이나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기본이고, 만일 부정적인 의견이 올라올 때 이 의견에 신속히 응답하고 성실하게 조치하는 것이 최선이다. 판매자가 소비자의 불만에 경청한다는 인식을 줄 때 부정적인 의견을 올린 사람이 그 의견을 수정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회사의 그런 태도를 보고 처음에 제기된 부정적인 평가에 비중을 덜 두거나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인터넷 상에서 소비자의 의견을 모니터하고 대응하는 것을 전담하는 회사도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은 정보를 생산하고 이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보의 신뢰성이 취약하다. 유용하고 신뢰할만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평판을 얻으면 그 자체로 큰 사업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잘 보이려고 거짓말도 불사하고 남을 깍아 내리는 데 빠르므로 사람들의 호 불호의 의견이 쌓여서 좋은 평판을 구축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나 평판이란 사람들의 의견에서부터 나오므로 이를 잘 관리하는 방법을 개발한 업체는 큰 돈을 벌 수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물건과 서비스의 정보를 객관적으로 제공하는 사업으로 성공한 사례는 없지만 이러한 서비스에 대한 욕구는 매우 크다. 모두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에 불만을 느끼면서 객관적인 정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 2. 28. 23:32

  근래에 들어 혼자 사는 사람이 많다. 전체 가구 중 일인 가구의 비율은 미국은 3분의 1을 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전체의 4분의 1을 넘겼다. 이들 중 절반은 노인 가구이며 나머지 절반은 젊은 사람이 차지한다. 특히 혼자 사는 여성의 비율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혼자 사는 것, 특히 여성이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 혼자 사는 것은 외로움, 불안정, 히스테리, 노처녀 등과 같이 부정적인 상태, 문제의 상태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혼자 사는 것의 좋은 점이 부각되면서, 혼자 사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보는 사회적 인식은 크게 변화하였다. ‘자유’, ‘구속에서 홀가분함’,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언제 건 행동에 옮길 수 있음’ 등의 매력이 새로이 발견된 것이다. 과거에는 경제적인 제약 때문에 좋건 싫건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했으나, 여성의 취업기회가 늘고 경제적인 독립을 누리게 되면서 구지 구속을 참고 지내야 할 필요성이 줄었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 좋은 것이다. 물질적 풍요가 낳은 산물이다. 마음에 맞는 사람과 안정된 관계를 오래 가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될 때 구지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홀로 자유로이 사는 사람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얼마나 답답해했던가. 관계 속에서 힘들어 할 때 마음 닿는 대로 발걸음 닿는 대로 홀가분하게 사는 것을 꿈꾼다. 비록 때때로 외로움을 느낄 테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의 불안정을 참아야 하지만 ‘자유’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신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혼자 있을 때 더 나다와지는 것 같다. 예술에 눈을 돌리고, 무엇이 가치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혼자있을 때 평소 안해보던 것도 시도하고 창의적이 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인지 모른다.  


 

2010. 8. 15. 14:38
  몇년 전만 해도 전자책이라고 하면 기술에 미친 사람이나 시험적으로 사용해보는 것으로 알았다. 미국 신문에서 근래까지 아마존의 킨들이라는 전자책 실험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지 회의적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라고 하면 일단 부정적인 이유를 먼저 앞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그런데 소개하는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올해 다섯달 동안 시장에서 거래된 책 중 8.5%가 전자책이었다고 한다. 앞으로 삼사년 내에 전자책 시장은 40%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정말 빠른 변화의 속도이다. 불과 15년전에만 해도 인터넷을 들어보지도 못했으며, 구글이라는 검색엔진은 불과 10년전에 처음 나타났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은 이제 6년째이며, 트위터는 2~3년 밖에는 안된다. 블랙베리라는 스마트 폰이 몇년 됬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일반 사람이 전화기로 인터넷을 이용한 것은 이삼년전에 나온 애플의 아이폰이 처음일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빠른 변화에 적응할 수있을까? 대답은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과거 기술에 익숙한 사람은 과거의 기술을 계속 이용하는 관성을 지속한다. 생존의 위협 앞에서 마지못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리 해도 새로운 기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생활하고 일하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결국에는 새로운 기술을 익숙하게 사용하면서 성장한 새로운 세대가 이들을 대체하면서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은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나는 컴퓨터 1세대이다. 대학교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으며, 윈도우 이전 운영체제인 도스 프로그램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씨름했었다. 90년대 후반 홈페이지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html언어로 직접 타이프 치면서 나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요즈음 이미지 중심의 컴퓨터 사용이나, 이동성 중심의 인터넷 활용이나, 일 이외의 용도로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는 데는 친숙치 못하다. 먹고살기 위해 이러한 기술을 부지런히 쫒아가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몸과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래도 문자 중심의 컴퓨터 사용,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인터넷 활용, 일을 하는 도구로서 컴퓨터와 인터넷 세대에서 벗어날 수없다. 그렇다면 현재 하고 있는 블로그는? 아무래도 일 쪽이다. 놀면서까지 컴퓨터 앞에 있고 싶지는 않기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마도 10년 이내에 전자책이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변화 수용 속도는 정말 감탄할만 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잘 이용하는 체 해야 할 것이다. 나도 조만간 전자책을 많이 읽게 되겠지만 얼마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일을 위해서라면 전자책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놀면서 흥미로 읽을 때는 종이책을 고집하면서 살다가 죽을 가능성이 크다.

   

2010. 8. 14. 21:33
    대학은 산업인가 아닌가? 여기에 소개하는 기사에 따르면 영국에서 대학은 분명히 하나의 산업이며, 그것도 많은 이익을 내는 매우 큰 산업이다. 영국 대학들은 국내 학생에게는 소요 비용보다 낮은 등록금을 받는 대신 외국의 유학생에게 비싸게 거두어  재정의 균형을 맞춘다. 등록금 이외에도 외국 유학생이 먹고자는 데 쓰는 비용은 지역 경제에 중요한 수입원이다. 이것이 산업이라면 상품구성과 품질 관리는 어떻게 할지, 어떻게 마켓팅을 할지, 가격 정책은 어떻게 할지, 어떻게 비용 대비 이익을 극대화할지 , 등을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국의 대학교는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학교의 경영을 바라보며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는 데 열성을 기울이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이 영국의 대학교를 먹여 살리고 있기때문이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는 영어권 국가로서 수십만명의 외국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시장에서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영국 대학도 만만치 않은 수의 외국인을 받아들인다. 이들 나라에 학생을 보내는 송출 국가로는 중국과 인도가 다수를 점유하며 아시아와 중동 등 제 삼세계의 나라도 많은 유학생을 보낸다. 영국 대학의 걱정 중 하나는 과거에 자신의 교육을 소비하였던 나라들 가까이에서 지역의 유학생 수요를 흡수하는 경쟁자가 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지아, 등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국제적인 수준의 대학교에 유학하는 이 지역의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조만간 중국은 유학을 꿈꾸는 우수한 학생들을 자국의 대학에서 흡수할 수있는 실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어떻게 하면 자국에 더 많은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할 수있을까? 조셉 나이 교수는 미국의 힘을 소프트 파워에서 찾는 데, 과학 기술과 문화에서의 매력과 우위가 군사적인 우위보다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미국의 가장 큰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과학과 기술에 있다. 인터넷, 컴퓨터, 자동차,휴대전화, 전기, 등 우리가 이용하는 거의 모든 문명의 이기들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거나 혹은 실용화되어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의 문제점을 흔히 지적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실용화시키는 능력에서 아직 미국을  따라갈 나라는 없다. 이러한 새로운 아이디어 생산의 중심에는 미국의 대학이 있는 것이다. 미국 대학의 연구소는 불이 꺼지지 않으며 계속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고 산업체에 공급하고 있다. 근래에 새로운 발견 발명은 대부분 미국 대학교의 연구소에서 시작된다. 미국 문화의 흡인력은 또 어떻고 말이다. 세계의 영화관이 미국 헐리우드 영화로 도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이 아마도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사실 이들 나라에게 외국인 유학생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이들이 공부하는 동안 돈을 뿌려주는 것은 물론, 이들이 매우 열심히 공부하기때문에 자국 학생에게도 자극이 되어 대학의 수준을 우수하게 유지하는 데 촉매제가 된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와 국적의 외국인 유학생들이 캠퍼스에서 돌아다니면 대학교의 국제적인 분위기는 저절로 조성된다. 세계화와 함께 선진국 기업들은  국제적인 사업과 국제적인 경쟁에 많이 참여하게 되고 이 나라 학생들은 교육 과정 속에서 이러한 국제적인 소양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데, 외국인 유학생은 바로 이러한 교육 목적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다. 

   외국인 유학생들은 자국에 돌아가면 자국에서 지도적인 자리를  차지하면서 미국 혹은 영국에 우호적인 의견과 생각을 전파하게 된다. 이들에게 익숙한 외국의 문물은 자신이 유학했던 나라일 것이므로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이 나라의 사례를 많이 언급하면서 사람들에게 이 나라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미국이 풀브라이트 프로그램 등으로 제삼세계의 똑똑한 학생이나 언론인, 공무원, 정치가 등을 자국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한국의 지도급 인사 중에 미국 정부의 돈으로 미국에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소수일 것이다. 자비를 들여서 공부한 사람까지 포함한다면 한국의 지도층 인사들은 거의 전부가 미국을 자신의 사고의 축으로 삼고 있다. 결과 한국에서 외국의 사례라고 하면 모두 미국을 인용한다. 어디 프랑스나 러시아의 사례를 언급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이들이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한다면 어떤 영화를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선호하겠는가? 프랑스 음식점이나 러시아 식당이 주위에 드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국은 우리나라 지도자를 자국에서 공부시키는 데 엄청나게 많은 돈을 썼지만 그 몇배로 수익을 보장받는 투자를 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대학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산출되는 한, 세계의 젊은이들은 이들 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할 것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자국민보다 외국인 유학생이 더 똑똑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데 더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약간 께름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똑똑한 외국 학생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이들 나라에 남아서 계속 아이디어를 생산하도록 한다면 이들 나라의 대학과 산업은 계속 우위를 유지할 것이니, 사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외국학생이 본국 학생보다 더 잘하는 것이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나라 사람 중 다수가 똑똑한 외국인이 들어와 좋은 직장을 선점하고 자신들은 밀려나서 싸구려 일자리에서 해메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외국 유학생은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만 이들이 자국에 남아서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려고 안달한다. 과거에는 박사를 따면 시민권을 쉽게 얻고 직장도 쉽게 구할 수있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사실은 이들 덕분에 선진국 국민이랍시고 그나마 잘 살고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똑똑한 외국인 유학생이 없었다면 실리콘 밸리는 생겨날 수없었으며, 근래에 눈만 뜨면 새로 들려오는 인터넷 세계의 새로운 아이디어들도 미국의 몫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할만큼 소프트 파워가 있는가? 우리나라의 대학은 똑똑한 학생들을 자국의 대학에 유치할만큼 실력을 쌓아가고 있는가? 혹시 조만간 싱가포르나, 홍콩이나, 중국으로 유학가는 학생들이 줄을 서서 공항을 빠져나가지는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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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11. 22:27
  외신에는 행복에 관한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기사가 잊을만하면 또다시 등장하곤 한다. 그러한 기사의 논지는 대체로 비슷하다. 물질적인 성공이나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반드시 행복을 증진시키지는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 기사에서도 역시 단순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행복을 높이는 사례임을 처음에 지적하면서, 서구의 물질중심주의적 행복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과시적인 소비나 불필요한 소비가 생활을 더 복잡하게 하며 행복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경제가 어려워져서 무턱대고 많이 소비하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내적인 성찰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읽혀진다.  어느 정도 물질적으로 기본적인 것이 충족된 상태에서 추가로 물질을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은 행복의 증진에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많이 검증되었다. 

  사실 문제는 물질적인 만족이 아니다. 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은 물질적으로 더 편하자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지위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하다. 명예, 지위 등과 같이 남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는 정말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옛 성현들은 명예나 지위에 초연하기를 권고하지만, 과연 그사람 자신이 정말 그렇게 살기를 원했는지 의심스럽다. 사회적인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삶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냐. 물론 소를 모는 목동이나 밭을 가는 농부를 칭송하는 시도 있기는 하다마는.  서구의 가치관은 젊은 시절에 야망을 품고 성공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라지 않는가? 
사회적으로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살면서 행복하라는 것은 도인이 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나 넘볼 수없는 달관의 경지이다. 체념만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    

 
별로 달관의 경지를 크게 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꼭 행복 추구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할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을 벌리지 않으면 무엇에 연루되어 골치를 썩일 일도 없겠지만 이루는 것도 없기에 바람직하지는 않다.  집착하여 열심히 매진하는 것이 없다면 실패할 까닭도 없지만 얻는 것도 없다. 크게 불행해 지지만 않는다면 많은 일을 이루고 여러 사람과 엮이면서 살고 싶다. 방글라데시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하여도 부럽지는 않다.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고 하여도 이웃을 위해 혹은 대의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이룬 것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때때로 너무 힘들 때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쉬운 길을 가고 싶은 유혹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물질적인 소비보다는 작지만  뜻깊은 체험이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 물질적인 필요가 충족된 다음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과 기억에 남을 일을 하거나 혹은 자신을 무엇에 몰입하면 물건을 소비하여 얻는 행복보다 더 크고 오래 기억될 수있다고 한다. 여행과 같이 돈이 드는 체험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면 큰 돈 들지 않으면서 뜻있는 경험도 주위에 얼마든지 많다. 예컨대 요즈음 나에게는 집가까이에 개천을 산책하면서 하늘과 풀을 보고 물소리를 듣고 얼굴을 지나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경험이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함으로서 행복을 얻는 것이 어렵다면 일상이 허락하는 대로 자신에게 뜻있는 자잘한 체험을 자주 찾아 나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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