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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7. 14:52

   사람들은 학교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하며 하루가 멀게 교육 제도를 바꾼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교육 제도를 자주 바꾸는 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 것은 문제의 근원이   학교 교육 자체보다는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http://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12/10/why-kids-should-grade-teachers/309088/

 Why Kids Should Grade Teachers

By Amanda Ripley


   어느 사회나 학교 교육은 사회적인 성공의 중요한 통로이다. 과거 토지 소유나 신분이 지위와 권력의 기반이었을 때에는 학교 교육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요즈음 ‘지식 경제’(Knowledge Economy)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경제활동에서 지식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교육의 지위획득 기능은 더 커졌다.

   문제는 학생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학교 자체가 아니라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점에 있다. 사람들은 학교 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장치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어떤 가정 배경인가에 따라 교육 기회는 큰 차이를 보인다. 교육 수준이 높고 소득이 많은 부모의 자녀는 그렇지 못한 부모의 자녀보다 평균적으로 학업 성취도가 월등하게 높다. 일간 신문에서 서울대 학생의 부모의 상당수가 강남에 거주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사실 모든 초등학교 학급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공부를 못하는 학생보다 부모의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다.

   본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학업 성취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배경에 따라 성취가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을 사람들은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평등과 민주주의 이념은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평등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 제도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능력이 자녀의 학업 성취로 고스란히 이전되는 것을 허용한다. 자신이 어떤 부모에게서 출생하는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사람들은 이런 부정의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없는 사람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은 불편해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맨날 떠들면서 이리저리 뒤집어보아도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을 외면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아우성만 지속될 것이다. 

   미국은 이런 점에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종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열등한 지위에 있는 흑인과 히스패닉 자녀의 낮은 학업 성취도는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이다. 유색인이 다니는 학교의 수준은 정말 열악하다. 학교의 시설은 낡고 부족하여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는 환경이며, 선생의 수준이나 가르치려는 의욕은 낮으며, 학생의 배우려는 의지 또한 매우 낮다. 많은 유색인 학생들이 매일 집에서 복잡한 사건을 경험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학교에 오는 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머리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반면 중류층 백인이 다니는 학교는 좋은 시설과 안정된 가정 환경과 부모의 관심과 선생의 열의와 학생의 의지가 결합하여 높은 학업 성취를 보인다.

   미국의 교육 개혁은 대체로 유색인 학교의 낮은 학업 성취도를 어떻게 끌어 올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중류층 학생의 학업 성취도 또한 국제 비교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이면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는 있다. 미국의 많은 교육학자들이 복잡한 방법론을 동원하여 문제를 분석하고 매일 같이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오지만 그리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사실 효과를 보이는 개선책은 대체로 교육의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여기 소개한 기사에서 지적하는 개혁 방안은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자녀의 학업성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선생이 좋은가 여부는 학생의 학업 성취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어떻게 선생의 질을 높일 것인가, 어떻게 나쁜 선생을 솎아낼 것인가, 어떻게 수업의 질을 개선할 것인가는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다른 방법보다 학생이 선생을 직접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높다.

   학생은 선생과 오랜 시간 함께하고 선생이 제공하는 교육을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이므로 어느 외부 전문가보다 더 선생과 선생이 제공하는 교육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보다 선생에 대한 평가가 더 공정하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 편차는 매우 적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다른 학생들 간에도 선생에 대한 평가는 일관되다. 심지어는 유치원 학생들 조차도 자신의 선생을 잘 평가할 수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반면 학생의 학업 성취도로 선생을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선생의 질보다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복잡한 방식으로 부모의 사회경제적인 수준 차를 통제하여  학생의 학업성취도에 따라 선생과 학교의 질을 평가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공정성이 결여되어 반발을 낳는다. 우리나라에서 근래에 일제고사를 이용하여 학생의 성취도가 떨어지는 학교에 불이익을 주는 정책이 옳지 않다고 비판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을 잘 알기 때문에 복잡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단순하면서 직접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다음의 다섯 개의 문항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 이 수업을 듣는 학생은 선생님을 존경한다.

2. 우리 반 학생들은 선생님의 통제를 잘 따른다.

3. 우리 반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4.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거의 매일 많은 것을 배운다.

5.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는다.


  학생은 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물론 선생은 학생의 평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평가받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평가가 자신이 받을 보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면 더더욱 평가를 기피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공적인 일이므로 공적인 절차에 따라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보상이 따르는 일에 대해 평가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평가가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며,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기 어렵기때문이다. 학생의 평가가 오류투성이라면 모를까 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이것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평가는 학생은 물론 선생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학생들은 매우 냉정하며 공정하게 평가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관심을 덜 기울이거나, 수업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배우는 것이 많지 않은 수업은 학생들이 기피하며 낮게 평가한다. 학생의 이해도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면 반드시 낮은 평가를 받는다. 학생이 배우는 양과 수준과 속도에 관심을 기울이며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선생을 학생들은 선호하고 높은 평가를 내린다. 점수를 잘 주는 선생의 강의에 많은 학생이 몰리지만 그러한 강의에 대해 반드시 후한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한 강의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불만을 표하는 학생이 반드시 나온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선생의 강의를 평가할 때 비교적 후한 점수를 준다. 5 만점으로 평가했을 때 웬만큼 괜찮다고 생각하면 평균 4 점 이상이다. 평균 3.5점 이하를 받으면 학생이 선생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한학기를 가르치고 나서 선생인 나 자신에게 불만족했던 강의는 거의 반드시 4.0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학생들도 나와 동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선생이 학생의 평가를 받지 않았던 것은 우리사회의 권위주의적인 전통 때문이다. 사회적 권위가 합리성을 제약했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것이 선생의 권위에 대한 침해라고 반발하지만, 열심히 잘 가르치는 선생에게는 학생이 존경하고 좋은 평가를 내린다. 학생은 선생의 인간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수업을 통해 학생에게 한 일을 평가하는 것이므로 인권 모독과는 상관이 없다. 학생들은 평가를 통해 선생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개선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교사 노조는 선생에 대한 학생의 평가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는 이기적인 주장일 뿐이다. 대부분의 선생은 겉으로 드러내 말하지는 않지만 학생의 평가가 대체로 공정하고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 엉터리로 평가하지만 학생 전체에 대해 평균을 내면 일부의 왜곡된 평가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제도가 효과적으로 시행된다면, 전혀 준비하지 않고 수업에 임하는 선생이나, 학생의 학업 성취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선생은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나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그런 무책임한 선생을 여러 명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수업을 매일 들으면서 느꼈던 좌절과 분노를 기억한다. 나는 그런 선생을 전혀 존경하지 않았으며, 어린 나이에도 그들을, 그리고 그런 수업을 억지로 들어야 하는 나를 불쌍하게 느꼈다. 그런 선생은 자신이 잘 가르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기에 학생의 학업 성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것이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어떤 교육개혁보다 더 혁명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