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369)
미국 사정 (22)
미국문화의 기초 (2)
뉴욕사람들 (5)
세계의 창 (25)
잡동사니 (26)
과일나무 (285)
배나무 (10)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미국 사정/뉴욕사람들'에 해당되는 글 5건
2015. 8. 8. 22:09

(5-1-4) 그리니치 빌리지의 뒷골목으로 난 정원건물 사이로 출구가 열린 정원이다정원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니 도심 한 가운데인데도 조용하고 아늑하다.


   몇 년 전 뉴욕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 한여름을 보낸 일이 있다. 워싱턴 스퀘어 공원 앞 도서관에서 큰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정말 아름답다. 가까운 건물의 계단 형으로 올라가는 옥상도 멋있고 워싱턴 기념 아치를 통해 보이는 5번가도 무척 아름답다. 여름에는 오래된 건물 사이로 워싱턴 스퀘어 공원과 5번가가 나무 가지로 울창하게 드리워져 있어 유럽의 옛날 도시를 보는 느낌이다.

   뉴욕 대학 도서관의 실내는 천장이 높고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마호가니 책상이 반들반들 빛나고 책상마다 놓여 있는, 놋쇠로 만든 갓을 씌운 등이 환하게 빛을 발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등록금이 비싼 귀족 사립 학교는 과연 다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아침 일찍 이곳에 와서 한적한 도서관의 분위기를 즐기고, 워싱턴 스퀘어 공원을 내려다보면서 하루를 계획하곤 했다. 자리를 잡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무거운 트레일러 가방을 끌면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고시생과 마찬가지로 책상 위에 한 무더기의 책을 쌓아 놓고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한다. 7월 말의 어느 날 도서관에 오니 이들이 완전히 사라져 있어서 웬일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무렵 변호사 자격시험이 있다고 한다. 뉴욕 대학 도서관에서 보낸 여름은 내 일생에서 가장 호사한 시간이다.

   내 기억 속에서 뉴욕 대학과 워싱턴 스퀘어 공원은 분리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피곤하면 바로 앞에 있는 공원에 나와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며 쉬곤 했다. 점심때는 집에서 싸가지고 온 샌드위치를 먹거나, 주변의 피자집에서 피자를 사와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분수 옆 벤치에 앉아 먹고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 피곤한 날에는 도서관에서 일찍 나와 그리니치 빌리지의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금요일 오후면 도서관이 텅 비고, 대신 워싱턴 스퀘어 공원이 사람들로 북적대기 시작한다. 점심시간부터 벌써 무료 공연이 이어지고 주위에 사는 학생들과 주민이 공원에 나와 주말의 해방감을 만끽한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 어린 아이를 유모차에 밀며 나온 사람, 예쁘게 차려입고 데이트 하는 남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은퇴하고 여유 있는 삶을 즐기는 듯 보이는 노부부, 배낭을 둘러맨 젊은 여행자, 연신 사진기를 들이대며 호기심을 번득이는 관광객,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청소년, 분수 속을 좋아라 뛰어 다니는 어린이와 강아지. 이들 속에 섞여 있으면 왠지 내 가슴도 들떴다. 지금은 멀리 가버린 젊음을 다시 맛보는 것 같았다.

   날씨가 좋은 오후에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 앉아 있으면 심심하지 않다. 관광객도 많이 오지만, 그보다는 주변에 사는 시민이나 대학생들이 와서 시간을 보낸다. 가운데 분수를 둘러싸고 있는 계단과 벤치에 앉아 사람들은 책을 보고,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남녀가 손을 잡고 앉아 포옹을 하고, 햇빛을 즐기며 넓은 하늘을 바라본다. 분수 광장 옆에는 거리 공연이 벌어진다. 젊은 흑인 팀이 정말 열심히 춤을 추고 구경꾼들은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른다. 몇 년 후에 다시 와 보았는데도 같은 얼굴의 흑인이 공연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에게 이곳의 거리 공연은 직장이다. 광장 한편에는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이 있고 양쪽 벤치에 노인들이 앉아 있고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끌고 온 엄마나 아이 보는 아주머니 들이 잡담을 나누고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한다. 그 너머에는 돌로 된 탁자를 가운데 놓고 노인들이 체스를 두고 있다. 그 중에는 내기 체스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체스 말을 정렬해 놓은 채 우두커니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여름철에는 주말마다 분수 광장 한편에서 연주회가 열린다. 뉴욕시와 기업의 협찬으로 이루어지는 클래식 음악 연주회다. 공짜로 수준 높은 연주를 듣는다는 즐거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 상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다. 점심시간부터 공연 준비를 하느라 무대를 가설하고 의자를 정렬하고 통행을 막으면서 여유로운 공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때때로 뉴욕 대학 음악전공 학생들 몇몇이 평일 점심시간에 간단히 하는 연주가 더 흥미롭다. 그들의 연주를 가까이 다가가 듣는 사람도 있지만, 멀리 벤치에 앉아 흘러오는 음악을 들으며 점심을 먹을 때는 정말 꿈 같은 시간이다.

   그리니치 빌리지에는 옛날 도시의 모습이 살아 있다. 구불구불한 길과 기억하기 힘든 독특한 이름을 가진 가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중에 게이 스트리트라는 이름도 보인다. 4번가와 12번가가 교차하기도 하고, 특이한 이름의 도로가 한두 블록 이어지다가 중간에 다른 이름으로 바뀌기 일쑤다. 주변으로 고층 건물이 올려다 보이지만 이곳에서만은 4~5층 높이의 오래된 건물이 주를 이룬다.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목조 건물과 밖으로 철제 계단이 돌출된, 벽돌로 지은 아파트가 가로에 잇닿아 있다. 폭이 5미터도 안 되며 한 층에 방 하나만 있는 삼사 층의 주택도 눈에 띈다. 일전에 이곳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한 건물에 한 가구가 사는데, 이 층에는 부엌 겸 거실이 있고 삼 층과 사 층에 조그만 침실이 각각 하나씩 있다. 집안에 난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사는 것도 나름 괜찮단다. 물론 장애가 있는 경우라면 이런 집에서 살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건물 사이에 난 좁은 골목으로 출구를 빠끔히 내밀고 있는, 조그만 정원을 가진 오래된 집도 보인다. 정원에 들어가 보니 도심 한 가운데인데도 조용하고 아늑하다. 대로변에는 상점이 줄지어 있지만 뒤편의 좁은 거리에는 드라마에나 나옴 직한 고풍스러운 주택이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좁은 거리는 바닥에 작은 벽돌이 깔려 있어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길거리에는 오래된 가로수가 줄지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며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맨해튼의 중심가가 바로 옆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동네 전체가 조용하다. 오래된 유럽의 구시가를 거니는 느낌이다.

   이렇게 오래된 동네에 누가 살까 궁금해 하는데, 사오십 대의 지적으로 보이는 훤칠한 남자가 캐주얼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온다. 산보를 가려나보다. 편한 옷이지만 점잖게 입은 할머니도 간혹 눈에 띈다. 식료품을 산 쇼핑백을 손에 들고 있다. 미국 교외의 전형적인 주택가와는 달리 어린 아이나 청소년이 돌아다니는 것은 보기 힘들다. 함께 다니는 남녀를 많이 보지만 자녀가 없는 부부이거나 동거하는 연인 사이로 보인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거리에서 보는 사람의 절반은 관광객으로 보이는데, 젊거나 중년 관광객이 많은 반면 어린 아이를 동반한 가족 관광객은 거의 없다. 또 다른 부류는 주변에 직장이 있거나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데 이들의 차림새와 태도에서 보보스의 분위기를 읽는다. 어느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으며 자신의 머리로 먹고사는 자유분방한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그들은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비교적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이다.

   그리니치 빌리지 곳곳에 테이블을 밖에 내놓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다. 그곳에서는 세련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며 한가한 여유를 즐긴다. 대로변에는 보헤미안 풍의 가게가 눈에 띈다. 펑크 스타일의 옷과 장신구를 파는 상점, 패션 드레스를 파는 부티크, 색다른 문양과 색채의 물건을 전시한 인테리어점, 독특한 그림을 걸어 놓은 화랑이 있다. 사실 이곳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물건을 왕창 사서 집안으로 나르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종이봉투나 쇼핑백에 들어갈 정도의 식료품을 사서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자동차 트렁크 한가득 식료품을 사서 실어 나르는 미국 중류층의 전형적인 소비문화와는 퍽이나 다른 분위기다. 차고가 없는 집이 대부분이고, 거리에는 녹음이 우거져 있으며 한가하게 거리를 산보하는 사람이 눈에 띈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동성애자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동성애 커밍아웃 운동이 시작된 곳이 아닌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 그렇듯 동성애자의 폭동이 일어났던 스톤월 인은 생각보다 훨씬 조그만 가게였다. 지금도 영업을 한다는데 사람의 인적을 별로 찾을 수 없다. 현관 위에 걸린 무지개 문양의 깃발이 이곳이 동성애와 관련된 곳임을 말해줄 뿐이다. 그 맞은편 크리스토퍼 공원에 있는 동성애 기념 동상 주변에서도 동성애자를 볼 수 없다. 이곳 모퉁이의 게이 스트리트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동성애자는 이곳을 떠난 것이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퇴근길에는 철망으로 둘러쳐진 거리 농구를 가끔씩 구경했다. 그곳 근처로 걸어가면 사람들의 함성이 들리고, 철망 너머 빠르게 움직이는 선수들의 격렬한 몸  놀림과 욕설이 나를 흥분시킨다. 그곳에서 움직이는 흑인 청년들을 보노라  면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 연상된다. 울퉁불퉁한 근육질, 민첩한 몸놀림, 신속한 대시와 무지막지한 충돌, 엄청난 점프력. 이들의 건장한 육체를 보면서 한편으로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 가슴이 아팠다. 흑인이 동물로 취급되던 노예제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는 두뇌를 가진 인간이기보다 소나 말처럼 힘을 쓰는 동물로서 소유되고 착취되었다. 노예제 시절 유산 목록에는 가축이나 가구와 함께 노예의 이름이 기록되어 후손에게 상속되었다. 노예제는 흑인을 지능이 낮고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존재로 보는 고정관념을 미국 문화 속에 고착시켰다. 영화나 광고에서 흑인은 동물처럼 원초적인 욕정과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백인이 흑인보다 키가 크고 육체적으로 더 건장하다. 미국에 오래 살면서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일 뿐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흑인은 육체적인 존재라고 느낀다. 문화적인 고정관념이 이성적 판단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리니치 빌리지에는 예술가들이 살지 않는다. 이곳을 걷다 보면 문화계의 유명 인사를 만난다고 하는데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이곳은 중류층이 사는 교외나 부자들이 모여 사는 부촌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곳곳에서 자유로움과 다양성의 멋이 풍겨나기 때문이다. 순수한 보헤미안 주의와는 거리가 멀겠지만 , 판에 박힌 따분함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개성을 풍기며 다양성을 맛볼 수 있다. 일전에 어느 대도시의 교외에서 한동안 머문 적이 있는데 질식할 것 같은 단조로운 환경이 권태 그 자체였다. 기껏해야 인근 공원에서 바람을 쐬거나 도서관에서 비디오를 빌려 보거나 주말에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다였는데, 조금만 지나면 이 생활에 진력이 난다. TV를 즐겨 보는 것도 아니고 잔디를 기르는 데 취미도 없는 내게 교외의 생활은 인생 낭비다. 아무리 편리하고 풍요롭다고 해도 지적인 자극과 문화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는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곳에 모여 있을 것이다. 집값이 무척 비싸다고 하니 아무나 살기는 어렵겠지만, 한적함이 묻어나면서 도시의 다양성과 문화생활이 바로 곁에 있는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 4. 3. 05:21

할렘을 대표하는 두 흑인 운동가의 대조적인 생애


  

(7-1-3) 두보이스, 1918흑인과 백인의 혼혈로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귀인상이다흑인 최초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며 흑인 운동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7-1-4) 마커스 가비, 1924짙은 고동색 피부두터운 입술뭉툭한 코투박한 복장전혀 세련되지 않은 모습이나 그의 연설에 흑인들이 열광했다그는 흑인의 응어리진 가슴을 풀어줄 희망을 전하는 전도사였다.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는 흑인의 문예 부흥이 중심이지만 흑인의 지위를 높이는 사회 운동에서도 큰 자취를 남겼다. 그 당시 할렘을 중심으로 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한 두 흑인 운동가, 두보이스(W.E.B. Du Bois)와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의 활동은 이후 흑인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이며 그들의 운동 방식 또한 그들의 성격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이들의 생애와 흑인 운동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보면 자못 흥미롭다.

두보이스는 1868년 보스턴에 엘리트 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쪽 가계는 노예제 시절 매우 예외적이었던 자유 흑인이다. 조상이 미국의 독립 전쟁에 참가해 자유를 획득했다. 그의 아버지 쪽 가계는 프랑스인과 흑인의 혼혈로 아이티에서 대지주였다. 두보이스는 지식인 부모 밑에서 어릴 때부터 고급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다. 한때 대학 교수를 했으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백인 사회의 위선과 불의를 고발하고 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한 일에 매진했다. 그는 글뿐만 아니라 흑인 중류층을 중심으로 1909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를 만들었다. 수십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심리학 등 사회 과학 전반에 걸쳐 그가 논의하지 않은 주제가 없을  만큼 지적인 활동 범위가 넓었다. 그는 흑인의 시민권 획득과 자결, 자조를 강조했는데 대체로 자유, 평등, 인권 등 유럽의 가치에 입각해 흑인의 지위 향상을 도모한 지식인이다. 그의 글과 활동은 이후 흑인 운동의 주류를 형성해 1950년대 민권 운동으로 연결되었으며, 그가 만든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는 흑인 사회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말년에 공산주의를 찬양하다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해외에 출국한 뒤 입국이 거절되어 196193세의 나이로 아프리카 가나에서 사망했다.

   마커스 가비는 지식인 두보이스와 달리 선동가이고 풍운아다. 그는 1887년 카리브 해에 있는 자메이카의 소도시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많이 읽었으며 인쇄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했다. 중남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인쇄공으로 일했고, 한때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대학 강의를 듣기도 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흑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신문사에서 일했으며,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유명한 연설자의 코너라고 이름 붙여진 연단에서 수시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후 자메이카로 돌아와서는 세계 흑인 향상 협회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백인의 억압 때문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흑인이 아프리카에 있는 흑인과 단결해 하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의 발상이 엉뚱하지 않은가?

   그는 미국에 건너가 전국을 돌면서 흑인에게 연설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조직의 미국 지부를 만들어 미국 흑인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사회 운동을 추진했다. 할렘을 근거로 흑인을 위한 신문을 발간했으며, 흑인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산업을 건설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미국의 흑인을 아프리카 서안에 위치한 라이베리아라에 단체로 이주하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의 흑인이 아프리카로 모두 건너가서 자신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웅대한 계획을 실현에 옮기기 위해 참가자를 모집하고 그곳에 단체로 건너갈 선박을 구입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가 역설한, 아프리카로 단체 이주하는 계획에 실제 동조한 흑인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조직에 400만 명이나 가입했으며 그가 연설하는 곳마다 흑인으로 넘쳐흐를 정도로 호응은 대단했다. 그는 천부적인 연설가였다. 마커스 가비가 불러일으킨 흑인 사회의 열광은 엄청났으므로 미국 정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FBI는 그를 감시하고 사소한 구실로 그들 잡아들였다. 미국 정부는 그의 계획이 사기라고 발표하고 3년간 수감한 후 자메이카로 강제 추방했다. 미국에서 추방된 후 그는 자메이카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의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다 1940년 영국 런던에서 사망했다.

   마커스 가비가 미국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다. 감옥에 갇힌 기간을 제외하면 불과 7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자취 는 이후 오래 지속되었다. 1960년대 말콤 엑스가 주도한 흑인 분리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며,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주장으로 대표되는 흑인 문화의 고유한 가치를 찾는 흑인 정체성 운동과, 흑인 민족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로 이어진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마커스 가비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가나의 국기는 마커스 가비가 조직한 세계 흑인 향상 협회의 깃발 문양을 빌려왔으며, 그가 제안한 아프리카인의 단결은 아프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frica)’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말콤 엑스가 흑인의 주체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그의 부모가 마커스 가비가 조직한 세계 흑인 향상 협회의 회원으로 열렬히 활동하던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놀랍다. 말콤 엑스는 할렘에서 활동하면서 분명히 마커스 가비의 숨결을 느꼈을 것이다.

   마커스 가비는 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실제적인 정책을 제안한 것은 아니다. 그가 제시한, 전 세계 흑인이 단결해 하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목표나 미국의 흑인이 아프리카로 돌아가 그들만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실현되기 어려운 꿈이다. 반면 두보이스는 흑인 엘리트로서 백인 사회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함께 흑인 지위 향상을 위해 실제적인 활동을 많이 했다. 흑인들은 누구를 더 기억할까? 물론 실제 미친 영향력으로 보면 두보이스가 훨씬 크지만, 흑인에게 꿈을 가져다 준 사람으로 마커스 가비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  지 않다. 마커스 가비의 부름에 흑인들은 열렬히 응답했다. 그가 활동하던 때에 할렘의 흑인들 사이에서 불러일으킨 열광은 물론이고 현재도 흑인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컨대 힙합의 노랫말 가사에서 마커스 가비의 이름을 만난다. 마커스 가비는 실행자이기보다는 종교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전설적인 선지자로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유사한 시기 할렘에서 활동한 이 두 인권 운동가는 외모에서부터 활동 성향까지 뚜렷이 대조적이다. 두보이스는 유럽인의 윤곽과 짙은 갈색 피부에 지적 풍미를 풍기는 세련된 엘리트의 모습이다. 반면 마커스 가비는 짙은 고동색의 피부에 아프리카 흑인의 두터운 입술과 뭉툭한 코를 지닌, 세련과는 거리가 먼 비서구적인 모습이다. 마커스 가비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열적인 연설가이기는 했지만 논리 정연한 주장을 폈던 것 같지는 않다. 두보이스의 글은 지금도 대학에서 광범위하게 읽히고 있으나 마커스 가비의 연설은 글로 출판된 것이 없다.

   마커스 가비는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가 만든 조직은 두보이스가 만든 조직에 비해 이상은 높지만 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실제 한 일은 별로 없다. FBI가 그를 조사해 사기죄로 감옥에 집어넣었을 때, 그가 한 약속에 비해 실제 진척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사기를 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상적인 약속을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약속을 믿고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가 사기를 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두보이스는 백인을 능가하는 지력을 이용해 백인에게나 흑인에게나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했다. 반면 마커스 가비는 흑인의 응어리진 가슴을 풀어줄 희망을 전하는 전도사였다. 마커스 가비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엄청난 수의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흑인의 감정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백인 식민주의와 백인 우월주의가 지배하던 세상에서 억눌리고,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당한 흑인에게 흑인도 고유한 가치를 가진 존귀한 존재이고 아프리카의 뿌리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  을 가져다주었다. 흑인에게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게 해준 것이다.

   후세 사람은 그들의 삶의 방식만큼이나 다르게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두보이스는 흑인 연구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한 학자로서, 하버드 대학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있다. 그 연구소에는 그의 지적 활동과 관련된 유물이 보존돼 있다. 반면 마커스 가비의 자취는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할렘의 공원이 전부다. 그가 활동했던 할렘의 사무소나 집은 헐린 지 오래이며, 그의 유물은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는 흑인 민중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2014. 6. 29. 15:55

앨리스 아일랜드와 인디언 박물관

_유럽 이민자의 꿈과 인디언의 슬픈 자취

(2-3-2a, 2-3-2b) 엘리스 아일랜드 입국 심사장의 과거와 현재. 1904년에 찍은 이 사진 속의 입국 심사장은 가축 출하장을 연상시킨다. 미국의 백인 3분의 1의 선조가 이곳을 통해서 들어왔다. 텅 빈 입국 심사장 홀에 서면 백 년 전 이곳에서 웅성대던 탄식과 환성이 환청처럼 들릴 것 같다.


   엘리스 아일랜드는 자유의 여신상과 한 짝이다. 엘리스 아일랜드는 자유의 여신상 옆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 1892년에서 1954년까지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입국 심사를 받던 곳이다. 1924년 이민법이 개정되어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이 실질적으로 중단되기 이전까지 이곳은 유럽 특히 남유럽과 동유럽으로부터 오는 이민자로 붐볐다. 1,200만 명의 이민자들이 이곳을 통과했다. 현재 미국 시민의 3분의 1은 그들의 선조가 이곳을 통과해서 미국에 입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는 미국에 들어오는 이민에 제한이 없어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미국에 갈 수 있었던 시절이다. 미국에 먼저 건너 온 사람들은 친척이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민을 권유했다. 한마을 사람 전부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경우도 있고, 일가친척이 순차적으로 모두 이민을 가기도 했다. 이민자는 독특한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친숙한 곳을 버리고 낯선 곳을 선택한 사람이다. 이민자는 자신의 모국에서 극도로 가난하지도 또 부자도 아닌 중간층의 사람이다. 자신이 사는 사회에서 중상류층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거나 반대로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은 미국으로 떠날 심리적인 용기 또는 물질적 수단이 없다. 이민자들은 출신 국가는 서로 달랐지만 상대적으로 젊고 모험심이 강한 동질적인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엘리스 아일랜드를 거쳐 미국으로 온 사람들은 희망과 불안이 교차한 상태였다. 오랜 항해 끝에 이곳 입국 심사장에서 심사를 받고 이 섬을 떠났다. 이 섬에서 평균 두세 시간 정도 체류했는데, 그 시간은 그들에게 일생 잊을 수 없는 긴장과 초조의 시간이었다. 입국자의 2%는 입국이 거부되었다. 이들은 같은 건물에 있는 임시 수용소에 일시적으로 수용되거나 바로 출국 조치되었다. 질병이 가장 큰 사유였으며 범죄 경력자나 불온한 사상을 지닌 사람도 거부되었다. 현재 엘리스 아일랜드의 입국 심사장 건물을 찾으면 입국 심사가 이루어졌던 텅 빈 큰 홀이 가운데 있고 주위로 입국자의 소지품을 전시한 공간이 있다. 백 년 전의 일이지만 이곳에서 입국을 거절당한 사람의 절망을 떠올린다.

   필자에게도 기억에 남는 입국 심사 경험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인지 뉴욕인지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을 때였다. 국제공항의 입국 심사장에서 별도의 방으로 따로 불려가 한참을 기다리다가 심문을 받았다. 꿀릴 것이 없어서 그리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사무실 한편에 아마도 입국을 거부당한 것으로 짐작되는 일군의 사람들이 경찰의 감시 하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미국에 가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지만 일이십 년 전만 해도 광화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면접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 초조와 긴장이 흘렀던 것을 기억한다. 거의 반나절 동안 대사관 담벼락을 따라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비자 면접관의 고압적인 질문 몇 마디에 조마조마했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힐끗 쳐다보고 서류를 보면서 몇 마디를 툭툭 던지는 것에 굴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 당시 비자 발급을 거부당하는 일은 아주 흔했다. 미혼 여자라고 거부당하고, 나이가 많다고 거부당하고, 직업이 분명치 않다고 거부당하고, 미국 방문 사유가 불분명하다고 거부당하고,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거부당하고……. 지금도 미국 공항에서 입국 심사관 앞에 서면 문득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국의 병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2-3-3) 맨해튼 남단 배터리파크에 있는 인디언 박물관 전경. 조각상 속의 인디언은 그리스 여신의 뒤에 숨어 있다. 건물의 대부분이 텅 비어 있는 이상한 박물관이었다. 인디언은 나에게 역사의 실체가 무엇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맨해튼의 남단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페리가 출발하는 바로 옆에 인디안 박물관이 있다.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분관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세관 건물로 쓰였다. 웅장한 석조의 조각상과 대리석 외관에 비해 전시물은 신통치 않아 특이한 분위기를 풍긴다. 한쪽에는 인디언의 역사와 유물을 전시해 놓고 다른 쪽에는 인디안 출신 예술가의 현대 작품을 전시하는데 건물 크기에 비해 실제 전시에 사용하는 공간은 크지 않다. 많은 공간은 그냥 텅 비어 있어 막막한 느낌이 든다. 뉴욕에서 인디언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밀려오는 곳의 바로 옆에 인디안 박물관을 세운 것은 아이러니이다. 인디언은 바로 이들 유럽 이민자들 때문에 멸망했기 때문이다. 병균을 가져왔고, 그들의 땅을 탐내서 그들을 죽이고 몰아냈다. 미국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 인디언은 왜 서부에서만 사는지 궁금했다. 백인이 만든 서부의 신화에 속아 넘어가서 인디언은 원래부터 서부의 야생에서만 사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인즉 인디언은 북미 대륙 전체에 걸쳐서 살았다. 특히 동부와 남부에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비옥한 곳, 즉 현재 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주로 살았다. 그러나 유럽인이 동부에 정착하면서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던 인디언은 죽거나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쫓겨났다. 현재 미국의 동부에서는 인디언을 볼 수 없다. 백인들은 침략자의 종교인 기독교와 서구인의 관습을 받아들인 인디언 부족마저도 서부로 쫒아냈다. 인디언들과 체결한 조약은 번번이 폐기되었고, 인디언은 사람이 살기 부적합한 서부의 황량한 건조지대로 내몰렸다. 흑인은 노예로 부려먹지만 인디언은 반항을 해 쓸모가 없다고 하며 아예 제거하려 했던 잔인한 사람들이다. 일전에 서부의 인디언 보호 구역을 방문했을 때 도로 포장도 안 된 진흙길로 연결된 부실한 집에서 비참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팠던 적이 있다.

   19세기 초반에 선출된 잭슨 대통령은 미국의 영웅으로 숭앙받는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서부 변방에서 나온 서민 출신의 대통령이다. 그는 인디언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토벌 전투를 지휘해 얻은 명성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인디언 토벌 전투에 참여한 장군들은 죽은 인디언만이 착한 인디언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맨해튼 남단의 인디언 박물관을 방문하면 인디언의 슬픈 자취 바로 옆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보인다. 역사는 승리자의 편이며 패배자에게는 참으로 냉혹하다. 인디언을 생각하면 미국이 부르짖는 인권이나 정의라는 것에 대한 공허함이 밀려온다.

 

 

2013. 11. 4. 16:59


(1-4) 뉴욕 시청 앞 공원. 맨해튼 시내에는 조그만 공원들이 곳곳에 있다. 고층  빌딩 사이에 있는 이 공원을 우연히 지나면서 도심 공원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뉴욕 거리를 걷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대체 뉴욕의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기에 세계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까? 어떤 사람들이 뉴욕에 오고 뉴욕에 와서 무엇을 하는지 해부해 보자.

뉴욕 사람 중 가장 많은 수는 이민자와 그 가족들이다. 그들이 뉴욕으로 이민 오는 이유는 물론 아메리칸 드림을 좆아서, 열심히 일해 성공하기 위해서다. 일 세대 이민자 대부분은 낮은 임금을 받는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 중 일부는 미국 대학을 나와 사무직이나 전문직에서 일한다.

뉴욕의 이민자들은 민족에 따라 일 세대 이민자들이 주로 일하는 업종이 다르다. 중국인은 음식점에서 많이 일하며, 필리핀 여성은 병원에서 많이 일하고, 파키스탄에서 온 사람은 거리의 신문 판매대나 슈퍼마켓 점원으로 일하고, 동유럽 이민자는 택시 운전수나 아파트 수위를 많이 한다. 중남미인은 가정부나 아이 돌보는 일, 호텔의 청소, 접시 닦이, 조경 관리, 공사장 인부 등 하급 서비스 직업에 많이 종사한다. 한인은 세탁소, 식품점, 손톱 미용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하던 사람도 미국에 와서는 세탁소나 식품점에서 일한다. 일 세대 한인이 뉴욕에서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 중에서 그래도 고급 직종은 아마 델리일 것이다. ‘델리란 샐러드 종류의 다양한 요리를 해놓고 뷔페 형식으로 파는 음식점인데, 근래 많이 보인다.

뉴욕에 사는 이민자들은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온다. 뉴욕은 이민자의 수도 많거니와 종류의 다양성에서도 다른 어느 도시와도 비교가 안 된다. 미국에 이민자가 많은 도시는 많지만 대부분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 한정된다. 반면 뉴욕에서는 거의 모든 인종과 민족을 고루 볼 수 있다. ‘인종 전시장이라는 용어가 대변하듯 뉴욕은 정말 특이한 곳이다.

뉴욕 거리를 채우는 두 번째 부류는 관광객이다. 200847백만 명의 관광객이 뉴욕을 방문했다. 이중 미국 국내에서 온 사람이 8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뉴욕시는 관광 수입으로 매년 300억 달러, 우리 돈으로는 345천억 원을 벌어들인다. 2001년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관광 산업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불과 이 년 후 다시 이전 수준으로 회복해 이후 관광객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뉴욕의 관광객은 특정 시즌 없이 일 년 내내 붐빈다. 여름휴가 때와 연말연시에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기는 하지만 봄과 가을에도 뉴욕의 거리는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뉴욕은 영국의 런던, 프랑스의 파리, 이탈리아의 로마를 모두 한 곳에 합쳐 놓은 매력을 발산한다. 맨해튼에는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이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셀 수 없이 많다. 엄청난 돈과 인력, 재능이 투입된 것들이 한 곳에 몰려있어 어리둥절하다. 뉴욕에 오면 마치 시골사람이 서울에 온 것과 같은 어지러움과 활력을 동시에 느낀다.

뉴욕은 세계 유행의 중심지로, 곳곳에서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다. 거리를 돌아다니고 매장을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정보를 소화하기 벅차다. 엄청난 정보와 상징의 폭탄 세례를 받는 것 같다. 뉴욕에서는 어느 곳에선가 항시 축제 또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과 전시회는 다 돌아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다. 뉴욕의 매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양성이다. 사람의 다양성, 음식의 다양성, 점포의 다양성, 장소의 다양성, 분위기의 다양성, 이벤트의 다양성 등 모든 면에서 뉴욕은 다른 어느 대도시보다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다양함 그자체가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과 산물들이 한 곳에 모이는 장터 같다.

뉴욕에는 말로만 듣고 텔레비전에서 보기만 했던 유명한 것들이 너무 많다. 뉴욕의 미디어가 미국과 세계인의 눈과 관심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곳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소비하는 미디어가 이곳을 동경하게 만든 것이다. 안방 TV와 영화관에서 보던 곳을 직접 가서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이곳에 올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사람도 뉴욕에 오면 촌사람이 된다. 초강대국 미국에서도 가장 큰 도시인 뉴욕을 구경하러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 사람이 서울에 와보고 싶어 하고, 영연방 사람이 런던에 와보고 싶어 하고, 프랑스 식민지 국가의 사람이 파리에 와보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뉴욕에서 흔히 만나는 세 번째 부류는 무언가를 배우고 새로운 커리어의 기회를 포착하려고 온 젊은 연령의 단기 체류자다. 뉴욕에는 학교와 사설 학원이 아주 많다. 대학교만 해도 수십 개가 있으며 패션에서 연극, 요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가르치는 학원이 많다. 외국인이 많이 모인 곳이므로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도 수를 셀 수 없다. 학생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연수를 하기 위해 뉴욕을 찾는 사람도 많다. 예컨대 뉴욕은 큰 병원이 많고 의료 서비스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연수를 받는 의사와 수련생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뉴욕에 있는 기업의 입장에서도 연수생을 공짜에 가까운 임금으로 쓸 수 있으므로 이들의 채용을 선호한다. 미국 대학생들에게도 뉴욕의 인턴 자리는 꿈의 기회다. 비록 정규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뉴욕에서 지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건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과 유사한 부류로 아무런 안정된 일거리도 갖지 못하고 무작정 뉴욕에 머무는 사람도 흔히 만난다. 학교나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기업에서 연수생으로 일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최저 임금의 임시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뉴욕에서 머무를 기회를 모색한다. 소위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인데, 뉴욕에 최저 임금을 주는 임시직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마냥 시간을 끌며 엉거주춤 지내고 있다. 뉴욕에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가지고 온 돈을 모두 소비하고 한 주 한 달을 연명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지칠 때까지 버티다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들을 만나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젊다는 것이 자산이기는 하지만 처음에 벅차올랐던 희망이 시간이 지나 점차 가물가물해지고, 사람이 지쳐가는 것을 보면 씁쓸하다.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힘을 내서 시작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뉴욕 거리에서 만나는 네 번째 부류는 뉴욕을 방문한 비즈니스맨이다. 뉴욕은 비즈니스의 중심이므로 비즈니스맨들은 이곳에 출장 올 기회가 많다.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 혹은 뉴욕 곳곳에서 항시 열리는 상업 전시회나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뉴욕의 그 많은 호텔이 항상 꽉꽉 차는 이유는 관광객도 있지만 이들 비즈니스맨 때문이다.

요컨대 새로운 꿈을 좆아서, 일자리를 찾아서, 관광을 하려고, 비즈니스를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뉴욕을 찾는다. 전 세계로부터 사람과 돈이 모이면서 곳곳에서 낡은 건물을 수리하거나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길거리 곳곳을 파헤치며 도로 공사를 하고, 부동산 값이 치솟는다. ‘프랜즈섹스 앤드 더 시티와 같은 TV 드라마에서 뉴욕의 생활이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가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 여기에는 관광객이 절반 이상의 자리를 채운다. 뉴욕의 유명세는 사람을 끌고 이것은 다시 더 많은 사람과 기능을 끌어들이는 집적 효과와 상승 효과를 낸다. 뉴욕은 할 일과 배울 것, 먹고 놀 것이 많고도 다양해 많은 사람이 찾아오며, 이는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 오고 싶게 만든다.

 

2013. 1. 5. 20:09

  지난 여름에 출간된 책 "뉴욕사람들" (한울출판사, 2012)의 원고를 나누어서 실는다. 출판사와 계약할 때 온라인 판권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출판사의 허락없이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계약위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온라인 책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이곳에 실는 원고의 모습은 출판된 책 처럼 아름답지는 않으므로 같은 원고이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상업적으로 돈을 벌려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므로 관심있는 독자에게 읽을 기회를 주는 것이 판권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머리말과 목차이다. 


<머리말>


처음 외국 여행을 떠나면 사람들은 유명한 관광지를 돌기 바쁘다. 그런 단계가 지나면 이제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문화를 음미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여행 스타일은 익숙하지 않은 곳에 홀로 떠돌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과 같이 엄청난 자연의 장관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렇지만 사람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양식은 아기자기하고, 어디에 가든 내가 사는 방식과 흡사하면서도 다른 면을 발견한다. 다른 문화를 접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자각도 높아지기 마련인데, 뉴욕은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특이한 곳이기에 더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 책은 뉴욕을 모델로 미국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관찰한 글이다. 뉴욕 맨해튼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들을 묘사하고, 뉴욕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그들은 어떤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이야기한다. 덧붙여 그들이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이 문화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뉴욕에서 필자와 유사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 책은 관광 안내서는 아니다. 어디에 어떻게 가고, 무엇을 먹고 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안내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 책에서는 뉴욕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우리의 삶의 방식을 비교하고 뉴욕의 관광지뿐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뉴욕, 그리고 미국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까지를 도모한다. 필자가 학교에서 연구하고 강의한 미국학 관련 지식이 곳곳에 깔려있기는 하지만 현학적 논의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이 책을 여가 시간에 재미있게 읽는 가운데 미국인과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좋겠다.

오랜 과정을 거쳐 책이 만들어졌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2010년 교육부의 교육역량강화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교육 테마를 발굴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학습개발원의 성경준 원장님께 감사한다. 연구 과정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의 김지환, 박주연, 한상민이 자료 조사를 도와주었으며, 뉴욕 현지에서는 박지영, 조남목이 도움을 주었다. 필자는 과거에 뉴욕에 살았지만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여러 번 뉴욕을 방문했다. 맨해튼 섬을 동서남북으로 걸어서 답사한 것만도 여러 번이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원고를 다듬어 출판하기까지 긴 길을 가야 했다. 한울의 신희진씨는 필자의 어색한 문구를 모두 고쳐주었다. 이 책의 출판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연구비 지원을 받았음을 밝힌다


<목차>

 

머리말

 

1. 뉴욕의 화려한 부활

1. 우리가 뉴욕이라고 부르는 곳

2. 세계인이 방문하고 싶은 도시 1, 뉴욕

3. 뉴욕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뉴욕시는 네덜란드 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 뉴욕 문화 상징의 메카

1. 타임즈 스퀘어, 세계의 교차로

그랜드 캐년과는 또 다른 이유로 타임즈 스퀘어를 찾는다

2. 뉴욕의 대표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_전 세계 보물들의 총 집합소 구겐하임 미술관과 현대미술 미술관_현대미술의 색채와 서양인의 공공 관념

3. 관광지 순례

자유의 여신상_자유의 여신상이 표현하는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앨리스 아일랜드와 인디언 박물관_유럽 이민자의 꿈과 인디언의 슬픈 자취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_디즈니랜드에도 급행 티켓이 있다지만 록펠러 플라자_신이 낸 기업인, 록펠러 브루클린 다리_다리 위로 코끼리 행렬이 지나간 이유 유니온 스퀘어_광장에서 해바라기하는 사람들과 파머스 마켓

4. 뉴욕의 교회

세인트 패트릭 성당_억압당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꿈 세인트 존 더 디바인 성당_백년이 넘어서도 미완성인 교회 리버사이드 교회_화석화된 백인 교회 대 살아 있는 흑인 교회 그랜트 장군의 묘_미국 '시민 종교(Civic Religion)'의 지부

 

 3. 로어 맨해튼

1. 그라운드 제로, 911 세계무역센터의 폐허

그라운드 제로와 오바마 대통령

2. 월 스트리트와 유엔 본부

월 스트리트_화려한 만큼이나 위험한, 위험을 사고파는 곳유엔 본부_맨해튼 구석에서 괄시받는 서자

3. 이스트 빌리지, 오리지널 이민자 동네

이스트 빌리지에서 다양성의 매력을 발견하다

 

 4. 뉴욕의 터줏대감

1. 리틀 이탈리, 리틀 이탈리에는 이탈리아 인이 살지 않는다?

콜럼버스 데이 퍼레이드 참관기

2. 유태인의 딜레마, 성공했기에 사라지는 민족

내가 만난 유태인

3. 차이나타운, ‘황색 위협(Yellow Peril)’-인종 차별의 소산

군침 도는 먹거리 천지, 맨해튼 차이나타운 답사기

 

 5. 보보스 문화의 매력

1. 그리니치 빌리지, 맨해튼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동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보낸 한여름

2. 첼시와 미트패킹, 뉴욕 경제와 함께 부활한 새로운 매력의 발산지

옛 것을 재활용해 성공한 세 가지 사례

3. 센트럴 파크, 도심 한가운데 구현한 완벽한 인공 자연

생활 속의 자연, 센트럴 파크의 진가를 맛보다

 

6. 뉴욕의 상류층 대 소시민

1. 어퍼 이스트사이드, 소위 부자이며 유명한사람들의 동네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사는 부자들의 삶을 엿보다

2. 미드타운 이스트와 어퍼 웨스트사이드, 뉴욕 소시민의 생활

어퍼 웨스트사이 대 어퍼 이스트사이드

맨해튼 보통 사람들의 생활

3. 엘리트 대학 대 서민 대학

컬럼비아 대학교_전 세계 엘리트들의 치열한 경연장, 아이비리그 명문 사립대 뉴욕대_맨해튼 도심 속 낭만적인 대학 생활 뉴욕시립대_오고 싶어 하는 모든 학생들을 받아주는 대학 뉴스쿨_진보적이고 실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대학

 

7. 흑인 문화의 고향

1. 할렘, 흑인 사회 문화의 중심지

할렘을 대표하는 두 흑인 운동가의 대조적인 생애

할렘을 걷다

2. 흑인 교회, 정신적 구원과 실질적 뒷받침이 함께 하는 곳

아비시니안 침례교회 방문기

3. 배드포드-스타이브샌트, 흑인만의 세상

할렘보다 진짜 흑인 문화가 숨 쉬는 곳, 배드스타이

  

8. 뉴욕의 마이너리티

1. 코리아타운, 한국 이민자들의 풍경

2. 이스트 할렘, 푸에르토리코인의 근거지

이스트 할렘 사람들의 사는 모습

3. 인도 사람들, 백인인가 아시아인인가?

4. 퀸즈, 세계 모든 나라 이민자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

퀸즈로 가는 전철 풍경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