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369)
미국 사정 (22)
세계의 창 (25)
잡동사니 (26)
과일나무 (285)
배나무 (10)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미국 사정'에 해당되는 글 22건
2015. 8. 8. 22:09

(5-1-4) 그리니치 빌리지의 뒷골목으로 난 정원건물 사이로 출구가 열린 정원이다정원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니 도심 한 가운데인데도 조용하고 아늑하다.


   몇 년 전 뉴욕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 한여름을 보낸 일이 있다. 워싱턴 스퀘어 공원 앞 도서관에서 큰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정말 아름답다. 가까운 건물의 계단 형으로 올라가는 옥상도 멋있고 워싱턴 기념 아치를 통해 보이는 5번가도 무척 아름답다. 여름에는 오래된 건물 사이로 워싱턴 스퀘어 공원과 5번가가 나무 가지로 울창하게 드리워져 있어 유럽의 옛날 도시를 보는 느낌이다.

   뉴욕 대학 도서관의 실내는 천장이 높고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마호가니 책상이 반들반들 빛나고 책상마다 놓여 있는, 놋쇠로 만든 갓을 씌운 등이 환하게 빛을 발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등록금이 비싼 귀족 사립 학교는 과연 다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아침 일찍 이곳에 와서 한적한 도서관의 분위기를 즐기고, 워싱턴 스퀘어 공원을 내려다보면서 하루를 계획하곤 했다. 자리를 잡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무거운 트레일러 가방을 끌면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고시생과 마찬가지로 책상 위에 한 무더기의 책을 쌓아 놓고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한다. 7월 말의 어느 날 도서관에 오니 이들이 완전히 사라져 있어서 웬일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무렵 변호사 자격시험이 있다고 한다. 뉴욕 대학 도서관에서 보낸 여름은 내 일생에서 가장 호사한 시간이다.

   내 기억 속에서 뉴욕 대학과 워싱턴 스퀘어 공원은 분리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피곤하면 바로 앞에 있는 공원에 나와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며 쉬곤 했다. 점심때는 집에서 싸가지고 온 샌드위치를 먹거나, 주변의 피자집에서 피자를 사와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분수 옆 벤치에 앉아 먹고 햇볕을 쬐며 시간을 보냈다. 피곤한 날에는 도서관에서 일찍 나와 그리니치 빌리지의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금요일 오후면 도서관이 텅 비고, 대신 워싱턴 스퀘어 공원이 사람들로 북적대기 시작한다. 점심시간부터 벌써 무료 공연이 이어지고 주위에 사는 학생들과 주민이 공원에 나와 주말의 해방감을 만끽한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 어린 아이를 유모차에 밀며 나온 사람, 예쁘게 차려입고 데이트 하는 남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은퇴하고 여유 있는 삶을 즐기는 듯 보이는 노부부, 배낭을 둘러맨 젊은 여행자, 연신 사진기를 들이대며 호기심을 번득이는 관광객,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청소년, 분수 속을 좋아라 뛰어 다니는 어린이와 강아지. 이들 속에 섞여 있으면 왠지 내 가슴도 들떴다. 지금은 멀리 가버린 젊음을 다시 맛보는 것 같았다.

   날씨가 좋은 오후에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 앉아 있으면 심심하지 않다. 관광객도 많이 오지만, 그보다는 주변에 사는 시민이나 대학생들이 와서 시간을 보낸다. 가운데 분수를 둘러싸고 있는 계단과 벤치에 앉아 사람들은 책을 보고,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남녀가 손을 잡고 앉아 포옹을 하고, 햇빛을 즐기며 넓은 하늘을 바라본다. 분수 광장 옆에는 거리 공연이 벌어진다. 젊은 흑인 팀이 정말 열심히 춤을 추고 구경꾼들은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른다. 몇 년 후에 다시 와 보았는데도 같은 얼굴의 흑인이 공연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에게 이곳의 거리 공연은 직장이다. 광장 한편에는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이 있고 양쪽 벤치에 노인들이 앉아 있고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끌고 온 엄마나 아이 보는 아주머니 들이 잡담을 나누고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한다. 그 너머에는 돌로 된 탁자를 가운데 놓고 노인들이 체스를 두고 있다. 그 중에는 내기 체스를 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체스 말을 정렬해 놓은 채 우두커니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여름철에는 주말마다 분수 광장 한편에서 연주회가 열린다. 뉴욕시와 기업의 협찬으로 이루어지는 클래식 음악 연주회다. 공짜로 수준 높은 연주를 듣는다는 즐거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 상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다. 점심시간부터 공연 준비를 하느라 무대를 가설하고 의자를 정렬하고 통행을 막으면서 여유로운 공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때때로 뉴욕 대학 음악전공 학생들 몇몇이 평일 점심시간에 간단히 하는 연주가 더 흥미롭다. 그들의 연주를 가까이 다가가 듣는 사람도 있지만, 멀리 벤치에 앉아 흘러오는 음악을 들으며 점심을 먹을 때는 정말 꿈 같은 시간이다.

   그리니치 빌리지에는 옛날 도시의 모습이 살아 있다. 구불구불한 길과 기억하기 힘든 독특한 이름을 가진 가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중에 게이 스트리트라는 이름도 보인다. 4번가와 12번가가 교차하기도 하고, 특이한 이름의 도로가 한두 블록 이어지다가 중간에 다른 이름으로 바뀌기 일쑤다. 주변으로 고층 건물이 올려다 보이지만 이곳에서만은 4~5층 높이의 오래된 건물이 주를 이룬다.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목조 건물과 밖으로 철제 계단이 돌출된, 벽돌로 지은 아파트가 가로에 잇닿아 있다. 폭이 5미터도 안 되며 한 층에 방 하나만 있는 삼사 층의 주택도 눈에 띈다. 일전에 이곳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한 건물에 한 가구가 사는데, 이 층에는 부엌 겸 거실이 있고 삼 층과 사 층에 조그만 침실이 각각 하나씩 있다. 집안에 난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사는 것도 나름 괜찮단다. 물론 장애가 있는 경우라면 이런 집에서 살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건물 사이에 난 좁은 골목으로 출구를 빠끔히 내밀고 있는, 조그만 정원을 가진 오래된 집도 보인다. 정원에 들어가 보니 도심 한 가운데인데도 조용하고 아늑하다. 대로변에는 상점이 줄지어 있지만 뒤편의 좁은 거리에는 드라마에나 나옴 직한 고풍스러운 주택이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좁은 거리는 바닥에 작은 벽돌이 깔려 있어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길거리에는 오래된 가로수가 줄지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며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맨해튼의 중심가가 바로 옆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동네 전체가 조용하다. 오래된 유럽의 구시가를 거니는 느낌이다.

   이렇게 오래된 동네에 누가 살까 궁금해 하는데, 사오십 대의 지적으로 보이는 훤칠한 남자가 캐주얼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온다. 산보를 가려나보다. 편한 옷이지만 점잖게 입은 할머니도 간혹 눈에 띈다. 식료품을 산 쇼핑백을 손에 들고 있다. 미국 교외의 전형적인 주택가와는 달리 어린 아이나 청소년이 돌아다니는 것은 보기 힘들다. 함께 다니는 남녀를 많이 보지만 자녀가 없는 부부이거나 동거하는 연인 사이로 보인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거리에서 보는 사람의 절반은 관광객으로 보이는데, 젊거나 중년 관광객이 많은 반면 어린 아이를 동반한 가족 관광객은 거의 없다. 또 다른 부류는 주변에 직장이 있거나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데 이들의 차림새와 태도에서 보보스의 분위기를 읽는다. 어느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으며 자신의 머리로 먹고사는 자유분방한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그들은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비교적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이다.

   그리니치 빌리지 곳곳에 테이블을 밖에 내놓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다. 그곳에서는 세련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며 한가한 여유를 즐긴다. 대로변에는 보헤미안 풍의 가게가 눈에 띈다. 펑크 스타일의 옷과 장신구를 파는 상점, 패션 드레스를 파는 부티크, 색다른 문양과 색채의 물건을 전시한 인테리어점, 독특한 그림을 걸어 놓은 화랑이 있다. 사실 이곳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물건을 왕창 사서 집안으로 나르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종이봉투나 쇼핑백에 들어갈 정도의 식료품을 사서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자동차 트렁크 한가득 식료품을 사서 실어 나르는 미국 중류층의 전형적인 소비문화와는 퍽이나 다른 분위기다. 차고가 없는 집이 대부분이고, 거리에는 녹음이 우거져 있으며 한가하게 거리를 산보하는 사람이 눈에 띈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동성애자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동성애 커밍아웃 운동이 시작된 곳이 아닌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 그렇듯 동성애자의 폭동이 일어났던 스톤월 인은 생각보다 훨씬 조그만 가게였다. 지금도 영업을 한다는데 사람의 인적을 별로 찾을 수 없다. 현관 위에 걸린 무지개 문양의 깃발이 이곳이 동성애와 관련된 곳임을 말해줄 뿐이다. 그 맞은편 크리스토퍼 공원에 있는 동성애 기념 동상 주변에서도 동성애자를 볼 수 없다. 이곳 모퉁이의 게이 스트리트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동성애자는 이곳을 떠난 것이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퇴근길에는 철망으로 둘러쳐진 거리 농구를 가끔씩 구경했다. 그곳 근처로 걸어가면 사람들의 함성이 들리고, 철망 너머 빠르게 움직이는 선수들의 격렬한 몸  놀림과 욕설이 나를 흥분시킨다. 그곳에서 움직이는 흑인 청년들을 보노라  면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 연상된다. 울퉁불퉁한 근육질, 민첩한 몸놀림, 신속한 대시와 무지막지한 충돌, 엄청난 점프력. 이들의 건장한 육체를 보면서 한편으로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 가슴이 아팠다. 흑인이 동물로 취급되던 노예제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는 두뇌를 가진 인간이기보다 소나 말처럼 힘을 쓰는 동물로서 소유되고 착취되었다. 노예제 시절 유산 목록에는 가축이나 가구와 함께 노예의 이름이 기록되어 후손에게 상속되었다. 노예제는 흑인을 지능이 낮고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존재로 보는 고정관념을 미국 문화 속에 고착시켰다. 영화나 광고에서 흑인은 동물처럼 원초적인 욕정과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백인이 흑인보다 키가 크고 육체적으로 더 건장하다. 미국에 오래 살면서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일 뿐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흑인은 육체적인 존재라고 느낀다. 문화적인 고정관념이 이성적 판단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리니치 빌리지에는 예술가들이 살지 않는다. 이곳을 걷다 보면 문화계의 유명 인사를 만난다고 하는데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이곳은 중류층이 사는 교외나 부자들이 모여 사는 부촌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곳곳에서 자유로움과 다양성의 멋이 풍겨나기 때문이다. 순수한 보헤미안 주의와는 거리가 멀겠지만 , 판에 박힌 따분함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개성을 풍기며 다양성을 맛볼 수 있다. 일전에 어느 대도시의 교외에서 한동안 머문 적이 있는데 질식할 것 같은 단조로운 환경이 권태 그 자체였다. 기껏해야 인근 공원에서 바람을 쐬거나 도서관에서 비디오를 빌려 보거나 주말에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다였는데, 조금만 지나면 이 생활에 진력이 난다. TV를 즐겨 보는 것도 아니고 잔디를 기르는 데 취미도 없는 내게 교외의 생활은 인생 낭비다. 아무리 편리하고 풍요롭다고 해도 지적인 자극과 문화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는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곳에 모여 있을 것이다. 집값이 무척 비싸다고 하니 아무나 살기는 어렵겠지만, 한적함이 묻어나면서 도시의 다양성과 문화생활이 바로 곁에 있는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 4. 3. 05:21

할렘을 대표하는 두 흑인 운동가의 대조적인 생애


  

(7-1-3) 두보이스, 1918흑인과 백인의 혼혈로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귀인상이다흑인 최초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며 흑인 운동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7-1-4) 마커스 가비, 1924짙은 고동색 피부두터운 입술뭉툭한 코투박한 복장전혀 세련되지 않은 모습이나 그의 연설에 흑인들이 열광했다그는 흑인의 응어리진 가슴을 풀어줄 희망을 전하는 전도사였다.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는 흑인의 문예 부흥이 중심이지만 흑인의 지위를 높이는 사회 운동에서도 큰 자취를 남겼다. 그 당시 할렘을 중심으로 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한 두 흑인 운동가, 두보이스(W.E.B. Du Bois)와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의 활동은 이후 흑인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이며 그들의 운동 방식 또한 그들의 성격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이들의 생애와 흑인 운동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보면 자못 흥미롭다.

두보이스는 1868년 보스턴에 엘리트 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쪽 가계는 노예제 시절 매우 예외적이었던 자유 흑인이다. 조상이 미국의 독립 전쟁에 참가해 자유를 획득했다. 그의 아버지 쪽 가계는 프랑스인과 흑인의 혼혈로 아이티에서 대지주였다. 두보이스는 지식인 부모 밑에서 어릴 때부터 고급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다. 한때 대학 교수를 했으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백인 사회의 위선과 불의를 고발하고 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한 일에 매진했다. 그는 글뿐만 아니라 흑인 중류층을 중심으로 1909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를 만들었다. 수십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심리학 등 사회 과학 전반에 걸쳐 그가 논의하지 않은 주제가 없을  만큼 지적인 활동 범위가 넓었다. 그는 흑인의 시민권 획득과 자결, 자조를 강조했는데 대체로 자유, 평등, 인권 등 유럽의 가치에 입각해 흑인의 지위 향상을 도모한 지식인이다. 그의 글과 활동은 이후 흑인 운동의 주류를 형성해 1950년대 민권 운동으로 연결되었으며, 그가 만든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는 흑인 사회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말년에 공산주의를 찬양하다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해외에 출국한 뒤 입국이 거절되어 196193세의 나이로 아프리카 가나에서 사망했다.

   마커스 가비는 지식인 두보이스와 달리 선동가이고 풍운아다. 그는 1887년 카리브 해에 있는 자메이카의 소도시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많이 읽었으며 인쇄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했다. 중남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인쇄공으로 일했고, 한때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대학 강의를 듣기도 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흑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신문사에서 일했으며,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유명한 연설자의 코너라고 이름 붙여진 연단에서 수시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후 자메이카로 돌아와서는 세계 흑인 향상 협회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백인의 억압 때문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흑인이 아프리카에 있는 흑인과 단결해 하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의 발상이 엉뚱하지 않은가?

   그는 미국에 건너가 전국을 돌면서 흑인에게 연설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조직의 미국 지부를 만들어 미국 흑인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사회 운동을 추진했다. 할렘을 근거로 흑인을 위한 신문을 발간했으며, 흑인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산업을 건설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미국의 흑인을 아프리카 서안에 위치한 라이베리아라에 단체로 이주하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의 흑인이 아프리카로 모두 건너가서 자신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웅대한 계획을 실현에 옮기기 위해 참가자를 모집하고 그곳에 단체로 건너갈 선박을 구입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가 역설한, 아프리카로 단체 이주하는 계획에 실제 동조한 흑인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조직에 400만 명이나 가입했으며 그가 연설하는 곳마다 흑인으로 넘쳐흐를 정도로 호응은 대단했다. 그는 천부적인 연설가였다. 마커스 가비가 불러일으킨 흑인 사회의 열광은 엄청났으므로 미국 정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FBI는 그를 감시하고 사소한 구실로 그들 잡아들였다. 미국 정부는 그의 계획이 사기라고 발표하고 3년간 수감한 후 자메이카로 강제 추방했다. 미국에서 추방된 후 그는 자메이카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의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다 1940년 영국 런던에서 사망했다.

   마커스 가비가 미국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다. 감옥에 갇힌 기간을 제외하면 불과 7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자취 는 이후 오래 지속되었다. 1960년대 말콤 엑스가 주도한 흑인 분리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며,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주장으로 대표되는 흑인 문화의 고유한 가치를 찾는 흑인 정체성 운동과, 흑인 민족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로 이어진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마커스 가비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가나의 국기는 마커스 가비가 조직한 세계 흑인 향상 협회의 깃발 문양을 빌려왔으며, 그가 제안한 아프리카인의 단결은 아프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frica)’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말콤 엑스가 흑인의 주체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그의 부모가 마커스 가비가 조직한 세계 흑인 향상 협회의 회원으로 열렬히 활동하던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놀랍다. 말콤 엑스는 할렘에서 활동하면서 분명히 마커스 가비의 숨결을 느꼈을 것이다.

   마커스 가비는 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실제적인 정책을 제안한 것은 아니다. 그가 제시한, 전 세계 흑인이 단결해 하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목표나 미국의 흑인이 아프리카로 돌아가 그들만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계획은 실현되기 어려운 꿈이다. 반면 두보이스는 흑인 엘리트로서 백인 사회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함께 흑인 지위 향상을 위해 실제적인 활동을 많이 했다. 흑인들은 누구를 더 기억할까? 물론 실제 미친 영향력으로 보면 두보이스가 훨씬 크지만, 흑인에게 꿈을 가져다 준 사람으로 마커스 가비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  지 않다. 마커스 가비의 부름에 흑인들은 열렬히 응답했다. 그가 활동하던 때에 할렘의 흑인들 사이에서 불러일으킨 열광은 물론이고 현재도 흑인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컨대 힙합의 노랫말 가사에서 마커스 가비의 이름을 만난다. 마커스 가비는 실행자이기보다는 종교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전설적인 선지자로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유사한 시기 할렘에서 활동한 이 두 인권 운동가는 외모에서부터 활동 성향까지 뚜렷이 대조적이다. 두보이스는 유럽인의 윤곽과 짙은 갈색 피부에 지적 풍미를 풍기는 세련된 엘리트의 모습이다. 반면 마커스 가비는 짙은 고동색의 피부에 아프리카 흑인의 두터운 입술과 뭉툭한 코를 지닌, 세련과는 거리가 먼 비서구적인 모습이다. 마커스 가비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열적인 연설가이기는 했지만 논리 정연한 주장을 폈던 것 같지는 않다. 두보이스의 글은 지금도 대학에서 광범위하게 읽히고 있으나 마커스 가비의 연설은 글로 출판된 것이 없다.

   마커스 가비는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가 만든 조직은 두보이스가 만든 조직에 비해 이상은 높지만 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실제 한 일은 별로 없다. FBI가 그를 조사해 사기죄로 감옥에 집어넣었을 때, 그가 한 약속에 비해 실제 진척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사기를 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상적인 약속을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약속을 믿고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가 사기를 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두보이스는 백인을 능가하는 지력을 이용해 백인에게나 흑인에게나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했다. 반면 마커스 가비는 흑인의 응어리진 가슴을 풀어줄 희망을 전하는 전도사였다. 마커스 가비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엄청난 수의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흑인의 감정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백인 식민주의와 백인 우월주의가 지배하던 세상에서 억눌리고,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당한 흑인에게 흑인도 고유한 가치를 가진 존귀한 존재이고 아프리카의 뿌리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  을 가져다주었다. 흑인에게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게 해준 것이다.

   후세 사람은 그들의 삶의 방식만큼이나 다르게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두보이스는 흑인 연구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한 학자로서, 하버드 대학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있다. 그 연구소에는 그의 지적 활동과 관련된 유물이 보존돼 있다. 반면 마커스 가비의 자취는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할렘의 공원이 전부다. 그가 활동했던 할렘의 사무소나 집은 헐린 지 오래이며, 그의 유물은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는 흑인 민중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2014. 6. 29. 15:55

앨리스 아일랜드와 인디언 박물관

_유럽 이민자의 꿈과 인디언의 슬픈 자취

(2-3-2a, 2-3-2b) 엘리스 아일랜드 입국 심사장의 과거와 현재. 1904년에 찍은 이 사진 속의 입국 심사장은 가축 출하장을 연상시킨다. 미국의 백인 3분의 1의 선조가 이곳을 통해서 들어왔다. 텅 빈 입국 심사장 홀에 서면 백 년 전 이곳에서 웅성대던 탄식과 환성이 환청처럼 들릴 것 같다.


   엘리스 아일랜드는 자유의 여신상과 한 짝이다. 엘리스 아일랜드는 자유의 여신상 옆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 1892년에서 1954년까지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입국 심사를 받던 곳이다. 1924년 이민법이 개정되어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이 실질적으로 중단되기 이전까지 이곳은 유럽 특히 남유럽과 동유럽으로부터 오는 이민자로 붐볐다. 1,200만 명의 이민자들이 이곳을 통과했다. 현재 미국 시민의 3분의 1은 그들의 선조가 이곳을 통과해서 미국에 입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는 미국에 들어오는 이민에 제한이 없어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미국에 갈 수 있었던 시절이다. 미국에 먼저 건너 온 사람들은 친척이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민을 권유했다. 한마을 사람 전부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경우도 있고, 일가친척이 순차적으로 모두 이민을 가기도 했다. 이민자는 독특한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친숙한 곳을 버리고 낯선 곳을 선택한 사람이다. 이민자는 자신의 모국에서 극도로 가난하지도 또 부자도 아닌 중간층의 사람이다. 자신이 사는 사회에서 중상류층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거나 반대로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은 미국으로 떠날 심리적인 용기 또는 물질적 수단이 없다. 이민자들은 출신 국가는 서로 달랐지만 상대적으로 젊고 모험심이 강한 동질적인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엘리스 아일랜드를 거쳐 미국으로 온 사람들은 희망과 불안이 교차한 상태였다. 오랜 항해 끝에 이곳 입국 심사장에서 심사를 받고 이 섬을 떠났다. 이 섬에서 평균 두세 시간 정도 체류했는데, 그 시간은 그들에게 일생 잊을 수 없는 긴장과 초조의 시간이었다. 입국자의 2%는 입국이 거부되었다. 이들은 같은 건물에 있는 임시 수용소에 일시적으로 수용되거나 바로 출국 조치되었다. 질병이 가장 큰 사유였으며 범죄 경력자나 불온한 사상을 지닌 사람도 거부되었다. 현재 엘리스 아일랜드의 입국 심사장 건물을 찾으면 입국 심사가 이루어졌던 텅 빈 큰 홀이 가운데 있고 주위로 입국자의 소지품을 전시한 공간이 있다. 백 년 전의 일이지만 이곳에서 입국을 거절당한 사람의 절망을 떠올린다.

   필자에게도 기억에 남는 입국 심사 경험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인지 뉴욕인지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을 때였다. 국제공항의 입국 심사장에서 별도의 방으로 따로 불려가 한참을 기다리다가 심문을 받았다. 꿀릴 것이 없어서 그리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사무실 한편에 아마도 입국을 거부당한 것으로 짐작되는 일군의 사람들이 경찰의 감시 하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미국에 가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지만 일이십 년 전만 해도 광화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면접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 초조와 긴장이 흘렀던 것을 기억한다. 거의 반나절 동안 대사관 담벼락을 따라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비자 면접관의 고압적인 질문 몇 마디에 조마조마했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힐끗 쳐다보고 서류를 보면서 몇 마디를 툭툭 던지는 것에 굴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 당시 비자 발급을 거부당하는 일은 아주 흔했다. 미혼 여자라고 거부당하고, 나이가 많다고 거부당하고, 직업이 분명치 않다고 거부당하고, 미국 방문 사유가 불분명하다고 거부당하고,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거부당하고……. 지금도 미국 공항에서 입국 심사관 앞에 서면 문득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국의 병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2-3-3) 맨해튼 남단 배터리파크에 있는 인디언 박물관 전경. 조각상 속의 인디언은 그리스 여신의 뒤에 숨어 있다. 건물의 대부분이 텅 비어 있는 이상한 박물관이었다. 인디언은 나에게 역사의 실체가 무엇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맨해튼의 남단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페리가 출발하는 바로 옆에 인디안 박물관이 있다.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분관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세관 건물로 쓰였다. 웅장한 석조의 조각상과 대리석 외관에 비해 전시물은 신통치 않아 특이한 분위기를 풍긴다. 한쪽에는 인디언의 역사와 유물을 전시해 놓고 다른 쪽에는 인디안 출신 예술가의 현대 작품을 전시하는데 건물 크기에 비해 실제 전시에 사용하는 공간은 크지 않다. 많은 공간은 그냥 텅 비어 있어 막막한 느낌이 든다. 뉴욕에서 인디언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밀려오는 곳의 바로 옆에 인디안 박물관을 세운 것은 아이러니이다. 인디언은 바로 이들 유럽 이민자들 때문에 멸망했기 때문이다. 병균을 가져왔고, 그들의 땅을 탐내서 그들을 죽이고 몰아냈다. 미국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 인디언은 왜 서부에서만 사는지 궁금했다. 백인이 만든 서부의 신화에 속아 넘어가서 인디언은 원래부터 서부의 야생에서만 사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인즉 인디언은 북미 대륙 전체에 걸쳐서 살았다. 특히 동부와 남부에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비옥한 곳, 즉 현재 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주로 살았다. 그러나 유럽인이 동부에 정착하면서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던 인디언은 죽거나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쫓겨났다. 현재 미국의 동부에서는 인디언을 볼 수 없다. 백인들은 침략자의 종교인 기독교와 서구인의 관습을 받아들인 인디언 부족마저도 서부로 쫒아냈다. 인디언들과 체결한 조약은 번번이 폐기되었고, 인디언은 사람이 살기 부적합한 서부의 황량한 건조지대로 내몰렸다. 흑인은 노예로 부려먹지만 인디언은 반항을 해 쓸모가 없다고 하며 아예 제거하려 했던 잔인한 사람들이다. 일전에 서부의 인디언 보호 구역을 방문했을 때 도로 포장도 안 된 진흙길로 연결된 부실한 집에서 비참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팠던 적이 있다.

   19세기 초반에 선출된 잭슨 대통령은 미국의 영웅으로 숭앙받는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서부 변방에서 나온 서민 출신의 대통령이다. 그는 인디언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토벌 전투를 지휘해 얻은 명성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인디언 토벌 전투에 참여한 장군들은 죽은 인디언만이 착한 인디언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맨해튼 남단의 인디언 박물관을 방문하면 인디언의 슬픈 자취 바로 옆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보인다. 역사는 승리자의 편이며 패배자에게는 참으로 냉혹하다. 인디언을 생각하면 미국이 부르짖는 인권이나 정의라는 것에 대한 공허함이 밀려온다.

 

 

2013. 11. 4. 16:59


(1-4) 뉴욕 시청 앞 공원. 맨해튼 시내에는 조그만 공원들이 곳곳에 있다. 고층  빌딩 사이에 있는 이 공원을 우연히 지나면서 도심 공원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뉴욕 거리를 걷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대체 뉴욕의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기에 세계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까? 어떤 사람들이 뉴욕에 오고 뉴욕에 와서 무엇을 하는지 해부해 보자.

뉴욕 사람 중 가장 많은 수는 이민자와 그 가족들이다. 그들이 뉴욕으로 이민 오는 이유는 물론 아메리칸 드림을 좆아서, 열심히 일해 성공하기 위해서다. 일 세대 이민자 대부분은 낮은 임금을 받는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 중 일부는 미국 대학을 나와 사무직이나 전문직에서 일한다.

뉴욕의 이민자들은 민족에 따라 일 세대 이민자들이 주로 일하는 업종이 다르다. 중국인은 음식점에서 많이 일하며, 필리핀 여성은 병원에서 많이 일하고, 파키스탄에서 온 사람은 거리의 신문 판매대나 슈퍼마켓 점원으로 일하고, 동유럽 이민자는 택시 운전수나 아파트 수위를 많이 한다. 중남미인은 가정부나 아이 돌보는 일, 호텔의 청소, 접시 닦이, 조경 관리, 공사장 인부 등 하급 서비스 직업에 많이 종사한다. 한인은 세탁소, 식품점, 손톱 미용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하던 사람도 미국에 와서는 세탁소나 식품점에서 일한다. 일 세대 한인이 뉴욕에서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 중에서 그래도 고급 직종은 아마 델리일 것이다. ‘델리란 샐러드 종류의 다양한 요리를 해놓고 뷔페 형식으로 파는 음식점인데, 근래 많이 보인다.

뉴욕에 사는 이민자들은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온다. 뉴욕은 이민자의 수도 많거니와 종류의 다양성에서도 다른 어느 도시와도 비교가 안 된다. 미국에 이민자가 많은 도시는 많지만 대부분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 한정된다. 반면 뉴욕에서는 거의 모든 인종과 민족을 고루 볼 수 있다. ‘인종 전시장이라는 용어가 대변하듯 뉴욕은 정말 특이한 곳이다.

뉴욕 거리를 채우는 두 번째 부류는 관광객이다. 200847백만 명의 관광객이 뉴욕을 방문했다. 이중 미국 국내에서 온 사람이 8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뉴욕시는 관광 수입으로 매년 300억 달러, 우리 돈으로는 345천억 원을 벌어들인다. 2001년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관광 산업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불과 이 년 후 다시 이전 수준으로 회복해 이후 관광객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뉴욕의 관광객은 특정 시즌 없이 일 년 내내 붐빈다. 여름휴가 때와 연말연시에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기는 하지만 봄과 가을에도 뉴욕의 거리는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뉴욕은 영국의 런던, 프랑스의 파리, 이탈리아의 로마를 모두 한 곳에 합쳐 놓은 매력을 발산한다. 맨해튼에는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이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셀 수 없이 많다. 엄청난 돈과 인력, 재능이 투입된 것들이 한 곳에 몰려있어 어리둥절하다. 뉴욕에 오면 마치 시골사람이 서울에 온 것과 같은 어지러움과 활력을 동시에 느낀다.

뉴욕은 세계 유행의 중심지로, 곳곳에서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다. 거리를 돌아다니고 매장을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정보를 소화하기 벅차다. 엄청난 정보와 상징의 폭탄 세례를 받는 것 같다. 뉴욕에서는 어느 곳에선가 항시 축제 또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과 전시회는 다 돌아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다. 뉴욕의 매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양성이다. 사람의 다양성, 음식의 다양성, 점포의 다양성, 장소의 다양성, 분위기의 다양성, 이벤트의 다양성 등 모든 면에서 뉴욕은 다른 어느 대도시보다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다양함 그자체가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과 산물들이 한 곳에 모이는 장터 같다.

뉴욕에는 말로만 듣고 텔레비전에서 보기만 했던 유명한 것들이 너무 많다. 뉴욕의 미디어가 미국과 세계인의 눈과 관심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곳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소비하는 미디어가 이곳을 동경하게 만든 것이다. 안방 TV와 영화관에서 보던 곳을 직접 가서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이곳에 올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사람도 뉴욕에 오면 촌사람이 된다. 초강대국 미국에서도 가장 큰 도시인 뉴욕을 구경하러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 사람이 서울에 와보고 싶어 하고, 영연방 사람이 런던에 와보고 싶어 하고, 프랑스 식민지 국가의 사람이 파리에 와보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뉴욕에서 흔히 만나는 세 번째 부류는 무언가를 배우고 새로운 커리어의 기회를 포착하려고 온 젊은 연령의 단기 체류자다. 뉴욕에는 학교와 사설 학원이 아주 많다. 대학교만 해도 수십 개가 있으며 패션에서 연극, 요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가르치는 학원이 많다. 외국인이 많이 모인 곳이므로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도 수를 셀 수 없다. 학생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연수를 하기 위해 뉴욕을 찾는 사람도 많다. 예컨대 뉴욕은 큰 병원이 많고 의료 서비스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연수를 받는 의사와 수련생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뉴욕에 있는 기업의 입장에서도 연수생을 공짜에 가까운 임금으로 쓸 수 있으므로 이들의 채용을 선호한다. 미국 대학생들에게도 뉴욕의 인턴 자리는 꿈의 기회다. 비록 정규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뉴욕에서 지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건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과 유사한 부류로 아무런 안정된 일거리도 갖지 못하고 무작정 뉴욕에 머무는 사람도 흔히 만난다. 학교나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기업에서 연수생으로 일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최저 임금의 임시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뉴욕에서 머무를 기회를 모색한다. 소위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인데, 뉴욕에 최저 임금을 주는 임시직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마냥 시간을 끌며 엉거주춤 지내고 있다. 뉴욕에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가지고 온 돈을 모두 소비하고 한 주 한 달을 연명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지칠 때까지 버티다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들을 만나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젊다는 것이 자산이기는 하지만 처음에 벅차올랐던 희망이 시간이 지나 점차 가물가물해지고, 사람이 지쳐가는 것을 보면 씁쓸하다.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힘을 내서 시작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뉴욕 거리에서 만나는 네 번째 부류는 뉴욕을 방문한 비즈니스맨이다. 뉴욕은 비즈니스의 중심이므로 비즈니스맨들은 이곳에 출장 올 기회가 많다.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 혹은 뉴욕 곳곳에서 항시 열리는 상업 전시회나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뉴욕의 그 많은 호텔이 항상 꽉꽉 차는 이유는 관광객도 있지만 이들 비즈니스맨 때문이다.

요컨대 새로운 꿈을 좆아서, 일자리를 찾아서, 관광을 하려고, 비즈니스를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뉴욕을 찾는다. 전 세계로부터 사람과 돈이 모이면서 곳곳에서 낡은 건물을 수리하거나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길거리 곳곳을 파헤치며 도로 공사를 하고, 부동산 값이 치솟는다. ‘프랜즈섹스 앤드 더 시티와 같은 TV 드라마에서 뉴욕의 생활이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가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 여기에는 관광객이 절반 이상의 자리를 채운다. 뉴욕의 유명세는 사람을 끌고 이것은 다시 더 많은 사람과 기능을 끌어들이는 집적 효과와 상승 효과를 낸다. 뉴욕은 할 일과 배울 것, 먹고 놀 것이 많고도 다양해 많은 사람이 찾아오며, 이는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을 이곳에 오고 싶게 만든다.

 

2013. 1. 5. 20:09

  지난 여름에 출간된 책 "뉴욕사람들" (한울출판사, 2012)의 원고를 나누어서 실는다. 출판사와 계약할 때 온라인 판권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출판사의 허락없이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계약위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온라인 책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이곳에 실는 원고의 모습은 출판된 책 처럼 아름답지는 않으므로 같은 원고이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상업적으로 돈을 벌려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므로 관심있는 독자에게 읽을 기회를 주는 것이 판권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머리말과 목차이다. 


<머리말>


처음 외국 여행을 떠나면 사람들은 유명한 관광지를 돌기 바쁘다. 그런 단계가 지나면 이제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문화를 음미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여행 스타일은 익숙하지 않은 곳에 홀로 떠돌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과 같이 엄청난 자연의 장관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렇지만 사람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양식은 아기자기하고, 어디에 가든 내가 사는 방식과 흡사하면서도 다른 면을 발견한다. 다른 문화를 접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자각도 높아지기 마련인데, 뉴욕은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특이한 곳이기에 더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 책은 뉴욕을 모델로 미국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관찰한 글이다. 뉴욕 맨해튼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들을 묘사하고, 뉴욕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그들은 어떤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이야기한다. 덧붙여 그들이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이 문화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뉴욕에서 필자와 유사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 책은 관광 안내서는 아니다. 어디에 어떻게 가고, 무엇을 먹고 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안내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 책에서는 뉴욕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우리의 삶의 방식을 비교하고 뉴욕의 관광지뿐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뉴욕, 그리고 미국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까지를 도모한다. 필자가 학교에서 연구하고 강의한 미국학 관련 지식이 곳곳에 깔려있기는 하지만 현학적 논의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이 책을 여가 시간에 재미있게 읽는 가운데 미국인과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좋겠다.

오랜 과정을 거쳐 책이 만들어졌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2010년 교육부의 교육역량강화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교육 테마를 발굴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학습개발원의 성경준 원장님께 감사한다. 연구 과정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의 김지환, 박주연, 한상민이 자료 조사를 도와주었으며, 뉴욕 현지에서는 박지영, 조남목이 도움을 주었다. 필자는 과거에 뉴욕에 살았지만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여러 번 뉴욕을 방문했다. 맨해튼 섬을 동서남북으로 걸어서 답사한 것만도 여러 번이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원고를 다듬어 출판하기까지 긴 길을 가야 했다. 한울의 신희진씨는 필자의 어색한 문구를 모두 고쳐주었다. 이 책의 출판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연구비 지원을 받았음을 밝힌다


<목차>

 

머리말

 

1. 뉴욕의 화려한 부활

1. 우리가 뉴욕이라고 부르는 곳

2. 세계인이 방문하고 싶은 도시 1, 뉴욕

3. 뉴욕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뉴욕시는 네덜란드 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 뉴욕 문화 상징의 메카

1. 타임즈 스퀘어, 세계의 교차로

그랜드 캐년과는 또 다른 이유로 타임즈 스퀘어를 찾는다

2. 뉴욕의 대표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_전 세계 보물들의 총 집합소 구겐하임 미술관과 현대미술 미술관_현대미술의 색채와 서양인의 공공 관념

3. 관광지 순례

자유의 여신상_자유의 여신상이 표현하는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앨리스 아일랜드와 인디언 박물관_유럽 이민자의 꿈과 인디언의 슬픈 자취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_디즈니랜드에도 급행 티켓이 있다지만 록펠러 플라자_신이 낸 기업인, 록펠러 브루클린 다리_다리 위로 코끼리 행렬이 지나간 이유 유니온 스퀘어_광장에서 해바라기하는 사람들과 파머스 마켓

4. 뉴욕의 교회

세인트 패트릭 성당_억압당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꿈 세인트 존 더 디바인 성당_백년이 넘어서도 미완성인 교회 리버사이드 교회_화석화된 백인 교회 대 살아 있는 흑인 교회 그랜트 장군의 묘_미국 '시민 종교(Civic Religion)'의 지부

 

 3. 로어 맨해튼

1. 그라운드 제로, 911 세계무역센터의 폐허

그라운드 제로와 오바마 대통령

2. 월 스트리트와 유엔 본부

월 스트리트_화려한 만큼이나 위험한, 위험을 사고파는 곳유엔 본부_맨해튼 구석에서 괄시받는 서자

3. 이스트 빌리지, 오리지널 이민자 동네

이스트 빌리지에서 다양성의 매력을 발견하다

 

 4. 뉴욕의 터줏대감

1. 리틀 이탈리, 리틀 이탈리에는 이탈리아 인이 살지 않는다?

콜럼버스 데이 퍼레이드 참관기

2. 유태인의 딜레마, 성공했기에 사라지는 민족

내가 만난 유태인

3. 차이나타운, ‘황색 위협(Yellow Peril)’-인종 차별의 소산

군침 도는 먹거리 천지, 맨해튼 차이나타운 답사기

 

 5. 보보스 문화의 매력

1. 그리니치 빌리지, 맨해튼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동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보낸 한여름

2. 첼시와 미트패킹, 뉴욕 경제와 함께 부활한 새로운 매력의 발산지

옛 것을 재활용해 성공한 세 가지 사례

3. 센트럴 파크, 도심 한가운데 구현한 완벽한 인공 자연

생활 속의 자연, 센트럴 파크의 진가를 맛보다

 

6. 뉴욕의 상류층 대 소시민

1. 어퍼 이스트사이드, 소위 부자이며 유명한사람들의 동네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사는 부자들의 삶을 엿보다

2. 미드타운 이스트와 어퍼 웨스트사이드, 뉴욕 소시민의 생활

어퍼 웨스트사이 대 어퍼 이스트사이드

맨해튼 보통 사람들의 생활

3. 엘리트 대학 대 서민 대학

컬럼비아 대학교_전 세계 엘리트들의 치열한 경연장, 아이비리그 명문 사립대 뉴욕대_맨해튼 도심 속 낭만적인 대학 생활 뉴욕시립대_오고 싶어 하는 모든 학생들을 받아주는 대학 뉴스쿨_진보적이고 실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대학

 

7. 흑인 문화의 고향

1. 할렘, 흑인 사회 문화의 중심지

할렘을 대표하는 두 흑인 운동가의 대조적인 생애

할렘을 걷다

2. 흑인 교회, 정신적 구원과 실질적 뒷받침이 함께 하는 곳

아비시니안 침례교회 방문기

3. 배드포드-스타이브샌트, 흑인만의 세상

할렘보다 진짜 흑인 문화가 숨 쉬는 곳, 배드스타이

  

8. 뉴욕의 마이너리티

1. 코리아타운, 한국 이민자들의 풍경

2. 이스트 할렘, 푸에르토리코인의 근거지

이스트 할렘 사람들의 사는 모습

3. 인도 사람들, 백인인가 아시아인인가?

4. 퀸즈, 세계 모든 나라 이민자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

퀸즈로 가는 전철 풍경

 

 

2012. 10. 14. 12:15

   미국 사회에서 지난 30년간 소득 불평등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 근로자의 실질 임금은 정체하거나 하락하는 반면, 최상위 1%의 소득은 크게 증가하였다. 대기업 CEO의 연봉은 평균적인 근로자 임금의 수백 배에 달한다. 전 세계로부터 “아메리칸 드림”을 쫒아 미국으로 많은 이민자들이 모여 들었지만, 근래에는 미국이 유럽보다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http://www.nytimes.com/2012/10/14/opinion/sunday/the-self-destruction-of-the-1-percent.html?hp&_r=0

 The Self-Destruction of the 1 Percent

By CHRYSTIA FREELAND




   미국은 폐쇄적인 사회로 치닫고 있다. 저소득층의 자식이 상층으로 이동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상류층은 자식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기가 과거보다 수월하다. 부자는 중류층보다 세금을 적게 낸다. 기업의 인수 합병을 통해 경제력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다. 이들은 엄청난 정치자금을 무기로 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 공화당 후보인 미트 롬니나 뉴욕 시장인 블룸버그의 예에서 보듯이 거부들이 자신의 돈으로 대중의 여론을 조작하여 권력을 획득하려 한다. 미국의 선거는 어느 후보가 더 많은 돈을 모았는가에 좌우된다. 선거가 다가오면 엄청난 광고비를 써서 TV에 상대를 비방하고 자신을 칭찬하는 광고전을 벌인다. 이러한 광고에서 제시하는 정보는 거짓말과 과장의 범벅으로 시청자의 냉정한 판단을 흐려 놓는다. 여론을 주도하는 미디어 자체가 영리를 추구하는 대기업으로 돈 있는 사람의 편이므로,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해서보다는 대기업과 부자를 위한 나팔수 역할을 한다.

   대기업은 공정한 경쟁을 두려워한다. 시장에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약자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은 물론, 대기업들 서로 간에 결탁하여 경쟁을 제한하려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경쟁자가 출현하는 것을 막으려고 시장의 규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어 놓는다.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게끔 교묘하게 처리한다. 세금으로 충당하는 엄청난 공적자금은 이들에게 돌아가며, 정부의 다양한 보조금의 수혜자 역시 이들이다. 

  부자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만 특별한 교육을 시켜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게 한다. 아래 계층과 접촉하거나 그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경쟁하는 상황을 피한다. 미국 부자들이 자식을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과 한국의 부자들이 자식을 외국인 학교에 보내는 것은 동일한 맥락이다. 부자의 자식들은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거나, 부당 내부거래를 통해 땅집고 헤엄치는 장사를 하거나, 해외 브랜드의 독점 수입을 통해 쉬운 돈벌이를 택한다. 그들은 공정한 경쟁이 무엇인지 체험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경쟁이 제한되고, 계층 이동이 차단되고, 부가 집중되고, 불평등이 높아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에 적대 관계가 깊어지고, 갈등이 높아지고, 폭력충돌이 빈발할 것이다. 범죄가 높아지고, 안전을 확보하는 데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열심히 살려는 동기를 상실하고, 인재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공급되지 않고, 생산성이 떨어지고, 결국 그 사회는 몰락한다. 첨부한 기사에서 과거에 베네치아가 그러한 길을 걸었다고 지적한다.

   미국 사회의 불평등 수준이 매우 높음에도 그럭저럭 버텨온 것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 이념이 강한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사람들은 더이상 미국을 매력적인 이민지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경향이 계속된다면 미국에 인재가 모여들지 않을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승자독식의 게임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한다고 하여도, 그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면 다른 사회로 옮겨갈 것이다. 미국 밖으로부터 인재가 모여들지 않는다면 세계의 창의를 주도하는 미국의 지위 또한 무너질 것이다. 미래의 스티브 잡스나 버락 오바마는 미국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2012. 8. 26. 22:41

  오늘 감동적인 글을 읽었다. 아틀랜틱 몬슬리 9월호에 나온 “Fear of a Black President"라는 제목의 글이다. 미국에서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흑인의 분노와, 흑인에 대한 백인의 공포는 동전의 양면이다. 노예제에 뿌리를 둔 흑인에 대한 백인의 비인간적인 차별은 미국 사회의 곳곳에서 여전히 감지된다. 흑인은 근본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종주의는 많은 백인의 머릿속에 또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흑인들은 좌절과 분노로 자신을 파괴하는 한편, 범죄로서 주류의 질서에 저항한다. 백인은 흑인을 두려워하며 가급적 멀리하려 한다.


Atlantic_FearofBlackPresident.hwp



  이런 인종주의 사회에서 2008년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인데다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서 다른 선택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인 아들 부시의 오랜 실정과 경제 위기가 공화당의 계속된 집권을 어렵게 했으며, 민주당의 예비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역시 여성인데다 전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점이 사람들을 머뭇거리게 했다. 인종주의 사회에서 소수 인종인 흑인이 다수의 지지를 얻어 지도자로 선출된 것은 정말 닥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 사회는 초유의 사태에 한동안 어리둥절하였다. 흑인을 자신의 지도자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많은 미국인들은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거나 혹은 이슬람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그를 부정하려고 하였다. 공화당은 오바마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 반대로 일관하여 그의 정부가 실패로 끝나기를 바랐다.

  흑인은 백인에 대해 가슴속 깊이 분노를 품고 산다. 오바마는 흑인이다. 오바마는 이러한 분노를 어떻게 삭혔을까? 오바마는 영민한 사람이다. 백인에 대한 흑인의 분노의 감정을 절대 밖으로 표출해서는 안된다는 것, 존재 자체를 백인 주류사회에 눈치 채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안다. 흑인의 분노의 감정이 담긴 것으로 해석되게 오해되는 발언이나 행동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엄청난 비난과 반발이 퍼부어질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다른 어느 대통령보다 인종에 대한 언급을 가장 적게 한 대통령이다. 백인이라면 특별히 인종적인 함의가 있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을 발언도 흑인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오바마는 대통령이기에 앞서 흑인이다. 백인에게 오바마의 발언과 행동은 흑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의심받기 쉽다.  그러한 의심은 여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그러한 발언을 한 취지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오바마는 이러한 오해가 발생할 소지가 있을 때에는 자존심을 굽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전에 하바드 대학교의 흑인 교수가 자신의 집 앞에서 백인 경찰에게 가택 침입죄로 체포되었다. 열쇠를 집에 놓고 나와 문을 억지로 따려고 씨름하고 있을 때 지나치던 경관이 다가왔다. 그가 자신의 교수 신분증을 보이고 이곳에 오래 산 사람임을 거듭 말했으나 경찰이 이를 무시하고 그들 연행하여 경찰서에서 하루 밤을 재우고 풀어준 것이다. 그가 백인이었다면 아마도 경찰이 그의 학교나 이웃에 확인하여 웃고 지나갔을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러한 경찰의 행동이 지나친 치안 행위라고 언급했다. 정부의 책임자로서 그의 발언은 지극히 온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백인 경관은 기자들을 향하여 자신은 조금도 잘 못한 것이 없다고 발언하여 사실상 오바마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오바마 대통령은 그 경관이 자신의 말을 오해했다고 굽히고 들어갔고, 백악관에 경찰과 교수를 초청하여 맥주잔을 건네면서 화해를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당시 의료보험 개혁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상황에서 여론이 인종 문제로 들끓어 올랐을 때 기꺼이 자신을 굽힘으로서 논란이 사그라들기를 바랐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책에서 인종주의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받고 좌절과 분노의 나날을 보냈던가를 솔직히 썼다. 대통령이 된 지금도 흑인으로서의 쓰라린 기억을 가끔씩 노출한다. 예컨대 최근에 플로리다에서 후드티를 입은 트레이본 마틴이란 순진한 청년이 경관의 추격을 받아 총 맞아 죽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손에는 스키틀이라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탕과 아이스티만 들려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만일 아들이 있었다면 그도 트레이본처럼 보였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흑인으로서 쓰라린 감정의 정곡을 찌르는 발언아닌가?

  오바마 대통령은 백인의 인종주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미국의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우회 전략을 취한다. 미국의 어려운 사람 중에 흑인이 상대적으로 더 많으므로 이는 결국 흑인에게 혜택이 더 돌아간다. 이러한 인종 중립적인 정책을 추진함으로서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흑인을 특별히 우대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그가 추진한 의료개혁의 주요 내용인, 모든 미국인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은 의료보험을 누리고 있는 중류층 백인보다는 지금까지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가난한 흑인들에게 더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정책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고 하는 데에는 인종주의적 의도도 바탕에 깔려있다. 

  흑인은 근본적으로 열악하다는 인종주의를 깨는 효과적인 전략은 그렇지 않은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음으로서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증인이 될 수 있다. 그가 미국사회의 인종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음에도 그의 존재 자체가 인종주의를 무너뜨리는 증거로 작용하고 있음을 잘 알기에 그는 누구보다 인종주의적 갈등이 촉발되어 일을 망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인종주의적 백인 또한 이를 잘 알기에, 그의 발언이나 행동이나 그의 정책에서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가 실패한 대통령이 되면 오랫 옛날 노예제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종주의가 옮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백인 인종주의자들은 흑인은 선천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지도자가 될 수없으며, 설사 잘못되어 지도자로 선출되었더라도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음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인종 문제에 직접 간여하면 그들의 계책에 말려들어 일이 잘 못될 가능성이 높다.  바로 그것을 오바마 대통령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과거에 오바마 대통령의 자서전 “Dreams from my father"을 읽을 때의 감동이 몰려왔다. 오바마는 지혜로우며 용감한 사람이다. 진실로 위대한 사람을 찾기 힘든 오늘날 그는 나에게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으로 새삼 우러러 보인다. 역사도 그를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2012. 8. 23. 11:21

미국 대통령 선거는 우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모든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다. 아직 몇 달 더 남아 있어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의 공화당은 미국의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어 합리적인 논리보다는 감정으로 미국인의 정체성에 호소하는 부분이 있으며, 공화당과 미국의 기득권층과의 결합은 매우 공고하기에 선거때 큰 힘을 발휘한다. 돌발 사태가 발생할 때 미국인의 감정에 호소하고 기득권층의 여론조작과 돈의 힘이 작용하여 짧은 시일내에 쏠림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이라 찜찜해 하는 미국인이 많이 있기에 오바마 대통령의 권력 기반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훨씬 취약하다. 2000년과 2004년에 부시 대통령이 당선과 재선될 때 외부인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가 그렇게 지지를 획득하리라 예상하기 어려우나 그의 스타일과 지지 배경은 미국인에게 상당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그 반작용으로 흑인인 바락 오바마가 2008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부시에게 주었던 비합리적인 애정과 그가 망쳐 놓은 경제 때문에 다수의 미국인은 정말 하기 힘든 선택을 했던 것이다.  


오늘 경향신문에 "미국 대선, 공화당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임원혁(KDI  국제대학원교수) 교수가 쓴 글이 경제적 측면에서 현재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기에 다음에 전문을 소개한다. 그러나 그가 '공화당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지적한 부분은 미국 정치에서 작용하는  '공화당의 괴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기에 약간은 한계가 있다.  


<미국 대선, 공화당의 한계>, 임원혁, 경향신문 2012년 8월 23일.


오는 11월6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를 공식 선출하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다음 주와 그 다음 주에 열린다. 주 단위로 실시되는 미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총 538명의 선거인단 중 270명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주별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대선 결과를 예측하는 웹사이트(www.electoral-vote.com)에 따르면, 8월21일 현재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는 284표, 공화당의 미트 롬니 후보는 241표, 무승부는 13표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실업률이 8%를 상회하여 사회적 불만이 쌓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자인 오바마 후보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롬니 후보의 개인적인 문제와 미국 공화당의 근본적인 한계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 전략을 구상할 당시 롬니 후보는 본인이 민간 CEO와 매사추세츠 주지사로서 올린 성과를 내세우면서, 경제·사회·외교 부문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저지른 실정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이와 같은 대선 전략에 따라 롬니 후보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4년이 넘고 대규모 부양책이 시행되었음에도 경기 회복이 지지부진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이 보편적 의료보험을 확립한다는 명분하에 의료보험 매입을 의무화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침해했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눈치를 보면서 저자세 외교를 구사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선 전략은 사실관계에 배치될 뿐 아니라 롬니 후보와 공화당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키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우선 롬니 후보가 내세웠던 민간 CEO 경험은 주로 기업 인수·매각에 관한 것으로, 향후 미국 경제를 재건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즉, 사모투자회사에는 좋을지 몰라도 국민경제에 과연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롬니 후보가 현재까지 공개한 납세신고 기록에 따르면, 2009년과 2010년 근로실적이 없는데도 소득이 4200만달러에 달하고, 스위스 은행계좌를 보유하고 있으며, 실효 세율이 13.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월가 점령 운동 등을 통해 금융계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불만이 분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롬니 후보의 CEO 경력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사실관계 차원에서 보더라도 글로벌 금융위기는 공화당 부시 행정부 당시의 잘못된 정책에 기인한 바 컸고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공화당은 재정 정책과 관련하여 딴죽을 걸었기 때문에 현재의 경기 부진을 오바마 행정부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맞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미 대법원에서 판결한 바와 같이 의료보험 매입 의무 조항은 세금과 마찬가지로 공공정책 차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롬니 후보는 매사추세츠 주지사로 재임할 당시 이와 유사한 보편적 의료보험 제도를 선구적으로 도입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더욱 할 말이 없다. 외교·안보분야를 봐도 오바마 행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에서 벗어나 외국의 입장을 존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사마 빈 라덴 사살까지 감행한 행정부를 허약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처럼 원래 구상한 대선전략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롬니 후보는 하원 예산위원장으로서 작은 정부를 주창하여 보수층의 총애를 받고 있는 폴 라이언 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지지층을 결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폴 라이언 의원이 제시한 감세와 재정지출 개혁안은 고소득층에게는 큰 혜택을 주지만 중산층과 서민에게는 상당한 타격을 주는 방향으로 되어 있어 그 세부 내용이 알려지면 일반 유권자의 반발을 초래할 것이다. 즉, 롬니 후보가 본인의 선명성을 입증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잠재적 자충수인 것이다. 이처럼 롬니 후보와 공화당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에 유로존 위기의 심화 등 돌발변수가 없는 한 2012년 미 대선은 오바마 후보의 승리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2012. 8. 18. 21:38

  운을 타고난 사람은 어떻게 해도 잘 된다고 했던가? 근래에 미국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새로운 종류의 천연가스가 엄청나게 많이 매장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쉐일 가스”(shale gas)라고 부르는 것으로 지하 수 킬로미터의 암반 사이에 고여 있는 천연 가스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매장량을 추정하는 것조차 어려웠고 이를 지상으로 끌어내는 기술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수년전에 ‘프래킹’(Fracking)이라는 새로운 채굴 기술이 미국에서 개발되면서 새로운 자원의 보고가 열리게 되었다. 프래킹이란 지하 수 킬로 미터를 수직으로 파이프를 박은 다시 수평으로 구멍을 뚫고 들어가 물의 압력을 이용해서 쉐일 가스를 품고 있는 바위를 부순뒤 가스를 뽑아내는 기술이다.


Economist_NaturalGas.hwp





현재 세계의 주에너지원은 화석 연료이다. 석탄과 석유가 주를 차지하며 핵 에너지가 다음을 차지한다. 천연 가스는 매장량이 많지 않고 취급하기 어렵기에 제한적으로만 사용된다. 쉐일 가스의 발견으로 천연 가스가 주요 에너지원으로 새로이 등장 할 수도 있다. 현재 사용되는 매장량이 많지 않고 호주, 인도네시아, 중동, 시베리아 혹은 북해 바다 밑 등에서 주로 생산되어 에너지를 소비하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다. 채굴 비용에 비하여 운송에 들어가는 비용이 훨씬 높으며 폭발의 위험도 높다. 새로운 종류의 천연가스인 쉐일 가스는 현재 알려진 매장량만 기존의 천연가스의 수십배에 달하며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나라에 많이 매장되어 있다. 미국과 중국에 특히 많이 매장되어 있는데 이 나라는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다.

석유에 주로 의존하는 미국은 이러한 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으로 흥분에 들떠있다. 현재 쉐일 가스를 채굴하고 있는 몬태나의 작은 마을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임시 숙소가 사방에 들어서며 생필품의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마치 과거에 금광붐이 불었을 때처럼 말이다. 미국에서도 아직은 쉐일 가스를 채굴하는 초기단계이지만, 조만간 이 가스가 많이 매장된 중서부나 서남부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가스를 채굴하면 주변 산업단지에서 이 가스를 많이 소비할 것이다.

가스는 석유와는 달리 운송비용이 매우 많이 든다. 그러나 쉐일 가스를 액체 상태로 하여 파이프를 통해 육상 운송할 경우 비용을 현저히 낮출 수 있다. 수년내 쉐일 가스의 채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 미국의 에너지 비용이 현재의 절반 이하로 낮아질 수 있다. 값싼 에너지를 이용하며 미국의 제조업이 다시 부흥할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일본 중국 다음으로 천연가스를 많이 수입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쉐일 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미국이 강대국이 된 것이 풍요로운 자연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천연자원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고 온화한 기후에 경작 가능한 토지가 매우 넓고 인구 밀도가 낮은 것이 미국인이 잘 살게 된 주원인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재화가 토지임을 생각한다면 미국의 강점은 명확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다른 어느 곳보다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로 이민을 가고 싶어 하며, 몽골의 끝없는 평원을 보고 흥분한다. 유럽계 이민자들은 북미 대륙에 건너와 원주민을 몰살하고 그곳을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축복을 내린 땅이고 자신을 하느님의 선택받은 자라고 굳게 믿었다. 아직까지는 그들의 믿음이 계속 실현되고 있는 듯하다. 미국인이 유럽인보다 특별히 신앙심이 강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라는 말은 부정의한 세계에 대해 사람들이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란 생각도 든다. 

미국을 관찰하다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헐벗은 나라임을 새삼 깨닫는다. 미국과 같이 끝 모르게 풍부한 자원을 캐내면서 흥청망청 살아가도록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적 자원'을 잘 개발하고 활용하고 있는가?  저출산 타령만 하면서 여성들을 하릴 없이 집에 묵히고, 사람들을 젊은 나이에 은퇴하도록 하고, 경쟁에서 탈락하면 매몰차게 저버리는 우리 사회는 아직 갈길이 멀다.   

 

2012. 8. 16. 11:51

  오바마 대통령은 여러 가지로 특이한 경력의 정치인이다. 인종주의가 만연한 미국에서 흑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기적적인 일이지만, 빈곤 운동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도 특이하다. 미국의 대통령은 대체로 중상류 출신으로 고상한 경력을 통해서 성장하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시카고의 빈곤지역에서 빈민을 상대로 빈곤퇴치를 위한 조직 활동을 하였다. 그는 현장 활동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껴 정치적인 힘을 키워서 빈곤 문제를 퇴치하겠다는 꿈을 품고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의 성장 배경을 볼 때,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겉보기에 온건하지만 그의 속내는 매우 진보적일 것이다.

 

NYtimes_ObamaVsPoverty.hwp




미국은 일인당 5만불을 넘는 고소득 국가이지만, 추악한 빈곤 문제를 안고 있다. 중위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극빈층이 전체 인구의 6.7%에 달하며, 특히 아동 빈곤 비율은 20%를 넘고 있다. 어린이 다섯 명 중 한명은 빈곤한 가정에서 생활한다. 미국 대도시의 도심에는 대낮에도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한 극빈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빈곤과 항시 함께 따라오는 범죄는 선진국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높은 수준이다.

 

문제는 이렇게 심각한 빈곤 현실이 근래로 오면서 미국 사회와 정치권에서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빈곤은 정치권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싶어 하지 않는 문제이다. 빈곤은 뿌리가 깊기 때문에 해결하기가 어려우며, 어설프게 접근해서는 빛도 나지 않고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쉽기에 정치인들은 빈곤문제에 피상적인 립서비스 수준으로만 접근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선거 유세 때 노점상에서 오뎅을 먹는 사진을 찍고는 그만인 식이다. 또한 중상류층의 정치적 관심은 높은 반면 빈곤층은 투표에 참가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관심은 빈곤층보다 중상류층의 삶에 더 집중된다.


빈곤은 대물림된다. 어떤 사람이 빈곤한 이유는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돈벌이 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질 수 없으며, 영양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저항력이 낮아 쉽게 병에 걸리며, 먹고살기 위해 아파도 무리를 하기 때문에 계속 참고 일을 하다보면 더 심각하게 병에 걸려 돈을 벌지 못하고 약값과 병원비로 지출만 늘게 된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못 받는 이유는 집안이 공부할 환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중류층 가정의 아이들과 경쟁에서 밀리고 학교와 사회에서 소외되어 좌절하면서 학업을 소홀히 하고 결국 일찍 중단한다. 가난한 가정은 부부간에 불화가 심하고 한부모 가족인 경우가 많으며, 부모도 하루하루 먹고 살기 어려우므로 자녀에게 규칙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치거나 공부를 봐주거나 학교를 잘 다니도록 뒷바라지할 여력이 없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학교와 사회에서도 소외된 아이들은 공부를 착실히 해야 할 동기가 생기기 어렵다.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자신의 충동적 감정을 조절하면서 미래의 성취를 위해 계획적으로 생활하고 현재의 어려움을 참아야 될 이유가 없다. 그 결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때그때 충동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직장에서 진득이 어려움을 이겨낼 능력이 없다. 엄청난 현실의 스트레스에 접해, 손쉬운 돈벌이나 범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술이나 도박에 의지해 당장의 어려움에서 도피하려고 하며, 불규칙한 생활로 인하여 질병에 고생하고, 배우자나 자녀에게 스트레스를 가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 있게 행동하지 않기에 항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허덕이며 일생을 살아가는 전체의 그림이 보이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사고를 훨씬 자주 당하며 단명한 삶을 산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인 유형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경우도 드물게는 있지만 대체로는 이러한 빈곤의 대물림 사이클을 반복한다. 오바마는 시카고의 빈민 지역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사회 운동가로서 이러한 수렁에 빠진 사람들을 단편적으로 돕는데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미래에 정치인이 되어 국가의 재정과 힘을 동원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삶 전체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빈곤 전략을 구사하겠다고 결심한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빈곤층에게 집중적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정책이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상류층은 자신의 돈이 빈곤층에게 돌아가는 데 반대하기에 빈곤 정책을 입법화하고 예산을 따는 것이 어렵다. 또한 정치인 오바마가 빈곤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재선을 목표로 하는 그에게 정치적으로 인기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1960년대의 빈곤과 전쟁을 선포한 존슨 대통령 이후 실질적으로 빈곤층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대통령이라고 한다. 겉으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 그가 빈곤 문제의 해결로 내세운 전략은 ‘교육’이다. 빈곤의 대물림을 끊는 고리로 교육 특히 어린 나이부터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전략이다. 가정환경의 차이가 아이들의 성취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린 시절에 가정환경의 불리함을 보완할 장치를 제공하는 것은 빈곤 퇴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략이어야 한다.

 

어린이의 빈곤 문제는 사회정의의 문제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나, 이로 인한 결과는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 중류층 부모의 교육열은 대단하다. 이것은 한편은 좋은 일이지만 이것의 뒷면은, 능력이 되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매우 어린나이부터 교육과정이 끝나는 20대까지 일관되게 심각하게 불리한 처지에서 게임을 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잔인한 사회이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매우 각박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긴장해서 살고 있다. 일단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하여도 경쟁에서 탈락하면 빈곤층과 흡사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있고, 그러면 자신은 물론 자식 세대에서 다시 올라서기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우리사회가 진실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려고 한다면 이러한 잔인함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잔인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내가 지금 잘 먹고 잘 살아도 위험이 상존하고 있기에 정말로 편안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될 수는 없다.    

prev"" #1 #2 #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