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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9. 15:55

앨리스 아일랜드와 인디언 박물관

_유럽 이민자의 꿈과 인디언의 슬픈 자취

(2-3-2a, 2-3-2b) 엘리스 아일랜드 입국 심사장의 과거와 현재. 1904년에 찍은 이 사진 속의 입국 심사장은 가축 출하장을 연상시킨다. 미국의 백인 3분의 1의 선조가 이곳을 통해서 들어왔다. 텅 빈 입국 심사장 홀에 서면 백 년 전 이곳에서 웅성대던 탄식과 환성이 환청처럼 들릴 것 같다.


   엘리스 아일랜드는 자유의 여신상과 한 짝이다. 엘리스 아일랜드는 자유의 여신상 옆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 1892년에서 1954년까지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입국 심사를 받던 곳이다. 1924년 이민법이 개정되어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이 실질적으로 중단되기 이전까지 이곳은 유럽 특히 남유럽과 동유럽으로부터 오는 이민자로 붐볐다. 1,200만 명의 이민자들이 이곳을 통과했다. 현재 미국 시민의 3분의 1은 그들의 선조가 이곳을 통과해서 미국에 입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는 미국에 들어오는 이민에 제한이 없어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미국에 갈 수 있었던 시절이다. 미국에 먼저 건너 온 사람들은 친척이나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민을 권유했다. 한마을 사람 전부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경우도 있고, 일가친척이 순차적으로 모두 이민을 가기도 했다. 이민자는 독특한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친숙한 곳을 버리고 낯선 곳을 선택한 사람이다. 이민자는 자신의 모국에서 극도로 가난하지도 또 부자도 아닌 중간층의 사람이다. 자신이 사는 사회에서 중상류층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거나 반대로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은 미국으로 떠날 심리적인 용기 또는 물질적 수단이 없다. 이민자들은 출신 국가는 서로 달랐지만 상대적으로 젊고 모험심이 강한 동질적인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엘리스 아일랜드를 거쳐 미국으로 온 사람들은 희망과 불안이 교차한 상태였다. 오랜 항해 끝에 이곳 입국 심사장에서 심사를 받고 이 섬을 떠났다. 이 섬에서 평균 두세 시간 정도 체류했는데, 그 시간은 그들에게 일생 잊을 수 없는 긴장과 초조의 시간이었다. 입국자의 2%는 입국이 거부되었다. 이들은 같은 건물에 있는 임시 수용소에 일시적으로 수용되거나 바로 출국 조치되었다. 질병이 가장 큰 사유였으며 범죄 경력자나 불온한 사상을 지닌 사람도 거부되었다. 현재 엘리스 아일랜드의 입국 심사장 건물을 찾으면 입국 심사가 이루어졌던 텅 빈 큰 홀이 가운데 있고 주위로 입국자의 소지품을 전시한 공간이 있다. 백 년 전의 일이지만 이곳에서 입국을 거절당한 사람의 절망을 떠올린다.

   필자에게도 기억에 남는 입국 심사 경험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인지 뉴욕인지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을 때였다. 국제공항의 입국 심사장에서 별도의 방으로 따로 불려가 한참을 기다리다가 심문을 받았다. 꿀릴 것이 없어서 그리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사무실 한편에 아마도 입국을 거부당한 것으로 짐작되는 일군의 사람들이 경찰의 감시 하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미국에 가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지만 일이십 년 전만 해도 광화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면접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 초조와 긴장이 흘렀던 것을 기억한다. 거의 반나절 동안 대사관 담벼락을 따라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비자 면접관의 고압적인 질문 몇 마디에 조마조마했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힐끗 쳐다보고 서류를 보면서 몇 마디를 툭툭 던지는 것에 굴욕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 당시 비자 발급을 거부당하는 일은 아주 흔했다. 미혼 여자라고 거부당하고, 나이가 많다고 거부당하고, 직업이 분명치 않다고 거부당하고, 미국 방문 사유가 불분명하다고 거부당하고, 뚜렷한 이유도 모른 채 거부당하고……. 지금도 미국 공항에서 입국 심사관 앞에 서면 문득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국의 병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2-3-3) 맨해튼 남단 배터리파크에 있는 인디언 박물관 전경. 조각상 속의 인디언은 그리스 여신의 뒤에 숨어 있다. 건물의 대부분이 텅 비어 있는 이상한 박물관이었다. 인디언은 나에게 역사의 실체가 무엇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맨해튼의 남단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페리가 출발하는 바로 옆에 인디안 박물관이 있다.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분관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세관 건물로 쓰였다. 웅장한 석조의 조각상과 대리석 외관에 비해 전시물은 신통치 않아 특이한 분위기를 풍긴다. 한쪽에는 인디언의 역사와 유물을 전시해 놓고 다른 쪽에는 인디안 출신 예술가의 현대 작품을 전시하는데 건물 크기에 비해 실제 전시에 사용하는 공간은 크지 않다. 많은 공간은 그냥 텅 비어 있어 막막한 느낌이 든다. 뉴욕에서 인디언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밀려오는 곳의 바로 옆에 인디안 박물관을 세운 것은 아이러니이다. 인디언은 바로 이들 유럽 이민자들 때문에 멸망했기 때문이다. 병균을 가져왔고, 그들의 땅을 탐내서 그들을 죽이고 몰아냈다. 미국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 인디언은 왜 서부에서만 사는지 궁금했다. 백인이 만든 서부의 신화에 속아 넘어가서 인디언은 원래부터 서부의 야생에서만 사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인즉 인디언은 북미 대륙 전체에 걸쳐서 살았다. 특히 동부와 남부에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비옥한 곳, 즉 현재 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주로 살았다. 그러나 유럽인이 동부에 정착하면서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던 인디언은 죽거나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쫓겨났다. 현재 미국의 동부에서는 인디언을 볼 수 없다. 백인들은 침략자의 종교인 기독교와 서구인의 관습을 받아들인 인디언 부족마저도 서부로 쫒아냈다. 인디언들과 체결한 조약은 번번이 폐기되었고, 인디언은 사람이 살기 부적합한 서부의 황량한 건조지대로 내몰렸다. 흑인은 노예로 부려먹지만 인디언은 반항을 해 쓸모가 없다고 하며 아예 제거하려 했던 잔인한 사람들이다. 일전에 서부의 인디언 보호 구역을 방문했을 때 도로 포장도 안 된 진흙길로 연결된 부실한 집에서 비참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팠던 적이 있다.

   19세기 초반에 선출된 잭슨 대통령은 미국의 영웅으로 숭앙받는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서부 변방에서 나온 서민 출신의 대통령이다. 그는 인디언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토벌 전투를 지휘해 얻은 명성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인디언 토벌 전투에 참여한 장군들은 죽은 인디언만이 착한 인디언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맨해튼 남단의 인디언 박물관을 방문하면 인디언의 슬픈 자취 바로 옆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보인다. 역사는 승리자의 편이며 패배자에게는 참으로 냉혹하다. 인디언을 생각하면 미국이 부르짖는 인권이나 정의라는 것에 대한 공허함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