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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주의'에 해당되는 글 3건
2023. 9. 8. 12:15

Avi Tuschman. 2019(2013). Our Political Nature: The Evolutionary Origins of What Divides US. Prometheus Books. 413 pages.

저자는 인류학 배경의 정치컨설턴트이며, 이 책은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의 배경에는 성격 특성이 있으며, 사람들의 성격 특성은 진화적 적응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보수적 혹은 진보적인 이유는 그의 성격과 연관되는데, 사람들 사이에 다양한 성격의 분포는 인류의 오랜 진화적 적응의 결과이다. 모든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루는 이유는, 이 두가지 상반된 성향이 함께 하여 인류의 진화적 적응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여러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 성향을 측정한 결과, 보수에서 진보까지의 연속선에서 정규분포의 모습을 그린다. 사람들의 정치 성향은 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부자 중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 중에는 자신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보수 정책을 지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소득과 재산의 분포는 하위로 심하게 편향된 분포이며, 이는 정치적 성향의 분포와 매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경제적 이익과 정치 성향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사람들의 정치 성향은 성격 특성을 반영한다. 성격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차원 중, 개방성(openess)과 성실성(conscienciousness) 의 두가지가 정치성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참고로 성격을 구성하는 나머지 세 차원은 외향성(extraversion), 상냥함(Agreeableness), 신경질적임(Neuroticism)이다. 성격이 개방적일수록 진보적 정치성향을 보이며, 성실할수록 보수적 정치성향을 보인다. 사람들의 성격 특성은 일생동안 크게 바뀌지 않으므로, 사람들의 정치 성향 역시 일생동안 크게 바뀌지 않는다. 한 사회의 정치 경제 상황에 따라 정치 성향의 분포가 전체적으로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약간 이동하기는 하지만, 외적 상황에 관계없이 사람들의 정치성향은 여전히 정규분포를 유지한다. 사람들의 성격 특성은 많은 부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 일란성 쌍둥이의 성격과 정치 성향은 서로 매우 흡사한 반면, 태어나서 떨어져 성장한 이란성 쌍둥이의 성격과 정치 성향은 서로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서, 성격 특성과 정치 성향은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는 세가지 차원이 있다. 부족주의(tribalism), 불평등을 허용하는 정도(tolerance of inequality), 인간 본성에 대한 인식(perceptions of human nature)이 그것이다. 이 각각의 차원은 생물학적인 진화적 적응(evolutionary fitness)과 연관되어 있다.

먼저 부족주의를 보자면, 이는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 종교성(religiosity), 성에 대한 개방성(sexuality)으로 구성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우선시하고 타 집단을 배격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퍼뜨리는데 유리하다. 친족선택이론 (kin selection)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자신과 유전적으로 연관된 사람을 중시할수록 자신의 유전자가 후세에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신의 집단 내에서만 폐쇄적으로 살아간다면,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짐으로, 어느 정도의 개방성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타집단과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는 태도가 유전자를 퍼뜨리는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모든 사회는 부족주의에 편향된 보수적 정치성향과 새로운 환경에 개방적인 진보적 정치성향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하지만, 호기심이 많고 약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선호한다. 어는 사회에서나 지나치게 보수적이지도 지나치게 진보적이지도 않은 중도 성향의 사람이 대다수인 반면, 극단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사람이 소수를 이루는 이유이다.

모든 사회는 사회 구성원, 특히 여성의 성생활을 엄격히 관리한다. 남성의 분방한 성생활에는 비교적 관대한 반면, 여성의 성행위는 엄격히 제한을 한다. 여성은 후손을 낳는 주체임으로 이들의 성생활을 엄격히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리는데 핵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모든 사회는 남성이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고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적인 위계를 형성하고 있다. 부족주의적이며 보수적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은 여성의 성을 엄격히 제한하고 가부장적 권위를 지지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활동은 가족의 생존에 큰  도움을 줌으로 여성의 활동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은 진화적 적응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여성의 자유를 허용하고 남성과 여성의 권위 격차를 줄이는 진보적 정치 성향 또한 진화적 적응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여성의 경제활동 기여도가 높아지고, 여성이 폐쇄적이며 권위적 가족관계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높아지면서 남녀간의 권력 격차는 줄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치성향은 전체적으로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람들이 각자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보상받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가난이나 성공의 책임은 구조적 환경의 탓인지, 가족 내에서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자식을 양육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부모가 자식을 자신과 대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좋은지,  등에 대해 보수와 진보는 의견이 서로 엇갈린다. 사회와 가족이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이렇게 서로 상반된 태도의 사람들이 모두 필요하다.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게 되면, 사회와 가족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다.

사람의 본성이 상호 협조적 (cooperative)인지 아니면 경쟁적(competitive)인지에 관해, 철학자에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 두가지 상반된 생각은 인간의 생존, 유전자의 확산에 필수적이다.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본성을 경쟁적으로 보고, 진보주의자는 협조적으로 본다. 인간의 본성을 맹목적으로 협조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으면 반칙을 저지르는 (cheating)사람에 의해 망하며,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으면 협동을 통한 시너지를 거두지 못함으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모든 사회에는 협조적이면서 경쟁적인 요소를 동시에 품고 있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중도적인 정치 지향의 사람이 다수를 차지한다.

저자는 사람들의 정치지향의 결정 요인을 성격 특성 및 진화적 적응에서 찾는 과정에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거의 모든 논의를 인용하고 있다. 그 결과 이 책은 모든 다양한 잡다한 지식이 뒤범벅되어 있다. 저자의 박학다식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논의를 좀더 체계화하고, 핵심적인 증거 위주로 설명을 집약했다면 더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2023. 4. 2. 22:11

Brian Hare and Vanessa Woods. 2020. Survival of the Friendliest: Understanding our orgins and rediscovering our common humanity. Oneworld Publications. 197 pages.

저자는 인류학자이며, 이 책은 동물의 진화과정에서 다정한 성격을 가진 개체가 번성한다는 독특한 주장을 한다. 진화론에 따르면 육체적으로 강하고 지능이 높은 유전자를 가진 개체가 그렇지 못한 개체와 경쟁에서 승리하여 번성한다는 주장이 지배했다. 반면 저자는 이웃에게 다정한(friendly) 개체는 어려운 과업을 함께 협력하여 타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개체보다 생존 경쟁에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동물을 길들이는 실험을 여러 세대에 걸쳐 시행한 결과, 다양한 측면에서 동물의 형질이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에 대해 적대적 민감성이 적은 개체를 선택한다는 기준만을 적용했음에도, 이와 관련이 없는 형질들이 일관된 방향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외적으로 보면 얼굴의 생김새에 변화가 관찰된다. 이마에서 턱까지 경사도가 줄며, 얼굴의 형상이 각진 모습에서 길고 갸름한 형태로 변하며, 송곳니가 줄어들며, 광대뼈가 들어가고, 코의 높이가 낮아지고, 앞으로 튀어 나온 이마가 들어가며, 눈이 움푹 들어간 정도가 줄어든다. 전반적으로 몸의 크기가 줄며, 두개골의 크기가 줄어든다. 또한 발달 단계에서 유아기에 보이는 특징들이 일생동안 고정된다. 이러한 변화는 개나 가축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과거 사멸한 인류의 조상이나 유인원과 현생 인류를 비교해도 유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외면적 변화와 함께, 내면의 형질의 변화도 전개된다. 상대의 의도를 읽는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되고, 공격성과 폭력성이 줄어드는 대신, 다정하고 온순해진다.

인간은 타인의 의도를 읽는 의사소통능력이 태어난지 일년 무렵부터 다른 모든 동물을 앞선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개 또한 인간의 의도를 읽는 능력이 침팬지보다도 뛰어나다.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은 심리학에서 "theory of mind"라고 칭하는데,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인간이 가장 뛰어난 능력이며, 집단으로 생활하면서 함께 일을 하는데 필수적이다. 인간은 육체적 힘이 대단치 않음에도 이러한 뛰어난 의사소통 능력과, 이를 기반으로 고도의 집단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능력 덕분에 지구상의 최강자로 등극하였다.

야생의 세계에서 동물은 다른 개체에 대해 적대적 민감성이 매우 높다. 타 개체를 경계하고 쉽게 가까이 하지 않는 성향은 동물 세계에서 보편적이다. 동물들이 자신의 가까운 가족 밖의 타 개체를 만나면, 서로 공격하여 위험을 제거하거나, 위계를 확실히 정하여 굴복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길들여진 동물은 이러한 본능적 성향을 억제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타인과 함께 생활하려면 남에 대한 적대적 민감성이 적어야 한다. 인간은 이러한 적대적 민감성을 줄이는 방향, 즉 공격적, 폭력적 성질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이를  '스스로 길들이기 가설' (self-domestication hypothesis)라고 칭한다. 가축이나 애완동물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적대적 민감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선별하여 길들인 결과물인 반면, 인간은 인간 종족 내에서 적대적 민감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이 선택되어 왔다. 그 결과 현생 인류는 과거 유인원에 비해 적대적 민감성이 적고, 덜 폭력적이고 덜 공격적인 존재가 되었다. 타인에 대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개체가 더 번성할 것 같지만, 인류 조상의 수렵채취 시절에,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개체는 집단 구성원의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되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보다 훨씬 힘이 세고 공격적 폭력적이었지만, 적대적 민감성이 적고 더 고도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현생인류와 경쟁에서 패하여 소멸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이런 다정한 성질은 자신과 근접한 집단의 구성원에게만 적용될 뿐, 자신과 먼 집단의 구성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자신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 자신에 근접한 집단 구성원에게는 다정하지만, 자신의 생존과는 연관이 희박하거나 자신의 집단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타집단에게는 냉혹하고 잔인하다. 사람들은 조그만 식별이라도 적용하여 자신의 집단과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을 구분하며, 타 집단 성원에 대해서는 자신의 집단 성원에게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태도를 갖는다. 즉 인간의 부족주의 성향(tribalism)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백인은 유색인을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재도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차별하는 집단 구성원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dehumanizing). 대상을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인식할 때, 자신의 집단 성원에 대해서 가지는 다정함은 타집단 성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타집단 사람들을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괴물로 칭하면서, 그들이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그들을 열등하게 여기고 적대적으로 취급한다. 미국에서 그러한 타집단은 흑인, 타민족, 이민자, 다른 정당 지지자, 여성, 가난한 사람,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띤다.타집단 성원을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그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차별하고 불이익을 가하며, 그 결과 벌어진 차이는, 다시 그들은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강화시킨다.

타집단을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성향을 불식시키려면, 타집단 사람들과 자주 교류하여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줄이려면, 백인과 흑인이 함께 살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지름길이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줄이는 것, 타민족 이민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줄이는 것, 남성과 여성 사이의 편견과 차별을 줄이는 것,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간 적대적 행위를 줄이는 것, 등등, 모두 두 집단 간 교류를 늘이도록 사회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저자는 다양한 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독특한 주장을 제시한다. 타인에게 다정한 개체가 생존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은 일견 모순적이다. 타인에게 다정한 태도는 또다른 인간의 본성인 부족주의의 한계에 갖혀 넓게 적용되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갈등과 폭력을 유발한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다정한 개체가 위계를 추구하는 개체보다 적자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주장은 인류의 역사로 볼 때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조직활동이라는 것은 위계체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성원들 상호간 대등한 다정한 조직이 현실세계에서 어려운 일에 집단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이 위계적 조직보다 더 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소수의견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모두 타인이 아닌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본능이 타인에 대한 다정함과 어떻게 맞추어지는지 궁금하다. 여하간 흥미있게 단숨에 읽었다. 

2020. 5. 29. 21:40

 

Paul Seabright. 2010. The Company of Strangers: a natural history of economic lif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0. 315 pages.

프랑스의 정치경제학자인 저자는 인간의 경제생활을 인간의 본능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인간은 가장 공격적인 동물이다. 인간의 과거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모르는 사람(strangers)을 마주쳤을 때, 상대에게 친절하게 손을 내밀기보다는 상대를 위협하고 공격한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서로에게 의지하는 경제 활동을 하게 되었을까?

서로 협력하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의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생존 가능성이 높기에 진화를 통해 서로 협력하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선택되었다. 어떻게 좁은 범위의 가족과 친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타집단의 사람에 대해, 두려워하고 피하거나 공격하기보다 서로 다가가 평화롭게 접촉을 유지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상대에게 받은 호의를 되값으려 하는 인간의 본능에 있다. 인간은 거래의 본능이 있는데, 유사한 가치의 것을 교환하므로서 서로에게 모두 이익을 가져온다. 인간은 다시 만날 가능성이 희박한 상대에게도 받은 것에 상응하는 것을 되주려는 성향을 보인다. 즉 인간의 호혜적 교환은 계산의 결과이기보다는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다.

이방인을 공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서로 거래하는 관계로 발전시킨 것은, 한편은 이러한 성향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선택된 결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등한 거래관계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를 정착시킨 덕분이다. 시장기구와 사유재산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거래 당사자가 계약을 존중하지 못하면 국가의 권력을 동원해 계약을 강제하고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안정적인 거래관계를 위해서 필수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깨어지기 쉽기 때문에 항시 세심히 관리해야 한다. 안정적인 거래를 위협하는 요인을 방치하면, 금방 이방인을 두려워하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지배하려하는 인간의 본능이 고개를 든다. 

한편 상대가 나의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고 상응하는 것을 나에게 제공하지 않으면 그러한 행위를 처벌하려는 강력한 본능을 발전시켰다. 거래의 공정성은 인간의 유전자에 깊숙이 박힌 본능이다. 바로 이러한 본능이 서로가 잘하는 것을 각자 수행하면서, 각자가 생산한 것을 서로 교환함으로서 모두가 이익을 더하게 된다.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각자는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분업을 통해 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분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유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저자는 이를 터널 비젼, 즉 자신의 좁은 이익만을 돌보는 방식인데, 놀라운 것은 모든 사람이 터널 비젼을 가지고 살고 있음에도 전체의 이익이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전체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각자의 선을 위해 일할 때 부의 총량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바로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이 주장하는 바이다. 이는 전체의 선을 위해 중앙집중적으로 계획하는 공산주의 체제보다 개인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결정하는 분권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더 효율적인 이유이다. 명령과 복종에 의해, 혹은 이념에 추종하기 때문에 맺어진 정치적 관계보다는, 상호의 이익을 가져오는 상업적인 거래관계, 모두가 시장 가격의 신호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관계가 더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다.

분업의 효율은 다른 한편으로, 분업에 참여하는 구성 부분간에 조율이 어그러질 때 문제를 발생시킨다. 경제 불황은 바로 이 분업이 어그러진 결과이다. 2008년에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주체는, 지나치게 위험한 투자를 한 은행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넘어 빚을 내어 집을 산 개인들이다. 위험한 투자에 참여한 투자자들은 이것이 매우 위험한 행위임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에게는 그 위험이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폭탄 돌리기를 한 것이다. 

개인 각자의 결정으로 할 수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을 도모하는 것, 즉 긍정적인 외부효과가 나타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개인은 국가의 조정을 통해 이러한 집합적인 일에 참여함으로서 개인 각자가 할 수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의 이익을 누리게 된다. 즉 공공재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농업을 시작하면서 관개사업을 하는 것이나,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군대와 성벽을 쌓는 것이 그것이다.

국가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호혜적인 거래관계이다. 거래관계의 당사자 국가 간에 규모의 차이가 클 때, 그들간의 관계는 실용적인 대등한 거래관계로부터, 권력을 추구하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 제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이면서 다른 나라와 호혜적인 거래관계를 맺으려고 하였는 데, 이는 자유주의 이념에 따른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이익에 이것이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면서, 미국은 자유주의 이념을 계속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될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근래에 미국이 자국이익 우선주의로 나아가는 것은, 보통의 나라들 사이에 맺어지는 자연적인 관계로 복귀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이방인을 두려워하고 공격하던 본능을 극복하고 서로 거래를 하고 분업을 하면서 의존하는 경제관계로 발전시킨 것을 '위대한 실험'(Great Experiment)이라고 한다. 인간은 여전히 낯선 사람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좁은 집단 범위에만 이익을 나누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족주의(tribalism)적 성향이 강하기에 이러한 위대한 실험은 깨어질 위험성이 높다. 우리 가족, 우리 친족, 우리 지역, 우리 동창, 우리 나라, 우리 민족, 우리 인종에 우선권을 주고 외부인에게 차별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인류 문명의 성과는 이러한 본능을 자제하고 낮선 사람과 함께 일하고 낮선 사람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려고 한 결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취약하며, 실제로 무너지는 경우를 인류 역사에서 무수히 많이 본다. 인간은 앞으로 진화해야 할 길이 멀다.

이 책은 경제 철학이다. 경험과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의 사회적 삶의 방식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기술하고 설명한다. 프랑스 학자의 책 답게 주절이 주절이 말이 많다. 잡다하게 관계된 논의를 모두 망라한 에세이들을 모아 놓았다. 자신의 주장을 명료히 하면서 직설적으로 쓰는 영미권의 학술 풍토와는 많이 다르다. 이를 모두 읽어내느라고 고생했다. 저자의 설명이 장황하여 따라가다보면 지치기에, 과연 이러한 서술방식이 효과적인지 의심스럽다. 프랑스의 사회과학은 생각이 자유분방하고 통찰력을 준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영미권의 그것에 비해 각광을 받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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