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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McNeill'에 해당되는 글 3건
2023. 5. 6. 22:34

William McNeill. 1991(1963). The Rise of the West: A History of the Human communi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807 pages.

저자는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고대에서부터 1950년경까지 세계 문명의 전개를 설명한다. 세계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중동지역이 인류의 문명을 대표한 500 BC 경까지, 이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유라시아대륙의 곳곳을 수시로 침범하면서 농업 혹은 상업을 기반으로 한 문명들(헬레니즘, 인도, 중국, 이슬람 제국)을 위협한 시기인 서기 1500년까지, 전세계에 대한 서구의 압도적 지배로 요약되는 1500년 이후 현재까지, 이렇게 인류 역사를 세개의 시기로 구분을 한다. 그는 세계의 문명권이 고대부터 서로 영향을끼치며 전개되어 왔다는 점, 1500년 총포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발전은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의 전개에 의해 크게 좌우됬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류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3,000년 경에 이곳에서 농경이 처음 시작되고 도시가 출현하였으며, 부족의 규모를 넘어선 큰 규모의 정치체가 등장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후 변방으로 확대되어, 기원전 1700년경에는 이집트, 소아시아, 크레테, 이란으로 확대되었으며, 이후 인도, 그리스, 중국 문명이 기원전 500년경까지 세워졌다. 중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독립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반면, 인도와 그리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영향을 받아 세워졌다.

그리스 문명은 서쪽으로는 로마제국과 서유럽으로, 동쪽으로는 소아시아의 헬레니즘으로 확장되었다. 인도문명은 동남아시아로 확장되었으며 중국에 영향을 미쳤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은 철기문화를 일찌기 발전시키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멸망시켰으며, 이란 아프간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인도 문명을 위협하였다.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유목민족들은 중동과 중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통해 문명간 교류를 활성화하였다. 이들은 서쪽으로는 동유럽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중국을 수시로 침범하면서 기존 사회의 변화를 촉발시켰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 문명은 동으로는 이란과 인도 지역으로, 서로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로 확장하였다.

1500년까지 서유럽은 문명의 변방지대에서 낙후되었었다. 그러나 이후 항해 및 총포 기술과 함께 체계적으로 군사를 조련하는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다른 모든 지역을 압도하는 전쟁 능력을 획득하였다. 서유럽이 중국, 인도와 비교하여 이렇게 크게 발전한데는, 여러 작은 정치체들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전쟁 능력을 함양한 것, 지주층과 비교하여 상공인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점이 큰 이유이다. 서유럽의 이러한 전통은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부터 발전되었다. 반면, 중국은 지주세력이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여 상공인의 발전을 억눌렀다. 또한 상대적으로 안정된 중앙 집권체제가 계속 유지되면서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의 힘이 매우 강했으며, 다수의 정치체들간 경쟁을 통한 변화의 역동성이 부족하였다.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초원지역에 사는 유목민족은 주변의 농경민족보다 군사적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수시로 주변의 문명들을 위협하였다. 서쪽으로는 헝가리까지 진출하였으며, 이들의 압박으로 역시 유목민족이던 고트족이나 게르만족이 서유럽으로 밀려나 정착하였다. 유럽인은 고대부터 군사적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으므로, 호전적인 문화가 바탕에 깔려있다. 유목민족들은 남으로는 북인도로 진출하여 인도 유러피안어족의  인도문명을 세웠다. 이들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원나라, 청나라, 금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의 문화에 흡수되는 길을 택했다.

중동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시작해, 이후 헬레니즘을 수용하고, 이슬람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오랜동안 주변의 다른 문명권에 영향을 미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을 거듭하였으며, 노예를 기반으로 군대를 유지하였는데 이들의 거듭된 반란으로 국력이 쇠하였으며, 신정 정치가 계속되면서 변화를 거부하여, 외부의 위협에 대응한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1500년경 이후 서구 문명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이후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으로 이어지는 세계 확장의 길에 접어든다. 1400년경 부터 서유럽은 점차 기독교의 지배에서 풀려나,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세속적인 합리주의가 세를 더하였다. 이는 1700년대에 계몽주의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국민의 힘을 키우고 민족국가를 형성시킨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700년대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급속한 인구증가로 이어졌다. 결국 1800년대 중반쯤 세계 모든 지역은 서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유라시아대륙에 비해 3,000년 정도 문명의 발전이 낙후되어, 1500년경 서구와 만났을 때 아직 철기문화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유라시아대륙의 질병에 취약하여 쉽게 무너졌다. 서구의 위협에 대응해 자신의 선조로부터 계승한 문화의 무력함에 절망한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서구의 문화를 급속히 수용하였으며, 자신의 전통 문화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저자의 역사관은 두가지 점에서 독특하다. 첫째, 세계는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한다. 어느 지역에서 좋은 아이디어나 발전이 전개되면, 이것은 얼마 안되어 주변지역에 모방되고, 이러한 과정이 빠른 속도로 전지구를 돌며 영향을 미친다. 둘째, 서구가 앞서기 전인 1500년 무렵까지 유목민족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이 세계사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총포의 발명으로 유목민족의 파괴력이 무력해진 후에도 여전히, 군사적 능력은 역사의 전개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서구가 세계를 제패한 것은 우월한 군사력 덕분이다.  현재 세계는 서구의 문명권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 이를 대체할 어떤 다른 문명이 등장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계속 발전하면, 아마도 미래에 인류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현재의 인류를 대체하는 새로운 인류가 등장할 수도 있다.

저자는 역사의 전개를 거시적으로 접근하면서 말로 많이 설명한다. 다양한 사회와 제도, 지역, 시간을 종행무진으로 비교하면서 엄청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지금까지 학교에서 공부한 역사는 서유럽에 국한된 역사이며, 통찰력과는 거리가 먼 단순 학습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높이는 데에 역사 공부의 목적을 둔다면, 이 책은 정말 최상의 교재이다. 감탄을 거듭하면서 800쪽의 책을 읽었다. 여러번 읽을만한 책이다. 다만 20세기의 역사나, 동아시아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2023. 4. 21. 10:03

William McNeill. 1995. Keeping Together in Time: Dance and Drill in Human History. Harvard. 157 pages.

저자는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많은 사람이 보조를 맞추어 동시에 움직일 때 느끼는 흥분이 종교, 군사, 정치, 사회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2차대전에 징집되어 군사훈련을 할 때, 여러 시간 동안 보조를 맞추어 행진연습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적 흥분의 기억에서 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러 사람이 함께 리듬을 맞추어 육체적인 활동을 하면, 집단 소속감과 함께 삶에 대한 흥분이 고조되면서 집단결속이 높아진다. 저자는 이를 '육체적인 결속' mascular bonding 이라 지칭하는데, 인간 진화의 과정에서 집단 구성원들과 언어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소통을 할 때 집단 결속력이 높아지고 집단적인 일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정적 소통 방식은 후대의 인류에게 계승되었다. 인간의 삶에서 감정은 지적인 활동 못지 않게 중요하다. 대체로 감정적인 활동이 이루어지고 나서, 이를 지적으로 정당화 내지 제도화하는 작업이 뒤따른다.

과거 인류가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동시에 리듬에 맞추어 하는 활동은 그들의 삶의 중요한 일부였다. 종교적인 목적에서 공동체 구성원이 여러 시간 동안 함께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하고 춤을 추었다. 집단적으로 하는 노동에서 노동요에 맞추어 단체로 일하므로서 오랜시간 노동의 고됨과 지루함을 극복하였다. 축제 기간에 집단적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름으로서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다. 이러한 집단 활동은 서기 2000년전 수메르 시대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새로운 종교가 시작되는 계기는, 지도자의 이끌림에 따라 집단적으로 춤을 추고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하면서 종교적 황홀경(trance)를 맛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 세계의 모든 종교는 초기 단계에 이러한 신비한 영적 체험으로 신도를 유인하는데, 이는 여러 사람이 모여 동시에 몸을 움직이면 느끼게 되는 집단적 '흥분'  effervescence 에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집단적 흥분은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도의 규모가 커지고 종교가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면, 이러한 집단적 흥분을 제한하려하고, 감정보다 지적인 접근을 중시하게 된다. 그러나 지적인 접근에 반발하여 영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이단이 생겨나고, 이들이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면서 신도가 증가하면서 종교의 합리화 과정이 되풀이 된다. 과거 감리교, 침례교, 몰몬교가 발흥하게 된 계기, 근래에 복음주의 개신교 교회, 특히 오순절 교회Pentecostal 가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크게 성황을 이루는 이유는, 예배 시간에 신도들이 동시에 몸을 움직임이고 큰 소리로 외치고 기도하면서 영적인 흥분을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떠한 종교건 이러한 집단적 흥분을 떠나 지적인 접근만으로 오래 존속할 수는 없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집단적인 군사 훈련, 특히 병사들이 보조를 통일해 움직이는 훈련 방법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훈련을 강도 높게 받은 병사들은, 사기가 높고, 전장의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무엇보다 전우애가 투철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몸을 던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훈련을 받은 군대가 이러한 훈련을 받지 않은 군대를 만나 번번히 이겼기 때문에, 이러한 군사 훈련은 서구 전역에 급속히 확대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훈련 방식을 일찍이 도입하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으나, 오스만 터키는 자신의 전통적 방식을 고집하여 낙후된 군대로  남아 있다가, 유럽의 침공에 몰락하였다.

19세기 중반 독일과 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이 패한 이후, 독일에서는 건장한 젊은이를 길러내기 위해 체조와 운동을 통해 육체를 단련하는 사회적 운동이 정부의 적극적 주도로 전개되었다. 같은 시기 이웃나라 스웨덴에서도 전국민 체조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고, 일본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국가가 주도하여 전국민 혹은 집단 구성원 모두를 리듬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건강 증진을 도모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군사적인 의도를 내포하였으며, 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의식으로 장려되었다.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독일의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청년 친위대를 양성하면서 체조와 행진을 중시했으며, 나치 시절에 매년 벌어진 뉴렌베르크 집회에서는 대규모 군중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행진을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치 특유의 손을 높이들어 인사하는 행위 역시, 동시에 몸을 움직임으로서 결속감을 고취시키는 수단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히틀러의 악몽을 잊기 위해 유럽에서는 국가주도로 체조와 행진하는 것이 기피되었지만, 히틀러의 기억이 미약한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여전히 집단 결속을 다지기 위해 집단적으로 체조를 하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현대 도시인의 삶에서 리듬에 맞추어 집단적으로 춤을 추거나 행진을 하거나 구호를 외칠 기회는 많지 않다. 운동 경기장에서 자신의 팀을 응원하는 집단적 행위가 미국에서는 가장 이에 근접한 활동이다. 많은 사람이 보조를 맞추어 움직임으로서 집단 소속의 흥분감을 느끼는 것은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화 과정을 통해 그러한 욕구를 타고 났기 때문이다. 근래에 젊은이들이 유명 가수의 콘서트에서 가수의 이끌림에 맞추어 집단적으로 춤을 추고 떼창을 부르고 소리를 외치고 흥분하는 이유는 이러한 활동이 인간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집단 행사에 참여하고 나서 속이 뻥 뚫리는 후련한 느낌을 받고 삶의 활력을 얻는다.

저자는 인류학 배경을 가진 역사학자답게, 공식적인 제도보다는, 사람들의 삶의 현실, 즉 사람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 사료는 많지 않지만, 마치 인류학자의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서술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동시에 리듬에 맞추어 움직일 때 삶의 흥분을 느끼고 집단 결속감이 높아지며, 이것이 언어나 제도 못지 않게 사회와 삶의 버팀목이라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독창적인 그의 주장에 매료되어 단숨에 읽었다.

2023. 1. 28. 13:06

William H. McNeill. 1977. Plagues and Peoples. Anchor Books. 257 pages.

저자는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전염병이 인류에 미친 영향을 역사 전개에 따라 서술한다. 저자는 서구,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전지구적인 사람과 물자의 교환에 강조점을 두고 역사 전개를 서술한다. 전염병의 역사는 이러한 역사 접근의 가장 대표적인 주제이다. 17세기 이전까지 전염병에 대한 자료는 미진하므로, 많은 경우 상황 정보를 종합하여 추론한다.

전염병은 인간과 접촉이 잦아지면 '문명화'(civilized)의 과정을 겪는다. 특정 전염병에 처음으로 노출된 인구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는다. 한 마을 전체가 몰살하거나, 백명 중 한두 명만 살아남을 정도로 피해가 심하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에 치명적인 병원체는 대상 인구를 소진한 다음에는 계속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에게 덜 심한 피해를 입히는 변종으로 대치된다. 한편 이러한 치명적인 전염병에 노출된 인구는 면역력을 보유하게 되기 때문에, 면역력이 없는 다음 세대로 대체되기 전까지 같은 전염병으로 다시 크게 피해를 입지 않는다. 이렇게 병원균과 인간 상호간에 적응(adaptation)이 진행되면,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치명적이었던 전염병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태어난 면역력이 없는 아동들에게만 치명적인 병으로 안정화(stabilized)된다. 특정 전염병은 대체로 3~4세대의 주기, 즉 약 100년을 주기로 하여 다시 찾아와 큰 피해를 입힌다. 3~4 세대가 지나면 특정 전염병에 대해 면역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전염병은 대부분의 성인에게 다시 큰 피해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전염병의 주기적 출몰이 16세기까지 모든 인류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경험이었다.

인류 사회는, 한편으로는 전염병 즉 생물체에 기생하면서 숙주와 함께 살아가는 유기체인 '미세한 기생충'(microparacitism),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인간에 기생하면서 그들을 착취하여 살아가는 인간들인 '큰 기생충'(macroparacitism)이 서로 밀접히 연결되면서 역사가 전개되었다. 큰 기생충의 적응 방식은 미세한 기생충의 적응 방식과 유사하다. 큰 기생충인 지배자들은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것의 일부를 폭력을 바탕으로 전쟁, 약탈, 세금, 지대, 등의 방식으로 빼앗는다. 이웃 나라를 정복한 지배자들은 초기에는 생산자들이 생존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하게 수탈하여 생산자들의 생산 기반을 몰락 시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지배자들은 생산자들이 계속 생산을 할 수 있을만큼 남겨두고 수탈을 하며, 지배자와 생산자간 안정된 공생관계가 자리잡는다. 큰 기생충이 생산자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면, 생산자들의 영양 상태가 악화되고 병원균에 대한 저항력이 떨여져 전염병의 피해가 커진다. 전염병이 몰아닥쳐 생산자들의 생산 능력이 떨어졌는데도, 큰 기생충이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수탈을 계속할 경우, 그 사회는 붕괴하게 된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부 지배자들은 생산자들을 적정 수준으로 착취하여 둘 간의 관계가 안정화된다.

인류는 그리스 로마 시대, 즉 기원전 500년경에 이르러,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의 지역이 주요 전염병에 접촉한 경험을 갖게 되고, 어느 정도 면역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중동에 기원한 고대 문명과, 중국, 인도 문명 사이에 드물지만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때때로 이루어지면서, 통일되고 문명화된 전염병의 풀이 형성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전염병의 주기적 출몰로 인구가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인구 증가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안정 상태가 1,200년대까지 이어졌다.

역사학자들은 전염병이 사건의 전개에 미친 영향을 과소 평가하는데, 이는 전염병의 출몰이 예기치 못한 사건이며,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 미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 예컨대, 서구에서 아테네의 몰락, 페르시아의 패배, 로마제국의 붕괴, 중세 봉건제의 발달, 등에서 전염병의 발흥이 사건의 방향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한 요인이다. 또한 황하강 유역에서 시작된 중국문명이 1300년대까지 양쯔강 이남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인도 북부의 세력이 인도 중부 이남으로 확대되지 못한 것 역시, 아열대 지역의 높은 전염병 위험이 서늘한 지역에서 시작된 문명의 남하를 막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지역은 전염병의 위험이 높기 때문에, 인구 밀도가 낮으며, 생산력이 높지 못하여 큰 규모의 비생산인구를 부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몰살을 당하는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기존의 이념과 권위 체계에 대한 신뢰를 거둔다. 대신 이러한 혼란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갈구하는 데, 기독교, 불교, 유교는 사람들의 고통을 토양으로 성장하였다. 세속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람, 특히 가까운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기독교는 이를 하나님의 심판, 인간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설명하였으며, 죽은 다음 천국에 간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의 허무를 달래 주었다. 불교는 이러한 고통과 혼란에 대하여, 세속적 욕망에서 물러날 것과, 죽은 다음 다시 환생한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위무하였다. 유교는 가족의 유대를 강조하여 조상에서 자신 그리고 후손으로 이어지는 연결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잊게 하였으며, 중앙집권 체제에서 가족의 확대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관료적 의례와 절차를 믿음의 일부로 만들었다.

1300년대에 흑사병이 유럽을 포함한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휩쓸었다. 흑사병은 쥐를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전염되는 질병이다. 이 병원균은 히말라야 북단에 원천을 두고 있었는데, 1200년대 중반 몽고 제국이 이 지역에 정벌을 갔다 돌아오면서 병원균을 가지고 왔으며, 이것이 징기스칸의 서방 정벌을 따라서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을 넘어 터키와 헝가리까지 진출했으며, 마침내 1300년대 초에 서유럽을 휩쓸었다. 몽고의 서방 정벌이 헝가리에서 멈추게 된 이유 역시 몽고 정벌군이 흑사병으로 크게 피해를 입어 후퇴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흑사병은 선박을 통해 이탈리아 북부에 유입되어 유럽 전체에 퍼졌다. 서유럽에서는 초기에 큰 피해를 입은 뒤, 이후 다시 흑사병이 몰려왔을 때 격리와 검역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피해를 점차 줄여 나갔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도입하지 않아 1700년대까지도 흑사병의 출몰로 큰 피해를 입었다.

흑사병은 기존의 권위와 이념 체계에 큰 균열을 가져왔다. 중세 시대에 굳건했던 정통 기독교의 조직과 교리 대신에, 신비주의와 내면의 성찰을 강조하는 믿음이 활개쳤으며, 기존의 기독교 교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1500년대의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흑사병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이 무력한 것을 체감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헌신이 약화되었다. 이는 1500년대에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난 르네상스와 과학기술의 발달을 낳았다. 흑사병에 대한 대응 조치가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중앙집권이 확대된 반면 교회와 지역 영주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흑사병은 1300년 무렵에 중국으로부터 화약이 도입되고, 이후 총과 대포가 발명되면서 봉건 영주와 기사의 세력이 약화된 것과 더불어 중세를 붕괴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흑사병은 서유럽 전체에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했으며, 이는 중세의 생산과 사회관계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한편 이 시기 중국에서는 몽고제국의 후손인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으며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는데, 이러한 변화 역시 몽고 지역에서 흑사병의 피해가 심각하여 지배력을 계속 행사하기 어려웠던 것이 주요 원인으로 추정된다.

1400년대 후반에 유럽은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었다. 유럽인들은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였으며, 바다를 통해 아시아에 진출하였다. 유럽 세력이 대양을 넘어 확장하게 된 원인은, 1300년대 이래 거듭된 흑사병의 위협을 이겨내고 인구가 빠르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시대에 중국의 명나라는 해외로의 진출을 억제하고 중국 대륙 내로 한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중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지배하였으므로, 지배권의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쇄국정책을 펼쳤다. 반면 유럽은 중세의 봉건체제를 벗어나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작은 나라로 쪼개졌으며, 이들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해외로 진출하는 것이 장려되었다.

아메리카인들은 유라시아의 전염병에 전혀 노출되지 않았었으므로,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마치 유럽인이 아시아로부터 건너온 흑사병에 처음 노출되었을 때처럼. 외부에서 온 전혀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로 인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은 반면, 이러한 병원균에 면역력을 가진 침략자들은 거의 피해가 없는 것을 보고, 전염병으로부터 살아 남은 생존자들은 삶의 의미를 잃고 자기 파괴적으로 생활하거나, 지금까지 자신의 사회의 믿음과 권위 체계를 부정하고 침략자의 지배와 이념을 순순히 수용하였다.

1600년대 이후 유럽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다. 웬만한 치명적인 전염병에 대해 면역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전염병이 돈다고 해도 때 방역과 격리 등의 방법으로 전과 같이 큰 피해를 입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수입한 감자, 옥수수, 알파파 등의 생산성이 매우 높으므로 인구 전반의 영양 수준이 높아졌으며,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럽인이 이동하면서 유럽의 인구 압력이 낮아진 것, 등이 인구 증가의 원인이다. 1700년대에 들어 경험주의의 과학적 접근이 의료 분야에 확대되면서 병원균의 확산을 억제하는 실증적인 방법이 개발 보급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홍역을 예방하는 예방 접종이 그것이다. 또한 도시의 비위생적인 환경를 개선하는 조치들이 속속 전개되었다. 1800년대 중반 현미경의 발명으로 병원균의 실체가 확인되면서 전염병은 마침내 인류가 실체를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대상이 되었다.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유럽의 도시들은 주변 농촌지역보다 사망율이 높지 않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그전까지 도시인의 수명은 농촌 사람들보다 낮았으므로, 계속하여 주변 지역으로부터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어야만 도시가 유지되었다. 1800년대에 서유럽의 위생과 의료 지식이 전세계의 유럽인이 진출한 지역에 보급되면서, 한 지역의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전염병에 노출되어 몰살당하는 현상은 사라졌다.

이 책은 거의 반세기전에 집필되었음에도 대단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서유럽에 국한된 시야를 세계로 확대시키고, 지배자와 정치 분야에 집중된 전통적 역사 서술을 넘어,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아우르고 사회전반의 변화를 거시적으로 통찰하는 안목을 제공한다. 정말 대단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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