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J. Sandel. 2020.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Farrar, Straus and Giroux. 227 pages.
저자는 사회철학자로, 이 책은 미국 사회에서 성과주의 혹은 업적주의(meritorcracy)가 지배하면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응 방향을 제시한다. 성과주의 혹은 업적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원칙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칙이 지배할 때, 상위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상위 지위를 얻었다는 자긍심을 갖고 사는 반면, 하위 지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모자라서 어렵게 산다고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성과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패배한 사람을 낮추어보는(condescend) 반면, 패배한 사람은 수치심과 함께 승리자에 대해 불만과 분노에 가득차게 된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되고, 영국에서 유럽탈퇴 결정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이들, 성과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
1980년대 이래 세계화와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의 시장 경쟁력은 높아졌으며 소득이 크게 증가한 반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은 좋은 일자리를 잃고 열악한 서비스 일자리만 남은 처지에 빠졌다. 지난 사십년 동안 미국의 경제는 잘 나갔는데, 상위소득자의 소득은 현저히 증가한 반면, 중하위 소득자의 소득은 정체되었다. 그 결과 소득 불평등은 높아졌다.
근래로 올수록 대학 졸업장이 경쟁에서 승리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문제는 미국 성인의 3분의 1만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이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3분의 2의 사람들이 이러한 변화를 접하면서 어떤 감정을 가질지 미국의 엘리트들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이들에게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더 쓰라리게 하고 분통을 살뿐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라도 성공할 수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이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미국은 서구 유럽과 비교하여 사회이동이 덜 활발한 사회이므로,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의 이념은 더 많은 미국인을 좌절에 빠뜨린다.
미국의 대학이 사회적 성공을 위해 필수적 경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 교육은 지위 상승이동의 경로가 되지 못한다. 우수한 대학의 학생 중 상위층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우수한 대학은 사실상 상위층의 지위 대물림의 수단이 되었다. 상위층 자녀는 대학 준비과정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으며, SAT 성적은 부모의 소득 수준과 비례한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은 지난 사십년간 갈수록 치열해졌다. 우수한 대학에 입학하는 경쟁에 몰려 젊은이들의 정신과 인생이 좀먹는 정도에 이르렀다.
요컨대 성과주의가 심해지면서 미국의 정치는 파행에 빠져 비민주적 대중영합주의가 득세하였으며, 많은 중하층 사람들이 좌절과 분노에서 자기파괴적 행위를 하며, 중상층 젊은이들도 경쟁에 치여서 전인적인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 어떻게 성과주의의 폐해를 막을 것인가?
저자는 우선 우수한 대학의 대학입시 방식의 개혁을 제안한다. 성과에 따라서 줄을 세워서 입학을 결정하는 방식을 버리고, 대신 일정 학업 능력을 넘어선 학생들 풀에 대해 추첨을 통해 입학을 허용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우수한 대학 졸업장을 얻는 것이 완전히 개인의 성과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사실 사회적 성공이 완전히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다양한 요인이 개입되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사회적 성공의 핵심 경로인 대학 입시에서부터 운의 작용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성과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이것은 완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이룬 것이라는 자긍심에서 실패한 사람을 낮추어보는 태도가 조금은 사라질 것이며, 경쟁에 실패한 사람도 이것이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쓰라림이 덜 할 것이다.
개인이 시장경쟁에서 거둔 성과가 아니라 개인이 사회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개인의 가치가 결정되도록 사회제도를 조정해야 한다. 저자는 이를 '분배에서의 정의'(distributive justice)에 대비되는 용어인 '기여에서의 정의'(contributive justice)라고 지칭한다. 개인이 시장경쟁에서 거둔 성과는 개인의 소득으로 귀결되는 데, 이는 그가 사회에 기여한 정도와 반드시 일치 하지는 않는다. 이 두가지가 어긋나는 경우, 이 두가지를 근접시키려는 사회적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금융시장에서 투기를 통해 엄청난 소득을 거둔 사람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서, 사회에 기여한 정도보다 보상을 덜 받은 사람, 예컨대 청소부나 학교 선생님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재산 소득에 세금을 많이 부과하는 대신, 노동 소득에는 세금을 면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있도록 최저한의 사회적 조건을 마련해 준다면, 성과주의에 따른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문제의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 아무리 능력에 따라 경쟁해서 패한다고 해도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다면 패자의 쓰라림은 덜 할 것이다. 또한 승자와 패자의 보상의 간격이 크지 않다면, 즉 소득 불평등이 크지 않다면, 승자와 패자의 갈림이 덜 쓰라릴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공공재(common good)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승리와 패배에 관계없이 누리는 부분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성과주의의 부작용을 말하지만, 사실 성과주의는 서구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이룬 동력이다. 능력과 노력을 가진 사람에게 중요한 자리를 배당하고 보상을 많이 주는 시스템은, 사회발전을 추구하는 가장 과학적 기술적 접근방식이다.과거에 신분사회, 즉 능력과 노력에 관계없이 태어난 지위에 따라 삶이 결정된 사회의 부정의와 비효율을 생각한다면 성과주의가 얼마나 우수한 체제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성과주의의 부작용을 걱정하기 전에,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한다는 성과주의 이념이 완벽히 구현되지 않은 것을 먼저 문제삼아야 한다. 부모의 지위에 따라 자식에게 기회의 차등이 주어지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가야할 길이 멀다. 저자가 지적하는 미국이 당면한 성과주의의 부작용이란 것은, 사실 성과주의 자체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성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데 따른 문제이다.
기회가 완벽히 평등하게 주어졌음에도 실패하는 사람의 좌절과 분노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들에게 인간적으로 살만한 수준의 삶을 보장하고, 그들의 자녀에게 부모의 실패와 완전히 독립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면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다. 자신은 능력과 노력이 모자라 실패했더라도, 자신의 자녀가 부모의 실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새로운 인생의 게임을 시작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결코 게임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이 정말 공정하고 믿는다면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식에게 새로운 공정한 게임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코 자신에게서 게임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인 노동계층이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과 함께 자신의 자녀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반발하는 것이지, 성과주의 그자체에 반발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열심히 했음에도 자신에게 돌아온 몫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빈약하다고 느낄 때, 분노한다. 게임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생각에는 오류가 있다. 세계화가 되면서 그들보다 더 가난한 제삼세계의 사람들이 그들만큼 열심히 살지만 그들보다 덜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다만 그들보다 더 열심히 산 것은 아닌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거나 대도시에 교육 많이 받은 사람들이 엄청난 몫을 가져가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이 그들의 분노의 근원이다. 불평등이 그들의 분노와 좌절의 원인이며, 지난 사십년 동안 그들의 소득이 정체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남은 잘 나가는데 나는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만큼 사람을 좌절시키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이 책은 저자의 강의 명성만큼 좋은 책은 아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논의가 답답하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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