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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8. 21:17

Alan Macfarlane. 2014. Invention of the Modern World. The Fortnightly Review. 322 pages.

저자는 캠브리지대학의 인류학 교수이다. 그는 영국이 산업화에 착수하기 훨씬 이전인 12세기 경부터 근대적 (modern) 특성을 띠었는데, 중세 후반이래 영국의 예외적으로 근대적 특성 덕분에 세계에서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국이 오래 전부터 유럽의 대륙국가나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매우 다른 특성을 보였다고 지적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를 자주 비교한다.

근대적 특성의 핵심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가 별도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이것이 모두 뭉뚱그려져 있었다. 과거에는 가족/친족과 정치, 가족과 경제, 정치와 종교, 종교와 경제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는 종교의 영향이 세속의 모든 일에 미쳤으며, 가족 관계가 모든 일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었던 반면, 영국은 일찍부터 영역간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영국에서는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가족에 의존하는 경우가 없으며, 어려울 때에도 핵가족을 넘어서서 친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영국은 상업의 나라라 할 정도로 상행위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을 중시했다. 유럽 대륙이나 다른 전통사회와 달리 영국인들은 돈 버는 것을 천시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풍족하게 살면서 품위를 유지하는 중상류층을 '신사' gentleman 라고 존중하는 태도가 근대 이전부터 영국을 지배했다. 상업을 통해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지주가 되거나 정치에 진출하기도 하는데, 상업 자본가와 지주를 사회적으로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영국은 상공업을 권장했기에 일찍부터 사람들의 물질적 생활 수준이 유럽 대륙보다 훨씬 높았다. 유럽 대륙국가들보다 임금이 훨씬 높았으므로 기계 장치를 많이 사용했다. 영국은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으며 어느 다른 나라보다 훨씬 일찍 부터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많이 사용했다. 풍부한 석탄 자원이 산업혁명을 촉진시키는 배경이기는 하지만, 자원 매장 그 자체가 산업혁명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독일이나 중국 또한 풍부한 석탄 매장량을 자랑하지만 그들은 산업혁명 이전부터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영국만큼 많이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용을 우선시하고 물질적인 풍요에 높은 가치를 두는 영국인의 가치관이 석탄을 많이 쓰도록 유도한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실용보다 이념을 중시하고 물질적 풍요를 경시하는 가치관 때문에 유용한 자원이 있음에도 이를 이용하여 물질적 발전을 이루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영국은 태어나면서 법적으로 구분되는 지위를 부여받는 신분 제도가 뿌리 내리지 않았다. 귀족은 사회관습적인 특권을 누렸지만, 법적으로 구분되는 특권을 부여받지는 않았다. 귀족과 평민 모두 동등한 법에 구속되며, 귀족이라고 평민과 구별되는 별도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지 않았다. 성공한 상공인은 종종 귀족의 작위를 부여받았으며, 상공인(yeoman & merchant)과 귀족간의 사회이동의 경계가 엄격하지 않았다. 이는 유럽 대륙을 포함한 다른 전통사회에서 귀족, 승려, 평민, 사농공상 등 엄격한 신분 구별이 보편적이었던 카스트 사회와 구별된다. 영국은 다른 사회범주, 예컨대 남자와 여자, 혹은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 권리의 차이가 없었다.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개인주의가 발달했다. 개인주의란 개인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며, 개인을 세계의 중심으로 두는 세계관이다. 모든 전통사회에서는 개인이 집단 속에 매몰되어 있는 집단주의가 지배한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주요한 의사결정은 집단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며, 일의 책임도 집단이 공동으로 진다. 반면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일은 각자가 결정하며, 일의 결과도 개인이 책임진다. 영국에서 일찍부터 개인주의가 발달하게 된 데에는, 독특한 가족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있다. 영국에서는 귀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0살이 넘으면 부모 곁를 떠나 남의 집에 머물며 일을 배우거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의 살 길을 찾는 관행은 장자상속제 때문에 더욱 심했다. 차남 이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것이 없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부모를 떠나 자신의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영국인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남녀 관계도 부모의 간섭 없이 당사자간의 감정과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연애 결혼이 보편적이었으며, 자신이 만든 가족 구성원만으로 삶을 꾸리는 핵가족이 지배했다.

영국인은 자식의 노동에 가족이 의존하는 대신 외부인을 고용하는 관행이 지배했다. 이는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남의 집에 머물면서 일을 배우는 관행과 부합한다. 영국인은 자신의 앞가림을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기에 남녀 모두 결혼을 늦게 했다. 자식이 가족의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영국인은 일찍부터 산아 제한을 하며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았다. 영국인은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수준이 유럽 대륙 나라들보다 높을 수 있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보다 일찍 저출산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왕, 귀족, 상공인간 견제와 균형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유럽 대륙이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왕은 국민에 대해 전제적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귀족 또한 왕과 독립된 독자적 권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봉건 영주가 자신의 성의 주민에 대해 절대적 권한을 가졌던 봉건제도는 프랑스나 유럽 대륙 국가에 해당될 뿐 영국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17세기에 명예혁명으로 왕권이 제한된 것이나, 18세기에 미국에서 입헌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은 이러한 오랜 전통에 서 나온 것이다.

영국인은 일찍부터 무수히 많은 자발적 결사체를 조직했다. 취미 모임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다양한 일에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조직(association)을 결성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자연인과 유사한 독립된 법적 지위를 가진 신탁 기구(trust)를 만드는 전통과 연결된다. 유한 책임을 지는 구성원들이 참여하여 자원과 결정을 위임하는 신탁기구인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발전에 매우 효과적인 사회적 발명품이다.

영국은 기독교 국가이지만 기독교의 세력이 유럽 대륙만큼 세지 않았다. 교회가 별도의 법체계와 재판소를 가지고 세속 권력과 대립하는 체제는 유럽 대륙의 카톨릭 국가에서는 보편적이었으나,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인은 세속적 실용주의를 신봉했기에, 사람들이 신학적 교리에 죽고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영국인은 절대적 진리보다는 얼마나 삶에 도움이 되는지에 따라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실용적 진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실용적 진리는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대상이기에, 영국에서 과학과 기술이 유럽 대륙보다 먼저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왜 영국이 유럽 대륙과 다른 특징을 보이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유럽 대륙에는 로마의 지배력이 크게 미쳤으며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그 영향이 지속된 반면, 영국에서는 실질적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로마의 영향이 약했다. 대신 영국에는 게르만 민족의 전통적 특성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유럽 대륙과 차이가 나게 되었다. 유럽의 게르만 민족 국가인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도 영국과 유사한 특징을 찾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카톨릭 국가들과 이웃하면서 게르만 민족의 특성이 많이 희석되어서 점차 영국과 차이가 벌어졌다. 게르만 민족의 전통인 집단 협의 의사결정, 지위 평등, 절대적 신앙을 배격하는 것, 실용주의 등이 영국에서는 사그라들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책에서 설명하는 영국의 강점을 따라가다 보면,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으며, 왜 영국이 세계의 절반이 넘는 영토를 이백년 이상 지배하는 강국이 될 수 있었는지 이해된다. 그러나 이 책은 영국의 강점만 말하는 편향성을 보인다. 이책의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영국 이외에 유럽 대륙의 나라 사람들은 우매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영국이 그렇게 실용적이고 민주적인 나라인데, 왜 노예무역을 주도했으며, 왜 아편전쟁을 했으며, 왜 이웃나라 아일랜드를 무자비하게 억압하였으며, 왜 인도를 지배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왜 인종주의가 강하며, 왜 근래에 대중영합주의가 휩쓸면서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유럽연합탈퇴를 감행했는지, 등등 영국의 어두운 측면을 이해할 수없다. 책의 후반부에 영국의 국민성을 설명하는 데에서는 중언부언하는 것이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책을 읽으면서 영국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