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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에 해당되는 글 3건
2024. 2. 14. 18:07

Sheldon Solomon, Jeff Greenberg, and Tom Pyszczynski. 2015. The Worm at the Core: On the Role of Death in Life. Penguin Books. 225 pages.

저자는 심리학자이며, 이 책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심리학 실험, 인류학적 탐구, 철학적 사색, 문학적 표현 등 가용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논의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며, 이 문제는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두가지 방식으로 극복하려 한다. 하나는 '문화' culture 이며, 다른 하나는 '자존감' self-esteem 이다. 문화는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죽은 후에도 의미있는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를 제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한다. 종교는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응하는 대표적인 방책이다. 문화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으로부터 와서 내가 죽은 이후로 이어지는 의미있는 무엇이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조상, 혈통, 후손, 민족, 예술, 지식, 위인, 역사, 등의 문화적 메시지와 상징은 나의 죽음이 '끝', 즉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고 사람들을 설득한다.

자존감이란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중요하며 의미가 있다는 자의식 self-consciousness 이다. 자신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큰 집단과 큰 프로젝트의 일부에 속하며, 이런 집단과 프로젝트에 내가 기여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자신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자신이 이 땅에 살면서 행한 것을 후손이 이어받아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삶이 외롭거나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은 자신보다 더 큰 것의 일부이기 때문에, 나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문화적 확신이나 자신의 삶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은 결코 확고하지 않다. 종교적 신념은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으며, 자신이 더 큰 것의 일부에 속하며 이것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 역시 확실하지 않다. 신이나 내세에 대한 아이디어는 인간이 만든 허구이며, 자신이 이룬 것은 별볼일이 없으며 자신이 죽으면 모두 잊혀질 것이라는 생각이 수시로 떠오른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이땅에 사는 한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다. 권력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없애는 작업, 즉 영생을 추구하는 데 엄청나게 몰두했다. 그러나 생물학적 존재인 인간은 물리적으로 죽음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상징적인 영생을 추구할 수 있을 뿐. 그래서 사람들은 자식, 명예, 예술 등에 몰두하며, 이것이 잘 안되면 술, 마약, 섹스, 도박, 등으로 방종한 삶에 자신을 내던지며 인생의 근본적인 외로움과 허무를 잊으려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속한 집단과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는 쪽, 즉 보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이나 내가 따르지 않는 믿음과 규범의 존재는, 내가 속한 집단과 내가 따르는 질서와 가치를 위협하는 존재이며, 이는 내가 죽음을 극복하려 하는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들수록 타집단에 대해 더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을 옹호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극단적으로 정신병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적절하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두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죽음과 친숙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가급적 감추고 피하려 할 것이 아니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런 냉엄한 사실을 자주 인식하고 감정적으로 친숙해지라고 조언한다. 둘째는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완전한 의미는 자연 세계에서 찾을 수 없다. 우주와 자연 법칙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생물계에서 인간은 벌레나 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지구는 수많은 별 중 하나에 불과하다. 벌레와 개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인간의 영혼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인간의 삶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이 시점에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와 행위는 유의미하다. 아이들과 놀기, 예술 창작에 몰두하기, 신의 은총에 감복하기,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기, 등을 할 때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나마 내려놓는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며, 본인이 인지하건 하지 않건 간에 모든 사람의 삶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책의 첫머리에서 선언한다. 그러나 이 명제를 경험적으로 충분히 검증했는지 의심이 든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예시와 설명은 서구 기독교 문명권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수반하는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죽음이 끝이라는 사실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범신론적 세계관이나, 다른 생물과 인간을 대등하게 보는 불교의 세계관이나,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관심을 둘 뿐 죽은 다음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유교의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고통이 아닌 죽음 자체를 크게 두려워할 것 같지 않다. 비서구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면 조금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21. 10. 18. 17:20

Eric Klinenberg. 2012. Going Solo: the extraordinary rise and surprising appeal of living alone. Penguin books. 233 pages.

저자는 사회학자이며, 이 책은 300명 이상의 사례를 인터뷰한 연구 결과이다. 20세기 후반들어 혼자사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다. 미국에서 단독가구가 전체 가구수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65세 이상의 절반이 혼자 산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상반된 특성을 보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괜찮은 직업에 종사하면서 혼자사는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극도로 가난하고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20~30대의 왕성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한편에 있으며, 노년기에 배우자를 여의고 홀로 사는 사람들이 다른 편에 있다. 혼자사는 사람이 느는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텐데, 북유럽 사회와 같이 인구의 절반이 혼자사는 단계에까지 갈 수도 있다.

근래로 올수록 혼자사는 사람이 느는 것은 경제적 풍요의 결과이다. 과거에는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함께 살 수 밖에 없었으나, 극도로 가난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이제는 많은 사람이 개인의 소득과 사회복지 시스템의 덕택에 혼자 살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의 삶의 성취를 최우선하는 개인주의 가치관을 쫓아서, 사람들은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불행한 결합에서 벗어날 자유를 획득하였다. 사람들은 내키지 않는 상대와 결혼해야 하는 경제적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불행한 결혼을 끝내는 것을 주저치 않는다.

20세기 후반에 혼자사는 사람이 증가하는 원인은 다양하다. 첫째, 개인의 감정과 성취을 최우선하는 가치관의 확대, 둘째, 여성의 교육 수준 향상과 취업 확대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됨, 셋째, 도시 생활의 증가, 넷째,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쉽고 빈번해짐, 다섯째, 교육 기간이 늘고 수명이 연장되어 노년기가 느는 등으로 생애 주기가 바뀐 점.

혼자사는 사람이 증가하는 이유는 혼자사는 것이 꾀 할만하기 때문이다. 혼자산다고 하여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은 혼자 살면서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직장 생활에 바쁜 것은 물론이고, 일 이외에 여가생활에서 사람들과 많이 교제한다. 혼자 사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공간과 시간과 에너지를 마음대로 쓰는 자유를 누린다는 장점이 있다. 결혼 생활은 잘 되면 좋지만, 갈등할 때에는 혼자사는 것보다 못하다. 결혼한 사람이 혼자사는 사람보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더 좋다는 많은 연구 결과는 잘못된 비교이다. 왜냐하면 결혼했다 문제에 부딛쳐 이혼한 사람을 결혼한 사람의 표본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배우자와 함께 살기 때문에 혼자사는 것보다 더 건강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문제없이 지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결혼의 실용적 장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착각하고 말하는 것일 수있다.

젊은 시절은 물론이고 중년에 이르기까지 혼자사는 것은 살만하다. 그러나 노년이 되고 건강이 악화되어 가까운 사람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불안이 나이가 들수록 다가온다. 몸이 병들고 쇠약해져 타인의 도움을 일방적으로 필요로 할 때, 친구는 가족을 대체할 수 없다. 사람들은 거동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늦게까지 자신의 집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어한다. 미국인들은 양로원을 죽으러가는 곳이라고 인식하며, 실제로 양로원에서의 삶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만큼 열악하다. 부자들은 비싼 요금을 내고 반자립적인 생활을 제공하는 assisted home 에서 살기도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이것은 가능한 대안이 아니다.

앞으로 혼자 사는 사람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도심에 이들의 주거 수요을 충족하는 소형 주거의 아파트를 많이 공급해야 한다. 노인들이 생의 마지막 단계까지 자신의 집에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복지 서비스가 확대되어야 한다. 혼자사는 노인의 문제는 미국인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데, 노인들의 물질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도록 돕는 사회가 놓은 사회이다. 미국의 중류층 삶의 전형인 교외의 단독주택은 혼자사는 사람의 욕구와는 어긋남으로 앞으로 수요가 감소할 것이다.  

이 책은 혼자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서술하는 것으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혼자사는 것도 충분히 할만한 일이며, 이러한 선택의 자유를 뒷받침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메시지를 제시한다. 혼자사는 것이 결코 고립된 방식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결혼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혼자 살다가 때때로 같이 살기도 하고, 원하는 동안 함께 사는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이다. 저자는 이러한 방식의 삶이 일반화된 스웨덴을 이상적으로 그린다. 스웨덴은 빈부나 연령에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면 언제건 혼자살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하기에 혼자사는 방식이 조금도 이상할게 없는 사회라고 한다. 살다보면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고 서로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참으면서 계속 함께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옛사람의 말은, 살기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로 치부해야 한다. 인생은 한 번 뿐이므로 자유롭게 해보는 데까지 해보다 죽는게 더 나은 삶이다. 쉽게 읽어 내릴 수 있는 책이다.

2012. 4. 16. 21:37

   지하철을 타면 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각자의 세계 속에 몰입해 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은 눈이 어두운 노인이거나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사실 스마트폰을 산지 얼마 안되었기에 사용법을 익히고 새로운 앱을 시험해 보느라 바쁜 것은 이해한다. 나는 전철을 타면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 맞은편에 앉은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무슨 재미로 살까, 어떤 고민을 안고 헤메고 있나, 어떻게 저런 표정의 얼굴이 만들어졌을까, 젊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저사람은 과연 어떤 희망을 가졌을까, 여자는 남자와 어떻게 다를까, 등등 사람을 보면서 이모저모로 관찰하노라면 연민의 정이 느껴지고, 호기심이 피어오르고, 덧없다는 느낌도 들고,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Atlantic_Lonelyness.hwp



   페이스북 계정을 처음 만들면, 알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추천해 주어 친구를 맺게 한다. 오랫 동안 소식을 몰랐던 사람을 새삼 발견하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터넷 상의 접촉은 실제 대면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선뜻 연락을 취하지는 않는다. 페이스북의 관계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친구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아예 들어가 보지도 않는다. 내 페이스 북 계정에는 친구가 한명도 없다.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자주 휴대전화를 열어보고 이메일을 체크하는 것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누군가 찾아주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지만, 막상 상대와 접촉하면 왠지 불편해지는 것이 요즈음 사람의 심사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사람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개인주의적으로 된 것이다. 집단의 압력에 구속되던 상태에서 해방된 것까지는 좋은데, 의미있게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각자 자신의 틀을 지키면 서로 접촉하기가 조심스럽다. 상대가 쉽게 접근해 오면 나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 튀기고 싶은 변덕이 발동한다. 내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고 싶건만 막상 상대를 마주치면 왠지 상대의 못난 구석이 먼저 눈에 띠어 물러서 버리곤 한다. 나도 상대에게 그렇게 보일 것임을 알고, 나 자신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각자 자신의 것을 지키고 자신에게 충실하면 의미있는 무엇을 발견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 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삶의 울림을 찾지 못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라는 조언은 그릇되다. 아무래도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가장 감동을 받을 때는 남과의 연결 속에서 무엇을 할 때이었던 것 같다. 


   페이스북이 그렇게 많은 접속건수를 기록하지만 그것이 사람들 간의 직접적인 대면 관계를 대치하지는 못한다.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쏟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물론 둘 간에 인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외로운 사람이 인터넷에 더 몰두하기는 할 것이다. 인터넷을 많이 들여다보다 인터넷 세상으로 빠져든다는 환상은 매트릭스나 아바타와 같은 영화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 세컨드 라이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넷 속의 대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아직 인간의 진화 수준은 인터넷 가상 세계에서보다는 물리적으로 대면하는 관계 속의 삶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와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서로에게 구속되는 것을, 또한 상대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각자의 동굴 속에 머물러 있다. 인터넷이라는 제한된 통로를 통해 상대와 접하려고 하나,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별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 사회에 외로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으며 그들에게 대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직업이 번성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혼자만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선진국 사람들은 외로움이라는 비용을 비싸게 치른다. 가난한 나라에서라면 본인이 원치 않아도 항시 남과 부대껴야 하니 부자나라의 개인주의적 삶에는 양면성이 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면 그래도 선진국 사람의 개인주의적이며 외로운 삶이 집단의 압력에 이리저리 밀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나는 도저히 뗄 수없는 끈끈한 관계나 함께 망가져본 경험이 있는 허물없는 사이가 한편으로는 부럽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다. 일생 함께 점심을 같이해야 하는 직장 동료라는 말은 나에게 구속으로 다가올 뿐이다. 

   관계 맺는 일이 그렇게 힘들다니. 선진국 사람과 같이 제한적으로 또 계약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결코 그 관계가 편안해 질 수 없다. 하긴 나도 그리 관계 맺는 데 능한 사람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내식으로 살아가는 개인주의적인 삶이 편하기는 하다. 그래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끊임없이 남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나도 마음속 구석에 사람들과 관계 맺고자 하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게다. 나도 따지고 보면 외로움에 절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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