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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7. 12:58

Daniel Markovits. 2019. The Meritocracy Trap: How America's Foundational Myth feeds inequality, dismantles the middle class, and devours the elite. Penguin Press. 286 pages.

하바드 법대 교수인 저자가 미국 사회에서 지난 수십년간 진행된 성과중심주의적 사회 체제로 변화하는 경향을 비판한 사회비평서. 1980년대 이래 미국 사회는 뛰어난 성과를 내는 소수의 엘리트에게 엄청난 보상을 몰아주는 방향으로 개편되고 있다. 최상층의 소득은 빠르게 증가하였지만, 중류층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감소하였다. 소득 불평등은 급속히 높아졌으며, 상위 5~10%와 나머지 90% 사이에 사회적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이는 이차대전 이래 1970년대까지 상층은 물론 중류층과 하층의 소득도 꾸준히 향상되고 다수에게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되던 시절과 대조된다.

근래에 엄청난 소득을 누리는 엘리트는 1950년대까지의 상층과 성격이 다르다. 그들은 교육 수준이 매우 높으며, 고도의 기술을 갖추고, 엄청나게 열심히 일하고 엄격히 자기 통제를 한다. 그들은 일의 세계에서 높은 생산성을 창출해낸다. 미국의 고급 사립대학을 졸업하고 최고의 직장에서 일하며 미국의 기술혁신과 세계화와 경제성장을 선두에서 이끈다. 금융, 법, 의료, 연구개발, 대기업의 경영에 종사하며, 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고 본인이 가져가는 성과도 엄청나다. 대학을 졸업하고 초봉 연2~3억이 보통이며, 월스트리트에서는 성과급 보너스로 수십억에서 수백억을 챙긴다.

이렇게 높은 성과를 올리는 엘리트 계층에 진입하려면 무서울만큼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입시 경쟁을 방불할 정도로 이들은 유아시절에서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엄청난 경쟁을 이겨내고 천문학적 비용을 교육에 퍼붓는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이들은 자신의 소질이나 흥미는 무시한 채 일주에 50~80시간을 일한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대단하여 인간적이지 못한 삶을 산다. 이들은 일을 덜 하고 싶지만, 이들의 직장은 여유롭게 일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엄청난 경쟁속에서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노예나 다름없이 일을 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낙오되는 두가지 선택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엘리트와는 대조적으로 중류층은 소득이 정체되며 불안정한 직장에서 과거보다 일을 덜 한다. 엘리트 계층이 높은 기술을 구사하여 엄청나게 일하는 그늘에서 중류층은 단순 반복적인 일에 종사한다. 주요한 결정은 모두 엘리트 계층이 독차지 하기 때문에 중류층은 일에서 소외되며 해고와 채용이 용이한 조직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엘리트 계층이 높은 성과를 거두며 결정을 독차지 하는 반면, 중류층은 지시된 일을 하는 지위로 전락한 것은 정보기술의 발전에 힘입었다. 정보기술의 도움을 받아 엘리트들은 중간관리층을 거치지 않고 조직의 구석구석을 통제하며, 세계화 덕분에 이들의 고급 기술은 전세계 사업장에서 몇배나 많은 생산성으로 증폭된다.

엘리트 계층은 각자가 보유한 기술과 각자가 올린 성과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고 보상을 받는다고 하지만, 이들의 엘리트 지위는 세대간에 세습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 귀족 계층이 자식에게 재산을 직접 물려주는 방식으로 지위를 세습했다면, 요즘의 엘리트 계층은 엄청난 비용을 투입한 최고급 교육을 통해 높은 인적 자산을 축적하도록 해 고급 직업과 높은 지위를 획득하도록 하여 엘리트 지위를 세습한다.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엘리트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데 들이는 비용을 부모가 죽을 때 물려주는 유산 가치로 환산하면 8 ~16 백만달라, 한화로 90억 ~ 180억에 달한다. 요즘의 엘리트 부모가 고급 교육을 통해 자녀에게 엘리트 지위를 세습하는데 들이는 비용은 과거 귀족 계층이 자녀에게 물려준 재산 가치보다 결코 적지 않다.

저자는 책의 후반에서 성과주의는 과거에 귀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화라고 비판한다. 과거에 귀족이 선천적인 우수성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한다면, 성과주의 사회의 엘리트는 뛰어난 능력과 높은 생산성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귀족의 선천적인 우수성이 거짓이듯이, 엘리트의 뛰어난 능력과 높은 생산성 또한 거짓이다. 요즈음 엘리트의 뛰어난 능력은 그들의 부모의 엄청난 교육 투자가 만들어 낸 결과물에 불과하며, 그들의 높은 생산성은 높은 기술을 가진 사람만이 높은 생산성을 산출하도록 일의 세계를 조직하였기 때문이다. 중류층의 평범한 기술이 쓸모 없어지도록 일을 조직하지 않았다면, 엘리트의 기술 독점과 높은 생산성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과주의 체제가 문제가 많다면 이를 어떻게 불식시킬것인가? 소수의 엘리트를 만들어내는 사립학교를 규제해야 한다. 엘리트 학교들이 일정 비율 이상 중하층 출신의 자녀를 입학시키도록 규제하고, 소수 엘리트만 다니는 학교가 누리는 비영리 세금 감면 혜택을 중단해야 하며, 엘리트 학교의 등록금을 면세 조치하는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 높은 기술을 가진 엘리트에게 결정과 보상이 집중되도록 되어 있는 일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의료계에서는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의 영역을 넓히며, 의사가 아닌 간호사의 권한을 넓혀야 한다. 금융계에서는 복잡한 금융 상품이나 고위험 상품의 개발을 규제하여 보통 기술의 종사자가 담당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법조계에서는 변호사의 업무를 포괄적으로 법무 종사원에게 개방하여 법률 행위의 성과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구조 자체를 허물어뜨려야 한다. 기술 개발 분야에서는 아무런 제안이 없다.

이 책은 성과주의의 폐해에 대하여서는 길게 서술하지만, 그렇다면 성과주의의 대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짧게만 언급한다. 그가 제시한 대안들은 성과주의를 무력화시킬만큼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하간 높은 기술과 능력이 성장과 풍요를 낳은 것은 사실이지 않는가? 스티브 잡스의 기술이 오늘의 스마트폰 문화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80대 20의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80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20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보상을 지급한다면 인센티브 체계의 붕괴로 자본주의가 지속되지 못하고 기술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결국 공산주의의 말로를 똑같이 경험할 것이다.

저자는 소수의 엘리트가 그들이 누리는 높은 보상에 합당한 성과를 낸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대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일반 사원의 200배 이상의 성과를 내는지 의심스럽다. 금융기관의 딜러가 일반 사무직의 500배 이상의 성과, 혹은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는가? 잘나가는 변호사가 일반 사원의 500배의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는가? 그렇게 높은 보상이 과연 그의 높은 능력이 만들어낸 생산성의 반영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즉 그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며, 그의 높은 생산성은 그가 홀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능력이 떨어지거나 혹은 부모가 그만큼 교육에 투자하지 않았던 직원이 상당히 기여하여 함께 만들어 낸 것이라면, 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 금융기관의 딜러, 전문의, 대형 법률회사의 변호사가 그렇게 높은 보상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의사가 높은 보상을 받는 것은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거나, 의사로 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부족하거나, 의사가 특별히 더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다. 의사 직업에 진입하는 진입 장벽이 높이 쳐져 있으며, 의사의 서비스 가격을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통해 높은 수준으로 규제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바드 법대를 졸업한 사람이 초봉으로 수억을 받는 것은 하바드 법대를 나오면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하바드 법대라는 좁은 문이 졸업자에게 부여하는 독점적 시장가격 때문이다. 하바드 법대는 이러한 독점적 시장 가격을 관리하기 위해 학생수를 늘리기 보다 등록금을 높이고 기부금을 많이 받는 방식으로 독점의 프리미엄을 관리한다. 

이 책에서 엘리트들이 성과주의의 쳇바퀴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그의 주장 역시 의심스럽다. 그들은 그 생활을 선택했고 혜택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만일 그게 그렇게 지옥같은 생활이라면 왜 그들의 자녀에게 그러한 지위를 물려주려고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겠는가? 저자는 성과주의의 폐해에 대하여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반복적으로 서술한다. 예일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법대 교수인 자신의 삶이 빡빡하다는 데에 대해 궁시렁대는 소리처럼 들린다. 성과주의 이념을 대체할 것이 현재로는 보이지 않는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과가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보상한다는 원칙은 민주주의와 가장 잘 맞는다. 그 대안은 추첨에 따라 지위와 보상을 나누어준다는 것일터인데, 아직 사람들은 이러한 대안을 선택할만큰 성과주의의 부작용에 진저리를 내고 있지 않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양질의 교육 기회를 더 넒은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경쟁의 기회를 확대하여 성과주의의 혜택이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 성과주의 자체는 피곤한 것이 사실이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 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 않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연공서열이나 성과급을 반대하는 주장은 바로 성과주의를 피하고 싶어하는 기득권자들의 억지이다. 성과주의가 가장 공정한 원칙이라는 것이 시대의 소리며, 시간이 갈수록 성과주의가 더 확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