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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에 해당되는 글 4건
2023. 7. 3. 10:53

Eric Hoffer. 2002(1951). The True Believer: Thoughts on the Nature of Mass Movement. Harper Perennial. 168pages.

저자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막노동자로 일생을 지내면서 독학으로 책을 읽고 글을 써서 명성을 얻은 특이한 사람이다. 이 책은 그의 첫번째 책으로,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혁명적인 대중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서술한다. 왜 혁명적인 대중운동이 발생하고, 어떤 사람이 참가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대중운동이 시작되고 종결되는지 서술한다. 경험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 설명이 아니라 저자의 주관적 생각을 제시한다.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급진적인 사회운동은 궁핍과 좌절과 억압이 극에 달하는 저점에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혁명,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등이 발생하기 이전 한동안 사람들의 삶의 수준이 향상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수준이 올라가는데,  현실이 그에 미치지 못할 때 기존 질서를 뒤없는 사회혁명이 발생한다. 전제주의 정권의 억압이 굳건할 때에는 체제를 전복할 사회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전제주의 정권의 장악력이 떨어지는 시점, 즉 국민을 조금 풀어주는 시점에 급진적인 사회운동이 발생한다. 사람들이 먹고 살게 없다고 하여 혁명을 하지는 않는다. 극빈하면 일상의 생계를 확보하는 데 심리적 육체적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기 때문에 혁명에 참여할 여유가 없다. 소련의 스탈린 시절, 중국의 모택동 시절, 정책 실패로 수백만이 굶어 죽었지만, 정권의 장악력이 확고하였기 때문에 체제에 대한 반발이 유의미하게 형성되지 않았다.

급진적인 사회운동은 혁명의 이념과 목표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는 사람에 의해 추진된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여, 자신의 인생을 걸 대안을 찾는 사람들이다.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또 다른 부류는 현재의 질서에서 잘 맞지 않는 주변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삶에 실망하거나 현재의 질서에서 주변적인 사람은 현재의 질서를 뒤업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엄청난 열성을 보인다. 이들은 혁명을 방해할 어떠한 장애물도 부숴버리는 에너지를 발휘하는 광신도 fanetics 들이다. 자신의 삶에서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재의 삶에 무료해 하고 암담해 할 때, 사회를 뒤집어 업고 새 세상을 만든다는 이념과 목표에 쉽게 빠져든다. 이들은 혁명이 가져오는 혼란과 변화 그 자체에 희열을 느끼며, 막상 목표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다. 광신도들이 없다면 기존 질서를 뒤업는 작업이 수반하는 혼란과 폭력과 저항을 이겨내고 계속 나아가는 추진력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기 때문에 혁명은 실패한다. 

광신도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혁명적 이념에 엄청난 열정을 투입하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현재의 질서를 바꾸려는 사람은 계산적이기 때문에 추진력이 약하며 기득권의 저항과 역경을 이겨낼 수 없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새로 시작하려 하기보다 기존의 질서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선택을 한다. 자신의 일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사람들, 예컨대 지식인, 예술인이나, 자신의 가진 것 있는 사람들은, 외부의 이념에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을 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또한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혁명은 기존 체제에 대해 사람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야 발화가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지식인들은 새로운 이념과 대안을 제시하여,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공한다. 기존의 질서에 대한 불만만으로는 부족하며 대안에 대한 희망이 있어야만 혁명의 동력이 작동한다. 혁명의 시작은 지식인의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의 시작은 예수의 말이며, 볼셰비키 혁명의 시작은 맑스와 레닌의 말이며,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의 말이다. 사람들은 혁명적 이념이 제시하는 환상, 현실을 대치하는 대안에 대한 희망에 끌려서 혁명에 참여한다.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바꾼다는 희망, 자신을 일개 개인이 아니라 사회전체와 동일시하는 환상에 빠져서 자신을 희생한다. 이러한 희망과 환상에 모두 설득당하고 동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혁명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 광신자들은 사회전체의 이름으로 혁명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적으로 몰아 증오하며,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자를 억압하고 처단한다. 

폭력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려면, 혁명의 진행 단계에 따라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이 등장하여 제 몫을 하여야 한다. 혁명의 이념과 대안과 희망을 제시하는 지식인, 자신을 희생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부수고 혁명의 행동강령을 실천하는 광신도, 혁명 사업을 실행하고 조직을 관리하는 현실적인 실행인, 광신도와 실행인을 아우르고 이끌어가는 지도자, 혁명이 성공했을 때 뒤정리를 담당하며 혁명의 이념과 목표를 제도로 구체화시키는 관료, 등이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 실행인의 뒷받침을 받지 않고 광신도만으로는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 지도자가 없는 광신도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기존의 질서를 전복했을 때 현실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은데, 이를 새로운 질서, 새로운 제도로 정착시키는 일을 할 인재들이 필요하다. 이들이 없다면 혁명은 혼란으로 끝나게 된다. 혁명의 초기에는 광신도들이 중추적 역할을 하지만, 이들은 혁명 후반 제도화의 단계에는 오히려 정착을 반대하는 걸림돌이 된다. 이들은 안정을 원치 않고, 비현실적인 새로운 세상을 구축할 것을 계속 부르짖으며, 질서를 만들기보다 질서를 파괴하는 데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혁명은 오래 끌면 실패한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기피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변화보다 안정을 선호하기 때문에, 아무리 기존 질서에 문제가 많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웬만하면 참고 그대로 지내려 한다. 혁명적 변화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라는 충격에 짧게 노출되어야만 견딜 수 있다. 기존의 혁명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근본적으로 변한 부분도 있지만, 기존 질서의 대부분은 혁명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단기간의 혁명을 통해 기존의 질서에 균열이 가고 변화의 방향이 설정되면, 시간을 두고 충격의 여파가 퍼지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기독교의 탄생에서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300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16세기의 종교개혁이나,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혁명, 등도 혁명의 충격이 가시고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가 전개되었다.

저자는 특이한 이력답게, 글쓰기 방식이나 논지의 전개에서도 파격적이다. 다르다. 객관적 증거를 제시하거나, 기존의 논의 위에 자신의 주장을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오랜 경험과 반추의 결과물을 일방적으로 토해낸다. 주관적이고 선택적으로 추출하는 과장이 엿보이지만, 독창적인 신선함이 엿보인다. 다만 이 책에서는 혁명의 중요한 요소를 누락시키고 있다. 저자는 주로 개인의 심리적인 측면에서 혁명 참가자에 촛점을 맞추는데, 혁명은 사회구조적인 현상이다. 혁명의 원인은 혁명 참가자의 심리에 있기보다, 사회구조적 모순에 있다. 저자는 이부분을 처음에 약간 언급한다. 여하간 재미있게 읽었다.

2021. 8. 17. 22:36

Joseph Stiglitz. 2019. People, power, and profits: progressive capitalism for an age of discontent. 247 pages.

저자는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이며, 이 책은 미국의 문제를 진단하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한다. 미국은 극심한 불평등과 금권정치로 국민의 다수가 소외되어 있다. 1980년대 이래 세계화와 자동화 기술의 발전으로 교육수준이 낮은 노동계층의 삶이 어려워진 반면, 정치경제 엘리뜨들은 이들의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무관심하여,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 선동 정치인의 출현을 맞이했다. 저자는 극심한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며, 보통 사람들의 집단적 사회운동으로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자고 제안한다.

1980년대 이래 중류층의 소득은 정체된 반면, 상위 1%부자의 소득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서비스와 지식 중심의 경제가 도래하면서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들은 절망과 좌절 속에 마약과 진통제를 탐닉하면서 건강이 악화되고 수명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상위층으로의 소득 집중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대기업들이 경쟁 기업을 합병하면서 산업집중이 높아져 독과점 자본주의가 출현하였다. 자본가와 대기업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치를 매수하여 경쟁을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고, 이것이 다시 독과점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낳는다. 독과점이 심해지면 경쟁을 제한하고 혁신을 저해하여, 경제는 활력을 잃고, 경제성장은 둔화된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이래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세금을 축소하고, 규제를 철폐하고, 정부의 권한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정부가 쪼그라들었기에 독과점이 심해진 것이다. 세금과 복지지출을 통한 정부의 소득재분배 기능이 무력화되었기에 불평등은 악화일로이다. 2008년의 금융위기의 책임이 금융기관에 있는데, 이들의 지나치게 위험한 투자 행태의 실패를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주고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금융기관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돈을 흐르게 하는 원래의 역할에서 벗어나, 비생산적 투기를 통해 불로소득(rent)을 거두는 행위에 몰두함으로서 경제의 불안정을 높이고 악순환을 부추긴다. 공화당이 주도한 대법원에서 무제한하게 정치헌금 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1인 1표의 민주주의는 폐기되고 대신 1달러 1표의 금권주의 정치가 판치고 있다. 금권주의 정치는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의 영향을 확대시켜 게임의 규칙을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때문에, 정치에서 보통사람의 목소리는 소외되고 이들의 좌절은 깊어졌다. 이러한 절망적 환경에서 트럼프라는 대중영합주의 선동 정치인이 등장한 것이다.

첫번째 과제는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자본의 과도한 영향력을 통제해야 한다. 정치 자금의 투명성을 높이고, 선거 비용과 정치 헌금의 상한선을 설정하고, 정치인과 고위관료가 퇴직후 유관기관으로 취업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현재 미국인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데, 이러한 감정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개혁하는 사회운동을 추진해야 한다.

두번째 과제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기회를 공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계화로 일자리를 잃게된 사람들이 새로운 좋은 일자리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고용보험을 강화하고, 기술훈련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익히도록 하고, 양육지원을 하고, 노후한 사회기간시설을 재건해야 한다.  현재의 역진적 조세 체계를 공평하게 바로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부자와 기업들이 세금을 회피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헛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세번째 과제는 모든 사람에게 고상한 수준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공영 의료보험을 강화하고, 은퇴후 연금을 정부가 맡아서 관리하며, 정부가 보유한 개인 소득에 대한 자료를 활용해 모기지 제도을 저비용에 안정적으로 운용하여 자신이 사는 집을 소유하려는 보통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해야 한다. 교육의 질을 높여 세대간 계층이 세습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공립학교 교사의 보수를 높이고, 학생 1인당 재정의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공립학교 지원을 높여야 한다. 

이러한 모든 개혁을 하려면 정부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 미국은 19세기 말과 1920년대에 두차례나 기업의 독과점이 심하고 불평등이 매우 높아 위기를 맞이했으나, 시민들이 주도한 진보주의 운동(Progressive movement)과 뉴딜정책을 통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다. 저자는 또다시 시민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의 문제 분석은 그동안 많이 나왔던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관건인데, 저자는 현재의 제도권 정치는 자정 능력을 상실했으므로, 각성한 시민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을 통해 차근차근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점진적 무혈 혁명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 현실적 제안은 아니다.

미국인이 아닌 제삼자의 눈으로 볼 때, 미국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미국은 예외적인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문제가 갈수록 악화하고, 혼란이 자주 찾아오고, 경쟁국에 추월당하면서 삶이 어려워지고, 풍부한 자원 덕분에 그럭저럭 지내는 이류국가로 전락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미래 예측이다. 부자는 삼대는 간다 했으니, 앞으로도 한동안 미국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일 것이나, 안으로 썩어가는 방향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외국에 추월당하면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면서, 전쟁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복국가에서 출발한 미국은 현재도 매우 호전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혹은 저자의 진단이나 나의 인식에 심각한 오류가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미국이 그렇게 문제가 많다면 다른 선진산업국에 뒤져야 하는데, 미국은 여러 지표에서 다른 나라보다 훨씬 좋은 기록을 보인다. 미국은 기술, 비즈니스, 문화에서 혁신을 가장 많이 만들어 내며, 생산성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며, 거의 완전고용을 실현하고 있으며, 부를 가장 많이 창출하며, 선진국 중에서도 경제성장율이 가장 높으며, 인구 노령화를 걱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며, 전세계로부터 똑똑한 사람을 많이 받아들인다. 소득 불평등이 두드러지고, 아동 빈곤율이 높고, 범죄와 살인율이 높고, 형무소에 갖힌 사람의 비율이 매우 높고, 금권정치가 심한 것도 또한 사실이다.  요컨대 미국은 좋은 점 뿐만 아니라 나쁜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런 나라가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미성숙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건지 헷깔린다. 인간도 미성숙 단계에는 에너지가 넘치고 화려하지만, 반면 지나친 실수가 많고 결함도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에 미성숙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앞으로 100년쯤 후에야 어느 해석이 옳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2019. 9. 24. 14:43

Naomi Klein. 2009. No Logo. 10th anniversary edition. Picador. 458 pages.

이책은 1990년대 중후반에 걸쳐 공정무역 fair trade를 구호로 선진국 사회 전반에 퍼졌던 다국적 기업과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회운동의 배경과 전개 양상을 잘 서술한다. 책의 내용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에서는 다국적 기업들이 선진국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일을 개발도상국의 하청공장에 넘겨버리고, 대신 브랜드와 같이 상징과 이미지를 다루는 일에 집중하는 경향을 서술한다. 어떻게 브랜드를 관리하는 일이 다국적 소비재 기업 활동의 핵심이 되는지 다양한 예를 동원하여 상세히 설명한다. 후반부에서는 다국적 기업의 제품을 생산하는 개발도상국의 하청 공장에서 벌어지는 노동착취 행위에 대해 선진국 소비자들이 가두 데모나 불매운동 등으로 압박하여 그들을 굴복시키는 과정을 서술한다. 

저자는 나이키 스포츠 용구 회사를 대표적인 사례로 하여 상세히 설명한다.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는 운동화를 생산하는 일을 개발도상국의 하청공장에 넘기는 대신, 그의 회사는 나이키 브랜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사업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1990년대 중반 동남아에서 이들의 제품을 만드는 하청 공장에서 아동 노동, 억압적인 고용관행, 착취적인 저임금이 서구 매스컴에 보도되었다. 이는 1980년대 이래 선진국 회사들이 개발도상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실업이 늘어나고 불평등이 확대되는 등 서구에서 탈산업화가 동반한 문제와 짝을 이룬다. 세계화는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 전에 없던 많은 일자리를 가져다 주었지만 선진국 사람들의 눈에 그러한 일자리가 착취적 노동으로 비춘 것은 당연하다.

다국적 기업의 제품을 생산하는 개발도상국 공장의 착취적인 노동 상황에 대한 반발이 서구 사회에서 크게 탄력을 받은 것은, 기업의 윤리를 요구하는 소비자 운동의 측면과 함께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선진국 노동자들의 노동운동도 함께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공정무역 운동은 표면적으로는 개발도상국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운동이지만, 내면은 개발도상국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뺏긴데 대한 반발이다. 개발도상국의 경제수준으로 보면, 착취적 노동이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 낫다. 공정무역을 주장하며 세계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WTO 국제회의장에서 대규모 데모를 벌이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소비재를 취급하는 다국적 기업은 선진국 전반으로 퍼진 시민단체, 노동단체, 학생들의 불매 운동에 굴복하여 윤리 헌장을 도입하였으며, 개발도상국 공장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저자는 다국적 기업들이 브랜드 구축에 기업의 역량을 집중한 것이 바로 그들의 비윤리적 기업 행위에 대한 비판에 취약해진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한다. 1990년대 이전에도 기업은 비윤리적인 활동을 했으나 일반 시민들은 이를 응징할 수단이 제한되 있었다. 정치권은 대기업의 돈을 받고 그들의 편이었으므로 정부가 나서서 기업의 비윤리적 행위를 규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소비재를 취급하는 대기업이 제조 부문을 떨어버리고 브랜드를 가장 큰 기업의 가치로 만드는 순간, 그들은 소비자들의 비판에 취약해 진 것이다.

저자는 책의 끝부분에서 이러한 일반 시민의 저항이 이익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비윤리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다국적 기업의 행태에 얼마나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고 질문한다. 그러한 착취적 일자리가 지속되는 이유는 개발도상국의 빈곤에 있다. 착취적인 일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이상 그러한 일자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선진국에서 1990년대에 뜨겁게 전개됬던 공정무역 운동의 열기를 이제 선진국 사회에서 찾아볼수없다. 뒤돌아보면 1980년대 이래 세계화 과정에서 많은 저임금 일자리가 개발도상국으로 넘어온 덕분에 중국을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빈곤이 현저히 줄었고, 그것이 그 나라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를 하였다. 한국이 대표적인 예이며, 중국이 뒤를 잇고 있다. 공정무역 운동이 선진국 시민들에게 개발도상국의 비참한 삶의 현장에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 그들이 반대한 세계화가 바로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개선시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물론 그 와중에 다국적 기업과 선진국의 엘리트들이 크게 돈을 벌면서 부의 집중이 더 가속화되기는 했지만.

2000년에 이 책이 출간되고 크게 관심을 모았으며,  출간 10년을 기념하여 길게 쓴 후기를 덧붙였다. 그 후기에서 저자는 이 운동이 얼마나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고백하면서, 다국적 기업의 비윤리적 활동의 배경인 자본주의와 신보수주의 정책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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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30. 13:28

 요즈음 미국에서는 조셉 코니라는 사람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사람은 우간다의 군벌 두목으로 어린 아이들을 유괴해서 총을 쥐어준 뒤 이들을 조정해서 무차별적으로 만행을 저지르는 나쁜 인간이다. 아프리카에는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 사람이 새삼 유명해진 이유는 일군의 미국 젊은이들이 이 사람을 제거하여 아이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비디오를 만든 것이 엄청난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든 29분짜리 비디오가 유튜브에 지난 3월 5일에 올라온 이후 오늘까지 8천 6백만명이 시청을 하였다. 이 비디오에서 그들은 미국에서 행복하게 자라는 아이와 우간다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을 대비하면서 미국의 힘으로 코니를 잡아 정의를 바로세우자고 호소한다.


Atlantic_AmericanNationalism.hwp



  이 비디오를 만든 젊은이들은 우연히 우간다를 여행하다가 코니의 만행을 접하고 8년전에 “보이지 않는 어린이”(Invisible Children inc.)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동안 주로 참상을 고발하는 영상물을 만들어 퍼뜨리면서 모금활동을 하고 미국 정부에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미국 정부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만든 영상물이 인터넷을 통해 크게 호응을 얻고 주요 언론에서 이 비디오의 경이로운 성과를 보도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정치인을 움직여 중앙아프리카에 100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코니의 만행을 중단시키도록 미국 정부가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번 비디오에서는 다가오는 4월 20일을 D-day로 잡고 미국 젊은이들이 궐기하여 세상을 바꾸자고 호소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인터넷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다. 한 달도 못되는 사이에 8천만 명이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마침내 정치인조차 이들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이 젊은이들의 활동에 대해 식자층의 의견은 찬반으로 나뉜다. 소위 힙스터라 지칭되는 미국 중상류층 젊은이들의 치기어린 활동이 아프리카의 어린이에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회의를 표하는 사람이 많다. 반면 자신의 일상사와 관련이 없는 세계 반대쪽에 사는 사람의 고통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미국의 숭고한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는 양쪽의 주장 모두에 공감한다. 코니가 어린 아이를 유괴해서 총질하게 만드는 것의 원인은 빈곤과 교육 부족에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코니를 잡는다고 해도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 어린아이를 착취해서 나쁜 일을 할 것이다. 교육 받지 못하고 먹을 것이 없고 질병의 위협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먹을 것을 주면서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나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죽음이 바로 곁에 있기에 남을 착취하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사람이나 남을 죽이는 사람이나 큰 일이 아니다. 기아와 질병이 가져오는 죽음의 위협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을 제대로 교육받도록 하고, 그들에게 일자리를 준다면 그들도 앞날을 개척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 것이며 남의 생명을 존중할 것이다. 요컨대 서구인이 누리는 문명의 혜택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프리카인이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름길이지, 군벌 한명을 추적하여 사살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젊은이들의 일시적인 관심에 눌려서 아프리카 한가운데 100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했지만 그들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 듯하다. 아프리카 중앙지대는 미국의 이해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중동이나 아시아와는 달리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국인은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 젊은이들의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신의 이해와 무관한 대의를 위해 오래 일하기는 힘들다. 이 단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지금까지 모금된 돈의 대부분을 비디오를 제작하는 데 썼을 뿐 실제 아프리카의 고통 받는 어린이의 복리를 향상시키는 데 쓴 돈은 쥐꼬리 만큼이라고 비판한다. 이 젊은이들이 비디오를 통해 유명해지고 모금으로 거둔 돈을 자신들의 활동비로 쓰면서 끝날 가능성은 다분히 크다. 아프리카인의 비참을 이용하여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명성을 추구하는 얄팍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는 이유는, 잘 먹고 편히 사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웃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찌되었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활동에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미국의 중상류층 백인 젊은이들은 아프리카도 좋지만 자신의 나라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흑인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거리 하나만 건너면 비참한 지경에서 살아가는 흑인이 얼마나 많은가? 미국 흑인 남성 셋 중 하나는 감옥에 가는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이웃의 병원비를 내 돈으로 내서는 절대 안된다고 외치면서 전국민의료보험을 반대하는 것이 미국인이 아닌가? 미국에서 정의가 바로 선다면 많은 나라들이 미국을 뒤따라서 좋게 바꾸지 않을까? 나는 우리 사회의 나쁜 면이 부분적으로 미국의 나쁜 측면만을 본받아서 그리되지 않았나 의심을 할 때도 있다. 미국은 이러저러하다고 아는체 하는  식자층에게 미국에서 비참한 사람들의 삶을 당신이 아느냐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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