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iot Liebow. 2003(1967). Tally's Corner: A Study of Negro Streetcorner Men. Rowman & Littlefield. 166 pages.
사회인류학자인 저자가 흑인 남자들의 삶에 대해 일년 반 동안 참여관찰한 결과를 기록한 책.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으로 출간된 것으로, 참여관찰 방법론 분야의 고전으로 지목되며, 나온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가난한 흑인의 삶에 대해 언급할 때 종종 인용되는 놀라운 책이다. 워싱턴시의 흑인 슬럼가 길모퉁이에 정기적으로 매일 모이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일의 세계, 부모와 자식관계, 남편과 아내관계, 연인 관계, 친구 관계를 시시콜콜 묘사하면서 저자의 생각을 덧붙여 해석을 내린다.
도심의 빈곤지역에 사는 흑인 남성은 일의 세계에서 실패하고 사회의 생존 경쟁에서 낙오한 루저(loser)이다.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중학교를 다녔다 해도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며, 변변한 기술이 없는데다 흑인이기 때문에 일생 안정된 직업을 가져보지 못했다. 접시닦이, 청소부, 건설 막노동자, 등 걸리는 대로 일을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일을 찾지 않는다. 그들을 고용하는 사람에게 그들이 하찮은 존재이듯이, 그들에게도 일이란 별볼일 없는 것이다. 그들은 책임이 따르는 일을 해본 적이 없으며, 툇짜 맞고 패배한 경험을 숫하게 하면서 자신감을 상실했다. 기분에 따라 일을 그만두며, 돈이 긴급히 필요하면 아무 일이나 걸리는 대로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고되고, 보수가 작고,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며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고, 불안정한 것이기에, 그들에게도 그러한 일이란 짧게 급한 돈을 쥐는 용도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한 일을 마음을 바쳐 성실하게 해야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현재의 만족을 우선시하는 삶을 산다. 다가올 내일이 별 볼일 없으리라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당장 기분이 좋지 않으면 어제까지 나가던 일도 중단하며, 돈이 생기면 술이나 도박으로 써버린다. 그들은 자기 절제를 하고 저축을 하면 지금까지와 다른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의 부모의 삶을 통해, 또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에는 기대할만한 것이 없다고 느낀다. 숫한 실망과 수치와 패배와 버려짐을 거치면서 무엇하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할 수없는 수동적인 삶이 엮여진 것이다.
흑인 남성은 그들의 자녀와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자녀는 대체로 엄마와 같이 살며 그들과 같이 살지 않는다. 그들이 가족의 생계부양자 역할을 제대로 할 수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인과 자녀를 버리는 것과 부인이 그들을 내쫒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맞는지 구별할 수 없다. 그들의 자녀의 엄마는 때때로 자녀를 데리고 그들을 방문하여 돈을 타가지만, 여러해 동안 자녀를 전혀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흑인 남성과 자녀간의 관계는 흑인 남성과 자녀의 엄마와의 관계에 좌우된다. 흑인 남성이 자녀의 엄마와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만 자녀와의 관계가 지속된다. 그들의 삶에서 자녀란 그리 큰 비중을 차지 하지 않는다. 남자로서 씨를 뿌린 결과 자녀가 태어났지만, 그들은 자녀의 양육에 간여하지 않기에 자녀또한 그들의 생물학적 아버지와 정서적 유대가 없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아버지와는 사실상 남남이 된다. 그들이 비정한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녀의 양육을 재정적으로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부자간의 관계를 포기한 것이다.
흑인 남성들또한 중류층과 마찬가지로 결혼의 책임과 의무를 소중히 여긴다. 살림을 차리는 관계와 결혼을 한 사이는 그들의 세계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그들은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권리와 책임을 지고 싶어하며, 그들의 여자친구 또한 그러한 관계를 꿈꾼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결혼을 하지 못하거나 결혼을 해도 얼마 오래가지 못한다. 그들이 가장으로서 제대로 밥을 벌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은 갈등의 연속이며 그러한 긴장을 오래 지탱해 낼 수 없다.
그들과 여자친구의 관계는 일시적 성적 대상에서부터 완전히 마음을 준 연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들의 여자친구는 성적 욕구 충족의 대상이며 그들로부터 돈을 갈취 당하는 피해자이다. 그러나 연인관계와 착취 관계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들은 남성은 본래 한 여성에 만족할 수없는 동물적 존재라고 자신의 무책임한 여성 편력을 변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특정 여성에 대한 애착이 단순히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 위한 것은 아님을 그들의 대화 속에서 드러낸다. 그들은 생계를 이어가는 데 필요한 돈이 항시 부족하고 수시로 위기에 봉착하기때문에, 그들의 여성과의 관계는 안정적일 수 없다. 잘 지내는 듯하다가 어느날 심각하게 싸우고 헤어지며, 한동안 안보다가 다시 만나 같이 산다. 여성의 입장에서도 그들의 남성은 감정적 욕구를 채우는 대상이며, 힘들 때 의지할 보호막이며 , 때로는 자신을 착취하는 존재이다. 그들의 삶에서 남녀 관계는 항시 불안정하면서 의존적이고, 서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괴롭히면서도, 삶의 무의미함을 이겨내는 수단이다.
흑인 남성들 사이에 친구 관계는 가까운 듯하지만 피상적이며 느슨하다. 그들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에서도 돈문제나 여자 문제로 다툼을 벌이고 헤어지며, 서로 과거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다. 가까운 친구간에는 서로의 여자친구를 건드리지 않은 불문율이 있으며, 서로 어려우면 도움을 주고 받지만, 진짜 어려울 때에는 자신의 문제를 각자 챙겨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가진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서로 돕는데 한계가 있고, 수시로 어려움과 위기에 봉착하기에 그들의 관계는 수시로 변하며 잠정적이다. 그럼에도 서로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매일 길모퉁이에 모여 잡담을 하고 시간을 보내며 감정적으로 의지한다. 그들은 밖에 사회에서 버림받은 쓰라림과 수치심을 마음 속에 품은 채, 서로 잡담을 하고 장난을 치면서 자존심에 난 상처를 위로한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빈곤의 문화'(culture of poverty) 이론을 반박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중류층과는 다른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주장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는 그들의 불안정한 환경과 빈약한 자원 때문이다. 그들도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책임있게 일 하고 싶지만, 그들에게 이러한 삶이란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어렵게 자라나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주위에 의지할 사람이나, 길을 이끌어 줄 사람이나, 닮을만한 롤모델이 없으며, 가진 것이 전혀 없다. 그들은 흑인 남성이기에 사회에서 차별당하고 배척되며,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살려 해도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건설현장의 막노동을 하려 해도, 수입이 좋고 안정된 일은 노조에 가입해야 하며,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진 곳은 보수가 낮거나 불안정하거나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힘든 곳 뿐이다.
책의 부록에서 저자가 어떻게 현지 참여관찰을 하게 됬는지 설명한다. 저자는 워싱턴 빈민가에서 잡화점을 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흑인들의 삶에 친숙했다. 저자가 이 연구를 위해 흑인 빈민지역으로 걸어들어간 첫날 거리에서 벌어진 조그만 사건을 구경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길 모퉁이에 모여 이야기 하는 흑인의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고, 그들의 어려움에 우연히 도움을 주는 계기를 가지고, 이러한 일이 수주 동안 쌓이면서 그들의 가까운 친구로 받아들여진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나는 대로 길 모퉁이 모임에 참여하고, 잡담을 하고 술을 함께 마시고, 그들의 집에 찾아가고, 함께 놀러가고, 이런 생활을 일년 반 동안 했다. 길모퉁이의 흑인들은 저자가 백인 대학졸업자로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자원을 이용하기도 하고 함께 어울리면서 그들의 삶에 감정적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1990년대 중반 저자가 암으로 죽을 때까지 이들과 연락을 지속했다고 한다.
놀라운 책이다. 객관적 시각에서 그들의 삶을 서술한 기록물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삶에 대해 따뜻한 감수성을 느끼게 하는 문학 작품이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그리는 사람들의 삶이 머리 속에 그려지며, 저자의 해석에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만, 그들의 삶의 표면 밑을 흐르는 슬픔과 소외감을 감지한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대등한 눈높이에서 그렇게 따뜻한 이해심을 갖기란 힘들다. 저자의 공감능력이 부럽다. 이 글을 읽으면서 흑인 남성의 삶에 동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고, 나도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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