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369)
미국 사정 (22)
세계의 창 (25)
잡동사니 (26)
과일나무 (285)
사과나무 (51)
감나무 (41)
모과나무 (51)
호두나무 (41)
살구나무 (50)
체리나무 (51)
배나무 (10)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과일나무/살구나무'에 해당되는 글 50건
2023. 3. 2. 17:47

Robert Greene. 2018. The Laws of Human Nature. Viking. 586 pages.

저자는 잘 나가는 자기개발서 작가이며, 이 책은 인간 본성의 약점은 무엇이며, 왜 그런 문제가 발생하며, 이를 극복하고 이용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각 장은 인간 본성의 문제를 하나씩 격파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각장의 서술은 일률적으로 패턴에 따라 전개된다. 먼저 간단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왜 일이 그렇게 전개되었는지 진단을 내린다. 다음으로, 관련된 인간 본성의 문제가 무엇인지일반화의 맥락에서 서술하고,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지목하고, 최종적으로는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스스로 극복하며, 상대가 보이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이용할지 서술한다.

저자가 파악한 인간본성의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18개장에서 각각을 다루는데 많은 부분이 겹친다. 인간은 감정에 따라 비이성적으로 움직인다. 자기 중심적이다. 대외적으로 마스크쓰고 있다. 때때로 충동에 휩싸인다. 욕망한다. 단견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다. 자기 방어를 한다. 내부의 어두운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 타인을 질투한다. 자신에 대해 과대망상증이 있다. 목적 없이 살아간다. 집단 압력에 순응한다. 공격 성향을 가지고 있다. 등등.

이러한 인간 본성의 약점/문제들은 유전적인 성향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는 어렸을 때 부모와의 경험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이러한 문제의 존재를 파악해야 한다. 조용히 물러나 자신과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관찰을 하면 이런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자신을 모니터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 고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심하게 가진 타인을 대할 때에는, 그에게 휘말리지 않도록 경계하고 거리를 두는게 좋다.

저자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추종한다. 인간 본성의 문제들은 스스로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에 있으며, 어릴때 부모와의 경험이 이러한 문제의 결정적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고치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정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는 관점을 바꾼다면 문제를 역이용하여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전형적인 자기개발서의 공식을 따른다. 먼저 문제를 인식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면 고칠 수 있으며, 나아가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많은 인간의 문제들은 환경의 산물이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그것에 헌신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목적 없이 닥치는 대로 대응하며 살아간다. 인생의 목적은 스스로 만들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동일한 논리와 피상적이고 유사한 서술을 반복하여, 정말 읽기 어려웠다.

2023. 2. 27. 10:52

Binyamin Appelbaum. 2019. The Economists' Hour: False prophets, free markets, and the fracture of society. Little, Brown and Company. 332 pages.

저자는 기자이며, 이 책은 1960년대 이후 최근까지 경제학자가 미국의 정책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서술한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케인즈의 이론, 즉 정부가 적극적 재정 확장을 통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론은 1960년대 이후 시장주의, 즉 경제는 시장 자율에 맡기고 정부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론에 의해 대체된다.  20세기초까지 정부의 정책 형성에서 경제학자의 역할은 미미했으나, 1960년대 이래 경제학자의 영향은 꾸준히 확대되었다.

1970년대에 미국은 극심한 경기침체와 인플레가 결합된 어려움 속에서 시장주의 노선을 택하게 된다. 그때까지 경제 전반에 지배했던 규제를 폐지하고 시장경쟁에 의해 생산성을 높이고 실업율을 줄이는 전략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가속화된다. 대규모의 세금 철폐를 통해 투자를 촉진한다는 공급경제학 이론이 등장했으며, 노조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복지 지출을 감축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80년대에 경기를 진작시키는데 기여했으나, 노동자의 임금이 정체되고 불평등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1980년대 이래 환경과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대기업의 시장 독점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정부의 규제 강도와 범위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때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규제에 대한 비용손익분석을 실시하여, 경제적 이해에 따라 규제의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 관행을 정착시켰다. 이러한 접근의 문제는 경제적 이해와 사회적 정의는 반드시 함께 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조치가 아무리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더라도, 인간의 기본적 가치를 훼손하거나 형평의 원칙에 위배될 경우, 과연 이를 추진하는 것이 타당한가는 의문이다. 비용손익분석의 두번째 문제는, 앞으로 발생할 상황에 대해 비용손익을 분석하는 것은 객관적인듯 하지만 주관적인 요소를 내포한다는 점이다. 구성 요인에 대해 어떤 가정을 하고 어떻게 가중치를 두느냐에 따라 분석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극심한 인플레에 대처하기 위해 통화량을 줄여야 한다는 통화주의자(moneterist)의 이론이 설득력을 얻었다. 실업율이 어느 정도 올라가더라도 인플레를 잡는 것이 우선이라는 통화주의자의 믿음은 카터 대통령이 임명한 폴 볼커 연방지준은행장을 통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이후 중앙은행은 정부와는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국채를 대량으로 매각/매입하거나 시중은행에 대한 지준율을 조정함으로서 통화량을 조절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이는 케인즈 이론에 따른 정부의 확장/긴축 재정정책과 함께 정부가 경제를 관리하는 중요한 정책도구로 자리잡았다.

1970년대 초에 미국은 2차 대전 이래 유지했던 금본위제도를 폐지하고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한다. 이후 레이건 대통령 시절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를 풀면서, 90년대 초반 저축은행의 대규모 부실 파동을 겪고, 2008년 대규모 금융위기를 겪었다. 이는 모두 금융기관의 무모할 정도로 위험한 투자와 대출 행태가 빚어낸 파국이다. 정부는 그들의 무모함에 대해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정부가 손실을 떠안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때 경제학자들은 어떤 조치가 해당 행위의 결과에 더하여 그와 연관된 사태에 미치는 영향(collateral effects)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면서, 시장 자율에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나서서 금융위기를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미국과 세계에는 시장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화가 전개되고, 생산성이 높아지고, 전반적으로 소득이 높아졌지만, 불평등이 확대되고, 대기업의 독과점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제조업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노동자의 임금이 정체하고, 제조업 대신 확대된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를 이민자로 채우면서, 이민자를 배격하는 파퓰리즘이 득세하였다. 이제 정치와 정부 정책에서 경제학자의 역할은 핵심 요소가 되었다.

이 책은 기자의 시각에서 다양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근래 미국의 정치경제 상황의 전개를 서술한다. 이는 학자들이 분석적, 체계적으로 사안을 접근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특정 사안에 대해 경제학자의 의견이, 그 당시 다른 관련 요인들과 비교할 때,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하는 식으로 체계적 논의를 기대했는데, 약간 실망했다. 시장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담겨있지 않아 진부하다. 어느 경제학자가 기르고 있는 고양이의 이름, 젊을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 특이한 냉소적 발언, 등 수많은 사소한 서술은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엄청나게 많은 고유명사가 등장하여 읽는데 애먹었다.

2023. 2. 21. 15:46

William McNeill. 1982. The Pursuit of Power: Technology, Armed Forces, and Society since AD. 1000.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87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서기 1,000년대 이래 무력과 전쟁 기술이 세계 역사의 전개에서 차지한 역할을 상세히 서술한다.

농업을 통해 자급자족의 수준을 넘어선 잉여가 생산되면서,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도시 인구와 정치 집단이 출현하였다.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댓가로 보호금을 갈취하는 시스템(protection racket)이 등장했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언제 드리닥칠지 모르는 폭력 집단에 의해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당하는 것보다는, 세금이라는 형태의 안정된 갈취를 당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에, 사람들은 국가라는 조직된 폭력 집단의 지배를 수용하였다. 폭력집단의 입장에서도, 예기치 못한 위험을 수반하며 불확실한 규모의 수입을 얻는 비조직적 약탈보다는, 조직적 폭력을 기반으로 안정된 지배 체제를 통해 생산자를 착취하는 편이 상대적으로 적은 위험으로 더 많은 수입을 가능케 하기에 국가체제를 수용하였다. 즉 폭력을 기반으로 한 안정된 지배체제인 국가는 어느 다른 폭력 집단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모두에게 더 많은 소득과 안정을 제공한다.

전 역사를 통틀어 사회 체제를 크게 두 범주, 즉 중앙의 계획과 위계적 명령을 통해 모든 경제 사회 활동이 운용되는 명령체제(command system)와, 다수의 개인이 참여하여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시장기구에 의해 경제 사회활동이 운용되는 시장체제(market system)로 구분할 수 있다. 공산주의,  중국의 관료적 권위주의, 프랑스의 절대왕정, 독일과 일본의 나찌/군부의 통제 등이 명령체제에 속하며, 자본주의,  개인주의적 시장 경쟁, 영국의 자유주의, 등이 시장체제에 속한다.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과 현재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명령체제가 지배하는 반면, 시장체제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작은 규모로 전개되고,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한 독특한 체제이다.

중국은 1500년경까지 생산성이나 군사력에서 서구를 크게 앞섰다. 중국에는 일찌감치 중앙집권 체제가 자리잡았다. 외부의 위협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내부에서도 지역간 경쟁이 심하지 않았으므로, 무인 세력은 관료나 문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다. 중국의 유교이념은 인문을 숭상하고 윗사람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반면, 무력이나 상공업은 천시하였다. 중국에서는 서구와 달리 무력 집단과 상공인이 연결되지 않았다. 상인은 독자적 권력을 갖지 못해 관료에 의해 재산을 뺏길 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이익을 재투자하여 사업을 번성시킴으로서 부를 늘이기보다는 관료로 갈아타려고 노력하였다. 무인들 역시 상인과 결탁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 권력을 장악하기보다 관료로 갈아타려고 노력하였다. 요컨대 중국의 유교문화권에서는 무기와 전쟁 기술이 발전할 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며, 그 결과 무력의 발전은 정체되었다.

서구에서는 1200년경 북이탈리아의 소규모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무기와 전쟁기술을 발전시키는 움직임이 펼쳐졌다. 도시국가는 주위의 폭력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용병을 고용하였고, 상인이 내는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유래된 화약은 서구에서 총포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서구유럽에서 왕이 봉건 제후를 제압하면서 무력 동원의 규모를 키웠으며, 왕들 간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하는 가운데 무기와 전쟁 기술 수준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1,400년경 대양을 항해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럽의 무력 각축장은 지중해로부터 대서양 연안으로 이동하였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이 무력 수준에서 강국으로 올라섰으며 ,유럽 무대에서는 물론 전세계의 식민지 쟁탈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서구 열강들이 유럽 무대에서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무기와 전쟁 기술 수준이 나날이 향상된 반면, 중국, 아메리카, 중동, 인도 등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무력의 발전이 정체되어 있었으므로, 전쟁에서 유럽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1,400년대 후반 대양을 통한 서구의 확장이 본격화되었을 때, 비서구 지역 사람들은 이들의 침략에 맞서 참혹하게 패배하였으며, 결국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서구 열강들 사이의 경쟁은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제압하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높은 비용을 수반하는 해전에서 영국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차례로 제압하였다. 영국은 시장체제를 발전시켜 금융가를 통해 전쟁에 필요한 비용을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조달할 수 있었던 반면, 스페인과 프랑스는 명령체제의 경직성과 비효율 때문에 전비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으며 높은 비용을 수반했다.

서구에서는 13세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부터 무력과 상공업이 서로 연결되어 상승적으로 발전하는 전통이 뿌리내렸다. 무력 집단은 상공인의 부를 이용하여 무력을 확장하였고, 상공인은 무력 집단의 힘을 등에 업고 상공업 활동을 확대하였다. 국가의 무력이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해외에서는 폭력을 동원한 약탈과 상업적 거래의 경계가 모호하였다. 국가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해적 내지 무역상의 활동을 묵인하거나 장려하였다. 서구의 식민지 쟁탈 경쟁은 국가의 무력과 상업적 이익이 결탁하여 전개한 프로젝트였다.

전쟁을 치르려면 거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력집단은 상공인과 어떤 형태로건 연결을 맺지 않고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서구에서는 국가들 사이에 무기 기술이 경쟁적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상공인의 우수한 무기 제조능력은 국가의 무력 경쟁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무력집단과 상공인간의 밀접한 관계는,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 모두, 기계적 우수성을 다투는 첨단 무기 개발 경쟁이 심화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무기 기술이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신무기를 개발하려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고, 더 많은 연구자가 관여해야 하고, 더 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진행해야 하는 상황은, 20세기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에서  최고조에 달하였다.  소위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가 완벽하게 형성된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탄생한 프랑스 군은 군대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평민을 대거 징집하여 전쟁에 투입하였으며, 전투 능력과 업적을 기준으로 군의 위계를 조직하였다. 징집된 평민들은 혁명으로 탄생한 모국의 사활을 책임진다는 사명감과 함께 전쟁에서 뛰어난 업적을 거두어 국민적 영웅이 되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나폴레옹이 이끈 전쟁에 헌신적으로 임하였다. 그때까지 유럽의 지배자들은 평민들의 반역을 우려해 자국민보다 외국인 용병을 선호하였으며,  사회의 상층 계급이 개인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군의 지위권을 차지하는 관행을 유지하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러한 전통적 군대를 전쟁에서 완전히 제압하므로서 새로운 군의 개념을 서유럽에 확산시켰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군의 무기체계와 전쟁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증기기관 덕분에 운송의 제약이 사라지면서 전쟁의 폭과 규모는, 과거 말과 마차에 의존할 때보다 훨씬 더 넓고 커졌다. 과거에는 전쟁을 치를 때 식량과 군수물자의 조달이 가장 큰 제약요인이었는데, 19세기 증기기관 철도와 20세기초 자동차는 이러한 제약을 완화시켰다. 군의 대규모 조달 물량은 산업혁명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새로운 기술이 생산에 적용될 초기에는 상업적 성공이 불확실한데, 군은 상업적 이해타산을 넘어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생산품의 수요를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계속된 전쟁은 인구 폭증의 압력으로 초래되는 사회불안을 피하는 효과적 방편으로 작용하였다. 18세기 유럽의 인구 폭증은 기존의 농업 생산성을 넘어서는 규모였는데, 19세기 초 유럽을 휩쓴 전쟁은 수백만의 젊은이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였으며, 잉여 인력의 상당수를 전장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20세기에 벌어진 제1,2차 세계 대전 역시 19세기의 인구 폭증 문제에 대해 동일한 효과를 가져왔다. 거꾸로, 인구 폭증으로 인하여 사회불안 요소가 커지고, 이것이 전쟁으로 이끌었다고 인과관계를 추리할 수도 있다. 유럽, 특히 스페인, 영국은 자국의 잉여 인구를 식민지에 수출함으로서 인구 폭증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도 해외 혹은 시베리아로의 이민을 통해 인구 폭증 문제를 해결하였다. 반면 프랑스는 일찌감치 19세기 초에 출생율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에 인구폭증의 문제를 피해갈 수 있었다.

전쟁은 기존의 관행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턴을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기득권 집단이 기존의 관행을 고집하다가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기존의 관행을 버리고 상대국이 실행하는 새로운 패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전쟁이 빈발하면서 서유럽 국가들 서로간에 기존의 관행을 버리고 보다 효율적인 새로운 관행을 경쟁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비효율적인 낡은 관행과 기득권을 고집하다가는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산업혁명 초기에 기존의 장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고집하며 변화를 거부하였는데, 19세기초 유럽을 휩쓴 전쟁은 소위 '미국식 생산방식(American Production system)'이라 일컬어지던 기계를 이용한 표준화된 대량생산 방식을 무기 생산에 도입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전쟁이후 민간물품의 생산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또한 전국의 농촌 벽지로부터 전쟁에 동원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후 과거 전통사회의 관습을 버리고 도시적 합리적 행위 규범을 따르게 되었다. 

군과 민간 활동은 서로 영향을 교환하였다. 예컨대, 19세기 이래 서구 유럽에서는 전쟁을 치르기 위해 대규모의 인원과 물자의 생산과 배치를 담당하는 사람을 민간 대기업의 경영자 중에서 구했다. 대규모 전쟁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인원과 물자를 조달하고 관리하는 일은 매우 합리적인 경영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전후 민간의 대기업 경영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동양과 비교해 유럽에서 무력이 크게 발전한 것은 여러 지역으로 차단된 지형적 원인과 함께, 농경이 아니라 유목을 생업으로 한 것에서도 부분적으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유목은 생명 살상을 일상적으로 하며, 특히 겨울이 다가오면 많은 가축을 일시에 죽이는 관행이 지배하였다. 중국의 논농사와 달리 유목은 좁은 지역에서 많은 인구를 먹여살릴 수 없으므로, 인구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오는 전쟁이 서구에서 더 자주 벌어졌다. 중국의 논농사는 중앙집권의 권력이 농사에 필수적인 치수를 관리하였으며, 농사꾼은 자신의 땅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중앙의 권력에 순종하였다. 동양의 집단주의적 가치나, 무력과 상공업을 경시하고 권위주의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는 이러한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반면 수시로 이동하는 유목민들은 중앙의 권력에 쉽게 반항하며, 서로간 생존을 위한 무력 투쟁도 불사함으로, 서구에서는 개인주의적 가치가 강조되고 집단간 무력 경쟁의 릴레이가 전개된 것이다.

저자는 전쟁과 무력 활동을 도외시한 역사 서술은 피상적이라고 주장한다. 인류의 시작에서부터 집단적인 무력 행사는 인간 사회의 핵심을 차지한다. 무력을 어떻게 관리하고 경쟁하는지는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전쟁의 승패 위험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세계의 역사와 사회의 전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만든다.

 

2023. 2. 15. 17:11

Laszlo Bock. 2015. Work Rules!: Insights from inside Google that will transform how you live and lead. Twelve. 365 pages.

저자는 구글의 인사관리 부문의 책임자이며, 이 책은 구글에서 인사관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설명한다.

구글은 사원들에게 일의 내재적 가치를 강조한다. 돈이나 지위와 같은 외재적 보상(external reward)보다 사원 개개인이 느끼는 일의 보람, 즉 내재적 보상(internal reward)을 중시한다. 자신의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조직에 헌신한다.

구글은 사원들 간 지위의 차이를 최소화하며, 직급간 외면적 구별을 없앴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같은 식당을 이용하는 등등. 회사에서 전개되는 모든 일들을 구성원이 알 수 있도록 투명하게 공개한다. 상급자와 하급자가 동일하게 정보를 공유함으로서 사원들 모두가 회사에 헌신도를 높이며 공정한 일처리를 유도한다. 누구라도 의견이 있으면 주저없이 제시하고, 그러한 의견이 무시되지 않고 진지하게 검토하며, 의견을 제시한 사람에게 결과가 반드시 피드백되도록 한다. 모든 사안은 최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처리한다. 채용, 평가, 보상, 배치 등 인사관리의 모든 사안은 관련된 데이타를 구축하고 분석하여 효율성을 높인다.

구글은 사원을 선발하는 데 무척 많은 공을 들인다. 잘못된 사람이 들어오면 그가 발생시키는 문제로 인한 비효율이 엄청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선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똑똑해야 하며, 관련 업무 능력이 뛰어나며, 잠재력이 큰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 여러단계의 객관적 테스트와 구조화된 면접을 실시한다. 짧은 시간에 급하게 사람을 선발하면 잘못된 사람을 선발할 위험이 높아지는 반면 좋은 사람을 선발할 가능성은 낮아지므로, 시간을 두고 여러사람이 간여하여 다각도로 면밀히 검토하면서 선발 과정을 진행한다. 선발 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사람의 의견을 모으므로서, 특정인의 편견이나 부당한 영향을 배제한다. 구글에 지원서를 낸 사람 중 1%이하만 선발될 정도로 매우 좁은문이다. 일단 이렇게 선발된 직원은 전적인 신뢰를 두고 일을 맡기며, 성과가 빨리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성과를 높이도록 코칭과 교육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도와준다. 그래도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회사를 떠나도록 권하고 이직을 도와준다.

성과 평가는 다면 평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상급자는 물론 동료와 하급자의 의견까지 평가에 반영한다. 성과평가 과정과 보수를 정하는 과정을 구분한다. 성과 평가를 통해 각자의 부족한 점과 강점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기회를 가지도록 한다. 성과 평가는 10월에 하며, 보수를 정하는 일은 연말에 한다. 성과 평가를 돈으로부터 거리를 띠움으로서 성과평가에 감정이 덜 개입하게 만든다. 성과평가에서 최상위 5%를 차지한 사람들의 업무 수행방식을 면밀히 분석하여, 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함으로서,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컨설팅을 받는 효과를 가져온다.

인간사의 많은 일은 정규분포가 아니라 지수분포를 따른다. 상위 10%의 사람이 전체 성과의 90%를 해내는 반면, 나머지 대부분은 이 소수의 사람들 덕분에 그럭저럭 지낸다. 지식 산업의 경우 이러한 성향은 뚜렷하다. 회사의 보상체계가 능력과 성과의 극단적 불균형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과와 보상이 최대한 부합하는 성과주의(meritocracy)가 지배할 때만,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정말 유능한 사람을 특별히 후하게 보상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높은 보상으로 유인하는 다른 회사에 이직할 것이다. 사원들 사이에 보상의 격차가 크면, 적게 받는 사람은 불만이겠지만, 그들에게 왜 그렇게 큰 차이가 나야 하는지 객관적 자료를 가지고 설득해야 한다.

이 책은 구글의 인사관리 실태를 분석하기보다는, 구글의 인사관리 정책을 설명하는 인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 구글은 정말 모든 사람이 일하고 싶어하는 환상적인 직장인 것 같다. 회사의 영업이익율이 30%에 달하면, 인재가 사방에서 모여들고, 혁신과 개선이 이어지고, 모두 후한 보상을 누리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은 별로 없고, 잘나가는 순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갈수록 더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독보적인 조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글과 같은 엘리트 회사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2023. 2. 12. 16:53

Joshua Greene. 2013. Moral Tribes: Emotion, Reason, and the Gap between Us and Them. Penguin books. 353 pages.

저자는 심리학자이며, 이 책은 인간의 도덕성(morality)의 특성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편 타당성을 갖는 도덕율을 탐색한다. 저자는 절대적으로 옳은 도덕율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최고의 대안인 "공리주의 Utilitanianism" 혹은 "결과주의 Consequencialism" 를 모든 도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도덕성이란, 진화의 과정에서 '협동' cooperation 이라는 우월한 특성을 수행하기 위해 발달하였다. 인간은 집단적으로 협동하여 일하였기 때문에 진화의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이기적 존재이다. 집단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는 협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집단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배반 행위를 규제할 장치가 필요하다. 도덕율이 바로 그러한 장치이다.

인간의 도덕성,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판단과 행위는 두 단계로 구성된다. 첫째는, '감정' emotion 이다. 예컨대, 남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짓말 하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어려운 이웃을 보면 동정심이 들고, 배반당하면 분노가 치밀고, 반사회적 행위에 대해 혐오감이 들고, 사회에 기여하는 행위를 하면 의기양양하고, 등등.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은, 사람들 서로간에 행위를 조율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을 포함한 이웃의 감정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도덕성의 두번째 단계는, 이성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꼼꼼히 따져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의 도덕성은 첫 단계, 즉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만, 이것이 적절치 않은 경우가 있다. 내가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을 상대할 때, 도덕적 감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예컨대, 내가 속한 집단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감정적으로 꺼리지만, 전쟁에서 타집단 사람을 죽이면 칭송받는다. 나의 집단 사람을 속이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타집단 사람을 착취하는데 대해서는 부정적 감정이 일지 않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을 우월하게 보는 반면 타집단을 낮게 본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습득한 성향인데, 집단간 접촉이 드물던 수렵채취 단계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집단간 접촉이 빈번한 사회에서는 갈등과 비참의 원인이다.

그런데 이성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려면 도덕적 기준이 필요하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 인간 내면의 소리, 등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현실적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공리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가장 많은 사람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유일한 기준이다. 이때.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의 가치에 대해 차별을 두지 않는다. 어떤 행위가 옳은가 여부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라는 기준만을 적용해 판단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공리주의에 따라 행동하지만 항시 그렇지는 않다. 때때로 행위의 결과에 관계없이 직관적인 감정을 우선시한다. 예컨대 낙태 반대론자들은 낙태를 허용할 때 발생할 결과를 우려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부여한 생명을 인간이 끊는데 대한 부정적 감정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낙태 반대자들은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하는데, 이렇게 절대적인 의미의 '권리' right 를 주장하는 순간, 경험적으로 '결과'를 따져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공리주의는 설자리가 없다.

신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세속적 인간이 의지할 유일한 판단 기준은 '경험적 사실'밖에 없다.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조차,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만 선택하여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편파적 선택에서 가장 자유로운 방식은 과학적 접근이다. 따라서 과학적 접근 방식을 적용하여 객관적으로 수집한 결과에 따라,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가치가 다 옳다는 상대주의 또한 배격한다. 장기적으로 본 인간의 긍정적 경험, 즉 행복을 최대화하는 것이 도덕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철학적 문제를 심리학과 진화생물학적 접근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절학적 질문에 대한 참과 거짓의 판단은 일단 유보해 놓고. 공리주의적 접근은 세속적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잘 썼다. 다만 반복과 군더더기를 빼서 절반 정도의 분량으로 썼다면 훨씬 읽기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2023. 2. 2. 15:17

Rudolf Vrba. 2020(2002). I escaped from Auschwitz: The shocking true story of the world war II hero who escaped the Nazis and helped save over 200,000 Jews. Racehorse publishing. 446 pages.

저자는 17세에 슬로바키아에서 유태인 집단 이주 명령에 따라, 나찌의 유태인 집단학살로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어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약 2년간 지내다가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는 탈출 후 유태인 조직의 도움으로 아우슈비츠의 실상이 전세계에 알려지도록 했으며, 이후 전범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 유태인 학살 잔학행위에 연관된 사람들의 처벌에 앞장섰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일을 상세히 묘사하고, 그가 어떻게 탈출에 성공했는지, 탈출 후에 어떻게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외부로 알렸는지 설명한다. 그가 수용소에 있던 2년동안 1,750,000명이 죽었다고 진술했는데,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아우슈비츠에서 200~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전유럽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유태인을 잡아들여  신속히 살해할 수 있었을까. 유태인들은 유럽 전역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해 받고 있었다. 따라서 나찌 혹은, 나찌에 협력하는 지역 정부에서 그들을 새로운 곳으로 이주시킨다고 했을 때, 유태인들은 박해받는 곳을 떠나 미지의 삶의 장소로 이주한다는 아이디어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아우슈비츠로부터 탈출하여 그곳의 실상을 폭로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나찌의 집단 학살 정책에 대해 아무 정보도 없었다. 나찌는 아우슈비츠의 실상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통 보안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많은 유태인들은 자식의 앞날을 위해 지금 사는 곳보다 앞으로 가는 곳이 더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이주 열차에 순순히 올라탔다.

이 수기의 대부분은 저자가 어떻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는지 설명한다. 아우슈비츠에서 대량 학살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면 많은 보조 인력이 필요한데, 수용자들 중 건장한 사람을 선발하여 이러한 일을 맡긴다. 이들은 강압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사람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작업에 동원된 수용자들은 굶주림의 위협이 없었다. 이들에게는 규칙을 위반하지 않고 건강을 계속 유지하는 한, 생존이 확보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우슈비츠에서 1년 이상 생존하는 사람은 드문데, 저자가 2년이나 죽지 않고 버텼다는 것은 예외적이다.

저자는 젊음의 활기 뿐 아니라, 상황을 잘 판단하고 신중히 행동하는 영민함을 갖추었다. 그는 독일어, 러시아어 등 다섯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힘있는 사람의 호감을 얻는데 유용하게 작용했다. 윗 사람이 그를 잠시 접해보고 호감을 느껴 그와 함께 일하도록 하는 일이 여러번 벌어진다. 사회적인 지위의 대물림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강제 수용소에서 도, 사람들의 인적자본의 차이가 지위의 차이, 삶과 죽음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는 전쟁후에 대학에 진학하여 의학을 공부하고 이후 의학자로서 하바드 의대에서 교수까지 하였다. 그는 수용소 내에서 드문 인재(elite)였음은 물론, 수용소 밖에서도 드문 인재(elite)였던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서 수용자들 사이에 지위의 불평등은 인적 자본과 운이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번 겪는데, 그때마다 운이 함께 하였다. 수용소에서 그가 쌓은 신뢰관계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었다.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를 신뢰하지 않을지 잘 판단하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의 결정인데, 그는 남의 마음을 읽는 눈이 있었다. 십장의 명령에 따라 규칙을 위반하다 발각되었을 때, 그는 엄청난 고문을 받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그 십장의 관리하에 특별 대접을 받으면서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가 수용소에서 생존을 위해 노력한 것은, 처음에는 순전히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였지만, 집단 학살의 참상을 대면하면서 마음 속에서 분노가 쌓이고, 이를 그대로 지속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이 그를 계속 살게 한 힘이 되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 이송된 사람들이 그곳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대량 학살 사업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라는 점을 깨닫고, 자신이 탈출하여 외부세계에 이곳의 실상을 알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아우슈비츠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서부터 탈출을 염두에 두고, 그의 표현대로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접근하였다. 아우슈비츠 보안의 허점을 면밀히 탐색하고, 다른 탈출자들의 실패를 꼼꼼히 분석하였으며, 섣부른 충동이나 탈출 제안에 쉽게 빠져들지 않았다. 외부로 탈출하여 실상을 폭로할 것을 목표로 살았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되는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기억속에 저장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탈출하여 슬로바키아의 유태인 조직 사람들에게 헝가리 유태인들의 대량 이주 학살이 계획되고 있음을 경고했음에도, 헝가리 유태인 조직이 자신의 나라의 유태인들에게 대량 이주의 실상을 알리지 않고 죽게 내버려둔 것에 분노했다. 전쟁후에 알게 되었는데, 헝가리 유태인 조직의 우두머리가 나치 우두머리와 거래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거래의 내용은, 상당한 규모의 헌금을 내는데 대한 보상으로, 헝가리 유태인 상류사회 사람들 1,800명이 스위스로 도망가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일반 유태인들이 대량 이주의 실상에 무지한채 순순히 이주 정책을 따르도록 한 것이었다. 그 결과 헝가리 유태인 약 40만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설명한다. 1960년 초 영국에서 지낼 때 지역 신문에 아우슈비츠의 집단 학살 실상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악의적인 사람으로 비난하는데 충격을 받고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설명하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나찌의 집단 학살이 거짓이라고 믿는 사람이 서구에서 적지 않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그것도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하여, 잔혹하게 수백만이나 죽일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죽이고 비참하게 만드는데 기꺼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유태인의 집단 학살 사업은 이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에게 이익을 제공하였다. 유대인 집단 강제이주 정책을 집행한 지역 사람들은 유태인이 떠나면서 남긴 집, 사업체 등 소중한 재산을 거져 빼앗았으며, 아우슈비츠에서는 유태인이 가지고 온 것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독일로 보냈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자들은 인근에 있는 독일의 군수 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였다. 유태인을 처분하면서 그들이 지금까지 쌓았던 재산들은 독일과 지역 경제에 윤활유로 작용한 것이다.

이 책은 인재(elite),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재는 필요하며, 인재는 생존의 확율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인간 사회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하다.

2023. 1. 30. 17:19

Gary Marcus. 2008. Kludge: the Haphazard Evolution of the Human Mind. Mariner Books. 176 pages.

저자는 심리학자이며, 이 책은 인간의 사고 작용에 내재한 결함을 설명하고, 그것의 원인을 진화에서 찾는다. 인간의 신체 기관은 진화를 통해, 초기에 단순한 것에서부터 조금씩 복잡한 기능을 덧붙이며 발전하였다. 그 결과 우리의 신체 기관은 '클루지'(kludg)의 집합체이다. 여기서 '클루지'란 당장의 필요에 따라 성급히 엉성하게 만들어진 땜질 처방을 뜻한다. 처음부터 복잡한 기능을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만들었다면 그와 같은 땜질 처방을 하지 않았겠지만,  진화란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최적의 선택(total maximum)이 아닌, 그때그때 발달 과정에서 가용한 것(regional maximum)을 선택하였으므로 결함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심리와 사고작용은 인체의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이런 과정을 겪어 진화했으므로 결함을 내포한다.

인간은 '맥락 기억'(contextual memory) 장치를 가지고 있다. 기억의 대상과 과거에 그것을 체험한 맥락이 함께 얽혀 저장되어 있으며 불러일으켜 진다. 따라서 기억의 대상에 수반된 맥락이 기억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과거 원시 인간의 생존 조건에 기인한다. 과거에 체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났을 때 잘 기억해 내는 것은 원시인의 생존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렇게 맥락이 기억에 영향을 주는 상황은 과거의 사건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을 방해하며, 기억 자체를 외곡시킨다. 

사람들은 그때그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따라 움직이며, 좀처럼 논리적으로 따지며 사고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복잡한 사안은 논리적으로 손익을 따지고, 미래에 예상되는 결과를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만 잘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피곤하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때 찬찬히 사고하는 능력은 가동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과 부합되는 것을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반면, 자신의 믿음에 반대되는 것은 기억을 잘 하지 못한다. 자신이 믿는 것에 부합되는 사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자신의 믿음에 부합되지 않는 사실은 소홀히 하고 외곡하여 인식한다. 믿음이나 감정이 이성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인간은 즉시 혹은 단시간 내에 쾌락을 주는 것에 과도하게 중요성을 부여하는 반면, 장기적으로 이익을 가져오는 것에는 중요성을 덜 둔다. 나중에 후회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당장의 쾌락의 유혹을 거부하기 어렵다. 모든 사람은 오늘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성향을 타고 났다. 불이익이 돌아올 것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일을 미룬다. 심한 우울증에 빠지거나, 과도한 염려와 초조함, 제어하기 힘든 분노 등과 같이 비정상적인 심리 상태에 빠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렇게 인간 심리에 내재한 다양한 결함은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클루지'로 해석해야 한다. 오랜 인간의 원시 생존 시기 동안 진화된 뇌가, 생존 상황이 전혀 다른 현대 사회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특히 문제가 된다. 이러한 인간 심리의 결함을 최소화하는 몇가지 방법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가능한 한 다양한 여러 대안을 생각해 볼 것, 기존에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질문해 볼 것, 서로 관계가 있다고 하여 인과관계인 것은 아님을 명심할 것, 자신의 생각이 충동과 감정에 의해 덜 좌우되도록 상황을 조정할 것(즉 피곤하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에는 중요한 결정을 하지 말 것, 중요한 사안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것), 이익과 비용을 대비하여 생각하는 습관을 키울 것,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어, 만일 제삼자라면 어떻게 할지,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나의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등을 염두에 둘 것, 합리적으로 생각하도록 수시로 자신을 일깨울 것, 등.

이 책은 인간의 비합리적, 감정에 휘둘려 생각하는 성향에 대해 쓴 다른 심리학 책들과 유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요컨대, 인간이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인간 본능의 핵심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심리적 결함에 덜 빠지려면, 심리적 결함의 힘이 자신에게 항시 작용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자기 통제 훈련을 통해 생각의 근력을 기르고, 경험을 많이 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생각의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이 적은 상황으로 자신을 조정해야 한다.

2023. 1. 28. 13:06

William H. McNeill. 1977. Plagues and Peoples. Anchor Books. 257 pages.

저자는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전염병이 인류에 미친 영향을 역사 전개에 따라 서술한다. 저자는 서구,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전지구적인 사람과 물자의 교환에 강조점을 두고 역사 전개를 서술한다. 전염병의 역사는 이러한 역사 접근의 가장 대표적인 주제이다. 17세기 이전까지 전염병에 대한 자료는 미진하므로, 많은 경우 상황 정보를 종합하여 추론한다.

전염병은 인간과 접촉이 잦아지면 '문명화'(civilized)의 과정을 겪는다. 특정 전염병에 처음으로 노출된 인구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는다. 한 마을 전체가 몰살하거나, 백명 중 한두 명만 살아남을 정도로 피해가 심하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에 치명적인 병원체는 대상 인구를 소진한 다음에는 계속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에게 덜 심한 피해를 입히는 변종으로 대치된다. 한편 이러한 치명적인 전염병에 노출된 인구는 면역력을 보유하게 되기 때문에, 면역력이 없는 다음 세대로 대체되기 전까지 같은 전염병으로 다시 크게 피해를 입지 않는다. 이렇게 병원균과 인간 상호간에 적응(adaptation)이 진행되면,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치명적이었던 전염병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태어난 면역력이 없는 아동들에게만 치명적인 병으로 안정화(stabilized)된다. 특정 전염병은 대체로 3~4세대의 주기, 즉 약 100년을 주기로 하여 다시 찾아와 큰 피해를 입힌다. 3~4 세대가 지나면 특정 전염병에 대해 면역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전염병은 대부분의 성인에게 다시 큰 피해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전염병의 주기적 출몰이 16세기까지 모든 인류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경험이었다.

인류 사회는, 한편으로는 전염병 즉 생물체에 기생하면서 숙주와 함께 살아가는 유기체인 '미세한 기생충'(microparacitism),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인간에 기생하면서 그들을 착취하여 살아가는 인간들인 '큰 기생충'(macroparacitism)이 서로 밀접히 연결되면서 역사가 전개되었다. 큰 기생충의 적응 방식은 미세한 기생충의 적응 방식과 유사하다. 큰 기생충인 지배자들은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것의 일부를 폭력을 바탕으로 전쟁, 약탈, 세금, 지대, 등의 방식으로 빼앗는다. 이웃 나라를 정복한 지배자들은 초기에는 생산자들이 생존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하게 수탈하여 생산자들의 생산 기반을 몰락 시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지배자들은 생산자들이 계속 생산을 할 수 있을만큼 남겨두고 수탈을 하며, 지배자와 생산자간 안정된 공생관계가 자리잡는다. 큰 기생충이 생산자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면, 생산자들의 영양 상태가 악화되고 병원균에 대한 저항력이 떨여져 전염병의 피해가 커진다. 전염병이 몰아닥쳐 생산자들의 생산 능력이 떨어졌는데도, 큰 기생충이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수탈을 계속할 경우, 그 사회는 붕괴하게 된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일부 지배자들은 생산자들을 적정 수준으로 착취하여 둘 간의 관계가 안정화된다.

인류는 그리스 로마 시대, 즉 기원전 500년경에 이르러,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의 지역이 주요 전염병에 접촉한 경험을 갖게 되고, 어느 정도 면역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중동에 기원한 고대 문명과, 중국, 인도 문명 사이에 드물지만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때때로 이루어지면서, 통일되고 문명화된 전염병의 풀이 형성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전염병의 주기적 출몰로 인구가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인구 증가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안정 상태가 1,200년대까지 이어졌다.

역사학자들은 전염병이 사건의 전개에 미친 영향을 과소 평가하는데, 이는 전염병의 출몰이 예기치 못한 사건이며,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 미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 예컨대, 서구에서 아테네의 몰락, 페르시아의 패배, 로마제국의 붕괴, 중세 봉건제의 발달, 등에서 전염병의 발흥이 사건의 방향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한 요인이다. 또한 황하강 유역에서 시작된 중국문명이 1300년대까지 양쯔강 이남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인도 북부의 세력이 인도 중부 이남으로 확대되지 못한 것 역시, 아열대 지역의 높은 전염병 위험이 서늘한 지역에서 시작된 문명의 남하를 막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지역은 전염병의 위험이 높기 때문에, 인구 밀도가 낮으며, 생산력이 높지 못하여 큰 규모의 비생산인구를 부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몰살을 당하는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기존의 이념과 권위 체계에 대한 신뢰를 거둔다. 대신 이러한 혼란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갈구하는 데, 기독교, 불교, 유교는 사람들의 고통을 토양으로 성장하였다. 세속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람, 특히 가까운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기독교는 이를 하나님의 심판, 인간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설명하였으며, 죽은 다음 천국에 간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의 허무를 달래 주었다. 불교는 이러한 고통과 혼란에 대하여, 세속적 욕망에서 물러날 것과, 죽은 다음 다시 환생한다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위무하였다. 유교는 가족의 유대를 강조하여 조상에서 자신 그리고 후손으로 이어지는 연결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잊게 하였으며, 중앙집권 체제에서 가족의 확대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관료적 의례와 절차를 믿음의 일부로 만들었다.

1300년대에 흑사병이 유럽을 포함한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휩쓸었다. 흑사병은 쥐를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전염되는 질병이다. 이 병원균은 히말라야 북단에 원천을 두고 있었는데, 1200년대 중반 몽고 제국이 이 지역에 정벌을 갔다 돌아오면서 병원균을 가지고 왔으며, 이것이 징기스칸의 서방 정벌을 따라서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을 넘어 터키와 헝가리까지 진출했으며, 마침내 1300년대 초에 서유럽을 휩쓸었다. 몽고의 서방 정벌이 헝가리에서 멈추게 된 이유 역시 몽고 정벌군이 흑사병으로 크게 피해를 입어 후퇴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흑사병은 선박을 통해 이탈리아 북부에 유입되어 유럽 전체에 퍼졌다. 서유럽에서는 초기에 큰 피해를 입은 뒤, 이후 다시 흑사병이 몰려왔을 때 격리와 검역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피해를 점차 줄여 나갔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도입하지 않아 1700년대까지도 흑사병의 출몰로 큰 피해를 입었다.

흑사병은 기존의 권위와 이념 체계에 큰 균열을 가져왔다. 중세 시대에 굳건했던 정통 기독교의 조직과 교리 대신에, 신비주의와 내면의 성찰을 강조하는 믿음이 활개쳤으며, 기존의 기독교 교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1500년대의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흑사병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이 무력한 것을 체감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헌신이 약화되었다. 이는 1500년대에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난 르네상스와 과학기술의 발달을 낳았다. 흑사병에 대한 대응 조치가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중앙집권이 확대된 반면 교회와 지역 영주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흑사병은 1300년 무렵에 중국으로부터 화약이 도입되고, 이후 총과 대포가 발명되면서 봉건 영주와 기사의 세력이 약화된 것과 더불어 중세를 붕괴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흑사병은 서유럽 전체에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했으며, 이는 중세의 생산과 사회관계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한편 이 시기 중국에서는 몽고제국의 후손인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으며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는데, 이러한 변화 역시 몽고 지역에서 흑사병의 피해가 심각하여 지배력을 계속 행사하기 어려웠던 것이 주요 원인으로 추정된다.

1400년대 후반에 유럽은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었다. 유럽인들은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였으며, 바다를 통해 아시아에 진출하였다. 유럽 세력이 대양을 넘어 확장하게 된 원인은, 1300년대 이래 거듭된 흑사병의 위협을 이겨내고 인구가 빠르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시대에 중국의 명나라는 해외로의 진출을 억제하고 중국 대륙 내로 한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중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지배하였으므로, 지배권의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쇄국정책을 펼쳤다. 반면 유럽은 중세의 봉건체제를 벗어나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작은 나라로 쪼개졌으며, 이들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해외로 진출하는 것이 장려되었다.

아메리카인들은 유라시아의 전염병에 전혀 노출되지 않았었으므로,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마치 유럽인이 아시아로부터 건너온 흑사병에 처음 노출되었을 때처럼. 외부에서 온 전혀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로 인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은 반면, 이러한 병원균에 면역력을 가진 침략자들은 거의 피해가 없는 것을 보고, 전염병으로부터 살아 남은 생존자들은 삶의 의미를 잃고 자기 파괴적으로 생활하거나, 지금까지 자신의 사회의 믿음과 권위 체계를 부정하고 침략자의 지배와 이념을 순순히 수용하였다.

1600년대 이후 유럽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다. 웬만한 치명적인 전염병에 대해 면역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전염병이 돈다고 해도 때 방역과 격리 등의 방법으로 전과 같이 큰 피해를 입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수입한 감자, 옥수수, 알파파 등의 생산성이 매우 높으므로 인구 전반의 영양 수준이 높아졌으며,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럽인이 이동하면서 유럽의 인구 압력이 낮아진 것, 등이 인구 증가의 원인이다. 1700년대에 들어 경험주의의 과학적 접근이 의료 분야에 확대되면서 병원균의 확산을 억제하는 실증적인 방법이 개발 보급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홍역을 예방하는 예방 접종이 그것이다. 또한 도시의 비위생적인 환경를 개선하는 조치들이 속속 전개되었다. 1800년대 중반 현미경의 발명으로 병원균의 실체가 확인되면서 전염병은 마침내 인류가 실체를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대상이 되었다.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유럽의 도시들은 주변 농촌지역보다 사망율이 높지 않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그전까지 도시인의 수명은 농촌 사람들보다 낮았으므로, 계속하여 주변 지역으로부터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어야만 도시가 유지되었다. 1800년대에 서유럽의 위생과 의료 지식이 전세계의 유럽인이 진출한 지역에 보급되면서, 한 지역의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전염병에 노출되어 몰살당하는 현상은 사라졌다.

이 책은 거의 반세기전에 집필되었음에도 대단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서유럽에 국한된 시야를 세계로 확대시키고, 지배자와 정치 분야에 집중된 전통적 역사 서술을 넘어,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아우르고 사회전반의 변화를 거시적으로 통찰하는 안목을 제공한다. 정말 대단한 책이다.

 
2023. 1. 23. 17:10

홍완식. 2021. 소재, 인류와 만나다: 인간이 찾아내고 만들어온 모든 소재 이야기. 삼성경제연구소. 360쪽.

저자는 소재공학과 교수이며, 이 책은 인류가 발견 혹은 발명한 소재를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시간 순서에 따라 간략하게 소개한다. 돌, 금속, 청동기, 도자기, 콘크리트와 유리, 비료와 폭약, 철강, 섬유와 수지, 플라스틱의 순으로 설명한다.

각 소재에 관해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발견 혹은 발명되었으며,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이용되는지, 등을 설명한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화학적 조성을 포함해 체계적인 설명을 시도하나, 뒤로 갈수록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주를 이룬다. 저자가 이 분야의 연구자이므로, 각 소재에 대해 과학적인 배경 지식이 제시된다. 그러나 수시로 단편적이고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군더더기 인용이 많이 붙어 있어, 잡다한 상식을 넓히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하는게 아쉽다. 단편적인 사항을 망라하는 책은 다 읽고나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저자의 전문지식을 담아 각 소재에 대해 체계적으로 일반인이 알기 쉽게 정리해 설명했다면 과학분야에 좋은 책이 되었을텐데. 물론 그러러면 이 책을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2023. 1. 22. 13:52

박창식. 2017. 언론의 언어 왜곡, 숨은 의도와 기법. 커뮤니케이션북스. 109쪽.

저자는 한겨레신문사 기자이며, 이 책은 저자가 몸담은 한겨례말글연구소의 세미나에서 전개된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 언론사들이 정치권력과 관련하여 어떻게 언어를 구사하는지 설명한다.

언어는 말 자체의 의미와 함께 사회에서의 권력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기관은 언어 조작과 통제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며, 이는 사람들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릇되게 사고하도록 한다. 보수 언론은 권력의 편에서 언어의 조작과 통제에 가담하며, 진보 언론은 권력의 언어 조작 압력을 거부하려 한다. 근래 한국에서는 정치 권력 못지 않게, 대자본의 힘이 세기 때문에, 언론은 자본가의 눈치를 보며 언어 구사에 몸을 사린다.

언어를 통해 대중의 인식을 통제하는 다양한 방식이 소개된다. 완곡어 사용, 프레임 설정, 의도적인 방향의 은유, 선정적 측면만 선택적으로 부각하기, 등이 권력자의 편에서 흔히 사용된다면, 진보 측면에서는 정치적 올바름, 정치적 사과 등이 사용된다. 그외, 이념적 색채가 담긴 용어, 피동형 문체, 등도 권력자의 편에서 자주 사용한다.

이 책은 저자의 정치부 기자 경력이 곳곳에 잘 뭍어나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사례를 사용하며, 읽기 쉽게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