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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해당되는 글 3건
2020. 7. 2. 13:04

Claudia Goldin and Lawrence F. Katz. 2008. The Race between Education and Technology. Harvard University Press. 353 pages.

저자는 저명한 경제학자들로, 이 책은 미국에서 지난 백년간 교육 수준의 향상과 기술 발전의 관계를 수리적으로 분석한 학술서이다. 책의 첫머리에 저자는 "왜 백년전에는 미국이 세계적으로 교육의 향상을 선도하는 나라였는데, 근래에 미국인의 교육수준이 다른 선진산업국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19세기말 20세기 초반, 2차대전후 1970년대 초반까지, 1970년대 중반이후 21세기 초까지, 지난 백년간을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 미국인의 교육 수준과 교육 제도의 변화를 검토한다.

미국은 20세기초반까지 선진산업국들 중에서 교육수준이 독보적으로 높은 나라였다. 19세기초부터 공립 초등교육이 전개되기 시작했으며, 19세기말에는 공립 중등교육 운동이 벌어지면서 전국적으로 무상 중등학교가 확대되었다. 2차대전 무렵에는 중등학교를 나오는 것이 당연시되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는 물론 백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흑인에게는 2차대전 무렵까지도 중등학교를 다니는 것이 쉽지 않았다. 유럽의 나라들은 20세기 초반까지 중등학교는 소수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으며, 공립 중등학교는 드물었다. 

미국에서 공교육이 일찍이 확대된데에는 몇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첫째는 지역자치의 전통이다. 공립학교는 지역의 주민들이 갹출한 재원을 바탕으로 지역주민이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웃 지역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지역들간 경쟁을 유발시켰다. 내가 사는 지역에 양호한 교육 환경이 만들어 지면 그 지역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주민들은 자신의 지역에 좋은 공립 학교를 세우는데 적극적이었다. 이는 유럽에서 공교육이 중앙집권적으로 구축된 것과 명확히 대조된다.

둘째는 평등을 추구하며 패자에게도 기회를 주는 미국의 공교육의 원칙이다. 미국은 모든 주민들에게 지역의 공립학교에 무상으로 접근할 수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또한 교육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뒤쳐지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는 기회를 공교육의 마지막 단계까지 열어 두았다. 이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이 12~4세 무렵에 국가 자격시험을 치루어, 이 시험의 결과에 따라 인생의 진로가 달라지도록 중등교육 과정에 차등을 둔 제도와 뚜렷이 다르다. 유럽에서는 엘리뜨에게만 고급 중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부여하며, 나머지 사람에게는 중하위의 직업에 진출할 수 있는 직업교육을 시켰다. 반면, 미국에서는 모든 학생들에게 중등교육의 마지막 단계까지 동일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보다 많은 사람이 양질의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유럽은 미국을 본받아 무상 공립 중등교육을 확대하였으며, 질 높은 중등교육을 선별적으로만 제공하던 제도를 많이 완화하였다.

20세기 초반까지 중등교육의 학력은 노동시장에서 크게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중등교육을 이수하려고 하였다. 20세기 중반에는 대다수가 중등교육을 받게 되면서 중등교육의 이점은 줄어들었다. 대신 고등교육을 이수하는 것이 큰 보상을 가져왔으므로,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고등교육 즉, 대학 교육은 정부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대학간 자유경쟁의 결과 대학 교육의 질이 꾸준히 향상되었다. 유럽은 미국보다 뒤쳐져 공립 중등교육이 보급되었으며, 이어서 고등교육이 확대되는 과정을 근래까지도 지속하고 있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에 들어 국민의 교육수준이 확대되던 장기 추세가 중단되었다. 고등교육의 이수는 80% 무렵에서 좀처럼 더이상 높아지지 않으며, 4년제 대학의 졸업율은 한때 70%까지 높아졌다가 60%초반대로 후퇴하였다. 4년제 대학 졸업자는 노동시장에서 큰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면 노동시장에서 큰 불이익을 받음에도 일부 사람들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4년제 대학을 중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편, 미국의 기술 수준은 19세기 후반 이래 꾸준히 높아졌다. 과학과 기술 수준이 높아지면서, 노동시장에서 인적자본에 대한 요구가 꾸준히 상승하였다. 20세기 초반까지는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기술 수준에 비해 중등교육 이수자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중등교육을 졸업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누릴 수 있었다. 20세기 후반 들어 컴퓨터와 생산서비스 산업이 발달하면서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기술 수준은 크게 높아졌으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이러한 노동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여 높은 임금을 누리고 있다. 문제는 기술수준의 상승하면서 고급 인력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것에 비해 대학교 졸업자의 증가 속도가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노동시장의 수요에 비해 고급 인력의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고급 인력의 임금이 크게 높아졌다. 대학원을 졸업하여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의 공급이 노동시장의 수요에 비해 크게 부족하므로 이들은 매우 높은 임금 프리미엄을 누린다.

저자는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때문에 임금의 격차가 크게 나게 되었음을 분석적으로 입증한다. 4년대 대학의 졸업자가 1970년대 중반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하였더라면 이들의 임금 프리미엄이 지금과 같이 높지 않을 것이므로, 소득 불평등도도 지금만큼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더하여 20세기 후반 세계화의 결과, 낮은 기술수준의 일자리는 해외로 이전하거나 혹은 이민자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에, 낮은 기술수준을 가진 근로자의 임금은 정체하거나 하락한 반면, 높은 기술수준의 일자리는 세계화로 효능이 더 커졌기 때문에 더 높은 보상을 누리게 되었다.

왜 미국인은 유럽인에 비해 중등교육의 탈락율이 높으며, 4년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은가? 4년제 대학 중퇴자가 많은 것은 두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는, 대학교육을 받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채 대학에 들어온 사람이 많기 때문이며, 둘째는 대학의 등록금이 매우 비싸서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이유는 중등교육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중등교육이 부실한 이유는 다양하다. 첫째는 주민의 소득과 인종에 따른 거주지 분리 현상이 교육의 지역자치 원칙과 만날 때, 가난하고 흑인이 사는 지역의 학교의 질은 매우 열악하게 된다. 둘째는 선생의 보수가 낮아 인재가 지원하지 않으며, 교사 노동조합이 능력이 부실한 교사의 처벌을 어렵게 만든다. 셋째, 가난한 흑인과 미혼모 가정 배경의 아이는 어릴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교육과정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불이익을 누적해간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부 미국인의 교육수준이 낮은 것은 학교의 문제도 있지만, 빈곤 문제, 인종문제가 중첩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빈곤과 인종문제가 유럽의 선진산업국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에, 미국인의 교육수준이 유럽과 달리 어느 수준에서 향상을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결국 사회를 개선해야만 미국인의 교육 수준 향상도 이루어질 수있다. 과학 기술 수준은 계속 발전하고,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인재의 수준은 높아지는 데, 미국 사회가 이러한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 앞으로 소득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 확대될 것이다.  

저자들은 책의 말미에 '미국이 과거에는 세계에서 교육수준의 향상을 선두에서 이끄는 나라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주저앉게 되었냐고' 탄식하며 분발을 촉구한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교육수준의 정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국외자의 눈으로 볼 때, 미국이 과거에는 잘 나갔지만 앞으로도 그러할지는 의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에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없다.

이책은 과학기술의 향상이 교육 수준의 정체와 만나면서 임금 격차가 커졌다는 것을 수리적 입증한 학술서이다. 막상 저자가 책 서두에 제기한 왜 미국인의 교육수준의 향상이 중단되었는가 하는 질문에는 별도로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 질문에 대해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은, 기존에 많이 언급된 것을 마지막 장에서 간단히 정리하는 데 그친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 참신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2012. 10. 7. 14:52

   사람들은 학교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하며 하루가 멀게 교육 제도를 바꾼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교육 제도를 자주 바꾸는 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 것은 문제의 근원이   학교 교육 자체보다는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http://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12/10/why-kids-should-grade-teachers/309088/

 Why Kids Should Grade Teachers

By Amanda Ripley


   어느 사회나 학교 교육은 사회적인 성공의 중요한 통로이다. 과거 토지 소유나 신분이 지위와 권력의 기반이었을 때에는 학교 교육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요즈음 ‘지식 경제’(Knowledge Economy)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경제활동에서 지식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교육의 지위획득 기능은 더 커졌다.

   문제는 학생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학교 자체가 아니라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점에 있다. 사람들은 학교 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장치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어떤 가정 배경인가에 따라 교육 기회는 큰 차이를 보인다. 교육 수준이 높고 소득이 많은 부모의 자녀는 그렇지 못한 부모의 자녀보다 평균적으로 학업 성취도가 월등하게 높다. 일간 신문에서 서울대 학생의 부모의 상당수가 강남에 거주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사실 모든 초등학교 학급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공부를 못하는 학생보다 부모의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다.

   본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학업 성취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배경에 따라 성취가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을 사람들은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평등과 민주주의 이념은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평등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 제도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능력이 자녀의 학업 성취로 고스란히 이전되는 것을 허용한다. 자신이 어떤 부모에게서 출생하는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사람들은 이런 부정의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없는 사람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은 불편해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맨날 떠들면서 이리저리 뒤집어보아도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을 외면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아우성만 지속될 것이다. 

   미국은 이런 점에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종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열등한 지위에 있는 흑인과 히스패닉 자녀의 낮은 학업 성취도는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이다. 유색인이 다니는 학교의 수준은 정말 열악하다. 학교의 시설은 낡고 부족하여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는 환경이며, 선생의 수준이나 가르치려는 의욕은 낮으며, 학생의 배우려는 의지 또한 매우 낮다. 많은 유색인 학생들이 매일 집에서 복잡한 사건을 경험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학교에 오는 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머리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반면 중류층 백인이 다니는 학교는 좋은 시설과 안정된 가정 환경과 부모의 관심과 선생의 열의와 학생의 의지가 결합하여 높은 학업 성취를 보인다.

   미국의 교육 개혁은 대체로 유색인 학교의 낮은 학업 성취도를 어떻게 끌어 올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중류층 학생의 학업 성취도 또한 국제 비교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이면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는 있다. 미국의 많은 교육학자들이 복잡한 방법론을 동원하여 문제를 분석하고 매일 같이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오지만 그리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사실 효과를 보이는 개선책은 대체로 교육의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여기 소개한 기사에서 지적하는 개혁 방안은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자녀의 학업성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선생이 좋은가 여부는 학생의 학업 성취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어떻게 선생의 질을 높일 것인가, 어떻게 나쁜 선생을 솎아낼 것인가, 어떻게 수업의 질을 개선할 것인가는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다른 방법보다 학생이 선생을 직접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높다.

   학생은 선생과 오랜 시간 함께하고 선생이 제공하는 교육을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이므로 어느 외부 전문가보다 더 선생과 선생이 제공하는 교육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보다 선생에 대한 평가가 더 공정하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 편차는 매우 적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다른 학생들 간에도 선생에 대한 평가는 일관되다. 심지어는 유치원 학생들 조차도 자신의 선생을 잘 평가할 수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반면 학생의 학업 성취도로 선생을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선생의 질보다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복잡한 방식으로 부모의 사회경제적인 수준 차를 통제하여  학생의 학업성취도에 따라 선생과 학교의 질을 평가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공정성이 결여되어 반발을 낳는다. 우리나라에서 근래에 일제고사를 이용하여 학생의 성취도가 떨어지는 학교에 불이익을 주는 정책이 옳지 않다고 비판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을 잘 알기 때문에 복잡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단순하면서 직접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다음의 다섯 개의 문항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 이 수업을 듣는 학생은 선생님을 존경한다.

2. 우리 반 학생들은 선생님의 통제를 잘 따른다.

3. 우리 반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4.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거의 매일 많은 것을 배운다.

5.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는다.


  학생은 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물론 선생은 학생의 평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평가받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평가가 자신이 받을 보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면 더더욱 평가를 기피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공적인 일이므로 공적인 절차에 따라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보상이 따르는 일에 대해 평가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평가가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며,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기 어렵기때문이다. 학생의 평가가 오류투성이라면 모를까 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이것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평가는 학생은 물론 선생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학생들은 매우 냉정하며 공정하게 평가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관심을 덜 기울이거나, 수업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배우는 것이 많지 않은 수업은 학생들이 기피하며 낮게 평가한다. 학생의 이해도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면 반드시 낮은 평가를 받는다. 학생이 배우는 양과 수준과 속도에 관심을 기울이며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선생을 학생들은 선호하고 높은 평가를 내린다. 점수를 잘 주는 선생의 강의에 많은 학생이 몰리지만 그러한 강의에 대해 반드시 후한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한 강의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불만을 표하는 학생이 반드시 나온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선생의 강의를 평가할 때 비교적 후한 점수를 준다. 5 만점으로 평가했을 때 웬만큼 괜찮다고 생각하면 평균 4 점 이상이다. 평균 3.5점 이하를 받으면 학생이 선생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한학기를 가르치고 나서 선생인 나 자신에게 불만족했던 강의는 거의 반드시 4.0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학생들도 나와 동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선생이 학생의 평가를 받지 않았던 것은 우리사회의 권위주의적인 전통 때문이다. 사회적 권위가 합리성을 제약했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것이 선생의 권위에 대한 침해라고 반발하지만, 열심히 잘 가르치는 선생에게는 학생이 존경하고 좋은 평가를 내린다. 학생은 선생의 인간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수업을 통해 학생에게 한 일을 평가하는 것이므로 인권 모독과는 상관이 없다. 학생들은 평가를 통해 선생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개선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교사 노조는 선생에 대한 학생의 평가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는 이기적인 주장일 뿐이다. 대부분의 선생은 겉으로 드러내 말하지는 않지만 학생의 평가가 대체로 공정하고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 엉터리로 평가하지만 학생 전체에 대해 평균을 내면 일부의 왜곡된 평가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제도가 효과적으로 시행된다면, 전혀 준비하지 않고 수업에 임하는 선생이나, 학생의 학업 성취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선생은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나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그런 무책임한 선생을 여러 명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수업을 매일 들으면서 느꼈던 좌절과 분노를 기억한다. 나는 그런 선생을 전혀 존경하지 않았으며, 어린 나이에도 그들을, 그리고 그런 수업을 억지로 들어야 하는 나를 불쌍하게 느꼈다. 그런 선생은 자신이 잘 가르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기에 학생의 학업 성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것이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어떤 교육개혁보다 더 혁명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2012. 9. 16. 23:02

   2005년 11월 어느 날 미국의 미시간 주에 칼라마주라는 인구 74,000명의 조그만 도시에서 교육감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제부터 이 도시에서 졸업한 고등학생은 누구든지 그 주에 있는 공립 대학교에 진학하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는다. ‘약속’(Promise)라 명명된 이 프로그램에 소요되는 재원은 독지가가 기부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절대 비밀로 한다.

 

NYtimes_FreeCollegeScholarship.hwp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무슨 장난도 아니고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하냐는 부정적인 반응에서부터, 돈이 없어 대학갈 꿈도 꾸지 못했는데 대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에 이르기까지. 교육감이 직접 발표를 했으니 완전 거짓은 아니겠지만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발표를 한 이래 지금까지 7년 동안, 총 2,500명이 대학을 갔으며 3천 5백만 달라 (한화로 약 390억원)의 돈이 장학금으로 지불되었다. 이는 각 학생당 매 학기에 4천 2백 달라(한화로 460만원)가 평균적으로 지원된 것이다. 실제로 약속이 지켜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알아보자. 이곳은 과거에 대표적인 산업도시였다. 한때는 GM 자동차 공장이 있었고, 대규모 제지 공장이 있었고, 업존이라는 제약회사의 큰 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미국의 산업시설이 싼 임금을 찾아서 해외나 남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현재 이 도시에는 이렇다 할 산업 시설이 없다. 공장이 이전하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빈곤과 범죄가 심해졌다. 학교의 질은 형편없어졌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손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미국 중서부의 다른 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퇴락의 운명을 겪었다.

  그 동안 이지역의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서 온갖 처방이 다 동원되었다. 경제 전문가의 처방 중에 안 써본 것이 없었다고 한다. 떠나는 회사를 붙잡기 위해 세금을 깍아 주는 것은 물론, 큰 경기장이나 공원 시설 등 이 도시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토목공사에 이르기까지 소위 ‘경쟁력 강화 위원회’에서 머리를 짜낸 모든 처방을 써보았다. 도시 활성화를 위해 전문가들이 고안한 64가지나 되는 방안을 실행했으나 도시가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면서 공립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대학갈 희망을 안겨주면 빈곤에 찌든 이 도시가 활성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배경이라고 한다. 과거 이 도시의 산업이 활발하던 시절 지역사회를 위한 많은 자선활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전통이 남아 과거에 이곳에서 사업을 일으켜 엄청나게 큰 돈을 번 사람이 지역의 번영을 위해 돈을 내 놓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출발한 ‘스트라이커’ 라는 의료기기 회사의 창업 가족이 돈을 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7년간 390억원을 댔으니 매년 약 55억 정도 지출한 셈이다. 사실 미국 거부의 재산이라면 이 정도의 지출은 감당할 만하다. 이 실험은 현재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교육 부문에서는 단기간에도 눈에 띠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 공립학교 학생의 학업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고등학교 중퇴자 비율이 현저히 감소하고,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이 크게 증가하였다. 교육영역 밖의 효과는 아직은 제한적이다. 인구 감소가 멈추었으며,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지역사회로 조금씩 되돌아오면서 산업이 활성화될 조짐을 보인다. 교육 외의 영역에서는 아직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지 않지만, 교육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으로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므로, 이러한 실험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큰 성과를 거둘 것이 분명하다.

  교육 투자를 통해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아이디어는 참신하다. 지식 경제로 접어들면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소득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고등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은 일할 곳이 사라지는 추세이다.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기술이 없는 사람은 최저임금의 불안정한 일 이외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문제는 최저임금의 일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근로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섣부른 경제 활성화 정책에 돈을 쏟아 붓는 것보다는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묘책인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교 등록금을 공짜로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고등교육에 큰돈을 쓰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세상일에는 다 순서가 있다. 그러나 가난한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면 그들도 대학에 가고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불러 넣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은 이를 실제 실현할 수 있는 사회에서만 사람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다.

  부모를 잘 만나서 누구는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가고 누구는 대학을 꿈도 꾸지 못하는 사회에서 태어난다면, 불리한 쪽에 선 사람은 성공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를 원망하고 돌을 던질 것이다. 살기 좋은 사회란 자신이 어떤 패를 뽑을지 미리 알지 못하면서도 선택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을지. 아무리 소득이 높아지면 무엇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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