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 Markovits. 2019. The Meritocracy Trap: How America's foundational myth feeds inequality, dismantles the middle class, and devours the elite. Penguin Press. 286 pages.
저자는 법학자이며, 이 책은 현재 미국에서 업적주의(meritocracy)가 지배하는 환경이 낳는 심각한 문제를 서술한다. 업적주의는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중류층을 없애고 사회양극화를 촉진시킨다. 업적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는 엘리트층과 중류층간 간격을 벌리고, 엘리트의 계층 지위를 후세대로 세습시킴으로서 미국을 계층지위가 세대를 넘어 고정되는 카스트 사회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업적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물론 업적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도 지나치게 큰 부담을 안겨준다.
1980년대 이래 미국에서 소득 상위 1% 층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 소득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들 상위 1% 층은 최고의 전문가 직업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기업의 고위 경영자, 투자금융회사의 금융 전문가, 유명 법률회사의 변호사, 전문 분야의 의사, 컨설팅 회사의 임직원, 기술 스타트업의 임직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높은 인적 자본을 활용하여서 회사에 엄청난 부를 창출하고, 그 일부를 자신의 소득으로 챙긴다. 이들의 연봉은 수십억에서 수천억원에 달한다. 과거 귀족사회나 산업사회의 지배층인 귀족과 자본가들은 토지나 공장을 소유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자신은 놀면서 엄청난 소득을 향유하는 유한계급이었다. 반면, 20세기 후반에 새로이 등장한 엘리트 전문인들은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며,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 최고급의 기술을 획득하고, 이 기술을 활용하여 매우 복잡한 일을 수행하고 엄청난 부를 창출해 낸다. 이들은 누구보다 높은 능력과 노력으로 높은 생산성을 올리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높은 소득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1980년대 이래 정보기술과 운송 기술의 발달 덕분에, 전에는 가능하지 않은 정도로 매우 복잡한 일을 체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 덕분에 출현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당 50~100 시간을 투입하는 엄청난 노동으로 자신을 혹사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에 중독되어 살아간다.
이러한 엘리트들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경쟁을 뚫고 엘리트로 선발되도록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엄청난 관심과 투자를 쏟아붓는다. 엘리트 부모의 엄청난 투자는 실제 그들의 자녀가 우수한 학교에 들어가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학교 졸업후 자신과 같은 엘리트 전문인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반면 중류층은 자녀에게 큰 투자를 하지 못하므로, 중류층의 자녀는 엘리트 전문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미국의 명문 사립 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의 대부분이 부모가 부자이며, 등록금이 엄청난 사립 혹은 부자 동네의 공립 초중등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이, 미국 사회의 엘리트 지위가 교육을 매개로 하여 세대간 전승되고 있음을 지시한다. 엘리트 자녀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고 학교를 다니며, 그들이 명문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도, 다시 좋은 직장에서 엄청난 경쟁과 일의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경쟁에서 배제된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은 경쟁에 패배한 것으로 인한 실망과 좌절 속에서 살아간다. 1980년대 이래 정보기술과 기계화 덕분에 중간 관리층이 줄어들고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중류층의 삶은 과거보다 불안정해졌다. 그들은 불안전 고용과 실직 등으로 노동하지 않는 유휴시간이 늘었으나, 이것이 삶의 질의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 사회층의 양극화는 심화되어,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 사이에 소득은 물론 삶의 모든 측면에서 서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사는 곳, 일하는 방식, 자녀를 키우는 방식, 자녀가 다니는 학교, 가족의 안정성, 소비 물품, 여가를 보내는 방식, 정치적 성향, 종교 활동,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현재 미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도는 1920년대 후반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에 근접하고 있다. 미국의 중하층은 엘리트들을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며 건방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엘리트들은 중하층을 무능하고 노력하지 않고 절제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경멸하면서, 서로 간 반목이 심하다. 미국의 금권주의 정치 풍토에서 엘리트들은 정부를 장악한 반면, 중하층은 이러한 정부에 등을 돌렸다. 결국 도날드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주의자의 선동이 대중에게 먹혀들고, 정치의 합의 도출 기능이 마비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나라에 살면서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서로 반목하는 지금의 상황이 지속되면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인류의 과거에서 높은 불평등은 결국 전쟁 혹은 혁명을 통해서만 해결되었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를 벗어나 대안이 있는가? 저자는 이 부분에서는 그리 설득적인 논의를 전개하지 못한다. 저자는 업적(merit) 자체가 사회 환경에 따라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사회적으로 높은 보상이 업적과 함께 해야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엘리트들이 다니는 명문 사립대학은 그들이 보유한 엄청난 규모의 펀드의 수익을 활용하여 재학생들에게 크게 투자하고 이것이 높은 교육 성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명문 사립대에 입학 문호를 넓히도록 정부가 압력을 넣어야 한다. 엘리트 직장의 일 중독 문화가 임직원의 높은 수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을 덜하도록 제도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소득의 양극화, 특히 고급 전문직의 높은 수입과 그들의 지나친 일 중독 및 엄청난 자녀 교육 투자에 논의를 집중한다. 책의 대부분을 이러한 현상을 서술하는 데 할애한다. 그의 서술에는 몇가지 약점이 보인다. 첫째, 그는 업적주의 사회의 승리자(meritocrats)로 엘리트, 부자, 최고노동자 등을 언급하는 데, 이 집단의 범위가 모호하다. 엘리트 집단과 중류층 이하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강조하면서, 때로는 엘리트 집단의 범위를 대학 졸업자, 전문 대학원 졸업자, 아이비리그 대학 졸업자, 상위 0.1%, 상위 1%, 상위 5%, 상위 10% 등, 가용한 통계에 따라 수시로 조정한다. 그가 주장하는 엘리트의 독보적인 소득이나 배타적 삶의 방식이, 계층지위에 따라 낮아지면서 연속선을 그린다면, 그의 주장의 근본, 즉 양극화된 사회라는 주장은 무너진다. 둘째, 그의 서술은 전적으로 미국 사회에 한정해 있는데, 그가 지칭하는 엘리트들은 세계화된 사회 속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한 사람들이다. 미국의 엘리트 전문인은 대부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다국적 비즈니스 분야에서 활동하고 그로부터 높은 소득을 거둔다. 예컨대 빌게이츠가 엄청난 부를 획득한 것은 세계화된 시장 속에서 그의 능력과 노력이 독보적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업적주의 보상체계는 미국 사회에 한정해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셋째,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가 큰 소득 격차와 사회 양극화를 낳고 있다면, 그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없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인류의 과거는 부모의 지위에 따라 자동적으로 지위를 배분하는 방식인 카스트나 귀족 사회, 정실에 따라 지위를 배분하는 방식, 부모의 재산과 사업을 자식이 물려받는 방식이 지배했다.이러한 방식보다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가 그나마 낫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했듯이 업적주의 또한 세대간 엘리트 지위의 전승을 근본적으로 틀어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엘리트들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노하우를 전력을 다해 자녀에게 전승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위를 자녀에게 전승한다.
실용주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은 업적주의의 폐해를 막기위해, 업적과 보상을 극단적으로 연결시키는 순수한 업적주의 방식을 부분적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업적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되, 이것 이외에도 사회와 삶에 가치있는 다양한 기준을 동시에 인정한다면, 개인의 업적에만 전적으로 보상을 몰아주는 현재의 업적주의 보상체계는 타당하지 않다. 국가가 관여하여 다양한 가치에 따른 보상의 균형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그에 따라 각 가치에 따른 행동에 대해 보상이 적절히 돌아가도록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는 이러한 방식을 사회 민주주의적 방식이라고 지칭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영리 행위의 업적에 대해 높은 세금을 매겨, 이 세금으로 다른 가치 행위에 대해 보상을 해준다는 발상이다. 샌델의 사회민주주의적 보상 체계에 설득력이 있지만, 사실 현재의 상황은 업적주의를 약화시키기보다는 업적주의를 더 충실히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미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사회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제대로 보상되지 않으며, 이것이 더 큰 사회 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재 미국의 엘리트 전문인들의 소득, 일, 교육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서술이 지나치게 반복적이라 읽는 것이 매우 지루했다. 양극화와 엘리트 중심 업적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책의 맨 끝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끝 맺어서 허탈했다. 대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기지 않은 비판이라면 비판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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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Markovits. 2019. The Meritocracy Trap: How America's Foundational Myth feeds inequality, dismantles the middle class, and devours the elite. Penguin Press. 286 pages.
하바드 법대 교수인 저자가 미국 사회에서 지난 수십년간 진행된 성과중심주의적 사회 체제로 변화하는 경향을 비판한 사회비평서. 1980년대 이래 미국 사회는 뛰어난 성과를 내는 소수의 엘리트에게 엄청난 보상을 몰아주는 방향으로 개편되고 있다. 최상층의 소득은 빠르게 증가하였지만, 중류층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감소하였다. 소득 불평등은 급속히 높아졌으며, 상위 5~10%와 나머지 90% 사이에 사회적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이는 이차대전 이래 1970년대까지 상층은 물론 중류층과 하층의 소득도 꾸준히 향상되고 다수에게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되던 시절과 대조된다.
근래에 엄청난 소득을 누리는 엘리트는 1950년대까지의 상층과 성격이 다르다. 그들은 교육 수준이 매우 높으며, 고도의 기술을 갖추고, 엄청나게 열심히 일하고 엄격히 자기 통제를 한다. 그들은 일의 세계에서 높은 생산성을 창출해낸다. 미국의 고급 사립대학을 졸업하고 최고의 직장에서 일하며 미국의 기술혁신과 세계화와 경제성장을 선두에서 이끈다. 금융, 법, 의료, 연구개발, 대기업의 경영에 종사하며, 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고 본인이 가져가는 성과도 엄청나다. 대학을 졸업하고 초봉 연2~3억이 보통이며, 월스트리트에서는 성과급 보너스로 수십억에서 수백억을 챙긴다.
이렇게 높은 성과를 올리는 엘리트 계층에 진입하려면 무서울만큼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입시 경쟁을 방불할 정도로 이들은 유아시절에서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엄청난 경쟁을 이겨내고 천문학적 비용을 교육에 퍼붓는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이들은 자신의 소질이나 흥미는 무시한 채 일주에 50~80시간을 일한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대단하여 인간적이지 못한 삶을 산다. 이들은 일을 덜 하고 싶지만, 이들의 직장은 여유롭게 일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엄청난 경쟁속에서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노예나 다름없이 일을 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낙오되는 두가지 선택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엘리트와는 대조적으로 중류층은 소득이 정체되며 불안정한 직장에서 과거보다 일을 덜 한다. 엘리트 계층이 높은 기술을 구사하여 엄청나게 일하는 그늘에서 중류층은 단순 반복적인 일에 종사한다. 주요한 결정은 모두 엘리트 계층이 독차지 하기 때문에 중류층은 일에서 소외되며 해고와 채용이 용이한 조직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엘리트 계층이 높은 성과를 거두며 결정을 독차지 하는 반면, 중류층은 지시된 일을 하는 지위로 전락한 것은 정보기술의 발전에 힘입었다. 정보기술의 도움을 받아 엘리트들은 중간관리층을 거치지 않고 조직의 구석구석을 통제하며, 세계화 덕분에 이들의 고급 기술은 전세계 사업장에서 몇배나 많은 생산성으로 증폭된다.
엘리트 계층은 각자가 보유한 기술과 각자가 올린 성과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고 보상을 받는다고 하지만, 이들의 엘리트 지위는 세대간에 세습되는 경향이 있다. 과거 귀족 계층이 자식에게 재산을 직접 물려주는 방식으로 지위를 세습했다면, 요즘의 엘리트 계층은 엄청난 비용을 투입한 최고급 교육을 통해 높은 인적 자산을 축적하도록 해 고급 직업과 높은 지위를 획득하도록 하여 엘리트 지위를 세습한다.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엘리트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데 들이는 비용을 부모가 죽을 때 물려주는 유산 가치로 환산하면 8 ~16 백만달라, 한화로 90억 ~ 180억에 달한다. 요즘의 엘리트 부모가 고급 교육을 통해 자녀에게 엘리트 지위를 세습하는데 들이는 비용은 과거 귀족 계층이 자녀에게 물려준 재산 가치보다 결코 적지 않다.
저자는 책의 후반에서 성과주의는 과거에 귀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화라고 비판한다. 과거에 귀족이 선천적인 우수성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한다면, 성과주의 사회의 엘리트는 뛰어난 능력과 높은 생산성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귀족의 선천적인 우수성이 거짓이듯이, 엘리트의 뛰어난 능력과 높은 생산성 또한 거짓이다. 요즈음 엘리트의 뛰어난 능력은 그들의 부모의 엄청난 교육 투자가 만들어 낸 결과물에 불과하며, 그들의 높은 생산성은 높은 기술을 가진 사람만이 높은 생산성을 산출하도록 일의 세계를 조직하였기 때문이다. 중류층의 평범한 기술이 쓸모 없어지도록 일을 조직하지 않았다면, 엘리트의 기술 독점과 높은 생산성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과주의 체제가 문제가 많다면 이를 어떻게 불식시킬것인가? 소수의 엘리트를 만들어내는 사립학교를 규제해야 한다. 엘리트 학교들이 일정 비율 이상 중하층 출신의 자녀를 입학시키도록 규제하고, 소수 엘리트만 다니는 학교가 누리는 비영리 세금 감면 혜택을 중단해야 하며, 엘리트 학교의 등록금을 면세 조치하는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 높은 기술을 가진 엘리트에게 결정과 보상이 집중되도록 되어 있는 일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의료계에서는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의 영역을 넓히며, 의사가 아닌 간호사의 권한을 넓혀야 한다. 금융계에서는 복잡한 금융 상품이나 고위험 상품의 개발을 규제하여 보통 기술의 종사자가 담당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법조계에서는 변호사의 업무를 포괄적으로 법무 종사원에게 개방하여 법률 행위의 성과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구조 자체를 허물어뜨려야 한다. 기술 개발 분야에서는 아무런 제안이 없다.
이 책은 성과주의의 폐해에 대하여서는 길게 서술하지만, 그렇다면 성과주의의 대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짧게만 언급한다. 그가 제시한 대안들은 성과주의를 무력화시킬만큼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하간 높은 기술과 능력이 성장과 풍요를 낳은 것은 사실이지 않는가? 스티브 잡스의 기술이 오늘의 스마트폰 문화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80대 20의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80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20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보상을 지급한다면 인센티브 체계의 붕괴로 자본주의가 지속되지 못하고 기술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결국 공산주의의 말로를 똑같이 경험할 것이다.
저자는 소수의 엘리트가 그들이 누리는 높은 보상에 합당한 성과를 낸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대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일반 사원의 200배 이상의 성과를 내는지 의심스럽다. 금융기관의 딜러가 일반 사무직의 500배 이상의 성과, 혹은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는가? 잘나가는 변호사가 일반 사원의 500배의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는가? 그렇게 높은 보상이 과연 그의 높은 능력이 만들어낸 생산성의 반영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즉 그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며, 그의 높은 생산성은 그가 홀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능력이 떨어지거나 혹은 부모가 그만큼 교육에 투자하지 않았던 직원이 상당히 기여하여 함께 만들어 낸 것이라면, 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 금융기관의 딜러, 전문의, 대형 법률회사의 변호사가 그렇게 높은 보상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의사가 높은 보상을 받는 것은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거나, 의사로 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부족하거나, 의사가 특별히 더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다. 의사 직업에 진입하는 진입 장벽이 높이 쳐져 있으며, 의사의 서비스 가격을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통해 높은 수준으로 규제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바드 법대를 졸업한 사람이 초봉으로 수억을 받는 것은 하바드 법대를 나오면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하바드 법대라는 좁은 문이 졸업자에게 부여하는 독점적 시장가격 때문이다. 하바드 법대는 이러한 독점적 시장 가격을 관리하기 위해 학생수를 늘리기 보다 등록금을 높이고 기부금을 많이 받는 방식으로 독점의 프리미엄을 관리한다.
이 책에서 엘리트들이 성과주의의 쳇바퀴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그의 주장 역시 의심스럽다. 그들은 그 생활을 선택했고 혜택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만일 그게 그렇게 지옥같은 생활이라면 왜 그들의 자녀에게 그러한 지위를 물려주려고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겠는가? 저자는 성과주의의 폐해에 대하여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반복적으로 서술한다. 예일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법대 교수인 자신의 삶이 빡빡하다는 데에 대해 궁시렁대는 소리처럼 들린다. 성과주의 이념을 대체할 것이 현재로는 보이지 않는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과가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보상한다는 원칙은 민주주의와 가장 잘 맞는다. 그 대안은 추첨에 따라 지위와 보상을 나누어준다는 것일터인데, 아직 사람들은 이러한 대안을 선택할만큰 성과주의의 부작용에 진저리를 내고 있지 않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양질의 교육 기회를 더 넒은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경쟁의 기회를 확대하여 성과주의의 혜택이 더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 성과주의 자체는 피곤한 것이 사실이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 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 않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연공서열이나 성과급을 반대하는 주장은 바로 성과주의를 피하고 싶어하는 기득권자들의 억지이다. 성과주의가 가장 공정한 원칙이라는 것이 시대의 소리며, 시간이 갈수록 성과주의가 더 확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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