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J. Sandel. 2020.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Farrar, Straus and Giroux. 227 pages.
저자는 사회철학자로, 이 책은 미국 사회에서 성과주의 혹은 업적주의(meritorcracy)가 지배하면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응 방향을 제시한다. 성과주의 혹은 업적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원칙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칙이 지배할 때, 상위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상위 지위를 얻었다는 자긍심을 갖고 사는 반면, 하위 지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모자라서 어렵게 산다고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성과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패배한 사람을 낮추어보는(condescend) 반면, 패배한 사람은 수치심과 함께 승리자에 대해 불만과 분노에 가득차게 된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되고, 영국에서 유럽탈퇴 결정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이들, 성과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
1980년대 이래 세계화와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의 시장 경쟁력은 높아졌으며 소득이 크게 증가한 반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은 좋은 일자리를 잃고 열악한 서비스 일자리만 남은 처지에 빠졌다. 지난 사십년 동안 미국의 경제는 잘 나갔는데, 상위소득자의 소득은 현저히 증가한 반면, 중하위 소득자의 소득은 정체되었다. 그 결과 소득 불평등은 높아졌다.
근래로 올수록 대학 졸업장이 경쟁에서 승리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문제는 미국 성인의 3분의 1만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이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3분의 2의 사람들이 이러한 변화를 접하면서 어떤 감정을 가질지 미국의 엘리트들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이들에게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더 쓰라리게 하고 분통을 살뿐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라도 성공할 수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이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미국은 서구 유럽과 비교하여 사회이동이 덜 활발한 사회이므로,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의 이념은 더 많은 미국인을 좌절에 빠뜨린다.
미국의 대학이 사회적 성공을 위해 필수적 경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 교육은 지위 상승이동의 경로가 되지 못한다. 우수한 대학의 학생 중 상위층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우수한 대학은 사실상 상위층의 지위 대물림의 수단이 되었다. 상위층 자녀는 대학 준비과정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으며, SAT 성적은 부모의 소득 수준과 비례한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은 지난 사십년간 갈수록 치열해졌다. 우수한 대학에 입학하는 경쟁에 몰려 젊은이들의 정신과 인생이 좀먹는 정도에 이르렀다.
요컨대 성과주의가 심해지면서 미국의 정치는 파행에 빠져 비민주적 대중영합주의가 득세하였으며, 많은 중하층 사람들이 좌절과 분노에서 자기파괴적 행위를 하며, 중상층 젊은이들도 경쟁에 치여서 전인적인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 어떻게 성과주의의 폐해를 막을 것인가?
저자는 우선 우수한 대학의 대학입시 방식의 개혁을 제안한다. 성과에 따라서 줄을 세워서 입학을 결정하는 방식을 버리고, 대신 일정 학업 능력을 넘어선 학생들 풀에 대해 추첨을 통해 입학을 허용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우수한 대학 졸업장을 얻는 것이 완전히 개인의 성과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사실 사회적 성공이 완전히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다양한 요인이 개입되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사회적 성공의 핵심 경로인 대학 입시에서부터 운의 작용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성과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이것은 완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이룬 것이라는 자긍심에서 실패한 사람을 낮추어보는 태도가 조금은 사라질 것이며, 경쟁에 실패한 사람도 이것이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쓰라림이 덜 할 것이다.
개인이 시장경쟁에서 거둔 성과가 아니라 개인이 사회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개인의 가치가 결정되도록 사회제도를 조정해야 한다. 저자는 이를 '분배에서의 정의'(distributive justice)에 대비되는 용어인 '기여에서의 정의'(contributive justice)라고 지칭한다. 개인이 시장경쟁에서 거둔 성과는 개인의 소득으로 귀결되는 데, 이는 그가 사회에 기여한 정도와 반드시 일치 하지는 않는다. 이 두가지가 어긋나는 경우, 이 두가지를 근접시키려는 사회적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금융시장에서 투기를 통해 엄청난 소득을 거둔 사람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서, 사회에 기여한 정도보다 보상을 덜 받은 사람, 예컨대 청소부나 학교 선생님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재산 소득에 세금을 많이 부과하는 대신, 노동 소득에는 세금을 면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있도록 최저한의 사회적 조건을 마련해 준다면, 성과주의에 따른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문제의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 아무리 능력에 따라 경쟁해서 패한다고 해도 인간다운 삶이 보장된다면 패자의 쓰라림은 덜 할 것이다. 또한 승자와 패자의 보상의 간격이 크지 않다면, 즉 소득 불평등이 크지 않다면, 승자와 패자의 갈림이 덜 쓰라릴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공공재(common good)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승리와 패배에 관계없이 누리는 부분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성과주의의 부작용을 말하지만, 사실 성과주의는 서구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이룬 동력이다. 능력과 노력을 가진 사람에게 중요한 자리를 배당하고 보상을 많이 주는 시스템은, 사회발전을 추구하는 가장 과학적 기술적 접근방식이다.과거에 신분사회, 즉 능력과 노력에 관계없이 태어난 지위에 따라 삶이 결정된 사회의 부정의와 비효율을 생각한다면 성과주의가 얼마나 우수한 체제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성과주의의 부작용을 걱정하기 전에,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한다는 성과주의 이념이 완벽히 구현되지 않은 것을 먼저 문제삼아야 한다. 부모의 지위에 따라 자식에게 기회의 차등이 주어지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가야할 길이 멀다. 저자가 지적하는 미국이 당면한 성과주의의 부작용이란 것은, 사실 성과주의 자체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성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데 따른 문제이다.
기회가 완벽히 평등하게 주어졌음에도 실패하는 사람의 좌절과 분노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들에게 인간적으로 살만한 수준의 삶을 보장하고, 그들의 자녀에게 부모의 실패와 완전히 독립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면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다. 자신은 능력과 노력이 모자라 실패했더라도, 자신의 자녀가 부모의 실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새로운 인생의 게임을 시작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결코 게임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이 정말 공정하고 믿는다면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식에게 새로운 공정한 게임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코 자신에게서 게임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인 노동계층이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과 함께 자신의 자녀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반발하는 것이지, 성과주의 그자체에 반발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열심히 했음에도 자신에게 돌아온 몫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빈약하다고 느낄 때, 분노한다. 게임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생각에는 오류가 있다. 세계화가 되면서 그들보다 더 가난한 제삼세계의 사람들이 그들만큼 열심히 살지만 그들보다 덜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다만 그들보다 더 열심히 산 것은 아닌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거나 대도시에 교육 많이 받은 사람들이 엄청난 몫을 가져가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이 그들의 분노의 근원이다. 불평등이 그들의 분노와 좌절의 원인이며, 지난 사십년 동안 그들의 소득이 정체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남은 잘 나가는데 나는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만큼 사람을 좌절시키고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이 책은 저자의 강의 명성만큼 좋은 책은 아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논의가 답답하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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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Baldwin. 2016. The Great Convergence: Information Technology and the New Globalization. Belknap. 301 pages.
저자는 경제학자로, 이 책은 과거에 상품 교역이 확대되던 것으로부터 1990년 무렵을 기점으로 생산과정의 국제분업(Global Value Chain)이 확대되는 것으로 세계화의 조류가 바뀐 과정을 설명한다. 물건, 아이디어, 사람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동하는 비용이 낮아지면서 세계화가 전개되었다. 19세기 초반 산업혁명을 계기로 물건의 이동 비용이 낮아지면서 국가간 상품의 교역이 확대된 것이 첫번째의 세계화라면, 1990년 무렵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아이디어의 국가간 이동 비용이 낮아지면서 먼 거리에서도 생산과정을 조정 통제할 수 있게 되어 생산과정의 일부를 떼내에 해외로 이전한 것이 두번째의 세계화이다.
첫번째의 세계화에서 생산하는 곳과 소비하는 곳을 분리할 수 있도록 했다면, 두번째의 세계화에서는 생산 과정을 구성하는 단계를 세밀하게 쪼개서 각 단계의 효율을 높이고 비용을 최소화하도록 여러 나라에 생산 과정의 조각을 흩어 놓는 국제적 생산 분업체제(Global Value Chain)를 탄생시켰다. 선진국의 고급 기술과 개발도상국의 저임금이 결합된 생산방식은, 과거 상품 교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에서 선진국은 고급기술과 높은 임금을 결합하여 생산을 하고, 개발도상국은 낮은 기술과 낮은 임금을 결합하여 생산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획기적으로 다국적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주었다. 이제 국제분업체제에 참여하지 않으면 어느 선진국 기업들도 국제 경쟁에서 탈락할 수 밖에 없다. 반면 개발도상국은 이러한 국제분업체제를 통해 과거에는 가능하지 않던 생산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일자리가 탄생하고 소득이 높아지는 기회를 잡았다.
1990년 무렵 개발도상국은 선진국으로부터 생산과정의 부분을 유치하기 위해 일제히 자발적으로 관세를 낮추었다. 선진국의 생산과정이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려면 유형, 무형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와, 물건과 정보가 원활하게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있는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마련되어야 한다. 선진국의 생산과정을 유치한 개발도상국은 모두 선진국에 인접한 나라들이다. 아직 사람의 국제간 이동의 어려움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진국에 인접해야만 원격 조정과 통제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유럽인근의 동유럽이 연결되었으며, 미국인근의 멕시코가 연결되었으며, 일본 인근의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연결되어 생산 클러스터를 형성하였다. 인도는 예외적으로 선진국으로부터 서비스 일자리를 떼어받았기 때문에 거리의 제약을 덜받고 있다. 국제분업체제에서 선진국과 이들에 인접한 개발도상국이 생산클러스터를 형성하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상대적으로 먼 거리에 위치한 남미와 아프리카는 국제분업체제에 참여하지 못하여 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진국이 저임금 노동집약의 일을 개발도상국에 떼어주면서, 기술수준이 낮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어려움에 빠졌다. 이들은 해외이전이 불가능한 서비스 일자리를 맡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기술수준이 낮고, 열악한 임금에 불안정한 노동조건의 일자리이다. 이들의 불만과 분노가 트럼프나 영국의 EU 탙퇴와 같은 대중영합주의적 정치의 부상을 가져왔다.
국제분업체계가 확대될수록 선진국에서는 생산 서비스의 일자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제품 제조 단계 이전의 생산 서비스인 기획, 연구 개발, 디자인, 금융, 등의 일과, 제품 제조 단계 이후의 생산 서비스인 유통, 마켓팅, 애프터서비스 등의 일이 제품 전체의 부가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반면 개발도상국이 맡는 제품 제조과정 자체의 부가가치의 비중은 과거에 비해 낮아졌다. 국제분업체계가 진출한 분야는 의류, 신발 등과 같은 경공업에서 기계, 전자, 자동차 등과 같은 중공업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나이키, 유니클로, H&M, ZARA와 같은 선진국의 의류 기업들이 전자라면, 애플, 다이손, 토요타 등이 후자이다. 국제분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이들 다국적 기업들은 선진국에는 제조시설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일부 고부가가치 부품 공장만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제조는 개발도상국에서 담당하고 있다.
국제분업 체계에서 선진국은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데 치중하면서, 선진국의 도시는 아이디어 생산지가 되었다. 아이디어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인접하여 자주 의사소통을 할수록 더 생산되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교육, 기술 수준을 높이고, 아이디어의 실험과 확산이 원활하도록 개방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개발도상국은 저임금의 노동집약의 일을 선진국으로부터 떼어 맡으면서 일자리가 늘어나고 점차 기술수준이 향상되어 국제분업의 부가가치 생산위계에서 상위로 이전하려고 노력한다. 한국과 중국은 상위로 이전하면서, 임금 수준이 높아졌으며, 과거에 자신들이 맡던 하위의 일을 자신들보다 임금수준이 더 낮은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은 국제분업체계에서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는 입장이므로, 국제분업에 더욱 깊숙이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제분업에 참여하면서 국내 산업에 파급효과(spillover effects)가 높아져 가치사슬의 상위체계로 이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제분업이 더욱 확대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선진국의 고급기술과 개발도상국의 저임금을 결합한 생산방식은 경쟁력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이 더 확산되면 더 확산었되지 퇴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국제분업의 대상이 확대되고, 생산과정이 국가간에 더 세분하게 쪼개져 흩어지며, 국제분업에 참여하는 나라들이 소득이 낮은 나라들로 더욱 더 확대될 것이다.
사람의 국가간 이동 비용이 낮아지면 세번째의 세계화가 전개될 것이다. 사람들이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대량 이동하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비용 때문에 가까운 시일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여 원격으로 일을 하는 기술이 발달한다면, 노동자가 개발도상국에 있으면서 로봇이나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해 선진국에서 일할 수있을 것이다. 현재도 의사가 원격으로 수술을 집행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앞으로 다양한 서비스 노동에 확대될 것이다. 직접 사람이 이동하지 않고 가상현실을 이용해 회의를 하는 기술이 발달한다면, 먼거리에서도 아이디어를 조정하고 만들어내는 일의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다.
저자는 세계화의 신조류인 생산과정의 국제분업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의 서술에 몇가지 미흡한 점이 있다. 첫째는, 선진국에서 낙오된 노동자들의 불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선진국의 높은 기술과 개발도상국의 저임금의 결합이라는 경쟁력이 엄청나게 높은 생산방식은 경제 논리만큼 빨리 확대되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사회적 분배장치를 통해 승자와 패자의 이익이 공유되도록 하여 이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과 같다. 불평등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 이익공유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두번째 미흡한 점은, 생산제조 과정의 국제분업의 다음 단계로, 생산자 서비스의 국제분업이 앞으로 다가올 변화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저자는 발달된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원격 노동과 가상현실로 생산자 국제분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지만, 사실 생산자 서비스의 국제분업은 로봇이나 가상현실에 의존하지 않는 다고 해도 개발도상국의 기술 수준이 높아지면서 앞으로 계속 확대될 영역이다. 현재 인도가 선진국의 생산자 서비스(producer service)의 일부를 떼어 받아 일하고 있다면, 언어 장벽이 완화되면서 인도와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들도 생산자 서비스의 국제분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개발도상국의 기술수준이 높아진다면, 그들이 생산자 서비스의 하위부분을 맡으려고 하는 열망이 커질 것인데,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임금 격차가 상당하기 때문에 이러한 열망은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은 생산자 서비스에서도 부가가치가 높은 상위 영역은 선진국 노동자들이 차지하고, 일부 개발도상국은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하위의 생산자 서비스 영역으로 침투할 것이 분명하다. 이는 가상 현실이 아니라도 현재의 정보통신 기술로도 가능한 일이다.
선진국의 대인 서비스(personal service)는 어떻게 될까? 이는 기술수준이 낮고, 저임금에 불안정한 노동이다. 이 서비스는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해외로 이전하는 것이 어렵다. 로봇과 같은 정보통신이 결합된 자동화 기술에 의존하는 부분이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기계가 사람의 감정 노동을 대체하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이민자가 늘어나서 이 부분을 맡을 수 밖에 없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대인 서비스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높아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서비스는 앞으로도 생산성이 크게 높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소득이 높아지고 인구가 고령화될수록 대인 서비스의 수요는 늘어난다. 과연 선진국 사람들이 높은 서비스 가격을 감수하면서 이민자를 제한하는 선택을 할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이민자를 제한한다면 삶의 질이 낮아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이 개발도상국 사람들을 대인 서비스 노동력으로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책은 세계화와 관련된 생각을 자극하는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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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urt Kuttner. 2018. Can Democracy survive global capitalism. W.W.Norton. 309 pages.
저자는 American Prospect 라는 진보적 시사 잡지의 창간인으로, 이 책은 세계화, 특히 세계 자본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대중영합주의 정치가 출현한 근래의 경향을 분석한다. 왜 그러한 흐름이 전개되는지, 그러한 현상을 막으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등을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을 배경으로 진단한다.
미국은 1930년 대공황시기에 뉴딜정책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탈피하고 민주주의를 지킨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제2차 대전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고, 모든 계층의 소득이 향상되고, 사회보장과 복지제도가 확대되고, 소득불평등이 감소하였다. 서구 유럽 역시 전후의 폐허를 딛고 부흥하면서 복지국가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자본가, 특히 금융자본의 세력은 억제되었으며, 브레튼 우즈 국제금융체제 덕분에 국제금융시장은 안정되고, 노동조합 가입율이 높게 유지되고, 완전고용의 목표가 실현되었다.
1973년에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미국이 금본위체제를 포기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지고, 미국의 무역 적자와 재정적자가 확대되고, 경제불황이 심각해지면서 1980년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이 들어섰다. 레이건 대통령은 시장 위주의 신보수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다. 규제를 풀고,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복지를 축소하고, 세금을 감면하면서 자본가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자본가, 특히 금융자본은 다양한 금융상품을 개발하여 위험이 높은 투자를 하면서 큰 돈을 벌었으나, 결국 고위험의 금융 행태는 실물경제와 어긋나게 되어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하였다. 국민의 세금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위험한 행위로 큰 돈을 번 자본가는 책임을 지지 않고 여전히 고위험의 금융 행태를 계속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신보수주의 정책으로 어려움에 빠졌다. 시장의 힘은 강화된 반면 노동자의 조직력은 약화되면서 자본가에 대비해 노동자의 협상력은 크게 떨어졌다. 생산성 증가분을 자본가가 가져간 반면, 노동자의 임금은 정체되었다. 국제분업체제가 확대되면서 미국의 공장은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였고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과거에 좋은 제조업 일자리는 사라지고 노동조건은 악화되었다. 기술수준이 낮은 노동자에게는 불안정하며 낮은 임금의 서비스직 일자리만 남게되었다.
세계화로 국가와 지역들 사이에 자본을 유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세금은 낮아지고, 노동자의 힘은 약해지고, 반면 국제 자본의 힘은 강해졌다. 재정이 악화되면서 유럽에서도 과거에 후했던 복지제도는 후퇴했다. 전세계적으로 진보주의 세력은 약해진 반면, 보수주의 세력은 강해졌다.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여 기존의 제도권 정치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대가 높아졌고, 대중영합주의 정치인이 호응을 얻게 되었다.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주의 정치인은 노동자의 불만에 감정적으로 부응하였지만, 실제 정책에서는 노동자보다는 자본가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를 부정하고, 폭력을 옹호하고, 반대를 허용하지 않는 파시즘의 정치인이었다. 노동자의 불만을 계속 방치한다면, 결국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권위주의적 정치가 득세할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저자는 각 국가가 주권을 행사하여 세계 자본의 힘을 제한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제도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경제 변화에 잘 적응하도록 적극적인 노동정책을 펴고, 연금, 의료보험 등의 사회보장의 내실을 높여 노동자의 삶이 안정화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국제 자본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정부에 세금을 감면하도록 압박하고, 노동자 보호에 제한을 가하도록 하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선진국이 함께 협력하여 국제자본의 힘을 제한할 때 이것이 실현될 수있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모두 자본가에 포획되어 있으므로, 기존 노선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개혁이 가능하지 않다. 국민의 불만이 쌓이고 쌓여 진보주의 정치인이 출현하고, 그가 국민의 적극적 지지를 등에 업고 자본가의 세력을 제한하고 노동자 보호 제도를 확충하는 과감한 개혁을 하여야 한다.
저자의 20세기 미국과 유럽의 정치경제의 전개에 대한 서술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선진국의 진보적 지식인의 주장이 그렇듯, 그것은 대체로 선진국의 입장만을 반영한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1970년대 이래의 세계화로 선진국 자본의 힘이 강화되고 기술수준이 낮은 노동자의 힘이 약화된 것은 맞지만, 이 기간 동안 개발도상국의 빈곤이 크게 개선되고 많은 사람의 소득이 상승하였다. 세계화로 선진국 자본이 거둔 이익보다 개발도상국에 일반 사람들의 소득의 증가분이 훨씬 더 크다. 즉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1970년대 이래 세계 정치경제의 전개는 매우 긍정적이다.
정치는 각 나라 내에서 벌어지는 것이므로, 노동자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 자본가의 경제 행위가 제한되지 않는다면, 정치적 혼란이 경제를 망쳐버릴 것이라고 한다. 선진국 경제에 혼란이 발생하면 개발도상국의 경제에도 어려움이 전파될 것이다. 결국 세계화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저자의 진보적 정책제안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전반적인 진단과 방향 제시는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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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경제에서 혁신이 사라지고 있다. (0) | 2021.01.24 |
Samuel Huntington. 2006(1968). 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 Yale University Press. 461 pages.
저자는 저명한 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정치학계의 고전이다. 개발도상국이 전통사회로부터 벗어나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정치가 발전하는지 서술한다. 전통 사회는 왕과 귀족, 지주, 성직자로 구성된 소수의 지배층이 지배했다. 전통적인 정치체제는 권력자의 인적인 지배에 의존했다. 권력자가 교체되면 정치도 따라서 바뀌었다. 반면 근대적 정치체제는 정치가 제도적 과정을 통해 수행된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정치 참여의 범위가 확대되어 상층계급으로부터 중류층과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대된 것이 민주주의 체제이다. 개발도상국은 어떻게 정치의 제도화와 정치 참여의 확대과정을 거치는가?
저자는 정치가 근대화될수록 폭력과 부패가 사라질 것이라는 단선적인 예측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정치 제도화와 정치참여의 확대라는 면에서 볼 때, 낮은 수준의 정치 발전 단계에서 높은 수준의 정치 발전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초반에는 폭력과 부패가 확대되다가 정치가 성숙하고 나서야 폭력과 부패가 줄어든다고 주장한다. 마치 소득 불평등과 경제발전의 관계와 유사하다. 전통사회에서는 정치 제도화가 안되어 있고 정치 참여도 매우 제한적이므로 정치가 불규칙하게 안정과 불안정을 반복한다. 정치 발전의 초기단계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증폭되는 이유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치 참여가 정치 제도화보다 앞서 나가기 때문이다. 정치 제도화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며 시행착오를 거쳐 조금씩 진전되는 반면,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식민지 통치로 벗어나자 마자 정치와 경제에 대한 기대가 크고 이러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정치 참여를 분출한다. 정치 발전 초기단계의 엘리트와 중류층은 정치 선진국의 정치를 유학이나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들으면서, 자신의 나라의 정치와 경제 수준의 수용 범위를 넘어 요구하고 정치 참여를 한다.
전통적 정치체제로부터 변화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혼란이 발생한다. 정치의 제도화는 아직 충분치 않은데, 사회세력들의 정치참여 욕구가 확대될 때 집단들 사이에 갈등과 폭력이 발생한다. 정치가 제도화되면 다양한 집단의 요구를 정당이나 이익단체를 통해 여과하여 조정 과정을 거쳐 합의를 도출할텐데, 이러한 여과 조정 장치가 없기 때문에 집단들의 요구는 기존 권력과 부딛치고 또 집단들 서로간에 부딛치면서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폭력은 정치 참여가 확대되는 정치 근대화 과정의 일부이다.
폭력과 마찬가지로 부패 역시 정치가 근대화되는 과정의 일부이다. 전통사회에서는 경제권과 정치권이 분화되어 있지 않았고 정치 권력은 권력자의 인적인 지배의 성격이었으므로, 부패, -즉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정치 권력을 이용하는 것,- 라는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정치의 제도화에 따라 공적인 정치 행위와 관료의 행정이 담당자 개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하여 공적인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의 제도화가 이루어지기 전 단계에서 부패란, 사회적 세력, 특히 경제적 힘을 지닌 사람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는 방편으로서 긍정적 역할을 한다. 사회적 세력의 요구를 수용할 정치적 제도가 성숙되지 않았으므로, 정치인과 관료는 자신의 판단과 책임으로 이들의 요구를 제한적으로 수용하는데, 이들이 사회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댓가로 받는 뇌물이란 바로 이들의 판단과 책임에 대한 보상이다. 만일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에게 뇌물을 건네주면서 사회세력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수용하는 경로가 차단된다면, 사회세력의 요구는 결국 쌓이고싸여 폭력과 혁명으로 폭발할 것이다. 사회세력의 요구를 걸러주는 정치 제도가 잘 작동하면 뇌물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진다. 경제적 힘을 지닌 사람은 뇌물을 주는 대신 공식적 정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 하기 때문이다.
군부는 전통사회에서 가장 잘 조직화 되어 있고 가장 잘 근대화되어 있으므로,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정치개혁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집단들 사이에 세력 충돌이 발생하여 혼란이 벌어질 때, 군부는 질서의 회복을 주창하면서 권력을 잡고, 중류층과 연합하여 개혁을 추진한다. 그러나 정치가 제도화된 단계에 들어서면, 군부는 보수적 가치와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반개혁적 성향을 띤다.
봉건사회는 권력이 소수의 지배층에 나누어져 있었다. 정치 근대화의 출발은 권력의 중앙집중과정으로 시작된다. 왕은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중류층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면서 권력을 강화한다. 왕은 귀족, 지주, 성직자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서 근대적 개혁을 주창한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강화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중류층의 정치 참여 확대를 유발하여 군주제와 민주적 요구간에 충돌을 낳는다. 한편, 전통사회에서 왕과 관료를 중심으로 권력의 중앙집중 체제가 잘 구축되어 있는 경우, 근대적 개혁은 오히려 지체된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의 상실을 우려하여 밑으로부터의 참여 요구를 적극적으로 억누르려 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중앙집중체제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서, 왕의 중앙집중 노력에 대한 견제의 목적으로 기존의 지배층들은 오히려 왕에게 개혁적인 요구를 하기도 한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왕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보다 넓은 집단의 정치 참여와 정치 제도화를 요구한다. 결국 왕과 기존의 지배층들 사이에 알력이 정치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건 군주제는 정치 근대화에 따라 수세에 몰리고 결국 퇴장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정치학 전공자라면 한번은 읽어야 하는 필독서이다. 개발도상국의 정치 발전 과정에 관한 일반론을 포괄적으로 제공한다. 중남미와 중동의 사례를 주로 많이 들고 아프리카와 동남아의 사례도 적지 않다. 다만 소련을 정치적으로 제도화가 잘된 정치 선진국으로 서술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 책이 쓰인 1960년대 후반만 해도 소련이 잘 나가기 때문에 그렇게 보았겠지만, 이후에 밝혀진 사실은 소련은 외견과 달리 속에서 썩고 있었다. 미국은 비교적 정치 제도화가 잘 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흑인을 완전히 배제한 미국의 정치는 전혀 건강하지 않았다. 그는 이 책에서 흑인의 배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책에서 제시하는 사례들이 오래전의 일이라 논의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절반쯤 읽고 중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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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n Levitsky and Daniel Ziblatt. 2018. How Democracies die. Crown. 231 pages.
저자는 남미 정치와 유럽 정치를 전공한 정치학자들로, 이 책은 미국에서 도날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과정을 남미와 유럽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원활히 작동하는 것은, 민주주의 헌법과 같은 형식적 제도의 힘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상대를 합당한 경쟁자로서 인정하며 반대 행위를 인내하고 상대와 타협하는 비공식적 규범의 힘이라고 한다(tolerance and forbearance).
미국의 정치는 1970년대 중반이래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양극화가 심해졌다. 지난 수십년동안 공화당 정치인은 상대를 합당한 경쟁자가 아니라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무너뜨려야 하는 적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전통으로 내려오던 정치적 신사도를 저버리고 법이 허용하는 한 최고의 극단적 방법을 쓰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도날드 트럼프는 그러한 근래의 흐름에서 출현한 극단적인 정치인이다.
왜 근래에 미국의 정치가 그렇게 양극화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1960년대 이래 미국의 정치지형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1960년대 민권운동 이전에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우호적인 경쟁자로여기며 정치를 했다. 이는 1870년대에 남북전쟁 이후 남부와 북부가 정치의 장에서 흑인을 완전히 배제하고서 만들어진 우호적 관계이다. 문제는 민권운동으로 흑인이 미국의 정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서 발생했다.
1980년대 이래 민주당은 유색인과 세속적 세계관쪽으로, 공화당은 백인과 기독교 쪽으로 동질성이 높아졌다. 공화당의 지지기반인 백인 민족주의자 White Christian nationalists 들은 1960년대의 민권운동과 이민법 개혁이래 흑인과 유색인 이민자가 점차 늘면서, 과거 미국의 주류로서 압도적 다수의 지위가 무너지는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다수 집단의 지위가 도전을 받을 때 이들은 상대에게 매우 공격적이 되는데, 공화당이 1979년의 뉴트 깅그리치 출현 이후에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무너뜨리고 제압하려는 전술을 구사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바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백인 민족주의자들은 오바바를 미국에 충성하지 않는 진짜 미국인이 아닌 un-American 사람으로 매도하였으며,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오바마 정부의 일을 모두 반대하여 좌절시키는데 총력을 다하였다. 이런 극단적인 전술이 횡횡하면서 정치가 파행을 보이자, 기존의 정치계를 깡그리 부정하고 국민의 감정에 호소하는 대중영합주의적 외부자 populist outsider 인 도날드 트럼프가 기회를 잡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뒤 미국이 오랫동안에 걸쳐 만들어 놓은 민주적 전통과 관행을 무시하고 극단주의와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정치를 펼친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권위주의로 이행하는 몇가지 징표가 있다. 첫째는 정치인이 민주적 게임의 규칙을 부정하며, 둘째는 정치적 상대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셋째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폭력을 허용하거나 장려하며, 넷째는 언론과 정치적 경쟁자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한하려 한다. 트럼프는 이러한 네가지 징조를 모두 보였다. 트럼프는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다고 하며 선거의 정당성을 훼손하려 하였다. 트럼프의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범죄자로 매도하고 잡아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지지자들의 폭력적 행동을 지지하거나 용인하였으며, 세계의 독재자들의 인권 탄압을 옹호하였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공격하였으며, 정치적 상대를 제거하려 하고 탄압하였다.
근래에 미국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정치적 다툼과 민주주의의 퇴행은 과거 중남미나 유럽에서 익히 보던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페루의 후지모리, 베네쥬엘라의 차베스, 터키의 에르도안, 헝가리의 오르반, 러시아의 푸틴,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중 일부는 처음부터 권위적 통치자로 등장하지 않았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상대가 갖은 수단을 써서 이들의 통치를 반대하고 이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들도 이러한 반대에 극단적 수단으로 맞받아쳐 권위적 통치로 흐르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과정을 설명하자면, 첫째, 정치적 심판관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경찰, 검찰, 정보부, 세무서와 같은 법집행 기관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고, 사법부를 무력하게 하고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며, 입법부를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버린다. 둘째, 주요 경쟁자를 배제시킨다. 자신에게 반대하며 굴복하지 않는 야당 정치인, 언론인, 기업가는 자신의 충견을 동원하여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셋째, 자신이 절대권을 행사도록 규칙을 바꾸어 버린다. 헌법을 바꾸고, 사법부와 입법부를 구성하는 법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꾼다.
미국이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양극화를 초래한 주체가 공화당에 있으므로 공화당이 바뀌어야 한다. 백인 민족주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공화당의 지지 기반에서 탈피하여 유색인과 이민자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화당의 강력한 지지층인 백인 노동계층은 1970년대 후반이래 경제변화로 삶이 어려워졌는데, 이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소득 불평등을 줄이고, 적극적 노동정책과 보편적 복지정책을 통해 백인 노동계층의 삶의 위협이 줄어들면 그들의 극단주의적 태도도 완화될 것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민주주의 헌법을 가진 나라로 자부심이 크지만, 미국은 결코 예외적이지 않다. 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될만큼 건강하게 진행된 것도 아니다. 미국은 건국이래 근래까지 흑인을 배제하였기에 백인 정치인들 사이에서 화합이 유지되었으나, 아직까지 흑인과 이민자를 대등한 구성원으로 포용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세계의 다른 다민족 국가에서도 구성원이 잘 화합하는 민주주의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독재 시대에 정치인들의 행태가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상대가 극단주의적 책략을 구사한다고 하여 이에 맞받아쳐 극단주의적 전략으로 나아가면 결국 파국에 이를 뿐이라고 경고한다. 정치 지도자들이 이러한 위험을 예감하고 타협의 노력을 펼쳐 성공한 사례로 칠레를 든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극단적 책략이 먹힌 사례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과 독일의 나찌를 든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기초체력이 약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다. 비교 정치학의 폭넓은 지식을 배경으로 현재 미국의 정치 지형을 잘 분석한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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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rik Erixon and Bjorn Weigel. 2016. The Innovation Illusion: how so little is created by so many working so hard. Yale University Press. 238 pages.
저자는 경영컨설턴트들로, 이 책은 서구 경제에서 혁신적인 시도가 사라지는 원인을 탐색한다. 저자는 네가지 원인을 들고 있는데, 자본의 성격이 늙고 있고(gray capitalism), 주식회사의 지나친 관리중심주의(corporate managerialism), 세계화(second-generation globalization), 복잡한 규제(complex regulation)가 그것이다.
서구 경제에서 기관투자가의 영향이 커지고 있다.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이들이 소유한 자본의 비중이 늘어나며, 이들은 뮤츄얼 펀드, 연금기금, 보험 등의 기관투자가들을 통해 투자한다. 서구의 경제가 연금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사회(rentier's society)로 변하고 있다. 고령인구 소유의 자본은 젊은 인구 소유의 자본과 투자 성향이 다르다. 고령 인구 소유의 자본은 결과가 불확실한 혁신적 실험을 선호하지 않으며, 안정된, 확실한, 단기적 이익을 선호한다. 그들은 주식에 투자하기보다 채권에 투자하는 것을 선호한다. 자본주의 선호를 반영해야 하기에, 회사는 불확실한 혁신을 시도하지 않는다. 재무적 관심이 지배하는 회사는 혁신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지 않는다.
서구의 주식회사의 소유는 매우 많은 주주에게 분산되어 있다. 기관투자가가 소유하는 부분이 절반 이상에 달한다. 작은 지분을 가진 주주나 기관투자가들은 경영자를 통제하는데 한계가 있다. 경영자들은 자신의 이익, 즉 자신의 지위를 안정되고 공고히 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들은 불확실한 실험으로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주에게 인정받기 위해 단기적 이익에 치중하며, 회사가 거두는 이익을 다음 사이클에 혁신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주주들에게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통해 돌려주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이 불확실한 혁신보다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데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서구의 경제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규제를 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복잡한 규제는 관료들에게 이익이 되며, 기존 시장의 지배자에게도 이익이 된다. 신규 진입을 억제하는 진입장벽을 높게 쌓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서구 유럽은 미리 조심하는 것을 원칙 precautionary principle 으로 하는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새로운 사안에 대해 예방적인 규제 preventive regulation 남발하는데, 이는 새로운 실험을 억제하는 독이다. 경제사학자 Mokyer가 주장하는 permissionless innovation가 활발할 때 사회는 발전할 수 있었다. 영국은 과거에 그런 문화를 발전시킨 반면, 서구 이외의 다른 문화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할 때마다 규제기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보수적인 문화가 지배했기에 기술발전이 어려웠으며, 개발된 기술도 사회에 널리 확산되지 못하였다. 유럽은 과거의 혁신적 전통을 버리고 보수적 문화로 돌아섰으며, 미국도 정도는 덜하지만 비슷한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견해나 독특한 시도를 허용하는 문화를 장려해야 한다. 어느 사회나, 이견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동조하는 것이 편한 길이고 동화를 강요하는 경향이 지배하는데, 이는 혁신을 저해한다. 이견을 허용하고, 경쟁을 촉진하는 환경을 만들어 내야 한다.
연금 생활자의 사회가 경제의 활력을 좀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관투자가와 개인 투자자의 자본을 차별하여 결정권을 주는 제도를 제안한다. 기업가가 작은 비율을 소유하더라도 회사의 의사결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있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페이스북의 저커버그는 전체 주식의 18%를 소유하고 있지만, 의사결정권은 57%를 보유하는 식이다. 복잡한 규제가 경제 활력을 질식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규제를 줄이고, 새로운 규제를 만들 때마다 기존의 규제를 폐지하고, 규제가 아예 적용되지 않는 분야나 기간을 설정하는 방법 등을 생각할 수있다.
이 책은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차 있다. 마치 신문기사를 읽는 느낌이다. 책 전체 중에 건설적인 제안에 관한 논의는 맨 마지막의 7쪽에 불과하다. 결국 절반쯤 읽다 중단하고, 결론으로 뛰어넘었다. 그들의 비판이 타당한 측면이 있지만 반드시 옳는 것은 아니기에 분석적 접근이 필요하며,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논의는 흥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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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n Karlan and Jacob Appel. 2011. More than good intentions: Improving the ways the world's poor borrow, save, farm, learn, and stay healthy. Plume Books. 276 pages.
저자는 예일대의 경제학자와 현장 활동가로, 이 책은 개발도상국의 빈곤퇴치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효과적 방법을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논의한다. 책의 절반은 소액대출운동 microfinance에 관해 논의하며, 나머지는 저축, 농사, 교육, 건강의 분야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효과적 개입 방법인지 검토한다.
전세계의 개발도상국에 보급된 소액대출 프로그램은 명성은 높지만, 이 프로그램이 가난을 퇴치하는 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경험적으로 별로 검증되지 않았다. 저자가 RCT (randomized controlled trial) '무작위 통제 실험' 방식을 적용하여 검증한 결과, 소액대출 프로그램은 가난을 퇴치하는데 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는 소액대출을 받은 돈을 사업자금에 보태서 사업에 성공함으로서 빈곤에서 탈출한다는 이상형은 실제 소액대출을 받는 다수의 사람들의 능력이나 적성과 맞지 않는다. 선진국 사람들 중에도 사업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개발도상국 사람들 중에 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사업 소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면 생활비나 기타 잡다한 지출에 돈을 써버리고 만다.
집단적인 연대 책임을 부과함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신용 결핍을 보완한다는 소액대출 프로그램의 원리 또한 현실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사업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소질이 없는 사람의 채무까지 연대해서 짊어져야 하기 때문에 사업 능력있는 사람의 능력 발휘를 중도에 차단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집단적으로 연대 책임을 부과하지 않고 개인에게 자금을 빌려주었을 때 사업 소질이 있는 사람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대출보다 더 효과적 방법은 저축을 유도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저축을 하고 싶어도 돈을 맡아줄 금융기관이 없고, 돈을 모으는 도중에 지출의 유혹이 수시로 발생하기에 저축을 지속하기 어렵다. 자발적으로 목표 금액을 설정하고 그 목표에 달성할 때까지 중도 인출을 허용하지 않는 저축 상품을 제시하였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호응하였다. 그들도 저축할 욕구가 있지만 적절한 수단이 없어서 저축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농사에 비료를 많이 이용하도록 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가을에 농작물을 거두어서 수중에 돈이 있을 때 비료 쿠폰을 구입하게 하여, 이 쿠폰을 다음 해 농사에 비료가 필요한 시기에 비료로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새로운 농법이나 개량 종자를 보급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농촌 사람들 중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발굴하여 그들에게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 성공을 거두면,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사례를 본받아 따라 오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의 공립 학교는 등록금이 무료임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용이 많이 들고, 교육의 질이 낮아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인도에 공립학교의 교사는 결석하는 날이 많으며 교실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인도의 부모들은 비싼 돈을 들여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낸다. 교사의 출석과 보수를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교사의 출석율을 높일 수 있으나 부실한 수업을 잘 하도록 만들기는 어렵다. 멕시코에서는 자녀의 등교율에 비례해 부모에게 금전적 보상을 지급하는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었다. 케냐에서는 학업이 부진한 학생들에게 별도의 개인교습을 추가하였을 때 학업 능력이 향상되는 것을 확인했다.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기생충에 감염된 사례가 많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기생충 약을 먹도록 하여 기생충을 없앴을 때 아이들의 학교 등교율이 높아지고 건강 수준이 나아지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질에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먹는 물에 소금물 용액을 타면 이질균을 죽일 수 있는데,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소금물 용액을 타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먹는 물을 얻는 장소 바로 옆에 소금물 용액을 무료로 배포하는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소녀들이 성인 남성과 성관계를 맺음으로서 HIV 등의 성병에 걸리고 어린 나이에 임신하는 것을 줄이기 위하여 그들에게 건전한 성관계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성관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위험한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남성의 연령대에 따라 성병에 걸린 빈도에 큰 차이가 있음을 그들이 알게 함으로서 그들이 스스로의 결정으로 안전한 대상을 찾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책은 선진국 사람들이 개발도상국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개입하는 프로그램 중 어떤 것이 효과가 있고 어떤 것이 효과가 없는지 하는 의문에 답한다. RCT 방식을 적용하여 개별 프로그램의 효과성 여부를 과학적으로 검증한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이러한 외적 개입으로서 개인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빈곤으로 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행동경제학의 연구 주제로는 의미있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가난을 퇴치한 것은 이런 사소한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세계의 빈곤은 크게 줄었는데, 개발도상국의 경제 성장, 특히 중국의 비약적 성장이 빈곤 축소에 큰 동력이었다. 개발도상국의 노동집약산업에서 저임금으로 생산한 물품을 선진국에서 대량으로 수입함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손에 돈이 쥐여지게 된 것이 대규모 빈곤 퇴치의 열쇄였다.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게으르다거나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가난했던 것이다. 세계화에 따라 국제분업체계가 확대되면서 개발도상국에 일자리가 늘어난 것이 근래에 가난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소액대출운동이 그렇게 유명세를 탔지만 막상 이것이 가난을 퇴치하는 데 기여한 역할은 미약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선진국 학자들이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실험 동물로 취급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원조와 프로그램 아이디어가 어떤 성과를 보였는지는 아프리카 이남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가 인도와 아프리카 이남의 가난한 나라에 주로 한정되고, 막상 빈곤 퇴치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보인 중국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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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estous Juma. 2016. Innovation and its enemies: Why people resist new technologies. Oxford University Press. 316 pages.
저자는 기술 확산과 국제개발을 연구한 학자로서, 이 책은 왜 혁신적 기술이 사회의 반대에 부딛치게 되는지, 그러한 반대를 극복하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사회의 반대를 이긴 다양한 혁신 사례를 소개한다. 커피, 활자 인쇄술, 마가린, 농업 기계화, 교류 전기, 기계식 냉장고, 녹음 기술, 유전자 조작 작물, 유전자 변형 연어, 등의 사례가 각각 별도의 장으로 논의된다.
커피는 16세기에 이디오피아에서 중동을 거쳐 17세기에 유럽에 전파되었다. 아랍에서는 사람들이 커피 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정치에 대해 비판하는 것에 위정자들이 위협을 느껴 커피 하우스를 탄압하였다.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면 전통 음료인 포도주와 맥주의 소비가 줄어드는 것에 위협을 느껴 커피를 반대하였다. 이들이 커피를 반대하면서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건강, 문화적 정체성, 국가 안보의 위협 등이었지만, 이들이 말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유였다.
활자 인쇄술은 중국에서 아랍 세계로 일찍이 전파되었지만 아랍의 위정자, 특히 성직자들은 활자 인쇄술로 코란을 인쇄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활자 인쇄술이 아랍을 거쳐 유럽에 전파되어 성경이 대대적으로 보급되고 종교혁명과 과학발전으로 이어져 유럽이 앞서나가는 것에 위협을 느낀 다음에야 아랍의 위정자들은 활자 인쇄술을 적용하여 일반 서적을 인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마가린은 1870년경 네덜란드에서 개발되었지만, 낙농산업의 격렬한 반대에 부딛쳐 보급이 늦었다. 낙농업자들은 마가린을 '가짜 버터'라고 지칭하고 건강에 안좋은 열등한 것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퍼뜨리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하여 마가린의 보급을 막았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중 물자 부족이 심각해졌을 마가린의 보급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마가린은 버터보다 열등한 것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낙농국가들은 다양한 규제를 동원하여 마가린의 생산과 수입을 막고 있다.
19세기 말까지 농업은 대부분 사람, 말, 당나귀의 힘에 의존하였다. 트랙터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고장이 잦고 효율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에 동물을 이용하는 것보다 생산성이 낮았다. 말이나 당나귀와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트랙터의 도입에 큰 위협을 느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트랙터가 궁극적으로 동물을 대체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므로, 트랙터의 도입을 전적으로 반대하기보다, 말과 당나귀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농사의 문화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트랙터와 동물을 병행하는 쪽으로 여론을 몰고 갔다. 트랙터의 기술이 발전하고 효율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결국 농사에 동물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대신 여가의 목적으로 말을 이용하는 산업이 나타났다.
19세기 중반 전기가 발명되었을 때 에디슨은 직류전기를 사용한 전등을 보급하여 큰 명성을 거두었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가 발명한 교류 전기가 직류 전기보다 더 효율적임이 밝혀지면서, 에디슨은 자신이 투자한 직류전기 중심의 체제가 앞으로 교류전기로 대체될 것임을 직감하였다. 에디슨은 자신이 투자한 자본이 회수될 때까지 교류 전기가 보급되는 것을 저지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교류전기를 사형을 집행하는 전기의자와 연관시켜, 교류전기는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교류냐 직류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기를 어떻게 관리하는가가 전기 안전의 관건임이 비교실험을 통해 알려지게 되고, 전기를 활용한 이기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교류 전기가 직류 전기를 대체하였다.
20세기 초에 기계식 전기 냉장고가 처음 출현하였을 때 이전의 얼음 산업은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보관해 두었다 여름에 내다 파는 얼음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기계식 냉장고의 냉매로 쓰는 암모니아 가스가 쉽게 폭발되는 성질때문에 위험하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한동안 기계식 냉장고의 보급을 막았다. 그러나 기계식 냉장고의 기술이 향상되어 폭발 사건이 줄어들고, 소형화되어 가정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가축을 도축하는 곳과 정육을 소비하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문제가 없고 야채 또한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냉장 운송하여 소비자 가격을 크게 낮추게 되면서 기계식 냉장고는 급속히 보급되었다.
19세기 말 소리를 녹음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과거 음악활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잃었다. 녹음이 가능하지 않던 시절에 사람들은 연주회에 가거나 행사장에 악사를 초청하여 음악을 즐기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레코드가 보급되면서 생음악에 의존도는 크게 낮아졌다. 레코드의 보급으로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많이 더 자주 음악을 즐기게 되었다. 레코드는 음악의 내용도 바꾸어 놓았다. 과거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중심이고 가수의 노래는 부수적인 것이었는데, 레코드가 보급되면서 가수의 노래가 전면에 나서고 악기 연주는 배경으로 물러났다. 레코드의 보급 덕분에 스타 가수가 출현하게 되었다. 음악 활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협회를 조직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 했으나 대부분은 실직을 하였다. 이후 음악 종사자 조직의 처절한 투쟁을 통해 음악의 저작권이 설정되고, 방송국에서 음악을 틀때마다 로열티를 받는 등으로 음악 저작권에 보상을 하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1985년 벨기에에서 자연의 박테리아에 존재하는 해충을 죽이는 독소 유전자(Bt)를 식물의 유전자에 이식시키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 유전자 조작 기술을 옥수수, 목화, 감자, 쌀, 콩, 알파파 등에 적용하여 해충의 피해를 크게 줄이며 농업 생산성을 혁기적으로 높이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유전자 조작 기술이 개발될 당시 환경 위험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져 있던 때라 환경운동 단체의 반대가 심했다. 과학적 실험에서는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씨앗으로 자라난 식물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으나, 반대론자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위험이 앞으로 새로이 밝혀질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반대하였다. 유전자 조작을 반대하는 쪽에서 유전자 조작 식물이 위험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조작 식물을 개발한 쪽에서 이것이 위험하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유전자 조작 기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 작물을 괴물 식품(Frankenstein food) 등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덮어씌우면서 환경 운동의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유전자 조작 식물을 반대한 이유는 그 식물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이유때문이 아니라, 그 식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때문인데, 이는 식품의 위해성을 판정할 때 생산과정이 아니라 생산된 결과물에 대해 평가를 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난다.
유전자 조작 식물을 반대한 숨겨진 이유는 이 기술을 개발한 대기업, 특히 몬산토가 이 식물의 재배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보유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유전자 조작 식물의 재배가 허용되어 농업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으나, 유럽에서는 유전자 조작 기술을 금지했고 미국으로부터 유전자 조작 식물로 만들어진 식품의 수입도 막았다. 표면적으로는 인체에 위해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었으나, 숨은 이유는 유럽이 미국 대기업의 기술독점에 종속되는 것을 염려해서이다. 유전자 조작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의 국가들도 유전자 조작 식물의 재배를 금지했는데, 이는 아프리카가 유럽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조작 식물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과학적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세계무역기구 WTO는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수입규제를 부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사람이 직접 섭취하지 않는 목화나 목초에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으나, 곡물의 재배에서는 미국 이외에 이를 허용한 국가가 많지 않다.
1990년대 중반 미국 매사츠세츠주의 한 회사에서 연어의 유전자를 변형하여 사료를 적게 먹으면서 절반의 생육기간에 두 배 이상 크기로 키우는 기술을 개발했다. 지난 이십여년 동안 미국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이 식품의 위해성에 대해 결론을 내지 못하였으며 현재까지 시판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식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문제는 식물을 변형시키는 문제인 반면, 연어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것은 동물을 변형시키는 문제임으로 사람들이 인식하는 위험도는 훨씬 크다. 유전자 조작 기술의 경우 생산성을 높이는 문제와는 별도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작업에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이 혁신적인 기술에 반발하는 것에서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많은 경우 경제적 이유가 기술 도입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인데, 이러한 심층적 이유를 무시하고 단순히 설득을 하여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은 시간만 허비할 뿐 성공하기 어렵다. 기술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고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상을 할지, 그들을 어떻게 다른 일자리로 옮아가도록 할지에 대한 고민과 구체적 노력이 함께 할 때에만 '창조적 파괴' creative distruction 기술은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이 책은 주제는 흥미로우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과 문체가 매우 건조하고 형식적이어서 읽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마치 보고서를 읽는 듯하며, 정책 교훈을 도출하는 부분에서는 지루하기까지 하다. 특별히 어려운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읽어내려가는게 힘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혁신적 기술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가장 쟁점적인 대상인 핵 기술이 논의에서 완전히 빠진 것이 아쉽다. 유전자 조작 식물에 대한 논의는 저자의 전문 분야라 그런지 내용이 알차고 저자의 깊은 이해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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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n Macfarlane. 2014. Invention of the Modern World. The Fortnightly Review. 322 pages.
저자는 캠브리지대학의 인류학 교수이다. 그는 영국이 산업화에 착수하기 훨씬 이전인 12세기 경부터 근대적 (modern) 특성을 띠었는데, 중세 후반이래 영국의 예외적으로 근대적 특성 덕분에 세계에서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국이 오래 전부터 유럽의 대륙국가나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매우 다른 특성을 보였다고 지적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를 자주 비교한다.
근대적 특성의 핵심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가 별도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이것이 모두 뭉뚱그려져 있었다. 과거에는 가족/친족과 정치, 가족과 경제, 정치와 종교, 종교와 경제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는 종교의 영향이 세속의 모든 일에 미쳤으며, 가족 관계가 모든 일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었던 반면, 영국은 일찍부터 영역간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영국에서는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가족에 의존하는 경우가 없으며, 어려울 때에도 핵가족을 넘어서서 친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영국은 상업의 나라라 할 정도로 상행위를 통해 돈을 버는 것을 중시했다. 유럽 대륙이나 다른 전통사회와 달리 영국인들은 돈 버는 것을 천시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 풍족하게 살면서 품위를 유지하는 중상류층을 '신사' gentleman 라고 존중하는 태도가 근대 이전부터 영국을 지배했다. 상업을 통해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지주가 되거나 정치에 진출하기도 하는데, 상업 자본가와 지주를 사회적으로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영국은 상공업을 권장했기에 일찍부터 사람들의 물질적 생활 수준이 유럽 대륙보다 훨씬 높았다. 유럽 대륙국가들보다 임금이 훨씬 높았으므로 기계 장치를 많이 사용했다. 영국은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으며 어느 다른 나라보다 훨씬 일찍 부터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많이 사용했다. 풍부한 석탄 자원이 산업혁명을 촉진시키는 배경이기는 하지만, 자원 매장 그 자체가 산업혁명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독일이나 중국 또한 풍부한 석탄 매장량을 자랑하지만 그들은 산업혁명 이전부터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영국만큼 많이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용을 우선시하고 물질적인 풍요에 높은 가치를 두는 영국인의 가치관이 석탄을 많이 쓰도록 유도한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실용보다 이념을 중시하고 물질적 풍요를 경시하는 가치관 때문에 유용한 자원이 있음에도 이를 이용하여 물질적 발전을 이루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영국은 태어나면서 법적으로 구분되는 지위를 부여받는 신분 제도가 뿌리 내리지 않았다. 귀족은 사회관습적인 특권을 누렸지만, 법적으로 구분되는 특권을 부여받지는 않았다. 귀족과 평민 모두 동등한 법에 구속되며, 귀족이라고 평민과 구별되는 별도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지 않았다. 성공한 상공인은 종종 귀족의 작위를 부여받았으며, 상공인(yeoman & merchant)과 귀족간의 사회이동의 경계가 엄격하지 않았다. 이는 유럽 대륙을 포함한 다른 전통사회에서 귀족, 승려, 평민, 사농공상 등 엄격한 신분 구별이 보편적이었던 카스트 사회와 구별된다. 영국은 다른 사회범주, 예컨대 남자와 여자, 혹은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 권리의 차이가 없었다.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개인주의가 발달했다. 개인주의란 개인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며, 개인을 세계의 중심으로 두는 세계관이다. 모든 전통사회에서는 개인이 집단 속에 매몰되어 있는 집단주의가 지배한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주요한 의사결정은 집단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며, 일의 책임도 집단이 공동으로 진다. 반면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일은 각자가 결정하며, 일의 결과도 개인이 책임진다. 영국에서 일찍부터 개인주의가 발달하게 된 데에는, 독특한 가족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있다. 영국에서는 귀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0살이 넘으면 부모 곁를 떠나 남의 집에 머물며 일을 배우거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의 살 길을 찾는 관행은 장자상속제 때문에 더욱 심했다. 차남 이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것이 없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부모를 떠나 자신의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영국인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남녀 관계도 부모의 간섭 없이 당사자간의 감정과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연애 결혼이 보편적이었으며, 자신이 만든 가족 구성원만으로 삶을 꾸리는 핵가족이 지배했다.
영국인은 자식의 노동에 가족이 의존하는 대신 외부인을 고용하는 관행이 지배했다. 이는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남의 집에 머물면서 일을 배우는 관행과 부합한다. 영국인은 자신의 앞가림을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기에 남녀 모두 결혼을 늦게 했다. 자식이 가족의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영국인은 일찍부터 산아 제한을 하며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았다. 영국인은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수준이 유럽 대륙 나라들보다 높을 수 있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보다 일찍 저출산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왕, 귀족, 상공인간 견제와 균형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유럽 대륙이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왕은 국민에 대해 전제적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귀족 또한 왕과 독립된 독자적 권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봉건 영주가 자신의 성의 주민에 대해 절대적 권한을 가졌던 봉건제도는 프랑스나 유럽 대륙 국가에 해당될 뿐 영국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17세기에 명예혁명으로 왕권이 제한된 것이나, 18세기에 미국에서 입헌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은 이러한 오랜 전통에 서 나온 것이다.
영국인은 일찍부터 무수히 많은 자발적 결사체를 조직했다. 취미 모임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다양한 일에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조직(association)을 결성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자연인과 유사한 독립된 법적 지위를 가진 신탁 기구(trust)를 만드는 전통과 연결된다. 유한 책임을 지는 구성원들이 참여하여 자원과 결정을 위임하는 신탁기구인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발전에 매우 효과적인 사회적 발명품이다.
영국은 기독교 국가이지만 기독교의 세력이 유럽 대륙만큼 세지 않았다. 교회가 별도의 법체계와 재판소를 가지고 세속 권력과 대립하는 체제는 유럽 대륙의 카톨릭 국가에서는 보편적이었으나,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인은 세속적 실용주의를 신봉했기에, 사람들이 신학적 교리에 죽고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영국인은 절대적 진리보다는 얼마나 삶에 도움이 되는지에 따라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실용적 진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실용적 진리는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대상이기에, 영국에서 과학과 기술이 유럽 대륙보다 먼저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왜 영국이 유럽 대륙과 다른 특징을 보이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유럽 대륙에는 로마의 지배력이 크게 미쳤으며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그 영향이 지속된 반면, 영국에서는 실질적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로마의 영향이 약했다. 대신 영국에는 게르만 민족의 전통적 특성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유럽 대륙과 차이가 나게 되었다. 유럽의 게르만 민족 국가인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도 영국과 유사한 특징을 찾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카톨릭 국가들과 이웃하면서 게르만 민족의 특성이 많이 희석되어서 점차 영국과 차이가 벌어졌다. 게르만 민족의 전통인 집단 협의 의사결정, 지위 평등, 절대적 신앙을 배격하는 것, 실용주의 등이 영국에서는 사그라들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책에서 설명하는 영국의 강점을 따라가다 보면,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으며, 왜 영국이 세계의 절반이 넘는 영토를 이백년 이상 지배하는 강국이 될 수 있었는지 이해된다. 그러나 이 책은 영국의 강점만 말하는 편향성을 보인다. 이책의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영국 이외에 유럽 대륙의 나라 사람들은 우매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영국이 그렇게 실용적이고 민주적인 나라인데, 왜 노예무역을 주도했으며, 왜 아편전쟁을 했으며, 왜 이웃나라 아일랜드를 무자비하게 억압하였으며, 왜 인도를 지배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왜 인종주의가 강하며, 왜 근래에 대중영합주의가 휩쓸면서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유럽연합탈퇴를 감행했는지, 등등 영국의 어두운 측면을 이해할 수없다. 책의 후반부에 영국의 국민성을 설명하는 데에서는 중언부언하는 것이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책을 읽으면서 영국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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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P. Barash. 2018. Through a Glass Brightly: Using Science to see our species as we really are. Oxford University Press.
저자는 진화생물학자이다. 이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번째 부분에서는 인간중심주의, 즉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을 과학적 사실을 인용하여 비판하며, 두번째 부분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동물과 유사하며 또 다른지 진화생물학의 연구 성과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2부에서 논의하는 인간과 동물의 비교는 진화생물학의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적 능력, 부모와 자식간 갈등, 상대를 속이는 행위, 일부다처 논쟁, 호전적 행위, 이타적 행위, 자유의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간 불일치 등이 그것이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흥미로운 사례와 함께 이론적 논의를 전개하면서, 생물체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동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지 않음을 밝힌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자연 세계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발달시킨 기술이다. 다른 생물체는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른 기술을 발달시켰듯이, 인간의 지적 능력 역시 인간의 생존 환경에 맞추어진 생존 기술의 하나일 뿐이다. 인간의 생존 환경을 벗어난 논리적, 통계적 추리에서 인간은 매우 서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정도의 문제일뿐, 동물세계에서도 유사한 능력을 흔히 관찰한다.
진화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의 몸은 유전자를 전파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부모와 자식은 유전자의 절반만을 공유함으로, 유전자 생존의 측면에서 볼 때 부모의 이익과 자식의 이익이 완전히 일치 하지는 않는다. 부모의 유전자를 많이 퍼뜨리려는, 즉 많은 자식을 얻으려는 부모의 이익과, 각 개인으로서 자식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형제간 갈등이 발생한다. 형제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은 도덕의 문제로 정의하지만, 사실은 생물학적 토대 위에 서있다.
생물체들간 의사 소통이란, 참가자 각자가 이익을 얻기 위해 상대를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의 일부이다. 신호를 발하는 사람은 거짓된 신호로 상대를 조작하려 하며, 신호를 받는 사람은 거짓 신호 뒤에 숨은 진실을 해독함으로서 상대에게 조작당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다. 사회생활을 많이 하는 동물일수록 기만하고 이를 탐지해내는 무기 경쟁은 고도로 발달했다. 인간은 신호의 진실성을 의심하기보다는 일단 믿는 쪽으로 진화하였다. 그럼에도 인간의 의사 소통에서 거짓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런 일부이다.
인간의 조상에게 일부다처제가 자연적 현상이었다. 동물의 암컷과 수컷간 몸 크기의 차이, 행위 방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유추할 때, 인간 역시 일부다처제가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부다처제는 짝이 없이 홀로사는 수컷을 많이 만들고, 이들이 잠재적 사회불안과 폭력의 근원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도덕률로 하여 남녀관계를 규제한다. 그러나 여전히 능력이 많은 남성은 여러 여성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의 생활을 비공식적으로 영위한다. 저자는 자연적 현상이 반드시 인간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닌 대표적인 예로 일부다처제를 든다. 인간은 문화로 자연적 현상을 제어하고 있다. 그렇기에 규범에서 일탈하는 사례도 많이 발생한다.
원시 부족을 연구한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호전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이 공격적이기는 하지만 집단간 싸움을 벌이는 호전성은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반드시 적자생존에 도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협동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경우가 싸움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경우보다 많다. 인간이 집단적으로 싸움을 하는 호전성을 띠게 된 것은, 농경을 시작하면서 상대로부터 뺏앗을만한 가치 있는 것을 비축하고 지도자의 지휘하에 조직적으로 싸움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면서부터이다. 원시 수렵채취인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은 대체로 협동했으며 집단간 평화가 지배했다.
인간의 이타적 행위가 진화론의 이기적 인간 모델에 어긋난다는 지적은 옳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사는데, 자신의 유전자를 일부라도 지닌 친족의 생존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유리한 때에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를 한다. 이타적 행위를 통하여 집단 내에서 자신의 평판을 높임으로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유전자의 확산에 도움이 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이타적 행위란, 개별 인간의 몸의 측면에서 볼 때는 희생일지 모르지만, 유전자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이기적 행위인 것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행위를 통제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인간의 몸 안에는 수백만의 미생물이 함께 살고 있다. 이들 미생물이 우리의 행위와 사고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누가 누구에게 얹혀사는지 불확실 하다. 또한 유전자가 우리의 몸, 우리의 사고작용, 우리의 행위를 조정한다면,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가? 인간은 자신이 의식하면서 행위하지 않는다.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란 상상의 산물이다.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인간이 의도하기보다 유전자의 이익을 위하여 저지르는 행위라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반박하는 사례가 될 수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은 매우 서서히 진화를 통해 형성된 반면, 인간의 문화적 특성은 빠른 시일에 급격히 변화해 왔다. 특히 지난 이백년간의 산업화의 결과 인간의 문화적 특성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매우 멀리 떨어졌다. 이제 인간은 서로에 대해, 또 자연환경에 대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인간은 그러한 파괴력을 생물학적으로 실감하지 못한다. 수백만명을 죽이는 핵무기 공격 행위가 한명의 상대를 물리적으로 죽이는 경험보다 실감하기 힘든 시대가 도래했다.
이 책은 저자의 오랜 연구 경험이 녹아 있는 글이다. 저자는 과학적 사실을 설명하면서 문학 작품을 많이 인용하는데, 이는 결코 좋은 글쓰기가 아니다. 설명의 명확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인이 좋아서 다양한 시의 일부를 수시로 인용할지 몰라도, 과학적 주제를 접하는 독자는 주제의 정확한 이해에 더 관심이 있지, 저자의 시적 감흥에 쉽게 공감하지 않는다. 제 1부에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주장을 문학 작품을 길게길게 인용하면서 과학적 사실을 군데군데 언급하는데,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 속하지 않은 독자에게 이러한 설명은 불필요하게 장황해 보인다.
글자의 크기가 매우 작아 책을 읽는 내내 고문 받는 느낌이었다.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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