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 Markovits. 2019. The Meritocracy Trap: How America's foundational myth feeds inequality, dismantles the middle class, and devours the elite. Penguin Press. 286 pages.
저자는 법학자이며, 이 책은 현재 미국에서 업적주의(meritocracy)가 지배하는 환경이 낳는 심각한 문제를 서술한다. 업적주의는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중류층을 없애고 사회양극화를 촉진시킨다. 업적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는 엘리트층과 중류층간 간격을 벌리고, 엘리트의 계층 지위를 후세대로 세습시킴으로서 미국을 계층지위가 세대를 넘어 고정되는 카스트 사회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업적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물론 업적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도 지나치게 큰 부담을 안겨준다.
1980년대 이래 미국에서 소득 상위 1% 층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 소득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들 상위 1% 층은 최고의 전문가 직업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기업의 고위 경영자, 투자금융회사의 금융 전문가, 유명 법률회사의 변호사, 전문 분야의 의사, 컨설팅 회사의 임직원, 기술 스타트업의 임직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높은 인적 자본을 활용하여서 회사에 엄청난 부를 창출하고, 그 일부를 자신의 소득으로 챙긴다. 이들의 연봉은 수십억에서 수천억원에 달한다. 과거 귀족사회나 산업사회의 지배층인 귀족과 자본가들은 토지나 공장을 소유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자신은 놀면서 엄청난 소득을 향유하는 유한계급이었다. 반면, 20세기 후반에 새로이 등장한 엘리트 전문인들은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며,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 최고급의 기술을 획득하고, 이 기술을 활용하여 매우 복잡한 일을 수행하고 엄청난 부를 창출해 낸다. 이들은 누구보다 높은 능력과 노력으로 높은 생산성을 올리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높은 소득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1980년대 이래 정보기술과 운송 기술의 발달 덕분에, 전에는 가능하지 않은 정도로 매우 복잡한 일을 체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 덕분에 출현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당 50~100 시간을 투입하는 엄청난 노동으로 자신을 혹사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에 중독되어 살아간다.
이러한 엘리트들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경쟁을 뚫고 엘리트로 선발되도록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엄청난 관심과 투자를 쏟아붓는다. 엘리트 부모의 엄청난 투자는 실제 그들의 자녀가 우수한 학교에 들어가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학교 졸업후 자신과 같은 엘리트 전문인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반면 중류층은 자녀에게 큰 투자를 하지 못하므로, 중류층의 자녀는 엘리트 전문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미국의 명문 사립 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의 대부분이 부모가 부자이며, 등록금이 엄청난 사립 혹은 부자 동네의 공립 초중등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이, 미국 사회의 엘리트 지위가 교육을 매개로 하여 세대간 전승되고 있음을 지시한다. 엘리트 자녀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고 학교를 다니며, 그들이 명문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도, 다시 좋은 직장에서 엄청난 경쟁과 일의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경쟁에서 배제된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은 경쟁에 패배한 것으로 인한 실망과 좌절 속에서 살아간다. 1980년대 이래 정보기술과 기계화 덕분에 중간 관리층이 줄어들고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중류층의 삶은 과거보다 불안정해졌다. 그들은 불안전 고용과 실직 등으로 노동하지 않는 유휴시간이 늘었으나, 이것이 삶의 질의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 사회층의 양극화는 심화되어,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 사이에 소득은 물론 삶의 모든 측면에서 서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사는 곳, 일하는 방식, 자녀를 키우는 방식, 자녀가 다니는 학교, 가족의 안정성, 소비 물품, 여가를 보내는 방식, 정치적 성향, 종교 활동,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현재 미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도는 1920년대 후반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에 근접하고 있다. 미국의 중하층은 엘리트들을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며 건방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엘리트들은 중하층을 무능하고 노력하지 않고 절제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경멸하면서, 서로 간 반목이 심하다. 미국의 금권주의 정치 풍토에서 엘리트들은 정부를 장악한 반면, 중하층은 이러한 정부에 등을 돌렸다. 결국 도날드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주의자의 선동이 대중에게 먹혀들고, 정치의 합의 도출 기능이 마비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나라에 살면서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서로 반목하는 지금의 상황이 지속되면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인류의 과거에서 높은 불평등은 결국 전쟁 혹은 혁명을 통해서만 해결되었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를 벗어나 대안이 있는가? 저자는 이 부분에서는 그리 설득적인 논의를 전개하지 못한다. 저자는 업적(merit) 자체가 사회 환경에 따라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사회적으로 높은 보상이 업적과 함께 해야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엘리트들이 다니는 명문 사립대학은 그들이 보유한 엄청난 규모의 펀드의 수익을 활용하여 재학생들에게 크게 투자하고 이것이 높은 교육 성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명문 사립대에 입학 문호를 넓히도록 정부가 압력을 넣어야 한다. 엘리트 직장의 일 중독 문화가 임직원의 높은 수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을 덜하도록 제도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소득의 양극화, 특히 고급 전문직의 높은 수입과 그들의 지나친 일 중독 및 엄청난 자녀 교육 투자에 논의를 집중한다. 책의 대부분을 이러한 현상을 서술하는 데 할애한다. 그의 서술에는 몇가지 약점이 보인다. 첫째, 그는 업적주의 사회의 승리자(meritocrats)로 엘리트, 부자, 최고노동자 등을 언급하는 데, 이 집단의 범위가 모호하다. 엘리트 집단과 중류층 이하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강조하면서, 때로는 엘리트 집단의 범위를 대학 졸업자, 전문 대학원 졸업자, 아이비리그 대학 졸업자, 상위 0.1%, 상위 1%, 상위 5%, 상위 10% 등, 가용한 통계에 따라 수시로 조정한다. 그가 주장하는 엘리트의 독보적인 소득이나 배타적 삶의 방식이, 계층지위에 따라 낮아지면서 연속선을 그린다면, 그의 주장의 근본, 즉 양극화된 사회라는 주장은 무너진다. 둘째, 그의 서술은 전적으로 미국 사회에 한정해 있는데, 그가 지칭하는 엘리트들은 세계화된 사회 속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한 사람들이다. 미국의 엘리트 전문인은 대부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다국적 비즈니스 분야에서 활동하고 그로부터 높은 소득을 거둔다. 예컨대 빌게이츠가 엄청난 부를 획득한 것은 세계화된 시장 속에서 그의 능력과 노력이 독보적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업적주의 보상체계는 미국 사회에 한정해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셋째,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가 큰 소득 격차와 사회 양극화를 낳고 있다면, 그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없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인류의 과거는 부모의 지위에 따라 자동적으로 지위를 배분하는 방식인 카스트나 귀족 사회, 정실에 따라 지위를 배분하는 방식, 부모의 재산과 사업을 자식이 물려받는 방식이 지배했다.이러한 방식보다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가 그나마 낫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했듯이 업적주의 또한 세대간 엘리트 지위의 전승을 근본적으로 틀어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엘리트들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노하우를 전력을 다해 자녀에게 전승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위를 자녀에게 전승한다.
실용주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은 업적주의의 폐해를 막기위해, 업적과 보상을 극단적으로 연결시키는 순수한 업적주의 방식을 부분적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업적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되, 이것 이외에도 사회와 삶에 가치있는 다양한 기준을 동시에 인정한다면, 개인의 업적에만 전적으로 보상을 몰아주는 현재의 업적주의 보상체계는 타당하지 않다. 국가가 관여하여 다양한 가치에 따른 보상의 균형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그에 따라 각 가치에 따른 행동에 대해 보상이 적절히 돌아가도록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는 이러한 방식을 사회 민주주의적 방식이라고 지칭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영리 행위의 업적에 대해 높은 세금을 매겨, 이 세금으로 다른 가치 행위에 대해 보상을 해준다는 발상이다. 샌델의 사회민주주의적 보상 체계에 설득력이 있지만, 사실 현재의 상황은 업적주의를 약화시키기보다는 업적주의를 더 충실히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미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사회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제대로 보상되지 않으며, 이것이 더 큰 사회 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재 미국의 엘리트 전문인들의 소득, 일, 교육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서술이 지나치게 반복적이라 읽는 것이 매우 지루했다. 양극화와 엘리트 중심 업적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책의 맨 끝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끝 맺어서 허탈했다. 대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기지 않은 비판이라면 비판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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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ra Klein. 2020. Why We're Polarized. Avid Reader Press. 282 pages.
저자는 저널리스트이며, 근래 미국 정치가 심하게 양극화된 원인을 다양한 기존 연구를 인용하여 검토한다.
현재 미국의 정치 지형은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들이 서로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있으며, 중간층 혹은 부동층이 매우 엷다. 미국의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 정체성에 따라 이 두 진영 중 하나에 속한다. 미국인에게 중요한 집단 정체성은 다양한 범주에 걸쳐 있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다. 백인 대 유색인, 남성 대 여성, 복음주의 개신교도 대 이들 이외의 사람, 보수주의자 대 자유주의자, 교외/ 농촌지역 주민 대 대도시 주민, 고등학교 졸업자 대 대학교 졸업 이상 학력을 가진자, 등이다. 각각의 집단 구분에서, 전자에 속하는 사람은 공화당을 지지하고, 후자에 속하는 사람은 민주당을 지지한다. 이렇게 다양한 정체성 범주가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일관되게 정렬해 있다. 이 다양한 정체성 기준간에는 역사적 혹은 사회문화 및 경제적으로 서로간 약간의 연관성은 있지만 필연성은 없다. 예컨대 백인과 남성이 아니라 백인과 여성이 한 집단으로 묶인 정체성을 형성할 수도 있다.
미국인의 정치적 지지는, 논리적 혹은 실용적으로 일관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이 상대의 집단과의 다툼에서 이기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한다. 예컨대 오바마가 제안한 의료 개혁은, 예전에 미트 롬니를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이 제안한 정책과 유사한 것인데, 오바마의 집권에 반대하는 공화당 지지자들은 오바마가 제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정책을 극렬하게 반대한다. 정체성 정치의 또 다른 예로, 최근 선거에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도날드 트럼프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이 승리하는 것을 더 참을 수 없어 했기 때문에 트럼프를 지지했다. 요컨대 근래의 미국 정치는 실용적인 정책 대결이 아니라, "우리 대 그들" (us versus them) 이라는 정체성에 토대를 둔 진영 싸움이다. 미국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편이 이기고 상대편이 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혹은 설사 나에게 실제적으로 불이익이 돌아간다고 해도, 상대편이 이기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기 때문에, 정치가 심하게 양극화되어 있다. 집단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진영 싸움이 정치판을 지배하면, 상대를 합리적으로 설득하면서 실용적인 접근으로 타협을 도출하는 정치가 가능하지 않다. 이유를 불문하고 상대를 미워하고, 상대와 어울리고 싶어하지 않고, 상대가 이기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요컨대, 양자간 접근과 타협이 불가능한 정치만이 남았다.
미국의 정치 지형이 과거에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분되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당과 공화당은 각 정당 내에 다양한 이념과 의견을 가진 정치인들이 섞여 있어서, 정책 사안에 따라 소속 정당의 경계선을 넘어 지지하고 서로간에 타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민주당의 경우 서로 정반대의 이념을 가진 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남부의 민주당원은 흑인을 억압하는 인종주의를 극렬하게 옹호하는 반면, 북부의 민주당원은 진보적인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당시 민주당은 남부 흑인의 인권에 눈을 감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서만, 민주당의 정강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당시 공화당에 보수주의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인종 문제와 관련해서는 남부의 민주당원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의견을 가진 공화당원이 적지 않았다. 요컨대 과거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립이 심하지 않았던 때는, 흑인의 희생을 토대로 하여 타협의 정치가 전개되었다. 따라서 흑인을 포함한 미국인 전체로 볼 때, 과거 양극화되지 않았던 정치가 지금의 양극화된 정치보다 더 건강하다고 볼 수 없다.
근래 미국 정치의 극단적 양극화의 시발점은, 1960년대 중반 민주당이 집권하던 시절에 흑인에게 실질적으로 투표권을 주는 개혁을 실시한 후에, 1970년대에 들어 남부의 민주당원들이 공화당으로 갈아타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공화당은 백인을 중심으로 한 정당, 즉 백인의 집단 정체성을 최우선에 두는 정당으로 변모하였다. 공화당원에게 백인의 인종 정체성이 그렇게 크게 부상한 원인은, 1970년대 이래 미국인의 인종 구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 이민법 개정 이래, 미국인의 인종 구성에서 아시아인과 중남미인의 비중은 갈수록 커진 반면, 유럽계 백인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2040년경이 되면 백인이 미국 인구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 확실하다. 미국은 과거 노예제에 뿌리를 두고 오랫동안 유색인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였으며, 백인들은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삶의 모든 분야에서 유색인보다 우월한 특권을 누렸다. 백인은 숫적으로 자신들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을 일상에서 체감하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는 행태, 즉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사사건건 반대 진영과 대립하는 태도를 취한다. 공화당은 백인의 인종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역사 문화 사회적으로 백인 인종과 연관된 특성인, 남성, 복음주의 기독교 신앙, 도덕적 보수주의, 교외/농촌지역 거주자, 교육수준이 높지 않음, 등이 일관되게 결합된 모습을 띤다.
미국의 정치가 심하게 양극화된데는 미디어의 역할도 한 몫 한다. 케이블 티브와 인터넷이 출현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혹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정치 집단의 의견도 일상적으로 접해야 했다. 자신의 구미에 맞게 미디어를 취사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제한된 숫자의 신문 방송은 가급적 넓은 범위의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회사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심하게 편파적인 의견을 피했으며, 가급적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케이블 티브가 보급되고,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이 출현하면서, 사람들의 미디어 선택의 폭은 엄청나게 넓어졌다. 미디어 회사들은 모든 범위의 고객을 고루 상대하는 것보다, 편파적인 생각을 가진 충성스런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회사의 이익에 부합했다. 그결과 FOX 채널과 같이 지극히 편파적인 미디어가 공화당 지지자를 파고 들었으며, 그보다는 덜 편파적이지만, CNN, MSNBC 등의 채널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선호를 따르는 미디어로 자리매김하였다. 인터넷은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이용자의 성향에 맞는 내용만을 편향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미디어의 편파성 효과가 케이블 티브이보다 훨씬 심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편파적인 미디어만을 접하면서 상대편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없어지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견을 내재화하고 더욱 더 굳건하게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비교해 보면,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훨씬 더 편파적이며, 극단적인 벼랑끝 전략까지 구사하면서 자신의 진영의 우위를 지키려 한다. 민주당은 이념 지형에서 진보에서 중도보수까지를 넓은 범위를 포괄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공화당은 이념 지형에서 보수쪽에 훨씬 치우쳐 있으며, 백인이라는 인종 정체성이 다른 모든 정체성을 압도한다. 이러한 차이는, 백인이 자신들의 인구 수가 줄어 들고 인종적 특권이 축소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현재 공화당과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나 상하원 의원 선거에서 표면적으로는 거의 대등한 점유율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미국의 정치 제도가 심하게 외곡되어 있어서 유권자의 대표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전국민의 60% 이상의 표를 획득하지만, 각 주 당 2명의 상원의원이 할당된 제도 때문에, 주들 사이에 인구 규모의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하원 역시 선거구를 공화당의 득표에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조정하여 (gerrymandering), 실제로는 민주당이 훨씬 더 많은 표를 획득하지만, 하원의원 수에서는 절반밖에 획득하지 못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역시 2000년 앨고어와 부시의 선거나, 최근의 클린턴과 트럼프의 선거에서 모두 민주당 후보가 국민의 다수의 표를 획득하였지만, 선거인단이라는 외곡된 제도 때문에 국민의 소수의 표를 획득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백인의 인구 비율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외곡 현상은 더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다. 공화당은 자신의 지지자가 상대적으로 소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극단적인 주장과 벼랑끝 전략을 구사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또한 가급적 투표하기 어렵게 만들어 민주당 지지자들의 투표를 방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저자는 현재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미국 정치를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해 뾰족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양극화된 정치 지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념적으로 정당이 양극화되어 있으면 유권자들은 자신의 의견에 근접한 정당을 더 잘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정강의 정당이 난립하는 정치 지형보다는, 이념적으로 양극화된 정당 구도가 더 낫다고 본다. 양극화 그 자체보다는, 현재 미국의 정치가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즉 국민 주권이 제대로 정치 과정에 반영되지 않는 외곡된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공화당이 저렇게 극단적인 전략을 쓰는 것은, 소수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상대와 합리적인 타협이 불가능한 형국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당이 기존 제도가 제공하는 기득권을 포기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기는 매우 어렵다. 저자는 대신, 미국인들이 중앙 정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정치에 더 관심을 쏟을 것을 제안한다. 사실 지역의 정치가 주민의 이익에 더 가까이 있고, 극단적인 진영 싸움보다는 실용적 타협점을 찾기에 더 용이하다. 사람들이 지역 정치를 통해 실용적인 접근을 하는 습관이 든다면, 중앙 정치도 실용적이 되도록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 바뀔 것이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가 쓴 정치 분석서로는 드물게, 많은 학술 연구를 참고하여 주제를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미국 정치의 양극화와 관련된 논의를 폭넓게 섭렵하는 기회를 얻는다. 다만, 저자가 민주당 지지자이기 때문에, 공화당 지지자라면 혹시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다른 시각에서 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그렇게 양극단으로 쪼개져 있다면, 분명 저자와 반대편에 서있는 공화당 지지자는 민주당 지지자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미국 정치를 볼 것이다. 문제는 학계와 미디어는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체계적인 분석은 지식인의 소관인데, 미국에서 지식인은 거의 대부분이 민주당 지지자이므로, 공화당 지지자이면서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 책을 다 읽으면서, 저자의 분석 역시 편파적인 접근의 산물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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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n Levitsky and Daniel Ziblatt. 2018. How Democracies die. Crown. 231 pages.
저자는 남미 정치와 유럽 정치를 전공한 정치학자들로, 이 책은 미국에서 도날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과정을 남미와 유럽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원활히 작동하는 것은, 민주주의 헌법과 같은 형식적 제도의 힘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상대를 합당한 경쟁자로서 인정하며 반대 행위를 인내하고 상대와 타협하는 비공식적 규범의 힘이라고 한다(tolerance and forbearance).
미국의 정치는 1970년대 중반이래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양극화가 심해졌다. 지난 수십년동안 공화당 정치인은 상대를 합당한 경쟁자가 아니라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무너뜨려야 하는 적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전통으로 내려오던 정치적 신사도를 저버리고 법이 허용하는 한 최고의 극단적 방법을 쓰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도날드 트럼프는 그러한 근래의 흐름에서 출현한 극단적인 정치인이다.
왜 근래에 미국의 정치가 그렇게 양극화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1960년대 이래 미국의 정치지형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1960년대 민권운동 이전에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우호적인 경쟁자로여기며 정치를 했다. 이는 1870년대에 남북전쟁 이후 남부와 북부가 정치의 장에서 흑인을 완전히 배제하고서 만들어진 우호적 관계이다. 문제는 민권운동으로 흑인이 미국의 정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서 발생했다.
1980년대 이래 민주당은 유색인과 세속적 세계관쪽으로, 공화당은 백인과 기독교 쪽으로 동질성이 높아졌다. 공화당의 지지기반인 백인 민족주의자 White Christian nationalists 들은 1960년대의 민권운동과 이민법 개혁이래 흑인과 유색인 이민자가 점차 늘면서, 과거 미국의 주류로서 압도적 다수의 지위가 무너지는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다수 집단의 지위가 도전을 받을 때 이들은 상대에게 매우 공격적이 되는데, 공화당이 1979년의 뉴트 깅그리치 출현 이후에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무너뜨리고 제압하려는 전술을 구사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바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백인 민족주의자들은 오바바를 미국에 충성하지 않는 진짜 미국인이 아닌 un-American 사람으로 매도하였으며,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오바마 정부의 일을 모두 반대하여 좌절시키는데 총력을 다하였다. 이런 극단적인 전술이 횡횡하면서 정치가 파행을 보이자, 기존의 정치계를 깡그리 부정하고 국민의 감정에 호소하는 대중영합주의적 외부자 populist outsider 인 도날드 트럼프가 기회를 잡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뒤 미국이 오랫동안에 걸쳐 만들어 놓은 민주적 전통과 관행을 무시하고 극단주의와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정치를 펼친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권위주의로 이행하는 몇가지 징표가 있다. 첫째는 정치인이 민주적 게임의 규칙을 부정하며, 둘째는 정치적 상대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셋째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폭력을 허용하거나 장려하며, 넷째는 언론과 정치적 경쟁자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한하려 한다. 트럼프는 이러한 네가지 징조를 모두 보였다. 트럼프는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다고 하며 선거의 정당성을 훼손하려 하였다. 트럼프의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범죄자로 매도하고 잡아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지지자들의 폭력적 행동을 지지하거나 용인하였으며, 세계의 독재자들의 인권 탄압을 옹호하였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공격하였으며, 정치적 상대를 제거하려 하고 탄압하였다.
근래에 미국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정치적 다툼과 민주주의의 퇴행은 과거 중남미나 유럽에서 익히 보던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페루의 후지모리, 베네쥬엘라의 차베스, 터키의 에르도안, 헝가리의 오르반, 러시아의 푸틴,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중 일부는 처음부터 권위적 통치자로 등장하지 않았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상대가 갖은 수단을 써서 이들의 통치를 반대하고 이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들도 이러한 반대에 극단적 수단으로 맞받아쳐 권위적 통치로 흐르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과정을 설명하자면, 첫째, 정치적 심판관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경찰, 검찰, 정보부, 세무서와 같은 법집행 기관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고, 사법부를 무력하게 하고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며, 입법부를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버린다. 둘째, 주요 경쟁자를 배제시킨다. 자신에게 반대하며 굴복하지 않는 야당 정치인, 언론인, 기업가는 자신의 충견을 동원하여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셋째, 자신이 절대권을 행사도록 규칙을 바꾸어 버린다. 헌법을 바꾸고, 사법부와 입법부를 구성하는 법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꾼다.
미국이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양극화를 초래한 주체가 공화당에 있으므로 공화당이 바뀌어야 한다. 백인 민족주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공화당의 지지 기반에서 탈피하여 유색인과 이민자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화당의 강력한 지지층인 백인 노동계층은 1970년대 후반이래 경제변화로 삶이 어려워졌는데, 이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소득 불평등을 줄이고, 적극적 노동정책과 보편적 복지정책을 통해 백인 노동계층의 삶의 위협이 줄어들면 그들의 극단주의적 태도도 완화될 것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민주주의 헌법을 가진 나라로 자부심이 크지만, 미국은 결코 예외적이지 않다. 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될만큼 건강하게 진행된 것도 아니다. 미국은 건국이래 근래까지 흑인을 배제하였기에 백인 정치인들 사이에서 화합이 유지되었으나, 아직까지 흑인과 이민자를 대등한 구성원으로 포용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세계의 다른 다민족 국가에서도 구성원이 잘 화합하는 민주주의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독재 시대에 정치인들의 행태가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상대가 극단주의적 책략을 구사한다고 하여 이에 맞받아쳐 극단주의적 전략으로 나아가면 결국 파국에 이를 뿐이라고 경고한다. 정치 지도자들이 이러한 위험을 예감하고 타협의 노력을 펼쳐 성공한 사례로 칠레를 든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극단적 책략이 먹힌 사례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과 독일의 나찌를 든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기초체력이 약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다. 비교 정치학의 폭넓은 지식을 배경으로 현재 미국의 정치 지형을 잘 분석한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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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중류층을 떠받치던 중간 기술의 일자리가 해외로 이전하면서 미국에는 고급기술의 고임금 일자리와 저임금의 단순 노동만 남게 될 것이라는 예상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중류층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제기된다. 첫째는 현재 중간 기술의 일에 종사하던 사람이 그들의 일자리가 해외로 이전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현재 지향형의 질문이다. 둘째는 앞으로 중간 기술의 일이 점차 줄어들면 미국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미래 지향형의 질문이다.
현재 지향형의 질문, 즉 이미 실업에 처했거나 혹은 조만간 실업에 처할 중간 기술의 근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자못 심각하다. 일자리의 구조가 고급 기술과 단순 노동으로 양극화 된다면 이들이 갈 길은 분명하다. 기존에 이들이 하던 것보다 상위의 고급 기술을 요하는 일로 이동하거나 혹은 하위의 단순 노동직으로 이동하는 것, 둘 중의 하나이다. 새로이 고급 기술을 익히도록 훈련하여 이들에게 과거보다 더 좋은 일자리로 이동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늙은 개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기는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이미 직장에 다닌 사람을 재교육 시키는 직업훈련의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어렵다. 예컨대 컴퓨터를 젊은 시절부터 익숙하게 쓰지 않던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어 컴퓨터를 익숙하게 다루면서 일을 처리하도록 만들기는 매우 힘들다.
결국 기술이 앞서 가고 일의 방식이 바뀌면서 과거의 관습에 익숙한 사람 중 대부분은 새로운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설사 새로운 기술을 습득한다고 하여도 떠오르는 젊은 세대에 비하여 생산성이 높지 않다. 왜냐하면 과거의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하는데, 이는 새로운 방식이 정착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에게 새로운 방식을 배우게 하여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불완전하나마 적응하여 노동가능 연령 동안 버티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구조조정은 이들에게는 쓰라린 시련이지만 크게 보면 생산 방식의 변화와 함께 치러야 할 대가이다. 낡고 비효율적인 방식이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담당하는 주역들이 대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게나마래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다수는 나이가 들면서 결국 단순 노동직으로 하강할 수밖에 없다. 서비스 일자리는 앞으로도 풍부할 것이므로 이들이 갈 곳은 그곳밖에는 없다. 이는 서비스 일자리의 특성인 불완전한 고용상태와 낮은 소득을 받아들이면서 노동 가능 연령이 끝날 때까지 힘겹게 지내야 함을 의미한다. 사실 어느 쪽이건 이들에게 힘든 선택이기는 매한가지이다. 변화에 적응하기도 힘들며 변화에 도태되면 더 힘든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
미래 지향형의 질문, 즉 지금 성장하는 새세대에게 양극화되는 일자리 구조에서 어떻게 살아남도록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대응하기 어렵다. 일자리 구조가 양극화된다면 이들 역시 둘 중에 하나로 진출해야 할 것이다. 상위의 고급기술 직종은 고등 교육을 받고 높은 기술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갈 것이므로 다수는 중간 기술의 일자리를 맛 본적도 없이 취업의 첫걸음부터 단순 기술직으로 진입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대학만 졸업해도 중간기술의 괜찮은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고급 기술 직종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장만으로는 안된다. 더 고급 기술을 익히기 위해 대학원과 직업 현장에서 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실리콘 밸리의 프로그래머나 월가의 첨단 금융기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대학교만 졸업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선은 보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높은 기술을 교육시켜서 상위 일자리에 더 많이 포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실직에 처한 사람이건 미래의 직업을 준비하는 젊은이이건 중간 기술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변화에 대해 가장 좋은 대비책은 교육과 훈련을 강화하여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기술 수준이 높고 컴퓨터가 대치할 수없는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일에 진출시키는 것이 변화되는 노동시장에서 승자가 되는 길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중간층이 감소하는 문제에 관해 언급하는 사람은 한결 같이 교육의 질과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재정 지원과 제도 개선을 추진해야 함을 역설한다.
문제는 교육의 질과 기술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일자리와 소득 구조의 양극화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겠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상위의 고급 기술을 요하는 일자리는 소수이며 대부분의 일자리는 하위의 단순 기술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국의 산업구조가 고도화된다고 해도 고급 기술의 일자리는 노동 생산성이 높으므로 많은 고용을 수반하지 않는다. 예컨대 애플의 아이폰 생산이 백만 개에서 천만 개로 확대된다고 해도 이를 위해 필요한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마케팅, 금융, 기타 관리직의 소요인원은 열배로 증가하지는 않는다. 반면 생산과 중간관리를 담당하는 중간 기술의 일자리는 해외의 생산기지로 이전할 것이므로 다수는 미국에 남겨진 열악한 서비스 일자리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생산기지가 해외로 이전하는 것을 따라서 해외로 가는 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는 미국만큼의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이 낮은 임금이라도 감수하면서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여하간 미국 중류층의 임금 수준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높은 한 중간 기술의 일자리가 계속 외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만은 결국 비경제학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 잘나가는 상위의 사람들이 힘들게 일하면서 사는 다수의 사람과 혜택을 나누어 갖는 방향의 정치적인 해결책이 해답이라고 지적한다. 정보화와 세계화는 고급 기술을 가진 소수의 생산성을 크게 높이고 그로 인한 소득을 엄청나게 안겨다 준다. 예컨대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나 페이스북의 주커버그와 같은 사람은 시장이 전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기에 그들의 발명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었다. 잘나가는 소수의 미국인들이 세계 시장에서 거두는 높은 수익이 서비스직에서 단순 노동을 하면서 저임금을 받는 다수의 미국인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단순 노동을 하는 미국인은 유사한 일을 하는 개발도상국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의 생산성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뉴욕의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은 방글라데시의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보다 몇 배나 많은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담당하는 일은 외국으로 이전할 수 없는 것이므로 생산성에 따른 보수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경쟁력이 높은 고소득 직종의 사람이 저임금에 종사하는 단순 노동자를 도와주는 길은 다양하다.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이들을 도와주는 방법과 간접적으로 이들의 힘을 높여서 더 높은 소득을 얻도록 하는 방법 모두를 구사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길은 세금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 법으로 규정하는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 법으로 노동조건을 제한하는 것, 등이다. 한편, 노동자들이 조직화하여 협상력을 높이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 못지않게 효과가 큰 방법이다. 노조가 조직된 사업장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월등히 높으며, 개별 사업장에서는 물론 산업 전반과 경제 전체로 노동자의 조직력이 세질 때 소득 분배가 더 평준화된다는 것은 북구의 경험에서 확인되었다.
제조업과 같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할 수 있는 분야에서 노동자의 힘은 절대적으로 약하다. 그들의 임금 대비 노동생산성이 같은 일을 하는 개발도상국의 근로자보다 훨씬 낮을 경우 공장의 해외이전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경제적 효율성이 최고의 기준이므로 효율성이 낮은 선택을 하라고 기업에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서비스 산업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일의 특성상 해외로 사업장을 이전하기 어려움으로 같은 성격의 일을 외국에서 더 낮은 비용으로 한다는 이유로 근로자에게 낮은 임금을 강요할 수는 없다. 서비스 근로자의 협상력이 높아진다면 이들은 상당한 수준의 임금을 받아낼 수 있다. 예컨대 쓰레기 수거가 몇일만 중단된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방법이 없다. 문제는 서비스 산업의 속성상 전통적인 노동조합의 방식으로는 이들을 조직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노동자의 협상력을 키워 임금을 높이는 방법은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정치권이 부유한 층에 의해 장악되어 있으므로 힘들게 사는 사람의 목소리는 정치에 반영되지 못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새로운 이민자를 계속 받아들임으로서 서비스 일자리가 저임금으로 계속 유지되도록 만들고 있다. 새로운 이민자는 자신의 출신국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를 덜 느낀다. 이들은 언어 장벽과 사회문화적 격차 때문에 미국 출생자와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이들을 미국의 저임금 노동자와 연대시키는 것은 힘들다.
앞으로 기술이 계속 발달하면서 지금까지는 복잡한 것으로 여겨졌던 일이 컴퓨터의 도움으로 단순화하게 되고, 해외로 이전될 일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 결과 중간 기술의 일자리는 점점 더 많이 미국을 떠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까지 고급 기술로 여겨진 일은 중간 기술의 일로 바뀌고, 또 새로운 발명품이 등장하면서 이를 생산하기 위한 중간 기술의 일자리들이 새로이 출현하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아이폰이 도입되면서 그전에는 없던 중간 기술의 새로운 일자리들이 다수 출현했듯이 말이다. 새로운 혁신이 가져올 일자리의 변화는 예측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기술 변화의 사이클이 빨라지면서 미국에서 중간 기술의 일자리는 급속히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노동자들이 혁신의 이익을 누리는 기간이 점차 더 짧아진다. 미국이 혁신을 계속 주도한다면 모르지만 만일 혁신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면 분명 미국의 노동자들은 큰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한편 미국의 중류층 일자리가 계속 감소한다면 정치적인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날 수도 있다. 중류층 감소 현상은 자본주의 경제가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에서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므로 경제적인 원칙을 적용하여 해결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강조하는 미국이 봉착하는 문제는 결국 시장외적인 방식 즉 정치적인 방식으로만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어떻게 될까? 부자와 빈자간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사회갈등이 제도권 정치를 마비시키고 결국 폭동이나 범죄 등으로 불거지면서 살벌한 사회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와중에 없는 사람의 정치적 목소리는 커질 것이고 소득 재분배의 요구는 어떤 방식으로건 정치적으로 처리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 과정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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