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iel Markovits. 2019. The Meritocracy Trap: How America's foundational myth feeds inequality, dismantles the middle class, and devours the elite. Penguin Press. 286 pages.
저자는 법학자이며, 이 책은 현재 미국에서 업적주의(meritocracy)가 지배하는 환경이 낳는 심각한 문제를 서술한다. 업적주의는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중류층을 없애고 사회양극화를 촉진시킨다. 업적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는 엘리트층과 중류층간 간격을 벌리고, 엘리트의 계층 지위를 후세대로 세습시킴으로서 미국을 계층지위가 세대를 넘어 고정되는 카스트 사회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업적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물론 업적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도 지나치게 큰 부담을 안겨준다.
1980년대 이래 미국에서 소득 상위 1% 층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 소득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들 상위 1% 층은 최고의 전문가 직업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기업의 고위 경영자, 투자금융회사의 금융 전문가, 유명 법률회사의 변호사, 전문 분야의 의사, 컨설팅 회사의 임직원, 기술 스타트업의 임직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높은 인적 자본을 활용하여서 회사에 엄청난 부를 창출하고, 그 일부를 자신의 소득으로 챙긴다. 이들의 연봉은 수십억에서 수천억원에 달한다. 과거 귀족사회나 산업사회의 지배층인 귀족과 자본가들은 토지나 공장을 소유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자신은 놀면서 엄청난 소득을 향유하는 유한계급이었다. 반면, 20세기 후반에 새로이 등장한 엘리트 전문인들은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며,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 최고급의 기술을 획득하고, 이 기술을 활용하여 매우 복잡한 일을 수행하고 엄청난 부를 창출해 낸다. 이들은 누구보다 높은 능력과 노력으로 높은 생산성을 올리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높은 소득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1980년대 이래 정보기술과 운송 기술의 발달 덕분에, 전에는 가능하지 않은 정도로 매우 복잡한 일을 체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 덕분에 출현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당 50~100 시간을 투입하는 엄청난 노동으로 자신을 혹사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에 중독되어 살아간다.
이러한 엘리트들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경쟁을 뚫고 엘리트로 선발되도록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엄청난 관심과 투자를 쏟아붓는다. 엘리트 부모의 엄청난 투자는 실제 그들의 자녀가 우수한 학교에 들어가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학교 졸업후 자신과 같은 엘리트 전문인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반면 중류층은 자녀에게 큰 투자를 하지 못하므로, 중류층의 자녀는 엘리트 전문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미국의 명문 사립 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의 대부분이 부모가 부자이며, 등록금이 엄청난 사립 혹은 부자 동네의 공립 초중등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이, 미국 사회의 엘리트 지위가 교육을 매개로 하여 세대간 전승되고 있음을 지시한다. 엘리트 자녀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고 학교를 다니며, 그들이 명문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도, 다시 좋은 직장에서 엄청난 경쟁과 일의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경쟁에서 배제된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은 경쟁에 패배한 것으로 인한 실망과 좌절 속에서 살아간다. 1980년대 이래 정보기술과 기계화 덕분에 중간 관리층이 줄어들고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중류층의 삶은 과거보다 불안정해졌다. 그들은 불안전 고용과 실직 등으로 노동하지 않는 유휴시간이 늘었으나, 이것이 삶의 질의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 사회층의 양극화는 심화되어,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 사이에 소득은 물론 삶의 모든 측면에서 서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사는 곳, 일하는 방식, 자녀를 키우는 방식, 자녀가 다니는 학교, 가족의 안정성, 소비 물품, 여가를 보내는 방식, 정치적 성향, 종교 활동,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현재 미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도는 1920년대 후반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에 근접하고 있다. 미국의 중하층은 엘리트들을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며 건방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엘리트들은 중하층을 무능하고 노력하지 않고 절제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경멸하면서, 서로 간 반목이 심하다. 미국의 금권주의 정치 풍토에서 엘리트들은 정부를 장악한 반면, 중하층은 이러한 정부에 등을 돌렸다. 결국 도날드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주의자의 선동이 대중에게 먹혀들고, 정치의 합의 도출 기능이 마비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나라에 살면서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서로 반목하는 지금의 상황이 지속되면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인류의 과거에서 높은 불평등은 결국 전쟁 혹은 혁명을 통해서만 해결되었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를 벗어나 대안이 있는가? 저자는 이 부분에서는 그리 설득적인 논의를 전개하지 못한다. 저자는 업적(merit) 자체가 사회 환경에 따라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사회적으로 높은 보상이 업적과 함께 해야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엘리트들이 다니는 명문 사립대학은 그들이 보유한 엄청난 규모의 펀드의 수익을 활용하여 재학생들에게 크게 투자하고 이것이 높은 교육 성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명문 사립대에 입학 문호를 넓히도록 정부가 압력을 넣어야 한다. 엘리트 직장의 일 중독 문화가 임직원의 높은 수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을 덜하도록 제도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소득의 양극화, 특히 고급 전문직의 높은 수입과 그들의 지나친 일 중독 및 엄청난 자녀 교육 투자에 논의를 집중한다. 책의 대부분을 이러한 현상을 서술하는 데 할애한다. 그의 서술에는 몇가지 약점이 보인다. 첫째, 그는 업적주의 사회의 승리자(meritocrats)로 엘리트, 부자, 최고노동자 등을 언급하는 데, 이 집단의 범위가 모호하다. 엘리트 집단과 중류층 이하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강조하면서, 때로는 엘리트 집단의 범위를 대학 졸업자, 전문 대학원 졸업자, 아이비리그 대학 졸업자, 상위 0.1%, 상위 1%, 상위 5%, 상위 10% 등, 가용한 통계에 따라 수시로 조정한다. 그가 주장하는 엘리트의 독보적인 소득이나 배타적 삶의 방식이, 계층지위에 따라 낮아지면서 연속선을 그린다면, 그의 주장의 근본, 즉 양극화된 사회라는 주장은 무너진다. 둘째, 그의 서술은 전적으로 미국 사회에 한정해 있는데, 그가 지칭하는 엘리트들은 세계화된 사회 속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한 사람들이다. 미국의 엘리트 전문인은 대부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다국적 비즈니스 분야에서 활동하고 그로부터 높은 소득을 거둔다. 예컨대 빌게이츠가 엄청난 부를 획득한 것은 세계화된 시장 속에서 그의 능력과 노력이 독보적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업적주의 보상체계는 미국 사회에 한정해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셋째,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가 큰 소득 격차와 사회 양극화를 낳고 있다면, 그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없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인류의 과거는 부모의 지위에 따라 자동적으로 지위를 배분하는 방식인 카스트나 귀족 사회, 정실에 따라 지위를 배분하는 방식, 부모의 재산과 사업을 자식이 물려받는 방식이 지배했다.이러한 방식보다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가 그나마 낫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했듯이 업적주의 또한 세대간 엘리트 지위의 전승을 근본적으로 틀어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엘리트들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노하우를 전력을 다해 자녀에게 전승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위를 자녀에게 전승한다.
실용주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은 업적주의의 폐해를 막기위해, 업적과 보상을 극단적으로 연결시키는 순수한 업적주의 방식을 부분적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업적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되, 이것 이외에도 사회와 삶에 가치있는 다양한 기준을 동시에 인정한다면, 개인의 업적에만 전적으로 보상을 몰아주는 현재의 업적주의 보상체계는 타당하지 않다. 국가가 관여하여 다양한 가치에 따른 보상의 균형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그에 따라 각 가치에 따른 행동에 대해 보상이 적절히 돌아가도록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는 이러한 방식을 사회 민주주의적 방식이라고 지칭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영리 행위의 업적에 대해 높은 세금을 매겨, 이 세금으로 다른 가치 행위에 대해 보상을 해준다는 발상이다. 샌델의 사회민주주의적 보상 체계에 설득력이 있지만, 사실 현재의 상황은 업적주의를 약화시키기보다는 업적주의를 더 충실히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미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사회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제대로 보상되지 않으며, 이것이 더 큰 사회 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재 미국의 엘리트 전문인들의 소득, 일, 교육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서술이 지나치게 반복적이라 읽는 것이 매우 지루했다. 양극화와 엘리트 중심 업적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책의 맨 끝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끝 맺어서 허탈했다. 대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기지 않은 비판이라면 비판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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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S. Fischer. 2014. Lurching toward happiness in America. MIT Press. 129 pages.
저자는 저명한 미국의 사회학자로, 이 책은 그가 Boston Review 라는 지성지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현재의 미국 사회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소재를 열개의 글에서 다루고 있다. 각각의 글이 묻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미국인의 행복도에 변화가 있는가, 온라인을 통한 이성 소개는 바람직한가, 인터넷이 사람들을 과거보다 더 외롭게 만들었나, 미국인은 왜 유럽사람들보다 더 오랜 시간 일을 하는가, 극심한 빈곤의 원인은 무엇인가, 미국인은 왜 지역 자치에 집착하는가, UNDP의 인간개발지수를 통해 미국인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데서 문제점은 무엇인가, 성공이란 환경과 운의 결과인가 아니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가, 소득 불평등이 나쁜 이유는 심리적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갈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현재 미국 사회와 사회변화에 관한 질문에 답한다.
글의 바탕에 흐르는 전반적 기조는 미국 사회는 유럽과 다르며, 문제의 인식이나 접근 방식또한 다르다는 점이다. 사회 제도이나 삶의 질로 비교할 때, 저자는 미국 사회가 북유럽 사회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미국의 부유함은 풍요로운 자연과 이민자의 유입이 궁극적인 원인이며, 공공 영역이 작은 미국의 자본주의 모델은 명암이 뚜렷하다. 학자가 자신의 전문지식을 배경으로 잡지에 쓴 글답게 비논쟁적이며 평이하다. 뚜렷한 주장을 제시하지 않으며 논의의 심도가 깊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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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면 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각자의 세계 속에 몰입해 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은 눈이 어두운 노인이거나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사실 스마트폰을 산지 얼마 안되었기에 사용법을 익히고 새로운 앱을 시험해 보느라 바쁜 것은 이해한다. 나는 전철을 타면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 맞은편에 앉은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무슨 재미로 살까, 어떤 고민을 안고 헤메고 있나, 어떻게 저런 표정의 얼굴이 만들어졌을까, 젊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저사람은 과연 어떤 희망을 가졌을까, 여자는 남자와 어떻게 다를까, 등등 사람을 보면서 이모저모로 관찰하노라면 연민의 정이 느껴지고, 호기심이 피어오르고, 덧없다는 느낌도 들고,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페이스북 계정을 처음 만들면, 알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추천해 주어 친구를 맺게 한다. 오랫 동안 소식을 몰랐던 사람을 새삼 발견하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터넷 상의 접촉은 실제 대면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선뜻 연락을 취하지는 않는다. 페이스북의 관계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친구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아예 들어가 보지도 않는다. 내 페이스 북 계정에는 친구가 한명도 없다.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자주 휴대전화를 열어보고 이메일을 체크하는 것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누군가 찾아주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지만, 막상 상대와 접촉하면 왠지 불편해지는 것이 요즈음 사람의 심사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사람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개인주의적으로 된 것이다. 집단의 압력에 구속되던 상태에서 해방된 것까지는 좋은데, 의미있게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각자 자신의 틀을 지키면 서로 접촉하기가 조심스럽다. 상대가 쉽게 접근해 오면 나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 튀기고 싶은 변덕이 발동한다. 내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고 싶건만 막상 상대를 마주치면 왠지 상대의 못난 구석이 먼저 눈에 띠어 물러서 버리곤 한다. 나도 상대에게 그렇게 보일 것임을 알고, 나 자신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각자 자신의 것을 지키고 자신에게 충실하면 의미있는 무엇을 발견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 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삶의 울림을 찾지 못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라는 조언은 그릇되다. 아무래도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가장 감동을 받을 때는 남과의 연결 속에서 무엇을 할 때이었던 것 같다.
페이스북이 그렇게 많은 접속건수를 기록하지만 그것이 사람들 간의 직접적인 대면 관계를 대치하지는 못한다.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쏟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물론 둘 간에 인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외로운 사람이 인터넷에 더 몰두하기는 할 것이다. 인터넷을 많이 들여다보다 인터넷 세상으로 빠져든다는 환상은 매트릭스나 아바타와 같은 영화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 세컨드 라이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넷 속의 대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아직 인간의 진화 수준은 인터넷 가상 세계에서보다는 물리적으로 대면하는 관계 속의 삶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와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서로에게 구속되는 것을, 또한 상대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각자의 동굴 속에 머물러 있다. 인터넷이라는 제한된 통로를 통해 상대와 접하려고 하나,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별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 사회에 외로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으며 그들에게 대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직업이 번성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혼자만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선진국 사람들은 외로움이라는 비용을 비싸게 치른다. 가난한 나라에서라면 본인이 원치 않아도 항시 남과 부대껴야 하니 부자나라의 개인주의적 삶에는 양면성이 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면 그래도 선진국 사람의 개인주의적이며 외로운 삶이 집단의 압력에 이리저리 밀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나는 도저히 뗄 수없는 끈끈한 관계나 함께 망가져본 경험이 있는 허물없는 사이가 한편으로는 부럽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다. 일생 함께 점심을 같이해야 하는 직장 동료라는 말은 나에게 구속으로 다가올 뿐이다.
관계 맺는 일이 그렇게 힘들다니. 선진국 사람과 같이 제한적으로 또 계약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결코 그 관계가 편안해 질 수 없다. 하긴 나도 그리 관계 맺는 데 능한 사람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내식으로 살아가는 개인주의적인 삶이 편하기는 하다. 그래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끊임없이 남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나도 마음속 구석에 사람들과 관계 맺고자 하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게다. 나도 따지고 보면 외로움에 절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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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회사인 애플을 보면 미국 경제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 수 있다. 애플은 미국에서 디자인과 소프트웨어를 만들지만 기기의 제조는 전적으로 중국에서 한다. 중국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이유는 반드시 싼 임금 때문만은 아니다. 제품 전체의 가치에서 생산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부가가치 제품일수록 크지 않다. 미국은 중국의 제조 산업이 제공하는 강점에 도저히 필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노동자과 산업체는 배가 불러서 신속한 변화 요구에 민활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반면, 중국 노동자와 업체는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어 애플의 어떤 요구에도 신속히 대응하여 맞춘다. 신속한 변화는 많은 스트레스를 수반하고 기득이권의 포기를 필요로 하므로 미국의 노동자와 업체가 중국에 필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미국은 새로운 기술 개발과 혁신으로 중국의 업체와 노동자가 따라올 수 없는 선발의 이익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신기술 개발이나 혁신은 고용의 증가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애플의 소프트웨어나 디자인 개발은 기기 제조에 비해 현저히 적은 인원을 필요로 한다. 경제활동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면서 이들 상대적으로 작은 수의 엘리트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높은 보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중류층을 뒷받침 하던 제조업의 수 많은 일자리는 점차 해외로 이전하면서 사라진다.
미국에는 애플의 개발자와 같은 고급 근로자와 함께 외국으로 이전할 수 없는 하급 일자리만이 남는다.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애를 보고, 청소하고, 슈퍼마켓에서 진열대를 정돈하고, 공사장에서 일하는 등등. 이러한 일자리는 외국으로 이전할 수 없고 기계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많이 존재하지만 부가가치가 크지 않으므로 저임금 업종이다.
문제는 과거에 대학교육을 받은 중류층이 담당하던 일마저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도움으로 해외로 속속 이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콜 센터는 물론이고 자료 처리, 고객 관리, 회계처리, 디자인과 리서치에 이르기까지 기업 활동의 거의 전영역이 외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화이트칼라 업종 중 컴퓨터가 담당하기 어려운 창의적인 업무만이 미국에 남는다.
국내에 가까이 있으면 신속히 협의하고 조정할 수는 있으나, 요즈음 업무는 대부분 컴퓨터와 통신망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구지 근접해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강력한 노동 윤리와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된 인도의 젊은이가 미국의 별 볼일 없는 대졸 노동자보다 훨씬 생산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섭섭한 일이지만,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훨씬 바람직한 변화이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미국인이 열심히 노력하는 제삼세계의 인재보다 낮은 보상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 모두를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 볼 때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터무니 없이 큰 이익을 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미국 사회의 양극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문제는 양극화된 사회에서는 가진자와 못가진자간에 사회적 갈등이 커진다는 점이다. 미국인이 숭배하는 가치인 개인주의가 지속되는 한,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기회를 얻은 사람과 실패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커질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사회적 간극이 낳는 부작용을 새로운 이민자를 계속 받음으로서 피해가려 할 것이다. 새로운 이민자는 미국 사회의 바닥에서 시작하면서 열심히 일하므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안전판으로 기여해 왔다. 이들이 계속 들어오면 아메리칸 드림은 계속 살아있게 되고, 극심한 불평등에 대한 반발은 어느 정도 완화된다.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이면서 불평등이 극심한 냉혹한 사회를 지속할 것이다. 미국인의 마음속에서 “이익을 서로 나누면서 함께 잘 살아가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는 가까운 시일 내에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기미가 보인다. 물론 야후의 창업자인 제리양이나 구글의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같이 능력이 있는 세계의 젊은이들은 미국에서 큰 기회를 잡을 수있다. 미국은 이러한 세계의 인재들을 흡수하면서 활력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화려함 속에서 보통사람들은 허덕이면서 살아가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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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카우보이의 나라이다. 선과 악은 분명히 구분되며 악한은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원칙에 투철하다. 먹고 살기 위해 혹은 상황에 몰려서 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으리라는 동정적인 시각은 환영받지 못한다. 범죄자도 자신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며, 자신도 부모를 잘 못 만나거나 불운이 겹치면 죄를 저질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미국적이지 않은'(unamerican) 불온한 사상으로 공격받기 십상이다. 많은 지역에서 판사를 주민 투표로 선출하는 데, 이들은 범죄자에 대해 보다 더 가혹하게 처벌하여 안전을 가져오겠다는 공약을 경쟁적으로 남발하기에 범죄에 대한 처벌 수준은 갈수록 높아지며 범죄자에 대해 관대한 재판관은 설 자리가 없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두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수감자 한명당 18,000-50,000달라의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 돈을 범죄의 원인이 되는 빈곤과 무지를 개선하는 데 사용한다면 더 안전하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되련만. 미국 사람들은 무지와 가난을 개선하는 데 쓰는 돈은 매우 아까워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담을 좀더 높이 쌓고 위반자에게 좀더 가혹한 처벌을 가하는 데 사용하는 돈은 펑펑 쓴다.
2001년 9.11 사태로 미국인이 테러의 위험에 노심초사하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어서 이라크를 침공하여 그 전쟁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전쟁에 퍼붓고 있는 천문학적인 돈의 삼분의 일이라도 그나라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썼다면 미국인은 훨씬 안전한 세계의 지도자로 칭송받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전쟁을 치루면서 지출한 돈의 많은 부분은 미국의 군인과 미국의 전쟁관련 회사와 그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으니까,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헛된 낭비는 아닐 수도 있다. 엄청난 수의 범죄자를 잡아들이고 재판하고 가두는 데 쓰인 돈 역시 그러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안전 관련 사업을 흥하게 하는 데 투입되었으니까 반드시 공중으로 사라진 돈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돈을 써서 범죄자를 잡아 가두어도 거리에는 항시 새로운 범죄자들이 출현하고, 그렇게 많은 돈을 써서 전쟁을 해도 미국인의 안전은 테러의 위협에 변함없이 노출되며, 그렇게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쓰고도 사회가 살기 좋은 쪽으로 개선되지 않는 데 있다. 미국의 의료 비용이 다른 나라의 1.5~2배에 달하지만 미국인의 건강 수준은 훨씬 열악한 것처럼, 미국 사회의 안전 보장 비용도 다른 나라의 몇배를 쓰지만 훨씬 안전하지 않은 사회인 것을 볼 때, 미국 사회의 어떤 측면은 모방해서는 안될 나쁜 모델로 연구하고 가르침을 얻을 가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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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동안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Top Secrete America라는심층 취재 시리즈 기사를 읽었다. 특별 취재팀을 구성하여 미국 정부의 보안정보시스템을 2년간 조사해서 터트린 폭로 기사이다. 1970년대 워싱턴포스트가 닉슨대통령의 선거부정을 폭로한 워터게이트와유사한 폭발력을 노리는 프로젝트이다. 보안정보분야라는 매우 민감함 영역을 민간인이 심층 취재하여 공개까지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기사에서 폭로하는 미국 연방정부의 보안정보 분야의 규모는 그야말로 엄청나다.1,271개 정부 기관과 1,931개 민간 기업이 전국에10,000개의 사업장에 산재되어있으며, 종사하는 인력만85만 4천명에 매년 50,000개의 정보 보고서를생산해내고 있다. 이러한 보안정보 사업은 2001년 9.11 사태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현재도 계속 증가 일로이다.
9.11 사태는 미국인들이 최강대국의 시민으로서 누리던 안전한느낌을 한 순간에 빼앗아갔다. 이후 미국인은 외국 여행을 할 때는 항시 테러의 목표물이 될 수 있다는불안감을 지고 다녀야 했다. 무엇보다 미국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은, 미국과 미국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지구상에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시 상기하게 되었다는점이다. 미국인들은 미국적인 방식이 세계의 최고라고 믿고 있고 세계의 사람들도 이를 동경하고 따를 것이라고생각했기에, 감히 이것에 반대하고 도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설사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하여도 이것은 단순히 시기심의 표현에 불과하므로 무시하면 된다는 것이 그때까지 미국인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자부심이 9.11 사태로 배반당했을 때 엄청난 분노가표출되었으며, 전세계에 모든 가상의 적을 감시하는 보안정보 사업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효과를 따지지 않고 돈과 인력을 무한으로 투입한 결과, 보안정보분야는 통제가 불가능한 괴물로 자라났다. 첩첩이 비밀로 둘러싸고 상호 조율되지 않은 투자와 인력으로마구 증식된 정부의 정보 사업은 서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복잡하게 얽혀 있다. 수집된 정보가너무 많기에 오히려 전혀 쓸모가 없게 되었다. 단적인 예로 지난 가을에 발생한 비행기 테러 미수 사건은우연히 테러리스트의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수상한 행동을 목격하고 격투 끝에 제압하여 실패로 끝났다. 정부가투자한 엄청난 돈과 인력과 첨단 정보 기술은 실제 테러를 막는 데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군사와 보안정보 사업 분야에서 강대국 내지 선진국의 속성을 본다. 세계정치경제 질서에서 상위를 유지하기 위해 하위에 처한 국가와 경제와 사람을 감시하고, 자신의 이익에 위해가될만한 요소를 차단하는 데 엄청난 투자를 한다. 그러한 사업에 최첨단 기술을 적용하고 고급 인력이 종사한다. 박사급의 수학자, 언어학자, 컴퓨터전문가, 다양한 분야의 엔지니어 등 고급인력이 고임금을 받으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판단을 한다. 이들은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에서 투자 분석을 하는 사람이나, 여론조사회사의 여론 분석가들이나, 광고회사의 소비자 반응 분석가들과 동일한 종류의 일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제조업이 사라지고 ‘분석가’(analyst)의 일자리가 창출되는데 보안정보 산업도 한 몫하고 있는 것이다.사람들은 군사나 보안 정보 산업을 환영한다. 전투기를 제조하는 일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보다훨씬 더 고부가가치의 산업이며, 정보 분석 업무는 높은 교육을 받은 고급인재를 필요로 하며, 지역 경제에 큰 기여를 한다. 근래에 우리나라에서도 국가정보원이고급 인재들이 선호하는 직장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보안 정보 사업은 자기 모순적인 성격을 지닌 듯하다. 나를 반대하고위해할 수 있는 것은 뚜렷이 특정 지을 수 없다. 적이 누구인지도 뚜렷이 알 수 없는 데다가, 설사 나에게 위해가 되는 세력을 인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언제 어디서 공격할지 파악하기 어렵다. 나를 해칠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를 수집했다고 해도 이것이 과연 안전한 상황을 의미하는지 혹은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력이나 위험 요소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지 구분할 수 없다. 이런면에서 정보 사업은 지나치게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치게 하여 수집된정보가 너무 많으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중요한 정보를 선별하는 능력을 잃는다는 점이다.
미국과 같이 세계 구석구석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나라는 자연히 여러 곳에서 미국의 이익과 충돌하는 상황을초래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게 빼앗긴 것에 복수를 하기 위해 테러를 저지를 가능성은 상존한다. 지구촌의 일원인 미국과 미국인에게 가해질 수 있는 테러의 가능성을 모두 틀어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외국에서 미국인이 테러의 목표물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강대국의시민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인가?
미국인의 삶에서 안전의 문제는 항시 중요한 관심사이며, 국가 수준에서는물론 개인의 수준에서도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노력을 투입한다. 어느 곳이 안전한지, 어디에는 가면 안 되는지, 어떤 사람이 위험한지를 항시 의식해야한다. 많은 미국인들은 입구에 상시 보안요원이 지키고 있는 건물에서 일하고 담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통제된주거단지에서 살고 있다.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상류층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는 데 익숙하며 일반이 쉽게접근하지 못하는 곳에서 살면서 특권의식을 느끼고 있다. 문제는 미국에서는 중류층도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야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불식시킬 수 있으며, 나라 전체가 안전 노이로제 속에서 불안감을 줄이려고 광분하고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공항을 통해 입국할 때마다 엄청난 보안 절차와 지겨운 표정을 짓고 일하는 수많은 보안 요원들을 보면서슬퍼진다. 이러한 돈과 사람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쓰여지면 훨씬 살기 좋은 사회가 될 텐데.. 미국 대도시의 슬럼가에서 목격하는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과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비참한 삶을 옆으로 하고, 이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워싱턴포스트 기사에서 미국정부의 보안정보 사업이 엄청나며 담당자도 관리할 수 없을 정도로 첩첩이 비밀에 싸여 있고 중첩된 비효율을 보인다고 매섭게 비판을 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보안 노이로제로 볼 때 어느 정도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간과한 지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보안 노이로제의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지 않는 한, 안전에대한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상대를 감시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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