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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해당되는 글 4건
2021. 11. 6. 21:20

Joshua Goldstein. 2011. Winning the War on War: the decline of armed conflict worldwide. Plume. 328 pages

저자는 국제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유엔의 평화유지군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세계는 근래로 올수록 폭력이 줄어들고 있으며, 특히 국가간 전쟁은 현저히 감소하였다. 1948년에 처음 시작된 유엔의 평화유지군 활동은 유엔의 여러 역할 중에서 중요성을 점차 더해왔다.

유엔의 평화유지군 활동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분쟁 지역에 파견된다. 그간 아프리카의 분쟁지역에 주로 파견되었는데, 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 체제를 확립하는 데 유의미한 기여를 했다. 유엔의 평화유지 활동이 효과가 없다는 비판은 객관적인 증거에 반한다. 

유엔의 평화유지군은 분쟁이 발생한 이후에야 파견을 결정하고, 군인을 모집하고, 파견에 필요한 준비를 하므로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문제는 분쟁 발생 초기에 개입할 때 가장 효과가 큰데 이러한 중요한 기회를 놓친다는 점이다. 마치 불이 난 다음에 소방관을 모집하고 소방차를 준비하는 격이다. 강대국의 군대와 비교해 형편없이 빈약한 예산과 병력으로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면에서, 유엔의 평화유지군 활동은 유엔의 사업 중 효과성이 매우 높다. 

평화유지군은 적의 공격에 대응하는 전투병의 역할만이 아니라, 치안을 유지하고, 평화체제의 정착을 관리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원칙적으로 평화유지군이 파견되는 나라의 동의를 얻고 나서야 그곳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지만, 인권을 크게 유린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 해당 나라의 동의 없이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도 한다. 이 경우 국가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국제질서의 원칙과 충돌하게 된다.

분쟁이 일어날 조짐은 미리 탐지할 수 있다. 따라서 분쟁 발생이 예상되는 지역에 평화유지군을 미리 파견한다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과를 거두겠지만, 최소한의 평화유지군을 상비군으로 유지하자는 주장은 강대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보건 분야에서 사전 예방이 사후 치료보다 더 효과적이고 비용이 적게 들 듯이, 미래에는 평화 분야에서도 분쟁이 발생한 다음 개입하기보다 사전 예방 조치가 평화유지 활동의 주가 되어야 한다.  

"정의 없는 영구적 평화는 없다" 는 주장이 진보적 평화운동가들 사이에서 옹호되지만, 정의와 평화는 별개의 문제이다.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유혈분쟁이 터지지 않고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정의가 구현되어야만 평화가 가능하다면, 그러한 평화는 가시적인 미래에 확보하기 어렵다. 평화가 없는 상태, 즉 분쟁은 엄청난 인간적 희생을 동반하므로, 정의가 구현되는가 여부와는 별도로,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국가간의 전면전은 갈수록 줄어들어 1990년대 이래 매우 드물어졌다. 내전, 즉 정부군과 반군사이의 전투가 전세계의 분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내전은 대부분이 인종 민족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주류 집단에 반발하는 것인데, 분쟁의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대의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실제는 소수의 주동자 들이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대의를 팔아먹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조직 범죄집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의 소득 수준이나 경제성장율이 낮을 수록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아진다. 국민의 소득이 낮으면 세수가 적어 국민에 대한 국가 권력의 장악력이 떨어져 내전의 위험이 높다. 또한 전쟁 자금을 조달 할 수 있는 천연자원이 많을수록 내전의 가능성이 높다. 석유, 다이아몬드, 구리가 대표적 예이다.

국가간 대규모 전쟁이 크게 줄어들었고, 평화유지군이 개입하여 내전을 종식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사람들이 해결책으로서 폭력적 수단을 허용하는 정도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만일 유엔의 평화유지 활동이 더욱 활성화된다면 분쟁이 없는 세계의 도래도 가능할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분쟁을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의 소득을 높이는 것이므로, 가난한 나라의 경제성장을 돕는 것이 분쟁 없는 세계를 만드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다.

이 책은 유엔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정리한 글이므로 그리 재미있게 읽히지 않는다. 평소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유엔의 평화유지군 활동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2021. 7. 18. 12:26

Ian Morris. 2013. War! What is it good for?: Conflict and the progress of civilization from primates to robots. Farrar, Straus and Giroux. 393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인류의 역사 전반을 훑으면서 전쟁은 평화를 가져오는데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명제를 주장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공격성과 폭력성을 지닌 동물이다. 수렵채취 단계에서 폭력으로 사망한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20%에 달한다. 사람들은 문제와 어려움에 봉착하면 쉽게 폭력적 수단에 의지했으며, 집단들 사이에 제한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은 끝없는 공격과 보복을 낳았다. 농경을 하면서부터 행위 방식에 변화가 나타났다. 농경으로 인구 밀도가 늘고 이동의 제한에 부닥치면서, 과거 작은 집단 간 폭력적 갈등은 규모가 큰 사회 간 전쟁으로 발전했다. 전쟁에서 상대 집단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집단이 상대보다 더 부강하고 규율이 더 잘 잡혀 있어야 한다.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의 사회 통제의 효율성이 높아지면서, 사회 내에서의 사적인 폭력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그 결과 폭력의 빈도는 현저하게 줄었다.

과거 소집단 사이의 폭력적 갈등이 빈번했을 때는, 상대를 공격하여 이길 경우, 보복을 예방하기 위하여 상대 집단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안전한 방책이었다. 반면 국가가 폭력을 통제하는 단계에서는, 다른 국가와 전쟁에서 이기면 상대의 반발을 무마하는 수준에서 폭력을 그치고, 대신 상대 국가의 구성원을 자신의 사회 안으로 포용하여 더 큰 국가로 만드는 것이 미래의 전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안전한 방책이다. 그 결과 로마의 제국주의 시대에 폭력으로 죽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1~2%로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다. 전쟁을 통해 더 강력한 국가와 군주 Leviathan 가 출현하면서 폭력은 감소하고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온 기마민족의 공격으로 로마가 멸망하면서 강력한 국가의 통제는 허물어졌다. 기마민족은 농경사회의 지배자와 달리 기본적으로 정주하여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이 아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상대를 포용하고 더 큰 부강한 나라로 성장하는 길을 걷기 보다는, 상대를 정복하여 파괴하고는 물러나거나 혹은 얕은 수준의 통치만을 하는 지배자가 되었다. 이들은 정주하는 권력이 아니므로 피지배자를 자신의 일부로 포용하여 그들의 안위과 부를 높임으로서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전쟁의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피지배자를 자신들의 일부로 포용하지 않고 타자로서 착취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다. 기마민족의 전쟁은 상대를 파괴하는 것에서 더 발전하지 않는 '비생산적 전쟁'이다. 유럽은 다시 작은 집단으로 쪼개졌으며 이들 사이에 갈등과 폭력의 빈도는 높아졌다. 중세 시대에 유럽은 로마 제국주의 시대보다 폭력의 수준이 훨씬 높다. 유럽이 다시 상대를 포용하는 '생산적 전쟁'의 길로 들어선 것은 총기가 보급되고 기마 공격이 무력화되면서부터이다. 총기가 보급되면서 전쟁의 비용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훈육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높은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잘 훈련된 군대를 확보하기 위해 사적 폭력을 억제하고 사회를 잘 다스려야 할 필요성 역시 증가하였다.

서구가 세계를 제패하게 된 것은 항해와 무기 제조 기술이 발달하고, 군대의 훈육과 조직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서구 유럽은 지형 조건상 작은 나라로 쪼개져 있으면서 서로 간에 잦은 갈등과 경쟁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유럽은 단일 체제의 중국이나 인도와 달리 상호간 모방하면서 경쟁적 발달을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이 축적되면서 아시아와의 격차를 넓혔다. 서구의 제국주의시대 정복 초기에는 폭력이 많이 사용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제국주의는 종주국과 식민지 모두에서 질서를 높이고 폭력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세기 중반 영국이 프랑스와 패권전쟁에서 승리하고, 산업혁명으로 부와 기술을 높이면서, 영국은 세계에 대해 개방정책을 강요하였다. 각 나라들은 각자 자신이 잘하는 것을 생산하여 서로 교역하므로서 모두의 부를 높였다. 이러한 개방정책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영국에게 매우 큰 부와 번영을 안겨주었다. 영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자유 항해와 교역의 자유를 보장하는 세계 경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개방정책을 통해 영국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후발 산업국인 미국과 독일도 빠르게 성장하여, 19세기 후반 무렵에 미국은 산업 생산에서 영국을 따라잡았으며 20세기 초에 이르면 독일도 영국을 위협할만큼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자신들의 성장한 국력에 비해 자신들이 차지한 식민지가 보잘 것 없음에 불만이 커졌으며, 결국 1914년과 1938년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두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을 통해 국력을 소진한 영국 대신, 미국이 세계 경찰의 위치에 올라서서 개방 정책을 이어갔다. 1989년 소련이 몰락함으로서 미국은 마침내 유일한 세계 경찰의 위치에 올라섰다.

미국의 안전 보장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개방정책은 미국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었지만, 과거에 그랬듯이 다른 후발국가들에게도 빠른 추격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은 미국의 개방정책과 세계 경찰의 역할덕분에 빠르게 국력을 높였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거쳤듯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전쟁이 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앞으로도 계속 생산성을 높여간다면, 가까운 미래에 중국에 추월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미국이 중국에 추월당할 것으로 예측한다. 과거와 달리 핵무기의 확산으로 앞으로 전면전은 전쟁 당사자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기기 때문에 전면 전쟁이 발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미소간 군비축소의 결과 현존하는 핵무기는 수천만명을 죽이는 정도에 불과하며, 미사일을 요격하는 기술의 발전 등으로 핵무기의 피해를 선제적으로 줄일 수있는 방법이 계속 개발되고 있다. 따라서 핵무기의 엄청난 위험 때문에 앞으로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엄청난 피해를 입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인구의 상당 비율은 핵무기를 사용하는 전면 전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므로 전쟁의 위험은 상존한다.

인류의 평화에 대한 희망이 과학 발전에서 나올 수있다. 인류는 공격적 폭력성을 문화적 장치를 통해 통제해왔으며, 그 결과 근래로 올 수록 폭력이 줄어들었다. 앞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이 계속되면, 사람들 사이에 의식의 연결이 확대되면서 궁극적으로 컴퓨터와 인류 모두가 결합한 단일체 Singularity 가 출현할 수 있다. 컴퓨터의 도움으로 나와 우리의 외연이 계속 확장되다가 결국 모두가 하나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기 이전에, 인류는 과학 기술을 더 많이 활용하여 유리한 집단과 과학 기술이 낙후된 집단간에 불평등이 확대될 수있다. 전자는 월등한 능력을 동원하여 후자를 복속시키고 착취하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예측이 보다 가까운 미래의 모습일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역사적 지식을 버무려 비교적 가볍게 서술한 책이다.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나 새로운 주장은 없으며, 인류 역사 관통하는 상식을 제공한다. 인간의 본성은 갈등, 공격, 폭력이며, 강력한 국가와 군주의 출현으로 이러한 본성을 제어한다는 토마스 홉스의 명제를 재확인한다. 전쟁 때문에 강력한 국가와 군주가 출현하여 개인과 집단간 소소한 폭력을 제어한 결과 오늘날과 같이 폭력 행사가 드문 평화로운 사회가 됬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강력한 국가와 군주, 세계의 경찰의 필요성이다. 만일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는 국가의 힘이 약화된다면 다시 혼돈의 상황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즉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폭력적 존재가 버티고 있어야 한다.

 

     

 

 

2021. 5. 24. 08:01

Richard Haass. 2020. The World: A Brief instroduction. Penguin Press. 313 pages.

저자는 과거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기획에 참여하였으며 현재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기관을 이끄는 전문가이다. 이 책은 국제문제에 관한 기본 상식을 배양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개론서이다. 17세기 중반 웨스트팔렌 조약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세계 주요 지역의 개관, 국제적 쟁점 주제의 개요, 국제 질서의 프레임 이라는 네개 범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

1989년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이 단독으로 세계 강국으로 부상했으나 미국의 주도적 힘은 과거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다. 세계는 유럽, 소련, 중국, 인도 등으로 구성된 다자간 세계 질서 multilateralism 로 이행하고 있다. 세계 지역 중에서 아시아의 중요성이 점차 부상하고 있다.

세계의 평화는 각국의 민주화 정도, 경제적 상호의존의 정도, 국제 관계를 조정하는 기관의 힘, 국제적 규범의 힘에 좌우된다. 이 네개의 요인 어느 것도 현재 상대로 보건대 평화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70년간이나 평화를 지속해 왔지만, 앞으로 비평화로 이행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이 언제라도 비화되어 비평화상태에 빠질 수있다. 세계는 현재 무질서 chaos 의 상태이다. 

저자는 국제문제 전문가 답게 세계의 미래를 그리 낙관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 각 주제를 다루는 매 장의 후반에 자신의 견해를 간략히 서술하는데, 문제의 해결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는 말을 빼 놓지 않는다. 과거의 역사를 보건대 현재의 세계는 언제라도 전쟁으로 치닫을 수있다고 진단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평화를 향하여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갈등의 소지에 대해 서로 머리를 맡대고 타협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미국의 내정 문제가 정돈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미국의 지도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반면, 미국을 대체하여 세계를 이끌 지도적인 나라의 출현은 현재로서는 요원하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낙관할 수없다. 이 책은 평이한 글로 쓰여진 개론서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들을 모두 균형있게 다루려 했으므로, 특정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은 찾아볼 수없다.

 

2020. 7. 25. 12:30

Henry Kissinger. 2014. World Order. Penguin books. 374 pages.

정치학 교수로 였으며 미국의 국무부 장관을 지낸 저자가 서구의 외교사를 서술한다. 유럽의 국가들은 17세기 초반 삼십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음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국제관계의 규범을 만들었다. 이후 서구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는 웨스트팔리아 체제를 요약면 다음과 같다. 웨스트팔리아 체제는 종교와 세속 정치를 구분한다. 각 나라는 서로의 국가 주권을 존중하고, 서로를 대등하게 대우하며, 기존의 국경을 인정하고,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유럽의 국가들은 서로간 합종 연횡을 통해 세력 균형을 유지하면서 각 나라의 주권을 존중하는 이 체제가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이 체제가 훼손되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사이에 유지되던 세력 균형이 통일 독일의 부상으로 깨지면서 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웨스트팔리아 체제는 서구에서 오랫동안 국가들간에 관계를 조율하는 유효한 장치였다. 어떤 제도가 국가들의 상위에 군림하여 전체의 질서를 관리하는 방식, 즉 세계의 경찰이 존재하지 않는 한, 국가들 간 세력 균형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것 이외에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없다. 이 체제를 따르면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국가의 힘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전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제의 적과 손을 맞잡고 새로 부상하는 나라를 견제해야 한다. 이 체제에서는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어떠한 이념이나 이상이 없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도 없다. 오로지 서로간에 냉정한 힘의 평가와,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국가들 사이에 '현실주의 정치'(Realpolitik), '힘의 정치'(Power politics)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국제 질서가 자리잡았다. 이슬람 지역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합일되어 있다. 이슬람교는 세계를 이분법, 즉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과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지역으로 구분한다.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지역은 앞으로 정복을 통해 이슬람교를 믿도록 해야 한다.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은 하나의 원리로 통치되므로 지역간 구분이 중요치 않다. 오스만 터키 제국은 동서로는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아프가니스탄까지, 남북으로는 이집트에서 이란과 터키를 거쳐 발칸반도까지 거대한 단일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대제국에는 유럽에서와 달리 국가간 상호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다이나믹이 없었으므로,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와 경제가 정체되고 낙후하였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후 여러 지역으로 쪼개져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중국은 세계를 천황의 지배하에 있는 단일 세계로 인식한다. 유교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이념이다. 이 세계의 중심에 중국이 있고, 변방에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군신관계를 맺은 나라들이 있다. 중국이 볼 때 변방의 나라들은 모두가 중국 문명보다 못한 오랑캐들이다. 중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와 제도를 보유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므로, 주변국이나 이방과 관계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변국 중 중국을 침략한 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중국에 동화되었다. 예컨대 몽고는 중국을 침략하여 원나라를 세웠으며 만주족은 청나라를 세웠다. 서구에서는 국가들 사이에 웨스트팔리아 체제라는 수평적 질서가 지배했음에 비해, 아시아 나라들 사이에서는 중국을 가장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자리잡았다. 17세기에 서구의 나라들이 중국에 문호 개방을 요구했을 때, 중국은 이들을 오랑캐로 취급하고, 중국의 체제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여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결국 강제로 문호가 개방되고, 서구의 문물을 일찌감치 수입하여 발전한 일본에 국토가 유린되는 수모를 겪었다.

미국은 20세기초 제 1차 대전에 참전하기 직전까지 유럽에 대해 고립주의 혹은 중립주의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유럽의 열강들과 대양으로 구분되어 있고, 19세기말까지 서부를 개척하는 일에 몰두했으므로, 유럽의 국가들과 달리 국가의 안위를 위해 이웃 나라와의 관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이익이 직접적으로 걸린 경우 힘을 행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유럽 나라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에 간여하지 말라는 먼로 독트린을 선언했으며, 19세기 말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미국이 개입하여 바로잡을 수있다고 선언하였다. 이웃 나라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남서부를 빼앗았으며, 하와이를 점령했고,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쿠바 등을 미국의 식민지 내지 준식민지로 만들었다.

미국은 이념으로 뭉친 나라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의 조상으로부터 국가의 정통성을 이끌어낼 수 없다. 미국은 유럽의 봉건 질서를 부정하면서 만들어진 나라이다. 유럽의 전통적인 신분제도나 종교의 지배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건국 이념으로 건립되었다. 국가간의 관계에도 이러한 미국의 이념을 전파하려 한다. 미국은 유럽의 현실주의 정치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국가들 간 관계에서 개별 국가의 이익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고 대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나라의 주권은 존중하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이념은 인류가 모두 지켜야 할 보편적 원칙이라고 굳게 믿으므로,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승국이 된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이상주의를 국제관계의 규범으로 만들려 했다. '국제 연맹'(League of Nations)이 그것인데, 이 기구는 미국의 의회에서 조차 인준되지 못하였고, 무엇보다 국제 규범을 위반하였을 때 이를 강제할 조치가 없었으므로 국제 평화를 지키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제 2차 대전으로 유럽이 몰락한 후, 미국은 자신의 뜻대로 세계 질서를 만들고 강제할 수 있는, 세계 경찰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UN, IMF, World Bank 등이 그 산물이다. 냉전체제에서 소련과 경쟁을 벌이면서 미국은 미국의 이념을 전파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현실주의 정치, 공작정치를 병행하였다. 제삼 세계에서 국민을 탄압하는 독재자를 옹호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반군을 부추겨 콜럼비아로부터 파나마 운하를 빼앗아내고, 자주 민족적 독립을 저지하는 베트남 전쟁을 벌였다. 2차 대전후 미국의 국제관계는 공도 많지만 과실도 많다. 미국 덕분에 유럽과 일본이 다시 부상하였고,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었다. 반면 미국의 간섭 때문에 중남미와 중동은 계속 정정이 불안하고 발전이 지체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키신저는 21세기에 미국은 전환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과거와 같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기에는 힘에 부치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대신해 국제 질서를 주도해 나아갈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마지 못해 세계의 여러 문제에 간여하지만, 점차 개입의 범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단일 유럽이나 중국이 부상하면서 다자간의 관계, 즉 오랫동안 서구의 국제관계를 지배한 웨스트팔리아 체제가 다시 자리잡을 것이다.

이 책은 키신저의 경륜이 배어 있는 책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그러나 노년에 써서 그런지 분석의 예리함보다는 주마간산 식으로 전반적인 흐름을 해설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서구의 역사를 서술하는 부분은 그래도 깊이가 있지만, 아시아에 대한 서술은 피상적이다. 추상적인 개념을 주어로 하는 문장을 구사하기에 말하는 내용이 바로 다가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저자의 명성만큼 그렇게 좋은 책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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