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영. 2023.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교보문고. 334쪽.
저자는 작가이며,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진단한다. 그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인간인 핵개인이 늘어나고 앞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집단과 조직이 아니라 개인이 세계의 중심인 세상이 출현하는 것이다.
과거 한국사회는 집단주의 문화가 지배했다. 국가, 회사, 친족, 가족 등의 집단이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개인의 삶의 기회를 좌우했다. 피라미드식 권위주의적 위계관계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집단내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따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설정되었다. 장유유서, 연공서열, 선후배, 남존여비, 등으로 지칭되는 상하관계만 존재할 뿐, 수평적인 관계는 드물었다. 능력보다는 나이와 경력이 우선시되며, 효율과 창의성보다는 전통과 기득권이 지배하였다.
근래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러한 과거의 틀은 도전받으며 조금씩 바뀌고 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효율과 창의성을 중시하며, 능력에 따른 보상을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사회가 세계화되고 서구사회의 기준을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집단보다는 개인의 삶을 우선시하며, 집단의 권위와 전통을 따르기보다 창의와 효율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은, 과거의 질서를 고수하려는 구세대 사람들과 곳곳에서 부딛친다. 근래에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기술 변화가 빨라지면서, 오랜 경험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개인은 집단의 도움없이도 컴퓨터, 인터넷,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조직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세계적 경쟁에 노출된 회사들은 이러한 변화를 상대적으로 빠르게 수용하고 있다. 조직의 위계 체계를 축소하여 팀제로 전환하고, 경험보다는 능력을 우대하고, 회사내에서 인재를 양성하기보다는 당장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영입하여 그에 합당한 보상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평가체계를 다면화하고 투명하게 하여, 기존의 집단적 권위가 들어설 자리를 없애버리고 있다. 조직 내에서 개인은 자신의 역량만큼 보상받으며, 조직은 그 개인을 필요로하는 동안 필요로 하는 만큼만 우대하는 유연한 고용시스템이 등장할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개인주의 포트폴리오 사회 individualistic portfolio society에 사람들은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잘 살아갈려면, 개인은 자신의 가치를 항시 의식하고 행동하며, 기술과 사회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계속 업데이트하여 자신의 시장 가치를 유지하는데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은 전통적 집단주의 가치에 익숙하고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이든 사람과 조직의 상사들이 버티고 있지만, 이들은 조만간 새로운 개인주의 가치로 무장한 젊은 사람과 조직의 신입 세대들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개인의 사회는 그리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서구는 이미 그가 주장하는 핵개인 즉 개인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로 이전한지 오래기 때문이다. 근래에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 같다. 컴퓨터 사이언스의 전문지식과 다음소프트의 부사장이라는 그의 경력도 그의 인기에 한목하는 것일테고. 경직된 개념과 문장을 구사하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것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개인이 중심인 서구 사회에서도, 각 개인의 삶에서 국가와 조직의 중요성은 여전히 대단하다는 사실에서, 개인 중심의 사회를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은 한계가 있다. 국가와 조직이 개인의 삶을 제약함은 물론, 개인이 단독으로 할 수없는 많은 일을 사람들은 국가와 조직을 통해 해낸다. 많은 남녀의 친밀한 관계가 기존의 가족의 틀을 벗어나고 있지만, 부모 모두의 협동적 투자를 받은 자녀는 그렇지 않은 자녀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많이 성취한다는 사실이 당분간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 기술적 능력이 한창때인 젊은 시절에는 유동적인 지위를 선호하지만, 인생의 사이클에서 그렇지 않은 때에는 안정을 선호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개인중심의 포트폴리오 사회에 모든 사람이 동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개인 중심의 사회에 전개되는 치열한 경쟁의 폐해에 대비하기 위해, 사회적 공동 부양 장치를 보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장치를 유지하는 데에 누가 돈을 댈 것인가는, 개인 중심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더욱 골치 아픈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서구의 영향을 받아 앞으로 개인의 중요성이 확대될 것은 분명하지만, 개인 중심의 사회가 수반하는 문제도 적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에서 개인중심주의가 어떤 속도로 얼마나 확대될지를 구체적으로 예견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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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 Klinenberg. 2012. Going Solo: the extraordinary rise and surprising appeal of living alone. Penguin books. 233 pages.
저자는 사회학자이며, 이 책은 300명 이상의 사례를 인터뷰한 연구 결과이다. 20세기 후반들어 혼자사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다. 미국에서 단독가구가 전체 가구수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65세 이상의 절반이 혼자 산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상반된 특성을 보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괜찮은 직업에 종사하면서 혼자사는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극도로 가난하고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20~30대의 왕성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한편에 있으며, 노년기에 배우자를 여의고 홀로 사는 사람들이 다른 편에 있다. 혼자사는 사람이 느는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텐데, 북유럽 사회와 같이 인구의 절반이 혼자사는 단계에까지 갈 수도 있다.
근래로 올수록 혼자사는 사람이 느는 것은 경제적 풍요의 결과이다. 과거에는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함께 살 수 밖에 없었으나, 극도로 가난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이제는 많은 사람이 개인의 소득과 사회복지 시스템의 덕택에 혼자 살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의 삶의 성취를 최우선하는 개인주의 가치관을 쫓아서, 사람들은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불행한 결합에서 벗어날 자유를 획득하였다. 사람들은 내키지 않는 상대와 결혼해야 하는 경제적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불행한 결혼을 끝내는 것을 주저치 않는다.
20세기 후반에 혼자사는 사람이 증가하는 원인은 다양하다. 첫째, 개인의 감정과 성취을 최우선하는 가치관의 확대, 둘째, 여성의 교육 수준 향상과 취업 확대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됨, 셋째, 도시 생활의 증가, 넷째,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쉽고 빈번해짐, 다섯째, 교육 기간이 늘고 수명이 연장되어 노년기가 느는 등으로 생애 주기가 바뀐 점.
혼자사는 사람이 증가하는 이유는 혼자사는 것이 꾀 할만하기 때문이다. 혼자산다고 하여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은 혼자 살면서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직장 생활에 바쁜 것은 물론이고, 일 이외에 여가생활에서 사람들과 많이 교제한다. 혼자 사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공간과 시간과 에너지를 마음대로 쓰는 자유를 누린다는 장점이 있다. 결혼 생활은 잘 되면 좋지만, 갈등할 때에는 혼자사는 것보다 못하다. 결혼한 사람이 혼자사는 사람보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더 좋다는 많은 연구 결과는 잘못된 비교이다. 왜냐하면 결혼했다 문제에 부딛쳐 이혼한 사람을 결혼한 사람의 표본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배우자와 함께 살기 때문에 혼자사는 것보다 더 건강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문제없이 지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결혼의 실용적 장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착각하고 말하는 것일 수있다.
젊은 시절은 물론이고 중년에 이르기까지 혼자사는 것은 살만하다. 그러나 노년이 되고 건강이 악화되어 가까운 사람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불안이 나이가 들수록 다가온다. 몸이 병들고 쇠약해져 타인의 도움을 일방적으로 필요로 할 때, 친구는 가족을 대체할 수 없다. 사람들은 거동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늦게까지 자신의 집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어한다. 미국인들은 양로원을 죽으러가는 곳이라고 인식하며, 실제로 양로원에서의 삶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만큼 열악하다. 부자들은 비싼 요금을 내고 반자립적인 생활을 제공하는 assisted home 에서 살기도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이것은 가능한 대안이 아니다.
앞으로 혼자 사는 사람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도심에 이들의 주거 수요을 충족하는 소형 주거의 아파트를 많이 공급해야 한다. 노인들이 생의 마지막 단계까지 자신의 집에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복지 서비스가 확대되어야 한다. 혼자사는 노인의 문제는 미국인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데, 노인들의 물질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도록 돕는 사회가 놓은 사회이다. 미국의 중류층 삶의 전형인 교외의 단독주택은 혼자사는 사람의 욕구와는 어긋남으로 앞으로 수요가 감소할 것이다.
이 책은 혼자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서술하는 것으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혼자사는 것도 충분히 할만한 일이며, 이러한 선택의 자유를 뒷받침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메시지를 제시한다. 혼자사는 것이 결코 고립된 방식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결혼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혼자 살다가 때때로 같이 살기도 하고, 원하는 동안 함께 사는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이다. 저자는 이러한 방식의 삶이 일반화된 스웨덴을 이상적으로 그린다. 스웨덴은 빈부나 연령에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면 언제건 혼자살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하기에 혼자사는 방식이 조금도 이상할게 없는 사회라고 한다. 살다보면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고 서로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참으면서 계속 함께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옛사람의 말은, 살기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로 치부해야 한다. 인생은 한 번 뿐이므로 자유롭게 해보는 데까지 해보다 죽는게 더 나은 삶이다. 쉽게 읽어 내릴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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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면 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각자의 세계 속에 몰입해 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은 눈이 어두운 노인이거나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사실 스마트폰을 산지 얼마 안되었기에 사용법을 익히고 새로운 앱을 시험해 보느라 바쁜 것은 이해한다. 나는 전철을 타면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 맞은편에 앉은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무슨 재미로 살까, 어떤 고민을 안고 헤메고 있나, 어떻게 저런 표정의 얼굴이 만들어졌을까, 젊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저사람은 과연 어떤 희망을 가졌을까, 여자는 남자와 어떻게 다를까, 등등 사람을 보면서 이모저모로 관찰하노라면 연민의 정이 느껴지고, 호기심이 피어오르고, 덧없다는 느낌도 들고,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페이스북 계정을 처음 만들면, 알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추천해 주어 친구를 맺게 한다. 오랫 동안 소식을 몰랐던 사람을 새삼 발견하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터넷 상의 접촉은 실제 대면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선뜻 연락을 취하지는 않는다. 페이스북의 관계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친구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아예 들어가 보지도 않는다. 내 페이스 북 계정에는 친구가 한명도 없다.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자주 휴대전화를 열어보고 이메일을 체크하는 것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누군가 찾아주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지만, 막상 상대와 접촉하면 왠지 불편해지는 것이 요즈음 사람의 심사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사람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개인주의적으로 된 것이다. 집단의 압력에 구속되던 상태에서 해방된 것까지는 좋은데, 의미있게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각자 자신의 틀을 지키면 서로 접촉하기가 조심스럽다. 상대가 쉽게 접근해 오면 나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 튀기고 싶은 변덕이 발동한다. 내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고 싶건만 막상 상대를 마주치면 왠지 상대의 못난 구석이 먼저 눈에 띠어 물러서 버리곤 한다. 나도 상대에게 그렇게 보일 것임을 알고, 나 자신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각자 자신의 것을 지키고 자신에게 충실하면 의미있는 무엇을 발견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 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삶의 울림을 찾지 못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라는 조언은 그릇되다. 아무래도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가장 감동을 받을 때는 남과의 연결 속에서 무엇을 할 때이었던 것 같다.
페이스북이 그렇게 많은 접속건수를 기록하지만 그것이 사람들 간의 직접적인 대면 관계를 대치하지는 못한다.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쏟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물론 둘 간에 인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외로운 사람이 인터넷에 더 몰두하기는 할 것이다. 인터넷을 많이 들여다보다 인터넷 세상으로 빠져든다는 환상은 매트릭스나 아바타와 같은 영화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 세컨드 라이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넷 속의 대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아직 인간의 진화 수준은 인터넷 가상 세계에서보다는 물리적으로 대면하는 관계 속의 삶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와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서로에게 구속되는 것을, 또한 상대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각자의 동굴 속에 머물러 있다. 인터넷이라는 제한된 통로를 통해 상대와 접하려고 하나,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별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 사회에 외로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으며 그들에게 대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직업이 번성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혼자만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선진국 사람들은 외로움이라는 비용을 비싸게 치른다. 가난한 나라에서라면 본인이 원치 않아도 항시 남과 부대껴야 하니 부자나라의 개인주의적 삶에는 양면성이 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면 그래도 선진국 사람의 개인주의적이며 외로운 삶이 집단의 압력에 이리저리 밀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나는 도저히 뗄 수없는 끈끈한 관계나 함께 망가져본 경험이 있는 허물없는 사이가 한편으로는 부럽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다. 일생 함께 점심을 같이해야 하는 직장 동료라는 말은 나에게 구속으로 다가올 뿐이다.
관계 맺는 일이 그렇게 힘들다니. 선진국 사람과 같이 제한적으로 또 계약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결코 그 관계가 편안해 질 수 없다. 하긴 나도 그리 관계 맺는 데 능한 사람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내식으로 살아가는 개인주의적인 삶이 편하기는 하다. 그래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끊임없이 남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나도 마음속 구석에 사람들과 관계 맺고자 하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게다. 나도 따지고 보면 외로움에 절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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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여론조사에서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다. 미국인 주류 집단의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에 있으므로 미국의 식자층은 이러한 변화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물론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해서 신에 대한 믿음까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미국인 열 명 중 아홉은 어느 정도는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유럽사회는 이미 세속화되어 신을 믿는 사람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은 서구문명에 속하면서 근래까지 세속화의 물결이 침투하지 않은 예외적인 사회로 여겨져 왔다. 과학 기술의 힘을 신봉하고 물질주의와 소비문화가 팽배한 미국인이 독실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율배반처럼 생각되나, 실제 미국인 중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적지 않다. 기독교 근본주의를 추종하는 복음주의 교파 개신교 교도만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런 미국인의 독실한 신앙심이 근래에 두드러지게 균열하고 있다.
미국인의 개인주의는 개신교 신앙과 맞닿아 있다. 신에 대해 개인이 홀로 영적인 책임을 지며,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신에게 다가가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기며, 신이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교리 등은 모두 개인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것을 명한다. 부모나 형제조차도 자신의 신앙에 직접적으로 간여할 수 없다.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를 통해 서로 사교하고 믿음을 부추기며 지내지만, 개신교는 신앙에 관한 한 개인이 사막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근래에 많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하며 교회에 나가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은 개인주의의 발현이다. 이들은 기성의 교회 조직이나 자신 이외의 외부의 권위를 부정한다. 삶의 의미를 찾고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서 기존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용감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서 혹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은 결국 허무로 흐를 위험성이 크다. 기존 종교나 교회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유럽의 경우 세속화된 인간으로 이전하는 중간과정이었다. 이들에게 신 혹은 초월적인 힘에 대해 막연한 개념은 남아 있으나 인간사는 인간이 관장하는 것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질문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할 것이지만 미국인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보통 미국인의 생각이다. 신이 없으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도덕이 없고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관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극한 개인주의자와 무신론자가 합체가 되면 무서운 사람이 탄생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생각은 약간 다를 것이다. 질서라는 것은 신으로부터 보다는 내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나온다. 내가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신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나의 가족이나 내가 속한 집단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다. 동양 사회에 절대자 신을 모시는 종교가 큰 세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게 해달라는 구복적인 신앙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절대적인 가치나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는 믿음은 동양 사람에게 생소하다.
서구인이 교회와 신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절대적인 가치와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나서는 노력이 어디에 귀결될지 궁금하다. 불교의 참선이나 요가 등과 같이 자신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리 큰 성과를 거두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솔직히 자신의 내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가치 있는 무엇을 발견하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는다. 나는 생물학적인 존재이면서 사회적인 존재이다. 생물학적인 나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한다면 아마도 진화생물학에서 주장하는 ‘종족 본능’이 최고로 추구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왜 종족이 보전되고 융성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인간이 너무 많아서 지구상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가?
사회적인 나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한다면 아마도 이웃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찾을 것이다. 사회의 복리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나의 행위에서 내가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궁극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신에 귀의하여 모든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는 것이 가장 쉬운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상실할 때 의지할 것은 주위의 이웃, 내가 속하는 사회밖에 없다.
어찌 생각하면 왜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가치가 되어야 할지에 의문이 든다. 인류가 멸망한다고 하여도 그만 아닌가? 자연 그 자체에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의 기준이 없으므로 인류의 생존과 발전은 인간이 임으로 만들어낸 가치일 뿐이다. 결국 생물학적인 생존 본능만을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서구인들이 개인주의를 견지하면서 어떻게 신에게서 떠나서 삶의 의미를 찾을까? 아마도 헤매면서 살 것이다. 왜 사는지의 질문을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하고, 정 떠오른다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뒤로 미루고, 일상의 번잡함에 묻혀서 살다가 가는 것이다. 편하게 사는 것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바쁘고 벅차지 않겠는가?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삶이니 종교나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으로 하고 말이다. 이러한 주류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특이한 사람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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