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369)
미국 사정 (22)
세계의 창 (25)
잡동사니 (26)
과일나무 (285)
배나무 (10)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중국'에 해당되는 글 6건
2023. 10. 10. 21:44

Tasheng Huang. 2023. The Rise and Fall of the EAST: How Exam, Autocracy, Stability, and Technology brought China success, and why they might lead to its decline. Yale University Press. 353 pages.

저자는 정치경제학자이며, 이 책은 15세기까지 서구보다 모든 면에서 앞섰던 중국 문명이 이후 왜 서구에 뒤지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저자의 이론적 및 경험적인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국은 서기 600년경 수나라에서 과거가 도입된 이후, 사회의 모든 인적 자원과 이념적 자원이, 오로지 유교 지식만을 테스트하는 과거를 통해 국가 관료가 되는 길 하나로 집중되면서 다양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기술 발전, 경제 발전, 정치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서구가 16세기 이래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 세계가 여러 나라로 잘게 쪼개져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였기 때문이라고, 많은 경제사학자들이 주장한다. 여러 나라들이 경쟁하는 유럽 세계에서 어느 나라의 군주도 자신의 독단적인 변덕과 억압때문에 기술발전이 뒤쳐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이웃나라를 앞설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했기 때문에, 유럽 전체적으로 과학 기술이 상승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은 하나의 권위체로 일찌감치 통일되었기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경쟁적으로 장려할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15세기 명나라 때에는 군주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해상 무역을 금지하고 먼바다를 항해하는 선박 건조를 금지함으로서 기술의 맥이 끊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중국 정부는 상공업을 천대한 반면 지주와 관료를 우대했기 때문에, 상공업 분야에서 생산성 향상의 동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나라가 멸망한 뒤 350년간의 혼란을 수습하고, 서기 600년경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이래, 중국은 현재까지 대체로 계속하여 하나의 나라로서 통일을 유지해 왔다. 수나라는 과거를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를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과거제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성공하는 '성과주의 체제' meritocracy 를 구현하였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귀족과 군벌이 왕과 권력을 분점하고 통치에 참여하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객관적인 시험인 과거를 통해 선발된 관료가 왕의 권한 위임을 받아 통치를 담당하였다. 과거를 통해 선발된 많은 유능한 관료들은 국가의 권력이 국민의 생활 전반에 침투하는 매우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는 서구 유럽의 국가 역량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제한적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전체적으로 왕의 감독하에 치러지는 과거는 비교적 공정하게 집행되었다. 이중 블라인드 처리를 하여 시험 응시자의 가족 배경이 선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과거제도는 전국의 모든 인적 자원과 이념적 자원을 이것 하나에 전적으로 집중시켰으므로, 다른 사상이나 다른 경력이 존재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전국의 모든 인재들은 오로지 과거의 시험 과목, 즉 유교의 경전을 익히는데 어린시절부터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였다. 중국이 오랜 동안 분열되지 않고 하나로 통일을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은 바로 과거제에 있다. 과거제는 가족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객관적인 시험을 통해 성공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었으므로, 웬만한 지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 과거를 준비하고, 과거에 붙으면 그것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오랫동안 과거를 준비할려면 생산 활동에 종사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은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지주 계층이 주를 이루었다. 상공인들도 어느 정도 재력을 모으면, 자식에게 자신의 가업을 잇게하기보다, 과거 준비에 몰두하게 했기 때문에, 상공업 자본의 축적이나 생산성 향상의 선순환이 만들어내지 못했다. 요컨대 과거제도는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체제를 오랫동안 안정되게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새로운 아이디어의 발전을 막고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동력을 차단하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경제사학자들은 중국이 서구보다 기술이 뒤떨어지게 된 시기를 대체로 1500년경 명나라 때로 지적한다. 특히 명나라때 정화의 대원정 이후 왕의 명령으로 해외 무역을 금하고 먼바다를 나가는 배를 짓지 못하도록 한 조치를 중국이 기술발전의 대열에서 벗어난 상징적 사건으로 종종 언급한다. 그러나 저자가 중국의 10,000건이 넘는 발명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경험적으로 분석한 결과, 중국에서 기술 개발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서기 600년 수나라 때 무렵부터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역사에서 기술발전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기 이전 춘추전국시대라 일컬어지는 혼란기와, 한나라가 망하고 수나라가 통일하기 이전 위진 남북조 시대라 일컷는 혼란기였다. 이 두시기에 여러 나라가 경쟁하는 분열의 양상이 펼쳐졌는데, 이는 유럽에서 여러 나라가 분열해 경쟁하던 상황과 흡사하다. 이 시기에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이 경쟁하였으며, 정부의 이념에서도 여러 사상이 혼합되고 교차하였다. 이 시기를 "백가쟁명의 시대"라 지칭하는데, 이렇게 생각과 행동의 다양성이 허용되는 환경에서 새로운 발명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반면 국가의 이념이 유교로 제한되고, 과거제도로 모든 인재들이 쏠리던 송나라 이후에는 발명의 건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중국은 1970년대 중반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개혁의 시기를 맞았다.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가 허용되고, 국유기업의 사유화가 진행되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하면서, 생산성이 빠르게 향상되고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개혁파가 제거되고 보수파가 실권을 잡으면서, 이전 시기의 개혁적 조치들은 취소되거나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개혁의 모멘텀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경제성장을 정권의 정당성으로 삼는 기조는 이어졌다. 각 지방 정부는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개발을 추진하면서, 경제성장의 성과를 놓고 서로 경쟁하는 성과주의 원칙 meritocratic principle 이 지배하였다.

중국은 공산당 독재체제이지만, 과거 모든 권력을 한 사람이 독점하여 무모한 정책을 밀어붙여 중국을 위기에 빠뜨린 모택동 시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등소평 시대 이래 권력을 여러 지위로 분산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당서기, 수상, 군 총사령관, 원로회의, 등으로 최고의 권력이 분산되어,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도가 형성되었다. 또한 당서기의 임기를 최대 10년까지로 하여, 두차례에 걸쳐 평화적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중앙의 권력을 여러 지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 관행은 1989년 보수파가 실권을 잡으면서 부분적으로 깨어졌다.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한 이래 모든 최고위 자리를 그가 겸직하여 독점하거나 폐지하면서 일인이 권력을 전적으로 독점하는 체제로 다시 돌아갔다. 시진핑은 2018년 헌법을 개정하여 당서기의 임기 제한을 없앰으로서, 등소평 시대 이래 권력을 제한하는 취지의 개혁적 조치는 완전히 무위로 돌아갔다. 

시진핑은 중국에서 다양성을 제거하는 정책을 강압적으로 추진하였다. 홍콩의 독립 체제를 무너뜨리고, 시지핑 일인의 개인 숭배 이념을 주입하고, 시진핑의 독재 권력에 위협이 되는 잠재적 경쟁자를 부패 처단을 명분으로 숙청하고, 언론과 미디어의 통제를 강화하고, 민간 기업을 국가의 통제권 하에 두고, 성공한 기업가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등으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시진핑의 정책은 경제성장을 둔화시키고, 새로운 기술 발전을 억압하고,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결국 체제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한다. 시진핑은, 과거 명나라 시대에 철저하게 유교 이념으로 무장하여 다양성을 죽이고, 국가의 명령으로 기술 발전을 가로막던, 그런 길로 중국을 몰아가고 있다. 시진핑이 이끄는, 다양성이 사라진 강력한 권위주의 정치체제는, 과거 정체되고 폐쇄된 중국이 다양하고 역동적인 서구에 의해 몰락했듯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무장된 서구와의 대결에서 중국이 또다시 패배할 위험을 안고 있다. 

저자는 과거 중국의 역사로 부터 얻은 교훈으로 현재의 체제를 들여다보는 흥미있는 사고 실험을 한다. 과거제도에 대한 논의와 중국 공산당에 대한 논의는 연결되기는 하지만 구분된 논의이다. 그의 분석은 과거제도에 대한 논의에서 더 설득력이 있다. 시진핑 체제가 그의 예상과 같이 위기에 빠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서술하는 것은 흥미를 북돋우기는 하지만, 논의의 중복이 매우 많다. 경쟁과 다양성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 나아가 경제성장을 낳는다는 그의 지적은 설득력이 크다. 서구가 앞서게 된 원인을 서구가 아닌 중국, 특히 과거제도에서 찾는 그의 분석은 흥미롭고 한국의 과거를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2023. 6. 16. 10:22

David Stasavage. 2020. The Decline and Rise of Democracy: A Global History from Antiquity to Today. Princeton Univ. Press. 310 Pages.

저자는 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고대에서 근래까지 민주주의의 원천과 변화의 원인을 전제주의와 비교하면서 서술한다. 민주주의는 오랜 옛날부터 인간사회 공통의 정치 제도였으며, 민주주의는 퇴보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전개되어 왔으며, 민주주의와 전제주의는 별도의 길을 걸어왔다.

원시시대와 고대에는 민주주의가 거의 모든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정치 제도였다. 지도자가 마을 혹은 부족의 세력가들로 구성된 집단과 협의하면서 통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집단의 규모가 작을 경우 집단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고대의 민주주의는 주로 상층부의 참여에 국한될 뿐, 일반인에게까지 주권이 부여될 정도로 폭이 넓지는 않았다. 반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폭이 넓지만,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이라는 간헐적 간접적 방식으로 주권을 행사하기에 유권자와 대표 사이에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깊이가 얕다.

서유럽은 국가의 힘이 약했다. 왕은 소수의 가신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며, 자신 소유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정부를 꾸렸다. 대지주 귀족이나 도시민들은 왕의 통제가 미치지 않았다. 왕은 귀족과 도시 상공인들과 협의하면서 국가의 일을 처리하였다. 중세는 물론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의 국가는 국내총생산의 1%정도의 세수만을 거둘 뿐이었다. 유럽의 왕은 15세기 절대왕정 시절에도 자신이 통제하는 관료의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통치력이 미약했다. 서유럽에서 약한 국가와 협의체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귀족, 승려, 도시 상공인으로 구성된 협의체가 1250년 왕의 세수권한을 제한하는 서약인 Magna Carta와, 1688년 왕을 폐위시킨 명예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반인을 징집해야 하고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하게 되면서, 통치자는 국민에게 주권을 점차로 더 많이 양보해야 했다. 영국에서 19세기 중반 남성 모두에게 선거권이 확대되고, 1차대전 이후에 여성에게 선거권이 확대된 과정에는 이러한 힘이 작용하였다.

중국은 일찍부터 국가의 힘이 강했다. 기원전 주나라 시절부터 왕은 두터운 관료 집단을 거느리고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했다. 서기 200년전 한나라 시기에 시작된 과거제를 통해 왕은 자신이 직접 임명하고 통제하는 유능한 관료들을 동원하여 국민의 일상을 통제하였다. 한나라 시기에 국가는 국내총생산의 10%가량을 세금으로 징수하였으며, 도로나 치수사업 등 많은 사업을 전개하였다. 중국은 왕 휘하의 강력한 관료들 덕분에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 체제를 뿌리내렸으며, 이러한 전통은 현대의 공산주의 정권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유럽과 중국이 다른 길을 가게된 원인은 자연 환경의 차이에 있다. 서유럽은 넓은 평야가 없으며, 목축이나 호밀 재배에서 밀도가 낮은 농업을 하고, 자연 강우에 의존하여 생산에 굴곡이 많으며, 인구가 조밀하지 않았다. 토지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낮고, 사람들이 쉽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으면,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주의가 서유럽보다 미국에서 더 빨리 발달한 원인이다. 반면, 중국은 황하 유역에서 문명이 발달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넓고 비옥한 퇴적토가 있으며 강물을 끌여들여 밀도가 높은 농사를 지었다. 많은 사람이 집중해서 거주하고, 농업 환경 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중국의 농업은 생산량의 측정과 예측이 정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관료는 국민의 생산활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반면 서유럽의 농업은 외부인이 생산량을 측정하고 예측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지역인이 아닌 국가의 관료가 주민의 생산활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세금을 거두기 어려웠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대표자를 뽑아 의회에 보내는 방식의 간접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영국은 대표자에게 의결의 전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1600년경에 일찌기 확립한 반면, 서유럽 대륙의 나라들은 대표자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제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세금, 전쟁 선포 등과 같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국민이 자신의 대표에게 일정한 한도까지의 결정 권한(mandate)만을 부여하는 제도는, 국가가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의회에서 논의가 진행되면서 대표자의 결정권한을 넘어서는 사안이 발생하면, 자신을 선출한 주민들에게 돌아가 다시 의견을 묻고, 의회에 돌아와서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의회의 효율을 크게 저해한다. 대표자에게 의결의 제한을 부과하는 전통은 주민이 대표자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정도가 높다. 반면 대표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제도는 일단 대표자를 선출하기만 하면 주민은 대표자에 대한 통제권을 더이상 행사할 수 없다는 면에서 국민이 주권을 보유한 정도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서유럽에서 상공업이 가장 먼저 발전했던 네덜란드를 영국이 제치고 17세기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영국의 의회가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반면, 대표자의 의결을 제한하는 제도를 유지한 네덜란드 의회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민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도가 높으면, 변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어려우며, 기득권자들이 버티고 신규 시장 진입을 제한한다.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 즉 지주가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꾸고 울타리를 쳐서 경작민을 쫒아내는 것이, 영국 의회에서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대표자에게 전권을 부여한 제도 덕분이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민주주의였던 서유럽보다 전제주의였던 중국이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 훨씬 더 잘 살았다. 전제주의 국가에서 국가의 지휘로 자원을 동원하여 일관된 경제성장을 추진한 사례가 여럿 있다. 소련이나 현대의 중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경제가 성숙하게 되면 추가적인 성장을 위해 개인의 창의가 필요한데, 전제주의 체제는 개인의 창의를 억압하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맞는 것 같지 않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정치적인 반대의견은 강력히 억압하지만, 생산성을 높일 수있는 비정치적인 아이디어는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혁신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민주주의가 성장하려면 어느 정도의 소득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맞지 않는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현재 기준으로볼 때 매우 가난한 수준의 사회에서 발달하였으며, 중국은 현재 상당한 소득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민주주의가 정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중류층이 자신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라는 요구가 높아지고 정치 참여 욕구가 커지기 때문에 중국이 민주화될 것이라는 예측은 지금까지 맞지 않고 있다. 물론 국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에 허덕인다면, 선동 정치가의 주장에 쉽게 혹하고 매표와 같은 선거 부정이 만연하기에 민주주의가 자리잡기 어렵다는 주장은 맞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볼 때 기본적인 생존의 위협을 넘어선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국민의 소득 수준과 민주주의는 경험적으로 관련이 크지 않다.

서유럽에서와 같이 일단 의회민주주의가 먼저 자리잡으면, 이후 관료가 충원되어 국가의 기능이 커진다고 해도, 의회가 관료 집단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약화되지 않는다. 반면 중국과 같이 강력한 관료집단이 전제주의 정치와 결합해 있는 경우, 이후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어도 자리잡기 힘들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하여 서방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경우, 그 제도의 성공 여부는 식민지 시기 이전 그 사회에 민주주의적 협의체 전통이 얼마나 있었는가에 달려 있다. 협의체 전통이 미약하다면 식민지 시기의 전제적인 통치 방식이 독립 이후에도 계속되는 반면, 협의체 전통이 있었다면 서구의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1990년 공산주의 몰락 이후 개발도상국에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이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대단한 일이다. 냉전시기에 미국과 소련이 자신의 진영에 속한 전제적인 정부를 떠받쳤었는데, 이러한 보호막이 걷히면서, 많은 나라에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근래에 민족주의와 대중영합주의가 발흥하면서 선진국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중앙정치와 대표자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은 난제이다. 시민 교육을 강화하고, 대표자와 유권자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이 필요하다.

의회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견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대표자를 통해 수렴하는 제도이다. 전제주의 체제 또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경로를 가지고 있다. 어느 체제이건 통치자는 국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통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경우, 관료들이 지역의 민의를 수렴하는 경로로 기능한다. 능력에 따라 선발되는 관료는, 세습적 귀족과 달리 일반인 중에서 선발되므로 그들 자신이 민의를 대표하며, 이들이 행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국민들과 접하며, 국민의 의견과 필요를 반영하여 제도를 조정한다.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가 근래에 양극화되면서 정부와 의회가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조정하여 일을 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중국은 유능한 관료와 정치인을 점진적으로 위로 올려보내는 자신들의 체제가,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발하는 대의제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제도와 중국의 전제주의 제도는, 각자 안정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흥미로운 주제와 달리, 연구 논문과 같이 경험적 분석 자료의 제시와 건조한 서술 때문에 빠르게 읽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서구와 중국을 비교하고, 이슬람과 아프리카 등을 비교하고, 고대와 중세 및 현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종횡무진 생각을 펼쳐서, 통찰력이 돋보인다. 논의와 관련하여 의문이 생길만한 점들을 비록 저자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논의하는 솔직함이 엿보인다. 여러가지를 생각케 하는 좋은 책이다. 

2023. 4. 7. 16:48

Amitav Acharya and Barry Buzan. 2019. The Making of Global International Relations: Origins and Evolution of IR at its Centenary. Cambridge. 320 pages.

저자는 국제관계학자들이며,  이책은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최근까지 국제관계의 변화를 정리하면서, 이러한 정세 변화가 국제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서술한다. 국제관계의 변화는 크게 5개의 시기로 구분한다. 제 1차대전 이전까지, 1차대전에서 2차대전 사이의 기간, 2차대전 이후, 1989년 공산권의 몰락 이후, 21세기에 접어들어 지난 20년간.

제 1차 대전 이전 시기의 국제관계는 유럽의 중심국이 여타 세계의 식민지를 거느리는 제국주의 시기이다.  인종주의가 이 시기를 지배하는 이념이었다. 근대화에 성공한 서구와 여타 국가들간의 격차는 매우 컸다. 일본은 이러한 서구 백인 중심의 세계 질서에서 애매한 존재로 중심국에 편입되어 있었다. 서구 국가들 사이의 국제관계는 강대국들 사이에 '힘의 균형' (balance of power)이라는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

1차대전에서 2차대전 사이의 국제관계는 기본적으로 1차 대전 이전 상황의 연장이다. '국제연맹'이라는 국가들을 아우르는 조직이 국제사회에 새로이 등장하여 강대국들 사이에서 약간이나마 역할을 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1차 대전은 영국, 프랑스 등 선진 산업국과 독일이라는 후발 산업국간 힘의 균형의 변화가 원인인데, 전쟁이 그러한 원인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서구사회는 또다시 전쟁을 맞게 되었다. 두 차례의 전쟁을 벌이면서, 전쟁이 국제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이상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대국들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전면전은 패전국은 물론 승전국에게도 엄청난 손실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1,2차 대전으로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은 몰락하였으며, 국제질서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미국은 2차대전을 계기로, 오랫동안 견지하던 고립주의를 버리고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2차대전 이후 유럽 제국주의에 복속되어 있던 식민지들이 독립함으로서, 비록 국가들간 상당한 차이는 있지만 국제사회는 서유럽 국가들만이 아니라 세계 여타지역의 국가들도 참여하는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난 국가들 중 일부는, 미국과 소련의 양진영 어디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는 제3세계 비동맹 그룹을 형성하였다. 냉전시기에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공산주의 체제간에 대립과 경쟁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제삼세계를 대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미국은 이차대전 후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제도를 만들고 지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는 자유주의 (liberalism) 국제정치 이론에 반영되었다.

2차대전은 핵무기를 국제사회에 등장시켰다. 핵무기는 전쟁의 승패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멸망시킬 위험을 안고 있으므로, 이후 미국과 소련간 핵무기 경쟁과 억제의 구도 속에서, 강대국간 전면전의 가능성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왔다. 강대국간 전면전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후원을 받는 대리 전쟁은 세계 지역 곳곳에서 끊임없이 터졌음으로 이 시기를 평화롭다고 규정하는 것은 서구 편향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1989년 공산권은 내부적인 비효율 때문에 함몰하였다. 소련의 붕괴로 인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단극 체제의 세계질서가 등장하였다. 냉전체제가 종식된 후, 더이상 강대국간의 충돌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낙관론이 지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중국과 인도가 성장하여 점차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들어 브라질과 러시아 등과 함께 강대국 군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국제사회는 다극체제로 이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21세기에 들어 국제사회는 다극체제의 모습을 점차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세계의 질서를 관리하는 역할이 수반하는 비용을 지불하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서구의 자본주의의 약점을 두드러지게 노출시켰으며, 반면 30여년 동안 꾸준한 고속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중국은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의 영향을 덜 받으면서 제삼세계 국가들에게 중국의 위상을 높였다. 영국의 유럽연합탈퇴와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의 등장은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약점을 세계 만방에 재확인시켰다. 미국은 이제 세계를 전면에서 이끄는 지위에서 내려왔으며, 자신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여러 강대국 중 하나의 위치로 하락하였다. 이러한 세계질서에서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중심을 차지하는 반면, 오랫동안 국제관계를 지배했던 인종주의는 점차 쇠퇴할 것이다.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제삼세계 국가들의 비중이 커진 반면, 서구 강대국들의 비중은 계속 줄어들었다. 미래에 오늘날의 시기를 뒤돌아볼 때, 국제정세의 가장 큰 변화는 제삼세계 국가들의 부상일 것이다. 앞으로 중국과 인도의 비중이 계속 커질 것이며, 이에 따라 국제관계 학문도 서구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비서구를 아우르는 글로벌한 접근으로 바뀔 것이다.

이 책은 학술서로서, 국제관계 학문는 국제정세에 좌우된다는 지식사회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사실 20세기 후반까지 비서구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크게 낙후됬으므로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없었으며, 국제관계 학문에서도 거의 존재가 없었다. 최근에 들어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비서구 사회의 부상이 앞으로 국제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는 두고볼 일이다. 16세기에 서구가 아시아를 앞서 근대화한 이후, 비서구 사회는계속 뒤쳐져 있었으며, 앞으로도 비서구 사회가 서구사회를 앞설 가능성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부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서구 문명을 대체할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은 지난 백년동안 국제정세의 변화를 잘 정리하고 있다.

'과일나무 > 살구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류는 왜 있는가  (0) 2023.04.17
인간은 분류하는 동물이다  (0) 2023.04.12
다정한 동물이 살아남는다  (0) 2023.04.02
세상과 인생은 정돈되어 있지 않다.  (0) 2023.03.29
진짜 얼마나 위험한가  (0) 2023.03.26
2020. 9. 1. 21:18

Robert B. Marks. 2015. The Origins of the Modern World: A Global and environtal narrative from the fifteenth To the twenty first century. 3rd ed. Roman & Littlefiels. 218 pages.

저자는 중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 기존 역사학계의 유럽중심주의를 배격한다. 1800년대초 유럽이 산업혁명에 진입할 때까지 중국과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했다. 기술 수준, 생산성, 산업과 교역 규모 등 모든 면에서 중국과 인도는 유럽을 능가했다. 그당시 유럽은 세계의 변방에 위치한 낙후한 지역이었다. 유럽이 1500년대에 대항해의 시대를 열게 된 계기는 그당시 선진 지역인 중국에 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13세기에 몽골 제국이 중앙아시아에서 중동, 헝가리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동서간 교역이 활발했는데, 14세기에 중동 지역에 이슬람 제국이 들어서면서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통로가 막혀버려 중국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을 필요가 절실해졌다. 유럽 사람들이 중국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그렇게 노력한 이유는 중국의 선진 문물과 교역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반면 중국은 세계의 첨단을 달리던 나라로 유럽으로 부터 얻을 것이 별로 없었다. 중국은 유럽 나라들과 달리 바다를 통한 외부와 교역이나 정복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외부와의 관계는 내륙에 유목민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 제한되었다.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확보하였다. 이는 중국이 명나라 시대에 화폐제도를 지폐에서 은으로 바꾼 것과 맞물려서, 아메리카 대륙의 은은 유럽을 거쳐 대량으로 중국에 흘러들어갔다. 유럽은 중국에 은을 지불하고 비단, 도자기, 차 등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은의 유입이 줄어든 반면, 유럽인의 중국 문물에 대한 욕구는 줄어들지 않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유럽의 생산품 중 중국에 수출할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으로 수출하여 거둔 돈으로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아편 무역은 중국의 반발에 부딛쳤으며, 결국 1840-50년대에 두차례의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은 중국을 굴복시켰다.

유럽은 대양을 항해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유럽 국가들 간 치열한 경쟁을 통해 무기 제조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점차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노선을 밟았다.  유럽에 정복된 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은 유럽의 산업화 과정에서 천연자원과 원자료를 공급하고 완제품을 수입하여 소비하는 시장의 역할을 하였다. 비유럽 지역의 식민지화는 유럽이 산업화를 통해 부흥하게 만들고, 식민지의 기존 산업을 몰락시켜 가난하게 만드는 양극화의 길을 열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영국 중부지방에 철광석과 양질의 석탄이 인접해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혜의 조건 덕분에 수증기의 힘을 이용해 석탄을 채굴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증기 기관차를 이용한 철도 건설, 섬유 산업의 기계화로 이어졌다. 과거 인류의 역사는 환경 조건의 한계에 가로막혀 경제 발전과 인구 성장이 제한되었는데, 산업 혁명은 이러한 환경 조건의 한계를 뛰어 넘는 수단을 제공함으로서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인구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도의 면직물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소비하였는데, 인도를 식민지화하면서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금지하는 대신 면화 원재료를 수입하고 국내에서 가공하여 국내 소비와 수출을 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과거에 융성하던 인도의 면화 산업을 몰락시켰다.

1800년대초까지 유럽을 앞서있던 중국은 산업혁명으로 유럽에 뒤쳐지면서 격차가 점점 더 벌어졌다. 환경 조건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정체된 사회와 이를 뛰어 넘어 성장하는 사회간의 간격은 기술 수준이 발전하면서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은 1980년대에 개방적인 자본주의로 전환하여 본격적으로 경제발전에 착수하면서 빠른 속도로 서구와의 격차를 좁혀왔다. 인도와 기타 개발도상국들 역시 20세기 후반 식민지 상태로부터 독립하고 산업화하면서 서구와의 격차를 줄이고 있다.

저자는 유럽이 중국보다 먼저 산업혁명에 착수한 것이 유럽 문화의 내재적 우수함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영국에서 철광석과 양질의 석탄이 근접해 매장되 있는 것, 유럽 대륙이 여러 국가로 쪼개져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군사 기술이 발달하게 된 것, 유럽이 중국으로 가는 길을 찾다가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우월한 군사기술을 활용하여 전세계에 식민지를 정복하게 된 것, 등이 산업혁명과 이후 경제 발전의 근본적인 원인인데, 이들은 모두 우연의 산물이다. 유럽이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보다 특별히 더 합리적이라거나, 유럽이 중국보다 과학기술이 더 우수하거나, 상공업이 더 활발한 문화였던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사고나 우수한 과학 기술 덕택에 스팀 엔진을 개발하고 섬유 산업의 기계화를 이룬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구의 학자이면서 중국과 아시아의 편에서 세계 역사의 전개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가졌다. 서구의 발전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그의 주장이 맞을 것이다. 세상의 일은 많은 부분 우연적 조건이 맞물려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재적인 우수함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원인을 거술러 올라가면 자연 조건의 차이나 우연한 상황의 조합이 만들어 낸 것이다. 특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근본적으로 우수하다는 인종주의를 용인하지 않는한 모든 인간사는 우연한 외부 환경과 인간 사이에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서구가 중국과 아시아보다 앞선 것은 근본적인 원인이 여하하건 부정할 수 없다. 역사는 경로 의존적(path-dependent)이기 때문에, 일단 서구가 아시아보다 앞서게 되면 그 이후의 길이 달라진다. 물론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이 미국을 앞섰지만, 두차례에 걸쳐 유럽인들이 그들끼리 벌인 전쟁을 통해 폐허가 되면서, 미국이 유럽을 앞서는 새로운 경로가 만들어지게 됬듯이, 미국의 제도적 비효율과 내부 갈등 때문에 국력이 약해지는 대신, 중국이 꾸준히 노력하여 결국 미국을 따라잡고 서구를 다시 앞서게 되는 역사의 경로에 들어설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일인당 소득은 1만불에 불과한 반면 미국은 6만불에 달하므로, 중국이 미국을 앞서는 것은 가능하다고 해도 먼 미래의 일이다. 중국의 소득이 높아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발전의 속도가 떨어지고 내부 갈등이 커질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미래를 예단할 수 없다.   

이 책은 대학교의 교재로 집필된 듯하다. 세계 역사 전반을 빠른 속도로 훑으면서,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전반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주력한다. 아시아를 세계의 중심에 놓는 독특한 시각이 눈에 띠지만, 저자의 주장에 대해 치밀한 증거를 인용한 논의가 제시되지는 않는다. 개별 지역이나 국가에 촛점을 두기보다 지구 전체적으로 근대 세계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한눈에 조망하게 한다. 

 

2020. 8. 23. 18:17

Walter Scheidel. 2019. Escape from Rome: The Failure of Empire and the Road to Prosperi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527 pages.

저자는 하버드 대학의 역사학자로 역사학계의 핵심 화두인, "서구는 왜 중국보다 앞서게 되었는가"에 대해 인과론적인 답을 제시한다. 서구가 중국을 앞서게 된 사실의 원인을 사후적으로 발견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사후적 설명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사회과학적 비교 연구 방법을 차용한다. 서구가 중국과 다른 길을 가는데 어떤 요인이 핵심이었는지 찾기 위해, 만일 특정 요인의 값이 실재와 달랐다면, 다시 말하면 특정 요인과 관련하여 일이 다르게 전개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해본다. 한편으로 추론의 방법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요인과 관련하여 다양한 사례를 비교함으로서 그 요인의 인과적 중요성을 평가한다. 기본적으로는 유럽과 중국을 비교하는 것이 핵심이지만, 비교의 목적으로 중동과 남아시아의 사례를 검토한다.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서구에서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다른 제국이 다시는 들어서지 못한 반면, 중국에서는 제국이 연이어 지배하였는데, 바로 이 점이 서구와 중국의 역사를 다르게 만든 핵심 요인이다. 강력한 중앙 권력이 지배하는 제국은 기본적으로 변화보다 안정과 질서를 추구한다. 제국에서는 기존 체제와 기득이권에 도전하는 파괴적 발전(creative destruction)이 전개되기 어렵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 서유럽은 여러 국가로 쪼개지고, 각 국가 내에서도 다양한 정치세력이 공존하는 다원적 체제가 들어섰다. 이러한 다원적 체제에서는 국가와 세력들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는 가운데, 실력과 효율을 중시하고, 서로를 모방하고 개량하는 발전의 동력이 계속 작동하였다. 

로마 제국이 서기 450년 경에 멸망한 후 동로마에는 비잔틴 제국이 들어선 반면, 서로마에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 여러 주권국가로 나누어졌다. 이 나라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합종연횡하면서, 한 나라가 전체를 장악하는 제국이 다시 만들어지지 못하는 구도를 형성하였다. 중세 봉건 시대에는 각 나라 내에서 왕과 영주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으며, 교회와 세속 정치가 서로 견제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중세 후반에 들어 도시가 세력을 키웠고, 왕과 귀족에 대항해 상공인들이 세력을 키웠다. 서유럽은 왕, 귀족, 성직자, 상공인 사이에 권력이 분점되고,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이 나누어지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와 구교가 나누어지는 등, 다원적 경쟁체제가 지속되었다. 그 결과 국가와 국가간, 세력과 세력간 전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이러한 경쟁은 발전을 만들어 낸 동력이 되었다. 여러 국가들이 서로 경쟁했기 때문에, 한 국가에서 반대 세력은 다른 국가로 피신하여 자신의 뜻을 펼 수 있었다. 다른 경쟁 국가로 넘어가는 선택지가 열려있기 때문에 어떤 국가의 지배자도 반대 세력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절대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전지역에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제국이 계속 지배했기 때문에, 유럽의 다원주의 체제가  만든 발전의 동력을 갖지 못했다. 지배 세력을 위협할 새로운 세력이나 아이디어는 초기에 싹을 잘라버리는 정치 문화가 자리잡았다. 유교 사상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체계를 정당화하고 사람들을 이에 순응하도록 설득한다. 상공업은 기존의 위계 체계를 넘어서 부와 세력을 만들어낼 위험성을 지니므로 일찍부터 억압하였다. 반면 농업은 사람들이 토지에 붙박여 있고, 혁신적인 발전이 일어날 수 없어서 기존의 지배체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농업을 우대하였다.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에는 서구와 같이 다양한 세력간에 경쟁체제가 조성되었으나,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제국이 계속 지배하면서 발전을 질식시켰다.

왜 유럽은 로마의 멸망 이후 여러 작은 나라로 쪼개진 반면, 중국에서는 제국이 이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자연 조건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는다. 두가지 차이를 지적한다. 첫째, 서유럽에서는 산, 강, 바다가 장애물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독립적 정치체제가 들어설 수 있었던 반면, 중국에서는 황허와 양자강 사이에 대평원이 단일 정치체제를 가능케하였다. 둘째,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에 차이가 있다. 서유럽은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카르파티아나 알프스와 같은 산맥으로 차단되어 있다. 반면 중국은 몽고와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에 인접해 있다. 대평원의 기마민족은 유목을 생계로 하면서 때때로 주변의 농경민족을 침탈하여 필요한 것을 조달하였다. 이들은 기동성과 전투력이 뛰어나기에, 이들에 인접한 지역은 이들의 침탈에 방어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 권력을 만들어 냈다. 반면 유럽에서는 몽고나 터키족 등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의 침입이 헝가리에서 멈추었다. 서유럽은 상대적으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의 침탈로 부터 안전한 환경에 놓여 있었기에, 잘게 쪼개지고 서로 경쟁하는 체제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저자는 로마가 멸망한 시점을 첫번째 역사 분기점 (First Great Divergence),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개혁, 대탐험, 합리적 세계관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중첩되면서 이후 비약적으로 앞서나가게 된 사건을 두번째 역사 분기점(Second Great Divergence)라고 칭한다. 첫번째 역사 분기점 사건이 발생한 것이 두번째 역사 분기점을 발생하게 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로마 제국이 유럽 전역에 공통의 문화적 토양을 제공해 줌으로서, 이후 다양한 나라들 사이에 경쟁이 공통의 기초 위에 전개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러나 로마가 멸망한 후 또다른 제국이 들어섰다면 중국과 유사한 길을 가게 됬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저자는 책의 맨 마지막 문구에서, 유럽의 여러 국가들 간에 갈등과 경쟁은 끊임없는 전쟁을 낳았고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이것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유럽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권력과 기득 이권은 외부로부터의 경쟁과 위협 없이는 변화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3년전에 역사적으로 불평등의 추이를 분석한 Great Leveler 라는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을 썼다. 불과 3년만에 또다시 대단한 작품을 썼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이책을 통해 역사는 경쟁과 전쟁을 통해 전개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는 농경민이 주축이 되었다고 배웠는데, 저자는 북방 유목민을 중국 역사를 추동시킨 핵심으로 제시한다. 책의 후반 4부에서 지금까지 나온 이론들을 정리하여 서구가 앞서나가게 된 과정을 문화, 제도, 해외 식민지, 지식과 가치관의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한 부분은 여러번 읽을 가치가 있다. 대단한 책이다.  

2020. 1. 12. 13:04

Michael Beckley. 2018. Unrivaled: Why America Will remain the world's sole superpower. Conell Univ. Press. 154 pages.

국제정치학자인 저자가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국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설명한 책. 경제력과 군사력의 지표를 종합하여 미국과 중국의 국력을 비교한다. 현재 미국의 국력은 중국이 가까운 시일에 넘볼수 없을만큼 엄청나다. 조만간 중귝의 경제력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GDP의 총량만을 보는데, GDP 총량과 일인당 GDP의 양쪽을 함께 고려한 지표가 두나라간 국력의 차이를 더 정확히 나타낸다. GDP 총량은 그것을 생산하고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부(net wealth)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 총량에서 비용을 제한 순수한 부를 비교해야 한다.

경제력은 생산, 제도, 인구의 세가지 측면에서 검토한다. 중국은 총생산은 크지만, 생산성이 높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생산하는데 많은 비용이 든다. 중국은 미국보다 유용한 자원이 적기 때문에 미국보다 자원 수입에 훨씬 많은 비용을 소모한다. 인구가 많지만, 인적 자원의 수준이 낮으며, 거대한 인구를 먹여살리는데 생산량의 많은 부분을 소모해야 하기에 이를 제한 순수한 부는 크지 않다. 중국의 권위주의적 제도는 부패와 비효율이 큰 반면, 미국의 자유경제체제는 자원분배의 효율성이 높다.

미국과 중국의 군사력 비교에서 군대의 규모와 무기의 양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잘못됬다. 중국의 군대는 규모는 크지만 잘 훈련되어 있지 않고 부패가 심하며,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국내 치안을 유지하고 국경을 관리하는데 쓴다. 반면 미국 군대는 잘 훈련되어 있고 효율적이며, 국내 치안이나 국경 유지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미국의 무기는 성능에서 중국을 압도한다. 중국의 군대 규모가 크다는 것은 군사비의 상당 부분을 군인을 먹이고 입히는데 소모함을 의미하는 데, 이는 군사력 측정에서 비용요소로 삭감해야 한다.

1990년 소련의 붕괴 이후 세계는 단극체제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단극체제는 다른 나라들이 연합해서 단일 강국에 대항하는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 세계는 미국에 대항하는 강력한 연합 세력이 등장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중국, 러시아는 자체의 문제와 비효율때문에 다른 나라의 지지를 끌어모으기 어려우며, 유럽 선진국들이 연합하여 미국에 대항할 가능성은 적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제도면에서, 인구면에서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러한 미국의 우위는 앞으로도 당분간 그러할 것이므로,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는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미국의 국력을 갉아먹는 요인은 미국 국외보다는 국내에 있다. 역사적으로 경쟁상대가 없는 강국은 자체 내에서 파벌로 분열되고 갈등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미국도 근래에 정치적 분열이 악화되면서 정치적 파행의 조짐이 보인다. 양안의 대도시에 기반을 둔 민주당 세력과 내륙 지역에 기반을 둔 공화당 세력은 서로 편을 갈라 상대를 부정하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치닫고 있다. 돈있는 사람의 영향력이 정치에 과다하게 행사되는 반면, 돈없는 사람은 정치에서 소외되는 현상은 근래에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주의 정치인을 낳았다. 미국의 국내 갈등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미국은 내부의 문제에 정치력을 소모한 나머지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포기할 것이다. 세계는 질서가 흐트러지면서 여러 지역에서 소규모 강국간 긴장과 갈등이 높아질 것이다.

중국은 1979년에 개방하여 본격적인 경제발전에 착수한지 40년밖에 되지 않는 반면, 미국은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에 돌입하여 150년 이상의 경제개발 경험이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 헌정사는 250년이나 지속되면서 그동안 시행착오를 통해 제도를 개선해 왔다. 중국의 일인당 소득은 1만불이 못되는 반면, 미국은 5만불이 넘는다. 이 두나라의 국력을 비교하는 것은 마치 성인과 어린이를 수평 비교하는 느낌을 준다. 문제는 앞으로 중국이 얼마나 빠르게 따라잡을 것인가인데, 이 문제에 대해 그리 통찰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현재 중국은 미국의 적수가 되기에는 무리인데, 중국을 적국으로 간주하고 전쟁 시나리오를 상세히 분석한 것은 의외이다. 숫자와 그래프를 많이 제시하며 기술적 분석을 부지런히 하지만 통찰력이 부족한 젊은 학자의 논문이란 인상을 받다.

'과일나무 > 사과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정적인 삶  (0) 2020.01.21
진화의 원리  (0) 2020.01.16
성의 진화  (0) 2020.01.10
오늘의 문제에 대한 경제학자의 조언  (0) 2020.01.07
대양에서 경도를 측정하는 법  (0) 2020.01.04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