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393)
미국 사정 (22)
세계의 창 (25)
잡동사니 (26)
과일나무 (285)
배나무 (34)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2024. 10. 23. 15:26

키트 예이츠. 2019. 수학으로 생각하는 힘. 웅진 지식하우스. 356쪽.

저자는 수학자이며,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수학적으로 생각할 때 잘 못된 경우를 여러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풀어낸다.몇개의 독립적인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기하급수적 증가와 감소, 통계적 판단의 오류, 우연의 확율에 대한 이해,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곡하는 수치 표현, 전염병에 대응하는 수학적 모델, 등이다.

인구 전체로 볼 때 특정 질병의 발생 확율이 매우 낮다면, 선별 검사에서 양성으로 판정됐다고 해도, 실제 질병에 걸렸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양성 판정자 중에 false positive 경우가 true positive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만일 진짜로 그 질병에 걸렸다면, 두번 연속 false positive 를 받을 확율은 크게 낮아지므로, 처음 진료한 곳과 다른 의료기관에서 독립적 검사를 통해 이차 의견을 받는 것이 좋다.

어떤 집단에서 두 사람의 생일이 일치할 확율은 생각보다 높다. 예컨대 23명이 모인 집단에서 생일이 일치할 확율은 50%를 넘어선다. 이는 사람수가 증가하면 구성원 사이에 랜덤한 두사람의 조합의 경우의 수가 매우 빨리 증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 사건간의 관계에 대해 흔히 인과적 연관을 상상하는데, 실제는 우연히 두 사건의 특징이 일치할 가능성이 크다. 사건이 우연히 발생할 가능성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높다.

사람들은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드물게 일어나는 특질의 변화에 대해서는 비율로 표기하여 변화의 크기를 과장하는 반면,  자신이 숨기고 싶은 드물게 일어나는 특질의 변화에 대해서는 절대수치의 차이로 표기하여 변화의 크기를 축소하려 한다. 의도적으로 한쪽편은 비율로 표기하고, 다른 쪽 편은 절대 수치로 표기한다면, 이는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를 속이는 행위이다. 숫자를 제시하면 주장에 권위가 더해지는 듯 하지만, 이렇게 숫자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외곡되게 표현하는 행위는 미디어나 정치권은 물론 학계에서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다.

최적화를 행할 때, 모든 가능한 사안을 검토한 후 최선을 선택하는 것은 비용대비 수익이 적다. 첫 세 사건에서는 기준을 정한 후, 이후에 마주치는 사건 중, 이 기준보다 더 좋은 것이 나타나면 더이상의 탐색을 중단하는 것이 수학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최적화 전략이다. 식당을 고르거나, 상품을 고르거나, 등, 다수의 사건 중에서 결정을 하려할 때, 이 수학적 지혜를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은 수학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오용될 수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야기로 풀어낸다. 이러한 종류의 책은 문제가 복잡해지면 수학이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도와주는지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수학적 논증에 합당한 다양한 사례를 찿아내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이 돋보인다. 다만, 법적인 다툼에서 수치를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번역에 문제가 있는지 여러번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여하간 흥미있게 읽었다.

 

 

2024. 10. 18. 13:00

 

전봉근. 2023. 한반도 국제정치의 비극: 동북아 패권경쟁과 한국의 선택. 박영사.444쪽.

저자는 국제정치 학자이며, 이 책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상황을 분석하고, 한국이 어떤 외교 전략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논의한다.

한국의 외교 전략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의 정체성과 국익을 확실히 해야 한다. 한국은 크게 네가지의 정체성을 가진다. 첫째, 한국은 미국,중국, 일본, 소련이라는 강대국에 둘러싸여 중간에 끼인 국가이다. 둘째 한국은 경제적으로 대외의존도가 높은 통상 국가이다. 셋째, 한국은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분단 국가이다. 넷째, 한국은 인구과 경제규모에서 세계에서 강대국은 아니나 그렇다고 약소국도 아닌 중간의 위치의 국가이다. 한국의 존립과 번영을 위해 이 네가지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한국은 외교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의 안보는 원칙적으로 부단한 자강 노력과 함께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많이 의존하고 있으므로, 중국을 자극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요구를 따르되 중국의 심기를 크게 거슬릴 행동은 삼가야 한다.  중국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합의한 원칙 내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여 중국의 대척점에 서거나 혹은, 중국에 따르면서 미국과 척을 지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잃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중국이 밀어붙이는 국제질서보다는 우리의 안보를 위해 더 의지할만 하기 때문에, 미국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

한국은 우리와 비슷한 입장의 나라들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호주, 터키, 인도, 유럽연합,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등의 나라들과 연대를 맺으면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공동의 힘을 구축해야 한다. 물론 이 나라들은 각자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통일된 대오를 형성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중의 갈등 속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함께 목소리를 낸다면 중간자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무장에 대해 한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한국이 핵무장하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한다. 한국이 핵무장을 시도한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엄청난 압박과 제제를 받을 것인데, 한국 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으므로 이를 감당할 수 없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한국의 압도적 재래식 전력과 미국의 도움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하에 있으므로, 비록 이것의 신뢰성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겠지만, 북한이 핵을 사용하면 미국 또한 핵을 사용하여 응징하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북한이 핵을 사용하기는 어렵다. 북한 정권의 붕괴를 각오하지 않는 한, 핵무기는 사용하지 못한다. 북한은 한국과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여 정권의 생존을 위해 핵을 보유하는 것이지, 남한을 침공할 의도로 핵을 보유하는 것은 아니다. 즉, 북한의 핵 위협은 그렇게 생각만큼 현실적인 위협은 아니다. 한국이 핵재처리 능력을 확보하여, 핵무기는 보유하지 않아도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는 방안, 즉 일본의 현재 지위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는 목표 또한, 미국의 반대로 추진이 쉽지 않다.

저자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상 때문에, 선진국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 모두와 잘 지내야 할 운명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 주변 강대국들이 쉽게 잡아먹을 수 없는 능력을 키우고, 국내적으로 통일된 대오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 정책의 방향을 크게 바꾸고,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하는 한국의 외교는 개선해야 한다. 한국의 정체성과 국익을 명백히하고, 국제사회의 원칙에 따르면서,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정부와 국책연구소에서 오랜 외교 정책연구 활동을 한 결과를 집약한 것이다. 분석과 주장은 현실적합성이 높으며 설득력이 크다. 다만 저자의 여러 보고서와 논문들을 짜깁기하여 단행본을 만들었기 때문에, 중복이 매우 많다. 저자가 자신의 생각과 지식을 집약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호흡으로 새로 책을 썼다면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2024. 10. 14. 20:54

Daniel Levitin. 2014. The Organized Mind; thinking straight in the age of information overload. Dutton. 383 pages. 

저자는 뇌과학자이며, 이 책은 조직적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는 방법을 뇌과학의 연구에 기초해서 설명한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정보 과부하 상태에서 살고 있다. TV, 이메일, SNS, 유튜브, 인터넷 검색, 등의 경로를 통해 매일 엄청난 규모의 정보에 사람들의 의식이 노출된다. 쇼핑을 가서도 단일 품목에 대해 선택지가 매우 많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들을 비교하여 선택하는 과정에서 뇌의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이러한 정보들은 우리의 주의력과 기억력 및 뇌의 정보 처리 능력을 조금씩 갉아먹기 때문에, 사람들의 뇌는 지쳐 있다. 현대인은 정말 중요한 주제에 뇌의 능력을 집중적으로 쓰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근래에 사람들은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모드, multi-tasking mode, 속에서 살아간다. 뇌과학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없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우리 뇌는 한가지 일에 조금 에너지를 쓰고, 다른 일로 이전하여 또 조금 에너지를 쓰고, 다시 다른 일로 이전하는 일을 반복한다. 우리의 뇌는 이렇게 일과 일 사이에 의식을 이전할 때마다 뇌의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멀티태스킹 모드에서는 어느 한가지 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며 쉽게 뇌가 지친다. 한가지 일에 집중하고, 그 일이 끝나면 다른 일로 이전하는 방식 mono-tasking mode 으로 일해야만 뇌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뇌는 여러가지 생각을 동시에 담고 있으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가급적 많은 정보를 외부 수단에 기탁하는 것이 enteralize, 우리 뇌의 부하를 줄이고 중요한 일을 위해 뇌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길이다. 우리의 뇌는 일단 입력된 정보는 의식의 수면 위 혹은 아래에서 머물면서 뇌의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의식에 그 정보가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정보를 불러내서 뇌가 처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현재 사용하지 않는 많은 정보를 외부에 기탁하고 필요할 때만 불러오도록 해야 한다. 정보를 외부에 기탁하는 방법으로는, 종이에 메모하기, 비서나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꼭 필요한 시점에 뇌가 필요한 정보를 상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기, 등이 있다. 5분 이내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처리하여 머리를 비우는 것도 유용하다. 성공한 사람들은 당장 해야 할 일에 뇌의 에너지를 온전히 집중하도록 하여, 최고의 뇌 효율성을 거두면서 일한다.

뇌는 두가지 모드로 작동한다; '실행 모드' executive mode 와, '이완 모드' day-dreaming mode. 이완 모드가 기본 상태 default 이며, 실행모드가 끝나면 이완 모드로 복귀한다. 실행모드는 특정 주제에 의식을 집중하여 focused 정보를 처리하는 모드인 반면, 이완 모드는 특정한 주제에 의식이 투사되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상태이다. 이완 모드일 때, 전에는 연관되어 있지 않던 정보의 조각이 연결되며, 창의적인 생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이 떠오른다. 뇌에 과도하게 많은 다양한 정보가 입력되면, 이완모드에 들어가기 어렵다. 뇌는 휴식을 취할 때 이완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에,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실행 모드의 중간 중간에 휴식을 취해야 한다. 휴가를 가고, 쉬는 시간을 갖고, 등으로, 실행 모드로부터 의식을 벗어나게 해야만, 뇌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효과적인 의사 결정을 위해서는 수리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정보의 가치를 구분하고, 중요성과 가능성을 비교 분석해야만 가장 효과적인 정보 처리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저자는 베이지안 이론 Basian theory 에 입각해서 사고할 것을 제안한다. 기초 확율 base 을 먼저 정하고, 추가적인 정보를 이것에 차례로 더하면서, 조금씩 진실에 근접하게 확율을 다듬는 것이  최선의 정보 처리 방법이다.

인터넷의 시대에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의 가치를 평가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정보 출처의 권위, 다양한 정보의 상호간 비교,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정보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가짜 혹은 외곡된 정보를 진실된 정보와 구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러한 기술은 학교 교육에서부터 단련되어야 한다.

이 책은 저자의 뇌과학 연구 결과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지나치게 다양한 주제를 다루느라 촛점이 흐려졌다. 집안을 조직하고, 사회관계를 조직하고, 시간을 조직하고, 비즈니스를 조직하고, 의료 정보를 조직하는 등, 일상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다. 뒤로 갈수록 연구 결과에 근거한 논의는 줄어들고, 자기 개발서의 냄세가 난다. 그가 언급하는 많은 정보 조직과 뇌의 효율적 사용 방법을 적용하여 살아 왔음을 느낀다. 그가 언급하는 많은 지적들은 상식과 생활의 지혜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2024. 9. 27. 15:27

키트 예이츠 (노태복 옮김). 2023. 어떻게 문제를 풀것인가 (How to expect the unexpected). 웅진지식하우스. 494쪽.

저자는 수학자이며, 이 책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서의 오류를 크게 두가지, 무작위 회피와 선형관계 편향이라는 두 주제에 촛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인간은 순수한 무작위 randomne 상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주위에서 항시 패턴, 즉 규칙성을 찾으려고 한다. 규칙을 파악하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어 생존에 도움이 된다. 우연히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인과적 관계를 설정하려 한다. 원인이 불확실한 상황에 마주쳤을 때, 우리의 지력을 벗어난 존재, 즉 초월적인 신이 행한 일이라고 해석함으로서, 그러한 상황이 무작위, 즉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고 위안한다.

무작위로 발생했지만, 억지로라도 패턴을 부과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생존에 도움이 된다. 패턴이 확실하지 않다고 하여, 랜덤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준비없이 지내다가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는, 불확실하지만 패턴이 있다고 여기고 대비를 하는 경우에, 혹시 발생할 위험의 피해를 덜 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 방식은, 사건이 실제 랜덤하게 발생하는 것이었다면, 드물게 발생하는 랜덤한 위험에 대비하여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모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는 한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뿐이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위험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과도하게 조심하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경우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인간은 확율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사람들에게는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의 두 상황만 존재할 뿐, 몇 퍼센트의 가능성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에는 물리 법칙에 따라 정확한 순서로 발생하기보다는, 발생의 가능성을 확율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 경우, 수리적 접근은 확율적 사고를 하는 데 도움을 준다. 확율적인 사고를 할 경우, 베이지안 이론 Baysian theory은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베이지안 이론이란, 기왕에 발생한 사건의 가능성을,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증거로 하여 분석하면서, 인식의 정확도를 높여가는 접근법이다. 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사전에 알기는 어렵지만, 그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벌어진 상황을 분석하여, 이를 초래한 원인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측정한다. 한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그의 원인을 면밀히 분석하여, 다음에 그런 원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는 것은 베이지안 이론에 따른 행동 방식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선형관계로 인식하는 성향이 있다. A가 증가하면 비례적으로 B가 증가 혹은 감소한다고 인식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선형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 방식은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주입되어 우리의 인식의 기본틀을 형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직관적으로 세상을 선형관계로 인식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선형관계도 있지만 선형관계가 아닌 경우 또한 매우 많다. 두 변수간의 관계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인 경우, 우리는 이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대표적인 비선형 관계로는, 길이가 증가하면 면적과 부피는 제곱과 세제곱으로 증가하며, 가역적인 피드백이 가해질 때 지수적 관계 power law 가 성립한다. 주식시장의 버블과 붕괴, 전염병의 확산 등에서 지수적인 관계가 성립한다. 자기완성적 예언이나 부메랑 효과 등도 선형관계에서 어긋나는 경우이다.

카오스 chaos 이론이라 지칭되는 복잡계 complex system 또한 선형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초기의 조건이 약간이라도 다르다면, 시간이 지나 일이 한참 전개되었을 때, 엄청나게 큰 차이로 귀결되는 경우가 복잡계에 해당한다. 기후변화가 대표적인 사례이며, 자연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계 상황이 훨씬 많다. 단지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할 뿐이다. 복잡계의 상황에서 장기적인 예측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러한 모든 논의의 결론은, 자연계는 인간의 인지 편향인, 규칙성이나 선형관계가 아닌, 무작위성과 비선형관계가 지배하는 곳인데, 인간은 자신에게 편하게 잘 못 알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인식과 예측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인간은 많은 경우 예측이 틀릴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수학은 인간의 인식 편향이 빚어내는 잘못을 약간이나마 교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책은 대중 과학교양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몇가지 기본 과학원리를 일상의 다양한 사례에 적용하여 쉽고 재미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의 말솜씨가 돋보이기는 하지만, 논의는 깊지 않다. 어디에서 들어봤음직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연이어 소개된다. 번역이 성의를 길울여 잘 됬는 데, 책의 제목은 내용과 동떨어져 있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외교의 방향  (0) 2024.10.18
조직적으로 살아가는 법  (0) 2024.10.14
자본의 시대; 19세기 중반 서구의 근대화  (0) 2024.09.21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위기  (0) 2024.09.13
혁명의 시대  (0) 2024.09.02
2024. 9. 21. 16:56

Eric Hobsbawm. 1975. The Age of Capital (1848~1875). Vintage Books. 308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19세기 중반 서구 유럽에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경제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고 전세계로 시장이 확대되었으며, 비교적 평화로웠던 시기를 서술한다.

1850년 경이 되면, 1830년과 1848년 유럽 전체를 휩쓴 노동자 혁명의 물결은 실패로 끝난 것이 분명해졌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촉발된 공화정 혁명의 파장은 유럽 각 지역에서 표면적으로는 저지되고 왕정복고로 잠잠해졌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지식인과 부르쥬아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nationalism 가 높아지고, 민족 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반면 왕과 귀족으로 대표되는 구질서의 권위는 갈수록 쇠퇴했으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확대로 부르쥬아의 부와 영향력은 크게 높아졌다.

19세기 중엽 철도 산업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크게 확장되었다. 1780~800년대 초반의 산업 혁명 초기에는 면화산업이 융성했으나, 이후 제철과 철도가 자본주의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철도 산업의 성장과 함께 경제 전반에 거대 자본의 지배력도 커졌다. 산업혁명과 함께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 이동이 급증했으며, 유럽 곳곳에 대규모 도시가 출현하였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한편으로는 도시로 이주하고, 다른 한편으로 아메리카 대륙, 특히 미국으로의 이민이 크게 증가하였다. 철도, 증기선, 전신 기술 덕분에 자본주의 시장이 유럽을 넘어 세계로 확대되었으며,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였다. 빠른 경제 성장과 사회변화는 노동자 계층의 정치적 참여 요구를 일시적으로 잠재웠다. 이 시기에 참정권이 점진적으로 확대되기는 하였지만, 이전 시기와 달리 과격한 혁명의 움직임은 찾기 어렵다. 

급격한 경제 성장 덕분에 부가 엄청나게 증가하였지만, 불평등 또한 커졌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도시 노동자의 삶은 매우 비참했다. 장시간 노동, 아동 노동, 위험한 작업 환경, 저임금, 밀집된 거주, 비위생적 생활 환경이 일반적이었다. 기술발달과 시장 확대로 인한 생산성 증가의 몫은 거의 대부분 자본가들이 차지하였다. 정부의 규제나 복지 제도가 발달하기 이전 단계의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아무리 생산성이 증가하여도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 수준만을 허락하였다. 이시기에 칼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경제의 몰락을 예언하였다.

한편, 다윈의 진화론이 인간 사회에까지 적용되어, 경쟁과 적자 생존이 인간 사회와 역사를 움직이는 원리로 주창되었다. 이시기 진화론은 유색인과 대비된 백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주의를 정당화하였다. 비서구 세계의 원주민 사회는 서구의 선진 사회에 의해, 유색인은 백인에 의해 정복되고 지배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 기독교의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하여, 지식인과 부르쥬아를 선두로 유럽 사회는 세속화되었다. 신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는 무신론자는 많지 않았지만, 교회의 영향력은 삶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이 책은 저자의 19세기의 삼부작 중 중간 시기를 서술한다. 정치와 전쟁에 대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적으며, 경제와 사회의 근대화 modernization 과정에 대한 익숙한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내용 자체는 익숙하지만, 그의 문장은 정말 읽기 어렵다. 이중 부정, 비교 부정, 복잡한 문장 구조 때문에, 두번을 읽어도 의미가 뚜렷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직적으로 살아가는 법  (0) 2024.10.14
왜 우리의 예측은 종종 빗나가는가  (0) 2024.09.27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위기  (0) 2024.09.13
혁명의 시대  (0) 2024.09.02
강대국은 왜 공격적으로 행동하는가  (0) 2024.08.21
2024. 9. 13. 17:47

John Ikenberry. 2020. A World Safe for Democracy: Liberal Internationalism and the Crisis of Global Order. Yale University Press. 311 pages.

저자는 국제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Liberal Internationalism) 의 역사를 섭렵하고나서, 냉전이 종식된 이후 현재의 국제 질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 간단히 논의한다.

국제정치이론에서 자유주의 liberalism 는 현실주의 realism 와 대립되는 이론이다. 현실주의는 강대국간의 힘의 역학관계로서 국제질서를 규정한다면, 자유주의는 국가들 사이에 조정과 합의를 통해 형성된 규범으로 국제질서를 접근한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 와 친화적 관계이며, 인류의 안전, 자유, 행복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규범적인 질서이다. 반면 현실주의는 국가들간 무정부 상태에서 상호 역학관계와 안전의 문제에만 촛점을 맞출뿐, 무엇이 옳고 바람직한가에 대한 규범적인 함의는 없다.

서구사회에서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 즉 국가들이 서로 협의하고 조정하는 전통은, 19세기초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유럽의 열강들이 모여 전후의 질서를 논의한 비엔나 회의에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계몽주의의 정신을 이어받아 19세기에 들어 이성을 존중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영국을 필두로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움직임이 확산되는 등,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19세기 전기간을 통해 점차 확대되었다. 이러한 19세기의 움직임은 1919년 1차세계대전이 끝난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자유무역, 항해의 자유, 국제연맹의 창설 등의 제안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미국이 국제연맹을 수용하지 않고, 서구 경제가 대공황에 빠지고, 파시즘의 발흥 등으로 위기에 빠졌으나, 제2차 대전으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미국은 종전후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했으나, 과거 유럽과 같은 제국주의의 길을 선택하기보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도로 원칙적으로 모든 나라를 아우르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추구하였다. UN, IMF, World Bank, GATT 등의 기관과 제도가 그런 질서의 뼈대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질서에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참여하지 않음으로서 반쪽의 세계 질서가 되었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한 국제주의 질서의 일원으로서 대체로 규범에 따라 행동하면서 국제사회의 신뢰를 쌓았지만, 때로는 예외적인 존재로서 규범을 벗어난 방식으로 힘을 행사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서구 유럽에서 1600년대 초반에 벌어진 30년 전쟁의 결과 만들어진 웨스트팔렌 조약을 바탕으로 한다. 즉 영토 존중, 주권존중, 내정간섭 금지 등의 원칙에 입각해, 국제사회에서 각 나라는 서로를 대등하게 대하는 전통이확립되었다. 이러한 질서는 서구 유럽 국가들에게만 해당될 뿐, 유럽 밖의 국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은 규범이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현대성 modernity 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기술발전, 핵전쟁 위험, 환경파괴, 기후변화, 전염병 확산, 등등, 개별 국가가 단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주의 국제주의는 반드시 요구된다.

21세기에 들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위기에 봉착했다. 영국의 브랙시트, 미국의 트럼피즘, 민족주의의 확대와 같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부정하는 경향이 선진 산업국들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등 권위주의 국가들이 국제사회에서 서로 연대하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흔들어 놓고 있다. 앞으로 중국이 계속 커지고, 권위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한다면, 이는 미국과 자유세계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현재 위협에 직면해 있지만, 과거 위기에 빠졌다가도 다시 올라선 것 처럼,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낙관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지금까지 출현한 어떤 다른 대안보다도 인류에게 더 나은 가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주의 질서에 대해, 중국이 근래에 어깃장을 놓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 질서 덕분에 번영하였으며, 지금도 그 질서를 부정하고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저자의 대학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하는데, 중복이 많아서 읽기 힘들었다. 사실적인 서술과 규범적인 서술이 섞여 있고, 정치인의 발언을 인용한 문구가 많아서, 수사적인 부분을 제외한다면, 사회과학적 분석 결과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우리의 예측은 종종 빗나가는가  (0) 2024.09.27
자본의 시대; 19세기 중반 서구의 근대화  (0) 2024.09.21
혁명의 시대  (0) 2024.09.02
강대국은 왜 공격적으로 행동하는가  (0) 2024.08.21
바다의 신비  (0) 2024.08.19
2024. 9. 2. 17:24

Eric Hobsbawm. 1962. The Age of Revolution: 1789-1848. Vintage. 308 pages.

저자는 역사학자이며, 이 책은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1848년 유럽 혁명까지 약 50년간을 대상으로, 유럽 세계를 지배하던 구체제가 무너지고 근대 체제가 들어서는 과정을 서술한다.

구체제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왕,귀족,사제가 지배층을 형성하며 인구의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며 봉건제의 구속에 묶여 있다. 종교의 영향이 일상 전반을 지배한다. 봉건제 장원을 중심으로한 자급자족 경제이며,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은 미약하다. 이러한 구체제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심각한 균열을 보인다. 16세기 대항해시대 이래 상업이 발달하고, 18세기말 산업혁명이 불붙으면서 상공인의 부와 영향력이 커지고, 농민들이 농촌을 이탈하여 도시가 발달하고,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의 산물로, 부르쥬아라 칭하는 상공인 계층이 구체제를 뒤집어 엎은 사건이다. 직접적 원인으로는, 1756년의 7년 전쟁 결과 재정파탄에 처하고, 조세징수인의 가혹한 수탈과 흉작이 겹치면서, 농민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하여, 부르쥬아가 중심이 된 의회에서 왕,귀족,사제의 권한을 제한하는 결정을 내렸으며, 입헌군주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를 둘러싼 주변국들이 프랑스를 공격하여 구체제를 복구하려 하고, 왕당파와 개혁파 사이에 내전이 격화되면서, 혁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1792년 혁명 주도세력은 반대자를 엄격히 처벌하는 공포정치에 들어가고, 왕을 단두대에서 처벌하고 공화정을 수립한다. 나폴레옹 장군은 프랑스를 위협하는 주변 국가를 차례로 격퇴하고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하면서 영웅으로 숭앙되고, 결국 1799년 공화정을 버리고 황제에 등극한다. 나폴레옹 군대는 유럽 대륙을 거의 석권했으나,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하여 크게 패하고, 주변국가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들은 1814년 외국에 도피했던 왕을 다시 세웠으며, 1815년 귀양지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최종적으로 쫒겨남으로서 프랑스 혁명은 막을 내린다.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왕권신수설에 바탕을 둔 절대 왕정 monarchy 은 유럽 역사에서 사실상 막을 내린다. 나폴레옹이 점령한 지역 곳곳에서 공화정이 시도되었으며, 왕이 국가를 대표한다는 전통적 믿음 대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프랑스 혁명 정부가 외세의 위협에 대항하여 일반 민중으로부터 병사를 모집하여, 이들이 나라를 지키는 전쟁을 치르면서 굳어졌다. 나폴레옹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프랑스군은 애국심에 가득찬 민중의 군대였던 반면, 다른 나라의 군대는 귀족과 용병으로 이루어졌서 열심히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왕과 귀족들은 일반 민중을 무장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업적에 따른 보상의 원칙을 엄격히 적용한 반면, 귀족과 용병으로 이루어진 전통 군대는 열심히 싸울 동기가 약했다.

1814년 비엔나 회의 Congress of Vienna 를 계기로 나폴레옹이 점령한 지역에 국경이 새로 그어지고, 외면적으로는 구체제가 각 지역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일반 민중은 구체제를 더이상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830년과 1848년에 유럽 전 지역에서 구체제에 저항하고 공화정을 추구하는 폭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폭동들은 결국 진압되었으나, 이후 구체제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왕과 지배층의 권리를 제한하는 입헌 군주정으로 변화하고, 봉건 질서의 불합리한 구속을 폐지하고, 중산층의 권리를 확대하는 개혁이 속속 이루어졌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 nationalism을 고취시켰다. 구체제에서 왕과 귀족은 일반 민중과 유리되어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군이 진출하여 왕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각 지역에서는 언어와 종교를 중심으로 '민족' nation 이라는 정체성이 뚜렸해지고, 민족 국가를 세우려는 시도가 중산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 혁명군을 본따 유럽 전지역에서 지역의 일반 민중을 징집하여 민족 군대를 만드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민족 국가의 개념은 공고해졌다.

영국은 유럽을 뒤흔든 20년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다. 나폴레옹군이 영국 해군에 일찌감치 패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비교하여 프랑스는 중산층의 세력이 약했으며, 농민을 도시 노동자로 바꾸는 과정이 프랑스 혁명 때문에 더디게 전개되었으며, 7년 전쟁을 계기로 식민지 쟁탈전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패하여 많은 식민지를 잃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19세기에 들어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산업혁명이 빠르게 전개되지 못했다. 반면 영국은 19세기에 전세계를 식민지로 호령하고, 산업혁명에서 유럽 대륙 국가보다 크게 앞서면서, 엄청난 부와 군사력을 호령하는 제국이 될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정치 군사 영역에서 주로 전개되었지만, 사회구조, 예술, 종교, 과학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예술 분야에서는, 18세기 계몽주의를 기반으로 한 고전주의에 더하여, 프랑스 혁명 시기에 낭만주의가 출현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권위나 합리성에 대항하여, 인간의 감정과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는, 전통의 구속을 벗어버리는 혁명 정신을 반영한다.  프랑스 혁명은 기독교의 영향이 약화되던 18세기 계몽주의의 시대흐름을 가속화시켰다. 기독교 교회는 구체제를 뒷받침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군은 교회의 세력을 허물어 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요약 하자면,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주권의 새로운 체제가 성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의 힘은 19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꽃을 피워서,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와 기술 발달, 입헌군주제와 남성 모두에게 투표권의 확대로 귀결된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을 중심으로 근대가 출현하는 과정을 분석한 고전이다. 역사책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사건 서술이 거의 없고, 사회과학적 원인과 결과를 분석적으로 논의하기 때문에, 역사 사건에 대한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한다. 계급 갈등을 중심으로 사회변화를 파악하는 사회학적 접근을 한다. 공산주의자 답게, 구체제, 자본주의, 부르쥬아지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노동자 농민에 대한 긍정적인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중부정과 삽입구가 많고, 생각의 전개에 따라 문장을 계속 확장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읽기가 매우 힘들다. 그럼에도 역사의 흐름에 대해 통찰력을 주는 대단한 책이다.

2024. 8. 21. 16:51

John Mearsheimer. 2014(2001). Tradegy of Great Power Politics. W.W. Norton. 411 pages.

저자는 국제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자신이 "공격적 현실주의" (offensive realism)  라고 명명한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의 핵심을 설명하고, 1800년대 초반 나폴레옹 전쟁에서부터 최근 미국과 중국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강대국들 사이의 주요 국제정치적 갈등을 예로 하여 자신의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국제정치의 세계에는 국가를 넘어서는 권위체가 없으며, 국가들은 자신의 생존을 각자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국가들 사이에 권력 경쟁이 치열한 무정부 anarchy 상태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며, 한 나라의 다른 나라에 대한 의도는 수시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나라는 자신의 안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자신의 경제와 군사력을 키우고, 주변에 위협이 될만한 나라가 부상하는 것을 막는데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국가가 속한 지역에서 가장 강하고 유일한 강대국이 되는 것만이, 가장 확실하게 안보를 보장하는 길이다. 자신의 나라와 대양을 넘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자신에 비견할만한 그 지역의 유일한 강자가 출현하는 것을 막는 것 또한 자신의 안보를 지키는 데 중요하다.

강대국이 주위의 나라들에 대해 공격적인 이유는, 국제질서 속에서 자신의 나라의 기존 지위 status quo 에 안주해서는 자신의 안보를 확실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역에서 최강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보다 강한 자에 대응해 다른 나라와 연대를 도모하여 안위를 보전해야 한다. 강대국은 자신의 확실한 안보를 위해 경쟁자의 부상을 적극적으로 offensive 차단해야 하기 때문에, 주변국에 대해 공격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선의와 평화를 강조하는 미국이지만, 상대의 도발이 없음에도 이라크를 침공하고 중남미의 반미 정권을 무너뜨리는 공작을 수시로 감행한 것에서 보듯이, 국가의 안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상대의 선의에 의지해서는 안되며, 국제정치체제 속에서 자신의 상대적 힘을 기르고 경쟁자의 부상을 적극적으로 견제해야 한다

국가들 사이의 관계 및, 각 국가들이 다른 나라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은, 각 국가들이 처한 국제정치 시스템의 권력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 (structural realism). 각 나라의 국내 정치가 민주주의건 전제주의건, 자본주의 체제건 공산주의 체제건, 지도자의 성향이 어떠하냐 등에 관계없이, 즉 이념, 체제, 지도자의 성향 등 국내적 변수와 상관 없이 모든 나라들은 국제정치 시스템 내에서의 구조적 맥락에 맞추어 행동한다. 

국제정치 시스템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비등한 힘의 두 강대국이 대치하는 양강 구도(balanced bipolar structure), 셋 이상의 비등한 힘의 강대국이 포진한 다자 구도 (balanced multipolar structure), 한 나라가 지역의 다른 나라들보다 힘이 우세한 상황에서 셋 이상의 강대국이 포진한 다자 구도(unbalanced multipolar structrue).  제2차 대전 이래 미국과 소련이 대치한 냉전 상태가 첫번째 경우이며, 독일이 상대적으로 우세하면서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이 포진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유럽이 세번째 경우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 독일이 부상하기 이전까지 19세기 중반의 상황이 두번째에 해당한다. 첫번째 즉 양강 구도가 가장 평화로우며, 다음으로 두번째, 즉 균형된 다자 구도가 평화롭게, 세번째, 불균형된 다자 구도는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한 나라가 상대적으로 우세한 불균형 다자 구도에서, 강한 나라는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구조적 현실주의 정치 이론에 따르자면, 20세기 초반 유럽은 불균형 다자구도 속에서 독일이 우세한 상황이었으므로, 히틀러가 출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조만간 독일이 주변 국가를 침공하여 유럽의 지역 패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을 것이다. 

미국은 자신의 지역, 즉 서반구에서 유일한 강자가 되었다. 반면 1800년 초반 프랑스의 나폴레옹 전쟁, 20세기 초중반 독일이 주도한 제1, 2차 세계대전, 일본이 주도하여 아시아 전역을 휩쓴 제2차 대전, 등에서 유럽 혹은 아시아 지역을 제패한 유일한 강자가 되려는 시도가 좌절되었다. 미국은 건국이래 북미 전역을 힘으로 정복하여 통일하고, 1823년 몬로 독트린 이래 서구 열강이 서반구에 세력을 펼치는 것을 막았으며, 20세기 두차례의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과 경쟁할만한 지역의 패권 국가가 부상하는 것을 막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의 세력이 서구 유럽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샬플랜이라는 대규모 경제원조와 NATO라는 군사적 투자를 통해 소련의 확장을 막았다.

1990년 소련이 스스로의 문제 때문에 붕괴하면서, 이차대전 이래 미국과 소련의 대치 상태, 즉 냉전 Cold War 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은 전세계에서 유일한 강대국 unipolar system 의 지위에 등극하였다. 이제 미국은 경쟁하거나 우려할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 내키는 대로 개입하였다. 1990년 초반의 이라크 전쟁, 2000년대의 아프간 전쟁, 2차 이라크 전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은 이 모든 개입에서 단기적 전쟁에는 승리하였지만, 해당 지역 사람들의 자주 자결을 원하는 민족주의와 충돌하였기 때문에 결국 물러나야 했다.

1980년대 이래 중국의 빠른 경제 부상으로 2000년대 들어 인구와 경제 규모 면에서 중국이 가까운 미래에 미국의 경쟁자가 될 조짐이 보이면서, 미국은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197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은 중국의 개방과 경제 성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는 중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중류층이 비대해지면 결국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으며, 또한 외국과 밀접하게 연결된 개방 경제는 전쟁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성장은 미국을 포함한 세계 평화를 촉진하리라는 자유주의 국제정치 이론에 바탕을 둔 정책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미국 경제가 어려움에 빠지자 아시아 대륙에 패권적 지위의 강대국이 등장하는 것은 미국의 경제적 및 안보적 이익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높아졌으며, 결국 미국 정부는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는 강경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미국은 호주, 일본, 인도, 등과 연대를 맺으며 중국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며, 중국의 경제와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역 규제와 기술 수출 제한을 포함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저자의 "공격적 현실주의" 정치 이론이 예측한 그대로이다. 중국은 미국의 견제에 당연히 반발하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간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높다. 한반도에서 남북간 충돌이나, 타이완을 둘러싼 충돌, 등이 미국과 중국간 전쟁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큰 곳이다. 중국과 미국 모두 핵 무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전면전의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은 넓은 지역에 걸쳐 퍼져 있으며, 국지적 충돌의 충격이 체제 전체로 퍼지면서 확대될 가능성이 유럽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중국과 미국간 전쟁의 부담이 과거 냉전시절 소련과 서유럽 혹은 미국과의 전쟁의 부담보다는 훨씬 덜하다. 다시말하면 중국과 미국간의 제한된 전쟁의 가능성은 냉전시절보다 높다.  

중국의 부상이 지속되면, 주변에 있는 국가들은 국외의 강대국인 미국 및 지역 국가들 서로간에 연대를 맺으면서 중국을 견제하는 균형 외교 balance of power 를 펼치는 것이 최선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지역의 유일한 강자가 되는 목표를 추구할 것이며, 지역의 패권을 쥔 강대국은 그 지역의 여타 나라들에 간섭을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남미에 대해 그래온 것 처럼, 중국도 지역 패권 국가가 되면 유사하게 행동할 것이다.

이 책은 출간된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현실주의 정치이론의 고전이라고 지목될만큼 국제정치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저자의 단순 명쾌한 이론과 경험적 사례 검증이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국제 제도의 효용을 과소 평가한다거나,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힘의 논리 이외에 다른 가치도 유의미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는 하지만, 근래에 격화되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현실주의 정치 이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현실을 설명하는 사회과학 이론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국제정치학계의 대표적인 학술서이면서도 쉽게 다가오는 흥미로운 책이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위기  (0) 2024.09.13
혁명의 시대  (0) 2024.09.02
바다의 신비  (0) 2024.08.19
인터넷과 AI 가 지배하는 사회  (0) 2024.08.11
똑똑하면 무슨 쓸모가 있나  (0) 2024.08.05
2024. 8. 19. 14:38

김경렬. 2009. 화학이 안내하는 바다탐구. 자유아카데미. 463쪽.

저자는 화학 해양학자이며, 이 책은 화학 지식을 동원하여 바다를 탐구한 결과를 설명한다. 바다물의 화학적 구성, 바닷물의 순환, 깊이에 따른 바다의 특성 차이, 바다의 지형, 바다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 조석과 파도, 등이 주요 내용이다.

화학 해양학에서는 온도와 염을 중심으로 바다를 분석한다. 깊이 및 지역에 따라 온도와 염에 차이가 있다. 바다는 깊이에 따라 표층과 중층 및 심해로 나눈다. 햇빛이 투과되는 표층의 깊이는 100미터도 안된다. 이 표층에서 대부분의 생명 활동이 전개된다. 1,000미터 이하의 심해에는, 0~2도의 매우 차가운 물이 적도에서부터 극지방까지 동일한 분포를 보인다. 바닷물에 녹아있는 염은, 소금의 구성 성분인 염소와 나트륨이 대부분(86%)을 차지하며, 이외에 황산, 마그네슘, 칼슘, 칼륨 등이 있는데, 지역에 관계없이 전세계적으로 염의 구성 비율이 동일하다.

바다는 매우 깊다. 전세계 바다의 평균 깊이는 3,600미터에 이른다. 육지의 연장인 대륙붕은 200미터 깊이 이하의 얕은 바다이며, 대륙붕을 넘어서면 가파른 경사를 지나 심해의 평탄한 해저가 넓게 펼쳐진다. 평탄한 해저 곳곳에는 깊은 협곡인 해구와, 화산으로 솟아오른 해령이 존재한다. 지구물리학 이론인 판구조론으로 바다의 지형을 설명할 수 있다. 대서양에는 남에서 북으로 길게 해저 산맥이 존재하는데, 이는 아메리카 판과 유라시아판이 서로 갈라지면서 벌어진 틈으로 마그마가 분출하여 만들어졌다. 지구의 판과 판이 만나는 지점에 매우 깊은 해구가 형성된다. 밀도가 높은 해양판이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은 육지판 아래로 들어가면서 해구를 만들고 지진과 화산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심해에 대한 탐사가 이루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닷물은 수평으로 뿐만 아니라 수직으로 순환한다. 표층의 바닷물이 심해로 내려가서 전세계 바다의 밑 바닥을 한바퀴 돌고 표층으로 올라오는 순환을 반복한다. 표층의 바닷물이 심해로 내려가는 입구가 대서양의 북쪽 끝에 있으며, 이곳에서 심해로 내려간 바닷물은 대서양 남쪽을 지나 인도양 바닥을 거쳐 태평양 북쪽에서 표층으로 솟아 오른다. 이러한 순환의 중간인 대서양 남쪽과 인도양에서 일부가 표층으로 용출한다. 이러한 전지구적인 수직 순환을 한번 하는데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일반적으로 해류라고 지칭하는 수평 순환은 표층에서만 일어나며, 심해는 매우 서서히 이동한다.

태평양 동쪽의 표층 온도의 이상 변화로 인해 태평양 서쪽 지방에서 기상 이변이 발생한다. 엘리뇨는 페루 연안의 이상 고온을, 라니냐는 그 반대 현상을 지칭한다. 이러한 변화는 수십년을 주기로 발생하는데, 원인은 모른다. 근래에 전지구적으로 표층 온도가 상승하면서 지구 온난화의 우려가 커졌다. 해양 온도의 변화는 지구 역사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했는데, 근래에 관찰되는 해양 온도의 상승은 1,800년대 이래 산업화와 함께 특이하게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바다는 인류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에도 바다에 대한 체계적 이해는 달 탐험보다 더 늦게 이루어졌다. 이 책은 전문 연구자의 서술로 바다에 관해 깊이있는 지식을 전달한다. 바다에 관해 알려진 지식뿐만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졌는지, 연구 방법과 계기를 설명한 것 또한 흥미있게 읽었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혁명의 시대  (0) 2024.09.02
강대국은 왜 공격적으로 행동하는가  (0) 2024.08.21
인터넷과 AI 가 지배하는 사회  (0) 2024.08.11
똑똑하면 무슨 쓸모가 있나  (0) 2024.08.05
인간 관계망의 영향력  (0) 2024.08.01
2024. 8. 11. 15:50

Gerd Gigerenzer. 2022. How to stay smart in a smart world: Why human intelligence still beats algorithms. Pneguin Books. 247 pages.

저자는 심리학에 배경을 둔 의사결정과 리스크 관리를 연구하는 학자이며, 이 책은 인터넷과 AI의 영향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 가져온 문제점과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한다.

인공지능 AI의 응용 범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과는 다르게 작동하며, 강점과 약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인공지능은 불확실성이 없고 고정된 규칙이 적용되는 안정된 환경에서 놀랄만큼 높은 성과를 낸다. 체스 게임이나 동일한 업무를 반복하는 데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이겼다. 반면 인간의 지능은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하여 진화한 산물이다. 인간이 활동하는 사회와 미래는 불확실성이 높으므로 인공지능이 잘 대응하기 어렵다. 주가와 금융위기를 예측하거나, 인간 행동을 미리 예측하거나, 질병의 발생과 전개 양상을 예측하는 등에서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낫지 않다. AI 의 능력에 대한 많은 논의는, AI를 개발하는 사람과 회사의 상업적인 동기 때문에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사람들의 행동과 가치관을 인공지능에 맞추어 바꾸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예컨대, 근래에 자율주행차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현재 그대로의 교통 환경에서 완전한 자율주행차는 가능하지 않다. 대신, 인간이 인공지능 환경에 맞추어 적응하는 (adapt to AI) 방식으로 변화할 것이다. 예컨대 자율주행차 전용 도로가 생기고, 그러한 도로에서는 인간의 주행이 금지되고, 모든 불확실한 변수가 제거된 교통환경이 그것이다. 이는 과거 자동차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자동차 도로에 인간이 들어가서는 안되고 마차가 다니지 못하게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AI와 빅데이터 분석은 기본적으로 변수들 사이에 통계적인 상관관계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는데, 이는 한계가 있다. 반면 인간은 이론적인 인과 관계를 통해 세상을 파악한다. 인과적으로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러한 사건과 통계적으로 연관된 변수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피상적이며 과거에 이미 발생한 상황에 이해가 국한된다. 과거에 발생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건이 전개된다면, 과거의 사건에 바탕을 둔 상관관계 지식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변이를 잘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 모델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변이를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모델을 만드는 데 사용되지 않은 사례에 대해 이 모델이 얼마나 잘 맞는지 검증해야 한다. 많은 사회과학 연구에서 제시하는 회귀분석 모델의 설명력은, 해당 연구에 사용되지 않은 다른 사례나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는 설명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은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인공지능은 감시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인공지능 서비스를 공짜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사생활 정보를 몽땅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게 내어준다. 이 회사들은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광고주에게 팔아 큰 이익을 얻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생활이 타인에게 털리는 것을 염려하면서, 사생활을 털어가는 서비스 회사에게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 자신의 사생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선택을 원치 않는다 (privacy paradox). 인터넷과 인공지능 회사는 사용자들이 더 오래 더 많이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개발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러한 서비스에 중독되어 사용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계속된 비디오 공급에서 눈을 거두지 못하는 것, 자신의 페이스북을 수시로 열어보아야 하는 것, '좋아요'에 집착하여 무수히 자신의 영상을 올리고, 항시 이를 의식하면서 행동하는 것, 등등. 이러한 소비자의 행동은 고도의 심리적 조작의 결과이다. 사람들은 자극적 뉴스와 영상에 관심이 더욱 쏠리기 때문에,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이런 쪽의 콘텐츠를 더 많이 제시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견해는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중국에서는 인터넷과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각 개인에 대해 사회 신용지수 social credit 를 산출하여 일상 전반에 활용하는 시범사업을 여러 도시에서 시행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금융 신용지수를 산출하여 금융 활동에 활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사회 신용지수의 산출을 위해 점수로 입력된다. 사회 신용지수는 사람들이 사회 규범을 잘 지키도록 유도하는 순기능과 함께, 체제에 비판적인 의견과 행동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서구 사회는 중국과 달리 정부가 아닌 인터넷 기업들이 개인 정보를 샅샅이 수집하며, 이를 광고주에게 판매함은 물론, 정부의 정보기관에게 제공하여 사회에 위험한 인물을 감시하고 색출하도록 한다. 

인터넷과 인공지능이 가져온 인터넷 서비스 중독과 감시 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다. 현재처럼 서비스를 공짜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사생활 정보를 내주는 방식이 아니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대신 요금을 지불하는 구독 방식으로 전환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현재는 사람들이 서비스 요금을 지불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하고, 요금을 징수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정책에 대해 거대 인터넷 기업들은 적극 반대하겠지만, 정부가 주도하여 사회적 합의를 이끌고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이 제안하는 서비스 요금 유료화를 강제하는 정책이 실현되리라고 확신하는 것 같지 않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인공지능이 가져오는 미래가 반드시 사람들을 더 행복하거나 편안하게 만들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잘 할 수 있도록 인간의 행동과 사회 환경을 바꾸어 가리라는 예감이 든다. 중국의 사회 신용지수의 예에서 보듯, 사회질서와 통제에 대한 가치관도 바뀔 것 같다. 개인의 자유를 핵심 가치로 두는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조화와 질서를 우선시하는 사회로. 싱가포르식 사회 모델이다.  통찰력을 주는 책이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대국은 왜 공격적으로 행동하는가  (0) 2024.08.21
바다의 신비  (0) 2024.08.19
똑똑하면 무슨 쓸모가 있나  (0) 2024.08.05
인간 관계망의 영향력  (0) 2024.08.01
금융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  (0) 2024.07.26
2024. 8. 5. 16:16

Satoshi Kanazawa. 2012. The Intelligence Paradox: Why the intelligent choice isn't always the smart one. John Wily & Son. 208 pages.

저자는 진화심리학자이며, 이 책은 인간의 지능 intelligence 에 대한 저자의 연구에 바탕을 두고, 지능은 무엇이며, 왜 존재하며, 어떤 일을 하는지 서술한다.

인간의 지능은 진화의 결과 생겨난 다양한 속성 human traits 중 하나이다. 지능은 유전하는 속성이며, 사람에 따라 지능 수준은 차이가 크다. 인간의 육체적 속성 예컨대, 피부색이나 체질, 혹은 심리적 속성 예컨대, 공격성, 외향성, 예민성, 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능도 유전적인 영향이 큰 속성 중 하나이다. 문제는 다른 속성과 달리, 인간의 지능은 가치 평가가 함께 따른다. 지능이 낮은 사람은 지능이 높은 사람보다 인간적인 가치 worth 가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지능은 여러 측면이 있다. 언어적 지능, 수리적 지능, 공간 지각 지능, 논리적 추론의 지능, 사회적 지능, 등등. 이러한 다양한 측면의 지능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한 분야의 지능이 높으면 다른 분야의 지능도 함께 높다. 이러한 여러 지능의 배경 변수로서, 다방면을 포괄하는 지능 general intelligence 을 '지능 지수' Intelligence Quotient 로 측정한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지능지수는 신뢰도가 매우 높은 측정 지표이며, 일생 크게 변하지 않는다. 즉 지능지수로 대표되는 인류 공통의 분명한 실체가 있으며, 일반적인 비판과 달리 서구 문화가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다. 성인이 되면 어릴 때보다 유전적인 영향이 더 뚜렷이 발현되기 때문에, 어릴 때보다 성인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지능지수의 차이가 더 커진다.

인간은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해 온 이래 지난 200만년 동안 대부분을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수렵채취 생활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 특질은 수렵채취 활동에 적합하게 진화해 왔다. 농업을 하기 시작한 10,000년전 이후에 생활은 인간의 진화 과정에 아직까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지난 200년간 도시화 산업화로 출현한 현대의 사회에서는, 오래전 수렵채취 시절에 획득한 특질이 적절치 않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달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습성을 들 수 있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의 많은 부분은 유전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심리학계에서는 대체로 50:50으로, 즉 유전적 요소가 50%, 환경적 요소가 50%이라고 본다. 그러나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속성은 유전적 변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특성에서 유전적인 차이가 나타난다면, 이러한 특성에서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후손은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의 우수한 지능은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 즉 이성의 짝을 찾고, 자손을 기르고, 먹을 것을 구하고, 등의 능력과 비교할 때, 우수한 지능은 이러한 활동에 큰 이점을 주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우수한 지능은 익숙하지 않은 환경 즉, 새로운  삶의 문제에 당면했을 때 대처하는 능력으로 진화하였다. 오랫동안 변화가 거의 없는 환경에서 생존하고 적응하는 데 필요한 속성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으로 확고하게 굳어진 반면, 새로운 환경에 접해 대처하는 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공유된 특질이 아니라, 진화의 과정에서 새로이 출현한 특질이다. 인간 진화 과정에서 오래도록 친숙한 환경인 사바나에서 생활할 때 필요한 인간 공통의 생존 능력, 즉 이성의 짝을 찾고, 자손을 양육하고, 먹을 것을 구하는 등에서 지능이 높은 사람과 지능이 낮은 사람 간의 차이는 없다. 반면 농업을 시작한 후 새로이 출현한 환경에서 전에는 익숙치 않은 새로운 문제와 관련해, 지능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대처 능력이 더 크다.

현대 사회에서 지능이 높을수록 교육 수준이 높고, 소득이 높으며, 매력적이며, 사회적 지위가 더 높다. 현대사회의 환경은 인간 진화의 오랜 과정에서 볼 때 익숙한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지능이 높은 사람은 현대 사회에 출현한 새로운 분야에서 월등히 유리하다. 교육, 소득, 성별 등 여러 조건을 통계적으로 통제했을 때, 똑똑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다양한 면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인다. 지능이 높은 사람은 더 리버럴하며, 신을 믿지 않으며, 성적인 배타성 sexual exclusivity 을 고집하며,  올빼미 체질이며, 동성애 성향을 가지며, 고전 음악을 좋아하며, 술을 더마시며, 여성의 경우 결혼을 덜하고 결혼했다 해도 아이를 덜 낳는다.

저자는 지능이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인 활동에 유리함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책의 곳곳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와 같이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 지능의 이점은 최대로 발휘된다. 저자의 가설이 맞다면, 현대 사회에서도 근래로 올 수록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지능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과를 내고 더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이는 저자가 "지능의 역설" intelligence paradox 라고 지칭하는, 즉 지능이 높은 사람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부분에서 더 우월하지는 않다는 명제와는 반대된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보면, 저자의 분석이 흥미롭지만, 조금 설익은 주장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여하간 신선한 주장이어서 흥미로웠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의 신비  (0) 2024.08.19
인터넷과 AI 가 지배하는 사회  (0) 2024.08.11
인간 관계망의 영향력  (0) 2024.08.01
금융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  (0) 2024.07.26
정치 전문가의 미래 예측 능력  (0) 2024.07.19
2024. 8. 1. 16:27

Nicholas Christakis and James Fowler. 2009. Connected: How your friends' friends' friends affect everything you feel, think, and do. 2009. Little, Brown Spark. 306 pages.

저자들은 각각 사회학자와 정치학자이며, 이 책은 저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 관계망의 속성과 참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다.

인간 관계망은 참가자들에게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까까운 친구와 같이 직접적인 관계를 넘어서, 3도 three degrees, 즉 친구의 친구의 친구에게까지 작용한다. 그러나 3도를 넘어서는 영향력이 거의 전파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협력하는 것은 진화를 통해 형성된 특질인데, 수렵채취 시절의 선조는 대체로 150명 이내의 친밀한 관계망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3도를 넘어서는 관계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3도를 넘어선 사람에게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것은 진화의 결과로 보인다.

사람들은 유사한 속성의 사람끼리 무리를 짓는 경향이 있다.  관계를 통해 영향을 미치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감정, 비만, 흡연, 취향, 정치적 견해, 아이디어, 습관, 병원균, 등등. 흡연자는 흡연자들끼리, 비만한 사람은 비만한 사람들끼리,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끼리, 우울한 사람은 우울한 사람들끼리 무리를 지으며 상호작용을 한다. 이는 단순히 유사한 속성의 사람들끼리 뭉치는 성향때문만은 아니며, 관계망 속의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관계망의 중심, 즉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촘촘한 곳에 위치한 사람은 관계망의 주변부, 즉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성글은 곳에 위치한 사람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 왜냐하면 같은 수의 친구를 가지고 있더라도, 친구의 친구가 많은 경우 나의 영향력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계망은 참여자들 사이에 관계의 촘촘함에서 균일하지 않다. 사람들 사이에 관계의 촘촘함에서 위계가 존재한다. 관계망에서 촘촘한 곳에 위치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정보가 흐르며 더 많은 기회에 접할 수 있는 반면, 촘촘하지 못한 곳에 위치한 사람에게는 가용한 정보나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 즉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망의 속성에 따라 특정 참여자의 자원의 다과가 결정된다. 자신이 관계망의 어디에 위치할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 나의 친구, 나아가 나의 친구의 친구가 얼마나 사교적일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과 같은 온라인 친구는 오프라인의 친구와 같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 인간이 친밀하게 관리할 수 있는 관계망의 범위는 150명을 넘어서지 않는다. 온라인 소통은 오프라인 관계를 보완하고 강화하기 위해 주로 쓰인다. 물론 정보의 수집을 위해서는 폭넓은 온라인 관계망이 유용하지만, 인간적인 접촉과 사교의 목적을 위해서 온라인은 제한적으로만 도움을 준다. 물론 온라인 데이팅 서비스와 같이 인간적 접촉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관계 형성 방법이 앞으로 갈수록 확대되면서 온라인 관계에 새로운 장이 펼쳐질 것이다.

저자가 관계망에 관한 연구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생생하게 사례를 설명한다. 인간 관계망에 다양한 연구 결과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주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이 이제는 상식이 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간 관계망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모두 알고 있지만, 데이타 수집의 어려움 때문에 지금까지 소홀히 되었는데, 사람들의 디지털 생활이 확대되면 앞으로 크게 확대될 수 있다. 물론 사생활 침해의 문제나 상업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기는 하지만, 사회과학이 전적으로 개인의 속성에 촛점을 맞추는 개인주의적 방법론 methodological individualism 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는 있다.

2024. 7. 26. 17:51

Gerald Davis. 2009. Managed by Markets: How finance reshaped America. Oxford University Press. 255 pages.

저자는 조직을 전공한 경영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이 책은 1970년대 이래 금융 시장의 부상을 중심으로 미국 경제사회의 변화를 검토한다. 다음 몇가지 주제에 논의를 집중한다. 첫째는 거대규모의 제조업의 주식회사 (big corporation)를 중심으로 하던 미국의 경제 체제가 변하고 있다. 둘째,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금융 산업의 비중이 커지고, 중심이 은행으로부터 자본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셋째, 시장에서의 가치가 모든 경제 사회 활동의 기준이 되면서 사람들의 삶의 패턴도 바뀌고 있다.

미국은 1970년대초까지 거대 규모의 제조업 분야의 소수의 주식 회사들이 각 분야의 산업을 과점하는 경제 체제였다. 매출액과 고용에서 거대한 조직들은 거대한 자산과 높은 생산성, 안정적인 고용, 제조업 중심의 특징을 보였다. 주식회사의 소유 구조는 매우 넓게 퍼져 있었으며, 경영진은 주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경영자들은 주주는 물론 종업원, 지역사회, 고객,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stakeholders)를 동시에 고려하면서 회사를 이끌었다. 회사의 규모가 클 수록 경영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기 때문에, 회사 경영의 최우선 목표는 회사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었다. 종업원은 오랫동안 한 직장에서 일하며, 내부에서 성장한 사람이 경영자로 발탁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70년대 중반 미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기업은 매출보다 이익을 중시하게 되었다. 회사를 담보로 빚을 내서 공격적으로 인수하거나(leveraged buyout), 경쟁 관계의 다른 회사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인수 합병하는 행위 등에 대한 법적 제한이 사라지면서, 안정적으로 이익을 내어 현금 흐름이 탄탄한 재정 상태를 유지하여 회사 사냥꾼의 공격을 예방하는 것이 경영자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이익을 내지 못하거나 회사의 핵심 업무가 아닌 분야는 외부에 매각을 하고 종업원을 해고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경영자와 종업원 모두 언제든 회사에서 쫒겨날 것을 예상해야 하기에 회사에 대한 충성은 더 이상 기대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주주의 이익이 회사 경영의 중심이 되었다. 경영자의 보수를 주식의 가치와 연동시키는 관행이 확산되었으며, 주식 가치의 단기적인 변동이 회사와 경영자의 유일한 성과 평가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1980년대 정보산업기술과 컨테이너 운송 기술의 발달로 세계화가 가속되면서, 미국의 기업들은 제조 부문을 해외로 내보내고 마켓팅과 디자인 등 무형의 지적자산만을 내부에서 보유하는 식으로 변화되었다. 제조부문을 전혀 보유하지 않고 출발한 나이키나 애플과 같은 회사가 대표적이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라도 대부분의 회사들이 OEM 방식으로 일부 혹은 전부의 제조 부문을 외부로부터 조달하는 사업 방식을 채택하였다. 작은 자산으로 더 많은 이익을 뽑아낼수록 단위 주식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주주의 가치를 중시하는 경영은 자산과 종업원을 최소로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만든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과거 거대 규모의 주식회사들은 몸체를 줄이거나 해체되었으며, 대신 매출액 대비 작은 규모의 종업원을 가진 회사들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과거 미국을 대표하던 기업인 IBM, GM, Ford, GE,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과거에 금융(finance) 산업은, 일반인으로 부터 저축을 유치하여 자금을 필요로 하는 기업과 가계에 대출을 해주는 중개 역할을 하던 은행이 중심이었다. 자신의 위험으로 증권에 투자하거나 혹은 채권을 발행하는 투자은행은 1970년대 중반까지 미미한 규모였다. 미국의 은행은 각자의 주에서만 영업을 하도록 규제하였기 때문에, 큰 회사가 밀집한 뉴욕에 소재한 은행을 제외하고는 큰 규모가 아니었다. 각 지역의 은행은 그 지역의 기업을 상대로 영업하면서 지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70년대까지 금융 업무는 단조로웠으며, 미국 경제에서 작은 비중을 차지했다.

1980년대 들어 은행에 대한 지역 제한과 사업 범위에 대한 규제가 철폐되고 완전히 자유화되면서 금융 산업은 크게 변하였다. 은행들 사이에 인수 합병의 바람이 불면서 전국적인 영업망을 가진 거대규모의 은행이 등장하였다. 은행의 업무도 다양해져서, 단순히 수신과 대출을 중개하는 역할을 넘어, 기업의 인수 합병을 중개하고 자금을 대주며, 기업 공개와 채권 발행을 주관하고, 다양한 위험의 새로운 상품들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역할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투자은행, 보험, 펀드 등 이전까지 분리되었던 다양한 금융 분야의 경계가 사라졌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위험에 대한 정보 수집과 평가가 용이해지면서, 과거 은행이 가지고 있던 정보 수집의 독점적 노하우가 사라졌다. 이제 기업들은 은행을 매개로 자금을 조달하기보다, 채권이나 증권을 발행하여 더 싼 비용으로 시장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정보 기술 덕분에 증권을 발행하여 채무를 유동화시키는 것(securitization)이 용이해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금융상품들이 개발되어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장기주택저당채권(mortgage)을 바탕으로 하여 주택 담보부 채권(mortgage backed securities)을 발행하여 시장에서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수신 업무 없이, 시장에서 유동화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수월해지면서, 너도나도 이 사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어, 상환능력이 부실한 사람에게까지 2차 3차로 모기지를 발행하도록 부축이고, 이를 바탕으로 위험도가 높은 증권을 시장에서 유통시키다가, 주택가격이 폭락하고 주택 소유자들이 채권의 상환이 어려워지자, 이를 배경으로 한 유동화 증권 또한 지급불능 사태에 이른 것이 바로 2008년 금융위기이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거대 주식 회사의 규모가 축소된 대신, 금융 부문에서 다양한 신상품이 무수히 개발되고 활발히 거래되면서, 미국의 총생산에서 금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 1에 이르게 되었다.

금융 시장이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미국인의 일상과 의식에 변화가 왔다. 미국인들은 이제 항시 시장의 가치와 시장 위험을 의식하면서 산다. 자신이 일하는 회사가 시장에서 어떻게 평가받는지에 자신의 일자리가 달려있음을 의식하면서 직장을 다닌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자신의 회사 혹은 자신이 일하는 부문이 다른 회사에 매각되거나 혹은 다운 사이징 될 것을 염려해야 한다. 1990년대 중반 이래 미국인의 연금 체계는, 회사가 책임지고 은퇴 기금을 굴려 종업원의 은퇴 이후 연금을 지급하는 체제 (defined benefit system)에서, 401K라 하여 개인이 책임지고 자신의 위험에 따라 은퇴 기금을 굴려서 은퇴 이후의 소득을 만들어야 하는 체제(defined contribution system)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미국인은 자본시장의 부침에 자신의 노후 생계가 달려 있음을 의식하며 생활한다. 과거에 주택이란 자신이 자식을 낳고 생활하는 가정의 물적 토대라는 개념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 주택 가격이 폭등하고 주택을 담보로 2차 3차 모기지를 얻어서 자금을 확보하는 관행이 일반화되고, 이후 주택 가격이 폭락하여 집을 차압당하는 사람이 주위에 흔해지면서, 사람들은 주택 가격에 민감해지고, 주택을 재무적인 가치 (financial value)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요컨대 미국인은 이제 모든 것을 그것의 시장 가치에 항시 신경쓰면서, 자신의 위험은 자신이 관리하고 책임지는 투자자(investors)가 된 것이다.

저자는 1970년대 중반 이후 미국 경제사회의 변화를 대체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제조업이 축소된 것이나, 금융 부문이 부상한 것이나, 세계화로 인해 다국적 기업이 부상한 점, 등 미국의 주요 변화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밸류 체인의 상위로 이전하면서 생산성이 낮은 부문을 해외에 내준 것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미국의 밸류체인에서 하위 부문을 해외로 이전하였기에, 한국과 이어서 중국이 부상하고, 세계적으로 빈곤층이 극적으로 감소한 것이다. 기술 혁신과 지적재산권 전문 기업이 미국에 집중하면서 미국은 2000년대 들어 유럽보다 훨씬 앞서게 되었으며, 경제의 역동성이 높아졌다. 금융부문의 비중이 높아진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제조업 중심 거대 기업과는 대조적으로, 매출액 대비 종업원 규모가 작은 회사들이 과거 거대 주식회사를 대체했다고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애플, 등 기술 기업들은 신경제의 총아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내며 미국 경제를 떠 받들고 있다. 제조업 없이 사업하는 나이키를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래 금융 부문의 확대와 관련된 그의 서술은 근래의 미국 경제의 변화를 읽는데 도움을 준다.

2024. 7. 19. 16:50

Phillip Tetlock. 2005. Expert Political Judgement: How good is it? How can we know? Princeton University Press. 238 pages.

저자는 인지 심리학자이며, 이 책은 저자가 정치 전문가들의 미래 예측 행태에 대해 10여년 이상 연구한 결과를 정리하여 제시한다. 결론인 즉, 정치 전문가들의 미래 예측 능력은 그리 크지 않다. 어떤 것에 대해 예측하는가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사고 하는가가 예측의 정확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다.

저자는 정치전문가의 사고 방식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고슴도치"(hedgehog)라고 지칭하는 부류인데, 이들은 하나의 큰 원칙이나 이론에 경도하여 세상사를 모두 이것에 끼워맞추려는 성향이 강하다. 또다른 부류는 "여우"(fox) 라고 지칭하는 부류인데, 이들은 특별한 원칙이나 이론은 없으며 벌어지는 상황에 민첩하게 반응하여 수시로 입장을 조정한다. 고슴도치류는 거대 이론에 바탕을 두고 연역적 방식으로 사고하는 반면,  여우류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귀납적 방식으로 사고한다. 고슴도치류는 자신의 이론과 주장에 대해 확신이 강하며 세상을 보다 단순하게 그리는 반면, 여우류는 세상을 훨씬 복잡하고 확률적으로 생각하며 인간의 세상 인식 능력에 대해 유보적이다.

수백명의 정치 전문가들에게 1980~90년대에 중요한 국제정치경제의 관심사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로 예측을 하도록 하고, 예측의 정확성은 물론, 예측 사건이 발생하기 전과 발생한 후에 전문가들의 인식 방법의 차이 등을 분석하였다. 소련의 붕괴, 캐나다의 분열, 남아공화국의 인종차별 정권의 종말, 유럽 통합의 미래, 한반도를 포함한 핵전쟁 가능성, 경제 위기, 등등 100개 이상의 질문에 대해 예측 자료를 수집하였다. 분석 결과 여우류의 전문가가 고슴도치류보다 미래 예측이 정확했다. 그러나 어느 전문가들보다 타임시리즈 통계 모델로 미래 확장 예측(extrapolation)을 했을 때 예측의 정확도가 훨씬 높았다. 그 분야에 대해 오랫동안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제법 안다고 하는 전문가보다 단순한 수치들의 귀납인 통계 분석이 훨씬 정확한 것은 아이러니이다.

전문가들은 자신이 예측한 사건이 실제 발생하지 않았을 경우에도 자신의 예측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사안이 발생하기 위해 전제가 되는 조건이 만족되지 않았다거나, 거의 그렇게 될 뻔했다거나, 예측한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라거나, 위험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실재보다 더 크게 예측한 자신의 태도가 옳았다거나, 등등으로 자신의 틀린 예측을 정당화한다. 예컨대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퀘백주가 영어권 지역으로부터 분리되리라는 예측에 대해, 1991년 국민투표 결과 51%가 분리를 반대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 결과를 두고 캐나다의 분열을 예측한 전문가의 생각이 틀렸다고 반박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투표 이전에 어떤 상황이 다르게 전개되었다면 국민투표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 수도 있다. 또한 51%의 투표 결과는 샘플링 에러의 범위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즉 만일 투표를 통계적으로 독립적으로 여러번 한다면, 그중 분리를 찬성하는 결과의 투표가 발생했을 수 있는데, 현실에서는 한번밖에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이 어떻게 귀결되었는가는 순전히 우연일뿐이다.

예측이 틀릴 수 있는 다양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예측의 정확성에서 여우류는 고슴도치류보다 일관되게 앞선다. 또한 자신의 예측 사건과 관련된 인접 사안이 발생했을 때, 여우류는 자신의 예측치를 수시로 조정하는 반면, 고슴도치류는 일단 자신이 한 예측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여우류는 자신의 예측이 틀릴 수 있음을 항시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예측을 수시로 수정하는 데 꺼리낌이 없는 반면, 고슴도치류는 자신이 옹호하는 이론과 그에 따른 예측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상황이 변해도 좀처럼 입장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정치권은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도 고슴도치류가 여우류보다 인기가 높다. 사람들은 자신이 옹호하는 이념이나 진영에 부합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의 주장에 쉽게 귀를 기울인다. 반면 불확실한 세상을 전제로 하고 여러 유보적인 조건을 달면서 불확실한 예측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확실한 세계관과 확고한 주장을 복잡한 세계관과 애매한 주장보다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치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는 동기는, 그들의 주장의 사실성 못지 않게 그들의 주장의 오락성을 사기 때문이다. 정치 정문가의 세계에서 객관성은 그리 존중받는 덕목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정치 전문가들은 자신의 주장이 명확하게 틀리거나 맞는지 판명할 수 있도록 미래 예측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의견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분명히 알기는 어렵다.

이 책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방법론적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하면서 제시하기 때문에 읽기가 힘들었다. 사회과학 연구방법론과 통계학의 배경 지식이 상당해야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일반적인 교양서의 범주에 들지 않는 책이다. 기술적인 면을 조금 걷어내면, 그의 주장이 훨씬 흥미로울 것 같다. 물론 그러면 다른 책이 되겠지만.

2024. 7. 9. 18:22

Daniel Markovits. 2019. The Meritocracy Trap: How America's foundational myth feeds inequality, dismantles the middle class, and devours the elite. Penguin Press. 286 pages. 

저자는 법학자이며, 이 책은 현재 미국에서 업적주의(meritocracy)가 지배하는 환경이 낳는 심각한 문제를 서술한다. 업적주의는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중류층을 없애고 사회양극화를 촉진시킨다. 업적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재의 사회 분위기는 엘리트층과 중류층간 간격을 벌리고, 엘리트의 계층 지위를 후세대로 세습시킴으로서 미국을 계층지위가 세대를 넘어 고정되는 카스트 사회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업적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물론 업적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도 지나치게 큰 부담을 안겨준다.

1980년대 이래 미국에서 소득 상위 1% 층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 소득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들 상위 1% 층은 최고의 전문가 직업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기업의 고위 경영자, 투자금융회사의 금융 전문가, 유명 법률회사의 변호사, 전문 분야의 의사, 컨설팅 회사의 임직원, 기술 스타트업의 임직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높은 인적 자본을 활용하여서 회사에 엄청난 부를 창출하고, 그 일부를 자신의 소득으로 챙긴다. 이들의 연봉은 수십억에서 수천억원에 달한다. 과거 귀족사회나 산업사회의 지배층인 귀족과 자본가들은 토지나 공장을 소유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자신은 놀면서 엄청난 소득을 향유하는 유한계급이었다. 반면, 20세기 후반에 새로이 등장한 엘리트 전문인들은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며,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 최고급의 기술을 획득하고, 이 기술을 활용하여 매우 복잡한 일을 수행하고 엄청난 부를 창출해 낸다. 이들은 누구보다 높은 능력과 노력으로 높은 생산성을 올리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높은 소득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1980년대 이래 정보기술과 운송 기술의 발달 덕분에, 전에는 가능하지 않은 정도로 매우 복잡한 일을 체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 덕분에 출현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당 50~100 시간을 투입하는 엄청난 노동으로 자신을 혹사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에 중독되어 살아간다.

이러한 엘리트들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경쟁을 뚫고 엘리트로 선발되도록 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엄청난 관심과 투자를 쏟아붓는다. 엘리트 부모의 엄청난 투자는 실제 그들의 자녀가 우수한 학교에 들어가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학교 졸업후 자신과 같은 엘리트 전문인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반면 중류층은 자녀에게 큰 투자를 하지 못하므로, 중류층의 자녀는 엘리트 전문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미국의 명문 사립 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의 대부분이 부모가 부자이며, 등록금이 엄청난 사립 혹은 부자 동네의 공립 초중등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이, 미국 사회의 엘리트 지위가 교육을 매개로 하여 세대간 전승되고 있음을 지시한다. 엘리트 자녀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고 학교를 다니며, 그들이 명문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도, 다시 좋은 직장에서 엄청난 경쟁과 일의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경쟁에서 배제된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은 경쟁에 패배한 것으로 인한 실망과 좌절 속에서 살아간다. 1980년대 이래 정보기술과 기계화 덕분에 중간 관리층이 줄어들고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중류층의 삶은 과거보다 불안정해졌다. 그들은 불안전 고용과 실직 등으로 노동하지 않는 유휴시간이 늘었으나, 이것이 삶의 질의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 사회층의 양극화는 심화되어,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 사이에 소득은 물론 삶의 모든 측면에서 서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사는 곳, 일하는 방식, 자녀를 키우는 방식, 자녀가 다니는 학교, 가족의 안정성, 소비 물품, 여가를 보내는 방식, 정치적 성향, 종교 활동,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현재 미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도는 1920년대 후반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에 근접하고 있다. 미국의 중하층은 엘리트들을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며 건방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엘리트들은 중하층을 무능하고 노력하지 않고 절제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경멸하면서, 서로 간 반목이 심하다. 미국의 금권주의 정치 풍토에서 엘리트들은 정부를 장악한 반면, 중하층은 이러한 정부에 등을 돌렸다. 결국 도날드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주의자의 선동이 대중에게 먹혀들고, 정치의 합의 도출 기능이 마비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나라에 살면서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서로 반목하는 지금의 상황이 지속되면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인류의 과거에서 높은 불평등은 결국 전쟁 혹은 혁명을 통해서만 해결되었다.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를 벗어나 대안이 있는가? 저자는 이 부분에서는 그리 설득적인 논의를 전개하지 못한다. 저자는 업적(merit) 자체가 사회 환경에 따라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사회적으로 높은 보상이 업적과 함께 해야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엘리트들이 다니는 명문 사립대학은 그들이 보유한 엄청난 규모의 펀드의 수익을 활용하여 재학생들에게 크게 투자하고 이것이 높은 교육 성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명문 사립대에 입학 문호를 넓히도록 정부가 압력을 넣어야 한다. 엘리트 직장의 일 중독 문화가 임직원의 높은 수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을 덜하도록 제도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소득의 양극화, 특히 고급 전문직의 높은 수입과 그들의 지나친 일 중독 및 엄청난 자녀 교육 투자에 논의를 집중한다. 책의 대부분을 이러한 현상을 서술하는 데 할애한다. 그의 서술에는 몇가지 약점이 보인다. 첫째, 그는 업적주의 사회의 승리자(meritocrats)로 엘리트, 부자, 최고노동자 등을 언급하는 데, 이 집단의 범위가 모호하다. 엘리트 집단과 중류층 이하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강조하면서, 때로는 엘리트 집단의 범위를 대학 졸업자, 전문 대학원 졸업자, 아이비리그 대학 졸업자, 상위 0.1%, 상위 1%, 상위 5%, 상위 10% 등, 가용한 통계에 따라 수시로 조정한다. 그가 주장하는 엘리트의 독보적인 소득이나 배타적 삶의 방식이, 계층지위에 따라 낮아지면서 연속선을 그린다면, 그의 주장의 근본, 즉 양극화된 사회라는 주장은 무너진다. 둘째, 그의 서술은 전적으로 미국 사회에 한정해 있는데, 그가 지칭하는 엘리트들은 세계화된 사회 속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한  사람들이다. 미국의 엘리트 전문인은 대부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다국적 비즈니스 분야에서 활동하고 그로부터 높은 소득을 거둔다. 예컨대 빌게이츠가 엄청난 부를 획득한 것은 세계화된 시장 속에서 그의 능력과 노력이 독보적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업적주의 보상체계는 미국 사회에 한정해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셋째,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가 큰 소득 격차와 사회 양극화를 낳고 있다면, 그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없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인류의 과거는 부모의 지위에 따라 자동적으로 지위를 배분하는 방식인 카스트나 귀족 사회, 정실에 따라 지위를 배분하는 방식, 부모의 재산과 사업을 자식이 물려받는 방식이 지배했다.이러한 방식보다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하는 업적주의가 그나마 낫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했듯이 업적주의 또한 세대간 엘리트 지위의 전승을 근본적으로 틀어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엘리트들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의 노하우를 전력을 다해 자녀에게 전승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위를 자녀에게 전승한다.

실용주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은 업적주의의 폐해를 막기위해, 업적과 보상을 극단적으로 연결시키는 순수한 업적주의 방식을 부분적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업적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되, 이것 이외에도 사회와 삶에 가치있는 다양한 기준을 동시에 인정한다면, 개인의 업적에만 전적으로 보상을 몰아주는 현재의 업적주의 보상체계는 타당하지 않다. 국가가 관여하여 다양한 가치에 따른 보상의 균형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그에 따라 각 가치에 따른 행동에 대해 보상이 적절히 돌아가도록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는 이러한 방식을 사회 민주주의적 방식이라고 지칭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영리 행위의 업적에 대해 높은 세금을 매겨, 이 세금으로 다른 가치 행위에 대해 보상을 해준다는 발상이다. 샌델의 사회민주주의적 보상 체계에 설득력이 있지만, 사실 현재의 상황은 업적주의를 약화시키기보다는 업적주의를 더 충실히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미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사회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제대로 보상되지 않으며, 이것이 더 큰 사회 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재 미국의 엘리트 전문인들의 소득, 일, 교육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서술이 지나치게 반복적이라 읽는 것이 매우 지루했다. 양극화와 엘리트 중심 업적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책의 맨 끝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끝 맺어서 허탈했다. 대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기지 않은 비판이라면 비판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2024. 7. 9. 14:29

데스번드 모리스 (이규범 옮김). 2017(1985). 바디 워칭. 범양사. 312쪽.

저자는 동물학자이며, 이 책은 머리카락에서 발끝까지 인체를 20개 부분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구조와 기능, 진화의 흔적, 성장과 운동, 자세, 표정, 몸짓 등등을 생물학, 의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 과학적 지식을 총 동원하여 종합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신체 각 부분에 대한 사회적 관습, 상징적 의미, 미신과 신화 등 사회 문화적 측면 또한, 서구사회에서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신체 각부분과 연관된 설명을 다양한 사진과 그림과 함께 곁들여 제시하기 때문에 이해가 쉬우며 읽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 몸은 누구에게나 매우 친숙하지만,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실을 접하게 되어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 몸의 많은 부분이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컨대 인간의 다리 자세에 따라 이것이 발산하는 성적인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 번역도 자연스럽게 잘 되어 있어서 좋았다.

2024. 7. 2. 17:54

엔도 슈사쿠. (공문혜 옮김). 1982(1966). 침묵. 홍성사. 295쪽.

저자는 소설가이며, 이책은 종교적인 고뇌를 주제로 한 종교소설이다.

1600년대에 일본이 카톨릭을 박해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일본에 몰래 잠입한 포르투갈의 선교사가 관헌의 박해을 받은 끝에 결국 배교하고 만다는 줄거리이다. 이야기의 굴곡이 없이 단선적으로 진행되며, 배교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는 주인공의 심리적 고뇌가 주요 테마이다. 주인공은 기독교를 믿는 주민들이 처참한 고문을 받는 상황에서, 자신이 배교하면 그들을 고문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설득에 굴복한다. 하느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란, 타인의 아픔을 줄이기 위해 신부로서 일생동안 지켜온 신앙적 고집을 꺽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느님은 왜 선과 함께 악을 내셨으며,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사를 접하고도 왜 계속 침묵하냐고 묻는다.

이 소설은 이야기 전개가 단선적이지만, 주인공의 심리적인 다이나믹을 잘 묘사하여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 낸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질문을 핵심으로 하는 전형적인 종교소설이다. 저자의 독실한 신앙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2024. 7. 1. 15:36

Eric Hobsbawm. 1994. The Age of Extremes: A History of the World, 1914~1991. Vintage Books. 585 pages.

저자는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공산주의자로 유명하다. 이 책은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하여, 1917년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 1930년대의 대공황과 파시즘의 확대, 1940년대의 이차대전, 이후 냉전과 1950~60년대 서구의 장기간의 경제 호황, 1970년대의 경제위기와 제삼세계의 등장,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확대, 1989~91년에 공산주의 세계의 몰락으로 끝을 맺는다.

제 1차 세계대전은, 뒤늦게 산업화로 부상한 독일이 기존의 제국주의 세력인 영국과 프랑스에 도전한 사건이다. 전쟁에 패한 독일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나찌의 파시즘이 큰 호응을 얻는다.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중류층은 기존의 자유주의 질서에 분노하며,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와 반민주주의가 결합한 파시즘에 열렬히 호응한다. 2차대전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질서는 몰락하는 대신, 미국이 국제무대에서 새로운 강국으로 올라선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덩어리 사건이다.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은 무산자 계층이 기득권 집단을 타도한 사회혁명 social revolution이다. 소련은 중앙집중적 계획경제 정책을 구사하면서, 1950년대까지 빠른 속도로 산업화를 이룩하였다. 기득권 집단을 전복하고, 가난하고 낙후한 사회를 빨리 발전시키는 모델로서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는, 이차대전 이후 독립한 제삼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기구의 비효율과 불평등 확대 문제를 피할 수 있는 대안으로 선호되었다. 그러나 중앙집중 계획경제의 비효율은 1960년대 이래 점차 확대되었으며, 결국 이러한 내재적 문제로 인하여 1980년대말 공산주의 세계의 붕괴로 끝을 맺는다.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수요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각광을 받았다. 북유럽 국가의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극단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 자본주의 체제는 점차 효율성이 떨어졌으며, 1970년대 제삼세계의 부상으로 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1980년대 들어 시장기구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는데, 이는 이후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80년대 들어 정보통신 기술과 운송기술의 발달로 세계화가 전개되어 국제분업이 확대되었다. 선진 산업국에서는 제조업이 쇠퇴하는 대신, 제3세계 국가들이 국제 분업 체계에 편승하여 발전하면서 세계 경제에서 비중을 늘려갔다. 그 결과 국제 정치경제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비중을 갈수록 줄어들었다. 한편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은 이러한 세계화에서 배제된 채, 극빈자가 다수를 차지하며 정부의 역할이 미약하고 폭력이 지배하는 야만의 세계이다.

저자는 평등과 정의의 관점에서 역사 전개를 본다. 실재한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은 자체 문제 때문에 붕괴했지만, 무산자가 기득권자를 타도하는 이념으로서 칼맑스의 공산주의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불평등과 착취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평등과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대안이 아니다. 서구는 개인이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극단의 개인주의 사회로 향하고 있는데, 국가의 개입으로 전체의 복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저자는 1990년대 초반 글을 쓰는 시점의 세계는 위기 상황이며 변화가 긴급히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20세기 역사 해석은 큰 영향을 미쳤다. 일이차대전과 파시즘에 대한 분석은 학계의 정론으로 자리잡았다. 그가 글을 쓰던 1990년대 초반에는 중국의 부상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는지, 불과 수십년 후에 국제 사회에서 큰 위치를 차지할 중국에 대한 언급은 빈약하다. 중국에 대한 서술은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혼란이 전부이다. 공산주의 세계에 대한 그의 서술은 우호적인 동정 sympathy 의 냄세가 물씬 풍긴다. 공산주의 이념을 뿌리깊이 옹호하는 지식인으로서 서구 자본주의 세계의 전개를 분석하는 그의 서술이 신선하고 흥미롭다. 그의 글은 엄청난 정보를 잡아 넣으며, 생각을 계속 추가적으로 이어가는 방식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문장이 복잡하고 길어서 읽기 어렵다. 주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문장을 반복하여 읽을  때가 많았다. 읽기는 어렵지만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2024. 6. 24. 17:46

이나가키 에미코 (박정임 역). 2022.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 인생 후반전에 만난 피아노를 향한 세레나데. 알에이치코리아. 227쪽.

저자는 에세이 작가이며, 이 책은 저자가 50대 중반에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음악에 빠지게 된 과정을 서술한다. 어렸을 때 배우다 만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면서 느낀 감정과 시련의 과정을,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인생 경험과 교차하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다는 꿈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지만, 우연히 음악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실현하지 못했다. 음악잡지에 글을 쓰는 조건으로 전문 피아니스트를 선생으로 소개 받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 기초를 배우기는 했지만 40년간 피아노를 만진 일이 없는데, 피아노 선생의 권유로 연습곡이 아닌 본격적인 작품을 처음부터 치기 시작한다. 모짜르트의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을 맨처음으로 치고, 이어 쇼팽, 베토벤, 드비시, 바흐 등의 곡을 어렵게 어렵게 쳐나가면서, 음악의 세계에 빠져든다. 과거 수동적으로 듣기만 할 때와는 달리, 본인이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 작품을 훨씬 깊게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수확으로 꼽는다.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지 3년이 지나 이 책을 쓰는 시점에서, 피아노 없이는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아노가 작가의 인생에 중요한 동반자가 되었다.

저자는 무척 성실한 사람이다. 노력을 투입하면 그에 따른 성과가 고지곧대로 나온다는 점을 피아노를 배우는 묘미로 지적한다. 지난 삼년 동안 거의 매일 두시간 이상 꼬박꼬박 피아노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피아노를 배우는 과정은 지난하여, 엄청난 노력을 투입하는 것에 비해서는 진척이 매우 느리다. 이렇게 계속 연습하면 늘기는 느는 것인가, 곡의 어려운 부분을 내가 과연 쳐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서 피아노 연습을 하지만, 결국 끈질기게 연습하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진척이 있음을 확인하고 보람을 느낀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도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불확실함을 인정하면서 연습을 한다.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 몸과 두뇌가 후퇴함을 체감하면서, 고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체념을 고백한다.

피아노란 젊을 때와 달리 단순히 열심히만 한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님을 절감한다. 의욕과 초조함이 앞서 매우 열심히 연습한 결과 손가락 통증에 고생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치는 단계로 업그레이드를 시도한다. 자신의 피아노 실력이 느는 것과 함께, 자신의 피아노 연주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절감한다. 왜 내가 피아노를 치는가 하는 질문을 수시로 자신에게 던진다. 저자는 피아노를 칠 때가 즐겁다고 말한다. 노년에 피아노를 치는 것은 전문 연주자의 실력을 넘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아노를 치며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그 자체로, 즉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라고 하며 글을 맺는다.

저자는 전업 작가 답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좋다. 글 전체에 유머가 깔려 있으며, 자신의 새로운 인생에 대한 자긍심이 넘쳐 흐른다. 이 글의 필자 또한 이 책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늦깍이로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그의 고민과 시련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단숨에 읽었다. 필자 역시 이러한 길이 어디까지 갈지 의문을 품고 피아노를 친다. 물론 이 책이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와 유사한 길을 가는 동시대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 번역도 자연스럽게 잘 해서 읽기가 편하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은 왜 인간의 고통에 침묵하는가  (0) 2024.07.02
공산주의자가 보는 20세기 역사  (0) 2024.07.01
우리 몸의 통증은 왜 생기는가  (0) 2024.06.12
20세기 경제사  (0) 2024.06.06
식물의 세계의 다양성  (0) 2024.06.05
2024. 6. 12. 12:17

Monty Lyman. 2021. The Painful Truth: the new science of why we hurt and how we can heal. Bantam Press. 218 pages.

저자는 신경정신과 의사이며, 이 책은 사람들이 지속적인 통증(persistent or chronic pain)을 느끼는 원인을 설명하며,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어떻게 통증을 치유해야 할지 제시한다.

통증은 기본적으로 우리 몸을 보호하는 장치이다. 이는 통증이 우리 몸 조직의 손상이 보내는 신호라는 전통적인 생의학적(biomedical) 개념과 대조되는 새로운 시각이다. 즉 "pain is our body's protector, not detactor"라는 명제는 통증에 대한 혁명적인 인식의 변화이다. 통증이란 원래 우리 몸의 손상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두뇌가 발하는 경고이다. 우리 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통증을 통해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조정한다. 통증은 이를 유발한 물질, 환경,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앞으로 멀리하고 조심하도록 유도한다.

단기적으로 느끼는 통증은 손상된 조직이 보내는 신호이며, 손상이 치유되면 통증이 사라진다. 그러나 조직의 손상이 치유되었음에도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통증은 마음의 문제이다. 우리의 두뇌가 우리의 몸을 과보호하는 상태로 굳어져서 (wired), 물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없음에도 우리의 두뇌가 환경에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여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통증이 물리적 손상에 대한 수동적 반응이기보다, 두뇌의 적극적 작용의 결과라는 증거는 흔하다. 병사들이 전장에서 크게 부상당했음에도 그 당시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다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을 때 통증을 느끼는 경우, 우리의 두뇌는 전장에서 살아남는데 집중하는 반면 통증은 생존에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손상된 조직에서 올라오는 통증 감각 신호를 무시한다. 어떤 일이나 상황에 집중해 있을 때, 그당시 다친 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 일이 끝나고 나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통증은 사회적 원인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정당하지 못하게 취급되거나, 사회적으로 배제되거나, 인간 관계에서 높은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 우리 몸은 통증을 느낀다. 우리 두뇌가 이러한 상황을 안전하지 않은, 생존에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쉬 아프고, 아프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참여를 줄이고, 이것이 다시 통증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빚는다. 반면 주위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돌봄을 받는 경우, 조직의 손상이 유발하는 통증 조차 훨씬 줄어든다.

근래에 미국에서 마약성 진통제(opiods)에 중독되어 젊은 나이에 죽는 사회문제가 심각하다. 이러한 진통제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실업, 빈곤, 사회적 배제로 인해 자존감이 손상되어 일반인보다 고통을 더 심하게 느낀다. 마약성 진통제는 복용을 할수록 효과가 떨어져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하고, 마약성 진통제 자체가 통증에 대한 우리 몸의 민감성을 높여서 일반인보다 일상에서 통증을 훨씬 높은 강도로 느끼기 때문에, 진통제를 더 자주 더 많이 찾는 악순환이 진행되어, 결국 마약성 진통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에 이른다. 마약이나 마약성 진통제는 단기적으로는 통증을 없애주지만, 장기적으로는 통증을 더 느끼게 만드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조직의 손상을 동반하지 않은 지속적 통증은 두뇌의 문제임으로, 통증을 유발하는 두뇌의 작용을 바꾸어야만 통증이 치유된다. 처음 통증을 유발했던 상황이 더 이상 위험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두뇌에 새로이 각인시켜야 한다. 이는 환경을 바꿈으로서 가능하다. 예컨대 지속적으로 허리 통증을 느끼는 경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여 점차 강도를 높이는 운동을 통해, 허리 움직임이 허리 관절을 더이상 위험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두뇌가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의 두뇌는 변형(rewiring)이 가능한 높은 유연성을 지닌다. 두뇌의 오작동으로 인한 통증은 인식의 오류를 개선함으로서 치유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다양한 사례들을 이론적 논의와 섞어서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많은 연구 결과를 인용하는데, 전달하려는 내용에 비해 때로는 반복적이고 장황하다는 느낌이 든다. 4분의 1 정도 양을 줄이면 더 좋은 책이 됐을 것이다. 여하간 이해가 잘 되고 통찰력을 주는 좋은 책이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산주의자가 보는 20세기 역사  (0) 2024.07.01
중년이 넘어 피아노 배우기  (0) 2024.06.24
20세기 경제사  (0) 2024.06.06
식물의 세계의 다양성  (0) 2024.06.05
이민 문제의 진실은?  (0) 2024.05.22
2024. 6. 6. 07:58

J. Bradford DeLong. 2022. Slouching Toward Utopia. Basic Books. 536 pages.

저자는 경제학자이며, 이 책은 1870년에서 2010년까지 서구,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사를 서술한다.

1870년대는 맬더스의 주장, 즉 생산성의 증가가 인구 증가를 앞지를 수 없기 때문에, 인류는 빈곤과 비참속에서 간신히 생존을 지속하는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주장이 틀리게 된 시점이다. 인류는 조직적 연구를 통한 기술 발전 (research and technology)과 대규모 경영 조직(large corporation)의 주도 덕분에 생산성 증가가 인구 증가를 앞서게 되었으며, 이후 생존 수준을 넘어선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1870년 이래 엄청난 부의 창출을 이끈 또 다른 요인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이다. 시장은 모든 참여자의 아이디어를 모으는 (crowdsourcing) 기제이며, 다른 어느 체제보다도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인류가 이전에는 보지 못한 규모의 부를 만들어 내었다. 자본주의 경제는 전체 부의 규모는 크게 높이지만 분배의 문제는 잘 해결하지 못하는약점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시장 가치를 최고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인간의 다른 여러 욕구와 권리를 잘 반영하지 못한다. 시장이 인간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시장을 위해 기능하는 주객 전도 현상을 초래하였다. 칼 폴라니는 사람들은 공동체에 대한 욕구,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할  권리, 인간적으로 취급될 권리 등, 시장 가치로 평가되기 어려운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유토피아는 칼 폴라니가 주장하는 그러한 가치와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는 사회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만들어낸 분배 체계는 갈등을 초래하며 때때로 대공황과 같은 혼란을 겪게 된다.

1870년에서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서구의 경제는 엄청난 부를 창출하였으나, 자체의 모순 때문에 큰 전쟁과 대공황을 겪었다. 대공황을 거치면서 서구 자본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 시장의 문제를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사회보장제도, 정부의 개입에 의한 시장 조정, 정부 재정을 통한 경기 변동의 완화, 등 케인즈의 경제학은 서구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1945년 이차대전 종전 이래 1970년대 초반까지 약 30년간 서구 경제는 다시 엄청난 풍요의 시대를 맞았다.

1970년대에 중동발 자원민족주의의 충격파는 서구 경제를 심각한 침체로 몰아 넣었다. 미국 경제는 1980년대 산업 구조 조정과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제 강화 정책에 힘입어 다시 회복했으며, 1990년대에 정보통신기술과 콘테이너 운송 기술 발달이 가져온 세계화의 선두에서 생산성 혁신을 이끌면서 다시 엄청난 부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화로 형성된 국제분업체계는 고부가가치 분야를 서구 특히 미국이 독식하면서, 세계의 부가 선진국의 소수에게 집중하는 경향을 심화시켰다. 개발도상국들 또한 세계화가 만들어낸 국제분업체계에 편입되어 혜택을 보게 되면서, 세계의 빈곤인구는 놀랄만한 속도로 줄어들었다.

21세기에 들어 세계는 유토피아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아니다 라고 뚜렷이 말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부를 만들어내는 능하지만, 인간의 다양한 욕구와 권리를 충족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편 분배 문제에서 강점을 보인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199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부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여 신자유주의에 의해 대체되었다. 세계 경제의 부를 계속 증가시키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를 효과적으로 충족시킬지 하는 질문에 대해, 인류는 아직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 책은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20세기의 변화를 검토한다는 면에서 역사학자의 경제 변화에 대한 서술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저자는 자신의 리버럴한 입장을 서술의 곳곳에서 많이 표출하고 있다. 약간 냉소적이며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저자가 뚜렷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불확실한 문구가 많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며, 혹시나 하고 끝까지 참고 읽었지만 별반 통찰력을 얻지 못했다.  저자는 칼 폴라니를 추종하는데, 어떻게 세계 경제가 칼 폴라니가 제시하는 대로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전혀 아이디어가 없다. 세계 경제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저자 스스로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2024. 6. 5. 14:14

DK 식물 편집위원회 (박원순 옮김). 2020. 식물 대백과사전. 사이언스 북스. 343쪽.

이 책은 도판으로 구성된 백과사전으로 식물의 다양한 측면을 그림과 함께 서술한다. 식물계, 뿌리, 줄기와 가지, 잎, 꽃, 씨앗과 열매로 장을 구분하여 제시한다. 식물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보다는 다채로운 그림이 이 책의 핵심이다. 다양하고 기이한 식물들의 사진과 그림을 보면서 눈이 호사하는 느낌이 든다. 자연이 만든 생명체의 다양성에 새삼 감탄한다. 어린 시절에 백과사전을 읽으며 홀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기억을 떠올린다. 

 

2024. 5. 22. 17:17

Hein De Haas. 2023. How Migration Really Works: the facts about the most divisive issue in politics. Basic Books. 372 pages.

저자는 네덜란드의 사회학자로 이민문제 전문가이다. 이책은 이민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흔히 제기되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객관적인 데이타를 사용하여 이민 문제의 실상을 밝힌다.

국제 이민이 근래에 폭증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 이민자의 절대수는 증가했으나, 인구 비율로 볼 때에는 전체 인구의 3% 부근에서 매우 안정적이다. 이민자의 대부분은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같은 지역 내에서 이동하며,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이동하는 인구는 상대적으로 매우 소수이다. 근래에 선진산업국에서 불법이민자들이 폭증했다고 대중영합 정치인들이 주장하면서 대중을 선동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함이지, 실제 불법 이민자들이 폭증했기 때문은 아니다. 시민단체나 매스컴 역시, 불법 이민자들의 고통과 폭증을 자극적인 말과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크게 부각시키는데, 이 역시 그들 자신의 이익, 즉 대중의 지원과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소득 격차가 엄청남에도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 이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익숙한 환경에서 계속 살려고 한다. 국경을 넘어 먼거리를 이동하는데에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큰 투자가 필요하다.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모험을 감행할 때 치러야 할 재정적 비용이나 신체적 위험은 엄청나며, 설사 목적지에 도착해도 낮선 환경에서 주변의 차별과 무시와 외로움을 버텨내며 지내는 것은 엄청난 시련이다. 국경을 넘어 이주를 감행하는 사람들은 출신 국가에서 상대적으로 재력이 있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정신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이 오랜 고민과 계획 후에 신중하게 실행에 옮긴다. 이민자의 대부분은 극빈한 나라가 아닌 어느 정도 소득과 교육 수준이 되는 개도국, 예컨대 멕시코,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 국가 출신이다. 재해, 빈곤, 전쟁 등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같은 나라 내에서 이웃 지역이나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데에 만족한다.

큰 비용과 위험을 무릅쓰고 선진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뚜렷한 이유가 있다. 선진국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나라에 머무는 것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미래, 즉 지위를 상승시키는 데 훨씬 낫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일할 기회가 적으면 이동하지 않는다. 선진국의 경기와 이민자의 수는 함께 움직인다. 이민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 사람들이다. 불법 이민자들은 극심하게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진국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는 것일 뿐, 가난한 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동 중에 착취당하고 도착해서 낮은 임금과 비인간적 노동조건으로 착취를 당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나라에 머무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기 때문에 그리한다.

선진국에서 얻는 일자리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이라는 유인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국경 장벽을 높이 세워도 불법 이민자의 유입을 막을 수 없다. 선진 산업국은 노령화, 교육수준의 상승, 여성의 노동 참여 확대, 소득 수준의 상승, 등의 요인 때문에 개인 서비스 수요가 갈수록 높아지는 반면, 소위 3d 업종, 즉 더럽고 힘들고 낮은 임금의 노동을 하려는 사람은 내국인 중에 거의 없다. 내국인은 차라리 놀면서 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지언정, 그렇게 열악한 지위의 일자리를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민자들이 없다면 다양한 개인서비스나, 농업 노동의 수요를 채울 수가 없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말로는 불법 이민자를 막겠다고 하지만, 막상 불법 이민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주를 처벌하는 조치는, 법에서 규정하고 있음에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미국 전체에서 불법 이민자를 고용한 고용주를 처벌한 사례가 일년에 10~30건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이를 실증한다. 

진보 혹은 보수 성향의 어느 쪽이 정부를 장악하던 이민자에 대한 실제 정책의 차이는 거의 없다. 노동시장의 수요와 합법 이민자의 규모 사이에 괴리가 있는 한, 그 간극을 불법 이민자가 채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선진국에서 이민 노동자의 수요가 크기 때문에, 사실 이민자의 90%는 합법 이민자이며, 10%만이 불법 이민자이다. 불법 이민자의 대분은 합법적으로 입국하여 비자 기한을 넘기는 등의 방편으로 불법 이민자가 된 경우가 다수이므로, 국경을 막는데 엄청난 돈을 들이는 것은, 보안 산업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 실제 별 효과가 없다. 국경을 넘는 것을 어렵게 만들수록, 불법 이민자가 치르는 재정적 신체적 희생이 커질 뿐이다. 

정부의 이민 정책은 일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보수당과 진보당 모두, 각각 자신의 지지층 내에  이민에 대해 서로 다른 이익을 가진 집단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보수당 지지자 중 기업가와 부자는 이민의 문호를 확대하기를 원하는 반면, 인종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 보수적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은 이민을 줄이기를 원한다. 진보당 지지자 중, 노동자들은 이민자가 확대되는 것을 반대하나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이민이 확대되어 인간적으로 핍박받는 개도국 사람을 돕고 사회의 다양성이 높아지기를 원한다. 따라서 선진국 정부가 제시하는 이민 정책은 수시로 바뀌며, 실제 문제를 정면으로 부딛치기보다, 국민들에게 내세우는 인상을 중요시하고 피상적인 접근에 머무른다. 

일반인들의 이민자에 대한 태도 또한 일관적이지 않다. 선진국의 일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나 핍박받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밑에 깔고 있으며, 실제 주위에서 이민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민자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저임금으로 파고 들어오면서 노동시장의 상황이 열악해지는 것을 염려한다. 많은 사람은 이민자들이 식당 뒤에서 일하며, 노약자를 돌보고, 아이를 돌보고, 청소하고, 정원 관리하는 것을 일상에서 항시 경험하면서 그런 일을 도맡아 하는 이민자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 이민을 막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합법적인 이민자의 유입까지 막는 것은 반대한다. 국경은 엄격히 관리되어야 하지만, 선진국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젊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력은 어느 정도 규모로 계속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상이 위와 같다면, 근래에 "이민의 위기" immigration crisis 라고 외치면서, 이 문제에 대해 긴급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는 정치인, 미디어, 시민단체의 주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저자는 이민 문제의 사실을 정확히 이해시키는 것이 일차적 목표일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할 의향은 없다고 말한다. 선진국 사람들이 높은 물가, 낮은 성장율, 낮은 삶의 수준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민자의 유입을 막는 어떤 방안도 효과를 볼 수 없다.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의 일자리 덕분에 선진국 사람들은 큰 혜택을 보고 있으며, 저소득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 또한 이익을 얻고 있다. 이러한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한 이민자는 존재할 것이고, 만약 이들의 이동을 막으려 한다면, 이민자들의 희생만 커질 뿐이다. 

국경을 완전히 개방하여 사람들을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하는 방안 또한 현실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선진국에서 이민자로 인한 이익은 중상류층에게 주로 몰려있는 반면, 노동계층은 상대적으로 큰 이익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 계층이 이민자가 주위에 넘쳐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국경의 완전한 개방은 정치적으로 현실화되기 어렵다. 선진국 국민이 합의하는 수준에서 합의하는 규모 만큼의 이민자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상의 정책으로 보인다. 내국인은 일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반드시 채워져야 할 일자리를 합법적으로 유입된 이민자가 채우도록 하는 정책이다. 만일 그렇게 하면 개도국 이민자가 지나치게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대해, 저자는 일자리가 없다면 이민자이 들어오려 하지 않을 것이고,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순환이동" circular movement 현상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 없으리라고 본다. 정치인들은 이민의 실상에 대해 솔직하게 국민을 이해시키면서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위선적으로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정치는. 이민자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 책은 저자의 30년간의 연구가 집약된 결과 답게 논의가 분명하다. 저자의 연구의 깊이가 느껴지는 책이다. 다만 맨 뒤편에 정책을 제시하는 부분에서는 모호한 서술이 보인다. 이민은 사회변화의 일부이므로, 사회변화 전체의 맥락에서 이민을 바라보아야 하고, 이민에 대한 접근 또한 보편적인 노동의 문제로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회학자의 냄세를 풍긴다. 여하간 서술이 명료하고 솔직한 인상을 풍기는 좋은 책이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세기 경제사  (0) 2024.06.06
식물의 세계의 다양성  (0) 2024.06.05
서구가 주도하기 이전의 세계는 어땠을까  (0) 2024.05.13
마음가는 대로 사는 느슨함을 누려보자  (0) 2024.04.24
유연하게 생각하기  (0) 2024.04.17
2024. 5. 13. 16:40

 Robert Tignor, et al. 2011. Worlds Together, Worlds Apart, book 1. 3rd ed. W.W. Norton. 361 pages.

이 책은 대학의 세계사 교과서이다. 각 지역과 국가를 따로 취급하는 전통적인 역사 서술과 달리, 전세계를 포괄하여 세계의 변화를 큰 그림으로 다룬다. 인류의 발생에서 서기 1,000년까지를 1권으로, 1,000년부터 현재까지를 2권으로 나누어 제본하였다. 2권은 앞서 읽었고, 이어서 1권을 마져 읽었다.

서기 1,000년 이전 역사에서 특징적인 점은, 세계의 역사의 주도권이 이슬람과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로마 제국은 이후 서구 문명으로 크게 꽃피웠으나, 서기 1,000년까지 세계사 전체에서 볼 때, 규모 면에서 이슬람이나 중국에 크게 못미친다.

분절화된 여러 정치 체제간 경쟁에서 서구 사회 발전의 동력을 찾는다. 서구와 달리 이슬람과 중국은 일찌감치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특히 중국의 경우 왕조가 바뀔 때마다 분열의 시기가 있었으나, 이를 혼란기로 인식하고 다시 통일해야 한다는 의식이 중국인 사이에 강력했기 때문에, 여러 조각의 정치체로 나누어진 상태를 정상으로 생각한 서구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정착하여 농사짓는 생산 방식의 높은 생산력 덕분에 인구가 늘고 물질 문명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전개에서 계속 이동하는 유목민의 역할은 매우 크다. 유목민은 말, 무기 제조, 전쟁기술에서 정착 농민을 크게 앞섰기 때문에, 유럽, 이슬람, 인도 사회의 기존 농업 사회를 정복하고 지배 집단으로 군림하면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계층체계와 규범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전쟁과 정복, 요컨대 타인에 대한 폭력 행사를 삶의 수단으로 삼았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지배집단의 선조이다. 반면 정착 농업인들은 유목민 지배자 집단의 밑에서 실제 생산을 담당하는 다수의 민중을 구성하였다.

서유럽 사회가 근대에 들어 세계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번성하고 세계를 제패하리라는 사실은, 1500년 이전까지 누구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로마 제국을 이어받은 정치체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가 아니라, 콘스타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였다. 그리스 정교회 Authodox Church 의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비잔티움을 잇는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정통 후손이다.

종교는 사회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중요한 바탕이다. 서유럽에서는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였던 반면, 이슬람은 종교와 정치가 한몸이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정치가 종교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결과 서구나 이슬람에서는 종교가 매우 중요한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세속적인 세계관이 지배하고 종교는 부수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서구 유럽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세계를 전체적인 시각에서 공평하게 검토한다. 서기 1,000년까지 서구 유럽은 변방에 위치한 야만의 지역이기에 별반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스 시대와 로마 제국 또한 이슬람이나 중국과 비교할 때 빛이 바래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앞으로 1,000년 후에 세계를 주도하는 집단이 현재와는 다르리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까지를 고르게 커버하는 세계의 역사를 읽다보면 기억의 용량에 무리가 가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여하간 유익한 시간이었다.

2024. 4. 24. 14:57

와다 하루키. (김동연 옮김). 2022. 80세의 벽. 한스 미디어. 221쪽.

저자는 정신과 전문의로 30여년 동안 노인전문병원에서 일했으며, 본인의 나이를 61세라고 밝힌다. 이 책은 본인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80세를 넘긴 노인들의 건강, 생활 태도, 삶의 방식 등에 대해, 문제점과 바람직한 방향을 가벼운 에세이 형식으로 서술한다.

80세 노인이 되면 젊은이를 치료하는 서구 의학 방식은 잘 듣지 않는다. 반드시 건강검진을 받을 필요는 없으며, 자신의 몸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약이나 치료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장수하는 약은 없으며, 약은 몸이 좋지 않을 때만 먹으면 된다. 고혈압, 고혈당, 고콜레스테롤이라는 노인병 삼대 질환에 대해, 저자는 과도하게 혈압을 낮추거나, 혈당을 낮추거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려고 하는 것은 80대 노인에게는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젊은 사람들의 몸에 맞춘 기준치는 80대 노인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혈압을 과도하게 낮추면 기력과 면역력이 떨어지고, 혈당을 과도하게 낮추면 인지 기능이 저하하고 치매의 위험이 높아지며, 콜레스테롤 수치를 과도하게 낮추면 기분과 정력이 악화한다.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이다. 미국 노인은 심혈성 질환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일본 노인은 암과 노쇠로 대부분 사망한다. 서양 노인을 기준으로 하여 개발된 치료 방식이 일본 노인의 경우에는 부적합한 경우가 많다. 80세가 넘으면 대부분의 사람의 몸에는 암세포가 존재하며, 인지기능의 저하로 어느 정도 치매가 진행되고 있다. 노인들은 자신의 몸이 젊은 때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젊은 때와는 다른 자세로 삶에 임해야 한다. '투병'이 아니라 병과 함께 사는 방식을 익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많은 의사나 병원의 현행 접근 방식은 그릇되므로, 환자 본인이 잘 가려서 따라야 한다.

80세가 넘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 말고 당장 하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한다. 나이가 들면 감동이 옅어지는데, 이는 호르몬의 영향도 있지만, 노인은 경험이 많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이미 친숙하여 감동되지 않는다. 다양한 경험을 하려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데도 노인이 되었다고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운전을 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데, 노인이라고 운전면허를 반납하는 것은 절대 반대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계속 써야 제대로 작동한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몸을 계속 움직이고, 머리를 계속 쓰는 생활을 게을리하면 곧 쇠하여 죽는다. 몸에 맞는 정도로 많이 걷고, 흥미로운 일을 찾아서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 귀찮다고 안움직이고, 텔레비젼만 보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빨리 기능이 쇠퇴한다. 어떻든 인간은 결국 늙고 쇠하여 죽는 것이므로, 80세가 넘으면 '잔존 기능'을 잘 활용하여 잘 사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젊을 때와 같이 굳은 결심이나 노력을 많이 기울여서 한결같이 무엇을 추구하는 방식의 삶은 80대 노인에게 적합하지 않다. 악착같이 보람을 찾으려고 하며 살 것이 아니라, 살다가 보람을 찾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 하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 몸과 마음이 변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수시로 생각과 진로를 바꾸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 주위의 눈에 크게 개의치 말고, 생긴대로 마음가는 대로 산다고 해도, 80대에는 젊은이와 달리 무엇을 해도 크게 사고칠 위험이 적으므로, '불량 노인'이라고 치부하면서 자신에게 적당히 관대하게 사는 것이 좋다. 많은 경험을 뒤로 하고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80대 노인은, 느슨하게 사는 삶이 주는 즐거음과 특권을 누려도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쉬는 시간에 문득 주변에 손에 잡혀 읽은 책인데, 삼십분만에 단숨에 흥미롭게 읽었다. 80대 노인 뿐만 아니라 절은이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책이다. 책의 부제가 "벽을 넘어서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20년이 기다린다"고 썼는데, 과연 그럴까?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책에서 써야 할 말인 듯 싶다. 여하간 저자의 경륜과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2024. 4. 17. 17:44

Leonard Mlodinow. 2018. Elastic, Unlocking your brain's ability to embrace change. Vintage books. 220 pages.

저자는 물리학자이면서 과학저술, 과학저널리즘, SF 드라마 극작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이 책은 인간의 비체계적인, 유연한 사고 작용에 촛점을 맞추어 인간의 사고, 즉 생각하는 활동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간은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생각한다. 하나는 체계적, 논리적, 분석적 사고 작용으로 하향 top-down 방식으로 전개된다. 다른 하나는 비체계적, 종합적, 즉흥적, 창조적인 사고 작용으로 상향 bottom-up 방식으로 전개된다. 전자는 당면한 주제에 촛점을 맞추고 엄격히 통제된 방식의 사고인 반면, 후자는 비통제적이고 산반한 방식의 사고이다. 정확히 정의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전자의 방식이 유용한 반면, 전에 없던 새로운 상황과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는 후자의 방식이 유용하다.

인간 두뇌의 좌반구와 우반구는 작동 방식이 다르다. 좌반구는 논리적 분석적 사고에 능한 반면, 우반구는 비체계적 즉흥적 사고에 능하다. 우반구는 감정과 동기화를 담당하는데, 어떤 행위를 왜 하고 싶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를 제공한다. 좌반구는 어떤 문제에 대해 합리적이고 전형적인 답을 제시하는 반면, 우반구는 비논리적이고 비실용적이지만 다양하고 새로운 답을 제시한다. 인간의 두뇌는 좌반구와 우반구가 제시하는 다른 성격의 답들 중에서 취사선택, 종합하여 최종적인 답을 의식에 떠오르게 한다. 이 과정에서 우반구가 만들어 내는 비논리적이고 상식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답들은 거른다. 유연한 사고, 창조적인 사고는, 바로 이러한 두뇌의 거르는 과정 filtering 을 억제하는 데 있다.

유연한 사고는 구체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이완된 상태에서만 작동한다. 이완된 상태에서 작동하는 사고 작용은 인간의 두뇌의 기본 작동 양식 default mode of thinking 이다. 릴랙스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 뇌는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구체적인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 생각할 때와 작동 방식이 다른 것이다. 산보를 할 때, 샤워를 할 때, 꿀잠을 잘 때, 음악을 듣거나 바깥 경치를 보면서 편안히 휴식을 하고 있을 때가 바로 이 디폴트 모드가 작동할 때이다. 이렇게 이완된 상태에서 문득 그동안 집중적으로 생각했으나 풀리지 않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떠오른다. 우뇌에 대한 좌뇌의 filtering 기제가 약화되고, 우뇌의 유연한 사고가 자유롭게 작동하고, 관점의 전환이나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다양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유연한 사고를 촉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명상하기, 자신을 새로운 환경에 처하도록 해보기, 다른 의견의 사람과 토론하기, 마음을 이완시키는 약물, 술 등을 섭취하기, 등을 통해, 유연한 사고를 기를 수 있다. 유연한 사고를 촉진하려면, 엉뚱한 발상을 억압하거나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엉뚱한 발상과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 속에서만, 성공적인 아이디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학 저널리즘에 가까운 책이다. 다양한 기존 연구를 꿰어 맞추고 유머를 곁들이면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술술 읽어 내려간다. 평이한 내용이다.

2024. 4. 15. 13:33

리타 카터 (장성준, 강병철 옮김). 2020(2019). 인간의 뇌. 김영사. 249쪽.

저자는 의학 저널리스트이며, 이 책은 뇌의 구조와 기능, 뇌질환에 관해 그림과 함께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 도감이다. 뇌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하고 있다. 뇌 해부학, 감각, 운동과 조절, 감정, 사회적 뇌, 언어와 의사소통, 기억, 사고, 의식, 뇌의 발달과 노화, 뇌질환 등으로 찹터를 나누어 설명한다.

도감답게 뇌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fmri 사진이 해설과 함께 많이 붙어 있지만, 이러한 사진들이 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본문의 서술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알지 못한다", "분명치 않다" 등 이다. 과학계가 뇌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인간의 다른 기관과 달리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여하간, 그림이 없이 글로만 된 책을 읽을 때 보다 이해가 조금은 향상되는 듯하다.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이기는 하지만, 해설의 수준은 상당히 전문적이다. 

 

2024. 4. 3. 15:12

Paul Krugman, Maurice Obstfeld, and Marc Melitz. 2012. International Economics, Theory and Policy. 9th ed. Pearson. 690 pages.

저자는 노벨 경제학 수상자로, 이 책은 국제경제학 분야의 대표적인 교과서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문, 즉 무역 부문과 환율과 거시경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부문은 다시 이론적 논의 분야와 정책 분야로 나뉘어져 있다. 이론적 설명이 때로 어렵지만, 현실로부터 다양한 사례를 가져와서 설명하기 때문에, 국제경제의 현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된다. 

무역 부분은 상대적으로 이해가 쉬우나, 환율과 거시경제 부분은 실물 부문보다 훨씬 복잡하여 이해가 쉽지 않았다. 결국 무역 부분만 꼼꼼히 읽고 이해한 반면, 환율과 거시경제 부문은 앞부문과 달리 제대로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무역부문을 읽느라 진이 빠져, 환율과 거시경제 부문을 읽으면서는 집중을 하기 어려워서 일 수도 있다). 평소에 이코노미스트 등 경제 기사를 읽으면서 대강 알고 있던 사항을, 이 책을 읽으면서 이론적으로 보다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많은 연구와 통찰력이 집약된 대단한 교과서라고 감탄하며 읽었다. 나중에 여력이 나면, 환율과 거시경제에 관해 다른 쉬운 책을 먼저 읽고, 이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다. 

2024. 3. 20. 18:02

구마겐고 (이정환 옮김). 2020. 구마 겐고, 건축을 말하다. 나무생각. 291쪽.

저자는 일본의 건축가이며, 이 책은 자신이 어떻게 건축가로 성장했으며, 무슨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서술한다. 

저자는 도꾜 외곽에 농촌과 도시의 변경 지역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이웃에 숲으로 둘러쌓인 전통적인 농가 주택에서 자주 놀았으며, 나무 블록을 쌓아서 만드는 놀이를 즐겼으며, 아버지와 함께 밭에 딸린 조그만 집을 조금씩 고쳐짓는 경험 속에서 자연과 인간에 친근한 거주 공간를 선호하는 성향이 만들어졌다. 그는 고등학교 때 오사카 만국 박람회에 가서 건축물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건축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서구에서는 19세기 중후반 고도의 산업 성장과 과학기술의 진보 속에서 모더니즘 Modernism이 지배하였다. 모더니즘은 근면과 계획, 효율, 기계화, 대규모, 진보를 숭앙하는 가치관이다. 그러나 19세기말 20세기초에 물질문명에 반발하는 반모더니즘의 세계관이 등장하였다. 일본은 1970년대에 전후 고도 성장이 끝나고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퇴조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시점에 성인기에 진입하면서 반모더니즘의 세계관을 내재화하였다. 저자는 대학교 학생 시절부터 기존 건축계의 주류였던 모더니즘 사조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그는 일본의 전통과 서구의 현대를 접목하는 새로운 양식의 건축을 지향해왔다.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현실에 두발을 딛고, 일상에서 수시로 닥치는 일들을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추어 살아간다. 그는 거창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기 보다, 작고 실질적인 것을 추구한다. 콘크리트와 강철로 지어진 집은 인간 친화적이지 않다. 나무를 많이 사용하며, 자연에 인접해 지어진 집을 선호한다. 직선보다는 곡선을 선호하며, 부드러운 질감의 소재를 선호한다.

본인은 그의 건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가 능숙한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자신의 성장과정, 자신이 만든 작품, 건축학의 역사, 서구 문화사, 자신의 평소 생각, 등을 잘 버무려서 흥미롭게 서술한다. 두세쪽의 짧은 에세이들을 모아놓아서 가볍고 자유분방한 느낌을 준다.

 

 

2024. 3. 19. 18:31

Ezra Klein. 2020. Why We're Polarized. Avid Reader Press. 282 pages.

저자는 저널리스트이며, 근래 미국 정치가 심하게 양극화된 원인을 다양한 기존 연구를 인용하여 검토한다.

현재 미국의 정치 지형은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들이 서로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있으며, 중간층 혹은 부동층이 매우 엷다. 미국의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 정체성에 따라 이 두 진영 중 하나에 속한다. 미국인에게 중요한 집단 정체성은 다양한 범주에 걸쳐 있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다. 백인 대 유색인, 남성 대 여성, 복음주의 개신교도 대 이들 이외의 사람, 보수주의자 대 자유주의자, 교외/ 농촌지역 주민 대 대도시 주민, 고등학교 졸업자 대 대학교 졸업 이상 학력을 가진자, 등이다. 각각의 집단 구분에서, 전자에 속하는 사람은 공화당을 지지하고, 후자에 속하는 사람은 민주당을 지지한다. 이렇게 다양한 정체성 범주가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일관되게 정렬해 있다. 이 다양한 정체성 기준간에는 역사적 혹은 사회문화 및 경제적으로 서로간 약간의 연관성은 있지만 필연성은 없다. 예컨대 백인과 남성이 아니라 백인과 여성이 한 집단으로 묶인 정체성을 형성할 수도 있다.

미국인의 정치적 지지는, 논리적 혹은 실용적으로 일관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이 상대의 집단과의 다툼에서 이기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한다. 예컨대 오바마가 제안한 의료 개혁은, 예전에 미트 롬니를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이 제안한 정책과 유사한 것인데, 오바마의 집권에 반대하는 공화당 지지자들은 오바마가 제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정책을 극렬하게 반대한다. 정체성 정치의 또 다른 예로, 최근 선거에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도날드 트럼프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이 승리하는 것을 더 참을 수 없어 했기 때문에 트럼프를 지지했다. 요컨대 근래의 미국 정치는 실용적인 정책 대결이 아니라, "우리 대 그들" (us versus them) 이라는 정체성에 토대를 둔 진영 싸움이다. 미국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편이 이기고 상대편이 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혹은 설사 나에게 실제적으로 불이익이 돌아간다고 해도, 상대편이 이기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기 때문에, 정치가 심하게 양극화되어 있다. 집단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진영 싸움이 정치판을 지배하면, 상대를 합리적으로 설득하면서 실용적인 접근으로 타협을 도출하는 정치가 가능하지 않다. 이유를 불문하고 상대를 미워하고, 상대와 어울리고 싶어하지 않고, 상대가 이기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요컨대, 양자간 접근과 타협이 불가능한 정치만이 남았다.

미국의 정치 지형이 과거에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분되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당과 공화당은 각 정당 내에 다양한 이념과 의견을 가진 정치인들이 섞여 있어서, 정책 사안에 따라 소속 정당의 경계선을 넘어 지지하고 서로간에 타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민주당의 경우 서로 정반대의 이념을 가진 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남부의 민주당원은 흑인을 억압하는 인종주의를 극렬하게 옹호하는 반면, 북부의 민주당원은 진보적인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당시 민주당은 남부 흑인의 인권에 눈을 감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서만, 민주당의 정강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당시 공화당에 보수주의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인종 문제와 관련해서는 남부의 민주당원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의견을 가진 공화당원이 적지 않았다. 요컨대 과거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립이 심하지 않았던 때는, 흑인의 희생을 토대로 하여 타협의 정치가 전개되었다. 따라서 흑인을 포함한 미국인 전체로 볼 때, 과거 양극화되지 않았던 정치가 지금의 양극화된 정치보다 더 건강하다고 볼 수 없다.

근래 미국 정치의 극단적 양극화의 시발점은, 1960년대 중반 민주당이 집권하던 시절에 흑인에게 실질적으로 투표권을 주는 개혁을 실시한 후에, 1970년대에 들어 남부의 민주당원들이 공화당으로 갈아타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공화당은 백인을 중심으로 한 정당, 즉 백인의 집단 정체성을 최우선에 두는 정당으로 변모하였다. 공화당원에게 백인의 인종 정체성이 그렇게 크게 부상한 원인은, 1970년대 이래 미국인의 인종 구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 이민법 개정 이래, 미국인의 인종 구성에서 아시아인과 중남미인의 비중은 갈수록 커진 반면, 유럽계 백인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2040년경이 되면 백인이 미국 인구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 확실하다. 미국은 과거 노예제에 뿌리를 두고 오랫동안 유색인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였으며, 백인들은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삶의 모든 분야에서 유색인보다 우월한 특권을 누렸다. 백인은 숫적으로 자신들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을 일상에서 체감하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는 행태, 즉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사사건건 반대 진영과 대립하는 태도를 취한다. 공화당은 백인의 인종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역사 문화 사회적으로 백인 인종과 연관된 특성인, 남성, 복음주의 기독교 신앙, 도덕적 보수주의,  교외/농촌지역 거주자, 교육수준이 높지 않음, 등이 일관되게 결합된 모습을 띤다.

미국의 정치가 심하게 양극화된데는 미디어의 역할도 한 몫 한다. 케이블 티브와 인터넷이 출현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혹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정치 집단의 의견도 일상적으로 접해야 했다. 자신의 구미에 맞게 미디어를 취사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제한된 숫자의 신문 방송은 가급적 넓은 범위의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회사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심하게 편파적인 의견을 피했으며, 가급적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케이블 티브가 보급되고,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이 출현하면서, 사람들의 미디어 선택의 폭은 엄청나게 넓어졌다. 미디어 회사들은 모든 범위의 고객을 고루 상대하는 것보다, 편파적인 생각을 가진 충성스런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회사의 이익에 부합했다. 그결과 FOX 채널과 같이 지극히 편파적인 미디어가 공화당 지지자를 파고 들었으며, 그보다는 덜 편파적이지만, CNN, MSNBC 등의 채널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선호를 따르는 미디어로 자리매김하였다. 인터넷은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이용자의 성향에 맞는 내용만을 편향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미디어의 편파성 효과가 케이블 티브이보다 훨씬 심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편파적인 미디어만을 접하면서 상대편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없어지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견을 내재화하고 더욱 더 굳건하게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비교해 보면,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훨씬 더 편파적이며, 극단적인 벼랑끝 전략까지 구사하면서 자신의 진영의 우위를 지키려 한다. 민주당은 이념 지형에서 진보에서 중도보수까지를 넓은 범위를 포괄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공화당은 이념 지형에서 보수쪽에 훨씬 치우쳐 있으며, 백인이라는 인종 정체성이 다른 모든 정체성을 압도한다. 이러한 차이는, 백인이 자신들의 인구 수가 줄어 들고 인종적 특권이 축소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현재 공화당과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나 상하원 의원 선거에서 표면적으로는 거의 대등한 점유율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미국의 정치 제도가 심하게 외곡되어 있어서 유권자의 대표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전국민의 60% 이상의 표를 획득하지만, 각 주 당 2명의 상원의원이 할당된 제도 때문에, 주들 사이에 인구 규모의 차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하원 역시 선거구를 공화당의 득표에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조정하여 (gerrymandering), 실제로는 민주당이 훨씬 더 많은 표를 획득하지만, 하원의원 수에서는 절반밖에 획득하지 못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역시 2000년 앨고어와 부시의 선거나, 최근의 클린턴과 트럼프의 선거에서 모두 민주당 후보가 국민의 다수의 표를 획득하였지만, 선거인단이라는 외곡된 제도 때문에 국민의 소수의 표를 획득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백인의 인구 비율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외곡 현상은 더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다. 공화당은 자신의 지지자가 상대적으로 소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극단적인 주장과 벼랑끝 전략을 구사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또한 가급적 투표하기 어렵게 만들어 민주당 지지자들의 투표를 방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저자는 현재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미국 정치를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해 뾰족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양극화된 정치 지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념적으로 정당이 양극화되어 있으면 유권자들은 자신의 의견에 근접한 정당을 더 잘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정강의 정당이 난립하는 정치 지형보다는, 이념적으로 양극화된 정당 구도가 더 낫다고 본다. 양극화 그 자체보다는, 현재 미국의 정치가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즉 국민 주권이 제대로 정치 과정에 반영되지 않는 외곡된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공화당이 저렇게 극단적인 전략을 쓰는 것은, 소수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상대와 합리적인 타협이 불가능한 형국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당이 기존 제도가 제공하는 기득권을 포기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기는 매우 어렵다. 저자는 대신, 미국인들이 중앙 정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정치에 더 관심을 쏟을 것을 제안한다. 사실 지역의 정치가 주민의 이익에 더 가까이 있고, 극단적인 진영 싸움보다는 실용적 타협점을 찾기에 더 용이하다. 사람들이 지역 정치를 통해 실용적인 접근을 하는 습관이 든다면, 중앙 정치도 실용적이 되도록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 바뀔 것이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가 쓴 정치 분석서로는 드물게, 많은 학술 연구를 참고하여 주제를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미국 정치의 양극화와 관련된 논의를 폭넓게 섭렵하는 기회를 얻는다. 다만, 저자가 민주당 지지자이기 때문에, 공화당 지지자라면 혹시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다른 시각에서 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그렇게 양극단으로 쪼개져 있다면, 분명 저자와 반대편에 서있는 공화당 지지자는 민주당 지지자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미국 정치를 볼 것이다. 문제는 학계와 미디어는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데 있다. 체계적인 분석은 지식인의 소관인데, 미국에서 지식인은 거의 대부분이 민주당 지지자이므로, 공화당 지지자이면서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 책을 다 읽으면서, 저자의 분석 역시 편파적인 접근의 산물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떠나지 않았다.

'배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경제학, 이론과 정책  (0) 2024.04.03
자연과 인간에 친근한 건축  (0) 2024.03.20
서구를 중심에 두지 않은 세계사  (1) 2024.03.11
자연의 패턴  (0) 2024.02.19
죽음에 대한 두려움  (0) 2024.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