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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5. 11:37

한동안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 두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이 블로그가 운영자로부터 폐쇄 통지를 받아 한동안 접속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며, 둘째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보니 선뜻 글을 쓸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때문이다. 

블로그 운영자인 '다음'에 알아본 결과 이 블로그가 스패머로 신고되어 폐쇄되었단다. 음란물을 유통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블로그의 스킨에 여러개의 스팸 사이트가 연결되어 있니 스킨을 바꾸고 스팸을 제거하라는 지시이다.  그것도 모르고 이 블로그에 첨부한 글과 사진이 저작권 위반으로 신고되었다고 생각하여 글에 첨부된 파일을 모두 지우겠다고 말했다. 이 블로그에 첨부한 글은 저작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퍼온 것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저작권을 위반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이 매거진의 온라인 판에 공개된 것이고, 영리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번에 블로그가 폐쇄된 것이 저작권 위반 때문은 아니지만 이것을 알면서 계속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제부터는 기사 파일을 첨부하지 않고 링크 주소와 기사의 제목을 붙이는 정도로 해야겠다. 그래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높이고 모양을 보아서라도 첨부하는 쪽으로 타협을 보려고 한다.  

기사 파일은 링크된 주소에서 다운 받을 수있지만 혹시 어려운 경우에는 원문을 요청하는 댓글을 달면 메일로 보내는 방식을 취하려고 한다. 참고로 내가 많이 보는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읽는 방법을 소개한다.  

뉴욕 타임즈는 근래에 온라인 구독을 유료화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료화한지 1년이 지났는데 상당한 수의 유료 독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월 구독료가 20불 남짓으로 큰 돈이 아니기는 하지만, 인터넷이외에도 스마트 폰이나 아이패드로 신문을 읽을 수있게 한 것이 유료 독자를 모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모바일 환경이 신문의 유료 구독률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뉴욕 타임즈를 온라인으로 읽을 경우 한달에 10개의 기사만 무료로 제공되는 제한을 걸어 놓고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 설정에서 방문자 기록과 캐쉬를 삭제하여 초기화할 경우 이러한 제한이 풀리기 때문에, 사실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온라인으로 기사를 읽는데 어려움은 없다. 신문사에서도 이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로그온을 해야만 기사를 읽을 수있게 하면 엄격하게 관리할 수 있지만, 아마도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렇게 운영하는 것 같다. 

내가 두번째로 꼼꼼히 읽는 잡지는 이코노미스트이다. 이것은 일부 기사의 경우 기사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공짜로 보도록 제한을 걸어놓았다. 대체로 흥미있고 심층적인 분석 기사들은 이러한 제한이 걸려있다. 이러한 기사의 전체를 읽으려면 로그인 해야만 한다. 나는 잡지를 구독을 하고 있으므로 기사는 오프라인 상태로 읽고 스크랩의 목적으로만 온라인 사이트에 로그인해서 다운받는다. 이 블로그의 독자 중 전체의 기사를 다운받고 싶은 분은 댓글로 요청하면 내가 저장한 글을 보내주겠다. 

세번째로 꼼꼼히 읽는 잡지는 더 아틀랜틱 몬슬리라는 잡지이다. 이것은 다행히도 아직까지 유료화가 되지 않아서 언제든지 접속이 가능하며 과거의 기사도 검색해서 읽을 수 있다. 

기타 간간히 읽는 것으로, 영국에서 발행하는 가디언이라는 신문은 무료 접속이 가능하며, 타임즈, 하퍼즈 위클리, 뉴욕커, 더리퍼블릭, 더 내이션, 아메리칸 프로스펙트, 휴머니스트 등의 잡지는 모두 로그인을 해야만 기사의 전체를 읽을 수있다. 나는 때때로 사이트에 방문하여 흥미있는 글이 있는지 훑어보고 꼭 전문을 읽고 싶으면 뉴스 데이터 검색 서비스에 접속하여 전문을 다운로드 받는다. 

영미권의 지성지의 경우 한국의 독자층이 넓지 않으므로 좋은 글을 널리 보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은 하지만, 본인이 희망하면 얼마든지 구해서 볼 수있으므로 구지 실정법을 위반하면서까지 블로그를 운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선의로 시작한 일이 제약을 당하는 경험을 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여하간 앞으로도 블로그에 유익한 글을 계속 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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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22:06

최근에 필자가 학술발표를 한 글을 간단히 소개한다. 아직 진행되고 있는 연구로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정도이다. 



 요즈음 한국인에게 “미국을 좋아하는가?” 혹은 “미국을 좋게 생각하는가?” 하고 물으면 한마디로 간단하게 답을 얻기 어렵다. 아마도 1970년대에 이런 질문을 했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별 주저 없이 긍정적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학자들은 1980년 광주항쟁 이래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점차 변하여 이제 전적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데 동의한다.

그렇다고 “미국을 싫어하는가?” 혹은 “미국을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한국인은 많지 않다. 요컨대 요즈음 대다수 한국인은 미국에 대해 ‘그렇게 좋지도 싫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과거에 흔히 거론되던 ‘친미․반미’의 인식틀은 더 이상 한국인에게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인은 미국과 여러 면에서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국의 언론은 항시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따라서 한국인은 미국에 대해 자기 나름의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친미 아니면 반미라는 흑백의 일차원적인 잣대 대신에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을 반영하는 다섯 가지의 차원을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미국을 좋아하는지, 얼마나 미국을 신뢰하는지, 얼마나 미국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얼마나 미국을 경험하였으며 알고 있는지, 미국의 전반적인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이다. 각각의 차원에 대해 별도로 측정해 본 결과 놀랍게도, 한국인은 미국을 어느 정도는 좋아하지만 그리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한국인이 미국을 좋아하는 정도도 그리 높은 것은 아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전체의 4분의 1에 달한다. 미국의 수준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이지만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반면 한국인의 대부분은 미국이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인은 그들의 주장에 별로 동조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생각은 복합적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이지만 그리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대체로 한국 사람들의 생각이다. 한국인은 미국이나 미국인에 대해서도 그리 크게 감정적으로 끌리지 않는다. 미국의 풍요가 부럽기는 하지만 미국의 체제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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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16. 23:02

   2005년 11월 어느 날 미국의 미시간 주에 칼라마주라는 인구 74,000명의 조그만 도시에서 교육감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제부터 이 도시에서 졸업한 고등학생은 누구든지 그 주에 있는 공립 대학교에 진학하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는다. ‘약속’(Promise)라 명명된 이 프로그램에 소요되는 재원은 독지가가 기부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절대 비밀로 한다.

 

NYtimes_FreeCollegeScholarship.hwp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무슨 장난도 아니고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하냐는 부정적인 반응에서부터, 돈이 없어 대학갈 꿈도 꾸지 못했는데 대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에 이르기까지. 교육감이 직접 발표를 했으니 완전 거짓은 아니겠지만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발표를 한 이래 지금까지 7년 동안, 총 2,500명이 대학을 갔으며 3천 5백만 달라 (한화로 약 390억원)의 돈이 장학금으로 지불되었다. 이는 각 학생당 매 학기에 4천 2백 달라(한화로 460만원)가 평균적으로 지원된 것이다. 실제로 약속이 지켜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알아보자. 이곳은 과거에 대표적인 산업도시였다. 한때는 GM 자동차 공장이 있었고, 대규모 제지 공장이 있었고, 업존이라는 제약회사의 큰 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미국의 산업시설이 싼 임금을 찾아서 해외나 남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현재 이 도시에는 이렇다 할 산업 시설이 없다. 공장이 이전하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빈곤과 범죄가 심해졌다. 학교의 질은 형편없어졌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손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미국 중서부의 다른 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퇴락의 운명을 겪었다.

  그 동안 이지역의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서 온갖 처방이 다 동원되었다. 경제 전문가의 처방 중에 안 써본 것이 없었다고 한다. 떠나는 회사를 붙잡기 위해 세금을 깍아 주는 것은 물론, 큰 경기장이나 공원 시설 등 이 도시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토목공사에 이르기까지 소위 ‘경쟁력 강화 위원회’에서 머리를 짜낸 모든 처방을 써보았다. 도시 활성화를 위해 전문가들이 고안한 64가지나 되는 방안을 실행했으나 도시가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면서 공립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대학갈 희망을 안겨주면 빈곤에 찌든 이 도시가 활성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배경이라고 한다. 과거 이 도시의 산업이 활발하던 시절 지역사회를 위한 많은 자선활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전통이 남아 과거에 이곳에서 사업을 일으켜 엄청나게 큰 돈을 번 사람이 지역의 번영을 위해 돈을 내 놓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출발한 ‘스트라이커’ 라는 의료기기 회사의 창업 가족이 돈을 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7년간 390억원을 댔으니 매년 약 55억 정도 지출한 셈이다. 사실 미국 거부의 재산이라면 이 정도의 지출은 감당할 만하다. 이 실험은 현재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교육 부문에서는 단기간에도 눈에 띠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 공립학교 학생의 학업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고등학교 중퇴자 비율이 현저히 감소하고,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이 크게 증가하였다. 교육영역 밖의 효과는 아직은 제한적이다. 인구 감소가 멈추었으며,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지역사회로 조금씩 되돌아오면서 산업이 활성화될 조짐을 보인다. 교육 외의 영역에서는 아직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지 않지만, 교육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으로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므로, 이러한 실험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큰 성과를 거둘 것이 분명하다.

  교육 투자를 통해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아이디어는 참신하다. 지식 경제로 접어들면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소득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고등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은 일할 곳이 사라지는 추세이다.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기술이 없는 사람은 최저임금의 불안정한 일 이외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문제는 최저임금의 일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근로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섣부른 경제 활성화 정책에 돈을 쏟아 붓는 것보다는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묘책인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교 등록금을 공짜로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고등교육에 큰돈을 쓰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세상일에는 다 순서가 있다. 그러나 가난한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면 그들도 대학에 가고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불러 넣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은 이를 실제 실현할 수 있는 사회에서만 사람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다.

  부모를 잘 만나서 누구는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가고 누구는 대학을 꿈도 꾸지 못하는 사회에서 태어난다면, 불리한 쪽에 선 사람은 성공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를 원망하고 돌을 던질 것이다. 살기 좋은 사회란 자신이 어떤 패를 뽑을지 미리 알지 못하면서도 선택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을지. 아무리 소득이 높아지면 무엇 하는가?  

2012. 9. 9. 22:31

  북유럽은 정말 흥미롭다. 나만 아니라 미국인이나 유럽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 세계에서 가장 삶의 질이 높은 나라, 부패가 없고 투명한 나라, 삶의 위험을 국가가 보장해 주는 복지국가 모델을 실현한 나라, 국민의 정치 참여가 높은 나라, 소득의 거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고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이 공무원인 나라,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 극빈자가 없고 범죄율이 낮은 나라, 부유하며 일하는 시간이 적은 나라, 기술과 산업이 고도로 발달된 나라,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갈등이 없으며 모든 문제를 협의하여 가장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나라,  세련된 디자인과 높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나라, 남녀 평등의 수준이 최고인 나라, 자연이 매우 아름다우며 인구밀도가 낮아 공간이 풍부한 나라,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하는 나라, 노벨상을 제정한 나라.


Economist_BloodyScandinavians.hwp


  이렇게 말하면 이 나라의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90년대 초반 극심한 경제 불황을 겪었으며, 근래에 이 나라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으며, 실업률이 올라가고 복지 혜택이 축소되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으며, 사람들이 무뚝뚝하며, 무엇보다 겨울이 길고 혹독하다. 핀란드는 자살율이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높다. 노르웨이의 해저 유전을 제외한다면 자연자원도 별로 없다. 노르웨이의 물가는 또 얼마나 비싼가? 방문자들 마다 거의 두배에 가까운 생필품 가격에  깜짝 놀란다. 근래에 노르웨이에서는 외국인을 배척하는 극단주의자가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북유럽은 미국보다는 한 단계 앞서 발전한 사회인 것 같다.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을 선두로 신보수주의가 출현하면서 적자생존의 냉혹한 경쟁 사회가 출현하였다. 경제의 효율성은 높아졌으나 불평등이 확대되면서 능력이 없거나 실패한 사람은 좌절 속에서 사회에 돌을 던지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엄청난 부가 창출되기는 하였으나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빈곤은 확대되었다. 모두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든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대신 남과 경쟁해서 내가 더 잘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로 남았다.

  반면 북유럽 사회는 노동자의 세력이 자본가 못지않게 크기에, 사회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협의하여 문제를 풀어가는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하였다. 기업의 의사 결정권이 자본가의 위임을 받은 경영자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주인으로서 기업 경영에 함께 참여하는 경제민주주의가 실시되고 있다. 기업이 어려움에 빠지면 자본가와 노동자가 문제를 해결해 가는 노력을 함께 하고 희생을 분담하는 그런 경제체제이다. 영미식 자본주의에서 보면 참으로 이상한 사회이다.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니 말이 되는가? 그렇게 하여서 어떻게 다른 기업과 경쟁하여 이기며, 새로운 혁신이 도입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실제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이 많으며, 창의성이 높이 발휘되며, 엄청난 부가 만들어지고 있다. 북유럽은 인구도 많지 않은데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놀랍다. 스웨덴의 인구는 천만명에 불과하며, 이웃 노르웨이나 핀란드는 오백만명을 넘어서지 않는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이러한 북유럽의 독특한 사회체제에 더하여, 북유럽의 예술적 독창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북유럽은 예술적 독창성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아바(ABBA) 같이 독창적인 음악을 가지고 세계를 석권한 것은 그곳의 풍부한 음악적 토양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뭉크의 독창적 미술 또한 역시 그러하다. 추리소설의 분야에서도 북유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연이어 만들어 내고 있다. 북유럽의 독특한 풍토를 배경으로 하여 이야기를 정교하게 풀어가는 솜씨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북유럽은 범죄율이 낮고 북유럽 사람들은 전혀 공격적이지 않은데 범죄에 대한 상상력만은 걸출하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미국과 같이 총을 난사하는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도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고, 도심의 슬럼에 범죄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지능적인 범죄보다는 액션 영화에서 흔히 보는 무자비한 폭력 사건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북유럽처럼 범죄가 드물고, 조용하고, 개성을 존중하고, 세련된 사회에서는 범죄를 모의한다면 총을 휘두르는 그런 것보다는 고도의 지능적 플롯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저지를 것 같다. 그런 사회는 독창적이고 지능적인 범죄를 상상할 사회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북유럽에서 액션 영화가 제작되지 않듯이, 미국에서는 지능적인 추리소설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세계화가 되면 흔히 세계가 유사해 진다고 말한다. 유사한 미디어에 노출되고, 유사한 제품을 사용하고, 생각하는 방식이나 생활양식이 유사해지고, 등등.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부만 사실이다. 북유럽의 추리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북유럽 특유의 분위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지역적인 특색을 살렸기에 세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풍요로울수록 새로운 것을 찾는 욕구가 강하다. 굳이 오지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자신이 사는 곳과는 다른 자연환경과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세계화가 되어도 지역의 독특성은 여전히 보존할 가치가 있다. 사람들이 지역 고유의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때문이다. 지역 고유의 것에서 독창성이 나온다. 

  우리나라 사람은 흔히 미국을 본받아야 할 최고의 모범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지식인은 걸핏하면 미국에서는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을 따를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자연 조건과 사회적 배경이 너무나도 다르다. 미국은 자연자원이 풍부하며 이민자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사회이다. 미국 사회는 장점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약점도 많다. 미국 경제의 활기는 세계의 부러움을 사지만, 반면 높은 불평등과 빈곤과 범죄와 인종차별은 결코 배울 것이 못된다. 북유럽을 보면서 미국보다 이곳에서 배울 점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북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람 이외에 특별한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독창성을 북돋우는 북유럽의 토양을 배워와야 한다.  

2012. 9. 9. 21:05

   사진을 보고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40마일 (약 60킬로미터)을 차로 운전해서 가는데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특별히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나이지리아의 항구 도시 라고스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이란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Atlantic_TrafficJam.hwp


 


  근래에 아프리카는 아시아에 뒤이어 떠오르는 지역으로 주목받는다.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이 차례로 개발되면서 임금이 더 싼 아프리카 지역으로 생산 기반을 옮기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봉재업과 같이 저임금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업종은 아프리카에 엄청난 규모의 싼 노동력에 군침을 흘린다. 과거 이 나라들은 정치가 불안정하고, 도로나 항만, 에너지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이 축적되지 않아서 아무리 임금이 싸도 기업 활동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프리카 일부 나라들의 정치가 조금 안정되는 기미를 보이고, 아프리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중국이 과감하게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하면서 아프리카가 산업화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 결과는 사진에서 보는 엄청난 무질서와 교통 체증이다.

 

  엄청난 교통 체증은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부패에 주로 기인한다. 자원 개발의 이익을 독점한 독재 정부가 국민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의 보조금을 풀어 기름 값을 터무니없이 낮추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차를 소유하는 열풍이 불었다. 도로는 크게 늘지 않는데 차량이 갑자기 증가하니 교통체증은 당연지사. 산업화가 시작되어 물동량이 많아지면 철도와 대중교통을 확충하여야 하나 이 또한 정치적 부패로 지연되고 있다. 정권을 장악한 부족이 트럭 비즈니스를 독점하고 있는데, 이들이 철도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행태는 참으로 후진적이고 한심하다. 정치가 부패해서 뻔히 필요한 투자를 가로막고 경제 개발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그러니 가난하지’라고 혀를 찰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를 생각해 본다. 한 나라의 교통 사정은 정부의 부패 정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정치와 사회가 부패하면 교통 사정도 엉망이다.

 

  세계에서 가장 청렴하다는 스웨덴의 교통 사고율은 세계에서 최저이다. 스톡홀름이나 북구의 다른 도시의 교통 사정은 뉴욕이나 워싱턴과는 비교가 안 되게 좋다. 대중교통이 잘 발달해 있으며 자전거 이용도 활성화되어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부패의 정도가 높으며 교통 체증이 심하고 교통 사고율도 매우 높다.

 

  왜 정치가 부패하면 교통 체증이 심하고 교통사고가 많을까? 부패한 나라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자신의 고급차를 사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도 도로를 개선하고 대중교통을 확충하기 위해 세금을 더 내는 데에는 인색하다. 부패한 나라에서 힘 있는 사람은 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 데, 그 결과 힘없는 사람 또한 질서를 잘 지키려 하지 않기에 공공질서가 허물어진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라에서는 트럭 운전수들이 고속도로에 차를 주차해 놓아서 고속도로를 저속도로로 만들었다고 한다. 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두가 손해 보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후진국인 것이다. 또한 정치인이 기업과 결탁하여 차를 많이 팔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보통 사람의 교통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데에는 소홀하다. 힘 있는 사람들이 고급차를 사서 과시하면, 보통 사람들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너도 나도 차를 사서 끌고 다닌다.

 

  우리나라에서 운전을 하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 우격다짐으로 끼어들고, 차선을 마구 바꾸고, 교차로에서 꼬리 물기를 하여 진로를 가로막고,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막히고. 상대를 앞질러 나만 살면 된다는 초경쟁사회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힘 있는 사람들은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의 뒷좌석 앉아 여유 있게 가기에 교통 체증이 남의 나라 일일게다.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직접 운전을 해야 한다면, 아마도 한국의 도로 사정과 대중교통은 현재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일 것이다. 

2012. 9. 4. 23:01

  요즈음 미국에서 여대생이 남자를 사귀는 방식에 변화가 있다고 한다. 미국 여대생들은 남성과 가볍게 사귀며 즐기다 쿨하게 헤어지고 싶어 한다. 과거에는 사정이 달랐다. 여성이 남자와 만나면서 결혼으로 이어질 것을 염두에 두었다. 과거에는 자신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남성과 만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요즈음 여대생들은 이런 만남을 부담스러워 하고 기피하기까지 한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Atlantic_HookupCulture.hwp





  이유인즉 근래의 여대생들은 남성과 비슷한 방식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들은 일의 세계에서 성공하는데 삶의 우선순위를 둔다. 일의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냉혹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자질을 키워야 한다.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고, 대인 기술을 익히고 인맥을 쌓기 위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많은 모임에 참여하며, 일에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에라도 기꺼이 가며, 일을 위해서는 가족생활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 직장에서 성공한 남자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여대생들이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해서 성공하기 위해 남자들의 삶의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내동댕이 친 여성의 미덕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기 보다는 감추며,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물러서서 기다리며, 사회적으로 닳고 닳기보다는 때묻지 않은 순진함을 지키며, 무엇보다 너무 똑똑해지지 않으며...  여성적인 삶이란 일보다는 가정을 더 소중히 하고,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을 삶의 최고의 낙으로 삼으며, 남편을 잘 뒷바라지 하며, 경쟁보다는 양보와 희생을 택하며, 나의 이익을 생각하기 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등등. 이렇게 한다면 과연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잘 할 수 있을까? 요즈음 여성들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과거에 여성은 남편을 잘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여성은 남자와 만날 때 상대가 자신을 고생시키지 않고 잘 부양할 수 있을지 면밀히 살핀다. 능력 있는 상대가 자신과 결혼하도록 하는 데 모든 정력을 쏟아 붓는다. 여성은 남성의 심리를 조정하여 자신을 좋아하도록 내지 자신에게 걸려들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너무 헤퍼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튕겨서는 더욱 안된다.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응해 줄듯 줄듯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주지 않는 줄타기 묘기를 구사해야 한다. 상대가 능력이 없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버려야 한다. 더 좋은 패를 찾아서. 정말 힘든 일이다. 한번의 잘 못된 판단이 일생을 망칠 수도 있다. 결혼한 많은 여성은 이런 시간을 다시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50대의 안정된 삶을 누리는 어떤 여성이 혼돈과 불안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 이해할만 하다. 남녀관계가 삶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과거 젊은 여성들에게 남녀관계를  잘 푸는 것은 삶의 전부였다.   

   요즈음 미국 여대생들은 여성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여성도 직업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자신을 부양할 수 있고, 여성에게도 어떤 일을 하는지가 남성 못지않게 중요해지면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의존 성향은 점차 사라져 간다. 대신 여성 역시 남성과 마찬가지로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신중히 관리하고, 자신의 시장 가치를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예전처럼 여성이 남성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붓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남녀관계는 더이상 여대생들의 삶의 전부가 아니다. 

   한 남성에게 일찌감치 자신을 몰빵하며 연애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남자들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혼하자고 하고, 결혼하면 가사와 자녀 양육의 부담을 자신에게 덤탱이 씌우고,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꽃 피워보기도 전에 좌절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잠재력을, 자신의 기회를 시험해 보기도 전에 아이를 낳고 주저 않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조심한다. 자신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기반을 닦을 때까지는 남성의 진지한 사랑을 사절한다. 아무리 훌륭한 남성을 만나도 그의 성공은 그의 것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훌륭한 남성을 만나는 것을 서두르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훌륭해져야 훌륭한 남성과 만날 수있고, 그와 결혼하게 되어도 오래 함께 지낼 수있기때문이다. 자신이 그에 못미치면 죽어 살아야 하거나 혹은 버림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여대생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데 힘을 기울인다.  결혼해도 언제 이혼하자는 말이 나올지 모르기때문이다. 훌륭한 남성을 낚아채는 것이 게임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안다. 

   그렇다고 남성을 멀리한다는 말은 아니다. 대신 다양한 남성들을 가볍게 만나서 즐기면서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대인 관계의 기술을 습득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다. 남자건 여자건 사람을 많이 만나 봐야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느는 것이다. 일찍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지 않고, 자신이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남자의 마음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여러 남자를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피차 상처받지 않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을 테니까.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은 애시당초 없으니 적절한 상대를 만나면 성적인 즐거움을 사양할 이유도 없다. 애를 가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결혼까지는 아직 멀었으니 젊은 시절을 함께 즐기는 것이다.  

   상대와 만나면서 헤어질 것을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영악한 행위라고 비난할 수 있다. 자신의 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지켜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한들, 애틋하고 순진한 사랑을 모르면 세상 헛사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다. 여러 남자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여성은 아무도 자신의 것으로 차지할 수 없을 거라고  조언할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그런 여성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남성들은 순진하고 나만 바라보고 사는 여성 쪽으로 마음이 흐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어쨌든, 내가 여자라면 영악하고 쿨한 삶을 택하겠다. 사회적으로 능력있는 여성이 순진한 여성보다는 함께 일하기 좋고, 말도 잘 통하고, 어려울 때 도움도 청할 수 있다. 그런 여성이 함께 일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나와 인생길을 함께 할 동반자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순진한 쑥맥의 여성을 찾는 남성은 아마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아내를 일생 혼자서 벌어 먹여살리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외로운 남성의 길을 가야 한다.  

   한국은 여성에게 사회적인 참여의 기회가 공평하게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에게 의존하는 전략이 더 행복하게 사는 길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여성에게 그리 행복한 사회는 아니다. 남성은 활개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여성은 다소곳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일제 시대에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이 혼자서 빈곤에 허덕이다가 길거리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그녀는 시대를 너무 앞서 갔다. 남성에 의지해서 사는 삶을 거부했기에 어떤 남성도 그녀를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여성이 혼자 벌어먹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말이다. 

   미국 여대생들의 변화된 남녀교제 방식은 직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성의 문제에서도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가 돌아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1970년대 여성해방 운동의 열매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조용히 결실을 맺고 있다.  

2012. 8. 26. 22:41

  오늘 감동적인 글을 읽었다. 아틀랜틱 몬슬리 9월호에 나온 “Fear of a Black President"라는 제목의 글이다. 미국에서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흑인의 분노와, 흑인에 대한 백인의 공포는 동전의 양면이다. 노예제에 뿌리를 둔 흑인에 대한 백인의 비인간적인 차별은 미국 사회의 곳곳에서 여전히 감지된다. 흑인은 근본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종주의는 많은 백인의 머릿속에 또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흑인들은 좌절과 분노로 자신을 파괴하는 한편, 범죄로서 주류의 질서에 저항한다. 백인은 흑인을 두려워하며 가급적 멀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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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인종주의 사회에서 2008년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인데다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서 다른 선택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인 아들 부시의 오랜 실정과 경제 위기가 공화당의 계속된 집권을 어렵게 했으며, 민주당의 예비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역시 여성인데다 전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점이 사람들을 머뭇거리게 했다. 인종주의 사회에서 소수 인종인 흑인이 다수의 지지를 얻어 지도자로 선출된 것은 정말 닥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 사회는 초유의 사태에 한동안 어리둥절하였다. 흑인을 자신의 지도자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많은 미국인들은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거나 혹은 이슬람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그를 부정하려고 하였다. 공화당은 오바마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 반대로 일관하여 그의 정부가 실패로 끝나기를 바랐다.

  흑인은 백인에 대해 가슴속 깊이 분노를 품고 산다. 오바마는 흑인이다. 오바마는 이러한 분노를 어떻게 삭혔을까? 오바마는 영민한 사람이다. 백인에 대한 흑인의 분노의 감정을 절대 밖으로 표출해서는 안된다는 것, 존재 자체를 백인 주류사회에 눈치 채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안다. 흑인의 분노의 감정이 담긴 것으로 해석되게 오해되는 발언이나 행동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엄청난 비난과 반발이 퍼부어질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다른 어느 대통령보다 인종에 대한 언급을 가장 적게 한 대통령이다. 백인이라면 특별히 인종적인 함의가 있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을 발언도 흑인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오바마는 대통령이기에 앞서 흑인이다. 백인에게 오바마의 발언과 행동은 흑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의심받기 쉽다.  그러한 의심은 여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그러한 발언을 한 취지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오바마는 이러한 오해가 발생할 소지가 있을 때에는 자존심을 굽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전에 하바드 대학교의 흑인 교수가 자신의 집 앞에서 백인 경찰에게 가택 침입죄로 체포되었다. 열쇠를 집에 놓고 나와 문을 억지로 따려고 씨름하고 있을 때 지나치던 경관이 다가왔다. 그가 자신의 교수 신분증을 보이고 이곳에 오래 산 사람임을 거듭 말했으나 경찰이 이를 무시하고 그들 연행하여 경찰서에서 하루 밤을 재우고 풀어준 것이다. 그가 백인이었다면 아마도 경찰이 그의 학교나 이웃에 확인하여 웃고 지나갔을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러한 경찰의 행동이 지나친 치안 행위라고 언급했다. 정부의 책임자로서 그의 발언은 지극히 온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백인 경관은 기자들을 향하여 자신은 조금도 잘 못한 것이 없다고 발언하여 사실상 오바마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오바마 대통령은 그 경관이 자신의 말을 오해했다고 굽히고 들어갔고, 백악관에 경찰과 교수를 초청하여 맥주잔을 건네면서 화해를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당시 의료보험 개혁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상황에서 여론이 인종 문제로 들끓어 올랐을 때 기꺼이 자신을 굽힘으로서 논란이 사그라들기를 바랐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책에서 인종주의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받고 좌절과 분노의 나날을 보냈던가를 솔직히 썼다. 대통령이 된 지금도 흑인으로서의 쓰라린 기억을 가끔씩 노출한다. 예컨대 최근에 플로리다에서 후드티를 입은 트레이본 마틴이란 순진한 청년이 경관의 추격을 받아 총 맞아 죽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손에는 스키틀이라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탕과 아이스티만 들려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만일 아들이 있었다면 그도 트레이본처럼 보였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흑인으로서 쓰라린 감정의 정곡을 찌르는 발언아닌가?

  오바마 대통령은 백인의 인종주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미국의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우회 전략을 취한다. 미국의 어려운 사람 중에 흑인이 상대적으로 더 많으므로 이는 결국 흑인에게 혜택이 더 돌아간다. 이러한 인종 중립적인 정책을 추진함으로서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흑인을 특별히 우대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그가 추진한 의료개혁의 주요 내용인, 모든 미국인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은 의료보험을 누리고 있는 중류층 백인보다는 지금까지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가난한 흑인들에게 더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정책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고 하는 데에는 인종주의적 의도도 바탕에 깔려있다. 

  흑인은 근본적으로 열악하다는 인종주의를 깨는 효과적인 전략은 그렇지 않은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음으로서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증인이 될 수 있다. 그가 미국사회의 인종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음에도 그의 존재 자체가 인종주의를 무너뜨리는 증거로 작용하고 있음을 잘 알기에 그는 누구보다 인종주의적 갈등이 촉발되어 일을 망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인종주의적 백인 또한 이를 잘 알기에, 그의 발언이나 행동이나 그의 정책에서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가 실패한 대통령이 되면 오랫 옛날 노예제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종주의가 옮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백인 인종주의자들은 흑인은 선천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지도자가 될 수없으며, 설사 잘못되어 지도자로 선출되었더라도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음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인종 문제에 직접 간여하면 그들의 계책에 말려들어 일이 잘 못될 가능성이 높다.  바로 그것을 오바마 대통령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과거에 오바마 대통령의 자서전 “Dreams from my father"을 읽을 때의 감동이 몰려왔다. 오바마는 지혜로우며 용감한 사람이다. 진실로 위대한 사람을 찾기 힘든 오늘날 그는 나에게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으로 새삼 우러러 보인다. 역사도 그를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2012. 8. 24. 21:30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50대 중반이 되면서 직업 전선에서 물러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창 일할 연령인 25세에서 54세 사이에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1970년대까지 95%를 넘었으나, 198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 상황이 바뀌면서 이 비율이 급격히 감소하여 근래에는 80%후반에 머물고 있다. 경제활동 참가율이란 해당 연령대의 인구 전체 중에서 일을 할 능력이 있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의 비율을 의미한다. 일할 능력은 있으나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구직을 포기한 사람은 경제활동인구에서 제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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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대 후반 남성들이 근래에 경제활동에서 더 많이 퇴장하는 데에는 구조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기술 변화가 급속하여 낡은 기술을 가진 중년을 직장에서 선호하지 않는데다,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하여 연공서열을 쌓아 높은 임금을 누리던 남성 근로자들은 싼 임금을 찾아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해고 되었을 때, 주변에 싼 임금을 주는 서비스 직종에서 새로이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쌍용 자동차에서 강제 해고된 사람들이 시급 오천원의 임시직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의 아내들이 과거보다 더 많이 경제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다. 미국에서 기혼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상승하여 연령대에 따라서는 70%를 넘어섰다. 과거에는 남성이 밥을 벌어 와야 한다는 압력이 대단하여 직장이 열악하더라도 어떻게든 참고 다녔으나, 부인이 돈을 벌어온다면 남성은 실직을 해도 한숨 놓고 과거에 일하던 수준의 보수에 걸 맞는 직장을 알아볼 뿐 열악한 일자리를 찾아 고생하려고 하지 한다.

  50대에 일자리를 벗어난 중년 남성들은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일찍 일에서 은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모든 은퇴한 남성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하루를 지내고 있지는 않다. 뉴욕 타임즈 매거진에 소개한 사례는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로 보인다. 집에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제일 많다. 과거보다 잠을 많이 잔다. 일을 할 때는 평일에 8시간 이하로 자던 사람들이 은퇴하고 나서는 9시간 이상 잔다. 텔레비전의 시청시간이 눈에 띠게 늘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취미활동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음악을 좋아 하던 사람은 하루에 많은 시간을 음악을 들으며 보내고, 악기를 좋아 하던 사람은 매일 악기 연습에 많은 시간을 쓰고 때때로 동호회 연주 모임에도 나간다. 일을 하지 않으면서 책을 많이 읽게 된 사람도 있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것을 새로이 배우거나 해보는 사람도 많다.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새로운 악기를 배우는 사람이 많으며 교양 강좌를 듣고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사실 50대 후반 60대 초반의 나이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왕성한 나이이므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만 아니라면 자신이 해보고 싶은 것을 더 늦기 전에 시도해보고 갈 때까지 가보고 싶은 때이다.

  사실 은퇴라는 것이 경제적인 어려움만 아니라면 해볼 만하다. 그러나 현실은 50대 중반에 은퇴하면 나쁜 점이 훨씬 많다. 경제적 어려움은 시간이 가면서 가중된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라면 30년 이상 근로 소득 없이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을 멈추면 미국에서는 처음에 실업 수당이 나오고 몸이 아프게 되면서 장애 수당을 받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미래에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걱정 때문에 사기에 걸려드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 압박 때문에 과거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열악한 조건에서 일을 하는 중년 남성이 점차 늘어난다.

  경제활동에서 은퇴하기에는 50대 중반이 이른 나이이므로 경제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압력을 많이 받는다. 일을 해야 할 나이에 일을 하지 않으면 놀고먹는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덮어씌워 지면서 자긍심을 훼손당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으며 주위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기생충 취급한다면 계속 살아야 할 가치를 부정당하게 된다. 남성의 경우 놀고먹는다는 자아 이미지는 견디기 힘들기에 사회생활이 움츠러들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쉽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정신적으로 피폐해 지면 오랜 세월 함께 하던 주위사람들, 특히 자신의 배우자 마져 떠나게 된다. 

  사실 누구나 직장생활이 힘들기에 빨리 은퇴할 나이가 되어 마음 편히 놀고먹는 생활을 기다리는 마음이 굴뚝같다. 문제는 사회에서 인정하는 은퇴 연령이 점점 뒤로 늦추어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십년 전만해도 경제활동연령은 59세에 종료되고 60세 부터는 노인, 즉 사회적으로 당당하게 은퇴 생활을 해도 되었다. 현재 64세까지로 되어 있는 경제생활연령은 조만간 뒤로 늦추어 질 것이 분명하다. 근래 여론조사에서 70세부터 노인이 시작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라 하며, 건강 상태로 볼 때 70세까지는 일하는 데 크게 지장이 없다고 하니 경제활동 연령이 69세로 늦추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 지금 대로라면 연금 재정이 파탄날 것이 분명하기에 연금 개시 연령도 뒤로 늦추어 질 것이 분명하니 50대에 은퇴하기는 글렀다. 마음 편히 놀고먹을 수 있는 날이 훨씬 뒤로 늦추어 지는 것이다. 무엇을 하건 필사적으로 일하면서 최소한 60대 초반까지는 버티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50대 중반에 은퇴하여 조금 먹더라도 여유자적하며 살고 싶지만 꿈같은 이야기이다. 직장 생활에 쫒기지만 않는다면 더 뜻있게 삶을 살 수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2012. 8. 23. 11:21

미국 대통령 선거는 우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모든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다. 아직 몇 달 더 남아 있어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의 공화당은 미국의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어 합리적인 논리보다는 감정으로 미국인의 정체성에 호소하는 부분이 있으며, 공화당과 미국의 기득권층과의 결합은 매우 공고하기에 선거때 큰 힘을 발휘한다. 돌발 사태가 발생할 때 미국인의 감정에 호소하고 기득권층의 여론조작과 돈의 힘이 작용하여 짧은 시일내에 쏠림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이라 찜찜해 하는 미국인이 많이 있기에 오바마 대통령의 권력 기반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훨씬 취약하다. 2000년과 2004년에 부시 대통령이 당선과 재선될 때 외부인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가 그렇게 지지를 획득하리라 예상하기 어려우나 그의 스타일과 지지 배경은 미국인에게 상당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그 반작용으로 흑인인 바락 오바마가 2008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부시에게 주었던 비합리적인 애정과 그가 망쳐 놓은 경제 때문에 다수의 미국인은 정말 하기 힘든 선택을 했던 것이다.  


오늘 경향신문에 "미국 대선, 공화당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임원혁(KDI  국제대학원교수) 교수가 쓴 글이 경제적 측면에서 현재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기에 다음에 전문을 소개한다. 그러나 그가 '공화당의 근본적인 한계'라고 지적한 부분은 미국 정치에서 작용하는  '공화당의 괴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기에 약간은 한계가 있다.  


<미국 대선, 공화당의 한계>, 임원혁, 경향신문 2012년 8월 23일.


오는 11월6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를 공식 선출하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다음 주와 그 다음 주에 열린다. 주 단위로 실시되는 미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총 538명의 선거인단 중 270명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주별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대선 결과를 예측하는 웹사이트(www.electoral-vote.com)에 따르면, 8월21일 현재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는 284표, 공화당의 미트 롬니 후보는 241표, 무승부는 13표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실업률이 8%를 상회하여 사회적 불만이 쌓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자인 오바마 후보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롬니 후보의 개인적인 문제와 미국 공화당의 근본적인 한계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 전략을 구상할 당시 롬니 후보는 본인이 민간 CEO와 매사추세츠 주지사로서 올린 성과를 내세우면서, 경제·사회·외교 부문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저지른 실정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이와 같은 대선 전략에 따라 롬니 후보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4년이 넘고 대규모 부양책이 시행되었음에도 경기 회복이 지지부진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이 보편적 의료보험을 확립한다는 명분하에 의료보험 매입을 의무화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침해했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눈치를 보면서 저자세 외교를 구사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선 전략은 사실관계에 배치될 뿐 아니라 롬니 후보와 공화당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키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우선 롬니 후보가 내세웠던 민간 CEO 경험은 주로 기업 인수·매각에 관한 것으로, 향후 미국 경제를 재건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즉, 사모투자회사에는 좋을지 몰라도 국민경제에 과연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롬니 후보가 현재까지 공개한 납세신고 기록에 따르면, 2009년과 2010년 근로실적이 없는데도 소득이 4200만달러에 달하고, 스위스 은행계좌를 보유하고 있으며, 실효 세율이 13.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월가 점령 운동 등을 통해 금융계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불만이 분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롬니 후보의 CEO 경력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사실관계 차원에서 보더라도 글로벌 금융위기는 공화당 부시 행정부 당시의 잘못된 정책에 기인한 바 컸고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공화당은 재정 정책과 관련하여 딴죽을 걸었기 때문에 현재의 경기 부진을 오바마 행정부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맞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미 대법원에서 판결한 바와 같이 의료보험 매입 의무 조항은 세금과 마찬가지로 공공정책 차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롬니 후보는 매사추세츠 주지사로 재임할 당시 이와 유사한 보편적 의료보험 제도를 선구적으로 도입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더욱 할 말이 없다. 외교·안보분야를 봐도 오바마 행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에서 벗어나 외국의 입장을 존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사마 빈 라덴 사살까지 감행한 행정부를 허약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처럼 원래 구상한 대선전략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롬니 후보는 하원 예산위원장으로서 작은 정부를 주창하여 보수층의 총애를 받고 있는 폴 라이언 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지지층을 결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폴 라이언 의원이 제시한 감세와 재정지출 개혁안은 고소득층에게는 큰 혜택을 주지만 중산층과 서민에게는 상당한 타격을 주는 방향으로 되어 있어 그 세부 내용이 알려지면 일반 유권자의 반발을 초래할 것이다. 즉, 롬니 후보가 본인의 선명성을 입증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잠재적 자충수인 것이다. 이처럼 롬니 후보와 공화당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에 유로존 위기의 심화 등 돌발변수가 없는 한 2012년 미 대선은 오바마 후보의 승리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2012. 8. 18. 21:38

  운을 타고난 사람은 어떻게 해도 잘 된다고 했던가? 근래에 미국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새로운 종류의 천연가스가 엄청나게 많이 매장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쉐일 가스”(shale gas)라고 부르는 것으로 지하 수 킬로미터의 암반 사이에 고여 있는 천연 가스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매장량을 추정하는 것조차 어려웠고 이를 지상으로 끌어내는 기술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수년전에 ‘프래킹’(Fracking)이라는 새로운 채굴 기술이 미국에서 개발되면서 새로운 자원의 보고가 열리게 되었다. 프래킹이란 지하 수 킬로 미터를 수직으로 파이프를 박은 다시 수평으로 구멍을 뚫고 들어가 물의 압력을 이용해서 쉐일 가스를 품고 있는 바위를 부순뒤 가스를 뽑아내는 기술이다.


Economist_NaturalGas.hwp





현재 세계의 주에너지원은 화석 연료이다. 석탄과 석유가 주를 차지하며 핵 에너지가 다음을 차지한다. 천연 가스는 매장량이 많지 않고 취급하기 어렵기에 제한적으로만 사용된다. 쉐일 가스의 발견으로 천연 가스가 주요 에너지원으로 새로이 등장 할 수도 있다. 현재 사용되는 매장량이 많지 않고 호주, 인도네시아, 중동, 시베리아 혹은 북해 바다 밑 등에서 주로 생산되어 에너지를 소비하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다. 채굴 비용에 비하여 운송에 들어가는 비용이 훨씬 높으며 폭발의 위험도 높다. 새로운 종류의 천연가스인 쉐일 가스는 현재 알려진 매장량만 기존의 천연가스의 수십배에 달하며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나라에 많이 매장되어 있다. 미국과 중국에 특히 많이 매장되어 있는데 이 나라는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다.

석유에 주로 의존하는 미국은 이러한 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으로 흥분에 들떠있다. 현재 쉐일 가스를 채굴하고 있는 몬태나의 작은 마을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임시 숙소가 사방에 들어서며 생필품의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마치 과거에 금광붐이 불었을 때처럼 말이다. 미국에서도 아직은 쉐일 가스를 채굴하는 초기단계이지만, 조만간 이 가스가 많이 매장된 중서부나 서남부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가스를 채굴하면 주변 산업단지에서 이 가스를 많이 소비할 것이다.

가스는 석유와는 달리 운송비용이 매우 많이 든다. 그러나 쉐일 가스를 액체 상태로 하여 파이프를 통해 육상 운송할 경우 비용을 현저히 낮출 수 있다. 수년내 쉐일 가스의 채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 미국의 에너지 비용이 현재의 절반 이하로 낮아질 수 있다. 값싼 에너지를 이용하며 미국의 제조업이 다시 부흥할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일본 중국 다음으로 천연가스를 많이 수입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쉐일 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미국이 강대국이 된 것이 풍요로운 자연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천연자원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고 온화한 기후에 경작 가능한 토지가 매우 넓고 인구 밀도가 낮은 것이 미국인이 잘 살게 된 주원인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재화가 토지임을 생각한다면 미국의 강점은 명확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다른 어느 곳보다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로 이민을 가고 싶어 하며, 몽골의 끝없는 평원을 보고 흥분한다. 유럽계 이민자들은 북미 대륙에 건너와 원주민을 몰살하고 그곳을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축복을 내린 땅이고 자신을 하느님의 선택받은 자라고 굳게 믿었다. 아직까지는 그들의 믿음이 계속 실현되고 있는 듯하다. 미국인이 유럽인보다 특별히 신앙심이 강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라는 말은 부정의한 세계에 대해 사람들이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란 생각도 든다. 

미국을 관찰하다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헐벗은 나라임을 새삼 깨닫는다. 미국과 같이 끝 모르게 풍부한 자원을 캐내면서 흥청망청 살아가도록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적 자원'을 잘 개발하고 활용하고 있는가?  저출산 타령만 하면서 여성들을 하릴 없이 집에 묵히고, 사람들을 젊은 나이에 은퇴하도록 하고, 경쟁에서 탈락하면 매몰차게 저버리는 우리 사회는 아직 갈길이 멀다.   

 

2012. 8. 16. 11:51

  오바마 대통령은 여러 가지로 특이한 경력의 정치인이다. 인종주의가 만연한 미국에서 흑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기적적인 일이지만, 빈곤 운동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도 특이하다. 미국의 대통령은 대체로 중상류 출신으로 고상한 경력을 통해서 성장하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시카고의 빈곤지역에서 빈민을 상대로 빈곤퇴치를 위한 조직 활동을 하였다. 그는 현장 활동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껴 정치적인 힘을 키워서 빈곤 문제를 퇴치하겠다는 꿈을 품고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의 성장 배경을 볼 때,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겉보기에 온건하지만 그의 속내는 매우 진보적일 것이다.

 

NYtimes_ObamaVsPoverty.hwp




미국은 일인당 5만불을 넘는 고소득 국가이지만, 추악한 빈곤 문제를 안고 있다. 중위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극빈층이 전체 인구의 6.7%에 달하며, 특히 아동 빈곤 비율은 20%를 넘고 있다. 어린이 다섯 명 중 한명은 빈곤한 가정에서 생활한다. 미국 대도시의 도심에는 대낮에도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한 극빈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빈곤과 항시 함께 따라오는 범죄는 선진국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높은 수준이다.

 

문제는 이렇게 심각한 빈곤 현실이 근래로 오면서 미국 사회와 정치권에서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빈곤은 정치권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싶어 하지 않는 문제이다. 빈곤은 뿌리가 깊기 때문에 해결하기가 어려우며, 어설프게 접근해서는 빛도 나지 않고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쉽기에 정치인들은 빈곤문제에 피상적인 립서비스 수준으로만 접근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선거 유세 때 노점상에서 오뎅을 먹는 사진을 찍고는 그만인 식이다. 또한 중상류층의 정치적 관심은 높은 반면 빈곤층은 투표에 참가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관심은 빈곤층보다 중상류층의 삶에 더 집중된다.


빈곤은 대물림된다. 어떤 사람이 빈곤한 이유는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돈벌이 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질 수 없으며, 영양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저항력이 낮아 쉽게 병에 걸리며, 먹고살기 위해 아파도 무리를 하기 때문에 계속 참고 일을 하다보면 더 심각하게 병에 걸려 돈을 벌지 못하고 약값과 병원비로 지출만 늘게 된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못 받는 이유는 집안이 공부할 환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중류층 가정의 아이들과 경쟁에서 밀리고 학교와 사회에서 소외되어 좌절하면서 학업을 소홀히 하고 결국 일찍 중단한다. 가난한 가정은 부부간에 불화가 심하고 한부모 가족인 경우가 많으며, 부모도 하루하루 먹고 살기 어려우므로 자녀에게 규칙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치거나 공부를 봐주거나 학교를 잘 다니도록 뒷바라지할 여력이 없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학교와 사회에서도 소외된 아이들은 공부를 착실히 해야 할 동기가 생기기 어렵다.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자신의 충동적 감정을 조절하면서 미래의 성취를 위해 계획적으로 생활하고 현재의 어려움을 참아야 될 이유가 없다. 그 결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때그때 충동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직장에서 진득이 어려움을 이겨낼 능력이 없다. 엄청난 현실의 스트레스에 접해, 손쉬운 돈벌이나 범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술이나 도박에 의지해 당장의 어려움에서 도피하려고 하며, 불규칙한 생활로 인하여 질병에 고생하고, 배우자나 자녀에게 스트레스를 가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 있게 행동하지 않기에 항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허덕이며 일생을 살아가는 전체의 그림이 보이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사고를 훨씬 자주 당하며 단명한 삶을 산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인 유형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경우도 드물게는 있지만 대체로는 이러한 빈곤의 대물림 사이클을 반복한다. 오바마는 시카고의 빈민 지역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사회 운동가로서 이러한 수렁에 빠진 사람들을 단편적으로 돕는데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미래에 정치인이 되어 국가의 재정과 힘을 동원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삶 전체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빈곤 전략을 구사하겠다고 결심한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빈곤층에게 집중적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정책이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상류층은 자신의 돈이 빈곤층에게 돌아가는 데 반대하기에 빈곤 정책을 입법화하고 예산을 따는 것이 어렵다. 또한 정치인 오바마가 빈곤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재선을 목표로 하는 그에게 정치적으로 인기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1960년대의 빈곤과 전쟁을 선포한 존슨 대통령 이후 실질적으로 빈곤층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대통령이라고 한다. 겉으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 그가 빈곤 문제의 해결로 내세운 전략은 ‘교육’이다. 빈곤의 대물림을 끊는 고리로 교육 특히 어린 나이부터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전략이다. 가정환경의 차이가 아이들의 성취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린 시절에 가정환경의 불리함을 보완할 장치를 제공하는 것은 빈곤 퇴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략이어야 한다.

 

어린이의 빈곤 문제는 사회정의의 문제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나, 이로 인한 결과는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 중류층 부모의 교육열은 대단하다. 이것은 한편은 좋은 일이지만 이것의 뒷면은, 능력이 되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매우 어린나이부터 교육과정이 끝나는 20대까지 일관되게 심각하게 불리한 처지에서 게임을 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잔인한 사회이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매우 각박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긴장해서 살고 있다. 일단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하여도 경쟁에서 탈락하면 빈곤층과 흡사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있고, 그러면 자신은 물론 자식 세대에서 다시 올라서기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우리사회가 진실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려고 한다면 이러한 잔인함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잔인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내가 지금 잘 먹고 잘 살아도 위험이 상존하고 있기에 정말로 편안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될 수는 없다.    

2012. 8. 14. 12:15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왔다. 최근에 "뉴욕사람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문화에 대한 흥미를 배경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한 작품이다. 그동안 주로 학술적 글쓰기만을 하다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교양서를 썼다. 출간된 책을 받아 보니 글보다도 내가 똑딱이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가 매우 아름답게 구현되어 뿌듯했다. 사실 이 책은 2년전에 구상하여 작년 봄에 탈고한 것인데, 출판사를 찾고 제작하는 데만 일년 이상이 걸렸다. 우리나라의 고급 교양서 시장이 열악하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였다. 근래에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새 책을 구상하고 있는데 과연 햇볕을 볼 수있을지 아직은 확실치 않다. 이 문화에 대한 흥미와 지적인 호기심을 잘 결합한 교양서를 찾는 사람이 제법 많다는 것을 이 책을 내면서 발견하다.

 

   다음은 출판사에서 만든 책 소개이다. 출판사와의 계약 때문에 본문은 실지 못하지만, 전에 출간한 책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한참 지나 상업적인 가치가 크게 문제되지 않을 때  블로그에 올릴 생각이다.  


    

이 책은 뉴욕을 모델로 미국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관찰한 글이다. 뉴욕 맨해튼을 돌아다니면서 보는 것들을 묘사하고, 뉴욕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그들은 어떤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이야기한다. 덧붙여 그들이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이 책은 관광 안내서는 아니다. 어디에 어떻게 가고, 무엇을 먹고 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안내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 책에서는 뉴욕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우리의 삶의 방식을 비교하고 뉴욕의 관광지뿐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뉴욕, 그리고 미국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까지를 도모한다. 미국학자인 저자가 학교에서 연구하고 강의한 미국학 관련 지식이 곳곳에 깔려 있기는 하지만 현학적 논의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미국 문화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뉴욕에 대해 이 책의 저자와 유사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저자는 과거에 뉴욕에 살았지만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여러 번 뉴욕을 방문했다. 맨해튼 섬을 동서남북으로 걸어서 답사한 것만도 여러 번이다. 저자가 꼼꼼히 기록하고 사진으로 찍어 전하는 뉴욕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미국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이해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1장 ‘뉴욕의 화려한 부활’에서는 뉴욕은 어떤 곳이며 그곳으로 몰리는 세계의 인파들은 어떤 부류인지에 대해 개괄했다. 2장 ‘문화 상징의 메카’에서는 뉴욕의 주요 여행지 및 명물들, 교회와 박물관, 대학교 등에 대해 다루었다. 3장 ‘로어 맨해튼’에서는 월가와 유엔 본부가 위치한 남부 지역을 통해 뉴욕의 경제·정치적 풍광을 조망했다. 4장 ‘뉴욕의 터줏대감’에서는 흔히 인종 집합소라고 불리는 뉴욕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인종·민족인 이탈리아 인, 유대 인, 중국인 들의 생활상과 위상을 다루었다. 

5장 ‘보보스 문화의 매력’에 1980년대 상업적 부르주아와 1960년대 보헤미안의 가치를 합성한 보보스 계층, 소위 ‘문화 감각이 넘치는 엘리트’들의 삶의 터전과 매력적인 생활상을 담았다. 6장 ‘뉴욕의 상류층 대 소시민’에서는 뉴욕에서도 경제적 격차가 뚜렷한 지역들을 다루었으며, 7장 ‘흑인 문화의 고향’에서는 흑인 삶의 터전인 할렘과 베드퍼드-스타이브샌트를 기반으로 흑인의 생활상과 위상을 다루었다. 8장 ‘뉴욕의 마이너리티’에 뉴욕의 소수 민족인 한국인, 인도인 등 다양한 이민자들의 삶의 터전과 생활상을 담았다.





<목차>


뉴욕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01_뉴욕의 화려한 부활 
1. 우리가 뉴욕이라고 부르는 곳
2. 세계인이 방문하고 싶은 도시 1위, 뉴욕
3. 뉴욕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 뉴욕 시는 네덜란드 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02_문화 상징의 메카 
1. 타임스 스퀘어, 세계의 교차로 
▶ 그랜드캐니언과는 또 다른 이유로 타임스 스퀘어를 찾는다
2. 뉴욕의 미술관 
3. 관광지 순례 
4. 뉴욕의 교회 

03_로어 맨해튼 
1. 그라운드 제로, 9?11 세계무역센터의 폐허 
▶ 그라운드 제로와 오바마 대통령
2. 월가와 유엔 본부 
3. 이스트 빌리지, 오리지널 이민자 동네 
▶ 이스트 빌리지에서 다양성의 매력을 발견하다

04_뉴욕의 터줏대감 
1. 리틀 이탈리아, 리틀 이탈리아에는 이탈리아 인이 살지 않는다? 
▶ 콜럼버스 데이 퍼레이드 참관기
2. 유대 인의 딜레마, 성공했기에 사라지는 민족 
▶ 내가 만난 유대 인 
3. 차이나타운, ‘황색 위협’-인종 차별의 소산 
▶ 군침 도는 먹거리 천지, 맨해튼 차이나타운 답사기

05_보보스 문화의 매력 
1. 그리니치빌리지, 맨해튼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동네
▶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보낸 한여름
2. 첼시와 미트패킹, 뉴욕 경제와 함께 부활한 새로운 매력의 발산지 
▶ 옛날 것을 재활용해 성공한 세 가지 사례 
3. 센트럴 파크, 도심 한가운데 구현한 완벽한 인공 자연 
▶ 생활 속의 자연, 센트럴 파크

06_상류층 대 소시민 
1. 어퍼 이스트사이드, 소위 ‘부자이며 유명한’ 사람들의 동네
▶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사는 부자들의 삶을 엿보다
2. 미드타운 이스트와 어퍼 웨스트사이드 
▶ 어퍼 웨스트사이 대 어퍼 이스트사이드 
▶ 맨해튼 보통 사람들의 생활
3. 엘리트 대학 대 서민 대학 

07_흑인 문화의 고향 
1. 할렘, 흑인 사회 문화의 중심지 
▶ 할렘을 대표하는 두 흑인 운동가의 대조적인 생애 
▶ 할렘을 걷다
2. 흑인 교회, 정신적 구원과 실질적 뒷받침이 함께하는 곳 
▶ 아비시니안 침례교회 방문기
3. 베드퍼드-스타이브샌트, 흑인만의 세상 
▶ 할렘보다 더 진짜 흑인 문화가 숨 쉬는 곳

08_뉴욕의 마이너리티
1. 코리아타운, 한국 이민자들의 풍경 
2. 동부 할렘, 푸에르토리코 인의 근거지 
▶ 동부 할렘 사람들의 사는 모습
3. 인도 사람들, 백인인가 아시아 인인가?
4. 퀸스, 세계 모든 나라 이민자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
▶ 퀸스로 가는 전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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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16. 21:37

   지하철을 타면 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각자의 세계 속에 몰입해 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은 눈이 어두운 노인이거나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사실 스마트폰을 산지 얼마 안되었기에 사용법을 익히고 새로운 앱을 시험해 보느라 바쁜 것은 이해한다. 나는 전철을 타면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 맞은편에 앉은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무슨 재미로 살까, 어떤 고민을 안고 헤메고 있나, 어떻게 저런 표정의 얼굴이 만들어졌을까, 젊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저사람은 과연 어떤 희망을 가졌을까, 여자는 남자와 어떻게 다를까, 등등 사람을 보면서 이모저모로 관찰하노라면 연민의 정이 느껴지고, 호기심이 피어오르고, 덧없다는 느낌도 들고,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Atlantic_Lonelyness.hwp



   페이스북 계정을 처음 만들면, 알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추천해 주어 친구를 맺게 한다. 오랫 동안 소식을 몰랐던 사람을 새삼 발견하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터넷 상의 접촉은 실제 대면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선뜻 연락을 취하지는 않는다. 페이스북의 관계가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친구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아예 들어가 보지도 않는다. 내 페이스 북 계정에는 친구가 한명도 없다.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자주 휴대전화를 열어보고 이메일을 체크하는 것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든다. 누군가 찾아주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지만, 막상 상대와 접촉하면 왠지 불편해지는 것이 요즈음 사람의 심사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사람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개인주의적으로 된 것이다. 집단의 압력에 구속되던 상태에서 해방된 것까지는 좋은데, 의미있게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각자 자신의 틀을 지키면 서로 접촉하기가 조심스럽다. 상대가 쉽게 접근해 오면 나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 튀기고 싶은 변덕이 발동한다. 내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고 싶건만 막상 상대를 마주치면 왠지 상대의 못난 구석이 먼저 눈에 띠어 물러서 버리곤 한다. 나도 상대에게 그렇게 보일 것임을 알고, 나 자신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각자 자신의 것을 지키고 자신에게 충실하면 의미있는 무엇을 발견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 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삶의 울림을 찾지 못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라는 조언은 그릇되다. 아무래도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가장 감동을 받을 때는 남과의 연결 속에서 무엇을 할 때이었던 것 같다. 


   페이스북이 그렇게 많은 접속건수를 기록하지만 그것이 사람들 간의 직접적인 대면 관계를 대치하지는 못한다. 인터넷에 시간을 많이 쏟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물론 둘 간에 인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외로운 사람이 인터넷에 더 몰두하기는 할 것이다. 인터넷을 많이 들여다보다 인터넷 세상으로 빠져든다는 환상은 매트릭스나 아바타와 같은 영화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 세컨드 라이프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넷 속의 대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아직 인간의 진화 수준은 인터넷 가상 세계에서보다는 물리적으로 대면하는 관계 속의 삶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와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서로에게 구속되는 것을, 또한 상대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각자의 동굴 속에 머물러 있다. 인터넷이라는 제한된 통로를 통해 상대와 접하려고 하나,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별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 사회에 외로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으며 그들에게 대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직업이 번성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혼자만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선진국 사람들은 외로움이라는 비용을 비싸게 치른다. 가난한 나라에서라면 본인이 원치 않아도 항시 남과 부대껴야 하니 부자나라의 개인주의적 삶에는 양면성이 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면 그래도 선진국 사람의 개인주의적이며 외로운 삶이 집단의 압력에 이리저리 밀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나는 도저히 뗄 수없는 끈끈한 관계나 함께 망가져본 경험이 있는 허물없는 사이가 한편으로는 부럽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다. 일생 함께 점심을 같이해야 하는 직장 동료라는 말은 나에게 구속으로 다가올 뿐이다. 

   관계 맺는 일이 그렇게 힘들다니. 선진국 사람과 같이 제한적으로 또 계약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결코 그 관계가 편안해 질 수 없다. 하긴 나도 그리 관계 맺는 데 능한 사람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내식으로 살아가는 개인주의적인 삶이 편하기는 하다. 그래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끊임없이 남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나도 마음속 구석에 사람들과 관계 맺고자 하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게다. 나도 따지고 보면 외로움에 절은 사람이다.  

2012. 4. 8. 13:31

  선진국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기혼 여성의 경제활동이 크게 증가하였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성역할 분업, 즉 여성은 집에서 가사와 양육을 담당하고 남성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물론 경제형편이 어려운 계층은 이러한 사회적 이상형을 실천하기 어려웠다. 가난한 집의 부인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생계를 위해 돈벌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중류층에서 기혼 여성이 돈벌이를 하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Economist_Women&amp;Work.hwp



  세상은 변해 이제 서구사회에서는 70% 이상의 기혼 여성이 경제활동을 한다. 물론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전업직이 아니며, 남녀간의 임금 격차는 여전히 30%이나 난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만일 어떤 여성이 밖에 나가 일 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반전되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것이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될 정당한 사유로 인정되지 않을 날도 멀지 않다.

  여성이 밖에서 일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여성이 독립적인 경제기반을 가지면 남성과 여성간의 권력차이는 좁혀진다.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가 늘고,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의 발언권이 세지고, 이혼하고 재혼하는 사례가 늘고, 자녀를 적게 낳는 풍조가 정착한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 본인의 의지도 작용하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측면도 있다. 인구가 노령화하면서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하고 경제의 활력이 줄어드는 것을 보충하려면 여성의 참여를 늘릴 수밖에 없다. 여성의 교육이 남성과 동등한 수준에 근접하고 있는데 여성 인재를 집에 모셔둔다면 자원의 낭비가 엄청나다. 여성 인재를 놀리는 나라는 여성 인재를 활용하는 나라와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며, 우수한 여성을 고용하지 않는 회사는 그렇지 않은 회사에 뒤질 것이다. 

  여성의 경제력이 늘고 사회적 역할이 남성에 근접하면, “여성다움”이라는 문화적 상징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처럼 자신을 치장하고 남성에게 잘보이는 데 과도한 노력을 쏟아야만 하는 “여성다움”은 사라질 것이다. 적극적이고 독립적이고 능력있는 여성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는 문화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환상, 남성에 대한 여성의 환상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컴퓨터가 없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듯이,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없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어떨지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게 더 낳은 방식의 삶이고 인간성을 존중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방식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호도해도 비인간적이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삶에 책임지면서 사는 것이 더 편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2012. 3. 30. 13:28

 요즈음 미국에서는 조셉 코니라는 사람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사람은 우간다의 군벌 두목으로 어린 아이들을 유괴해서 총을 쥐어준 뒤 이들을 조정해서 무차별적으로 만행을 저지르는 나쁜 인간이다. 아프리카에는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 사람이 새삼 유명해진 이유는 일군의 미국 젊은이들이 이 사람을 제거하여 아이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비디오를 만든 것이 엄청난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든 29분짜리 비디오가 유튜브에 지난 3월 5일에 올라온 이후 오늘까지 8천 6백만명이 시청을 하였다. 이 비디오에서 그들은 미국에서 행복하게 자라는 아이와 우간다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을 대비하면서 미국의 힘으로 코니를 잡아 정의를 바로세우자고 호소한다.


Atlantic_AmericanNationalism.hwp



  이 비디오를 만든 젊은이들은 우연히 우간다를 여행하다가 코니의 만행을 접하고 8년전에 “보이지 않는 어린이”(Invisible Children inc.)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동안 주로 참상을 고발하는 영상물을 만들어 퍼뜨리면서 모금활동을 하고 미국 정부에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미국 정부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만든 영상물이 인터넷을 통해 크게 호응을 얻고 주요 언론에서 이 비디오의 경이로운 성과를 보도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정치인을 움직여 중앙아프리카에 100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코니의 만행을 중단시키도록 미국 정부가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번 비디오에서는 다가오는 4월 20일을 D-day로 잡고 미국 젊은이들이 궐기하여 세상을 바꾸자고 호소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인터넷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다. 한 달도 못되는 사이에 8천만 명이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마침내 정치인조차 이들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이 젊은이들의 활동에 대해 식자층의 의견은 찬반으로 나뉜다. 소위 힙스터라 지칭되는 미국 중상류층 젊은이들의 치기어린 활동이 아프리카의 어린이에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회의를 표하는 사람이 많다. 반면 자신의 일상사와 관련이 없는 세계 반대쪽에 사는 사람의 고통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미국의 숭고한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는 양쪽의 주장 모두에 공감한다. 코니가 어린 아이를 유괴해서 총질하게 만드는 것의 원인은 빈곤과 교육 부족에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코니를 잡는다고 해도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 어린아이를 착취해서 나쁜 일을 할 것이다. 교육 받지 못하고 먹을 것이 없고 질병의 위협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먹을 것을 주면서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나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죽음이 바로 곁에 있기에 남을 착취하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사람이나 남을 죽이는 사람이나 큰 일이 아니다. 기아와 질병이 가져오는 죽음의 위협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을 제대로 교육받도록 하고, 그들에게 일자리를 준다면 그들도 앞날을 개척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 것이며 남의 생명을 존중할 것이다. 요컨대 서구인이 누리는 문명의 혜택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프리카인이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름길이지, 군벌 한명을 추적하여 사살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젊은이들의 일시적인 관심에 눌려서 아프리카 한가운데 100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했지만 그들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 듯하다. 아프리카 중앙지대는 미국의 이해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중동이나 아시아와는 달리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국인은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 젊은이들의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신의 이해와 무관한 대의를 위해 오래 일하기는 힘들다. 이 단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지금까지 모금된 돈의 대부분을 비디오를 제작하는 데 썼을 뿐 실제 아프리카의 고통 받는 어린이의 복리를 향상시키는 데 쓴 돈은 쥐꼬리 만큼이라고 비판한다. 이 젊은이들이 비디오를 통해 유명해지고 모금으로 거둔 돈을 자신들의 활동비로 쓰면서 끝날 가능성은 다분히 크다. 아프리카인의 비참을 이용하여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명성을 추구하는 얄팍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기는 이유는, 잘 먹고 편히 사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웃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찌되었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활동에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미국의 중상류층 백인 젊은이들은 아프리카도 좋지만 자신의 나라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흑인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거리 하나만 건너면 비참한 지경에서 살아가는 흑인이 얼마나 많은가? 미국 흑인 남성 셋 중 하나는 감옥에 가는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이웃의 병원비를 내 돈으로 내서는 절대 안된다고 외치면서 전국민의료보험을 반대하는 것이 미국인이 아닌가? 미국에서 정의가 바로 선다면 많은 나라들이 미국을 뒤따라서 좋게 바꾸지 않을까? 나는 우리 사회의 나쁜 면이 부분적으로 미국의 나쁜 측면만을 본받아서 그리되지 않았나 의심을 할 때도 있다. 미국은 이러저러하다고 아는체 하는  식자층에게 미국에서 비참한 사람들의 삶을 당신이 아느냐고 묻고 싶다.   

2012. 3. 24. 12:22

  미국의 여론조사에서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다. 미국인 주류 집단의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에 있으므로 미국의 식자층은 이러한 변화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물론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해서 신에 대한 믿음까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미국인 열 명 중 아홉은 어느 정도는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유럽사회는 이미 세속화되어 신을 믿는 사람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은 서구문명에 속하면서 근래까지 세속화의 물결이 침투하지 않은 예외적인 사회로 여겨져 왔다. 과학 기술의 힘을 신봉하고 물질주의와 소비문화가 팽배한 미국인이 독실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율배반처럼 생각되나, 실제 미국인 중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적지 않다. 기독교 근본주의를 추종하는 복음주의 교파 개신교 교도만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런 미국인의 독실한 신앙심이 근래에 두드러지게 균열하고 있다.

  미국인의 개인주의는 개신교 신앙과 맞닿아 있다. 신에 대해 개인이 홀로 영적인 책임을 지며,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신에게 다가가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기며, 신이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교리 등은 모두 개인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것을 명한다. 부모나 형제조차도 자신의 신앙에 직접적으로 간여할 수 없다.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를 통해 서로 사교하고 믿음을 부추기며 지내지만, 개신교는 신앙에 관한 한 개인이 사막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근래에 많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종교가 없다고 하며 교회에 나가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은 개인주의의 발현이다. 이들은 기성의 교회 조직이나 자신 이외의 외부의 권위를 부정한다. 삶의 의미를 찾고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서 기존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용감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서 혹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은 결국 허무로 흐를 위험성이 크다. 기존 종교나 교회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유럽의 경우 세속화된 인간으로 이전하는 중간과정이었다. 이들에게 신 혹은 초월적인 힘에 대해 막연한 개념은 남아 있으나 인간사는 인간이 관장하는 것이라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질문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할 것이지만 미국인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보통 미국인의 생각이다. 신이 없으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도덕이 없고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관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극한 개인주의자와 무신론자가 합체가 되면 무서운 사람이 탄생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생각은 약간 다를 것이다. 질서라는 것은 신으로부터 보다는 내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나온다. 내가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신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나의 가족이나 내가 속한 집단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다. 동양 사회에 절대자 신을 모시는 종교가 큰 세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게 해달라는 구복적인 신앙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절대적인 가치나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는 믿음은 동양 사람에게 생소하다.

  서구인이 교회와 신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절대적인 가치와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나서는 노력이 어디에 귀결될지 궁금하다. 불교의 참선이나 요가 등과 같이 자신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리 큰 성과를 거두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솔직히 자신의 내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가치 있는 무엇을 발견하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는다. 나는 생물학적인 존재이면서 사회적인 존재이다. 생물학적인 나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한다면 아마도 진화생물학에서 주장하는 ‘종족 본능’이 최고로 추구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왜 종족이 보전되고 융성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인간이 너무 많아서 지구상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가?

  사회적인 나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한다면 아마도 이웃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찾을 것이다. 사회의 복리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나의 행위에서 내가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궁극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신에 귀의하여 모든 삶의 의미를 신에게서 찾는 것이 가장 쉬운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상실할 때 의지할 것은 주위의 이웃, 내가 속하는 사회밖에 없다.

  어찌 생각하면 왜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가치가 되어야 할지에 의문이 든다. 인류가 멸망한다고 하여도 그만 아닌가? 자연 그 자체에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의 기준이 없으므로 인류의 생존과 발전은 인간이 임으로 만들어낸 가치일 뿐이다. 결국 생물학적인 생존 본능만을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서구인들이 개인주의를 견지하면서 어떻게 신에게서 떠나서 삶의 의미를 찾을까? 아마도 헤매면서 살 것이다. 왜 사는지의 질문을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하고, 정 떠오른다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뒤로 미루고, 일상의 번잡함에 묻혀서 살다가 가는 것이다. 편하게 사는 것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바쁘고 벅차지 않겠는가?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삶이니 종교나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으로 하고 말이다. 이러한 주류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특이한 사람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2012. 3. 22. 12:07

  이코노미스트지의 핵 에너지 특집호는 “실패한 꿈”이라는 머리기사로 시작한다. 핵 에너지는 인류의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있는 묘한 존재다. 화석 에너지는 조만간 고갈될 것임을 모두 알기에 대체 에너지를 찾으려 노력한다. 태양광, 풍력, 조력, 지열 에너지 등 환경론자가 선호하는 대안은 현재까지는 화석 에너지의 대체 수단으로 한계가 있다. 기술 수준이 낮아 비용이 많이 들거니와 무엇보다 산발적으로 소량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방식은 현재의 산업 구조와 잘 맞지 않는다. 현재의 산업구조는 집중하여 대량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체제가 잡혀있다. 반면 핵 에너지는 화석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집중적인 방식으로 대량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으며 원료 확보가 용이하고 생산비가 저렴하다. 안전 문제만 아니라면 핵 에너지는 화석 에너지를 대체할 가장 이상적인 수단이다.


  핵 에너지는 이상적인 에너지원이기에 저주를 받고 태어났다. 우주의 엄청난 에너지는 모두 핵 에너지이지만, 그 규모가 엄청나기에 인간에게 피해를 줄 위험성이 현재까지는 이익을 상쇄하고 있다. 핵 에너지 개발이 핵폭탄 개발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인류가 그렇게 엄청난 에너지원을 관리할 기술과 사회적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핵 에너지관련 기술 발전이 느린 것은 이유가 있다. 핵 에너지를 연구한다고 하면 바로 핵폭탄을 연상하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저지된다. 소수의 나라의 허가받은 기관이 아닌한 함부로 핵에너지를 연구하거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할 수 없다. 사실 무서운 것일수록 피하기보다 그것을 잘 다루어 유용하도록 만든 것이 인류 발전의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행착오와 아이디어가 결집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핵에너지 개발은 그러한 발전의 과정이 원천적으로 막혀있다.
 
  사실 핵 에너지의 문제는 기술 못지않게 사회적인 문제이다. 아무리 무서운 것이라도 관리를 잘 하면 어느 정도는 쓸만하며, 휘험 요소를 모두 숙지하고 사회가 합리적으로 공평하게 분배한다면 핵 에너지 개발에 찬성할 사람은 훨씬 많을 것이다.  핵 에너지 개발의 과정에서 피해를 누가 분담하는가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대부분의 사회는 이를 현명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에너지의 혜택은 힘 있는 사람이 누리면서 힘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떠않는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기에 핵 에너지는 사회 갈등의 씨앗인 것이다. 북구의 나라들과 같이 이익과 위험을 사회전체가 합의에 따라 공동 분담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면 핵 에너지는 훨씬 효율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나는 솔직히 서구 환경론자의 주장에 그리 동조하지 않는다. 환경을 생각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자신들은 편안하게 살고 많이 소비하면서 환경 친화적인 방식을 고민하는 것은 위선적인 태도이다. 자신의 소비를 줄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를 나누어준다면 지구의 환경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미래의 에너지원인 핵 에너지를 포기하는 대신 환경친화적인 방식을 채택하려고 한다면 지금과 같이 풍요롭게 사는 서구인의 삶의 방식은 수정되어야 한다. 에너지를 많이 쓰는 생활을 지속하면서 대양열이나 풍력을 주 에너지원으로 한다면, 그러한 설비 자재를 생산하는 데 훨씬 많은 자원을 소모해야 하며 온 산천은 태양광 집열판과 풍력 프로펠라로 뒤덮일 것이다.

  "Small is Beautiful"이라는 철학을 정말 신봉하는가? 적게 먹고 적게 싸는 삶이 바람직하다는 이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대한다. 좀 더 잘 살고 싶고 좀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원한다. 사실 일인당 소득이 4만불을 넘는 선진국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지금보다 조금 덜 풍요롭게 살아도 괜찮다. 그러나 세계 70억 인구 중 90%이상은 1만불도 안되는 소득으로 힘들게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 어느 정도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려고 한다면 엄청난 자원이 필요하다. 핵에너지의 엄청난 매력에 등을 돌릴 수 없는 이유이다. 이들을 서구인 수준으로 생활하도록 하려면 환경친화적인 에너지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재의 기술과 사회체제로는 불장난에 가까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핵에너지 개발에 좀더 투자해야 한다. 중국이 핵에너지에 몰입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엄청난 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기 위해 아무리 위험이 크더라도 핵 에너지의 희망을 포기할 수 없기때문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핵 에너지 개발의 피해는 주로 힘없는 사람이 떠않고 있겠지만 말이다.  

2012. 3. 17. 21:52

  미국의 중류층을 떠받치던 중간 기술의 일자리가 해외로 이전하면서 미국에는 고급기술의 고임금 일자리와 저임금의 단순 노동만 남게 될 것이라는 예상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중류층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제기된다. 첫째는 현재 중간 기술의 일에 종사하던 사람이 그들의 일자리가 해외로 이전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현재 지향형의 질문이다. 둘째는 앞으로 중간 기술의 일이 점차 줄어들면 미국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미래 지향형의 질문이다.


  현재 지향형의 질문, 즉 이미 실업에 처했거나 혹은 조만간 실업에 처할 중간 기술의 근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자못 심각하다. 일자리의 구조가 고급 기술과 단순 노동으로 양극화 된다면 이들이 갈 길은 분명하다. 기존에 이들이 하던 것보다 상위의 고급 기술을 요하는 일로 이동하거나 혹은 하위의 단순 노동직으로 이동하는 것, 둘 중의 하나이다. 새로이 고급 기술을 익히도록 훈련하여 이들에게 과거보다 더 좋은 일자리로 이동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늙은 개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기는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이미 직장에 다닌 사람을 재교육 시키는 직업훈련의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어렵다. 예컨대 컴퓨터를 젊은 시절부터 익숙하게 쓰지 않던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어 컴퓨터를 익숙하게 다루면서 일을 처리하도록 만들기는 매우 힘들다.

  결국 기술이 앞서 가고 일의 방식이 바뀌면서 과거의 관습에 익숙한 사람 중 대부분은 새로운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설사 새로운 기술을 습득한다고 하여도 떠오르는 젊은 세대에 비하여 생산성이 높지 않다. 왜냐하면 과거의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하는데, 이는 새로운 방식이 정착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에게 새로운 방식을 배우게 하여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불완전하나마 적응하여 노동가능 연령 동안 버티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구조조정은 이들에게는 쓰라린 시련이지만 크게 보면 생산 방식의 변화와 함께 치러야 할 대가이다. 낡고 비효율적인 방식이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담당하는 주역들이 대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게나마래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다수는 나이가 들면서 결국 단순 노동직으로 하강할 수밖에 없다. 서비스 일자리는 앞으로도 풍부할 것이므로 이들이 갈 곳은 그곳밖에는 없다. 이는 서비스 일자리의 특성인 불완전한 고용상태와 낮은 소득을 받아들이면서 노동 가능 연령이 끝날 때까지 힘겹게 지내야 함을 의미한다. 사실 어느 쪽이건 이들에게 힘든 선택이기는 매한가지이다. 변화에 적응하기도 힘들며 변화에 도태되면 더 힘든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

  미래 지향형의 질문, 즉 지금 성장하는 새세대에게 양극화되는 일자리 구조에서 어떻게 살아남도록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대응하기 어렵다. 일자리 구조가 양극화된다면 이들 역시 둘 중에 하나로 진출해야 할 것이다. 상위의 고급기술 직종은 고등 교육을 받고 높은 기술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갈 것이므로 다수는 중간 기술의 일자리를 맛 본적도 없이 취업의 첫걸음부터 단순 기술직으로 진입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대학만 졸업해도 중간기술의 괜찮은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고급 기술 직종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장만으로는 안된다. 더 고급 기술을 익히기 위해 대학원과 직업 현장에서 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실리콘 밸리의 프로그래머나 월가의 첨단 금융기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대학교만 졸업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선은 보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높은 기술을 교육시켜서 상위 일자리에 더 많이 포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실직에 처한 사람이건 미래의 직업을 준비하는 젊은이이건 중간 기술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변화에 대해 가장 좋은 대비책은 교육과 훈련을 강화하여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기술 수준이 높고 컴퓨터가 대치할 수없는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일에 진출시키는 것이 변화되는 노동시장에서 승자가 되는 길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중간층이 감소하는 문제에 관해 언급하는 사람은 한결 같이 교육의 질과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재정 지원과 제도 개선을 추진해야 함을 역설한다.

  문제는 교육의 질과 기술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일자리와 소득 구조의 양극화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겠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상위의 고급 기술을 요하는 일자리는 소수이며 대부분의 일자리는 하위의 단순 기술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국의 산업구조가 고도화된다고 해도 고급 기술의 일자리는 노동 생산성이 높으므로 많은 고용을 수반하지 않는다. 예컨대 애플의 아이폰 생산이 백만 개에서 천만 개로 확대된다고 해도 이를 위해 필요한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마케팅, 금융, 기타 관리직의 소요인원은 열배로 증가하지는 않는다. 반면 생산과 중간관리를 담당하는 중간 기술의 일자리는 해외의 생산기지로 이전할 것이므로 다수는 미국에 남겨진 열악한 서비스 일자리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생산기지가 해외로 이전하는 것을 따라서 해외로 가는 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는 미국만큼의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이 낮은 임금이라도 감수하면서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 여하간 미국 중류층의 임금 수준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높은 한 중간 기술의 일자리가 계속 외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만은 결국 비경제학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 잘나가는 상위의 사람들이 힘들게 일하면서 사는 다수의 사람과 혜택을 나누어 갖는 방향의 정치적인 해결책이 해답이라고 지적한다. 정보화와 세계화는 고급 기술을 가진 소수의 생산성을 크게 높이고 그로 인한 소득을 엄청나게 안겨다 준다. 예컨대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나 페이스북의 주커버그와 같은 사람은 시장이 전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기에 그들의 발명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었다. 잘나가는 소수의 미국인들이 세계 시장에서 거두는 높은 수익이 서비스직에서 단순 노동을 하면서 저임금을 받는 다수의 미국인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단순 노동을 하는 미국인은 유사한 일을 하는 개발도상국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의 생산성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뉴욕의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은 방글라데시의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보다 몇 배나 많은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담당하는 일은 외국으로 이전할 수 없는 것이므로 생산성에 따른 보수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경쟁력이 높은 고소득 직종의 사람이 저임금에 종사하는 단순 노동자를 도와주는 길은 다양하다.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이들을 도와주는 방법과 간접적으로 이들의 힘을 높여서 더 높은 소득을 얻도록 하는 방법 모두를 구사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길은 세금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 법으로 규정하는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 법으로 노동조건을 제한하는 것, 등이다. 한편, 노동자들이 조직화하여 협상력을 높이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 못지않게 효과가 큰 방법이다. 노조가 조직된 사업장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월등히 높으며, 개별 사업장에서는 물론 산업 전반과 경제 전체로 노동자의 조직력이 세질 때 소득 분배가 더 평준화된다는 것은 북구의 경험에서 확인되었다.

  제조업과 같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할 수 있는 분야에서 노동자의 힘은 절대적으로 약하다. 그들의 임금 대비 노동생산성이 같은 일을 하는 개발도상국의 근로자보다 훨씬 낮을 경우 공장의 해외이전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경제적 효율성이 최고의 기준이므로 효율성이 낮은 선택을 하라고 기업에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서비스 산업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일의 특성상 해외로 사업장을 이전하기 어려움으로 같은 성격의 일을 외국에서 더 낮은 비용으로 한다는 이유로 근로자에게 낮은 임금을 강요할 수는 없다. 서비스 근로자의 협상력이 높아진다면 이들은 상당한 수준의 임금을 받아낼 수 있다. 예컨대 쓰레기 수거가 몇일만 중단된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방법이 없다. 문제는 서비스 산업의 속성상 전통적인 노동조합의 방식으로는 이들을 조직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노동자의 협상력을 키워 임금을 높이는 방법은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정치권이 부유한 층에 의해 장악되어 있으므로 힘들게 사는 사람의 목소리는 정치에 반영되지 못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새로운 이민자를 계속 받아들임으로서 서비스 일자리가 저임금으로 계속 유지되도록 만들고 있다. 새로운 이민자는 자신의 출신국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를 덜 느낀다. 이들은 언어 장벽과 사회문화적 격차 때문에 미국 출생자와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이들을 미국의 저임금 노동자와 연대시키는 것은 힘들다.

  앞으로 기술이 계속 발달하면서 지금까지는 복잡한 것으로 여겨졌던 일이 컴퓨터의 도움으로 단순화하게 되고, 해외로 이전될 일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 결과 중간 기술의 일자리는 점점 더 많이 미국을 떠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까지 고급 기술로 여겨진 일은 중간 기술의 일로 바뀌고, 또 새로운 발명품이 등장하면서 이를 생산하기 위한 중간 기술의 일자리들이 새로이 출현하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아이폰이 도입되면서 그전에는 없던 중간 기술의 새로운 일자리들이 다수 출현했듯이 말이다. 새로운 혁신이 가져올 일자리의 변화는 예측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기술 변화의 사이클이 빨라지면서 미국에서 중간 기술의 일자리는 급속히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노동자들이 혁신의 이익을 누리는 기간이 점차 더 짧아진다. 미국이 혁신을 계속 주도한다면 모르지만 만일 혁신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면 분명 미국의 노동자들은 큰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한편 미국의 중류층 일자리가 계속 감소한다면 정치적인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날 수도 있다. 중류층 감소 현상은 자본주의 경제가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에서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므로 경제적인 원칙을 적용하여 해결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강조하는 미국이 봉착하는 문제는 결국 시장외적인 방식 즉 정치적인 방식으로만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어떻게 될까? 부자와 빈자간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사회갈등이 제도권 정치를 마비시키고 결국 폭동이나 범죄 등으로 불거지면서 살벌한 사회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와중에 없는 사람의 정치적 목소리는 커질 것이고 소득 재분배의 요구는 어떤 방식으로건 정치적으로 처리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 과정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말이다. 

2012. 3. 17. 12:30

   미국에서 중류층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들고 있다. 전통적으로 노조가 조직된 제조 산업에서 일하며 중류층 생활을 하던 생산직 근로자들은 외국으로 공장이 이전하면서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제조업의 메카였던 중서부 지역은 대량 실업과 인구 감소로 고통을 겪고 있다. 사무직이라고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다. 컴퓨터와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과거에 열 명이 하던 일을 이제 한명이 처리할 수 있고 단순 사무 업무는 외국으로 급속히 빠져나가고 있다. 컴퓨터로 하는 일은 국내에서 하던 혹은 멀리 인도에서 하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싼 임금을 찾아서 외국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콜센타나 자료 입력 등의 단순한 업무만 이전했다면, 근래에는 프로그래밍, 회계, 재고 관리, 인사, 고객 관리, 법률 서비스, 등 거의 모든 사무직 업무들이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일자리가 해외로 이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개발도상국 대졸자의 임금은 미국인의 임금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미국 대졸자의 생산성이 개발도상국 사람들보다 크게 높지 않으므로 기업의 입장에서는 해외로 이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영어에 문제만 없다면 개발도상국의 대졸자가 미국의 대졸자보다 생산성이 높은 경우도 많다. 미국의 자본주의에서 기업의 목적은 국내에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을 높이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므로 해외로 일자리를 이전하는 행위를 탓할 수 없다. 세계 전역에서 생산과 소비를 하는 다국적기업의 경우 비경제적인 이유로 어느 특정국에 일자리를 몰아주는 것은 기업의 고객이나 주주의 기대에 어긋나는 비윤리적 행위이다.

  어찌보면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나라 사람보다 생산성이 낮은데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받아온 것이 문제이다. 과거에는 일자리의 이전이 불가능했으므로 두 나라 근로자들 사이에 보수의 비교가 어려웠지만 이제 일자리를 옮기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생산성과 보수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각자 실력과 노력에 맞게 유사한 수준의 보수를 받게 되는 것은 더 공평한 세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에 문제이지만. 

  결국 미국에 남는 일자리는 두 종류밖에 없다. 하나는 컴퓨터가 담당하기 힘든 창의적인 업무이며, 외국에서 대체할 수 없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다른 하나이다. 사무직이건 생산직이건 단순 반복적인 일자리는 싼 임금을 찾아서 조만간 대부분이 외국으로 이전할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혁신과 높은 수준의 두뇌 활동을 요하는 연구와 개발, 디자인과 마케팅, 고급 기술과 기획 등의 일만이 해외 이전의 위험에서 자유롭다. 이것과 정반대의 성격의 일, 즉 점포에서 손님을 응대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공사장에서 일하거나 애를 보는 일은 결코 해외로 이전할 수 없다. 이러한 일을 해외로 이전할 수는 없지만 대신 해외로부터 싼 임금도 마다 않는 사람을 국내로 들여와서 맡게 한다. 결국 중류층의 일자리는 사라지는 것이다.

  미국의 중류층의 일자리가 감소하는 것은 미국인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다. 선진국으로부터 이전하는 일자리는 기존의 것보다 상대적으로 보수가 좋으므로 이 나라의 중류층을 늘이는데 일조한다. 인도와 중국의 중류층이 근래에 급속히 성장한 것은 미국 산업의 구조조정의 결과이다. 즉 미국만 보면 소득 분배가 양극화된 것이지만, 미국과 인도와 중국을 함께 연결해서 보면 과거보다 소득 분배가 더 평준화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여하간 미국으로 볼 때 소득구조가 양극화되는 것은 크게 우려되는 현상이다.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중류층이 줄어들면 부자 혹은 빈자에게 호소하는 극단적인 주장이 호응을 얻는 반면 온건한 주장은 지지기반을 잃으므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진다. 빈부격차가 뚜렷해지면 사회적인 결속력이 줄어들고 범죄와 여러 사회문제들이 증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세계화에 따라 구조적인 이유로 벌어지므로 개별 기업의 입장에서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기업들이 해외로 생산기반을 이전하여 경쟁력을 높이는 데 특정 업체만 국내에서 버티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본주의와 자유를 최고의 원리로 하는 미국으로서도 정부가 나서서 기업의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는 어렵다. 해결책은 없을까? 다음 글에서 해결책을 논의하겠다. 

2012. 3. 11. 21:44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인들이 우리를 모범으로 여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실업문제, 빈곤문제, 재벌문제 등으로 우리 주위에서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숫하게 보며, 국회에서는 기득권을 챙기려고 억지를 쓰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정치인을 흔히 본다. 우리사회에는 부정이 판을 치며 술과 도박에 빠지거나 몸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향락산업 종사자가 얼마나 많은지 가늠할 수 조차 없다. 불안정한 가정환경과 냉혹한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이 폭력을 일삼거나 삐뚤어지게 자라나는 것을 주위에서 얼마나 많이 보는가? 이런 나라가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다니.


 

  그런데 외신에서는 세계의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한국을 본받아야 할 나라로 보고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한단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물론 한국의 문화가 각광을 받으며 한국에 와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 요즈음 한국의 대학교에는 중국, 동남아, 중앙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에서 온 유학생이 급증하고 있다. 외국의 공무원에게 한국에 관해 교육시키는 대학원 프로그램에 입학하려면 엄청난 경쟁을 뚫고 선발되어야 한다. 마치 수 십 년 전에 한국인이 서구 나라에 가서 배우는 것을 동경했듯이 이들은 한국에 와서 배우고 싶어 한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커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세계에서 독보적인 사례로 언급될 만하다. 1960년대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였던 것이 이제 다른 나라에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로 성장한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 그렇다고 한국이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한국이 발전해 왔던 과정을 다른 나라가 따라 한다고 해서 성공할 것 같지는 않다. 국제적인 환경이 달라졌으며, 한국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은 다른 토양에 정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모범적인 사례라고 외국에서 칭찬한다지만 우리는 문제가 많음을 잘 안다. 불평등은 확대되고 있으며, 학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젊은이들은 실업과 좌절에 신음하고 있으며, 부정의와 부패가 도처에 널려있다. 그래도 뒤를 돌아보면 우리가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깨닫고 앞날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갖는다. 우리의 정치가 혼탁하지만 불과 20년 전에는 무자비한 독재가 판치지 않았던가? 현재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대의 무자비한 민간인 살상이 1980년에 한국에서도 있었다. 연줄이 없으면 취직을 하기 어렵고 급행료를 내지 않으면 관공서에서 일이 돌아가지 않던 때가 그리 멀지 않았다. 여전히 후진적인 시스템이 곳곳에 있지만 점차 바뀌는 것을 보면서, 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히 보면서 앞으로 일이십년 후에는 우리도 선진국과 같이 풍요롭고 투명한 사회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내가 열심히 사는 이유 또한 이러한 사회를 앞당기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 블로그를 정성을 기울여서 쓰겠는가?

2012. 3. 10. 23:21

매년 1월 말이면 미국 대통령이 상하 양원 합동 의회에서 연설을 한다. 이것은 일년에 한번 있는 의례적인 행사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관심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올해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선을 노리므로 대통령의 연설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는 데 맞추어져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한 지난 삼년간 미국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웠다. 대외적으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 빠져 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엄청난 재정 부담을 안아야 했다. 이 두 개의 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는 공약을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여하간 오바마 대통령은 이에 거의 근접한 조치를 취했다. 대외적 성과와는 달리 대내적으로 미국 경제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08년에 터진 금융위기로 많은 회사가 파산하고 많은 가구가 빛 더미에 올라앉고 실업자가 넘쳐났다.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과거 공화당 정권의 무절제한 금융규제 완화에 있지만 미국인의 고통에 따른 원성을 오바마 대통령이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다. 그러한 경제위기 덕분에 흑인이면서도 대통령에 당선되는 미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지만 말이다.

그의 연설의 대부분은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 특히 경제적 양극화와 엄청난 실업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바쳐졌다. 마치 대통령이 회사의 세일즈맨인 것처럼 미국에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미국 경제의 양극화와 중류층 일자리의 감소는 구조적인 변화의 산물이므로 대통령이 기업의 팔을 비튼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다국적 기업은 미국인만이 아니라 세계인을 상대로 사업을 하므로 반드시 미국인의 이익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미국 대통령이 이들에게 미국에 더 유리하도록 경영하라고 하는 것이 왠지 구시대적 발상에서 나온 말처럼 들린다. 과연 미국의 대기업 경영자들이 대통령의 말을 귀담아 들을까?

1980년 공화당이 집권한 이래 미국 정치에서 공화당과 민주당간에 분열은 갈수록 심해졌다. 두 정당은 상대방을 반대하기 위해 무모하리만치 완고한 태도를 취함으로서 미국의 정치는 파행을 지속하고 국민의 원성이 커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절 그의 화합을 강조하는 연설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마침내 대통령에까지 당선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예산 삭감을 둘러싼 의회의 대치에서 보듯이 벼랑 끝 전술을 동원하여서 까지 오바마 행정부를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공화당의 전략을 보면 미국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연설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간의 화합을 거듭 강조하기는 했지만 마치 허공에다 대고 소리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래도 우리나라와 달리 대통령이 집권당을 일방적으로 휘둘러서 날치기로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몸싸움을 벌이며 반대하는 풍경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서 반대 정당을 설득하려는 열성과 함께, 결국 국민의 여론을 통해 반대 당의 힘을 꺽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신뢰를 읽는다. 확실히 우리나라보다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미국의 대통령이나 국민 모두가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2012. 3. 4. 19:53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온라인 마케팅의 중요성이 커진다. 이미 사용해본 사람의 의견을 게시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온라인 마켓팅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구매하기 전에 여러 판매자를 비교하고 다른 소비자들의 의견을 참조한다. 사람들은 판매자보다 실제 구매자의 말을 더 믿으므로 인터넷에서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인터넷에 게시되는 의견이 얼마나 객관적이냐는 점이다. 익명이 보장되는 인터넷의 속성상 판매자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긍정적인 의견을 남발할 수 있고, 혹은 반대로 경쟁자나 악의의 소비자가 부정적인 의견으로 매도할 수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정보는 있으나마나 하다. 인터넷의 정보가 이러한 약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구매를 할 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곤 한다.

  미국에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인터넷 리뷰 사이트가 여럿 있다. 소비자들이 직접 올리거나 혹은 리뷰 사이트의 직원이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용하고 올린 의견을 게재한 인터넷 사이트가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은 것이다. 많은 사람이 방문하여 게시된 의견을 참조한다면 그 회사는 광고를 유치하여 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객관적인 정보를 게시하여 방문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에도 한때 맛집 정보 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게재한 정보의 신뢰도가 형편없기에 실패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앤지스 리스트'(Angie's list)나 '옐프'(Yelp)는 대표적인 인터넷 리뷰 사이트로서 크게 성공하여 주식을 상장하기까지 했다. 앤지스 리스트는 집수리 분야에 특화하였으며 의견을 올리는 사람의 실명을 요구하여 거짓된 정보 생산을 차단하였다. 또한 유료 회원으로 가입해야만 리뷰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인터넷에서 공짜 정보를 얻는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돈을 내게 하면 방문자를 몰아낼 위험성이 크다. 그러나 집수리 분야의 경우 약간의 돈을 내더라도 유용한 정보를 얻는 것의 이익이 크기에 유료 회원이 미국 전역에서 백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집수리 서비스란 잘못 선택하면 물리기 힘들고 손해가 크기 때문에 좋은 정보의 가치가 큰 것이다. 

  옐프는 주로 레스토랑 리뷰에 특화하였는데 거짓 정보를 차단하는 노하우를 구축하여 성공하였다. 자체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거짓 리뷰를 자동으로 거르고, 자체 직원이 직접 나가서 소비자의 평가를 재검토하고, 거짓 리뷰를 게재하는 사람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효과를 거두었다. 업체로부터 광고를 수주하면서 이것이 리뷰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엄격히 지켰다. 물론 호의적인 평가를 받은 업체의 광고가 주로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거짓 리뷰를 차단하는 프로그램은 어떻게 작동할까? 구체적인 사실을 묘사하기보다 사용자의 주관적인 느낌을 남발하거나, 과장된 수사를 써서 칭찬하거나, 지나치게 평가 점수가 높거나, 합리적으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깍아 내리고 비난하는 말을 반복하는 등을 거짓 리뷰로 처리한다. 그럼에도 잘 쓴 리뷰의 경우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소비자가 올리는 리뷰를 전문으로 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약점은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리뷰를 써야 할 동기가 약하다는 점이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마다 리뷰를 써달라는 요구를 받지만 나는 한번도 이에 응한 적이 없다. 소비자가 사용 후기를 자발적으로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설사 쓴다고 해도 부정적인 경우가 훨씬 많다. 불만을 느낄 때 항의하는 맥락에서 쓰는 경우가 만족을 느껴 칭찬을 하기위해 쓰는 경우보다 많다. 인터넷에 자신의 의견을 쓰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이므로 웬만큼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으면 이해 상관이 없는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칭찬을 올리는 경우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터넷 상에 부정적인 의견이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물건이나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기본이고, 만일 부정적인 의견이 올라올 때 이 의견에 신속히 응답하고 성실하게 조치하는 것이 최선이다. 판매자가 소비자의 불만에 경청한다는 인식을 줄 때 부정적인 의견을 올린 사람이 그 의견을 수정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회사의 그런 태도를 보고 처음에 제기된 부정적인 평가에 비중을 덜 두거나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인터넷 상에서 소비자의 의견을 모니터하고 대응하는 것을 전담하는 회사도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은 정보를 생산하고 이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보의 신뢰성이 취약하다. 유용하고 신뢰할만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평판을 얻으면 그 자체로 큰 사업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잘 보이려고 거짓말도 불사하고 남을 깍아 내리는 데 빠르므로 사람들의 호 불호의 의견이 쌓여서 좋은 평판을 구축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나 평판이란 사람들의 의견에서부터 나오므로 이를 잘 관리하는 방법을 개발한 업체는 큰 돈을 벌 수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물건과 서비스의 정보를 객관적으로 제공하는 사업으로 성공한 사례는 없지만 이러한 서비스에 대한 욕구는 매우 크다. 모두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에 불만을 느끼면서 객관적인 정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 3. 2. 21:31

 컴퓨터 회사인 애플을 보면 미국 경제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 수 있다. 애플은 미국에서 디자인과 소프트웨어를 만들지만 기기의 제조는 전적으로 중국에서 한다. 중국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이유는 반드시 싼 임금 때문만은 아니다. 제품 전체의 가치에서 생산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부가가치 제품일수록 크지 않다. 미국은 중국의 제조 산업이 제공하는 강점에 도저히 필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노동자과 산업체는 배가 불러서 신속한 변화 요구에 민활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반면, 중국 노동자와 업체는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어 애플의 어떤 요구에도 신속히 대응하여 맞춘다. 신속한 변화는 많은 스트레스를 수반하고 기득이권의 포기를 필요로 하므로 미국의 노동자와 업체가 중국에 필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미국은 새로운 기술 개발과 혁신으로 중국의 업체와 노동자가 따라올 수 없는 선발의 이익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신기술 개발이나 혁신은 고용의 증가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애플의 소프트웨어나 디자인 개발은 기기 제조에 비해 현저히 적은 인원을 필요로 한다. 경제활동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면서 이들 상대적으로 작은 수의 엘리트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높은 보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중류층을 뒷받침 하던 제조업의 수 많은 일자리는 점차 해외로 이전하면서 사라진다.  

미국에는 애플의 개발자와 같은 고급 근로자와 함께 외국으로 이전할 수 없는 하급 일자리만이 남는다.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애를 보고, 청소하고, 슈퍼마켓에서 진열대를 정돈하고, 공사장에서 일하는 등등. 이러한 일자리는 외국으로 이전할 수 없고 기계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많이 존재하지만 부가가치가 크지 않으므로 저임금 업종이다.

문제는 과거에 대학교육을 받은 중류층이 담당하던 일마저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도움으로 해외로 속속 이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콜 센터는 물론이고 자료 처리, 고객 관리, 회계처리, 디자인과 리서치에 이르기까지 기업 활동의 거의 전영역이 외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화이트칼라 업종 중 컴퓨터가 담당하기 어려운 창의적인 업무만이 미국에 남는다.

국내에 가까이 있으면 신속히 협의하고 조정할 수는 있으나, 요즈음 업무는 대부분 컴퓨터와 통신망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구지 근접해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강력한 노동 윤리와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된 인도의 젊은이가 미국의 별 볼일 없는 대졸 노동자보다 훨씬 생산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섭섭한 일이지만,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훨씬 바람직한 변화이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미국인이 열심히 노력하는 제삼세계의 인재보다 낮은 보상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 모두를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 볼 때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터무니 없이 큰 이익을 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미국 사회의 양극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문제는 양극화된 사회에서는 가진자와 못가진자간에 사회적 갈등이 커진다는 점이다. 미국인이 숭배하는 가치인 개인주의가 지속되는 한,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기회를 얻은 사람과 실패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커질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사회적 간극이 낳는 부작용을 새로운 이민자를 계속 받음으로서 피해가려 할 것이다. 새로운 이민자는 미국 사회의 바닥에서 시작하면서 열심히 일하므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안전판으로 기여해 왔다. 이들이 계속 들어오면 아메리칸 드림은 계속 살아있게 되고, 극심한 불평등에 대한 반발은 어느 정도 완화된다.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이면서 불평등이 극심한 냉혹한 사회를 지속할 것이다. 미국인의 마음속에서 “이익을 서로 나누면서 함께 잘 살아가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는 가까운 시일 내에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기미가 보인다. 물론 야후의 창업자인 제리양이나 구글의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같이 능력이 있는 세계의 젊은이들은 미국에서 큰 기회를 잡을 수있다. 미국은 이러한 세계의 인재들을 흡수하면서 활력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화려함 속에서 보통사람들은 허덕이면서 살아가겠지만 말이다. 

2012. 2. 28. 23:32

  근래에 들어 혼자 사는 사람이 많다. 전체 가구 중 일인 가구의 비율은 미국은 3분의 1을 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전체의 4분의 1을 넘겼다. 이들 중 절반은 노인 가구이며 나머지 절반은 젊은 사람이 차지한다. 특히 혼자 사는 여성의 비율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혼자 사는 것, 특히 여성이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 혼자 사는 것은 외로움, 불안정, 히스테리, 노처녀 등과 같이 부정적인 상태, 문제의 상태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혼자 사는 것의 좋은 점이 부각되면서, 혼자 사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보는 사회적 인식은 크게 변화하였다. ‘자유’, ‘구속에서 홀가분함’,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언제 건 행동에 옮길 수 있음’ 등의 매력이 새로이 발견된 것이다. 과거에는 경제적인 제약 때문에 좋건 싫건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했으나, 여성의 취업기회가 늘고 경제적인 독립을 누리게 되면서 구지 구속을 참고 지내야 할 필요성이 줄었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 좋은 것이다. 물질적 풍요가 낳은 산물이다. 마음에 맞는 사람과 안정된 관계를 오래 가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될 때 구지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홀로 자유로이 사는 사람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얼마나 답답해했던가. 관계 속에서 힘들어 할 때 마음 닿는 대로 발걸음 닿는 대로 홀가분하게 사는 것을 꿈꾼다. 비록 때때로 외로움을 느낄 테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의 불안정을 참아야 하지만 ‘자유’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신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혼자 있을 때 더 나다와지는 것 같다. 예술에 눈을 돌리고, 무엇이 가치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혼자있을 때 평소 안해보던 것도 시도하고 창의적이 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인지 모른다.  


 

2012. 2. 25. 22:04

   십여년쯤 전에 인터넷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절에 홈페이지를 만든적이 있다. 컴퓨터 전문서적을 보고 컴퓨터 언어를 익히면서 명령어를 직접 쳐서 만든 것이 화면상에서 홈페이지로 구현되는 것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내용을 업데이트하는 것이 힘들고 일상에 치이면서 방치해두었다가 결국 폐쇄하였다. 블로그를 만들어 본 사람들도 다들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처음 만들었을 때, 내글이 인터넷 상에서 공개되고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는 느낌은 자못 흥분하게 만든다. 그러나 처음의 신선한 느낌이 가시고, 일상에 바빠서 자주 글을 올리지 못하게 되고, 대부분의 블로그는 시작한지 몇달 지나지 않아 방치된다.
  
   수년전에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도구로 개설했던 이 블로그를 한동안 방치했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한다. 내가 매일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나의 삶의 보람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글을 쓰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가운데 성숙하고, 나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흥미있는 읽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나도 남들이 쓴 좋은 글을 읽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같이 사회에다 나의 노력을 되돌려 주려 한다. 

  세상에 돌아가는 일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삼는다는 목적에 부합하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세계관이 넓어지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한다.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의 모습을 독자들은 자못 흥미있게 바라볼 수 있으리라. 글을 쓰면서 나에게 솔직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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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28. 15:24

제 2장. 미국을 구별짓는 특징



흔히 미국의 특징은 ‘다양성’ 그 자체라고 지적한다. 이 말은 한마디로 미국의 특징은 이렇다고 규정지으려는 것이 무모한 노력임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올라서면서 한때 미국의 특징을 찾는 연구가 성행했다. 유럽과는 구분되는 미국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미국학(American Studies)이라는 학문 분과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의 문학 작품과 역사를 중심으로 연구하면서 총체적인 시각에서 미국인의 심성과 역사를 관통하는 고유한 어떤 것을 찾으려고 했다. 신화상징 학파(Myth-symbol school)라고 불린 이 학자들은 그들이 ‘미국 문명(American Civilization)’이라고 규정한 것의 정신적인 특징을 탐구했다. 한편 일부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들은 미국인의 국민성에 관해 좀 더 경험적인 연구에 몰두했다. 미국인은 타자 지향형 인간이라거나, 자아도취 상태에 있다거나,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거나 하는 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노력은 다문화주의의 도전에 직면해 수그러들었다. 미국인 모두에게 총체적으로 동질적인 무엇이 있다고 가정하고 미국의 정신이나 미국인의 국민성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과거에 미국의 정신이나 미국인의 국민성이라고 지칭되었던 것이 사실은 영국계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한 차별적 사고의 소산으로 드러났고, 단일한 특성으로 규정짓기에는 미국이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매우 특이한 나라’라는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미국의 뿌리인 유럽과 비교해 보아도 그러하거니와, 유럽인들이 정착한 다른 지역, 예컨대 남미, 캐나다, 호주 등과 비교해 보아도 그렇다. 물론 일본이나 중국 같은 비유럽 사회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더욱 크다. 앞 장에서 논의한 미국의 예외주의가 미국의 역사적 전개에서 서구 유럽과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본 장에서는 객관적 조건과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특성을 검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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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화의 기초 (목차)  (0) 2010.12.28
2010. 12. 28. 15:07



<이현송. 1996. 미국문화의 기초. 한울아카데미.>


머리말 5

 

제1장 미국의 신화와 예외주의 11

1. 미국의 신화와 상징 14

2. 미국의 이념 37

3. 미국은 얼마나 예외적인가? 59

 

제2장 미국을 구별 짓는 특징 67

1. 자연환경적 요소 68

2. 정치·경제적 요소 82

3. 사회·문화적 요소 92

4. 미국적인 것은 근대적인 것인가? 116

 

제3장 이민자의 나라 123

1. 시기에 따라 상이한 이민의 물결 125

2. 이민의 영향 154

3. 다민족 사회의 응집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182

 

제4장 미국의 지역문화 191

1. 지역 구분 193

2. 지역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 196

3. 지역성과 변화 209

4. 미국의 지역성은 사라지는가? 254

 

제5장 미국 사회에서 인종의 의미 263

1. 인종은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다 265

2. 미국인의 인종 분포 273

3. 인종주의와 인종 유지의 사회적 기제 277

4. 인종 문제의 역사적 설명 284

5. 다문화주의 논쟁 303

6. 인종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314

 

제6장 인종 문제의 다양성과 변화 325

1. 흑인은 왜 항시 새로운 이민자보다 뒤처지는가? 325

2. 적극적 차별 개선 프로그램을 둘러싼 공방 334

3. 히스패닉의 부상은 미국의 주류 문화를 위협하는가? 344

4. 아시아계 미국인은 ‘모범적인 소수자’인가? 352

5. 인디언의 집단 정체성은 지속될 것인가? 362

6. 백인 민족 집단은 백인이라는 단일 정체성으로 통합될 것인가? 369

7. 인종과 계급의 관계: 인종의 중요성은 사라지고 있는가? 374

 

제7장 개인주의와 미국인의 꿈 383

1. 개인주의의 의미와 구성요소 384

2. 미국 사회와 개인주의 가치관 398

3. ‘미국인의 꿈’ 이념 418

 

참고문헌 453


<머리말>

미국의 특징은 다양성 그 자체이다. 세계에서 미국만큼 자연환경이 다양한 나라도 없으며, 미국인만큼 서로 이질적인 국민도 없다. 전 세계에서 미국에 이민자를 보내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인 사이의 빈부의 차이는 그야말로 엄청나다. 세계적인 부자는 대부분 미국에 모여 있는 반면, 미국의 빈민가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비참함을 연출하고 있다. 미국의 범죄, 마약, 미혼모 문제는 비교를 초월하며, 미국인 100명 중 한 명은 감옥에서 생활한다.

다른 나라라면 이 정도의 다양성을 한 나라의 테두리에 포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대체로 다양성이 극에 달하면 분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미국인은 다른 어느 나라 사람보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 미국인은 거의 모두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며 다시 태어나도 미국에서 살고 싶어 한다. 이 책은 “어떻게 이런 사회가 가능한가?” 하는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생활과 문화는 세계인을 매혹시키는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아름다운 자연, 넓은 공간과 물질적인 풍요, 개인주의적인 자유와 독립성, 도전과 창의를 높이 사는 태도, 형식과 전통을 배격하고 효율과 실리를 중시하는 태도, 과학과 기술에 대한 신뢰, 적극적인 추진력과 낙관적인 사고방식 등 우리가 삶에서 기대하는 좋은 것은 모두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반면 상업주의의 폐해, 물질주의의 저속함, 엄청난 경쟁과 스트레스, 피상적인 인간관계와 소외, 환경 파괴 등 우리가 혐오하는 현대인의 삶의 문제 역시 미국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또 남을 가장 많이 돕는 사람일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세속적인 사회에서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신앙심이 깊을 수 있을까? 근대적 민주정치 체제를 최초로 건설한 나라이면서 어떻게 그렇게 인종차별이 만연할 수 있을까? 미국은 그야말로 모순투성이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에 대한 논의는 분과 학문에 따라 주제를 나누어 접근한다. 미국의 정치, 미국의 경제, 미국의 사회, 미국의 문화는 각각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문학, 철학 등에서 영역을 구분하여 논의한다. 역사학자는 주로 과거를 담당하며, 다른 학문 분야의 사람들은 주로 현재의 일에 집중한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미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렇게 전문적인 접근도 유용하겠지만, 그 못지않게 여러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학제 간의 연구가 필요하다. 이 책은 지역학적 관점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미국의 사회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미국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는 대체로 미국에 대한 인상을 피상적으로 나열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러한지’를 체계적으로 묻고 탐색하기보다는 ‘그렇게 보이더라’고 말하고는 그만이다. 이유를 탐색한다고 해도 단편적으로 나열할 뿐이다. 이 책에서는 가급적 피상적인 논의나 단편적인 나열은 지양하고, 미국 사회·문화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파헤쳐 보려고 노력했다. 미국인은 어떤 사람들이며, 왜 그런 태도와 성향을 가지게 되었는지, 미국 사회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미국 문화의 장점과 단점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묻는 질문들은 겉으로 보기에 여럿인 것 같지만 사실은 뿌리가 하나에 닿아있다. 이 책에서는 바로 현대 미국 사회·문화를 구성하는 것의 뿌리를 캐어 ‘왜 그러한지’를 밝혀보려고 한다.

사실 이런 질문은 한 사람이 탐구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실마리를 찾기조차 어렵다. 그동안 미국 사회·문화와 관련하여 책도 많이 읽고, 많은 사람과 이야기하고, 강의도 많이 했지만 아직도 명쾌한 느낌이 와 닿지 않는다. 이 책이 그런 노력의 중간 결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에 기술한 많은 아이디어는 책에서도 왔지만, 미국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생각나는 것을 발전시킨 부분이 적지 않다. 아마도 그런 직접적인 경험과 느낌이 뒷받침되어 있기에 이 책의 가치가 조금이나마 살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 책을 완성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었다. 미국학 분야에 눈을 넓히는 데 도움을 준 육군사관학교의 정연선 교수와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성경준 교수에게 감사한다. 필자에게 진솔하게 이야기를 해준 많은 미국인들에게 가장 크게 감사하고 싶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텍사스 주립대학교의 기드온 쇼버그(Gideon Sjoberg) 교수이지만, 이외에도 저자가 미국 사회·문화에 관심이 많은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이야기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어려울 때마다 항시 삶의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준 가족에게 감사한다.

 

'미국 사정 > 미국문화의 기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2장. 미국을 구별짓는 특징  (0) 2010.12.28
2010. 8. 15. 22:26
   일전에 미대사관으로부터 현재 주한 대사인 스티븐스의 사진집을 받고 간담이 서늘해진 일이 있다. 그 사진집에는 그녀가 1970년대 중반 순수한 처녀시절에 한국에 평화봉사단으로 와서 예산의 한 시골 학교에서 머물면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녀는 그당시 가난하나 소박하게 살아가던 우리나라 농촌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한국과 그 사람들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 한국의 농촌 마을을 돌아다니던 그녀가 3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로 우리나라에 온 것이다. 그 사진을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마치 그녀가 나의 과거를 꿰뚤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근래에 미국 대학생들 중에 재학 중 일이년을 해외에 나가 공부하면서 현지인의 생각과 관습을 체험하고 익히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특히 중동 지역에서 그곳의 대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현지인의 입장에서 중동 문제와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익히는 미국 학생이 늘고 있다. 이들은 미국 내에서 계속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없는 통찰력을 얻으며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에 돌아가면 중동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문제해결을 위하여 다른 방식의 접근을 할 수있으리라는 섣부른 자신감도 내비친다.

  일전에 미국에서 한달간 방을 임대해서 머물렀던 적이 있다. 집주인이 인도계 캐나다인으로 수년전에 미국으로 이민와서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친척은 인도, 캐나다,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하는데, 전화할 때 보면 대화 상대에 따라 인도말을 쓰기도 하고, 영어를 쓰기도 하고, 때때로 스페인어를 쓰기도 한다. 그의 고객 중 중남미계 이민자가 많아서 스페인어를 배웠으며 직장에서는 종종 스페인어를 쓴다고 한다.

   미국에는 그야말로 세계 구석구석에서 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미국에 가기 전에는 들은 적도 없는 동남아시아의 소수민족이나 중앙아시아 사람을 여럿 만났다. 이들은 미국인이 되고자 열심이다. 다양성이 극에 달하면 문제도 많겠지만, 다양성은 미국을 활력있는 나라로 만든다. 세계화 시대에 자신의 국민 중에 세계 곳곳에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힘이다. 한국과 거래하는 데 한국을 잘 아는 한국계 미국인을 활용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물론 현지인의 생각을 잘 이해한다는 것이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미국인도 많다. 미개한 현지인의 말과 생각은 그저 무시하고 눌러버리면 그만일 뿐, 군사적인 힘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소위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미국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오면 우방이고 아니면 적이라고 생각하니 더 무슨 말을 하랴. 중동 사람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그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데 불편하기만 할 뿐이라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상대를 잘 아는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미국은 세계 각양 각색의 사람들을 자신의 국민의 일부로 흡수하며, 미국 사람 중에는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현지인의 생각과 사정을 속속들이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2010. 8. 15. 15:34
    요즈음 미국은 9.11 테러가 났던 곳 근처에 이슬람 문화센터를 짓는 것을 허용할지 하는 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엇그제 오바마 대통령이 이슬람교의 라마단 축제를 맞아 미국내 이슬람 지도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해 미국인이 희생된 자리에 이슬람 사원을 짓는 것을 지지하는 듯한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이슬람 사원을 짓는 것을 지지하는 취지로 말한 것이 아니라, 미국은 여러 인종과 민족이 모인 다문화 사회이며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나라이므로 개인 소유지에 이슬람 문화센터를 짓는 것은 미국의 국시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미였을 뿐,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해명했다.

   두가지 측면에서 오바마 발언에 대한 미국인들의 비판을 생각해 볼 수있다. 하나는 미국이 다인종 다문화 국가로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미국인이 제법 많다는 사실이다. 많은 보수주의 백인들은 미국이 유럽을 뿌리로 하는 기독교 백인의 국가이어야 하며, 다른 피나 문화가 섞여이는 것은 미국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톤도 이런 사람 중 하나이다.

  두번째는 오바마는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이름 속에 후세인이 있는 것을 두고
선거때 많은 미국 사람들은 오바마가 이슬람교도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기독교도라는 증거가 엄청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믿을 수없다고 말했다. 사실 그들에게 오바마가 기독교도인지 여부가 마음에 걸린 것이 아니라, 그가 흑인이면서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성향은 정말 끈질기며 음험하기까지 하다. 정의, 형평, 사랑, 인권, 등 어떤 가치를 앞세워도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말로는 다른 구실을 내세우면서 반대하지만 마음의 밑바닥에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고집이 자리잡고 있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를 아무래도 자신의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 사람이 미국 백인중에는 참 많다. 형편없는 흑인들이 주위에 득실 거리고 이들을 내려다보고 살면서 자존심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똑 같은 피부색의 흑인을 존경할 수있겠는가?  경제위기 때문에 마지못해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용인하기는 했지만, 그가 크게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실패한 별볼일이 없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하는 백인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오바마를 바라보는 마음속은 착잡하며 이율배반적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정치를 잘하고 경제를 일으켜 세운다면 자신도 좀더 잘 살게 될 것이나, 그의 성공은 흑인이 백인보다 더 잘 할 수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그다지 기쁘지 않다. 

   이슬람 교도를 자신과 같은 미국인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도 같은 심리이다. 이들은 이슬람교도를 이등 시민으로 간주하며, 자유 평등이라는 미국의 국시가 그들에게는 적용될 수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과거 흑인 노예나 인디안에게는 미국의 헌법을 적용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은 자유 평등을 실현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처럼 말이다.

   그런데 역사는 순환하는 것이라서, 이들 보수주의 백인들도 결국 소수자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백인들은 애를 많이 낳지 않으므로 아무리 이민을 막는다고 해도 유색인의 비율이 증가하는 것이며, 유색인이면서 성공한 사람이 늘면서 인종주의적 생각을 포기하는 백인들이 늘 것이기 때문이다. 백인이 아니고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이 동등한 미국인으로 대접받는 날은 빠른 시일내에 오지는 않겠지만, 미국에서 보수주의 백인의 위세가 갈수록 약해질 것은 분명하다.


 
2010. 8. 15. 14:38
  몇년 전만 해도 전자책이라고 하면 기술에 미친 사람이나 시험적으로 사용해보는 것으로 알았다. 미국 신문에서 근래까지 아마존의 킨들이라는 전자책 실험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지 회의적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라고 하면 일단 부정적인 이유를 먼저 앞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그런데 소개하는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올해 다섯달 동안 시장에서 거래된 책 중 8.5%가 전자책이었다고 한다. 앞으로 삼사년 내에 전자책 시장은 40%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정말 빠른 변화의 속도이다. 불과 15년전에만 해도 인터넷을 들어보지도 못했으며, 구글이라는 검색엔진은 불과 10년전에 처음 나타났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은 이제 6년째이며, 트위터는 2~3년 밖에는 안된다. 블랙베리라는 스마트 폰이 몇년 됬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일반 사람이 전화기로 인터넷을 이용한 것은 이삼년전에 나온 애플의 아이폰이 처음일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빠른 변화에 적응할 수있을까? 대답은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과거 기술에 익숙한 사람은 과거의 기술을 계속 이용하는 관성을 지속한다. 생존의 위협 앞에서 마지못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리 해도 새로운 기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생활하고 일하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결국에는 새로운 기술을 익숙하게 사용하면서 성장한 새로운 세대가 이들을 대체하면서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은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나는 컴퓨터 1세대이다. 대학교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으며, 윈도우 이전 운영체제인 도스 프로그램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씨름했었다. 90년대 후반 홈페이지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html언어로 직접 타이프 치면서 나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요즈음 이미지 중심의 컴퓨터 사용이나, 이동성 중심의 인터넷 활용이나, 일 이외의 용도로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는 데는 친숙치 못하다. 먹고살기 위해 이러한 기술을 부지런히 쫒아가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몸과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래도 문자 중심의 컴퓨터 사용,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인터넷 활용, 일을 하는 도구로서 컴퓨터와 인터넷 세대에서 벗어날 수없다. 그렇다면 현재 하고 있는 블로그는? 아무래도 일 쪽이다. 놀면서까지 컴퓨터 앞에 있고 싶지는 않기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마도 10년 이내에 전자책이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변화 수용 속도는 정말 감탄할만 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잘 이용하는 체 해야 할 것이다. 나도 조만간 전자책을 많이 읽게 되겠지만 얼마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일을 위해서라면 전자책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놀면서 흥미로 읽을 때는 종이책을 고집하면서 살다가 죽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