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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11. 10:11

   우리나라의 안철수, 일본의 토루 하시모토,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파키스탄의 임란 칸,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기성 정치권에 속하지 않은 아웃사이더로서 각 나라의 정치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과거에 정치를 하지 않았으므로 기성 정치권의 나쁜 관행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권자에게 매력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http://www.economist.com/node/21563719

Fighting monsters: Political outsiders are challenging Asia’s traditional elites


   일본을 제외하고 민주주의의 역사가 깊지 않은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는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되어 있다. 정치인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욕을 취하고, 반칙을 일삼고, 기업가와 결탁하여 자신들만의 특권 집단을 만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나랏돈으로 자식에게 집을 사준 일이나, 부유층이 국적을 바꾸면서까지 자식을 외국인 학교에 보내는 행태를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정치인과 고위 관료가 혼인과 직장 이동을 통해 재벌과 이익을 함께 하는 것, 국회의원이 되면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것, 판사와 검사는 재벌의 반칙 행위에 대해 관대한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것, 정치인들은 서로 싸우면서 국민의 복리보다는 권력 획득에만 관심을 두고 자신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한 통속이라는 느낌. 이게 바로 우리나라의 지도급 인사들이라니, 하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보통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선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들 사이에도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려 한다. 사람들은 남으로부터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긴장하며,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반칙을 저지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운전하면 뻔뻔하게 끼어들고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흔히 본다. 기업들은 속임수를 써서 고객의 돈을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면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곧이곧대로 규칙을 지키면 손해 본다는 생각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기에 기회만 닿으면 반칙을 저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전혀 반칙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성인이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부패와 무능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제이다. 모두들 반칙을 저지르면 시스템 전체의 효율은 약화되는데, 바로 이것이 후진국인 이유이다.  

   우리는 새로운 지도자를 갈망한다. 능력이 있고, 떳떳하고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성취한 사람을 찾는다. 안철수 현상은 바로 그러한 갈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므로 사회의 관행과 완전히 동떨어져 행동할 수는 없다. 한국의 중상류층이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기에, 안철수도 그러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남들이 하는 반칙의 행위에 손을 적셨을 것이다. 한국의 기업 문화가 술 접대를 하지 않고는 일을 성사시킬 수 없는 관행이기에, 안철수도 룸살롱에서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면서 거래처를 접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군대가 상관이 부하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행위를 용인하는 문화이기에, 안철수도 그러한 군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치는 혼자 할 수없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정치를 하려면 세력이 필요하다. 기성 정치권과의 타협과 연대 없이 정치 아마추어들만 모여서 선거라는 게임에서 이기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선거가 그렇게 간단한 게임이었다면, 기성 정치인들이 이전투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철수 또한 어떻게든 기성 정치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이 과정에서 기성 정치권의 요구에 일정부분 양보할 것이다.

   기성 정치권을 그렇게 만든 것은 우리들 유권자이다. 유권자들이 그런 정치 관행을 용인하고 표를 통해 지지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그런 정치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유권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안철수는 기존 유권자들의 관행과 타협을 모색할 것이다. 자신들의 좁은 집단 이익을 우선시 하는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전체의 대의를 생각하라는 구호는 별반 설득력이 없다. 사람들은 겉으로 말은 어떻게 하든 자신의 좁은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유권자가 변해야 정치가 변한다는 말은 진리이다. 그 반대로, 정치가 변해야 유권자가 변한다는 말은 맞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안철수가 우리나라의 정치판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유권자의 정치의식이 과거보다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기성 정치권에 충격을 가져오는 신인 정치인의 등장은 성공하던 실패하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유권자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듯이 정치권도 한 번에 바뀔 수 없다. 여하간 새로운 정치인의 등장은 기성 정치권의 관행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가 민주화 된지 30년이 안되었는데, 이렇게 정치가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변화가 우리나라만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바퀴는 일단 굴러가면 좀처럼 되돌려 후퇴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니,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 기대하며 마음 편히 정치판의 돌아가는 사정을 지켜본다. 

2012. 10. 7. 14:52

   사람들은 학교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하며 하루가 멀게 교육 제도를 바꾼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교육 제도를 자주 바꾸는 데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 것은 문제의 근원이   학교 교육 자체보다는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http://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12/10/why-kids-should-grade-teachers/309088/

 Why Kids Should Grade Teachers

By Amanda Ripley


   어느 사회나 학교 교육은 사회적인 성공의 중요한 통로이다. 과거 토지 소유나 신분이 지위와 권력의 기반이었을 때에는 학교 교육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요즈음 ‘지식 경제’(Knowledge Economy)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경제활동에서 지식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교육의 지위획득 기능은 더 커졌다.

   문제는 학생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학교 자체가 아니라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점에 있다. 사람들은 학교 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장치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어떤 가정 배경인가에 따라 교육 기회는 큰 차이를 보인다. 교육 수준이 높고 소득이 많은 부모의 자녀는 그렇지 못한 부모의 자녀보다 평균적으로 학업 성취도가 월등하게 높다. 일간 신문에서 서울대 학생의 부모의 상당수가 강남에 거주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사실 모든 초등학교 학급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공부를 못하는 학생보다 부모의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다.

   본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학업 성취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배경에 따라 성취가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을 사람들은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평등과 민주주의 이념은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평등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 제도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능력이 자녀의 학업 성취로 고스란히 이전되는 것을 허용한다. 자신이 어떤 부모에게서 출생하는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사람들은 이런 부정의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없는 사람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은 불편해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맨날 떠들면서 이리저리 뒤집어보아도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을 외면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아우성만 지속될 것이다. 

   미국은 이런 점에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종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열등한 지위에 있는 흑인과 히스패닉 자녀의 낮은 학업 성취도는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이다. 유색인이 다니는 학교의 수준은 정말 열악하다. 학교의 시설은 낡고 부족하여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는 환경이며, 선생의 수준이나 가르치려는 의욕은 낮으며, 학생의 배우려는 의지 또한 매우 낮다. 많은 유색인 학생들이 매일 집에서 복잡한 사건을 경험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학교에 오는 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머리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반면 중류층 백인이 다니는 학교는 좋은 시설과 안정된 가정 환경과 부모의 관심과 선생의 열의와 학생의 의지가 결합하여 높은 학업 성취를 보인다.

   미국의 교육 개혁은 대체로 유색인 학교의 낮은 학업 성취도를 어떻게 끌어 올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중류층 학생의 학업 성취도 또한 국제 비교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이면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고는 있다. 미국의 많은 교육학자들이 복잡한 방법론을 동원하여 문제를 분석하고 매일 같이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오지만 그리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사실 효과를 보이는 개선책은 대체로 교육의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여기 소개한 기사에서 지적하는 개혁 방안은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자녀의 학업성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선생이 좋은가 여부는 학생의 학업 성취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어떻게 선생의 질을 높일 것인가, 어떻게 나쁜 선생을 솎아낼 것인가, 어떻게 수업의 질을 개선할 것인가는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다른 방법보다 학생이 선생을 직접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높다.

   학생은 선생과 오랜 시간 함께하고 선생이 제공하는 교육을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이므로 어느 외부 전문가보다 더 선생과 선생이 제공하는 교육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보다 선생에 대한 평가가 더 공정하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 편차는 매우 적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다른 학생들 간에도 선생에 대한 평가는 일관되다. 심지어는 유치원 학생들 조차도 자신의 선생을 잘 평가할 수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반면 학생의 학업 성취도로 선생을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선생의 질보다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복잡한 방식으로 부모의 사회경제적인 수준 차를 통제하여  학생의 학업성취도에 따라 선생과 학교의 질을 평가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공정성이 결여되어 반발을 낳는다. 우리나라에서 근래에 일제고사를 이용하여 학생의 성취도가 떨어지는 학교에 불이익을 주는 정책이 옳지 않다고 비판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을 잘 알기 때문에 복잡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단순하면서 직접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다음의 다섯 개의 문항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 이 수업을 듣는 학생은 선생님을 존경한다.

2. 우리 반 학생들은 선생님의 통제를 잘 따른다.

3. 우리 반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4.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거의 매일 많은 것을 배운다.

5. 이 수업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는다.


  학생은 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물론 선생은 학생의 평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평가받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평가가 자신이 받을 보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면 더더욱 평가를 기피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공적인 일이므로 공적인 절차에 따라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보상이 따르는 일에 대해 평가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평가가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며,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기 어렵기때문이다. 학생의 평가가 오류투성이라면 모를까 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이것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평가는 학생은 물론 선생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학생들은 매우 냉정하며 공정하게 평가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관심을 덜 기울이거나, 수업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배우는 것이 많지 않은 수업은 학생들이 기피하며 낮게 평가한다. 학생의 이해도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면 반드시 낮은 평가를 받는다. 학생이 배우는 양과 수준과 속도에 관심을 기울이며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선생을 학생들은 선호하고 높은 평가를 내린다. 점수를 잘 주는 선생의 강의에 많은 학생이 몰리지만 그러한 강의에 대해 반드시 후한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한 강의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불만을 표하는 학생이 반드시 나온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선생의 강의를 평가할 때 비교적 후한 점수를 준다. 5 만점으로 평가했을 때 웬만큼 괜찮다고 생각하면 평균 4 점 이상이다. 평균 3.5점 이하를 받으면 학생이 선생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한학기를 가르치고 나서 선생인 나 자신에게 불만족했던 강의는 거의 반드시 4.0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학생들도 나와 동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선생이 학생의 평가를 받지 않았던 것은 우리사회의 권위주의적인 전통 때문이다. 사회적 권위가 합리성을 제약했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것이 선생의 권위에 대한 침해라고 반발하지만, 열심히 잘 가르치는 선생에게는 학생이 존경하고 좋은 평가를 내린다. 학생은 선생의 인간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수업을 통해 학생에게 한 일을 평가하는 것이므로 인권 모독과는 상관이 없다. 학생들은 평가를 통해 선생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개선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교사 노조는 선생에 대한 학생의 평가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는 이기적인 주장일 뿐이다. 대부분의 선생은 겉으로 드러내 말하지는 않지만 학생의 평가가 대체로 공정하고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 엉터리로 평가하지만 학생 전체에 대해 평균을 내면 일부의 왜곡된 평가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제도가 효과적으로 시행된다면, 전혀 준비하지 않고 수업에 임하는 선생이나, 학생의 학업 성취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선생은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나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그런 무책임한 선생을 여러 명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수업을 매일 들으면서 느꼈던 좌절과 분노를 기억한다. 나는 그런 선생을 전혀 존경하지 않았으며, 어린 나이에도 그들을, 그리고 그런 수업을 억지로 들어야 하는 나를 불쌍하게 느꼈다. 그런 선생은 자신이 잘 가르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기에 학생의 학업 성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것이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어떤 교육개혁보다 더 혁명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2012. 10. 5. 11:41

근래에 어느 곳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편집자가 내 글을 난도질 하여 최종 원고는 초고와는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다. 다음은 내가 처음에 쓴 초고이다. 



뉴욕은 세계인이 방문하고 싶은 도시 중 1위로 지목된다. 왜 세계 사람들은 뉴욕을 찾을까? 지금 뉴욕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도 항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에 미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뉴욕은 사람들이 떠나고 빈곤과 범죄가 판치는 무서운 곳이었다. 그 당시 센트럴 파크는 대낮에도 걸어 다니기가 꺼려졌다. 1990년대에 미국 경제가 되살아나면서 뉴욕은 부활하였다. 인구가 늘고 유명 연예인과 부자가 뉴욕에 산다는 소문이 퍼지고 기업이 뉴욕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뉴욕은 모든 미국인이 한번쯤 살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렇다고 뉴욕의 생활이 다른 곳보다 풍족하고 편하기 때문은 아니다. 뉴욕의 집값은 미국에서 가장 비싸기에 모두들 조그만 아파트에서 옹색하게 산다. 뉴욕의 주차비는 엄청나기에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서 출퇴근한다. 미국의 상징인 무한한 풍요와 소비지상주의는 뉴욕 사람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뉴욕의 매력은 ‘다양성’에 있다. 뉴욕은 예전부터 미국으로 이민자가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이들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뉴욕에 자신들만의 민족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19세기에 미국에 온 독일인,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유태인, 등 유럽의 이민자들이 집단적으로 살던 곳은 지금도 자취를 남기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훨씬 다양한 사람들이 뉴욕으로 몰려왔다. 중국인, 인도인, 중남미인, 한국인, 베트남인, 러시아인, 중동인, 아프리카인, 등등. 뉴욕에서 만나기 힘든 나라 사람은 아마 북한이 유일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그것도 각각 적지 않은 수가 한 도시에 모여들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그들은 고유의 언어와 음식과 관습을 가지고 왔다. 성서에 나오는 바벨은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안 되어 혼란에 빠졌다고 하는데, 뉴욕은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함 덕분에 융성하고 있다. 다양성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삶의 활력을 제공한다.

뉴욕의 삶은 지루할 겨를이 없다.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을 매일 접하는 것은 때로는 혼란스럽지만 신선한 경험이다. 피부 색깔은 물론, 얼굴 표정, 옷 입는 스타일, 치장하는 방식, 등 외모에서 차이가 난다. 서로 알게 되면, 행동거지나 예의범절, 가족 관계,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어제 본 티브이 드라마, 생각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나와 약간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길에서, 전철에서, 직장에서, 식당에서, 공원에서, 슈퍼에서, 집주위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때때로 문득 느낀다.

아시아 사람은 예의가 바르고 성실하며, 흑인은 정이 많으며, 인도 사람은 계산이 빠르며, 동유럽 사람은 무뚝뚝하고 속을 알 수 없으며, 베트남 사람은 영리하며, 중남미 사람은 열심히 살지만 기분파다. 뉴욕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뉴욕의 음식 문화는 다양하다. 미국의 고유 음식이라고 하면 햄버거와 스테이크 정도일 텐데, 뉴욕에서는 특색 있는 요리를 싼 가격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길모퉁이 피자집은 정통 이탈리아식 피자를 화덕에 구워서 내놓으며, 그 옆 인도 음식점에는 인도 사람이 만드는 특이한 향의 카레 요리가 미각을 자극하며, 그 옆 중국 음식점에는 중국말을 하는 주방장이 만드는 중국 요리가 가지 수를 셀 수없이 많으며, 그 옆 멕시코 음식점에는 타코 요리가 싸고 맛있으며, 그 옆 타이 음식점에는 일전에 태국 여행에서 맛보았던 타이 요리를 타이 여인이 친절하게 서빙하며,... 무궁무진하다. 이들 음식점의 주요 요리만 돌아가며 먹어도 한 달 내내 같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 이 모두가 그 나라 사람들이 고유의 재료로 만드는 ‘정통’ 요리이다.

뉴욕에는 볼거리가 넘쳐난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대체 몇 개인지 셀 수 없이 많다. 다양한 주제의 박물관이 있다. 인류 문명의 궤적을 보여주는 권위 있는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고전 미술 중심의 미술관, 최근의 작품을 전시하는 현대 미술관, 유태인 대학살 박물관, 중남미 문화 박물관, 소방 박물관, 금융 박물관, 디자인 박물관, 등등. 박물관과 미술관이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아이디어를 집약해서 보여준다면, 뉴욕의 수많은 갤러리와 부티크는 아름다움이 요즈음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말해준다.

뉴욕에서는 거의 매일 어디에선가 큰 전시회가 열리고 다양한 주제의 행사가 펼쳐진다. 요즈음 한창 진행되고 있는 뉴욕 패션 주간의 행사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를 위협하고 있다. 특히 뉴욕에 사는 다양한 민족들이 벌이는 민족 축제는 뉴욕 생활에 활기를 더한다. 이들은 맨해튼의 번화가에서 화려한 퍼레이드를 벌인다. 남녀노소가 함께 행진을 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구경꾼에게 손을 흔든다.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동네 전체에 만국기가 휘날리고, 흥겨운 음악이 거리에 넘치고, 노점 좌판에서는 민족 고유의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가게에서는 왕창 세일을 하고, 사람들은 곳곳에서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들이 서로 즐기는 모습을 보면 이방인인 나도 왠지 즐거워진다.

타임 스퀘어는 뉴욕 도심에 있는 교차로 광장인데 가장 뉴욕다운 곳이다. 화려한 광고 전광판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집채만 한 전광판은 폭탄을 퍼붓듯 정신없이 이미지를 쏟아 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독수리가 날다가, 란제리만 입은 여인이 요염한 포즈로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일렬로 건장한 젊은이들이 행진한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은 촌사람이 명동에 처음 온 것 같은 표정으로 인파에 떠밀려 간다. 껴안고 키스를 하는 사람들, 광장 계단에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 움직이는 관광버스 지붕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며 에너지를 느끼고 즐거워한다.

뉴욕이 1990년대에 부흥하게 된 것은 미국이 지식경제로 이전하면서이다. 지식을 다루고 지식을 생산하는 전문직이 경제를 주도하면서 다양성은 각광을 받는다. ‘창의적 계급’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아이디어가 삶의 핵심이다. 이들에게 단조로움이란 쥐약이다. 이들은 다양성을 접하면서 활력을 얻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산한다. 뉴욕의 지역신문인 뉴욕 타임즈가 전국적으로 지식인들이 구독하는 신문이 된 것은 당연하다. 뉴욕은 아이디어 산출의 중심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적인 삶이라고 하면 교외에 잔디밭이 있고 주차장이 넒은 집에 살면서, 주말에는 거대한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내고, 풍족하게 소비하는 생활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편할지는 모르지만 단조롭고 지루하다. 교외는 호기심을 질식시키는 공간이다. 반면 뉴욕의 거리는 항시 사람으로 북적이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하고 새로운 자극을 받는 곳이다. 뉴욕의 다양성을 탐내는 사람은 젊은이만은 아니다.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거리에서 한가하게 거니는 노인을 흔히 마주친다.

물론 뉴욕의 삶은 자극이 많기에 때로는 피곤하다. 한국 사람은 이런 삶에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서울과 다른 점은 뉴욕에는 사람의 다양성과 그것이 빚어내는 다양한 문화가 있다. 바로 그것이 뉴욕을 활기차고 호기심 넘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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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5. 11:37

한동안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 두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이 블로그가 운영자로부터 폐쇄 통지를 받아 한동안 접속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며, 둘째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보니 선뜻 글을 쓸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때문이다. 

블로그 운영자인 '다음'에 알아본 결과 이 블로그가 스패머로 신고되어 폐쇄되었단다. 음란물을 유통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블로그의 스킨에 여러개의 스팸 사이트가 연결되어 있니 스킨을 바꾸고 스팸을 제거하라는 지시이다.  그것도 모르고 이 블로그에 첨부한 글과 사진이 저작권 위반으로 신고되었다고 생각하여 글에 첨부된 파일을 모두 지우겠다고 말했다. 이 블로그에 첨부한 글은 저작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퍼온 것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저작권을 위반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이 매거진의 온라인 판에 공개된 것이고, 영리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번에 블로그가 폐쇄된 것이 저작권 위반 때문은 아니지만 이것을 알면서 계속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제부터는 기사 파일을 첨부하지 않고 링크 주소와 기사의 제목을 붙이는 정도로 해야겠다. 그래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높이고 모양을 보아서라도 첨부하는 쪽으로 타협을 보려고 한다.  

기사 파일은 링크된 주소에서 다운 받을 수있지만 혹시 어려운 경우에는 원문을 요청하는 댓글을 달면 메일로 보내는 방식을 취하려고 한다. 참고로 내가 많이 보는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읽는 방법을 소개한다.  

뉴욕 타임즈는 근래에 온라인 구독을 유료화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료화한지 1년이 지났는데 상당한 수의 유료 독자를 확보했다고 한다. 월 구독료가 20불 남짓으로 큰 돈이 아니기는 하지만, 인터넷이외에도 스마트 폰이나 아이패드로 신문을 읽을 수있게 한 것이 유료 독자를 모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모바일 환경이 신문의 유료 구독률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뉴욕 타임즈를 온라인으로 읽을 경우 한달에 10개의 기사만 무료로 제공되는 제한을 걸어 놓고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 설정에서 방문자 기록과 캐쉬를 삭제하여 초기화할 경우 이러한 제한이 풀리기 때문에, 사실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온라인으로 기사를 읽는데 어려움은 없다. 신문사에서도 이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로그온을 해야만 기사를 읽을 수있게 하면 엄격하게 관리할 수 있지만, 아마도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렇게 운영하는 것 같다. 

내가 두번째로 꼼꼼히 읽는 잡지는 이코노미스트이다. 이것은 일부 기사의 경우 기사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공짜로 보도록 제한을 걸어놓았다. 대체로 흥미있고 심층적인 분석 기사들은 이러한 제한이 걸려있다. 이러한 기사의 전체를 읽으려면 로그인 해야만 한다. 나는 잡지를 구독을 하고 있으므로 기사는 오프라인 상태로 읽고 스크랩의 목적으로만 온라인 사이트에 로그인해서 다운받는다. 이 블로그의 독자 중 전체의 기사를 다운받고 싶은 분은 댓글로 요청하면 내가 저장한 글을 보내주겠다. 

세번째로 꼼꼼히 읽는 잡지는 더 아틀랜틱 몬슬리라는 잡지이다. 이것은 다행히도 아직까지 유료화가 되지 않아서 언제든지 접속이 가능하며 과거의 기사도 검색해서 읽을 수 있다. 

기타 간간히 읽는 것으로, 영국에서 발행하는 가디언이라는 신문은 무료 접속이 가능하며, 타임즈, 하퍼즈 위클리, 뉴욕커, 더리퍼블릭, 더 내이션, 아메리칸 프로스펙트, 휴머니스트 등의 잡지는 모두 로그인을 해야만 기사의 전체를 읽을 수있다. 나는 때때로 사이트에 방문하여 흥미있는 글이 있는지 훑어보고 꼭 전문을 읽고 싶으면 뉴스 데이터 검색 서비스에 접속하여 전문을 다운로드 받는다. 

영미권의 지성지의 경우 한국의 독자층이 넓지 않으므로 좋은 글을 널리 보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은 하지만, 본인이 희망하면 얼마든지 구해서 볼 수있으므로 구지 실정법을 위반하면서까지 블로그를 운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선의로 시작한 일이 제약을 당하는 경험을 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여하간 앞으로도 블로그에 유익한 글을 계속 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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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3. 22:06

최근에 필자가 학술발표를 한 글을 간단히 소개한다. 아직 진행되고 있는 연구로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정도이다. 



 요즈음 한국인에게 “미국을 좋아하는가?” 혹은 “미국을 좋게 생각하는가?” 하고 물으면 한마디로 간단하게 답을 얻기 어렵다. 아마도 1970년대에 이런 질문을 했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별 주저 없이 긍정적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학자들은 1980년 광주항쟁 이래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점차 변하여 이제 전적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데 동의한다.

그렇다고 “미국을 싫어하는가?” 혹은 “미국을 나쁘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한국인은 많지 않다. 요컨대 요즈음 대다수 한국인은 미국에 대해 ‘그렇게 좋지도 싫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과거에 흔히 거론되던 ‘친미․반미’의 인식틀은 더 이상 한국인에게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인은 미국과 여러 면에서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국의 언론은 항시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따라서 한국인은 미국에 대해 자기 나름의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친미 아니면 반미라는 흑백의 일차원적인 잣대 대신에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을 반영하는 다섯 가지의 차원을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미국을 좋아하는지, 얼마나 미국을 신뢰하는지, 얼마나 미국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얼마나 미국을 경험하였으며 알고 있는지, 미국의 전반적인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이다. 각각의 차원에 대해 별도로 측정해 본 결과 놀랍게도, 한국인은 미국을 어느 정도는 좋아하지만 그리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한국인이 미국을 좋아하는 정도도 그리 높은 것은 아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전체의 4분의 1에 달한다. 미국의 수준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이지만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반면 한국인의 대부분은 미국이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인은 그들의 주장에 별로 동조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미국에 대한 생각은 복합적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이지만 그리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대체로 한국 사람들의 생각이다. 한국인은 미국이나 미국인에 대해서도 그리 크게 감정적으로 끌리지 않는다. 미국의 풍요가 부럽기는 하지만 미국의 체제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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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16. 23:02

   2005년 11월 어느 날 미국의 미시간 주에 칼라마주라는 인구 74,000명의 조그만 도시에서 교육감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제부터 이 도시에서 졸업한 고등학생은 누구든지 그 주에 있는 공립 대학교에 진학하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는다. ‘약속’(Promise)라 명명된 이 프로그램에 소요되는 재원은 독지가가 기부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절대 비밀로 한다.

 

NYtimes_FreeCollegeScholarship.hwp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무슨 장난도 아니고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하냐는 부정적인 반응에서부터, 돈이 없어 대학갈 꿈도 꾸지 못했는데 대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뛸 듯이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에 이르기까지. 교육감이 직접 발표를 했으니 완전 거짓은 아니겠지만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발표를 한 이래 지금까지 7년 동안, 총 2,500명이 대학을 갔으며 3천 5백만 달라 (한화로 약 390억원)의 돈이 장학금으로 지불되었다. 이는 각 학생당 매 학기에 4천 2백 달라(한화로 460만원)가 평균적으로 지원된 것이다. 실제로 약속이 지켜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알아보자. 이곳은 과거에 대표적인 산업도시였다. 한때는 GM 자동차 공장이 있었고, 대규모 제지 공장이 있었고, 업존이라는 제약회사의 큰 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미국의 산업시설이 싼 임금을 찾아서 해외나 남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현재 이 도시에는 이렇다 할 산업 시설이 없다. 공장이 이전하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빈곤과 범죄가 심해졌다. 학교의 질은 형편없어졌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손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미국 중서부의 다른 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퇴락의 운명을 겪었다.

  그 동안 이지역의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서 온갖 처방이 다 동원되었다. 경제 전문가의 처방 중에 안 써본 것이 없었다고 한다. 떠나는 회사를 붙잡기 위해 세금을 깍아 주는 것은 물론, 큰 경기장이나 공원 시설 등 이 도시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토목공사에 이르기까지 소위 ‘경쟁력 강화 위원회’에서 머리를 짜낸 모든 처방을 써보았다. 도시 활성화를 위해 전문가들이 고안한 64가지나 되는 방안을 실행했으나 도시가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면서 공립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대학갈 희망을 안겨주면 빈곤에 찌든 이 도시가 활성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배경이라고 한다. 과거 이 도시의 산업이 활발하던 시절 지역사회를 위한 많은 자선활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전통이 남아 과거에 이곳에서 사업을 일으켜 엄청나게 큰 돈을 번 사람이 지역의 번영을 위해 돈을 내 놓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출발한 ‘스트라이커’ 라는 의료기기 회사의 창업 가족이 돈을 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7년간 390억원을 댔으니 매년 약 55억 정도 지출한 셈이다. 사실 미국 거부의 재산이라면 이 정도의 지출은 감당할 만하다. 이 실험은 현재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교육 부문에서는 단기간에도 눈에 띠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 공립학교 학생의 학업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고등학교 중퇴자 비율이 현저히 감소하고, 대학을 진학하는 학생이 크게 증가하였다. 교육영역 밖의 효과는 아직은 제한적이다. 인구 감소가 멈추었으며,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지역사회로 조금씩 되돌아오면서 산업이 활성화될 조짐을 보인다. 교육 외의 영역에서는 아직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지 않지만, 교육에 대한 투자는 장기적으로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므로, 이러한 실험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큰 성과를 거둘 것이 분명하다.

  교육 투자를 통해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아이디어는 참신하다. 지식 경제로 접어들면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소득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고등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은 일할 곳이 사라지는 추세이다.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기술이 없는 사람은 최저임금의 불안정한 일 이외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문제는 최저임금의 일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근로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섣부른 경제 활성화 정책에 돈을 쏟아 붓는 것보다는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묘책인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교 등록금을 공짜로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고등교육에 큰돈을 쓰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세상일에는 다 순서가 있다. 그러나 가난한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면 그들도 대학에 가고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꿈을 불러 넣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은 이를 실제 실현할 수 있는 사회에서만 사람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다.

  부모를 잘 만나서 누구는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가고 누구는 대학을 꿈도 꾸지 못하는 사회에서 태어난다면, 불리한 쪽에 선 사람은 성공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회를 원망하고 돌을 던질 것이다. 살기 좋은 사회란 자신이 어떤 패를 뽑을지 미리 알지 못하면서도 선택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을지. 아무리 소득이 높아지면 무엇 하는가?  

2012. 9. 9. 22:31

  북유럽은 정말 흥미롭다. 나만 아니라 미국인이나 유럽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 세계에서 가장 삶의 질이 높은 나라, 부패가 없고 투명한 나라, 삶의 위험을 국가가 보장해 주는 복지국가 모델을 실현한 나라, 국민의 정치 참여가 높은 나라, 소득의 거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고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이 공무원인 나라,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 극빈자가 없고 범죄율이 낮은 나라, 부유하며 일하는 시간이 적은 나라, 기술과 산업이 고도로 발달된 나라,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갈등이 없으며 모든 문제를 협의하여 가장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나라,  세련된 디자인과 높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나라, 남녀 평등의 수준이 최고인 나라, 자연이 매우 아름다우며 인구밀도가 낮아 공간이 풍부한 나라,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하는 나라, 노벨상을 제정한 나라.


Economist_BloodyScandinavians.hwp


  이렇게 말하면 이 나라의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90년대 초반 극심한 경제 불황을 겪었으며, 근래에 이 나라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으며, 실업률이 올라가고 복지 혜택이 축소되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으며, 사람들이 무뚝뚝하며, 무엇보다 겨울이 길고 혹독하다. 핀란드는 자살율이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높다. 노르웨이의 해저 유전을 제외한다면 자연자원도 별로 없다. 노르웨이의 물가는 또 얼마나 비싼가? 방문자들 마다 거의 두배에 가까운 생필품 가격에  깜짝 놀란다. 근래에 노르웨이에서는 외국인을 배척하는 극단주의자가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북유럽은 미국보다는 한 단계 앞서 발전한 사회인 것 같다.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을 선두로 신보수주의가 출현하면서 적자생존의 냉혹한 경쟁 사회가 출현하였다. 경제의 효율성은 높아졌으나 불평등이 확대되면서 능력이 없거나 실패한 사람은 좌절 속에서 사회에 돌을 던지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엄청난 부가 창출되기는 하였으나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빈곤은 확대되었다. 모두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든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대신 남과 경쟁해서 내가 더 잘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로 남았다.

  반면 북유럽 사회는 노동자의 세력이 자본가 못지않게 크기에, 사회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협의하여 문제를 풀어가는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하였다. 기업의 의사 결정권이 자본가의 위임을 받은 경영자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가 주인으로서 기업 경영에 함께 참여하는 경제민주주의가 실시되고 있다. 기업이 어려움에 빠지면 자본가와 노동자가 문제를 해결해 가는 노력을 함께 하고 희생을 분담하는 그런 경제체제이다. 영미식 자본주의에서 보면 참으로 이상한 사회이다.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니 말이 되는가? 그렇게 하여서 어떻게 다른 기업과 경쟁하여 이기며, 새로운 혁신이 도입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실제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이 많으며, 창의성이 높이 발휘되며, 엄청난 부가 만들어지고 있다. 북유럽은 인구도 많지 않은데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놀랍다. 스웨덴의 인구는 천만명에 불과하며, 이웃 노르웨이나 핀란드는 오백만명을 넘어서지 않는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이러한 북유럽의 독특한 사회체제에 더하여, 북유럽의 예술적 독창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북유럽은 예술적 독창성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아바(ABBA) 같이 독창적인 음악을 가지고 세계를 석권한 것은 그곳의 풍부한 음악적 토양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뭉크의 독창적 미술 또한 역시 그러하다. 추리소설의 분야에서도 북유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연이어 만들어 내고 있다. 북유럽의 독특한 풍토를 배경으로 하여 이야기를 정교하게 풀어가는 솜씨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북유럽은 범죄율이 낮고 북유럽 사람들은 전혀 공격적이지 않은데 범죄에 대한 상상력만은 걸출하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미국과 같이 총을 난사하는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도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고, 도심의 슬럼에 범죄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지능적인 범죄보다는 액션 영화에서 흔히 보는 무자비한 폭력 사건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북유럽처럼 범죄가 드물고, 조용하고, 개성을 존중하고, 세련된 사회에서는 범죄를 모의한다면 총을 휘두르는 그런 것보다는 고도의 지능적 플롯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저지를 것 같다. 그런 사회는 독창적이고 지능적인 범죄를 상상할 사회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북유럽에서 액션 영화가 제작되지 않듯이, 미국에서는 지능적인 추리소설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세계화가 되면 흔히 세계가 유사해 진다고 말한다. 유사한 미디어에 노출되고, 유사한 제품을 사용하고, 생각하는 방식이나 생활양식이 유사해지고, 등등.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부만 사실이다. 북유럽의 추리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북유럽 특유의 분위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지역적인 특색을 살렸기에 세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풍요로울수록 새로운 것을 찾는 욕구가 강하다. 굳이 오지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자신이 사는 곳과는 다른 자연환경과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세계화가 되어도 지역의 독특성은 여전히 보존할 가치가 있다. 사람들이 지역 고유의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때문이다. 지역 고유의 것에서 독창성이 나온다. 

  우리나라 사람은 흔히 미국을 본받아야 할 최고의 모범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지식인은 걸핏하면 미국에서는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을 따를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자연 조건과 사회적 배경이 너무나도 다르다. 미국은 자연자원이 풍부하며 이민자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사회이다. 미국 사회는 장점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약점도 많다. 미국 경제의 활기는 세계의 부러움을 사지만, 반면 높은 불평등과 빈곤과 범죄와 인종차별은 결코 배울 것이 못된다. 북유럽을 보면서 미국보다 이곳에서 배울 점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북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람 이외에 특별한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독창성을 북돋우는 북유럽의 토양을 배워와야 한다.  

2012. 9. 9. 21:05

   사진을 보고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40마일 (약 60킬로미터)을 차로 운전해서 가는데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특별히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나이지리아의 항구 도시 라고스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이란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Atlantic_TrafficJam.hwp


 


  근래에 아프리카는 아시아에 뒤이어 떠오르는 지역으로 주목받는다.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이 차례로 개발되면서 임금이 더 싼 아프리카 지역으로 생산 기반을 옮기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봉재업과 같이 저임금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업종은 아프리카에 엄청난 규모의 싼 노동력에 군침을 흘린다. 과거 이 나라들은 정치가 불안정하고, 도로나 항만, 에너지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이 축적되지 않아서 아무리 임금이 싸도 기업 활동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프리카 일부 나라들의 정치가 조금 안정되는 기미를 보이고, 아프리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중국이 과감하게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하면서 아프리카가 산업화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 결과는 사진에서 보는 엄청난 무질서와 교통 체증이다.

 

  엄청난 교통 체증은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부패에 주로 기인한다. 자원 개발의 이익을 독점한 독재 정부가 국민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의 보조금을 풀어 기름 값을 터무니없이 낮추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차를 소유하는 열풍이 불었다. 도로는 크게 늘지 않는데 차량이 갑자기 증가하니 교통체증은 당연지사. 산업화가 시작되어 물동량이 많아지면 철도와 대중교통을 확충하여야 하나 이 또한 정치적 부패로 지연되고 있다. 정권을 장악한 부족이 트럭 비즈니스를 독점하고 있는데, 이들이 철도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행태는 참으로 후진적이고 한심하다. 정치가 부패해서 뻔히 필요한 투자를 가로막고 경제 개발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그러니 가난하지’라고 혀를 찰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를 생각해 본다. 한 나라의 교통 사정은 정부의 부패 정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정치와 사회가 부패하면 교통 사정도 엉망이다.

 

  세계에서 가장 청렴하다는 스웨덴의 교통 사고율은 세계에서 최저이다. 스톡홀름이나 북구의 다른 도시의 교통 사정은 뉴욕이나 워싱턴과는 비교가 안 되게 좋다. 대중교통이 잘 발달해 있으며 자전거 이용도 활성화되어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부패의 정도가 높으며 교통 체증이 심하고 교통 사고율도 매우 높다.

 

  왜 정치가 부패하면 교통 체증이 심하고 교통사고가 많을까? 부패한 나라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자신의 고급차를 사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도 도로를 개선하고 대중교통을 확충하기 위해 세금을 더 내는 데에는 인색하다. 부패한 나라에서 힘 있는 사람은 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 데, 그 결과 힘없는 사람 또한 질서를 잘 지키려 하지 않기에 공공질서가 허물어진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라에서는 트럭 운전수들이 고속도로에 차를 주차해 놓아서 고속도로를 저속도로로 만들었다고 한다. 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두가 손해 보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후진국인 것이다. 또한 정치인이 기업과 결탁하여 차를 많이 팔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보통 사람의 교통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데에는 소홀하다. 힘 있는 사람들이 고급차를 사서 과시하면, 보통 사람들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너도 나도 차를 사서 끌고 다닌다.

 

  우리나라에서 운전을 하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 우격다짐으로 끼어들고, 차선을 마구 바꾸고, 교차로에서 꼬리 물기를 하여 진로를 가로막고,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막히고. 상대를 앞질러 나만 살면 된다는 초경쟁사회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힘 있는 사람들은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의 뒷좌석 앉아 여유 있게 가기에 교통 체증이 남의 나라 일일게다.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직접 운전을 해야 한다면, 아마도 한국의 도로 사정과 대중교통은 현재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일 것이다. 

2012. 9. 4. 23:01

  요즈음 미국에서 여대생이 남자를 사귀는 방식에 변화가 있다고 한다. 미국 여대생들은 남성과 가볍게 사귀며 즐기다 쿨하게 헤어지고 싶어 한다. 과거에는 사정이 달랐다. 여성이 남자와 만나면서 결혼으로 이어질 것을 염두에 두었다. 과거에는 자신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남성과 만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요즈음 여대생들은 이런 만남을 부담스러워 하고 기피하기까지 한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Atlantic_HookupCulture.hwp





  이유인즉 근래의 여대생들은 남성과 비슷한 방식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들은 일의 세계에서 성공하는데 삶의 우선순위를 둔다. 일의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냉혹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자질을 키워야 한다.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고, 대인 기술을 익히고 인맥을 쌓기 위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많은 모임에 참여하며, 일에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에라도 기꺼이 가며, 일을 위해서는 가족생활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 직장에서 성공한 남자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여대생들이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해서 성공하기 위해 남자들의 삶의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내동댕이 친 여성의 미덕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기 보다는 감추며,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물러서서 기다리며, 사회적으로 닳고 닳기보다는 때묻지 않은 순진함을 지키며, 무엇보다 너무 똑똑해지지 않으며...  여성적인 삶이란 일보다는 가정을 더 소중히 하고,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을 삶의 최고의 낙으로 삼으며, 남편을 잘 뒷바라지 하며, 경쟁보다는 양보와 희생을 택하며, 나의 이익을 생각하기 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등등. 이렇게 한다면 과연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잘 할 수 있을까? 요즈음 여성들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과거에 여성은 남편을 잘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여성은 남자와 만날 때 상대가 자신을 고생시키지 않고 잘 부양할 수 있을지 면밀히 살핀다. 능력 있는 상대가 자신과 결혼하도록 하는 데 모든 정력을 쏟아 붓는다. 여성은 남성의 심리를 조정하여 자신을 좋아하도록 내지 자신에게 걸려들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너무 헤퍼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튕겨서는 더욱 안된다.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응해 줄듯 줄듯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주지 않는 줄타기 묘기를 구사해야 한다. 상대가 능력이 없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버려야 한다. 더 좋은 패를 찾아서. 정말 힘든 일이다. 한번의 잘 못된 판단이 일생을 망칠 수도 있다. 결혼한 많은 여성은 이런 시간을 다시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50대의 안정된 삶을 누리는 어떤 여성이 혼돈과 불안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 이해할만 하다. 남녀관계가 삶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과거 젊은 여성들에게 남녀관계를  잘 푸는 것은 삶의 전부였다.   

   요즈음 미국 여대생들은 여성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여성도 직업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자신을 부양할 수 있고, 여성에게도 어떤 일을 하는지가 남성 못지않게 중요해지면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의존 성향은 점차 사라져 간다. 대신 여성 역시 남성과 마찬가지로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신중히 관리하고, 자신의 시장 가치를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예전처럼 여성이 남성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붓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남녀관계는 더이상 여대생들의 삶의 전부가 아니다. 

   한 남성에게 일찌감치 자신을 몰빵하며 연애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남자들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혼하자고 하고, 결혼하면 가사와 자녀 양육의 부담을 자신에게 덤탱이 씌우고,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꽃 피워보기도 전에 좌절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잠재력을, 자신의 기회를 시험해 보기도 전에 아이를 낳고 주저 않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조심한다. 자신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기반을 닦을 때까지는 남성의 진지한 사랑을 사절한다. 아무리 훌륭한 남성을 만나도 그의 성공은 그의 것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훌륭한 남성을 만나는 것을 서두르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훌륭해져야 훌륭한 남성과 만날 수있고, 그와 결혼하게 되어도 오래 함께 지낼 수있기때문이다. 자신이 그에 못미치면 죽어 살아야 하거나 혹은 버림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여대생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데 힘을 기울인다.  결혼해도 언제 이혼하자는 말이 나올지 모르기때문이다. 훌륭한 남성을 낚아채는 것이 게임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안다. 

   그렇다고 남성을 멀리한다는 말은 아니다. 대신 다양한 남성들을 가볍게 만나서 즐기면서 젊음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대인 관계의 기술을 습득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다. 남자건 여자건 사람을 많이 만나 봐야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느는 것이다. 일찍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지 않고, 자신이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남자의 마음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여러 남자를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피차 상처받지 않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을 테니까.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은 애시당초 없으니 적절한 상대를 만나면 성적인 즐거움을 사양할 이유도 없다. 애를 가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결혼까지는 아직 멀었으니 젊은 시절을 함께 즐기는 것이다.  

   상대와 만나면서 헤어질 것을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영악한 행위라고 비난할 수 있다. 자신의 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지켜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한들, 애틋하고 순진한 사랑을 모르면 세상 헛사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다. 여러 남자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여성은 아무도 자신의 것으로 차지할 수 없을 거라고  조언할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그런 여성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남성들은 순진하고 나만 바라보고 사는 여성 쪽으로 마음이 흐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어쨌든, 내가 여자라면 영악하고 쿨한 삶을 택하겠다. 사회적으로 능력있는 여성이 순진한 여성보다는 함께 일하기 좋고, 말도 잘 통하고, 어려울 때 도움도 청할 수 있다. 그런 여성이 함께 일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나와 인생길을 함께 할 동반자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순진한 쑥맥의 여성을 찾는 남성은 아마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아내를 일생 혼자서 벌어 먹여살리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외로운 남성의 길을 가야 한다.  

   한국은 여성에게 사회적인 참여의 기회가 공평하게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에게 의존하는 전략이 더 행복하게 사는 길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여성에게 그리 행복한 사회는 아니다. 남성은 활개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여성은 다소곳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일제 시대에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이 혼자서 빈곤에 허덕이다가 길거리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그녀는 시대를 너무 앞서 갔다. 남성에 의지해서 사는 삶을 거부했기에 어떤 남성도 그녀를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여성이 혼자 벌어먹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말이다. 

   미국 여대생들의 변화된 남녀교제 방식은 직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성의 문제에서도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가 돌아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1970년대 여성해방 운동의 열매가 삶의 구석구석에서 조용히 결실을 맺고 있다.  

2012. 8. 26. 22:41

  오늘 감동적인 글을 읽었다. 아틀랜틱 몬슬리 9월호에 나온 “Fear of a Black President"라는 제목의 글이다. 미국에서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흑인의 분노와, 흑인에 대한 백인의 공포는 동전의 양면이다. 노예제에 뿌리를 둔 흑인에 대한 백인의 비인간적인 차별은 미국 사회의 곳곳에서 여전히 감지된다. 흑인은 근본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종주의는 많은 백인의 머릿속에 또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흑인들은 좌절과 분노로 자신을 파괴하는 한편, 범죄로서 주류의 질서에 저항한다. 백인은 흑인을 두려워하며 가급적 멀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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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인종주의 사회에서 2008년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인데다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서 다른 선택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인 아들 부시의 오랜 실정과 경제 위기가 공화당의 계속된 집권을 어렵게 했으며, 민주당의 예비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역시 여성인데다 전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점이 사람들을 머뭇거리게 했다. 인종주의 사회에서 소수 인종인 흑인이 다수의 지지를 얻어 지도자로 선출된 것은 정말 닥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 사회는 초유의 사태에 한동안 어리둥절하였다. 흑인을 자신의 지도자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많은 미국인들은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거나 혹은 이슬람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그를 부정하려고 하였다. 공화당은 오바마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 반대로 일관하여 그의 정부가 실패로 끝나기를 바랐다.

  흑인은 백인에 대해 가슴속 깊이 분노를 품고 산다. 오바마는 흑인이다. 오바마는 이러한 분노를 어떻게 삭혔을까? 오바마는 영민한 사람이다. 백인에 대한 흑인의 분노의 감정을 절대 밖으로 표출해서는 안된다는 것, 존재 자체를 백인 주류사회에 눈치 채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안다. 흑인의 분노의 감정이 담긴 것으로 해석되게 오해되는 발언이나 행동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엄청난 비난과 반발이 퍼부어질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다른 어느 대통령보다 인종에 대한 언급을 가장 적게 한 대통령이다. 백인이라면 특별히 인종적인 함의가 있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을 발언도 흑인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오바마는 대통령이기에 앞서 흑인이다. 백인에게 오바마의 발언과 행동은 흑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의심받기 쉽다.  그러한 의심은 여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그러한 발언을 한 취지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오바마는 이러한 오해가 발생할 소지가 있을 때에는 자존심을 굽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전에 하바드 대학교의 흑인 교수가 자신의 집 앞에서 백인 경찰에게 가택 침입죄로 체포되었다. 열쇠를 집에 놓고 나와 문을 억지로 따려고 씨름하고 있을 때 지나치던 경관이 다가왔다. 그가 자신의 교수 신분증을 보이고 이곳에 오래 산 사람임을 거듭 말했으나 경찰이 이를 무시하고 그들 연행하여 경찰서에서 하루 밤을 재우고 풀어준 것이다. 그가 백인이었다면 아마도 경찰이 그의 학교나 이웃에 확인하여 웃고 지나갔을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러한 경찰의 행동이 지나친 치안 행위라고 언급했다. 정부의 책임자로서 그의 발언은 지극히 온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백인 경관은 기자들을 향하여 자신은 조금도 잘 못한 것이 없다고 발언하여 사실상 오바마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오바마 대통령은 그 경관이 자신의 말을 오해했다고 굽히고 들어갔고, 백악관에 경찰과 교수를 초청하여 맥주잔을 건네면서 화해를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당시 의료보험 개혁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상황에서 여론이 인종 문제로 들끓어 올랐을 때 기꺼이 자신을 굽힘으로서 논란이 사그라들기를 바랐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책에서 인종주의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받고 좌절과 분노의 나날을 보냈던가를 솔직히 썼다. 대통령이 된 지금도 흑인으로서의 쓰라린 기억을 가끔씩 노출한다. 예컨대 최근에 플로리다에서 후드티를 입은 트레이본 마틴이란 순진한 청년이 경관의 추격을 받아 총 맞아 죽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손에는 스키틀이라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탕과 아이스티만 들려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만일 아들이 있었다면 그도 트레이본처럼 보였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흑인으로서 쓰라린 감정의 정곡을 찌르는 발언아닌가?

  오바마 대통령은 백인의 인종주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미국의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우회 전략을 취한다. 미국의 어려운 사람 중에 흑인이 상대적으로 더 많으므로 이는 결국 흑인에게 혜택이 더 돌아간다. 이러한 인종 중립적인 정책을 추진함으로서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흑인을 특별히 우대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그가 추진한 의료개혁의 주요 내용인, 모든 미국인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은 의료보험을 누리고 있는 중류층 백인보다는 지금까지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가난한 흑인들에게 더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정책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고 하는 데에는 인종주의적 의도도 바탕에 깔려있다. 

  흑인은 근본적으로 열악하다는 인종주의를 깨는 효과적인 전략은 그렇지 않은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음으로서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증인이 될 수 있다. 그가 미국사회의 인종 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음에도 그의 존재 자체가 인종주의를 무너뜨리는 증거로 작용하고 있음을 잘 알기에 그는 누구보다 인종주의적 갈등이 촉발되어 일을 망쳐버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인종주의적 백인 또한 이를 잘 알기에, 그의 발언이나 행동이나 그의 정책에서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가 실패한 대통령이 되면 오랫 옛날 노예제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종주의가 옮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백인 인종주의자들은 흑인은 선천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지도자가 될 수없으며, 설사 잘못되어 지도자로 선출되었더라도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음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인종 문제에 직접 간여하면 그들의 계책에 말려들어 일이 잘 못될 가능성이 높다.  바로 그것을 오바마 대통령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과거에 오바마 대통령의 자서전 “Dreams from my father"을 읽을 때의 감동이 몰려왔다. 오바마는 지혜로우며 용감한 사람이다. 진실로 위대한 사람을 찾기 힘든 오늘날 그는 나에게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으로 새삼 우러러 보인다. 역사도 그를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