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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에 해당되는 글 7건
2021. 8. 11. 22:55

William Easterly. 2001. The Elusive Quest for Growth: Economists' adventures and misadventures in the tropics. MIT Press. 291 pages.

저자는 월드 뱅크의 경제학자이며, 이 책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발도상국의 문제점을 검토한다.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을 하도록 하는 요인에 대한 기존의 경제학 이론은 틀렸다. 첫째, 경제학자들은 개발도상국은 자본이 부족하여 발전을 못하기 때문에, 자본을 지원해주면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개발도상국에 인력과 기술은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만 대주면 생산성이 오를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하는데, 개발도상국은 자본을 투자한다고 해도 이를 운용할만한 인력과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대로 생산성을 올리지 못한다. 둘째, 경제학자들은 개발도상국이 인적자본이 부족하여 발전을 못하므로 교육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고 해도 국내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을 제대로 소화할만한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해외로 나가거나 무용지물이 되버린다. 셋째, 경제학자들은 개발도상국이 소득을 높이기 위해 인구 압력을 낮추는 것이 필수라고 주장하는데, 출산율과 소득간의 인과관계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 실상은, 출산율이 낮아지면 소득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소득이 오르면 출산율이 낮아진다.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을 하는데 부족한 자본을 국제사회의 신용 공여와 원조로 보충하는 방식은 잘못됐다. 개발도상국에 제공된 신용이나 원조가 경제발전을 위해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국제사회의 신용과 원조는 경제개발에 쓰이기보다 지배층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개발도상국의 빚은 시간이 흐를수록 누적되어 구제금융이나 빛 탕감으로 귀결된 경우가 허다하다. 개발도상국의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경제를 제대로 운용하여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 국제사회의 신용과 원조가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이 착복할 수 있는 돈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신용과 원조는 의도하는 방향과 반대되는 인센티브로 작용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센티브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난 기간의 경제 운용 성적에 따라 신용과 원조를 공여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제대로 경제를 운용하는 정부에 신용과 원조를 몰아주는 반면, 제대로 경제를 운용하지 못하는 정부에는 신용과 원조를 줄여야 한다.

경제성장을 이끄는 핵심 요인은 자본보다 기술이다. 자본에 대한 수익은 체감하기 때문에 자본을 증가시켜 생산성을 높이는데에는 한계가 있는 반면, 기술이 높아지면 수익이 더 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기술은 이를 개발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더 큰 이익을 가져오며, 이미 기술이 축적된 위에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며, 기술 인력은 서로 함께 함으로서 서로의 생산성을 높이는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이미 기술이 높은 선진국은 기술 인력을 더 많이 모을 수있으며 더 높은 기술을 개발하는 선순환을 가져오는 반면, 기술 수준이 낮은 개발도상국은 이미 있는 기술자들 조차 해외로 이주하고 기술부족이 더 심화되어 경제발전을 할 수없는 악순환을 낳는다.

개발도상국은 정부의 규제가 성장을 막는 장애물이다. 정치인과 관료 등 기득이권자들이 경제 전체에 도움이 되기보다 사리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경제활동은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 정치인과 관료의 부패가 심한 곳에는 해외로부터 직접투자가 들어오지 않아 선진 기술을 배우지 못하며, 자원을 노리고 들어온 투자의 경우, 권력자들이 수익을 착복하여 해외로 유출시킴으로, 자원 개발로 거둔 수익은 국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 부패의 먹이감이 될 뿐이다.

대다수의 개발도상국은 소득 양극화와 다민족 갈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소득 양극화가 심한 경우 정부는 경제 전체를 위한 정책을 펴기보다 소수 부자 지배층의 이익에 기여하는 정책으로 일관한다. 여러 민족이 갈등을 벌이는 상황에서 국가는 지배층이 속한 민족에게만 이익이 되고 타 민족은 배제하는 정책을 펴기 때문에, 전체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하기 어렵다.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에 매진하지 못하는 진정한 원인은 국민들이 계급과 민족으로 서로 갈려 갈등을 벌이기때문에 정치가 불안하며, 그 결과 경제성장을 위한 안정된 제도를 갖추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가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언제 뺏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노력과 투자를 하려하지 않는다.

저자는 월드뱅크에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돕는 연구와 지원활동을 배경으로 이 책을 썼다. 곳곳에서 저자의 경험에 기반한 안타까운 감정을 담은 사례들을 접한다. 개발도상국에 대해 그가 느끼는 답답함을 독자도 공감하게 된다. 이 책은 문제점은 잘 지적하고 있지만, 어떻게 하면 개발도상국을 덧에서 벗어나게 할지에 관해서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도 책의 말미에서 이를 고백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마지막까지, 저자가 질문에 대해 무언가 답을 주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결국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여 허무했다. 사실 명쾌한 답이 있다면 벌써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빈곤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들과 같이 빈곤에서 벗어난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보면, 개발도상국의 미래에 절망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근래에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나라들 중에도, 동아시아만큼은 아닐지라도 경제성장이 제법 꾸준히 이루어지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2020. 4. 7. 18:10

Paul Collier. 2007. The Bottom Billion: Why the poorest countries are failing and what can be done about it. Oxford University Press. 195 page.

저자는 과거에 월드뱅크에서 극빈국 개발 연구를 지휘한 경제학자로 이 분야에 세계적 권위자이다. 극빈국은 무엇이 문제이고, 이들을 돕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전세계 60억 인구중 최하위 10억은 그 위에 50억의 개발도상국들이 점차 발전하고 있는 것과 달리 정체되거나 빈곤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이남에 산다.

그들은 네가지 덧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 갈등의 덧, 자연자원의 덧, 내륙에 갖힌 덧, 나쁜 정부와 정책의 덧이 그것이다. 그들이 내전에 빠지는 주요 원인은 빈곤, 더딘 성장, 자연자원에 의존하는 것이다. 극빈국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첫번째 이유는 내전이다. 내전은 이전에 이룬 경제 성과를 무위로 만들며, 엄청난 경제적 비용을 초래한다. 내전으로 치안이 불안하면 국민들이나 해외 투자가들이나 경제 발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극빈국 사람들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사는 것보다 반군에 가담하는 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반정부군에 가담한다. 어떻게 하던 별로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나라에게 석유나 광물자원은 저주이다.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돈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며, 이 돈은 반군의 자금원 역할을 한다. 자연자원으로부터 손쉽게 외화를 벌 수있으므로,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다. 광물자원은 물론 커피와 같은 환금 작물에 의존하는 경제는 국제 시세의 변동이 크기 때문에 안정된 경제 정책을 펴기 어렵다. 자연자원에 의존하는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성장하기 힘들다. 자연자원으로부터 나오는 돈을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축적한 정치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제압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한편 내륙에 갖힌 나라는 가까운 바다로 나가기 위해 인접국에 의존해야 한다. 이들은 인접국의 사정에 종속되며, 독립적인 경제 정책을 펴기 어렵다. 나쁜 정부에는 권력자 개인 혹은 그가 속한 집단의 축재를 국가의 발전에 우선하는 나쁜 정치가 지배한다. 그들은 공정하고 효율적인 정책을 반대하며, 현재 그대로 비효율적이지만 자신들에게만 이익이 돌아오는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극빈국은 세계화의 혜택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가진 것은 저임금 비숙련 노동력뿐인데, 이를 이용한 경제 발전은 인도나 중국이 이미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체 시장이 작고 정부와 치안이 불안정하기에 국제자본이 이들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 나쁜 정치와 정책이 횡횡하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국외로 탈출하고, 남아 있는 사람은 무능하거나 나쁜 사람들 뿐이다. 그들은 세계화에 편승해서는 그들 위에 개발도상국을 따라갈 수 없기에 '버스를 놓쳤다(missing the boat).'

이들을 돕는 방법에 네가지가 있다. 국제 원조, 군사적 개입, 국제 규준, 무역 정책이 그것이다. 국제원조를 둘러싸고 양분된 주장이 대립한다. 원조를 더 해야 한다는 주장과 원조는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원조를 해야 효과를 거둘 수있다. 내전이 종결된 직후에는 기존의 이권 세력이 약화된 상태이므로 개혁을 하기 좋은 시점이다. 이 시점에 10년간 원조를 보장하여 안정적이고 집중적으로 경제 개발을 지원한다면 그들을 덧에서 벗어나게 할 수있다. 현금 지원만이 아니라 기술 인력을 병행하여 지원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기득 이권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 원조를 하는 것은 그들의 배만 불려주기에 돈 낭비이다. 개선 약속을 조건으로 원조를 제공할 것이 아니라 개선 결과를 평가하여 그에 따라 원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군사적 개입은 선진국이 꺼리지만, 극빈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특히 내전이 종결된 시점에 선진국이 군사 개입을 하여 치안을 보장하면 비용은 적게 들면서 효과가 크다. 극빈국의 군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 부터 강탈하는 도구(extortion racket)로 기능할 뿐이다.

극빈국의 경제성장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하여 국제 규준을 만들어야 한다. 우선 선진국의 법규부터 정비해야 한다. 극빈국 독재자들이 부정하게 축재한 돈을 은밀히 보관해 주는 선진국의 금융 관행을 철폐해야 한다. 극빈국의 자연자원 개발 계약을 뇌물이나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따내는 것을 용인하는 선진국의 규범을 바꾸어야 한다. 근래에 선거를 통한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도입한 극빈국이 늘어나고 있으나, 권력의 견제 장치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선거 민주주의는 자신을 지지하는 집단에게만 의존하는 후견인 민주주의(patronage democracy)로 빠지는데, 이는 갈등을 격화시키는 원인이다. 극빈국의 사정에 맞도록 권력의 견제장치를 제도화한 규준을 만들어,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극빈국의 경제성장은 그들 위에 개발도상국이 걸은 길인 저임금 제조업과 무역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열악하므로, 국제무역에서 이들에게 이점을 주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중국이나 인도보다 이들이 수출한 제품에 관세를 낮게 매기는 방식이다. 또한 극빈국 자체의 무역장벽을 낮추어 비효율적인 국내 산업이 경쟁에 노출되도록 함으로서 산업의 효율성을 높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제무역에서 비교우위의 산업이 성장할 수있다. 현재와 같은 높은 보호무역의 장벽이 지속된다면, 그들 나라의 비효율적인 산업은 지속될 것이며, 이것에 이익을 보는 소수의 사람들에 붙잡혀서 다수의 국민이 빈곤의 덧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첫머리에, 지구촌에 극빈국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의 문제로, 극빈이 없는 세상은 공공재(public goods)라고 말한다. 극빈은 무질서와 혼란을 낳으며, 이것은 이들 나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테러나 난민과 같이 이웃나라에 문제를 확산시킨다. 혜택은 모두가 보지만 누구도 나서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구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극빈국 사정에 대한 치밀한 연구와 오랜 전문적인 경험이 뒷받침된 탄탄한 책이다. 극빈국이 대부분 아프리카 대륙에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의 문제에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한국이 부유해지면서 점차 눈을 돌려야 할 대상이다.

2020. 1. 7. 15:05

Abhijit V. Banerjee and Esther Duflo. 2019. Good Economics for Hard Times. Public Affairs. 326 pages.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저자가 오늘날 세계의 주요 문제들에 대해 경제학의 해결책을 체계적이며 비판적으로 정리한 책. 이민, 무역, 차별과 빈곤, 성장, 환경, 불평등, 정책적 개입, 복지 등 각 영역의 주요 문제에 대해 경제학자들의 논쟁을 검토하면서, 무엇이 문제의 핵심이고 어떤 대응이 가장 효과적일지 논의한다.

이민자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뺏고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민자들이 맡는 일자리는 기존 노동자들이 맡기를 꺼려한다. 이민자들이 맡는 일과 그들의 소비 덕분에 기존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이민자는 모험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이민자는 경제에 활력을 주며 혁신을 촉진한다. 이민자들이 경제적으로 플러스 요인임에도 사람들이 이민자의 유입을 반대하는 것은 비경제적 비합리적인 이유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흡사한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정이 안 좋은 경우 국외자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린다. 미국의 중하층 백인의 사정이 안좋기에 이들이 주로 이민자를 배격하며, 덕분에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주의 정치인이 당선되었다. 이민자는 미국 경제가 안좋거나 일을 찾을 가능성이 적으면 스스로 오지 않으므로, 과도하게 이민을 제한하는 것은 미국 경제에 해를 입히는 조치이다.

리카도의 비교우위 가설은 무역에 종사하는 쌍방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무역의 혜택은 모두에게 고루가지 않는다. 각국 내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중국과 무역이 늘면서 교육수준이 낮은 미국의 생산직 노동자는 패자가 되었다. 실질 임금이 하락하며, 일자리를 잃고 실업과 좌절 속에서 기대수명이 줄었다. 반면 교육수준이 높은 근로자들은 높은 부가가치의 산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소득이 증가하였다. 지난 사십년간 최고위 1%의 사람들이 성장의 과실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이들은 주로 금융분야에 종사하거나 다국적 기업의 최고경영자이다. 무역으로 얻은 이익의 일부는 무역때문에 일자리를 잃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도록 활용해야 한다. 생산성이 높은 분야로 이전할수 있도록 직업훈련, 실업수당, 이사 지원, 직업 알선 등,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에 훨씬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 그들이 보람을 느낄 수있는 일자리로 이전하도록 지원을 장기적이고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 나이가 많은 근로자들은 자신이 일생 종사한 직업과 일생 살던 곳을 떠나 직업 훈련을 통해 새로운 직업과 장소로 이전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이들을 계속 고용하는 기업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이들이 노동시장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시장 경쟁 원리를 따를 때 차별은 저절로 해소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합리적인 이익 계산만을 좆아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선호가 감정적 비경제적 요인에 의해 좌우되는 비중이 적지 않다. 미국이나 인도의 소수자 우대 정책은 소수자가 시장에서 처한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장치로 효과적이다. 정부의 개입에 의해 사람들의 선호를 공정한 방향으로 바꾸어 나아 갈 수 있다.

빈곤은 물리적인 절대적인 결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하고, 삶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빈곤자의 인간적인 욕구를 무시하고 그들을 물리적으로만 구제하려는 정책은 성공하지 못한다.

미국의 경제성장은 1970년대 중반 이래 둔화되었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는 제조업을 개발도상국에 넘기고 금융과 서비스업 분야로 중심을 이동하였다. 중국의 경제는 1979년 개방이래 근래까지 매년 10% 이상씩 성장하였지만, 선진국을 따라잡는 거리가 좁혀질수록 성장율은 둔화될 것이다. 생산성을 증대하는 길은 기술 발전도 있지만, 기존의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것도 그못지 않게 중요하다. 비합리적인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효율적인 방식으로 자본과 노동을 배치하지 않는다. 개발도상국일수록 자원의 비효율적인 배치가 생산성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자동화가 확대되면서 일자리가 줄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기술 발달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여하간 자동화에 밀려 일자리를 잃는 사람을 생산적인 다른 지역의 다른 일자리로 이전시키도록 적극적인 노동정책을 펴야 한다.

온난화의 영향은 모든 나라에 동일하지 않다. 서늘한 지역에 사는 선진국 사람보다 더운 지역에 사는 개발도상국 사람에게 피해는 훨씬 크다. 선진국 사람들이 온난화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현재도 그러한데, 피해는 주로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중국, 인도와 같은 나라는 이산화탄소 규제를 반대해 왔지만, 이 나라에서 대기 오염이 심각해 지면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에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탄소세와 같은 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차대전 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모든 계층에 성장의 과실이 돌아갔지만, 1980년대 이후의 성장은 과실이 최상위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이런 현상은 미국과 영국에서 심한 반면, 유럽 대륙 국가들에서는 상대적으로 덜하다. 미국의 부자들은 정치를 포섭하여 자신들의 축재가 계속되도록 정책을 유도하였다. 최상위 소득자에게 축재가 계속되는 것을 막기위해 최고세율을 높이는 방안을 제안한다. 현재 미국은 30%의 최고 세율을 정하고 있는데, 이를 1970년대 처럼 70%로 하면 엄청난 소득을 거두려는 압력이 사라질 것이다. 또한 1~2%의 부유세를 거둔다면, 재산의 증식분을 재투자함으로서 세금을 회피하는 현재의 문제점이 해결될 것이다. 부자들은 돈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므로 세금을 더 많이 낸다고 하여 지금보다 덜 열심히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평등이 확대되면 사회적 불만과 갈등이 고조되므로, 부자들의 힘으로 불평등이 확대되는 지금의 추세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다. 그대로 방치하면 부자들에게 불행한 방식으로 사정이 돌아갈 것이다. 

미국인은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지만, 시장이 해결할 수 없는 성격의 문제에 대해 정부의 개입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정부에게 자원의 분배를 맡기면 부패와 비효율을 염려하지만, 민간의 자원 분배의 기능에도 비효율이 많다. 정부는 절대적인 악이고 시장은 절대적인 선이라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무역과 기술 발달으로 경제 환경이 변하면서 발생하는 자원의 비효율적 배치를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효율적으로 재배치되도록 도와야 한다.

복지 지원은 수혜자의 의존성을 높인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복지 지원 여부에 관계없이 실업자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가난한 사람의 이성과 의지를 불신하여 그들의 의사결정권을 뺏는 방식으로 설계된 복지 지원은 비효율적이다. 가난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들 가장 잘 알기에 현금 지원을 가장 잘 처리할 수있다. 보편적 기본소득 제도는 가난한 나라에서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효과가 없다. 선진국에서 실업자는 물리적 생존이 아니라 인간적 자존심을 가져다주는 '일'을 원한다. 비용이 더 많이 들지라도 그들에게 의미있는 일을 가져다 주는 방향으로 복지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그들이 아동 돌보기, 노인 및 병약자 돌보기와 같은 공공서비스를 맡도록 제안한다. 이러한 서비스는 인간적인 보람을 주는 노동이며, 고도의 장기적 기술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기계가 대신할 수 없으며, 수요가 증가하는 서비스이다. 

결론으로, 사람들의 경제 행위는 합리적 이익추구 모델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나이가 많이 든 실업자에게 직업훈련을 통해 새로운 직업과 새로운 지역으로 이전하도록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가난한 사람에게 생존에 필요한 물리적 욕구만을 충족하도록 지원하는 방식 역시 효과적이지 않다. 그들의 인간적인 측면, 자존심, 삶의 의미와 보람 등을 고려한 경제적 조치만이 효과를 발휘한다.

이 책은 근래에 논쟁이 되는 대부분의 문제를 건드린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어떤 방안을 제시하는지 체계적으로 섭렵할 수 있다. 저자가 미국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인도인과 프랑스인- 미국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적 관점, 특히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선진국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엄청난 리서치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대단한 책이다. 그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그들의 목소리로 하는 강의를 듣는 듯하며, 사회문제를 개선하는 데 헌신하는 사람의 사명감과 열정이 느껴지며, 기존 경제학자의 주장을 비교하고 비판하는 데에서 학자로서 그들의 솔직함과 겸손이 느껴진다.

2019. 12. 30. 18:49

Elliot Liebow. 2003(1967). Tally's Corner: A Study of Negro Streetcorner Men. Rowman & Littlefield. 166 pages.

사회인류학자인 저자가 흑인 남자들의 삶에 대해 일년 반 동안 참여관찰한 결과를 기록한 책.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으로 출간된 것으로, 참여관찰 방법론 분야의 고전으로 지목되며, 나온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가난한 흑인의 삶에 대해 언급할 때 종종 인용되는 놀라운 책이다. 워싱턴시의 흑인 슬럼가 길모퉁이에 정기적으로 매일 모이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일의 세계, 부모와 자식관계, 남편과 아내관계, 연인 관계, 친구 관계를 시시콜콜 묘사하면서 저자의 생각을 덧붙여 해석을 내린다.

도심의 빈곤지역에 사는 흑인 남성은 일의 세계에서 실패하고 사회의 생존 경쟁에서 낙오한 루저(loser)이다.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중학교를 다녔다 해도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며, 변변한 기술이 없는데다 흑인이기 때문에 일생 안정된 직업을 가져보지 못했다. 접시닦이, 청소부, 건설 막노동자, 등 걸리는 대로 일을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일을 찾지 않는다. 그들을 고용하는 사람에게 그들이 하찮은 존재이듯이, 그들에게도 일이란 별볼일 없는 것이다. 그들은 책임이 따르는 일을 해본 적이 없으며, 툇짜 맞고 패배한 경험을 숫하게 하면서 자신감을 상실했다. 기분에 따라 일을 그만두며, 돈이 긴급히 필요하면 아무 일이나 걸리는 대로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고되고, 보수가 작고,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며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고, 불안정한 것이기에, 그들에게도 그러한 일이란 짧게 급한 돈을 쥐는 용도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한 일을 마음을 바쳐 성실하게 해야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현재의 만족을 우선시하는 삶을 산다. 다가올 내일이 별 볼일 없으리라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당장 기분이 좋지 않으면 어제까지 나가던 일도 중단하며, 돈이 생기면 술이나 도박으로 써버린다. 그들은 자기 절제를 하고 저축을 하면 지금까지와 다른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의 부모의 삶을 통해, 또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에는 기대할만한 것이 없다고 느낀다. 숫한 실망과 수치와 패배와 버려짐을 거치면서 무엇하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할 수없는 수동적인 삶이 엮여진 것이다.

흑인 남성은 그들의 자녀와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자녀는 대체로 엄마와 같이 살며 그들과 같이 살지 않는다. 그들이 가족의 생계부양자 역할을 제대로 할 수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인과 자녀를 버리는 것과 부인이 그들을 내쫒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맞는지 구별할 수 없다. 그들의 자녀의 엄마는 때때로 자녀를 데리고 그들을 방문하여 돈을 타가지만, 여러해 동안 자녀를 전혀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흑인 남성과 자녀간의 관계는 흑인 남성과 자녀의 엄마와의 관계에 좌우된다. 흑인 남성이 자녀의 엄마와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만 자녀와의 관계가 지속된다. 그들의 삶에서 자녀란 그리 큰 비중을 차지 하지 않는다. 남자로서 씨를 뿌린 결과 자녀가 태어났지만, 그들은 자녀의 양육에 간여하지 않기에 자녀또한 그들의 생물학적 아버지와 정서적 유대가 없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아버지와는 사실상 남남이 된다.  그들이 비정한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녀의 양육을 재정적으로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부자간의 관계를 포기한 것이다.

흑인 남성들또한 중류층과 마찬가지로 결혼의 책임과 의무를 소중히 여긴다. 살림을 차리는 관계와 결혼을 한 사이는 그들의 세계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그들은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권리와 책임을 지고 싶어하며, 그들의 여자친구 또한 그러한 관계를 꿈꾼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결혼을 하지 못하거나 결혼을 해도 얼마 오래가지 못한다. 그들이 가장으로서 제대로 밥을 벌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은 갈등의 연속이며 그러한 긴장을 오래 지탱해 낼 수 없다. 

그들과 여자친구의 관계는 일시적 성적 대상에서부터 완전히 마음을 준 연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들의 여자친구는 성적 욕구 충족의 대상이며 그들로부터 돈을 갈취 당하는 피해자이다. 그러나 연인관계와 착취 관계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들은 남성은 본래 한 여성에 만족할 수없는 동물적 존재라고 자신의 무책임한 여성 편력을 변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특정 여성에 대한 애착이 단순히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 위한 것은 아님을 그들의 대화 속에서 드러낸다. 그들은 생계를 이어가는 데 필요한 돈이 항시 부족하고 수시로 위기에 봉착하기때문에, 그들의 여성과의 관계는 안정적일 수 없다. 잘 지내는 듯하다가 어느날 심각하게 싸우고 헤어지며, 한동안 안보다가 다시 만나 같이 산다. 여성의 입장에서도 그들의 남성은 감정적 욕구를 채우는 대상이며, 힘들 때 의지할 보호막이며 , 때로는 자신을 착취하는 존재이다. 그들의 삶에서 남녀 관계는 항시 불안정하면서 의존적이고, 서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괴롭히면서도, 삶의 무의미함을 이겨내는 수단이다.

흑인 남성들 사이에 친구 관계는 가까운 듯하지만 피상적이며 느슨하다. 그들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에서도 돈문제나 여자 문제로 다툼을 벌이고 헤어지며, 서로 과거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다. 가까운 친구간에는 서로의 여자친구를 건드리지 않은 불문율이 있으며, 서로 어려우면 도움을 주고 받지만, 진짜 어려울 때에는 자신의 문제를 각자 챙겨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가진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서로 돕는데 한계가 있고, 수시로 어려움과 위기에 봉착하기에 그들의 관계는 수시로 변하며 잠정적이다. 그럼에도 서로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매일 길모퉁이에 모여 잡담을 하고 시간을 보내며 감정적으로 의지한다. 그들은 밖에 사회에서 버림받은 쓰라림과 수치심을 마음 속에 품은 채, 서로 잡담을 하고 장난을 치면서 자존심에 난 상처를 위로한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빈곤의 문화'(culture of poverty) 이론을 반박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중류층과는 다른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주장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는 그들의 불안정한 환경과 빈약한 자원 때문이다. 그들도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책임있게 일 하고 싶지만, 그들에게 이러한 삶이란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어렵게 자라나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주위에 의지할 사람이나, 길을 이끌어 줄 사람이나, 닮을만한 롤모델이 없으며, 가진 것이 전혀 없다.  그들은 흑인 남성이기에 사회에서 차별당하고 배척되며,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살려 해도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건설현장의 막노동을 하려 해도, 수입이 좋고 안정된 일은 노조에 가입해야 하며,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진 곳은 보수가 낮거나 불안정하거나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힘든 곳 뿐이다.

책의 부록에서 저자가 어떻게 현지 참여관찰을 하게 됬는지 설명한다. 저자는 워싱턴 빈민가에서 잡화점을 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흑인들의 삶에 친숙했다. 저자가 이 연구를 위해 흑인 빈민지역으로 걸어들어간 첫날 거리에서 벌어진 조그만 사건을 구경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길 모퉁이에 모여 이야기 하는 흑인의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고, 그들의 어려움에 우연히 도움을 주는 계기를 가지고, 이러한 일이 수주 동안 쌓이면서 그들의 가까운 친구로 받아들여진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나는 대로 길 모퉁이 모임에 참여하고, 잡담을 하고 술을 함께 마시고, 그들의 집에 찾아가고, 함께 놀러가고, 이런 생활을 일년 반 동안 했다. 길모퉁이의 흑인들은 저자가 백인 대학졸업자로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자원을 이용하기도 하고 함께 어울리면서 그들의 삶에 감정적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1990년대 중반 저자가 암으로 죽을 때까지 이들과 연락을 지속했다고 한다. 

놀라운 책이다. 객관적 시각에서 그들의 삶을 서술한 기록물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삶에 대해 따뜻한 감수성을 느끼게 하는 문학 작품이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그리는 사람들의 삶이 머리 속에 그려지며, 저자의 해석에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만, 그들의 삶의 표면 밑을 흐르는 슬픔과 소외감을 감지한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대등한 눈높이에서 그렇게 따뜻한 이해심을 갖기란 힘들다. 저자의 공감능력이 부럽다. 이 글을 읽으면서 흑인 남성의 삶에 동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고, 나도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을 수 있다.

2019. 12. 4. 10:54

Abhijit V. Banerjee and Esther Duflo. 2011. Poor Economics: a radical rethinking of the way to fighr global poverty. Public Affairs. 273 pages.

올해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저자가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제삼세계의 빈곤의 실태를 진단하면서 빈곤 퇴치를 향한 새로운 접근을 제안한 혁신적인 책이다. 저자는 경험적인 관찰과 무작위 추출 방식을 사용한 통제된 실험 (Randomized Controlled Trials) 방식을 적용하여 빈곤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정책 방안의 타당성을 검증한다. 연구 결과 유효한 것으로 검증된 방법을 실천한다면 빈곤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철학을 제시한다. 이는 빈곤 퇴치 문제에 대해 거시경제학적 접근이나 정치경제학적 접근과 같이 거대 담론을 위주로 하는 기존의 경제학 조류와 배치되는 발상이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빈곤자의 사적인 생활에 촛점을 맞추어,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왜 그렇게 사는지를 영양 섭취, 건강, 교육, 가족계획의 네 주제에 관해 논의한다. 2부에서는 빈곤자를 대상으로 한 제도 내지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 맺기에 관한 내용이다. 위기 관리, 소액 대출제도, 저축 활동, 소규모 자영업, 정부 정책 개입의 다섯 주제에 대해 설명한다. 각 장은 독립적으로 구분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 결론의 장에서 저자의 빈곤퇴치 방법에 대한 철학을 명시적으로 밝히면서 끝낸다.

가난한 사람들은 영양상태가 나쁘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인 식량을 살 돈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돈이 생긴다고 해도 먹을 것을 풍부히하는데 쓰기 보다는 행사 비용이나 조금 더 맛있는 비싼 식품이나 기호품을 사는 데 써버린다. 사회적인 압력 때문에 식품 이외의 것에 적지 않은 돈을 지출하며, 삶의 재미를 위해서 비용이 더 들지만 조금 더 맛있는 식품을 구입한다. 가난한 사람은 영양 상태가 불량하여 노동 생산성이 낮지만, 영양분 풍부하며 값싼 식품을 구입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영양상태가 좋으면 생산성이 높고 빈곤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높지만, 가난한 사람은 그러한 방안이 실현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을 개선하는 데에는 안전한 물, 위생시설, 모기장과 같은 예방적인 수단이 효과가 크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플 때 의사를 찾는 것 이외에 전통적인 주술사나 지역의 돌팔이 의사를 찾는 경우가 많다. 의사는 접근하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며, 서구의 의술이 작용하는 원리에 무지하며, 서구의 의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반면 전통적인 주술사나 지역의 돌팔이 의사는 접근이 쉬우며 비용이 적게 먹힌다. 그들은 막연히 치유를 희망하는 마음에 다양한 전통적인 수단에 의지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들에 대해 신뢰가 큰 것은 아니다. 선진국에서와 달리 시민의 건강을 보호하는 사회의 기반 시설이 부족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를 각자가 챙겨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제대로 실행되기 어렵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유도하는 사회적 넛지(Nudge)가 필요하다.

가난한 나라의 학교에서는 선생이 결근을 자주 하며 가르치는 임무를 소홀히 하여 교육의 질이 형편 없다. 이렇게 교육이 부실한 것은 선생이나 학교의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일까, 혹은 주민들이 좋은 교육에 대한 필요를 깨닫지 못하여 요구를 하지 않기 때문일까? 자녀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면 현물로 보상을 주는 프로그램은 효과가 있는 듯하다. 교육에 대한 필요를 이렇게 물질적인 유인으로라도 만들 필요가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의 질이 훨씬 좋다. 사립학교에서 엘리트 계층에 대한 교육은 학부모의 기대와 선생들의 관심에 힘입어 웬만큼 이루어진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공립 학교 교육은 학부모와 선생 양쪽의 부정적인 자기 완성적 예언때문에 실패로 끝난다.  가난한 나라의 학부모들은 자녀가 웬만큼 학교를 오래 다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난할 수록 자녀를 학교에 열심히 보내려 하지 않는다. 자녀들 또한 자신이 학교 교육을 따라가리라는 자신이 없고 교육이 자신의 미래를 바꾸어 주리라는 믿음이 없기에 학업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일찌 감치 학교를 중단한다. 선생들 또한 가난한 집의 자녀에게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가르치는데 성의를 기울이지 않기에 학생들은 쉽게 학업에 관심을 잃어 버리고 중도탈락한다. 학교는 엘리트에 대한 교육만 관심을 갖는데, 이는 과거 식민지 시대에 식민지 관료를 키워내던 교육의 잔재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개선안으로, 저자는 엘리트 교육과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이 이원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엘리트에게는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더라도 그들이 따라 오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들의 장래에 맞는 기본적인 내용을 교육시킨다면 그들도 따라올 것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애를 많이 낳는 것은 여러 자녀 중 누군가가 자신의 노후를 뒷바라지 해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노후 보장 문제를 가족 내에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맡는다면 자녀의 경제적인 효용을 염두에 두고 많이 낳지는 않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피임의 효능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지 않다, 다만 선택을 하지 않을 뿐이다. 여성에게 피임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면, 자녀를 덜 낳는다. 여성은 자녀의 뒷바라지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남성보다 작은 수의 애를 낳으려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삶에서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은 펀드 매니저와 흡사하게 다양한 부문에 투자함으로서 위험을 줄이는 전략을 구사한다. 작게 농사를 짓고, 조그만 자영업을 하고, 때때로 임노동자로 일하는 등으로 다양하게 간여한다. 농사에서도 생산성이 높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특정 작물로 전문화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이는 어느 한 분야에 전문화함으로서 축적하는 효율을 포기하는 것인데,  반면 어느 한 부문에 문제가 생겨도 다른 부문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삶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면 이웃에게 도움을 구하는데, 이는 추후에 이웃에게 도움을 되값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위험을 피하는 한가지 방책이다.

마이크로 크레딧 운동(소액 대출 운동)은 가난한 나라에서 널리 활성화되어 있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기업가 정신을 자극하고 빈곤에서 벗어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저자의 경험 연구 결과,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소규모의 자영업을 통해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큰 사업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울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이크로 크레딧은 집단 소속원들 상호간 신뢰와 사회적 압력을 이용하여 소액 대출 받은 돈울 정한 일정에 따라 규칙적으로 값는 안정된 시스템을 확립했기 때문에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사업이 되었다. 그러나 큰 사업을 하려면 실패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하고 사정에 따라 빌린 돈을 값는 일정이나 조건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있어야 한다. 마이크로 크레딧은 개인 사정에 따라 값지 않는 사례가 나타나면 사업 모델 자체가 붕괴하므로 큰 사업을 지원하는 금융시스템으로는 부적합 하다. 

가난한 사람들도 소액이지만 수시로 저축을 하며 계 등의 방식을 이용해 집단적으로 저축한다. 그러나 큰 돈을 저축하려고 하지 않는다. 저축을 한다는 것은 미래의 계획을 위해 현재의 만족을 포기하는 것인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미래에 실현 가능한 계획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에 엄격하게 자기 통제를 하면서 절약하여 저축을 하려 하지 않는다. 돈이 좀 모이면 써야 할 곳이 나타나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저축이나 보험을 통해 질병이나 사고와 같은 큰 충격에 대비하지 못하기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구멍가게와 같은 자영업을 많이 하지만, 이러한 사업이 크게 성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사업은 자본을 더 투입한다고 하여도 생산성이 오르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러 개의 소규모 자영업에 동시에 종사하기도 하는 데, 각 사업의 생산성은 매우 낮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이 영위하는 사업은 아무리 오래 해도 기술이 쌓이거나 전문화의 이익을 거두지 못하며, 사업에 대한 열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들은 자녀가 안정된 공무원이 되는 것을 가장 열망하는 데, 안정된 직업은 삶에 계획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기때문이다. 안정된 직업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 그들은 자녀 교육에 투자를 하고 생활을 절제하여 저축을 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정부가 부패하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에 원조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나, 국민들은 개선하려는 열망이나 욕구가 없기 때문에 좋은 제도를 도입하여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는 비관론이 경제개발관련 이론가들 사이에 지배해 있다. 저자는 이러한 거대 담론보다는 비록 규모가 작지만 구체적으로 설계된 제도로 개선을 도모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러한 조그만 변화가 쌓인다면 정부도 개선되고 국민들의 의식도 높아지면서 궁극적으로 빈곤에서 탈피할 수있으리라는 조심스런 낙관론을 제시한다. 실제 그들이 실험을 통해 효과가 있다고 검증한 아이디어들이 실행되고 이것이 축적된다면 점진적으로 변화가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책이다. 상아탑에 앉아 거대담론을 제시하는 경제학자들에 비할 때, 그들은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관찰 하고 실제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해서 효과를 검증해보고, 왜 기대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는지를 분석해서 다시 검증하는 작업을 반복하는 끈기를 보인다. 빈곤에 대해 논의는 많이 하지만 무작위로 선정한 표본에 대해 실험집단과 통제 집단으로 나누어 가설의 타당성이나 정책의 효과성을 엄밀히 검증하는 것은 지금까지 본 일이 없다. 이렇게 엄밀하게 유효성을 검증한 결과를 가지고 빈곤 문제의 개선을 시도해야 한다는 발상은 신선하다. 이런 접근법은 느리지만 유효한 개입이며 이것이 쌓이면 빈곤문제가 점차 해결되리라는 낙관론 또한 대단하다. 이는 기존의 경제학 방법론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접근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없다면 미국의 유명 사립대의 교수가 이런 작업을 도저히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과거에 빈곤운동을 하던 경력을 살려 현장에 운동가들의 협조를 등에 업고 이러한 실험을 할 수있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고, 대단한 책이다. 단숨에 읽고 감동받았다. 그들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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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6. 11:51

  오바마 대통령은 여러 가지로 특이한 경력의 정치인이다. 인종주의가 만연한 미국에서 흑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기적적인 일이지만, 빈곤 운동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도 특이하다. 미국의 대통령은 대체로 중상류 출신으로 고상한 경력을 통해서 성장하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시카고의 빈곤지역에서 빈민을 상대로 빈곤퇴치를 위한 조직 활동을 하였다. 그는 현장 활동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껴 정치적인 힘을 키워서 빈곤 문제를 퇴치하겠다는 꿈을 품고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의 성장 배경을 볼 때, 그의 정치적 태도는 겉보기에 온건하지만 그의 속내는 매우 진보적일 것이다.

 

NYtimes_ObamaVsPoverty.hwp




미국은 일인당 5만불을 넘는 고소득 국가이지만, 추악한 빈곤 문제를 안고 있다. 중위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극빈층이 전체 인구의 6.7%에 달하며, 특히 아동 빈곤 비율은 20%를 넘고 있다. 어린이 다섯 명 중 한명은 빈곤한 가정에서 생활한다. 미국 대도시의 도심에는 대낮에도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한 극빈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빈곤과 항시 함께 따라오는 범죄는 선진국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높은 수준이다.

 

문제는 이렇게 심각한 빈곤 현실이 근래로 오면서 미국 사회와 정치권에서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빈곤은 정치권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싶어 하지 않는 문제이다. 빈곤은 뿌리가 깊기 때문에 해결하기가 어려우며, 어설프게 접근해서는 빛도 나지 않고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쉽기에 정치인들은 빈곤문제에 피상적인 립서비스 수준으로만 접근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선거 유세 때 노점상에서 오뎅을 먹는 사진을 찍고는 그만인 식이다. 또한 중상류층의 정치적 관심은 높은 반면 빈곤층은 투표에 참가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관심은 빈곤층보다 중상류층의 삶에 더 집중된다.


빈곤은 대물림된다. 어떤 사람이 빈곤한 이유는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돈벌이 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질 수 없으며, 영양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저항력이 낮아 쉽게 병에 걸리며, 먹고살기 위해 아파도 무리를 하기 때문에 계속 참고 일을 하다보면 더 심각하게 병에 걸려 돈을 벌지 못하고 약값과 병원비로 지출만 늘게 된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못 받는 이유는 집안이 공부할 환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중류층 가정의 아이들과 경쟁에서 밀리고 학교와 사회에서 소외되어 좌절하면서 학업을 소홀히 하고 결국 일찍 중단한다. 가난한 가정은 부부간에 불화가 심하고 한부모 가족인 경우가 많으며, 부모도 하루하루 먹고 살기 어려우므로 자녀에게 규칙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치거나 공부를 봐주거나 학교를 잘 다니도록 뒷바라지할 여력이 없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학교와 사회에서도 소외된 아이들은 공부를 착실히 해야 할 동기가 생기기 어렵다.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자신의 충동적 감정을 조절하면서 미래의 성취를 위해 계획적으로 생활하고 현재의 어려움을 참아야 될 이유가 없다. 그 결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때그때 충동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직장에서 진득이 어려움을 이겨낼 능력이 없다. 엄청난 현실의 스트레스에 접해, 손쉬운 돈벌이나 범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술이나 도박에 의지해 당장의 어려움에서 도피하려고 하며, 불규칙한 생활로 인하여 질병에 고생하고, 배우자나 자녀에게 스트레스를 가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 있게 행동하지 않기에 항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허덕이며 일생을 살아가는 전체의 그림이 보이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사고를 훨씬 자주 당하며 단명한 삶을 산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인 유형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경우도 드물게는 있지만 대체로는 이러한 빈곤의 대물림 사이클을 반복한다. 오바마는 시카고의 빈민 지역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사회 운동가로서 이러한 수렁에 빠진 사람들을 단편적으로 돕는데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미래에 정치인이 되어 국가의 재정과 힘을 동원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삶 전체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빈곤 전략을 구사하겠다고 결심한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빈곤층에게 집중적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정책이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상류층은 자신의 돈이 빈곤층에게 돌아가는 데 반대하기에 빈곤 정책을 입법화하고 예산을 따는 것이 어렵다. 또한 정치인 오바마가 빈곤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재선을 목표로 하는 그에게 정치적으로 인기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1960년대의 빈곤과 전쟁을 선포한 존슨 대통령 이후 실질적으로 빈곤층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대통령이라고 한다. 겉으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 그가 빈곤 문제의 해결로 내세운 전략은 ‘교육’이다. 빈곤의 대물림을 끊는 고리로 교육 특히 어린 나이부터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전략이다. 가정환경의 차이가 아이들의 성취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린 시절에 가정환경의 불리함을 보완할 장치를 제공하는 것은 빈곤 퇴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략이어야 한다.

 

어린이의 빈곤 문제는 사회정의의 문제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나, 이로 인한 결과는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 중류층 부모의 교육열은 대단하다. 이것은 한편은 좋은 일이지만 이것의 뒷면은, 능력이 되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매우 어린나이부터 교육과정이 끝나는 20대까지 일관되게 심각하게 불리한 처지에서 게임을 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잔인한 사회이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매우 각박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긴장해서 살고 있다. 일단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하여도 경쟁에서 탈락하면 빈곤층과 흡사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있고, 그러면 자신은 물론 자식 세대에서 다시 올라서기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우리사회가 진실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려고 한다면 이러한 잔인함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잔인한 사회에서는 아무리 내가 지금 잘 먹고 잘 살아도 위험이 상존하고 있기에 정말로 편안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될 수는 없다.    

2010. 8. 14. 17:13
    미국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의 두배가 넘는 부자 나라이지만 우리나라보다 훨씬 불평등한 나라이다.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의 비참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 대도시의 슬럼가는 대낮에도 들어가기가 겁나는 곳인데 혹시 가본 적이 있다면 정말 놀랄 것이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이 사방에 있고 도로가 망가져 곳곳에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으며 잡초가 제멋대로 번성하고 쓰레기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다. 다리나 터널의 벽에는 기괴한 모양의 낙서와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건물의 창문은 부서지거나 판지로 못을 쳐놓았으며, 사람이 살것 같지 않은 건물에 철조망이 둘러쳐져 굳게 닫쳐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허물어져 가는 건물 속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걸어오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정말 무섭지 않을 수없다.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폐허의 모습 그대로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기사는 미국 남동부의 대도시인 애틀랜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밀고 싸우다 부상자가 속출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싸우다 다치고 죽는다는 이야기는 기사거리도 안되는데, '제삼세계 미국' (Third World America)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읽어보니 정말 아프리카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벌어졌다.

   요지인즉 정부에서 주는 주택보조수당(Housing Voucher)에 지원하기 위한 지원서를 나누어주기로 했는 데 이틀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여 당일에는 13000명이나 모였다는 것이다. 30도가 넘는 더위 속에 그늘하나 없는 땡볓아래 주차장에서 자리를 지키다가 졸도한 사람이 속출하는가 하면 서로 먼저 받으려고 싸움이 벌어져 경찰과 소방관이 출동하고 난리가 났다.

   궁금한 것은 돈이나 물건을 주는 것도 아니고 지원서 즉 종이쪼각 한장을 받으려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틀 전부터 줄을 서야 했는가이다.
그들이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여도 생활형편 등을 심사하여 수혜 여부를 판단할텐데 말이다. 당국자의 말인즉 사실 주택보조수당 재원이 형편없이 적어 신청한 사람의 대부분은 신청서를 제출하여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바보라서 이틀전부터 와서 무턱대고 줄을 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신청서를 터무니 없이 부족하게 나누어줄 것이 뻔하기에 그리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지 수당은 컴퓨터로 신청자의 신상을 조회하여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과거에 얼마나 엉터리 같은 방식으로 수혜자를 선정하였으면 신청서를 접수하는 것도 아니고 신청서 용지를 받기위해 그렇게 이틀씩이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일까?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아프리카 사람들이 구호물자를 받기 위해 며칠이나 걸어와서 경찰의 제지하에 아우성치면서 밀가루를 받는 모습과 중첩된다. 
대부분이 흑인인 이들의 처지는 노예였던 그들의 선조에게 대했던 백인 주인의 태도를 연상케 한다.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를 받으려면 인간적인 수모 쯤은 참아야 한다는 것을 나도 겪은 적이 있다. 미국에서 살 때 한번은 보건소에 방문해야 했는데, 사방에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신청서만 쓰고는 막연히 기다리는 상태에서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이 반나절 이상을 지냈었다. 중류층이 이용하는 시설에서 흔히 보는 번호표 발급기와 현재 서비스 받는 사람이 몇 번인지를 알리는 전광판을 설치하는 데 큰 돈이 드는 것은 아닐텐데. 버스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던 경험은 또 어떠한가.

    미국의 정치인 중에는 가난한 사람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제법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또한 사람들에게 성공을 향한 강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사회의 낙오자들에게 어줍지 않은 동정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가혹한 사람들이다. 여하간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가난한 흑인으로 태어나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의 가난한 달동네가 훨씬 살기 좋다. 물론 용산 참사같은 사건도 때때로 일어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앞으로 한동안 미국 사람을 만나면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애틀랜타의 주차장 땡볕 아래에서 종이조각 한장을 얻기 위해 이틀동안이나 줄을 서야 했던 가난한 흑인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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